소설리스트

3권-8 (2) (11/23)

S급 에스퍼의 수면제가 되었다 3권

목차

8 (2)

9

10

11

12 (1)

8 (2)

페도로프 유르한 황제의 막냇동생, 안달리시아 공작이 열성 오메가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에 제국의 고위 귀족들이 공작저를 방문했다.

초청장을 받은 귀족들만이 결혼식장에 들어갈 수 있어서 공작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하위 귀족들은 뇌물을 바쳐가며 초대된 이들의 동행자가 되고자 했다.

그 자리에 황제 부부와 두 황자들 또한 참석했다. 페도로프가 그의 동생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결혼식에 참석한 귀족들은 안달리시아 공작의 마음을 빼앗은 행운의 열성 오메가가 누구인가 궁금해했다.

그가 피앙세를 위해 몇 번 파티를 열긴 했지만, 워낙 품에 넣고 싸고도는지라 귀족들은 피앙세의 머리카락 한 올 보지 못했다.

귀족들은 안달리시아 공작이 홀딱 빠진 열성 오메가가 무희처럼 마른 체형에 무척 아름다운 오메가라 상상했다. 1황자가 허리를 끌어안은 채 놔주지 않는 아인 페르디안처럼 말이다.

들려오는 말에 따르면 삼촌의 결혼식을 위해 알렉세이가 결혼을 미뤘다고 들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보다 먼저 결혼하는 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붉은 버진 로드를 밟으며 하얀 정장을 입은 거구의 사내가 결혼식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인은 제이콥의 살이 엄청나게 빠져 있어서 놀랐고, 귀족들은 알파만큼이나 키가 크고 근육질인 열성 오메가의 생김새 때문에 놀랐다.

하얀 면사포를 두른 제이콥이 지나가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웅웅웅. 웅웅웅. 아인은 고개를 갸웃했다가 <집착광공은 능욕을 멈춰!>에 나온 장면을 떠올리고 너무 놀라 혀를 깨물 뻔했다.

현대에 과학이 있다면, 이 세계에는 마법이 있었다. 남자 성기를 본뜬 도구에 마법을 걸면 끊임없이 진동해 배 속에 있는 오메가 스팟을 자극할 수 있었다.

원작에서 알렉세이는 제이콥을 귀족들에게 소개할 때, 제이콥의 구멍에 그 이상한 물건을 박아 넣고 발정하게 만들었다. 새삼 그런 미친 변태 새끼가 자신의 연인이 되어 신기했다.

제이콥이 단상에 서자 검은 양복을 입은 안달리시아 공작이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옆에 섰다. 제이콥이 휘청거렸다.

안달리시아 공작이 행복하게 웃으며 제이콥의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키스를 퍼부었다. 귀족들은 아름다운 우성 알파가 고작 저런 열성 오메가를 사랑하게 된 걸 이해할 수 없어 수군거렸다.

신관이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해주며 기도문을 외웠다. 아인은 빨리 뷔페 음식을 먹고 싶어 발을 동동거리며 언제 결혼식이 끝나나 조바심을 냈다. 알렉세이가 아공간에서 초콜릿을 꺼내 입에 넣어줬다.

요즘 아인은 먹을 게 없으면 짜증을 부리거나 울어버려서 알렉세이는 주전부리를 가지고 다녔다. 아인은 남의 결혼식장에 와서 먹을 것만 생각했다.

간신히 초콜릿을 먹으며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신관이 두 사람 머리 위에 손을 올리자 하얀 빛이 번쩍 빛났다.

“이것으로 가정의 신, 헤라의 뜻에 따라 유리 안달리시아와 제이콥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귀족들이 박수를 쳤다. 아인도 얼른 피로연에 참석해 맛있는 뷔페 음식을 맛보고 싶었기에 열심히 박수를 쳤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피로연장으로 이동했다. 신이 나 볼살 터지도록 빵실빵실 웃었다.

알렉세이는 임신을 해 식성이 좋아지자 뺨에 살이 붙어 더 귀엽고 예뻐진 제 가이드에게 입술부터 들이대고 마구 뽀뽀를 퍼부었다. 그런 그들의 사이좋은 모습을 보고 귀족들이 부러워했다. 나이 많은 귀부인들은 살랑살랑 부채를 흔들며 시선을 가린 채 호사꾼 놀이를 했다.

“어쩜 저 둘은 저리 보기 좋을까요. 정말 선남 커플이에요.”

“나중에 2세를 낳으면 유르한 제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미인이 되겠어요.”

“그나저나 천재 화가 아인 페르디안이 저렇게나 미인일 줄이야.”

사나운 은회색 눈이 그녀들에게 향하자 그들은 바로 입을 닫았다. 정작 아인은 제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도 관심 없었다. 흰 식탁보가 깔린 긴 테이블만 해도 스무 개가 넘었고, 음식 종류들 또한 백 가지는 될 듯싶었다.

작은 분수들에서 치즈, 샴페인, 초콜릿, 홍차 등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결혼식장에 참석한 귀족들이 음식을 한 입씩만 먹는다고 쳐도 다 먹지 못할 양이었다.

아인은 눈이 돌아가 접시를 챙겨 들었다. 열심히 집게로 먹고 싶은 것들을 떠서 담았다. 그런 아인을 졸졸 쫓아다니던 알렉세이를 나이 많은 귀족이 데리고 가버렸다.

아인은 편하게 식사할 수 있겠구나 싶어 좋았다. 귀족들은 사람들과 대화하느라 바빴지만, 아인의 목적은 사교활동이 아니어서 식탁을 차지하고 앉았다. 수십 명의 시종들이 쉬지 않고 음식들을 채워놓고, 청소를 하고, 귀족들의 시중을 들었다.

눈으로 레이나와 샤를은 어디에 있을까 찾아봤지만 워낙 많은 인파가 몰려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포기하고 열심히 식사나 했다. 그런데 아인이 앉아 있는 식탁에 알파 둘이 다가왔다.

“안녕, 아인아. 혹시 나 기억해? 나 노엘 라이틀리라고 해.”

빨간 머리 옆에는 파란 머리가 붙어 있었다.

“난 제나드 체이서. 혹시 기억 못 해?”

“아니야. 기억해. 너희 내 10살 생일 파티에 참석해줬었지?”

아인이 알아봐 주자 그들이 기뻐했다.

“앉아도 돼?”

“앉아. 너희는 먹을 거 안 가지고 왔어?”

“응. 괜찮아.”

노엘과 제나드가 자리에 앉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인은 오렌지 시럽을 뿌린 돼지구이를 먹다가 그들을 쳐다봤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널 만나고 싶었어.”

제나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가 힘겨워하면서도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그런 일 겪고 우리도 정말 마음이 안 좋았거든. 몇 번이나 페르디안 백작저에 찾아갔지만, 문을 걸어 잠가 못 만나서 이제야 말해.”

제나드와 노엘이 아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미안해. 그때 우리가 싸우지만 않았어도, 네가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 거야.”

“아….”

친하지도 않은 그들이 왜 자신을 만나고 싶어 했는지 깨달았다. 아인이 기디언 백작에게 끌려간 게 자기들한테 어른들의 시선이 몰려서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인은 머리를 붕붕 저으며 부정했다.

“너희 잘못이 아니야. 그 일은 너희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었어.”

노엘과 제나드가 아인의 말에 펑펑 울었다. 지난 10년 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좋은 녀석들이었다.

오메가 친구들이 아인을 발견하고 테이블에 다가왔다가 질질 짜고 있는 노엘과 제나드를 발견하고는 어깨를 두드려줬다.

“드디어 만나서 사과했나 보구나.”

제나드와 노엘이 페르디안 백작저로 사과하기 위해 찾아왔던 일이 꽤나 유명한 일화인가 보다. 그것도 모르고 광공을 안 만날 생각에 바깥출입을 안 했다. 미안했다.

친구들이 음식을 담은 접시를 테이블에 올렸다.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제나드와 노엘도 실컷 운 다음, 음식을 가져와서 함께 식사를 했다. 아인도 이제 알파 친구가 두 명이나 생겼다.

***

“어머, 저 오메가 덩치 좀 봐. 무슨 알파인 줄 알았다니까요.”

“호호호호. 안달리시아 공작께 저런 특이한 취향이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그런 쪽으로다가 중매를 서줬을 텐데.”

안달리시아 공작과 결혼하는 열성 오메가에 대해 말이 많았다. 평범한 외모와 커다란 덩치, 평민이란 천한 신분, 열성 오메가, C급 가이드라는 요소까지. 천박하고 비루하기 그지없었다.

저런 못난 제이콥에게 어떤 매력이 있기에 안달리시아 공작이 홀딱 반했단 말인가. 시기와 질투 어린 시선이 제이콥의 듬직한 어깨를 훑어 내렸다.

2황자 호라이슨은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자꾸 말을 거는 알파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연거푸 샴페인을 들이마셨다. 아름다운 오메가는 향기로운 페로몬과 화사한 미소로 알파들의 정신을 쏙 빼놨다.

그의 추종자들은 1황자가 어떤 제안을 하든 흔들리지 않을 충성스러운 신하였으나, 동시에 호라이슨을 뼈까지 발라 먹으려고 드는 발정 난 짐승들이기도 했다.

추종자들은 누가 다음 차례인지 살벌하게 호라이슨을 앞에 두고 기싸움을 했다. 호라이슨은 그들의 더러운 욕망에 진절머리가 났다. 슬쩍 자리를 피하려고 했으나 손목이 붙잡혔다. 알파의 엄지가 노골적으로 호라이슨의 손목 안쪽을 문질렀다.

“2황자 전하 어디 가십니까.”

“놓으세요. 발칸 후작.”

“저와 함께 발코니에서 샴페인을 마시지 않겠습니까.”

“….”

샴페인은 여기서도 줄곧 마시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식음이 아니었다. 호라이슨의 푸른 눈이 검게 침전했다.

어둠을 집어삼킨 듯 암울한 눈빛은 빠르게 셈을 했다. 돈줄이었던 아놀드 후작이 죽어서 대체자가 필요하긴 했다.

호라이슨은 순순히 발칸 후작을 따라나섰다. 제이콥이 안달리시아의 품에 안겨 키스를 받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무언가 이성이 끊기는 걸 느꼈다.

더 이상 알렉세이의 연인도 아닌 제이콥이었다. 상종할 필요도, 그를 미워할 이유도 없건만 저 새끼가 행복한 걸 보니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왜 넌 행복해졌는데 난 그대로일까.’

“크아아.”

발칸 후작이 비명을 지르며 호라이슨의 손목을 놓았다. 호라이슨이 불타고 있었다. 불꽃에 휩싸인 호라이슨은 죽일 듯이 제이콥을 노려봤다.

“2황자 전하, 어서 멈추세요.”

“폭주다. 폭주야. 누가 가이드 좀 불러와.”

호라이슨이 손을 들었다. 제이콥에게 화상을 입혀 흉측한 몰골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고도 과연 그가 사랑받을 수 있을지, 행복할지 지켜보겠다.

다행히 결혼식장에 참석한 가이드들 수가 꽤 많았다. 그들은 불꽃을 뿜어내는 2황자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방사형 가이딩을 시도했다. 순식간에 결혼식장은 엉망이 되었다.

2황자의 폭주를 피해 귀족들은 죄다 도망쳤다. 안달리시아 공작저에 남은 이들은 이제 알렉세이와 아인, 그리고 그들을 수호하는 기사들뿐이었다.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황제 부부, 저택의 주인인 공작 부부마저 도망쳤다. 안달리시아 공작저에서 일하는 시종과 시녀들 또한 당연히 살고자 그곳에서 달아났다.

아무리 가이드들이 닉스를 쏟아부어도 호라이슨의 폭주가 멈추지 않았다. 가이드들은 2황자의 폭주를 막는 대신, 가이딩을 포기하고 도주했다.

은신하고 있던 주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호라이슨에게 다가가 불타고 있는 2황자를 끌어안았다. 주다의 몸은 큰 화상을 입어 녹아내렸다. 만일 그가 A급 에스퍼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2황자 전하. 괜찮습니다. 안전해요.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악몽을 꾸면서 항상 듣는 목소리였다. 호라이슨의 텅 빈 눈이 주다를 올려다봤다.

“아무 일도 없어요. 당신은 무사합니다.”

호라이슨에게서 드디어 불꽃이 사라졌다. 주다의 몸에 남은 열기로 인해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주다는 쓰러진 호라이슨을 받쳐 안았다.

아인은 알렉세이의 손에 눈이 가려져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이제 상황이 마무리되었음을 느꼈다.

알렉세이가 혀를 차며 주다에게 다가가 힐링 포션을 건넸다. 주다는 감사 인사를 하고 몸을 회복시켰다.

그는 언제나처럼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어린 주군이 가슴 아팠다. 어떻게 해야 당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 과연 그 방법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주다는 호라이슨을 안아 들고 마차에 태웠다. 2황자 궁으로 돌아가니, 황군이 도착해 있었다. 폭주하려던 A급 에스퍼를 오리하르콘 벙커에 가두기 위함이었다.

***

2황자의 폭주 사건 이후 그의 안정성을 높게 사 지지하던 수많은 귀족 추종자들이 돌아섰다. 호라이슨과 알렉세이의 지지자는 이제 그 수가 비등해졌다.

아인 페르디안이라는 유르한 제국이 낳은 천재 화가를 사랑하는 수많은 아인의 팬들 또한 알렉세이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동안 아인은 베일에 싸인 존재였다. 그가 알렉세이의 가이드로서 1황자 궁에 머물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지만, 아무도 믿어주는 이가 없었다.

그 누구도 천재 화가 아인 페르디안을 본 적 없었고, 아인의 팬들은 단지 금발과 금안이라는 이유만으로 1황자의 가이드를 그들이 사랑하는 화가라 주장하는 이들을 적대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안달리시아 공작 가문의 결혼식에 진짜 아인 페르디안이 등장했다. 그의 오메가 친구들이 ‘아인’이라 부르며 이를 증명했다.

그동안 얼굴 없는 천재 화가에 대한 순애보적인 애정을 쏟아붓던 팬들은 아인이 제 그림처럼 아름다운 오메가라는 사실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아인 페르디안은 어린 시절의 불행과 알파 아버지의 부재, 트라우마를 딛고 일어선 인간 승리 인생사까지 완벽한 기승전결을 갖춘 인물이었다. 아인 팬뿐만 아니라 다른 미술 애호가들의 마음도 흔들 만큼 격정적인 삶을 보낸 화가인 것이다.

원래 미술계에서는 화가의 실력과 더불어 그런 ‘뒷이야기’들이 그림 가격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뜩이나 비싼 아인의 그림은 천정부지로 가격이 폭등했다.

시중에 나와 있던 아인 페르디안의 그림들을 1황자가 깡그리 회수해 가뜩이나 아인의 그림에 대한 컬렉터들의 갈망이 강한데 큰일이었다. 페르디안 갤러리는 아인의 그림을 내놓으라 난리를 피우는 고객들로 인해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

때마침 알렉세이가 기존에 협박해서 사 간 그림들을 원래 주인들에게 되팔겠다고 나섰다. 그림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는 그들은 귀족들 중에서도 대단한 자본가들이었다. 아인의 그림을 다시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돈을 지불할 의사를 가진 존재들이란 뜻이다.

제 그림을 돈을 더 얹어서 다시 산 것뿐인데 미술계의 잔뼈 굵은 부유한 귀족들은 1황자에게 엄청난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 2황자의 책사 또한 1황자 측에서 머리를 잘 썼노라 인정하는 행보였다.

그리고 아인 페르디안이 그린 동화책의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샤를 상단’에서 캐릭터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릇과 공책 같은 물건에 캐릭터를 새긴 기발한 발상으로 샤를 백작은 하루아침에 떼돈을 벌었다.

<피넛버터 래빗>이 엄마 말을 잘 듣는 토끼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후속작은 좀 더 무거운 내용을 즐겁게 풀어낸 수작이었다.

<골든 보이의 대모험>은 주인공 골든 보이가 씩씩하게 왕따를 이겨내고 모험 중 친구를 사귀는 내용으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개그 요소가 곳곳에 숨어 있었다.

교육에 좋겠다며 동화책을 사서 읽히던 부모들의 행보는 자연스럽게 ‘샤를 상단’의 캐릭터 소품 구매로 이어졌다.

한때 그림을 좋아하는 귀족들 입에서만 오르내리던 아인 페르디안이란 이름은 이제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게 되었다.

물론 아인 페르디안이 범국민적인 사랑을 얻은 것은 그가 세 번째로 출간한 <낯설지만 특별하고 맛있는 요리법>이 요리사들의 필독서가 되면서부터였다.

식탁에 올라온 새로운 음식들을 맛본 귀족들은 금방 이 새로운 요리들에 푹 빠졌다. 귀족들 사이에서 이게 바로 아인 페르디안이 1황자 궁의 요리사들과 연구한 음식이라며, 지인들을 초대해 맛보게 하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다.

버림받은 1황자 알렉세이가 아인을 만난 건 그에게 엄청난 행운이었다. 유르한 제국에서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이었던 알렉세이 유르한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세탁되었다.

그동안 알렉세이가 성격파탄자고, 위험한 인물이라 비난하던 2황자 추종자들은 지금의 변화가 어이없어 코웃음을 쳤다.

모두가 홀려 버렸다. 아인 페르디안이라는 우성 오메가에게.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변화는 말이 되지 않았다.

2황자 측에서는 더 이상 아인 페르디안을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를 반드시 제거해야 제국민들의 여론을 뒤집을 수 있었다.

정식 가이드 없이 지내는 2황자가 문제 있다며, 황제에게 호라이슨과 가이드의 본딩을 촉구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언제는 누구에게나 가이딩 받을 수 있는 2황자라고 좋아하더니, 폭주할 뻔했다며 지금은 오리하르콘 벙커에 가둬놓고 1황자처럼 본딩을 하라며 협박하고 있었다. 오직 등급 높은 에스퍼만이 겪는 잔인한 현실이었다. 강인한 힘에 따르는 책임이자 굴레였다.

여론이 그러하니 2황자가 다시 승기를 잡으려면 가이드 한 명과 본딩을 해야 했다. 그러나 2황자의 추종자들은 이를 결사반대했다. 호라이슨에게 본딩한 가이드가 생기면, 그와 다시 잠자리를 가지지 못할 거란 추잡한 걱정 때문이었다.

호라이슨은 에테르가 안정될 때까지 어두운 벙커에 갇혀서 지냈다. 2황자를 지지하는 귀족들 중 그 누구도 어린 에스퍼가 그 안에서 얼마나 무서울까 걱정하지 않았다. 오직 주다만이 호라이슨과 함께 그곳에서 생활하며 수발을 들어줄 뿐이었다.

열화와 같은 여론이 1황자가 황태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렉세이는 보란 듯이 제 가이드, 아인 페르디안과 마탑에 매칭률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

그 사건은 제국민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았기에 수많은 방송국이 달라붙어서 실시간으로 생중계하기로 했다. 그 어떠한 에스퍼도 매칭률 검사를 공개한 적 없기에 이례적인 일이었다.

직접 그 광경을 보고 싶다는 사람들로 인해 비싼 매직 미러의 판매 지수가 수천 배 증가했을 만큼 모두의 관심이 1황자 커플에게 쏠렸다.

매직 미러는 평소에는 평범한 거울이지만, 마나를 흘려 넣으면 채널을 바꿔가며 방송을 볼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아직까지 방송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유르한 제국에서는 인기 없는 마도구인데, 이번 일을 계기로 많이 바뀔 듯했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방송국들은 1황자 커플의 매칭 검사를 방송하게 되면서 방송 중간중간에 넣을 광고를 받게 되었다. 매직 미러에 어떤 방송을 내보내느냐에 따라 방송 문화가 부흥할지, 멸망할지 결정될 것이다.

마침 영상 촬영을 하는 마도구를 통해 1황자의 마차가 마탑에 도착하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아인 페르디안의 팬들이 마탑 앞에 모여 있다가 환호성을 질렀다.

아인은 어리둥절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겁먹은 가이드를 보호하기 위해 알렉세이가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탑 안으로 들어갔다.

실시간으로 매직 미러에 송출되는 영상에 각 방송국의 해설이 곁들여졌다. 시청자는 마음에 드는 해설을 골라 그 채널을 시청했다. 마탑 마법사가 1황자 알렉세이와 그의 가이드 아인 페르디안에게 매칭률 검사에 대해 설명했다.

“저희가 앞으로 할 검사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두 분의 레아가 얼마나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 사이에 흐르는 마나의 양을 측정해 두 분의 매칭률을 알아내는 방식입니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레아가 연결된 통로가 넓다면 가이드는 에스퍼에게 한꺼번에 많은 닉스를 건네줄 수 있었다. 그게 등급과 별개로 에스퍼와 가이드의 매칭률이 중요한 이유였다.

에스퍼보다 가이드의 등급이 낮아도 둘의 매칭률이 놓으면 효율성이 좋기 때문에 손만 잡아도 에스퍼의 에테르 오염도가 많이 낮아졌다.

반면 둘의 등급이 같거나 가이드의 등급이 높아도 매칭률이 낮으면 섹스 가이딩 후에도 오염도를 조금밖에 정화하지 못했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매칭률을 결정하는 것은 선천적인 요소가 80%, 후천적인 요소가 20%였다. 태어날 때부터 서로를 위해 세상에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마법사들이 타인의 마나가 레아에 들어가려고 하면 고통스러울 수 있다며 둘에게 진통제를 나눠줬다. 아인은 달콤이가 걱정돼 먹지 않았다. 아인이 약을 거부하는 모습은 고스란히 전파를 타고 시청자들에게 전해졌다.

“가끔 두통, 구토, 호흡곤란, 발열 등 신체적으로 이상을 보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때는 지체 없이 종을 흔들어서 알려주세요. 즉시 마나를 거두고 매칭률 검사를 중단하겠습니다.”

아인은 아플 수도 있다는 마법사의 설명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알렉세이가 황태자가 되는 데 도움을 준다기에 선뜻 한다고 했는데, 이렇게까지 엄청난 이벤트인지 몰랐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이상한 도구를 겨눠서 무섭고 도망치고 싶었다. 알렉세이가 불안해하는 아인의 손을 꼭 잡아줬다.

S급인 에스퍼와 가이드의 레아를 연결하는 통로가 얼마나 넓을지 모르기에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이 전부 동원될 예정이었다.

120명이나 되는 대인원을 한 자리에 몰아넣을 순 없어서 그들의 마나를 하나로 집약해 송출해줄 마법진이 그려졌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발신 마법진에 마나를 흘려 넣으면 수신 마법진 위에 있는 에스퍼와 가이드에게 흘러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런 매칭률 검사는 다른 제국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기에 해외에서도 유르한 제국의 방송 채널을 시청 중이었다.

세계 유일무이한 S급 에스퍼와 그의 가이드에 대한 검사였기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번 매칭률 검사의 총지휘는 경험이 많지만 마나의 양이 적어 현장에서 제외된 3서클 마법사가 맡게 되었다.

매칭률 검사 전, 가이드 등급 측정이 빠르게 이뤄졌다. 사람들은 S급 에스퍼의 가이드이니 무조건 S급 가이드일 거라고 확신했지만, 진실은 뚜껑을 열지 않는 한 모르는 일이었다.

1000년 전 용사 요르의 비석이 있는 방으로 아인은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용사 요르는 자신이 죽고 난 뒤, 세상이 마물들에 의해 멸망할까 걱정하며 무덤 비석에 스스로를 봉인해 소울 스톤이 되었다.

요르는 에스퍼와 가이드를 정확하게 분류해내는 역할을 했다. 정확한 등급을 알아야 수준에 맞는 던전만 공략하며 사상자를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마법사가 용사 요르에게 이번에 검사받게 될 가이드를 소개했다.

“허허허. 이렇게 생명력 넘치는 닉스는 처음이구나.”

비석이 말을 했다. 아인은 기겁하며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마법사들이 한참 설득한 끝에 아인은 다시 비석이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아인은 비석이 랍스터 집게발이라도 되는 양 손을 대기 두려워했다.

용사 요르가 겁쟁이 아인에게 “괜찮다. 아가. 괜찮아. 나는 너와 같이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온 용사야.” 하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다.

그 말을 아인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지만 매직 미러 앞에서 생방송을 지켜보고 있던 시청자들은 달랐다. 아인 페르디안이 세상을 구원할 용사였다니!

아인은 절대 말하는 비석 위에 손을 얹고 싶지 않았지만, 주변의 압박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손을 올렸다. 용사 요르가 아인의 닉스를 측정하고 결론을 내렸다.

“아인 페르디안 S급 가이드다. 축하한다, 부디 신의 은총을 받는 용사는 세상을 위해 힘써 주기 바란다.”

예상하긴 했지만 아인 페르디안은 정식으로 S급 가이드로 인정받았다. 유르한 제국민들은 한마음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매칭률 검사 차례가 되었다.

겁먹은 아인의 손을 알렉세이가 꼭 잡아줬다. 임신한 오메가를 보호하듯 알파 페로몬이 두껍게 아인을 둘러쌌다. 페로몬의 영향으로 아인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성 페로몬이 아닌지라 다행히 사람들 앞에서 추하게 발정을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알렉세이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어리광을 부리게 되었다. 아름다운 우성 오메가와 우성 알파를 지켜보던 유르한 제국민들이 흐뭇하게 웃었다.

마탑 마법사들의 마나가 드디어 S급 에스퍼와 S급 가이드의 레아를 연결하고 있는 통로에 들어섰다. 아인이 눈을 부릅뜨고 당황한 기색을 표했다.

알렉세이는 혹시라도 아인이 아픈 기색을 보이면 종을 흔들기 위해 손에 힘을 꽉 줬다. 이번 매칭률 검사의 총지휘를 맞은 슈타인은 통신 마도구로 마법사들에게 연락했다.

“여기는 통제실. 들립니까.”

여러 마법사들에게 일일이 대답을 들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약속대로 그들은 수신 버튼을 눌렀다. 통제실에 설치된 120개의 붉은 전구가 빛났다. 슈타인은 전구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빛나는지 확인했다. 그가 빛나는 전구를 끄고 다시 질문을 했다.

“가이드의 레아 입구에 들어섰습니까.”

이번에도 빠짐없이 120개의 전구가 붉어졌다.

“그럼 지금부터 S급 에스퍼와 S급 가이드의 매칭률 검사를 시작합니다. 모든 마법사들은 마나를 에스퍼와 연결된 레아 통로에 남김없이 쏟아 넣어주세요.”

아인이 알렉세이를 돌아봤다. 알렉세이는 자신의 가이드를 진정시키기 위해 눈꼬리를 접고 웃었다.

“별거 아니야.”

소리 없이 입을 뻥긋거렸다. 아인이 알렉세이를 따라서 웃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알렉세이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아인이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잃었다.

“이 미친 새끼들아, 그만해!”

알렉세이는 손에 든 종을 미친 듯이 흔들다가 바닥에 던졌다. 슈타인은 당황해서 얼른 통제실에서 마법사들에게 검사 중단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미 120명의 마법사들 또한 아인처럼 기절한 상태였다.

막대한 마나를 받아들인 가이드가 잠들어 버렸다. 그의 레아에 들어선 마법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초유의 사태였다.

“아인아, 아인아.”

알렉세이가 아인의 앞에 무릎 꿇고 유순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나 무서워. 장난치지 마. 응?”

낮잠을 자는 연인을 깨우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알렉세이는 그의 무릎을 잡고 흔들다가 힘없이 흔들리는 몸에 이를 악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고!”

유일하게 매칭률 검사에 참가하지 않은 슈타인은 고작 3서클 마법사였다. 허접한 실력은 아니었지만, 이런 엄청난 사태를 혼자 해결할 만한 능력은 없었다.

다행히 마탑주 조세핀이 위급 시에 사용하라고 준 책자가 있었다. 그는 다급히 그 책자를 펼쳐서 내용을 살폈다.

“가이드가 발열할 때. 아니고. 두드러기. 이것도 아니고. 계속되는 설사. 이것도 아니고.”

빠르게 목차를 손으로 짚으며 내용을 확인했다. 지금 상황은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슈타인은 이제 자신은 끝이구나 싶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혹시나 하고 마지막 목차였던 ‘임신 중인 가이드가 셧다운을 일으켰을 때.’ 페이지를 펼쳤다.

아직 공식 발표는 없었지만, 혹시 아인 페르디안이 임신 중일 수도 있다.

「임신 중인 가이드가 매칭률 검사 도중 셧다운 상태를 일으킬 때가 있다. 이는 아주 희박한 확률로 일어나지만, 매칭률을 검사하는 마법사는 그 어떠한 위험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확률이 낮다는 말은 전혀 그럴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슈타인은 빠르게 조세핀이 적은 문장을 읽었다. 광분한 알렉세이가 통제실까지 슈타인을 죽이려고 쳐들어와 문밖에서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만일 통제실이 오리하르콘으로 지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진작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S급 에스퍼에 대한 두려움에 머릿속에 책자 내용이 잘 안 들어왔다.

“제발 닥쳐! 조용히 좀 하라고! 이걸 읽어야 어떻게 구하는지 알 거 아니야.”

확성기에 대고 외쳤다. 다행히 알렉세이가 잠잠해졌다. 제 가이드를 구하고 싶긴 한가 보다. 슈타인을 숨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해 조세핀이 저술한 위기 대처 책자를 다시 읽었다.

「임신한 가이드가 셧다운을 일으키는 가장 큰 이유는 태아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외부에서 침입한 마나를 적으로 간주해 레아를 닫아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가이드는 물론, 매칭률 검사 중인 마법사들 또한 레아에 영혼이 갇혀서 빠져나올 수 없다.

이때 가이드가 다시 레아를 개방하게 하려면 본딩한 에스퍼가 잠든 가이드의 잠재의식에 침투해 직접 가이드를 깨워야 한다. 위기를 느껴서 문을 걸어 잠근 가이드를 안심시켜 다시 레아를 열게 만드는 것이다.

단 본딩을 한 에스퍼가 없을 경우, 가이드의 레아와 그 어떠한 방식으로도 연결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가이드의 잠재의식에 들어갈 수 없다.」

슈타인은 에스퍼를 잠재워서 에스퍼가 본인의 레아를 통해 가이드의 레아로 이동하게 하는 방법을 읽었다.

실패하면 온 제국민의 사랑을 차지한 아인 페르디안은 물론이고, 유르한 제국의 1황자와 마탑 마법사들을 몰살시킨 역적 새끼가 될 터다.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그는 제 발로 통제실을 걸어 나왔다. 양손에 흉흉하게 불꽃과 얼음 송곳을 띄운 에스퍼에게 상황 설명을 했다.

“매칭률 검사가 이렇게 위험할 거란 소리는 없었잖아!”

“네. 보통 이렇게 위험하지 않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0.000001% 확률이거든요. 그런데 혹시 아인 공자 지금 임신 중입니까.”

“….”

휴, 다행이었다. 조세핀이 적어 놓은 위기 상항에 해당된다. 한시름 놓였다. 만일 원인도 모를 사고였다면 슈타인도 막막했을 것이다. 알렉세이에게 아인을 구할 방법을 설명했다.

아인을 구하려다가 본인도 깨어나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으나, 알렉세이는 그딴 건 상관없다는 듯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깨어나지 못하면 아인과 함께 죽여서 같은 관에 넣어달라는 끔찍한 유언을 남기고 떠났다. 이제부터 에스퍼에게 모든 걸 맡겨야 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슈타인은 제발 알렉세이가 아인과 마법사들을 데리고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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