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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는 아인과의 본딩으로 회복된 자신의 레아에 와 있었다. 황폐한 땅은 물기를 머금어 비옥했고, 푸른 싹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자신과 연결된 아인의 레아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입구가 어디인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한참 푸른 평야를 돌아다니며 아인의 레아를 찾았다. 본딩을 했을 때 봤던 검은 바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땅속에 있나 손으로 땅을 팠다. 아무리 파도 손톱만 깨져서 피가 날 뿐, 검은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의식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 신체에까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나타났다. 잠든 알렉세이의 손톱이 갑자기 깨져서 피가 나고 회복되었다.
방송이 중단되어 사고가 일어나는 것만 목격한 제국민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사람들은 아인을 걱정하며 황궁 앞에 진을 쳤다. 심지어는 어린아이들까지 울며불며 아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동화책 속 캐릭터를 이용한 샤를 상단의 사업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리라.
이를 계기로 아인 페르디안이 미술 애호가 귀족들뿐만 아니라 평민들에게까지 다양한 사랑을 받고 있음을, 관직에 앉은 고위 귀족들이 목도하게 되었다.
알렉세이에게 닥친 위기가 기회로 작용했다. 그동안 대쪽같이 중도파를 고수하던 귀족층이 1황자에게 마음이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 사고는 황제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황제는 유르한 제국에 마지막으로 남은 마법사 슈타인을 통제실까지 직접 찾아가 명을 내렸다.
그는 아들인 1황자나 그의 가이드에 대한 언급 없이 제국 국력의 지표가 되는 마탑 마법사들만 염려했다.
“무사히 이 나라의 마법사들을 구해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릴 것이다.”
슈타인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황제에게 감히 변명할 수 없었다. 반드시 마법사들을 구하겠노라 고개를 조아렸다.
한편 레아에서 땅을 파고 있던 알렉세이는 그 바보 같은 짓을 포기하고 다시 가이드의 레아를 찾아 나섰다. 한참 광활한 평야를 헤매던 중, 절벽이 나타났다.
절벽 아래에는 깊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신체 회복 능력이 비범한 알렉세이조차 저 아래 추락하면 뼈도 추리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 만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물러날 수 없었다. 아인의 레아로 가는 통로 비슷한 무엇도 여태 발견하지 못했다. 수상해 보이는 장소는 이곳 하나뿐이었다.
가이드의 닉스는 밤을 뜻하는 생명의 힘이었다. 알렉세이는 이곳이 아인에게 갈 수 있는 통로라 확신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공기의 저항으로 피부에 실 가닥 같은 상처가 생기고 피가 흘렀다. 알렉세이의 진짜 몸에도 상처가 생겨났다가 회복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추락하는 자신이 바닥에 떨어지면 터져서 죽을 거라 생각해 그 아픔을 가늠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거센 바람이 어느 순간 정반대로 바뀌었다. 추락하는 줄 알았으나 그는 비상하고 있었다.
땅으로 가는 줄 알았던 추락은 알고 보니 초월적 존재가 되기 위한 여정이었다. 아인의 어둠은 알렉세이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자신의 가이드가 있는 레아까지 어두운 밤하늘을 날아서 갔다.
밤하늘은 어느새 검은 바다로 바뀌어 있었다. 해안가에 앉아서 검은 바다를 보고 있는 아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인이 잔뜩 웅크린 채 배를 끌어안고 있었다. 마법사들 무리는 바다에 빠진 채 살려달라며 허우적거리며 헤엄쳤다.
“아인아.”
알렉세이의 부름에 아인이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돌아가자.”
“싫어. 무서워요. 달콤이가 다칠 거야.”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저것들 다 나한테 상대 안 돼. 어서 내 손 잡아. 나 믿지?”
배를 감싸고 있던 아인의 손이 풀렸다. 알렉세이가 손을 내밀었다. 아인이 그 손을 잡았다. 현실에서 두 사람은 눈을 떴다. 마나가 고갈된 마법사들 또한 잠에서 깨어났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레아를 연결하는 통로에서 살아 돌아온 마법사들은 그들이 본 경이로운 기적에 눈물을 흘렸다.
잠이 든 가이드를 구하기 위해 내민 에스퍼의 손을 가이드가 잡는 순간, 알렉세이의 레아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척박한 땅을 뚫고 자란 새싹들은 그냥 하찮은 풀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얀 캐모마일 꽃이었다. 작고 아담한 꽃들이 광활한 평야를 뒤덮는 절경을 그들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슈타인은 기계에 측정된 마나량과 이동 속도를 재빨리 기록해 연산 장치에 입력했다. S급 에스퍼가 S급 가이드를 만나게 된 일도 놀라운데, 그들의 매칭률은 무한대 값이었다.
무한대 개념을 마법사가 아닌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으니, 평범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숫자로 바꾸어 이제 발표해야 했다.
슈타인은 자신이 할 말이 일으킬 반향을 예감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일단 무사히 귀환한 마법사들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모두 잘 돌아왔습니다.”
전원의 붉은 전구가 빛을 뿜었다. 슈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렉세이와 아인의 매칭률을 발표했다. 확성기를 통해 그의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알렉세이 유르한 에스퍼와 아인 페르디안 가이드의 매칭률을 공식 발표합니다. 그들의 매칭률은 100%입니다. 이상입니다.”
황궁 밖에서 아인을 살려 달라 아우성치던 사람들이 고장 난 것처럼 뚝 멈춰 섰다. 제 귀가 잘못되었나 옆 사람을 쳐다보며 확인했다. 매칭률 검사를 끝낸 1황자와 아인 페르디안이 따로 자리를 마련해 건재한 모습을 드러냈다.
매직 미러를 통해 알렉세이가 자신의 가이드와 100%라는 높은 매칭률을 보이게 돼 기쁘다고 소감 발표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모두들 자기가 들은 내용이 맞았다는 걸 깨닫고 환호성을 질렀다.
“유르한 제국 만세! 만세!”
골든 보이를 사랑하는 아이들도 영문을 모른 채 어른들을 따라 함께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영상을 촬영하는 마도구에 담긴 건강한 알렉세이와 아인의 모습이 유르한 제국 사람들의 자긍심에 불을 지폈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을 맞이하는 백성들처럼 제국민들은 저택 대문에 국기를 꽂고 길가에 꽃가루를 뿌렸다.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다.
***
같은 시각, 2황자가 갇힌 오리하르콘 벙커 안에서 누군가는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폭주하려는 호라이슨을 가이딩하기 위해 제물처럼 바쳐진 A급 가이드였다. 호라이슨은 섹스를 통해 가이드의 닉스를 갈취한 다음, 가이드의 목을 손으로 짓눌렀다.
어둠 속에서 가이드의 눈이 흰자를 드러내며 뒤집혔다. 호라이슨은 목을 조르는 손에 더욱 몸무게를 실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있어!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해도 되는 소린 줄 알아?”
호라이슨은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지옥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2황자 궁의 백장미를 다 태우고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던 알렉세이를 머릿속에서 수천 번 되감고 있었다.
미치지 않은 자도 미칠 수밖에 없는 행위였다. 목을 졸린 가이드가 드디어 죽었다. 그럼에도 호라이슨은 가이드의 목뼈가 부러질 때까지 목을 졸랐다.
“2황자 전하. 에테르 오염도 측정하시죠.”
주다의 말에 호라이슨은 팔을 내밀었다. 마도구가 에스퍼의 혈관에 휘몰아치는 에테르를 조사했다.
“에테르 오염도 32%. 안정권에 돌입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알몸으로 몸을 일으킨 호라이슨에게 주다가 얼른 가운을 걸쳐줬다. 호라이슨은 가랑이 사이에서 질질 흘러내리는 정액을 느끼며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폭풍전야였다.
***
“아인아.”
레이나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모래궁 복도를 뛰었다. 샤를도 근엄함을 유지한 채 바삐 발을 놀려 경보했다. 선물꾸러미를 든 시종들이 그들의 뒤를 부지런히 따랐다.
“엄마. 아빠. 흐유유유.”
자신이 멀쩡한지 살펴보겠다며 레이나가 볼을 눌러 이상한 소리를 내버렸다. 다행히 아무도 못 들었는지 비웃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우리 아인이, 어디 다친 데는 없지? 하여간 누구 때문에 내 새끼 걱정을 한순간도 놓을 수 없다니까.”
백작 부인이지만 유르한 제국 1황자보다 우위에 있는 장모가 사나운 눈초리로 알렉세이를 째려봤다. 알렉세이가 어쩔 줄 모르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장모님.”
레이나가 들은 척도 안 하고 몸을 홱 돌려버렸다. 모래궁 시종들이 페르디안 가문의 시종들한테 짐을 건네받았다. 1황자 침실에 선물꾸러미가 차곡차곡 쌓였다.
빠르게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세팅이 시작되었다. 티 테이블에 수련 모양으로 레이스를 짠 하얀 식탁보가 깔렸다. 알렉세이, 레이나, 샤를은 준비가 끝난 티 테이블에 앉았다. 아인은 사람은 넷인데 의자는 세 개뿐이라 알렉세이의 허벅지를 이용했다.
여러 개의 디저트가 3단 골드 트레이에 놓여 반짝반짝 빛나며 시선을 빼앗았다. 그 안에 담긴 초콜릿, 마카롱, 에끌레르, 까눌레, 슈, 생크림 케이크, 치즈 케이크, 크렘브륄레 등이 화려한 금빛 트레이를 보다 더 화려한 장식품처럼 만들었다.
요즘 자신이 즐겨 먹는 복숭아와 딸기, 바나나, 멜론 같은 과일이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잘려 접시에 담겨 나왔다. 시종장이 티포트에 따뜻한 물과 홍차 잎을 넣고 정확한 시간을 쟀다. 찻잔에 따라진 찻물은 갈색이었는데 빛을 받으니 황금빛으로 보일 만큼 품질이 좋았다.
임신 중인 아인에게는 홍차가 아닌 루이보스 차가 따로 준비되었다. 아인은 차를 살짝 머금어 향을 느낀 후 마셨다. 레이나와 샤를이 매칭률 검사 중 일어난 사고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알렉세이가 그들을 안심시키는 동안, 아인은 열심히 과일들을 먹었다. 요즘 잘 먹어서 살짝 나온 자신의 배를 은근슬쩍 알렉세이가 손으로 만지려고 했다. 누가 뱃살성애자 아니랄까 봐 손짓이 아주 농염했다.
임신한 오메가를 위하는 듯 살살 둥근 배를 쓰다듬는 손바닥에 방심해선 안 됐다. 만일 <집착광공은 능욕을 멈춰!>를 안 읽었다면 깜빡 속았을 거다. 이 색마! 변태! 아인은 알렉세이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려서 떼어냈다.
“가만히 있어. 위험하잖아.”
알렉세이가 말썽꾸러기를 혼내듯 말했다. 어이없었다. 그는 아인이 마치 발버둥 쳐서 떨어질 뻔했다는 듯 아인을 고쳐 안았다. 그가 그 김에 아인의 뺨이랑 목덜미에 쪽쪽 뽀뽀를 했다. 정말 집착광공이라는 키워드에 걸맞은 집요함이었다.
머리통을 밀어내도 자꾸 입술을 들이댔다. 짜증 나서 주먹으로 마구 때렸는데도 좋다고 하하하 웃었다. 원작에서 제이콥이랑 SM플레이를 그렇게 하더니만 매 맞는 것도 좋아했다.
어쩌다가 자신이 이런 변태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레이나가 화제를 돌렸다. 가져온 선물들 열어보라며 뱃살에 환장하는 알렉세이의 마수에서 아인을 구해줬다. 역시 엄마밖에 없었다.
이젠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의자를 가져다주지 않는 시종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앉게 된 알렉세이의 허벅지 위에서 아인이 내려왔다. 레이나가 궁에서 지내며 필요할 만한 것들을 챙겨왔다고 설명했다.
대학교 근처에 얻은 자취방에 찾아온 엄마 같았다. 드라마에서 봤던 ‘부모 있는 아들’이 된 기분이었다. 괜히 부끄러워 웃음이 나왔다. 저 상자들을 열면 김치도 있고, 반찬들도 있나 기대하며 군침을 꼴깍 삼켰다.
1황자 궁 요리사들에게 말하면 언제든지 먹고 싶은 음식들을 먹을 수 있지만, 친정 엄마의 손맛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불길한 생김새지만 레이나의 확고한 취향인 분홍색 상자를 열어봤다.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디 갔어, 내 김장 김치.’
진심으로 김치는 아니어도 파이 정도는 만들어서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작 부인이니 요리는 안 해도, 저택에서 일하는 요리사들에게 부탁해서 음식을 싸 와야지 이게 뭐야.
“어때? 너무 귀엽지? 잘 때 꼭 안고 자. 우리 아인이가 좋아하는 토끼 인형이야.”
출판사 편집자에 의해 골든 보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으로 바뀐 잉잉이 캐릭터 인형이었다. 금빛 실크로 만든 토끼의 눈은 무려 다이아몬드였고, 코는 루비로 되어 있었다. 잉잉이를 꼭 끌어안고 영롱한 다이아몬드를 들여다봤다.
자신이 임신해서 먹을 것부터 찾았지만 레이나에게는 깊은 뜻이 있었던 거다. 이제 집에 양자를 들였으니 살아생전에 아인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증여세 문제 때문에 이런 꼼수를 쓰는 것이지 싶다.
“마음에 들어?”
알렉세이가 유심하게 자신을 들여다봤다. 보석에서 눈을 떼고 혹시 이번에도 그림 의뢰 맡기고 보석으로 때우려는 건가 싶어 눈을 부라렸다.
현찰. 뭐니 뭐니 해도 현찰이 최고다. 레이나는 증여세를 피하기 위해 토끼 인형을 선물하는 척 거금을 건넸지만, 자신은 엄연히 개인 사업자 등록을 마친 화가였다.
“나한테 의뢰 맡길 생각이면 돈부터 준비해요.”
“응? 갑자기 무슨 의뢰?”
현찰로 달라니까 시치미 떼는 것 봐라. 1황자 주제에 쩨쩨했다. 다시는 알렉세이에게 의뢰를 안 받을 거다. 역시 있는 것들이 더 무서웠다.
만일 양심 찔리게 블랙 슬라임을 자화상이라며 그리지 않았다면 그림값으로 반지 따위 받아주지도 않았을 거다. 가끔 숙면을 위해 가고일 눈 반지를 끼고 자긴 하지만, 그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굉장한 잉여 아이템이었다.
생긴 거와 다르게 짠돌이인 알렉세이를 경계하며 잉잉이를 옆구리에 낀 채 다른 상자들을 열어봤다. 쓸데없이 프릴이 잔뜩 달린 잠옷과 푹신한 베개가 나왔다. 세상의 눈을 속이기 위해 가져온 것들이었다.
“아인아, 부모님이랑 같이 편하게 있어.”
알렉세이가 눈치 좋게 빠져 줬다. 그 뒤 아인은 왕자병 말기 환자나 입을 법한 잠옷을 한 번만 입어 보라는 레이나에게서 도망쳐 다녔다. 혹시나 저것들이 증여세 안 내려고 쇼하는 건가 눈을 시뻘겋게 뜨고 감시 중일 모래궁 시종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그녀의 완벽한 연기였다.
아니라면 20살이나 된 아들에게 토끼 인형을 선물하고, 끔찍한 잠옷을 입히려고 할 리 없었다. 아인은 넓은 1황자 침실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슬쩍 걱정하기 시작했다. 혹시 레이나가 진심으로 이런 것들을 선물했으면 어쩌나 하고.
달콤이가 꿈에도 그런 생각 말라는 듯 꼬르륵 배곯는 소리를 냈다. 아인은 얼른 불길한 의심을 고개를 저어 떨쳐내고 오랜만에 부모님과 식사 시간을 가졌다.
식당에서 하하하 웃으면서 식사하고 있는데 창밖에 사람 그림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스테이크를 자르던 나이프를 멈춘 채 밖을 내다봤다.
“왜 그래, 아인아?”
“아니에요.”
샤를이 아인의 접시를 가져가서 대신 스테이크를 잘라줬다. 아인은 방금 은발을 본 것 같아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호라이슨이 진짜 아인 페르디안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는데 갑자기 잘만 넘어가던 음식들이 목구멍에 턱턱 막혔다. 샤를이 좀 더 먹어보라며 포크로 고기를 찍어서 입에 넣어줬다.
레이나가 계속 한 곳만 쳐다보는 아인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끼고 밖에 뭐 있냐며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꺄아.”
레이나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아인도 너무 놀라서 도망치려 했다. 의자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끌렸다. 죽은 참새가 유리창을 깨며 들어와 바닥에 처박혔다. 창문 앞에 서 있던 기사들이 커튼을 뜯어서 유리조각과 죽은 참새가 있는 처참한 현장을 감췄다.
아인은 부모님과 함께 기사들에게 보호받으며 침실로 이동했다. 다른 기사들은 범인을 찾기 위해 바삐 움직였으나 범인의 흔적은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알렉세이가 그 소식을 듣고 아인에게 위험하다며 산책 금지령을 내렸다. 속상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어도 소용없었다. 그는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알파였다.
***
아인이 부모님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준 알렉세이는 마탑으로 향했다. 조세핀을 만나서 상담할 내용이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1황자 전하.”
조세핀은 여전히 깨진 외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마법 연구를 하느라 안경을 새로 맞추러 가지 않은 그의 지난 행적이 훤히 보였다.
“슈타인이 그러더군요. 무한대라니! 매칭률 무한대는 유르한 제국 초대 황제 이후로 처음입니다. 하하.”
제 일처럼 기뻐해주는 조세핀이 고맙긴 했지만, 알렉세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깨진 그의 외알 안경을 빼앗았다. 이러면 눈이 불편해서라도 새로 맞출 것이다.
“돌려주세요. 1황자 전하.”
조세핀이 빼앗긴 외알 안경을 되찾으려고 들었다. 알렉세이는 손 안에서 외알 안경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새로 맞추라니까.”
손에서 굴러다니는 유리 조각들을 아공간에 버리고 소파에 앉았다. 조세핀도 소파에 앉겠다며 손을 더듬거렸다. 알렉세이는 눈뜬장님이 된 조세핀을 인도해 자리에 앉혔다.
“나 다시 에스퍼 등급을 측정해야 할 것 같아.”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2차 각성을 한 것 같아.”
조세핀의 입이 떡 벌어졌다. 2차 각성은 능력자가 숙련도를 쌓아 등급이 오르는 걸 뜻했다. 여태 세상 사람들은 S급을 가장 높은 등급으로 여겼다. 그런데 S급 에스퍼인 알렉세이가 2차 각성을 한 것 같다고 한다.
그 말은 S급 위에 다른 등급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마법 학계에도 엄청난 여파가 몰아칠 테지만, 간신히 제 가이드를 만나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지 않게 된 알렉세이가 다시 두려움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가이드가 있어서 폭주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힘을 두려워하고 배척하곤 한다. 만일 알렉세이가 진짜 2차 각성을 했다 하더라도, 공포 정치를 할 게 아니면 그 힘을 숨기는 게 나았다.
“알겠습니다. 용사 요르께 물어보러 가시죠.”
알렉세이는 자신을 걱정하는 조세핀을 보자 마음이 안 좋았다. 조세핀도 모르게 등급 측정을 다시 할 수 있었다면 그랬을 터였다.
용사 요르가 봉인된 소울 스톤이 있는 방은 마탑주가 아니면 열 수 없게 결계가 쳐져 있었다. 힘으로 깨고 들어갈 수 있지만, 그런 방법을 사용하면 결국 들키게 되었다.
조세핀이 결계를 풀었다. 그가 혹시 2차 각성을 했더라도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다. 고작 7서클 마법사 따위가 누구보다 강한 알렉세이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거였다. 어째서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포식자를 알아보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뭐 알렉세이에게는 몹시 좋은 소식이긴 했다. 아인 페르디안이 영원히 자신한테 속을 거란 뜻이니 말이다.
알렉세이는 용사 요르에게 인사를 했다.
“허허허. 왔구나 왔어. 그래, 알렉세이야. 내 비석에 손을 올려 보거라.”
알렉세이가 비석 위에 손을 올렸다. 빛이 뿜어져 나왔다. 용사 요르는 알렉세이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2차 각성을 했구나. SS급 에스퍼다. 앞으로 이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으려면 열심히 가이딩 받아라. 알렉세이.”
아인의 레아를 찾기 위해 어둠 속으로 추락하면서 느꼈던 변화는 착각이 아니었다. 알렉세이는 당연한 결과를 들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걸렸다.
조세핀은 용사 요르에게 어떻게 알렉세이가 2차 각성을 할 줄 알고 아인에게 세상을 구할 용사라고 말했었냐고 물었다. 비석에 갇힌 용사는 껄껄 웃기만 할 뿐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 중요하겠느냐. 이제 이 세상이 안전하다는 게 중요하지.”
“예, 맞습니다. 용사 요르이시여.”
조세핀은 존경을 담아 대답하면서, 속으로 알렉세이가 아인과 각인을 해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각인을 한 연인들 중 헤어지는 경우는 아주 극히 드물었다. 헤어진다고 쳐도 발정기가 되면 각인자와 다시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재결합 확률도 높았다. 때로는 아들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돌본 알렉세이였지만 조세핀 역시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폭탄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세이가 가이딩을 받지 못할 경우, 단순히 개인의 비극으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이 세상을 멸망시킬 폭주로 이어지게 된다지 않는가.
다행히 아인이 불의의 사고로 죽으면, 그와 본딩한 알렉세이 또한 심장이 멈춰서 죽는다. 가이드가 죽어 가이딩 받지 못하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그렇지만 2황자 추종자들은 알렉세이가 SS급 에스퍼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인류를 멸망시킬 것처럼 굴 게 뻔했다. 여태 가이드 없는 S급 에스퍼란 이유로 얼마나 박해받았는가. 이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했다.
알렉세이도 그런 조세핀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오직 세 존재만이 알 비밀을 가슴에 묻은 채 밀실을 빠져나왔다.
한편, 같은 시각. 2황자 궁에서 작은 소란이 발생했다. 오리하르콘 벙커에서 나온 호라이슨이 방에 있는 물건들을 던져댔기 때문이었다.
주다는 시종들에게 주군의 흉포함을 숨기기 위해 은폐 능력을 펼쳐 소음이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호라이슨이 씩씩거리며 깨진 유리 조각을 손에 쥐었다.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자학하려는 거였다.
“이건 안 됩니다.”
“놔! 놓으란 말이야!”
주다는 호라이슨의 손목을 비틀어 기어코 유리 조각을 빼앗아냈다. 그의 기분은 벙커를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궁에 복귀한 호라이슨과 청소를 하며 수다를 떠는 시종들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은 제 동료들과 알렉세이의 가이드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주다와 호라이슨이 갇혀 있는 동안, 알렉세이는 그의 가이드와 매칭률 검사를 했다. 그 현장은 매직 미러를 통해 생중계되었는데, 아인이 마법사가 준 진통제를 거부했단다.
시종들은 아인이 임신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우성 알파인 알렉세이가 얼마나 절륜한지에 대해 떠들면서 감히 황족을 성희롱하기까지 했다. 다른 나라의 황족이었다면 입이 인두로 지져져서 죽었을 만한 죄였다. 그러나 2황자 궁에서 일하는 시종들은 그리 여기지 않았다.
그동안 주인이 보여준 다정함과 친절함은 모두가 호라이슨을 사랑하게 했지만, 동시에 그의 위엄을 위협하는 독이기도 했다.
뒤늦게 호라이슨을 발견한 시종들이 당황해 입을 닫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그동안 얼마나 고생 많으셨냐며 인사를 올린 뒤, 잽싸게 도망쳤다.
호라이슨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매직 미러에 마나를 주입했다. 채널을 돌려서 아인의 소식을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온 채널에서 아인이 임신 중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호라이슨은 아인의 임신 소식에 제 납작한 배를 내려다보며 손으로 감쌌다. 주다는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였다. 그가 매직 미러를 던졌다. 벽에 부딪힌 유리가 깨지며 파편들이 날아다녔다. 주다는 얼른 호라이슨에게 유리 파편이 튀지 않도록 몸으로 막았다.
그가 정신계 에스퍼가 아니었으면 이런 위협쯤은 별거 아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 그러지 못해 부상을 입고 말았다. 등에 유리 파편이 박혀 따끔거렸다. 호라이슨은 그때부터 절규하며 방을 때려 부쉈다.
“왜! 왜! 나는 안 됐는데 왜! 돌려줘! 돌려주란 말이야!”
회상을 끝마친 주다는 손바닥에 파고든 유리 조각을 버렸다. 호라이슨이 움직이다가 다치지 않도록 바닥에 흩어진 유리 파편부터 청소했다.
청소를 하는 동안, 손바닥에 난 상처는 다 아물었다. 그렇지만 등에 있는 상처에서 계속 피가 나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유리 파편을 빼내야 할 듯싶었다.
손을 뒤로 보내봤지만 닿지 않았다.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는 주다를 지켜보던 호라이슨이 그를 불렀다. 주다는 등을 맡겼다. 호라이슨이 유리 파편을 꾹 짓눌렀다. 상처를 비집고 유리 파편이 깊게 들어갔다. 멍청한 몸은 그대로 찢어진 피부를 회복시켰다.
“주군께 폐를 끼쳤습니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가 봐.”
주다는 명령을 받고 나가면서 방에서 슬쩍 뾰족한 촛대를 훔쳤다. 이제 방 안에 그를 상처 입힐 만한 물건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등신은 저 혼자 뿌듯해하며 문밖에서 경비를 섰다. 호라이슨은 다행히 발작을 멈추고 흐느끼기만 했다.
흐흐흑. 흑흑. 그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주다는 날개뼈가 움직일 때마다 유리 파편에 찔려 인상을 찌푸렸다.
보이지 않는 작은 상처였지만, 계속 식은땀이 흘렀다. 기사복이 흠뻑 젖어 들었을 때쯤 교대 시간이 되었다. 엘리자베스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너 어디 아파 보인다. 의무실 좀 가봐.”
주다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한 걸음 내디뎠다가 휘청거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놀란 엘리자베스가 주다를 둘러업고 의무실로 뛰어갔다.
의원이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주다는 등에 유리 파편이 박힌 채 회복되었노라 답했다.
“이런. 어쩔 수 없네요. 째야지.”
주다는 웃통을 벗고 등을 보인 채 누웠다. 의원은 국소 마취로 상처 부분의 통각을 둔화시켰다. 마취가 되었음에도 소독된 피부가 칼에 베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아픔 또한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물리계 능력자에 비해 육체적 통각에 면역이 없는 주다는 고작 비명을 참아내는 게 최선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엄살 부린다며 놀렸다. 그녀에게 성질을 부리는 동안, 수술이 끝났다. 의원이 혀를 쯧쯧 찼다.
“도대체 어쩌다가 유리 파편이 박힌 채 회복되었어요. 근육이 난도질 되었네. 회복될 동안, 가만히 누워 있다가 가요.”
엘리자베스가 손수건으로 땀 맺힌 그의 이마를 닦아줬다.
“너 누구한테 당했어? 말해. 이 누나가 혼내줄게.”
“됐어. 그런 거 아니야.”
“아, 진짜! 말 안 하면 확 뽀뽀해 버린다!”
“직장 내 성희롱으로 고소당하고 싶으면 그러든지.”
“으휴. 이 멍청이. 답답이. 몰라, 나 갈래.”
토라진 엘리자베스가 발을 쿵쿵 굴리며 가다가 미련 가득한 눈으로 주다를 돌아봤다. 주다는 그녀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문이 조심스럽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엘리자베스의 기척이 문 앞에서 한참 떠나지 못하는 게 느껴졌다. 의원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좋을 때다.” 한 소리 얹었다.
몸이 회복된 주다는 훈련을 받기 위해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러다 1황자 궁으로 가는 호라이슨을 보게 되었다. 그는 영리하고 계산적인 인물이었지만 감정 기복이 커서 무슨 사고를 칠지 몰랐다. 은신과 은폐 능력을 사용해 몰래 호라이슨을 뒤쫓았다.
모래궁에 도착한 호라이슨이 창문을 들여다봤다. 주다는 그가 보고 있는 존재가 아인 페르디안임을 알아차렸다. 아인이 부모님과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웃음소리 가득한 그 공간에서 따뜻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굳이 소리를 듣지 않고 세 사람의 미소만 보고도 그들이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느낄 수 있었다.
페르디안 가문 사람들은 서로를 무척 아끼는 듯했다. 호라이슨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유령처럼 서서 그들을 지켜봤다. 그가 아인을 갑자기 공격할까 봐 주다는 바짝 긴장했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서 황태자가 되지 못하면 그동안 해온 희생들이 다 물거품이 된다.
호라이슨이 창가에 앉은 참새를 손으로 덥석 잡아 유리창으로 집어 던졌다. 안에서 난리가 났다. 창문 앞에 서 있던 기사들이 커튼을 뜯어내고 범인을 찾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주다는 잽싸게 능력을 사용해 호라이슨을 숨겼다. 요즘 그의 주군은 너무나 이상했다. 주다는 그 원인이 아인일 거라 짐작했다.
혹시 호라이슨이 알렉세이를 좋아하는 걸까?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알렉세이를 증오했음을 오랫동안 두 황자의 곁을 번갈아 가며 지킨 주다는 알고 있었다.
“불공평해.”
무엇이?
“나도 못 지켰으면 너도 못 지켜야지. 아아, 아니야. 아니야. 지켜야 해. 내가 이번에는 지켜줘야 해.”
돌연 분노가 가득했던 얼굴이 활짝 꽃처럼 피어나는 걸 지켜본 주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호라이슨이 납작한 배를 손으로 문지르며 뿌듯하게 웃었다.
“내 거니까.”
“….”
“아이도, 저 몸도 다 내 거야.”
결국 그가 미쳤다. 주다는 그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주다, 영혼을 바꾸는 흑마법이 이 세상에 있는지 한번 알아봐.”
호라이슨의 이번 명령에는 따를 수 없었다.
“왜? 싫어?”
“네.”
“건방지네. 내가 좋아서 주인을 배신한 개 주제에.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너 알렉세이가 보낸 첩자였잖아.”
주다는 호라이슨이 제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수많은 귀족들을 자신의 추종자로 삼기 위해 낭창하게 휘는 오메가의 붉은 입술이 주다에게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주다 또한 호라이슨에게 홀린 그 수많은 바보들 중 하나였기에 넋이 나간 채 제 뺨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입술과 입술 사이가 종이 한 장만큼 가까워졌다. 오메가의 페로몬을 느낄 수 없는 그인데 이상했다.
호라이슨의 궁을 눈부시게 장식했던 백장미 향기가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죽었으면 좋겠다. 영원히 그와의 찰나를 간직할 수 있도록.
그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주군의 잔인함조차 주다는 눈물 날 정도로 좋았다. 호라이슨이 주다를 좋아해 줄 거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다. 호라이슨은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하늘 위의 존재였다.
“주다, 그런 일은 너밖에 해줄 사람이 없어. 다른 새끼들은 내 진짜 모습을 모르잖아.”
어찌나 달콤하게 속삭이는지 귀에 꿀을 들이부은 줄 알았다. 주다는 귓불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빨개졌다. 호라이슨은 주다가 특별하다고 말했다.
“너만이 날 구해줄 수 있어.”
그는 뱀처럼 간교한 오메가였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기 말에 복종하는지 알았다. 그렇지만 주다는 호라이슨이 굴복시킨 짐승들과 달랐다. 주다는 진심으로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
“네, 알아보겠습니다.”
이제 주인을 배신할 시간이다. 한번 배신자는 영원한 배신자라는 말이 있던데, 이를 알면서도 주다를 받아준 호라이슨의 잘못이었다.
‘나는 당신의 부탁을 절대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당신에게 내가 하는 유일한 배신이다.’
***
젖꼭지가 퉁퉁 부었다. 바짝 곤두선 유두 끝은 뾰족해지고 체리처럼 짙은 붉은빛을 띠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아파서 옷을 입을 수 없었다.
아인은 알몸에 연보라색 실크 가운만 걸친 채 앞섶을 여미지 않고 딸기를 먹었다. 알렉세이가 일하러 가려고 옷을 챙겨 입는 듯하더니, 침대로 도로 기어들어 와 아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누가 보면 좆질 못 하게 해서 한 맺힌 줄 알 거다. 밤새 박히느라 힘겨웠던 아인은 정말 억울했다.
S급 에스퍼라느니 뭐니 하는 집착광공의 설정 때문에 하루 5시간씩 구멍이 헐도록 박혀도 그는 지칠 줄 몰랐다. 거기다가 구멍 아프다는 핑계로 섹스를 피할 수도 없게 이 세상에는 힐링 포션이 있었다. 과연 19금 내용만 주야장천 나오는 피폐물 소설의 세계관다웠다.
알렉세이가 관계를 끝내고 평소처럼 힐링 포션을 먹으라고 해서 안 먹었는데 괜한 짓이었다. 그런다고 안 하는 게 아니었다.
“윽. 아파요.”
허벅지를 더듬으며 가운 안으로 파고든 손이 열상을 입은 구멍을 건드렸다. 부을 대로 부어서 잘 들어가지 않는지 알렉세이가 알파 페로몬을 공기 중에 풀었다. 닫힌 입구가 열리고 텅 빈 내벽에 애액이 차올랐다.
아인의 의지와 달리 굵은 엄지가 달라붙는 점막을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쿨쩍 쿨쩍, 그가 엄지를 움직일 때마다 밖으로 애액이 흘러나왔다. 아인은 엉덩이를 흔들어 엄지를 빼내려고 했다.
그게 발정 난 알파에게 얼마나 야한 몸짓으로 비치는지도 모르는 순진한 오메가의 행동에 알렉세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눈치가 없으면 몸이 고생하는 법이었다. 아인이 딸기를 다 먹길 기다렸던 알렉세이는 바로 바지 지퍼를 내렸다.
아인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들오들 떨었다. 그깟 천 쪼가리가 무슨 대단한 보호 마법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알렉세이는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빨리 하면 기사들을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빠듯하긴 하지만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인아, 네가 좋아하는 자지야. 어서 나와 봐.”
“나 자지 안 좋아해요.”
“아닌데. 너 내 자지라면 환장하잖아. 우리 아인이 어제 완전 게걸스럽게 먹더라.”
이불로 덮인 엉덩이를 큼지막한 손이 둥글게 마사지했다. 배가 눌릴까 봐 짐승처럼 네 발로 엎드린 아인은 아차 싶었다. 이건 완전 ‘날 잡아먹어 줍쇼.’ 하는 후배위 자세였다.
손가락이 구멍을 꾹 눌렀다. 실크 가운과 얇은 이불이 아인의 그곳으로 밀려들어 왔다.
“안 돼요. 하지 마요.”
“왜? 자지 먹고 싶은데 다른 거 넣어서 싫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천들이 무서운 것뿐인데 알렉세이가 한 질문 때문에 아인이 뭐라고 대답해도 이상하게 해석되고 말았다.
맞다고 하면 자지 먹고 싶은 게 되고, 아니라고 하면 구멍에 천을 넣고 싶다는 게 됐다. 진퇴양난이었다. 아인은 이불을 살짝 내리고 머리를 빠끔히 내밀었다.
“힐링 포션 주세요.”
“탁월한 선택이야.”
잠자리를 피하기 위한 꼼수는 먹혀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힐링 포션을 먹어서 구멍이 아프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게 나았다. 남들은 팔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흘러내릴 때쯤 먹는다는 힐링 포션이어서 먹을 때마다 양심에 찔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섹스로 죽을 수 있다고 몸소 증명할 만큼 자신은 호승심 넘치지 않았다. 알렉세이가 거대한 짐승처럼 아인을 제 아래에 두고 덮치듯 감싸 안았다.
쪽쪽쪽. 볼살 부르트도록 뽀뽀를 하며 침을 발랐다. 이제 본능적으로 자신의 알파가 뽀뽀를 하면 알아서 뒷구멍이 오물거렸다.
부기가 빠져 원래의 분홍빛으로 돌아온 젖꼭지를 그가 집게손으로 쭉쭉 늘렸다. 만일 자신이 피자로 태어났으면 손님들이 ‘이 집 치즈 맛집이네.’ 했을 것 같다.
이불이 거추장스러운지 알렉세이가 침대 밖으로 던져버렸다. 벌어진 실크 가운의 뒷부분을 잡아 쭉 내렸다. 허리에 묶인 끈 때문에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
알렉세이가 가운의 아랫단을 끌어 올려 아인의 허리춤에 둘둘 말았다. 봉긋한 엉덩이와 가느다란 허리의 경계를 연보라색 실크 띠가 나누게 되었다. 섹스를 기피했던 기색이 무색하게 아인의 구멍은 흠뻑 젖은 채 알파를 갈구했다. 혀로 주름을 핥으니 달콤한 애액이 더 많이 흘러내렸다.
엉덩이 살을 양손으로 움켜잡은 채 할짝거리는 알렉세이 때문에 아인의 상체가 무너졌다. 엉덩이만 바짝 들어 올린 아인은 숨을 헉, 들이마셨다. 왜 매일 섹스를 하는데 무감각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거대한 쾌감이 버거웠다.
숨을 헐떡거리며 뜨거운 혀가 점막을 문지르는 감각에 몸서리쳤다. 엄지 두 개가 아인의 구멍을 찢어버릴 것처럼 벌렸다. 혀가 완전히 삽입되어 미꾸라지처럼 안을 유영했다.
“흐아아. 아아. 아니야. 아니야.”
아인이 손으로 침대 시트를 쥐어뜯으며 앞으로 사정했다. 아인의 사정 따위 관심도 없다는 듯 알렉세이는 멈추지 않고 혀로 안을 샅샅이 훑었다. 그러다가 입으로 구멍을 빨아 애액을 모조리 마셔버리기도 하고, 혀와 손가락을 동시에 쑤셔 아인을 울리기도 했다.
아인은 뒤를 자극받아 연거푸 사정했다. 페니스가 묽은 액조차 뱉어내지 못할 때까지 아인은 내몰렸다. 그렇게 되고 나서야 알렉세이는 돌덩이처럼 흉흉한 자지를 구멍에 쑤셔 넣었다.
“아. 아앗. 아아. 아흑. 윽.”
그가 하반신을 튕길 때마다 아인은 종이 인형처럼 나풀거리며 움직였다. 그러나 아인은 멀리 날아갈 수 없었다. 말의 고삐처럼 허리를 묶고 있는 실크 띠를 잡고 놔주지 않는 알렉세이의 집요함 때문이었다.
쩝쩝. 접합부에서 나는 음탕한 소리가 아인의 귀에도 크게 들리는데 알렉세이가 듣지 못할 리 없었다. 이러니 아인더러 자지를 좋아한다 몰아세워도 결국 이렇게 되는 거지 싶다.
알렉세이의 자지가 들어올 때마다 아인의 납작한 배가 울퉁불퉁하게 솟아올랐다. 이렇게 거대한 걸 배에 넣어도 달콤이가 무사한 게 신기했다.
아이를 앞세워 어떻게든 잠자리를 피할 수 없을지 다알리아에게 물어봤는데, 불행히도 불가능했다. 임신한 오메가에게 알파의 페로몬과 체액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망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알렉세이와의 섹스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제 뒤로 하는 섹스가 익숙하다 못해 기분 좋았다. 그래도 뭐든지 적정선이 있었다.
눈만 마주쳐도 헉헉거리며 뒤에 달라붙어서 쑤셔대면, 자신같이 방구석을 벗어나지 않는 허약한 멸치는 죽어났다. S급 에스퍼와 어울릴 거면 아인도 가이드가 아닌 A급 에스퍼 정도는 돼야 했다.
아무튼 아인이 얼마나 초능력자와 섹스하기 힘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알렉세이의 자지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주먹만 한 귀두가 오메가 스팟을 대놓고 퍽퍽 때려댔다. 아인은 페니스로 아무것도 뿜어내지 못해 괴로웠다.
“흑흑. 흑.”
구멍이 열상을 입어 뜨끈해졌다. 자지를 꽉 물고 있는 그곳이 실시간으로 부어가는 게 느껴졌다. 알렉세이가 우는 아인을 뒤집어서 똑바로 눕혔다.
혀로 젖은 뺨을 다정하게 핥았다. 물론 좆물을 싸기만 하면 부풀어 오르는 그의 개좆은 인성이 없었다. 그가 난폭하게 아인의 배 속을 자근자근 다졌다.
알렉세이는 허리를 기준으로 완전히 다른 성격이 되었다. 상체는 더할 나위 없이 자상한데, 하반신은 쌍놈의 새끼였다.
“그만 싸요. 나 힘들어. 으응. 읏.”
아인이 말하는 동안에도 알렉세이의 좆질은 계속됐다. 그가 힘드냐면서 아인의 다리를 들어 올려 단단히 팔 사이에 끼웠다. 좆에 박힐 때마다 아인의 작은 발이 허공에서 발차기를 했다.
자신이 현대에서 이 정도로 발차기 연습을 했으면 프로 축구 선수가 됐을 듯싶다. 적어도 그와 섹스하면서 자신이 만 번은 발차기를 했으리라 확신한다.
“해. 흑흑. 제발 싸란 말이야. 이 지루 새끼야.”
나중에는 신분제고 뭐고, 네가 황자면 다냐, 나는 이제 체력 고갈로 죽겠다고 반말을 했다. 알렉세이가 땀을 뻘뻘 흘리는 아인의 콧잔등에 잡힌 주름을 손으로 살살 만지며 웃었다.
“귀여워, 우리 아인이 너무 귀여워.”
이봐요, 귀여우면 일단 살려줘야 할 거 아닙니까.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기절한 척했다. 이러면 그가 물러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순진한 착각이었다. 아인이 깨어 있을 때는 눈치 보느라 절제하던 알렉세이가 송곳니를 뽐내며 씨익 웃었다. 처음은 입술이었다.
아랫입술이 개껌처럼 물어 뜯겼다. 연기하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참았다. 아인을 물어뜯으면서 동시에 좆질하기 힘든지 그가 드디어 구멍에서 빠져나왔다.
잔뜩 늘어난 주름이 제대로 오므라지지 않았다. 시뻘건 속살을 드러낸 채 애액이 질질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알렉세이가 입맛을 다시며 본격적으로 아인의 육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산채로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기분이었다. 아인은 눈을 꼭 감았다. 쇄골을 혀로 침 바른 다음, 그가 오물오물 씹었다. 겨드랑이에 얼굴을 파묻고 여린 피부를 빨아먹는가 하면,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히는 젖꼭지를 한입 크게 베어 먹었다.
갈비뼈가 훤히 드러난 몸통에 코를 문대면서 입맞춤도 했다. 그의 아이를 밴 배에는 아주 집요할 정도로 키스를 퍼부었다. 아인은 곰 앞에서 죽은 척하듯 알렉세이 앞에서 기절한 척 해봤자 효과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자연스럽게 깬 척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런데 힘없이 늘어진 다리가 무릎이 세워진 채 벌려졌다. 회음부를 빨아먹다가 사타구니로 이동한 알렉세이가 송곳니로 그곳을 콱 물어뜯었다.
“아악. 아파. 흑. 아파!”
깨물린 사타구니가 아파 죽겠는데 구멍에 손가락 세 개가 한꺼번에 밀어 넣어졌다. 놀랍게도 아인의 페니스가 발기했다.
“아인아, 다시는 나 피하면 안 돼. 그게 이불이든, 기절한 척 연기하는 거든 다 안 돼. 너 아무 데도 도망 못 가.”
아인은 울면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알렉세이가 그제야 웃으면서 아인을 놓아줬다. 진짜 미친 사이코패스 같았다. 방금 전까지 아인을 아프게 만든 주범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아인을 추슬러 안은 알렉세이가 아인의 입에 힐링 포션을 물려서 먹였다. 아인이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듯 움찔거리면 서늘하게 경고했다. 꼼짝없이 알렉세이에게 안긴 채 아인은 창문이라고는 하나 없는 밀실을 둘러봤다. 아름다운 풍경화들이 걸려 있어서 다행히 갑갑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원작 소설에서 제이콥은 이곳에 감금돼 하루 종일 알렉세이의 정액을 받아냈는데, 자신은 안 그래서 다행이었다. 아인은 자신이 지금 감금 중이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알렉세이에게 부탁했다.
“알렉, 나 오늘 정원에 나가도 돼요?”
“왜 나가게.”
어딘가를 가는 건 개인의 의지에 의한 행위였다. 어린아이가 혼자 집 밖으로 나가겠다고 부모님께 허락을 받는 게 아닌 이상, 다 큰 성인이 타인에게 그걸 허락받는다는 건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은 알렉세이가 한 변명을 믿었기에 그리 물었다. 2황자 호라이슨이 자신을 위협한다니까 조심해야지, 하면서 알렉세이의 계략대로 순조롭게 길들여진 것이다.
“너무 답답해서요. 친구들 불러서 오랜만에 티 타임 가질까 해요.”
“그래, 내 시선 안에만 있으면 외출해도 괜찮아.”
그의 말은 마치 아인의 자유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위선이었고, 기가 막힌 기만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아인은 활짝 웃으면서 오랜만에 외출한다고 기뻐했다. 신이 나 통신 마도구를 가져와 오메가 친구들을 황궁으로 초대했다.
“아인아, 이리 와.”
그는 통화를 끝낸 아인을 꼭 끌어안았다. 알렉세이는 자신의 가이드가 그가 만들어준 새장을 세상의 전부라고 여길 수 있도록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것이다.
아인의 목덜미에 새겨진 그의 이름도, 그들의 영혼을 한데 묶은 본딩도 완벽한 사슬이 아니었다. 아인은 무려 알렉세이로부터 세 번이나 도망치려고 했다. 처음은 암살자에게 위협을 느껴서, 두 번째는 호라이슨이 이간질을 해서, 세 번째는 이번 매칭률 검사 때.
매번 저를 떼어놓고 가려고 드는 아인 때문에 알렉세이는 매우 불안하고 불안했다. 제논이 어린 알렉세이를 두고 죽었을 때 느꼈던 공포와 무력감과 비교해도 전혀 모자람 없었다.
다행히 아인은 지금 자기가 감금당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품에 안은 아인을 들여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햇살이 탐스러운 오후 3시,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캐모마일이 잔디처럼 듬성듬성 자라 흉측한 1황자 궁에서 작은 티 파티가 열렸다.
시종장은 1황자가 사랑하는 가이드가 직접 초대한 귀빈들을 대접하느라 바짝 긴장한 채 밀크티를 찻잔에 따랐다. 아인의 잔에는 얼음을 가득 채우고 복숭아 주스를 따랐다.
보모들과 함께 온 오메가들과 아이들로 인해 1황자 궁은 시끌벅적했다.
“카인, 아빠가 뛰지 말라고 했지!”
프란츠가 친구들 만났다고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뛰어노는 어린 아들에게 화를 냈다. 카인이 혀를 내밀어 아빠를 골렸다. 골치가 아프다는 듯 프란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누굴 닮아서 저러는지 모르겠다니까.”
“누구긴 누구야. 너 똑 닮아서 그렇지. 프랑, 네가 후작 각하 속을 얼마나 썩였는지 기억 안 나?”
말썽꾸러기 아들에 대해 하소연하는 프란츠를 보고 친구들이 과거 이야기를 하며 놀렸다. 하하하하. 프란츠 몰이를 하느라 친구들과 웃고 있는데 뺨이 따끔거렸다.
아인은 햇빛이 너무 강한가 싶어 의자를 그늘 쪽으로 좀 더 당겨 앉았다. 보모에게 얌전히 안겨서 자고 있던 제레미의 아기가 깨어나 울음을 터트렸다. 제레미는 익숙하게 상의 단추를 풀고 젖을 먹이려다가 1황자 쪽을 힐끔 쳐다봤다.
“아인아, 네가 자리 좀 피해달라고 하면 안 돼?”
“응? 무슨 자리?”
“1황자 전하 말이야. 도대체 아까부터 왜 계속 저기에 계신대?”
그늘에 숨었는데도 자꾸 뺨을 콕콕 찌르는 감각이 왜 계속될까 싶었는데, 알렉세이의 시선이었나 보다. 아인은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 사실을 저 혼자만 뒤늦게 알아차렸다.
“알렉, 제레미가 젖 먹여야 한대요. 자리 좀 비켜주세요.”
“시종장은 제레미 남작을 내실로 안내하도록 해.”
아인은 알렉세이가 참 배려심 많다고 생각했다. 이 자리에서 알렉세이만 빼면 다 오메가이기는 하지만, 타인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는 건 창피한 일이니 말이다.
물론 실상은 알렉세이가 아인과 계속 있고 싶은 마음에 제레미를 보내버린 거에 불과했지만, 진실이 어쨌든 알렉세이는 아인에게 호감을 살 수 있었다.
“아인아, 불편해서 그런데 우리끼리만 대화하면 안 될까?”
“아! 미안. 많이 불편했어?”
아인은 슈리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알렉세이에게 잠깐 자리를 피해달라고 말했다.
“아인아, 내 시선 안에서만 외출을 허락한다고 했을 텐데.”
아인은 알렉세이와 슈리아를 번갈아 봤다. 그들 사이에서 전기가 빠지직 튀는 것만 같았다.
“1황자 전하, 설마 우리 아인이 감시하시는 건가요? 아인아, 너 혹시 감금당하고 있어?”
다혈질 슈리아는 결코 속에 있는 말을 담아두지 않았다. 아인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총대를 메고 그녀가 해 친구들의 속이 시원해졌다.
“어? 어… 나? 아, 나 감금된 거였어?”
아인이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알렉세이의 은회색 눈동자가 살벌하게 빛났다. 그와 눈이 마주친 아인의 친구들이 하하하 웃으며 농담이라고 말을 뒤집었다.
권력의 힘이었다. 친구들은 그럴 일 있겠냐며 본인 안위를 직시하게 된 아인의 눈을 다시 가려버렸다.
“1황자 전하처럼 자상한 알파가 널 감금할 리 없잖아.”
“응. 그런 거 같아. 나한테 복숭아도 주고, 딸기도 주고, 멜론도 줘.”
아인의 다정함에 대한 기대치는 상당히 낮았다. 현대에서 양부모가 패악질로 아인을 괴롭힌 탓이었다.
“아인이는 정말 좋겠다. 매일 사랑하는 알파랑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해서.”
“그런가? 좀 귀찮긴 한데… 맞아. 난 정말 행운아 같아!”
가볍게 위기를 넘긴 알렉세이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찾은 가이드인데… 방심하고 있다가는 또다시 깡충깡충 뛰어서 도망가 버릴지 몰랐다.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
약속 시간보다 한참 늦게 도착한 제이콥이 친구들을 보자 헐레벌떡 뛰어오는 척했다.
“아니야. 콥콥아. 어서 와.”
아인은 반갑게 제이콥을 맞이했다. 메인수를 가까이 두는 악역수라니! 원작 비틀기가 바로 이런 거지 싶다.
친구들이 제이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번에 안달리시아 공작과 결혼한 배우자 오메가였기 때문이었다. 젖을 물리곤 온 제레미도 호들갑을 떨며 제이콥을 반겼다. 친구들이 아인에게 제이콥을 소개받길 원했다.
“인사해. 여기는 다들 알지? 이번에 공작 부인이 된 제이콥 안달리시아야.”
평민이었던 제이콥이 허리를 숙여서 친구들한테 인사했다. 아인은 그러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콥콥아. 우리 친구 하기로 했잖아. 공식 석상도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 그렇게 불편하게 굴면 어떻게 친해져. 우리 모임의 규칙 첫 번째, 반말하기야. 어서 말 놔.”
“네. 도련님, 앞으로 말 놓을… 핫!”
“이 자리에서 알렉 빼고 네 직위가 제일 높아. 다른 곳에서도 이렇게 굴면 나한테 혼날 줄 알아.”
아인은 다시 존댓말을 하는 제이콥의 입에 쿠키를 쑤셔 넣었다. 앙상하게 말라서 훈남이 된 제이콥이 쿠키를 잘 받아먹었다. 입에 든 쿠키를 다 먹은 제이콥은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고 말을 놓았다. 아인의 친구들은 제이콥에게 왕성한 호기심을 보였다.
안달리시아 공작은 유르한 제국에서 철벽남으로 굉장히 유명한 알파였다. 모두들 제이콥과 공작이 어떻게 연인이 되었는지 궁금해했다. 아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저로 집착광공을 떠먹여 줬음에도 탈주해버린 메인수였다. 전혀 엉뚱한 알파와 결혼하게 된 뒷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내가 페르디안 백작저에서 시종 일을 그만두고 추천서를 받아 안달리시아 공작저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알렉세이는 제이콥의 뻔뻔한 말에 어이없었다. 누가 보면 진짜 시종인 줄 알겠다. 아인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비슷한 아픔을 가진 오메가를 보내놨더니, 막내 삼촌의 오메가가 되어 돌아올 줄이야.
“저택에서 일하는 시종들이 텃세를 부리더라고. 속상한 마음에 밤에 엉엉 우는데, 공작님이 나타나 무슨 일이냐고 묻더라. 그래서 산처럼 쌓인 감자를 가리키며 오늘 밤 안에 다 깎지 못할 것 같아서 울었다고 말했지.”
친구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공작님께서 그때 첫눈에 반한 거냐고 물었다.
“아니. 시끄러우니까 아가리 닥치라고 하대. 한 번만 더 시끄럽게 굴면 입을 확 찢어버린다고 했나?”
“헉!”
아인과 친구들을 물론, 조용히 공작 부부의 러브 스토리를 귀담아듣던 시종들조차 너무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제이콥은 별로 대단할 것 없다는 듯 웃어 보이며 두 손으로 큰 가슴을 모아서 흔들었다. 천박한 유혹이었으나 용감한 오메가가 부자 알파를 차지한다는 교훈이 담긴 몸짓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랬지. 주둥이든, 구멍이든 공작님 자지 넣어서 찢어 달라고. 그러니까 결국 못 참고 옷을 벗어 던지더라고. 하여간 알파란 것들은. 쯧쯧.”
아인은 존경심을 담아 제이콥을 우러러봤다. 역시 <집착광공은 능욕을 멈춰!>에서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마성의 옴므파탈다웠다.
“그랬더니 아직도 좆질로 내 주둥이랑 구멍을 찢어먹을 것처럼 계속 덤벼드네. 아주 힘들어 죽겠어. 무슨 놈의 새끼가 365일 러트야. 나 한 달 사이에 15kg이나 살 빠진 거 있지.”
날씬해진 제이콥의 비밀은 과도한 성생활 후유증이었다. 아인은 눈을 굴려 제 몰골을 확인하고 제이콥을 살폈다.
원래 말랐던 아인은 오히려 살이 붙었다. 아이를 임신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워낙 알렉세이가 아인에게 밥 먹이기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처럼 수행한 탓이었다. 그래서 자기 꼴과 정반대인 아인을 보고 제이콥은 오해했다.
“아인이는 좋겠다. 1황자 전하께서 너 가만히 내버려 둬서.”
은근슬쩍 먹이는 거였지만, 아인이 알아들을 리 없었다.
“아니야. 나도 얼마나 시달리는지 몰라. 밤새 잠도 못 자고, 아침에도 알렉이 일하러 가려다가 달려들어서 얼마나 힘든데.”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아인은 진실을 말해 제이콥에게 반격을 가했다.
“어휴~, 하여간 이것들 잘난 척하기는. 어디 알파한테 사랑 못 받는 오메가는 서러워서 살겠어?”
그리고 친구들은 아인의 의도와 달리 곡해해 들었다. 아인은 시무룩해져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인의 고통은 같은 처지인 제이콥만이 공감해줬다.
“아인아, 오해해서 미안. 네 때깔이 너무 좋아서 편하게 사는 줄 알았어.”
“응. 콥콥아. 우리 비슷한 처지인데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자.”
아인은 제이콥과 악수를 했다. 그에게 친히 잉잉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애칭을 허락했다. 알렉세이는 오메가 둘이 하는 짓이 너무 어이없어서 그들을 떼어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말았다.
그가 나서기 전에 아인과 제이콥이 양손 깍지를 풀었다. 오메가들의 수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아인은 주스를 마시는 내내, 어마어마한 양의 간식과 과일을 먹어 치웠다.
예전과 달리 식탐을 보이는 아인의 변화에 그제야 친구들은 오늘 만나면 꼭 물으려고 했던 질문을 상기해냈다. 언제나처럼 슈리아가 친구들의 대변인 노릇을 했다.
“아인아, 기분 나쁠 수 있는 질문인데 하나만 물어도 돼?”
“응. 뭔데?”
“너 혹시 임신했어?”
“우와, 어떻게 알았어? 다들 출산 경험자들이라 알아본 거야?”
아인의 대답에 친구들이 ‘역시!’를 외쳤다.
“너 매칭률 검사할 때, 매직 미러로 봤거든. 그때 진통제를 안 먹어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네.”
“축하해, 아인아. 너 페로몬 냄새 안 나서 안심이다.”
“각인했으면 무조건 결혼이지.”
“결혼은 언제 할 거야? 이번 달에는 폐하 탄신일 있으니까 몇 달 걸리려나?”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친구들의 질문에 아인은 차근차근 대답했다. 어느새 알렉세이가 곁으로 다가와 아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마치 이미 부부가 된 알파처럼 말이다.
제이콥은 처음 만난 오메가들이었지만 그들과 어울리는 게 몹시 즐거웠다. 숨이 찰 정도로 웃으며 대화하는데 등골이 서늘해 뒤돌아봤다. 2황자 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새라도 날아 들어왔는지 넝쿨 담장이 흔들렸다.
제이콥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다시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
재빨리 몸을 숨긴 호라이슨은 숨어서 아인과 친구들을 지켜봤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웃는 아인, 그리고 아인을 사랑하는 알렉세이, 아인의 배 속에 있는 아기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눈을 감고 상상했다. 저기 있는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고. 호라이슨은 알렉세이의 피부를 벗겨서 죽여 버리고 싶은 한편, 그의 가이드로서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아직까지 품고 있었다.
새까맣게 다 타버린 재라고 할지라도 불꽃의 흔적으로 열기가 남는다. 사라진 사랑에도 검은 그을림이 있다. 호라이슨에게 남겨진 재는 영혼을 불태워 죽일 것처럼 아직 뜨거웠다.
그것에 호라이슨이 다 불타서 죽기 전, 어서 빨리 아인과 몸을 바꿔야 했다. 그는 납작한 배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
알렉세이는 쥐새끼처럼 염탐하러 온 호라이슨의 기척을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가뜩이나 예민했던 감각이 2차 각성을 하면서 폭발적으로 예민해진 덕이었다.
아마 아인이 없었다면 그는 2차 각성을 하자마자 이 예민해진 감각 때문에 쇼크로 죽거나 폭주해버렸을 것이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인의 닉스가 알렉세이를 편안하게 해줬다.
성질 같아서는 자신의 궁에 숨어든 호라이슨의 모가지를 자르고, 심장을 뽑아내 버리고 싶었다. 알렉세이에게 타인의 목숨은 개미만도 못했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 데에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조세핀은 그런 알렉세이의 잔인한 성정을 걱정하며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했다. 만일 그가 오리하르콘 벙커에 갇히지 않아 그를 불쌍하게 여긴 조세핀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알렉세이는 지금쯤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패왕의 길을 가긴 몹시 쉬었다. 그에겐 황제도, 황후도, 2황자도 모조리 죽이고 이 나라를 지배할 능력이 있으니 말이다.
그동안 그에게는 수많은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호라이슨을 손쉬운 방법으로 제거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제논을 죽이러 온 황제와 자신이 다르다는 걸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살기를 숨기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알렉세이를 두고 조세핀은 제논을 죽인 황제와 무엇이 다르겠냐며 혼냈다. 길들여지지 않는 어린 짐승은 황제가 죽도록 싫어서 인간 탈을 뒤집어썼다.
물론 이 인간 탈은 완벽하지 못했다. 가끔 알렉세이는 본모습을 드러내 주변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그렇지만 제논의 복수를 위해 최악의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고지가 눈앞에 있었다. 괜히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호라이슨을 죽여서 황제 같은 새끼가 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알렉세이는 이제 가이드가 생긴 몸이었다. 조심 또 조심하며 더욱 완벽하게 ‘착하고 무해한 능력자’ 탈을 뒤집어써도 모자랐다.
알렉세이의 가이드는 겁이 많았다. 아주 많이 작고 귀여워서 그런 듯했다. 기디언을 욕실에서 고문했을 때, 그는 아인이 자신을 두려워할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 아인을 위한 복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인은 알렉세이의 폭력이 자기를 향한 것이 아님에도 겁을 먹었다. 아인에게는 그 순간 알렉세이가 조세핀이 말한 ‘황제 같은 놈’이었던 것이다.
다시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호라이슨이 떠난 자리를 불태워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눌렀다.
아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친구들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알렉세이는 살짝 자리를 빠져나와 기사들에게 더욱 궁 주위 경계를 삼엄하게 하라 명령을 내렸다. 필요하다면 케르베로스 기사단에서 인력을 더 가져다 쓰라고 했다.
아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알렉세이가 복수를 하더라도 무의미했다.
호라이슨의 등장으로 누군가가 아인을 훔쳐 가고, 해하고, 죽일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시끄러운 꼬맹이들을 데리고 드디어 오메가들이 떠났다.
알렉세이는 침실에 아인을 안전하게 데려다주고 복도에 시종들을 집합시켰다. 2황자 세력이 보낸 첩자들을 다 죽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궁에 배신자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앞으로 아인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을 전부 기미할 거라고 말했다. 기미할 시종 다섯 명을 뽑아 30분 동안 상태를 지켜본 뒤, 무사하면 아인에게 음식과 마실 것을 올리라고 했다.
그렇게 조치를 취했는데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괜히 주방에 찾아가 분탕질을 치고, 조세핀에게 연락해 조언을 구했다.
조세핀은 아인을 잠시라도 페르디안 백작저에 돌려보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2황자의 눈에서 치우는 쪽이 나을 거란 의견이었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아인과 한순간도 헤어지고 싶지 않아 그 제안이 내키지 않았다.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고 거절하는 알렉세이에게 조세핀이 본심을 드러냈다.
“1황자 전하, 연인을 감금하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이에요. 사람을 억압하는 걸로는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어요. 그를 1황자 전하 곁에 영원히 머물게 하고 싶거든, 그의 사랑을 얻으 세요.”
“…아인은 몰라. 자기가 감금당하는 것도.”
“뭐, 눈치가 썩 좋아 보이지 않긴 하더군요. 그렇지만 임신 중인 오메가이지 않습니까. 감정 기복도 심할 테고, 부모님도 얼마나 보고 싶겠습니까. 한 곳에 갇혀 있는 게 얼마나 정신 건강에 나쁜지 1황자 전하도 아시잖아요.”
알렉세이는 아인을 보내주기 싫었다. 발을 구르며 조세핀에게 화내고 싶었다. 왜 자신한테서 아인을 빼앗아가려고 하냐며 조세핀의 목을 조르고, 끝내는 저를 키워준 사내를 죽이는 상상까지 해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짜증 나도 조세핀의 말은 항상 옳았다.
“알았어. 돌려보낼게.”
“잘하셨습니다. 제논이 이런 1황자 전하를 봤으면 잘 컸다고 무척 뿌듯해했을 거예요.”
조세핀은 항상 같은 칭찬으로 사나운 짐승을 조련했다.
알렉세이는 기운 없이 침실로 돌아왔다. 친구들과 있을 때, 태양처럼 빛났던 아인의 미소를 떠올렸다. 그 웃음을 지켜주기 위함이니, 보내기 싫어도 참고 아인이 자신을 두고 도망가지 않을 것임을 믿어야 했다.
“아인, 집에 갈래?”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던 아인이 벌떡 일어났다. 복숭아를 하도 먹어서 달달한 과육 냄새가 나는 그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네! 나 이제 집에 가도 돼요?”
그가 너무 기뻐 보여서 알렉세이는 우울했다.
“응. 당분간 우리 결혼하기 전까지 가 있어. 그 전에 내가 상황 다 정리해둘게.”
아인은 알렉세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랐지만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나가 주고 간 잉잉이 인형을 챙겨 들었다. 알렉세이는 공간 이동 능력으로 아인을 데려다줘도 됐지만, 최대한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마차를 이용해 그를 데려다줬다.
아인이 마차 창밖을 내다보며 소풍 가는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의자에 앉아서 발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기분이 좋은지 활짝 웃은 아인이 알렉세이를 꼭 끌어안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알렉세이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조세핀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새장 안에 갇힌 새가 본인의 처지를 모른다고 할지라도 한 번쯤은 새장 문을 열어줘야 했던 거다.
이렇게나 자신을 좋아해줄 줄 알았으면 진작 풀어주는 척할 걸 그랬다. 앞으로는 적당히 풀어줘야겠다.
알렉세이는 상대를 구속하는 행위가 꼭 물질적, 공간적 제약만 뜻하지 않음을 배웠다. 곁에 두려면 사랑을 얻으라는 조세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아인과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해 순식간에 마차가 페르디안 백작저에 도착했다. 경비처소에서 관찰 마도구로 마차를 발견한 시종장이 확성기에 대고 물었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아인 페르디안을 데려왔다.”
“아이고, 도련님!”
알렉세이의 말에 시종장이 호들갑을 떨었다. 저택의 대문이 열리고 백작 부부가 달려 나왔다. 시종들과 시녀들 또한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도련님을 맞이하기 위해 대열을 갖췄다.
“아인아!”
레이나가 마차에서 내린 아인을 끌어안았다. 알렉세이는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간 아인을 보며 마음 한편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는 돌아갈 부모님이 없었다.
“1황자 전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샤를 백작이 제 아들을 돌려준 알렉세이에게 연신 허리를 숙였다. 궁에 방문했을 때, 알파 사위 취급해주더니만 속으로는 자기 아들을 납치한 범죄자쯤으로 여기고 있었던 거다.
아인이 이대로 떠나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봐 살짝 겁났다. 이제라도 돌려보내지 못하겠다고 다시 끌고 갈까 했다가 마차 안에서 자발적으로 그를 끌어안았던 아인을 떠올렸다.
“백작저에 보호 마법이 걸려 있어서 내 가이드의 안전을 위해 잠시 맡기는 거다.”
“예, 알겠습니다.”
“내 오메가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너희 아들이기도 하지만, 내 오메가라고.”
무엇이 그렇게 불안한지 알렉세이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한 뒤에야 아인을 놓아주었다. 마차에 올라타 아인이 부모님과 저택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한참 지켜봤다.
그를 놓아주고 홀로 궁으로 돌아오는 길, 알렉세이는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내렸다.
***
주다는 어떻게든 세뇌 능력을 개화시키기 위해 연습에 매진했다. 2차 각성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하는 헛짓이었다. 엘리자베스가 훈련실 문을 열고 쳐들어왔다.
과도한 정신계 능력 훈련으로 주다의 몸이 붕괴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다가 코피를 멈추지 않고 흘렸다. 그녀가 화내면서 주다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도대체 무슨 짓이야, 미쳤어? 죽고 싶으면 훈련실에서 죽지 말고, 내 눈 안 띄는 곳에서 죽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엘리자베스. 그분을 돕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무슨 일인데… 너야말로 무슨 일이냐고.”
주다는 대답하지 않고 엘리자베스의 손을 뿌리쳤다. 자살할 마음이 없었기에 가이딩실로 향했다. A급 가이드들이 호라이슨에 의해 많이 살해당한 탓에 B급 가이드만 보였다.
주다의 에테르 오염도를 측정한 B급 가이드들이 입맞춤으로 닉스를 넘겨주려고 했다. 주다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포옹으로 가이딩해 줄 걸 부탁했다.
가이드 다섯이 돌아가면서 주다를 끌어안았다. 포옹 가이딩은 효율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여전히 혈관에서 날뛰는 에테르 때문에 괴로웠지만 다행히 코피는 멈췄다.
상의가 온통 피로 물들어 주다는 기사단에 딸린 샤워실에 들렀다. 그가 샤워를 끝마치고 나올 때까지 복도에 서서 기다리던 엘리자베스의 간절한 눈빛을 주다는 모른 척 지나쳤다.
호라이슨에게 흑마법사를 찾고 있다고 말해두긴 했으나 그가 언제까지 기다려줄지 모르겠다. 주다가 찾아오지 않으면 그는 혼자서라도 영혼을 바꿔줄 흑마법사를 찾을 테다.
세뇌 능력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되는데, 어떻게 해야 그 능력을 개화시킬 수 있을까. 스스로의 무능함에 환멸을 느꼈다.
‘S급 에스퍼인 1황자 전하라면 손쉽게 호라이슨 님의 기억을 조작해줄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였을까. 발이 저절로 움직여 알렉세이가 있는 모래궁까지 흘러 들어오고 말았다. 주다는 얼른 뒤돌아 돌아가려고 했다가 예전 주인과 마주치고 말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주다를 무겁게 짓눌렀다.
1황자와 눈이 마주치지 않게 시선을 내리깐 채 경례를 올렸다.
“오랜만이야.”
“예, 주군. 주다 에르펜서. 당신의 개가 인사 올립니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이제 내가 네 주군은 아니지.”
신랄한 꾸짖음임에도 농담처럼 가벼운 말투였다. 전혀 화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주다는 자신이 변절한 첩자임을 알면서 그가 왜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두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배신자가 주제넘게 그런 질문을 할 순 없다.
“왜? 궁금해? 내가 널 왜 안 죽이는지?”
어떻게 속마음을 꿰뚫어 봤을까. S급 에스퍼란 엄청난 능력자 앞에서 주다는 기를 펴지 못한 채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게 내가 바라는 네 임무니까.”
의아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은회색 눈이 주다의 눈을 들여다봤다.
“2황자를 사랑해 날 배신하고 그 녀석의 신임을 얻는 것. 그래서 가장 가까이서 2황자의 정보를 아는 측근이 되는 것 말이야.”
알렉세이의 입꼬리가 위로 부드럽게 솟아올랐다. 주다가 호라이슨을 사랑하게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었으나 어차피 도박이었다.
자신의 기사들 중 한 명이 의아할 정도로 2황자에게 오랫동안 시선을 주었다. 그래서 알렉세이는 그동안 다른 첩자들이 해내지 못한 정보를 가져올 이중 첩자로 주다를 골랐다.
마음이 흔들려서 알렉세이를 배신한다면 원하던 대로 움직이는 말이 되어줄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고 해도 첩자 노릇 하는 주다에게서 적당한 정보를 얻겠지 싶었다. 알렉세이 입장에서는 무엇 하나 손해 볼 것 없었다.
“그래서 주다. 내가 알아야 할 게 있을까.”
당당하게 네가 배신한 게 자신의 의도였음을 밝힌 알렉세이가 세뇌 능력을 사용했다. 주다는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2황자가 오리하르콘 벙커에서 나왔습니다.”
알렉세이가 짜증을 냈다.
“그딴 건 나도 안다고. 이 나라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보지? 쓸모없긴. 가봐.”
주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알렉세이가 그를 놓아주지 않는 한, 주다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누구를 배신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알렉세이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주다와 헤어지고 자신의 가이드를 내보내야 했던 불편한 심기를 공격적인 페로몬으로 드러냈다. 그래봤자 각인한 그의 페로몬은 그 누구도 맡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알렉세이는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아인의 페로몬이 맡아져 얼른 알파 페로몬을 거둬들였다. 오메가 페로몬이 알파 페로몬에 의해 사라지면 안 됐다.
침대에 누워서 벽에 걸린 풍경화들을 구경했다. 아인의 그림은 귀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원래 주인들에게 팔아 버린 탓에 그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었다.
후회되어도 이미 지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애타게 아인의 흔적을 그리워하던 알렉세이는 머릿속에 처박아두고 있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바로 자신이 아인 페르디안의 자화상을 따로 치웠던 일에 대한 거였다. 아인이 자화상에 피눈물을 그려 넣어서 닉스를 빼먹지도 않은 작품을 내렸었다.
기억을 떠올린 알렉세이는 성큼성큼 걸어 빈방에서 자화상을 찾아왔다. 이거라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흉측한 자화상을 유명한 화가가 그린 아름다운 풍경화를 떼어내고 벽에 걸었다. 자다가 가위에 눌릴 것만 같은 작품이었지만 알렉세이는 아인의 냄새가 난다며 코를 킁킁거리며 좋아했다.
어차피 밤에 페르디안 백작저 3층에 있는 테라스에서 몰래 잠잘 거지만, 그전까지는 이것으로 아인이 없는 시간을 버텨야 했다.
***
1황자와 헤어진 주다는 혼자가 되자마자 발걸음을 빨리해 모래궁을 빠져나왔다. 알렉세이가 그에게 세뇌를 걸었으나 그때 주다는 능력에 당하지 않은 상태였다.
에스퍼들은 자신이 가진 능력과 똑같은 능력을 가진 다른 에스퍼에게 당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불을 다루는 에스퍼는 자신이 다루는 불에 해를 입지 않기 위해 그 능력에 내성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내성은 똑같은 능력을 가진 다른 에스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알렉세이의 세뇌 능력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다가 세뇌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2차 각성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세뇌 능력을 개발하겠다며 무리한 훈련을 감행한 탓에 등급이 떨어진 것 같다. 레아에 무리가 간 상태로 알렉세이와 대치한 후유증이리라.
혹시나 하고 은신 능력을 발동해봤지만 결계가 열리지 않았다. 바람궁 복도로 시종이 지나갔다. 주다는 그 시종 앞에 멈춰 서서 눈을 마주쳤다.
“손 들어.”
시종이 손을 들었다. 주다는 세뇌 능력을 풀었다. 시종은 본인이 방금 무슨 짓을 한지 모른 채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주다는 마지막으로 개인 아공간에 저장해둔 아이템을 확인했다. 전부 사라져 버렸다.
역시 등급이 떨어져 새로운 레아를 가지게 된 거였다. 아이템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 또한 절반 크기로 줄어 있었다.
진작 희박한 확률인 2차 각성에 목을 매지 말고 이럴 걸 그랬다. 물론 운이 나빴다면, 등급도 떨어지고 세뇌 능력도 얻지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강한 에스퍼가 돈과 권력을 가지는 유르한 제국에서 이는 굉장한 불행이었지만 주다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열 보 전진을 위해 한 보 후퇴한 것뿐이었다.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희생 또한 필요한 법이었다. 알렉세이 또한 흔들리지 않는 목표가 있었고, 마침 움직일 수 있는 말로 주다를 썼을 뿐이었다.
아마 그가 알렉세이와 같은 위치였다면, 주다도 자신을 썼을 것 같다. 2황자를 보는 눈빛을 숨기지 못한 본인 잘못이었다.
호라이슨에게 주다를 보낸 알렉세이를 그가 원망하지 않는 까닭은 동질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B등급으로 떨어진 주다는 웃었다. 고개를 돌려 정원을 복구하는 무리를 봤다. 정원사들이 쉼 없이 정원에서 죽은 흙을 퍼 날랐다. 비옥한 땅에서 퍼온 흙이 빈자리를 채웠다.
싱싱한 백장미 수백 그루가 수레에 실려 왔다. 주다는 주군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호라이슨이 장식장에서 도자기 인형을 꺼내 빗질을 하고 있었다.
주다는 호라이슨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능력을 발동시켰다. 알렉세이 유르한의 목표가 황제가 되는 거라면, 주다의 목표는 오직 하나, 바로 호라이슨 유르한의 행복이었다. 이를 위해서라면 주다는 사랑하는 그를 속이고, 기만할 수 있다.
***
“뭐야, 너. 누군데 함부로 들어와.”
호라이슨은 도자기 인형을 책상에 올려두고 어두침침한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에게 다가갔다.
“영혼끼리 교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고 들었습니다.”
손끝이 튀어 올랐다. 호라이슨은 제가 바라던 일이었으나 덜컥 겁에 질렸다. 하지만 순간의 망설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독한 한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 맞아. 그런데 내가 널 어떻게 믿고 그 일을 시키지. 알렉세이가 날 모함하기 위해 보낸 함정일지도 모르는데. 혹시라도 네가 날 위해 일하러 왔다고 해도, 나중에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잖아.”
의심이 많은 호라이슨이 손에 불꽃을 피워 올렸다.
“아니면 너같이 유능한 흑마법사가 이렇게 쉽게 제 발로 찾아올 리 없으니, 네 능력이 거짓일 수도 있겠군.”
흑마법사는 두 손을 들어 공격 의사가 없음을 표했다. 그는 바라는 것이 있어서 왔을 뿐이라고 답했다.
“무엇을?”
“아름다운 당신과 자고 싶어서요.”
“하!”
어이없다는 듯 호라이슨은 조소했다. 흑마법사도 그를 원하는 수많은 사내들과 같았다. 오히려 너무나 흔하게 받아온 요구였기에 흑마법사의 말이 진실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오메가는 처음 봐요.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해 왔습니다.”
더러워. 호라이슨은 흑마법사의 고백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목을 졸라서 죽이고, 피부를 벗겨내 버리고 싶었지만 그가 진짜 영혼을 교환할 수 있다면 죽이면 안 됐다.
“네가 진짜 그런 능력이 있는지 나한테 증명해 봐. 영혼을 바꿀 수 있다는 걸 확인하면, 바로 같이 자줄게.”
“안타깝게도 쉽게 증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영혼을 바꾸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금기 마법이거든요.”
“흥. 그럴 줄 알았어. 하여간 너 같은 사기꾼이 어떻게 재주 좋게 내 궁에 기어들어 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만 죽어주길 바라.”
호라이슨은 손에 있는 불꽃을 흑마법사에게 날렸다. 이상하게 그의 몸이 불타지 않았다. 같은 자연계 불 능력자인가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 봤다. 살타는 냄새가 나는데 모습은 멀쩡했다.
대단한 흑마법사여서일까?
불꽃을 거둬들였다. 호라이슨은 손으로 흑마법사의 로브 후드를 걷어냈다. 피부가 흉측하게 녹아내려 있었다.
멀쩡했던 흑마법사의 모습이 사라지고, 옷 하나 남기지 않고 탄, 화상 입은 남자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세뇌 능력이 풀려 버린 것이다.
호라이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다?”
“…내 눈을 봐. 네가 보고 있는 건 흑마법사야. 네 바람을 이뤄줄 단 하나의 존재.”
명확했던 초점이 다시 흐려졌다. 호라이슨은 A급 에스퍼의 불꽃도 막아낸 엄청난 흑마법사의 능력에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군. 앞으로 내가 영혼 교환 마법을 위해 뭘 도우면 되지?”
“황제가 되어 왕관을 써주세요. 오직 유르한 제국의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왕관에 있는 보석이 영혼 교환을 위해 쓰이는 매개체입니다.”
호라이슨은 여태 황제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 정말 황제가 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1황자인 알렉세이를 짓밟기 위해서였다.
황위에는 욕심이 없었으나 알렉세이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건 좋았다. 만일 자신이 황제가 되면 그를 델리칸 공작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럼 자신은 아인의 몸을 차지해 공작의 반려자가 될 거다. 황자만큼은 아니어도 부족하지 않은 삶일 것이다. 마음에 드는 전개였다.
“좋아. 그것만 필요하나?”
“예. 그럼 2황자께서 황제가 되어 왕관을 쓰시는 날, 대가를 받으러 찾아오겠습니다.”
흑마법사가 기척 없이 나타났던 것처럼 홀연히 눈앞에서 사라졌다. 실상은 심각한 화상을 입은 주다가 방문을 닫고 도망치듯 빠져나간 거에 불과했지만, 세뇌에 걸린 호라이슨은 이를 볼 수 없었다.
주다는 방문을 닫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황제가 된 호라이슨은 흑마법사의 말이 거짓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겠지만, 주다는 그가 목표한 바에 도달할 수 있게 자신이 도운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쌕쌕 쉬었다.
“주다!”
엘리자베스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가 주다를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아공간에서 힐링 포션을 꺼내 입에 부었다.
어쩌면 하나뿐인 힐링 포션을 사용한 것 때문에 그녀가 던전 공략에 나갔다가 죽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그를 사랑해주는데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니.
병신 새끼다. 왜 바라봐 주지도 않는 문란한 오메가 따위한테 빠져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그는 자신에게 그 어떠한 감정도 내주지 않을 텐데….
하다못해 에스퍼와 에스퍼가 아닌 에스퍼와 가이드로 만났으면 어땠을까… 오메가와 베타가 아닌, 오메가와 알파로 만났으면? 그럼 호라이슨이 주다를 조금이라도 봐줬을까?
주다는 헛된 가정을 떠올리며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엘리자베스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흑흑. 나쁜 새끼. 지금 그딴 소리가 주둥이로 나오지?”
“진심이야. 널 많이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서 널 알아보지 못한 나 같은 새끼 눈 삐었다고 욕하면서, 보란 듯이 행복했으면 싶어.”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주다를 엄청 욕했다. 자신을 사랑할 마음이 없으면 아깝지나 말든가. 이렇게 잘생긴 새끼가 다정하기까지 하면 반칙이었다.
“내가 너 그분 곁에서 다치는 거 더 이상 보기 싫다고 하면, 그 감정 그만둘래?”
“아니.”
“그래, 알았어.”
엘리자베스의 눈물이 주다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무릎 위에 올려둔 주다의 머리를 내팽개쳤다.
“이제 멀쩡해졌으면 일어나. 나 너 때문에 힐링 포션 하나도 없어. 이제 너 나한테 목숨 빚진 거야.”
주다도 알았다. 엘리자베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눈물을 그쳤다.
“그러니까 대가 받아 간다. 개새끼야.”
눈물에 젖어 짜디짠 입술이 닿았다. 엘리자베스는 키스를 끝으로 첫사랑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그녀는 벌거벗은 주다에게 망토를 던져주며 말했다.
“이제부터 이 세상에서 제일 쪽팔리는 놈으로 만들어주마. 알몸에 망토만 두르고 2황자 전하 호위해. 너 변태 새끼인 거 소문나게.”
엘리자베스는 미련 없이 가버렸다. 그녀의 근무 시간이었지만 주다가 대체 근무를 섰다. 시종들이 복도를 지나가면서 주다를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검댕이 묻은 기사님이 망토를 걸쳤는데 하의가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어렸을 때 오줌을 싼 어린아이가 벌을 받는 모습 같았다.
엘리자베스의 바람대로 주다 에르펜서는 바람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변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