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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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아, 잘 돌아왔어. 그동안 많이 고생했지?”

레이나가 아인의 손을 꼭 잡고 군대 다녀온 아들처럼 그를 반겼다. 고생이라고는 시도 때도 없이 우성 알파와 해야 했던 섹스밖에 없었지만, 그거야말로 엄청난 고생이었다.

버블티 빨대에 다리 한 짝을 넣는 것과 구멍에 알렉세이의 자지를 넣는 것은 똑같은 난이도이니 말이다. 아인은 잉잉이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 오랜만에 페르디안 백작저에 들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이곳은 아인이 그리는 그림의 주제였다.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기에 저택 곳곳을 누비며 캔버스에 담았다. 그러다 아인은 전에 식당에서 봤던 아이를 계단 밑에서 발견했다.

자신이 괜한 오해를 해서 가출했지만, 부모님은 아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아이를 입양한 게 아니었다. 또 체사레가 자신의 동생이 된다고 해서 아인이 부모님께 버림받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가출 사건이 있고 나서 부모님과의 오해를 푼 아인은 체사레를 입양하는 일에 동의했다. 그리고 체사레는 입양되어 후계자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샤를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똑똑했다고 들었다.

‘이 애가 페르디안 가문을 잇는 거구나’

아인은 신기한 마음으로 체사레를 쳐다보다가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겁에 질린 체사레가 고개를 푹 숙였다.

샤를은 아인의 어깨를 끌어안고 말을 거느라 체사레가 마중 나온지도 몰랐다. 레이나 또한 아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해 체사레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신발 밑창으로 바닥을 긁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저는 체사레예요.”

시종들과 시녀들 또한 현관까지 우르르 몰려나와 있어 소란스러웠다. 아인은 소외당하고 있는 체사레가 과거의 자신 같았다.

진주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양부모의 눈치가 보여서 그럴 수 없었다. 양부모가 대놓고 아인을 무시하고 진주만 예뻐하자, 초등학생이 된 진주도 아인을 제 부모처럼 무시하고 부려 먹었다.

아인은 까치발을 들고 높은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했다. 진주의 책가방에 대신 준비물을 챙겨서 넣었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다른 아이들은 학원에 갈 시간에 청소기를 돌렸다. 밀대에 일회용 청소포를 꽂아서 청소할 수도 있는데, 환경을 생각하는 엄마 때문에 손 걸레질을 했다.

서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고아에게 잠잘 곳과 입을 것, 먹을 것을 제공해 주니 돈값을 해야 한다고 여겨서 버텼다. 혹시라도 저 아이도 자신처럼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봐 슬펐다.

“안녕! 난 아인이야, 네가 체사레니?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

큰 목소리로 명랑하게 인사했다. 체사레가 화들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물이 고여 있던 큰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는 변화가 감동적이었다.

체사레가 계단 밑에 생긴 그늘에서 샹들리에가 있는 밝은 양지까지 걸어 나왔다. 아이의 뺨은 기대와 수줍음으로 발그레했다.

“안녕하세요. 형. 저는 체사레예요.”

아이는 아인이 자기 인사를 못 들었을 거라고 여기고 한 번 더 인사했다. 그제야 부모님도 체사레를 발견하고 언제 나왔냐며 물었다.

“아이참, 아가. 왔으면 말을 해야지. 얼마나 찾았는지 아니.”

“체사레, 잘됐구나. 그동안 형을 많이 보고 싶어 했는데.”

샤를의 말에 아인은 호의를 가지고 체사레를 봤다. 체사레가 부끄러워하면서 대답했다.

“제가 골든 보이를 많이 좋아하거든요.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토끼 마을 바깥세상에서 친구를 사귀는 모습이 너무 멋져요.”

“아, 그렇구나. 좋아해줘서 고마워.”

알고 보니 자신의 팬이었다. 아인은 체사레의 시선이 자신이 들고 있는 잉잉이 인형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걸 느꼈다. 레이나가 탈세할 목적으로 재산을 준 거여서 단번에 인형을 주겠다는 말이 안 나왔다. 혹시 체사레도 이 보석들을 노리는 건가?

아인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사람 볼 줄 모르는 편이지만, 아이의 얼굴에 물욕이 없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필요한 건 보석뿐이고, 인형은 필요 없으니 수선해서 주면 될 듯싶었다.

바느질 솜씨가 좋은 시종에게 인형을 맡기고 보석을 단추로 바꿔달라고 부탁하려다가 그건 너무 치졸한가 싶었다. 하지만 보석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닐 테고, 이게 자신이 받는 페르디안 가문의 유산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줄 순 없었다.

한 팔로 잉잉이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 고민했다. 체사레의 눈에 제 것이 아닌 걸 탐해서는 안 된다는 체념과 포기가 암울하게 눌어붙었다. 아인은 어차피 자신은 그림 그려서 돈을 많이 버니, 보석을 포기하기로 했다. 레이나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엄마, 체사레한테 잉잉이 인형 줘도 돼요?”

“그럼. 우리 아인이 정말 멋진 형이네. 벌써부터 동생을 위해서 인형도 양보해주고.”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어서 약간 의아했다. 적어도 그게 네가 물려받을 유일한 가문의 유산이라는 말쯤은 할 줄 알았는데… 아!

아인은 제 생각이 가진 심각한 오류를 깨달았다. 레이나가 이게 아인이 가문에서 받는 상속물이라고 한 번도 말한 적 없다는 걸 말이다.

‘설마 진짜 스무 살 아들한테 토끼 인형이 필요할 것 같아서 가져온 거였어?’

얼른 체사레에게 잉잉이 인형을 넘겨버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애지중지했다.

“감사합니다. 형.”

체사레가 토끼 배에 얼굴을 파묻었다. 샤를은 항상 다 큰 어른처럼 의젓하게 굴던 체사레가 드디어 제 나이에 걸맞은 행동을 해 놀랐다.

샤를은 그동안 체사레가 성숙하게 행동한다고 아이를 진짜 어른으로 취급했구나 하고 반성했다. 그는 체사레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 같이 식사하러 가자.”

샤를과 레이나가 앞서 걷고, 그 뒤를 아인과 체사레가 따랐다. 식당에 들어선 샤를은 멈칫했다. 그동안 아인이 집에 없어서 체사레에게 앉혔던 자리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샤를이 상석에 앉으면 양옆으로 레이나와 아인이 앉곤 했다. 삼각형을 그리며 세 사람이 가깝게 자리한 채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네 명이 되어서 샤를이 상석이 앉으면 한명이 소외당했다.

그는 가주가 앉는 상석 자리를 포기하고 레이나와 나란히 앉았다. 이러면 아이들과 마주 보면서 식사할 수 있었다. 레이나가 식탁 밑으로 샤를의 손을 잡았다.

권위와 자존심을 포기하고 가족의 평화를 택한 남편에 대한 애정이 담긴 레이나의 손 온기가 몹시 따스했다.

아인은 대단한 식성을 발휘해 접시에 담긴 음식들을 다 먹어 치웠다. 복스럽게 먹는 아들의 모습에 레이나가 기뻐했다. 체사레가 밥 먹는 중간중간 토끼 인형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저렇게까지 인형을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 선물해줬을 텐데….’

아이는 감정을 숨기고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만 했다. 페르디안 백작 부부는 더욱 세심하게 양아들을 보살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체사레가 이 집에서 스스로를 타인이라고 여기지 않도록 말이다.

식사가 끝나고, 두 아들이 사이좋게 손을 잡고 3층으로 올라갔다. 처음 만난 사이였는데 오랫동안 함께 자란 친형제 같았다.

레이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우울해졌다. 그동안 아인에게 동생이 필요했는데 그녀가 베타인 탓에 동생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했던 탓이다. 샤를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저었다.

“레이나, 당신은 아인이한테 최선을 다했어. 아인이는 전혀 부족함 없이 컸다고. 10년이나 부족한 내 몫까지 채우느라 고생 많았어.”

레이나는 샤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안겼다. 비록 오메가와 알파 사이처럼 각인을 하지는 못해도, 각인보다 서로를 향한 사랑이 더 강력한 연결고리인 페르디안 부부였다.

***

아인은 3층 작업실로 체사레를 데리고 들어갔다. 자신의 팬이 덕질할 수 있도록 작업이 끝난 채 쌓여 있는 캔버스들을 보여줬다.

체사레가 연신 “우와”를 외치며 아인의 콧대를 세워주었다. 자기도 보여줄 게 있다면서 아인을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아인의 방과 달리 체사레의 방에는 책상과 책꽂이가 있었는데, 체사레가 두꺼운 회계론 책을 가져왔다.

“요즘 선입선출법이랑 후입선출법을 배우고 있어요. 제가 생각해봤는데, 샤를 상단 장부 표기법을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 해요.”

체사레는 작은 손으로 책을 가리키며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들었다.

“재무회계를 작성할 때는 선입선출법으로 순이익을 최대한으로 높게 측정해 상단의 가치를 높이고, 세무회계를 작성할 때는 후입선출법으로 순이익을 낮춰서 절세하면 좋겠더라고요. 형 생각은 어때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어쨌든 페르디안 가문에 똑똑한 아이가 들어온 건 확실했다.

“아직까지는 이를 제재하는 관련 세법이 없더라고요. 합법도 불법도 아니라고나 할까. 그래도 뭐 편법이긴 하죠.”

비상한 쪽으로 머리가 트여 있었다. 돈 많이 벌겠다.

“앗! 혹시 나중에 형 결혼하고 문제 될까요? 형이 1황자비가 됐는데 시댁에서 세금 빼돌린 거 들키면 아무래도 안 좋아 보이겠죠?”

고민하는 체사레의 턱에 자그마한 호두가 생겨났다. 손으로 턱을 쓰다듬던 체사레가 결론을 내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 1황자 전하한테 세법 좀 고쳐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형 이미지 생각해서 우리 집은 못 하는데, 다른 상단이 이 편법을 발견해서 이득 보면 무지 배 아플 것 같아요.”

아인은 기분 좋게 웃었다.

‘우리 집.’

체사레가 샤를과 레이나, 아인을 진짜 가족으로 받아들였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인은 자신의 동생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알렉세이를 만나거든 꼭 말해주겠노라 약속했다.

똑똑한 동생과 노느라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았지만, 아인은 페르디안 가문에서 제공하는 교육을 체사레가 몹시 재미있게 받고 있는 것 같아 안심할 수 있었다.

샤를이 어디서 이런 훌륭한 후계자를 데려왔는지 모르겠다. 궁금해서 체사레에게 물어봤다. 아인의 물음에 체사레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그게 아니라… 형… 혹시 제가… 평민이면 싫을까요?”

“응? 왜 싫어?”

의아해서 물어봤다. 체사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다. 형한테 미움받을까 봐 무지 겁났어요.”

“내가 널 왜 미워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체체.”

“네? 체체라니, 그게 누구예요?”

“체사레니까 체체지. 네 애칭이야.”

“재수 없어서 침 뱉는 소리 같은데요?”

착한 체사레한테 사춘기가 온 것 같았다. 잉잉이 인형을 끌어안고 귀엽게 웃던 모습이 꿈이었는 양 온데간데없었다. 아이들은 왜 이렇게 빨리 자라는 걸까. 세월의 무상함을 한탄하는데 체사레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대답했다.

“우와. 너무 기뻐요. 나한테 체체라는 멋진 애칭이 생기다니.”

연기자 하기는 글렀다. 아인은 체체가 싫으면 체리는 어떠냐고 물었다. 체사레가 소름 돋았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체체 할래요. 제발 제 애칭 체체 하게 해주세요.”

이렇게까지 체체로 불리고 싶어 할 줄이야. 자신이 오해한 모양이었다.

체사레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낸 뒤, 아인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오랫동안 알렉세이의 침실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 자신의 방 같지 않았다. 어색하게 들어와서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은 뒤, 마법등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어두운 천장을 쳐다보며 오늘 가족들을 만나서 무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데 왜 이리 마음이 헛헛할까 생각했다.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아무것도 없는 빈자리를 괜히 손으로 문질렀다.

평소라면 알렉세이가 따뜻하게 끌어안아 줬을 테다. 그동안 그의 체온에 너무 익숙해졌는지 혼자 있으려니 약간 추웠다.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린 채 몸을 새우처럼 말았다.

“알렉, 보고 싶다.”

설마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세상은 정말 모를 일이다 싶었다. 항상 공기처럼 자신을 감싸던 알파 페로몬이 없어서 마음이 심란한 채 있는데, 테라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괴한이 침입한 것 같았다.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꼭 알렉세이가 자신을 만나러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인은 얼른 이불을 내리고 커튼을 젖혔다.

그가 테라스 바닥에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앉아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자신이 창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어쩌려고 이러고 있는 걸까.

알렉세이가 고개를 들어 아인을 올려다봤다.

“보고 싶었어.”

아인은 이상하게 그 한마디에 울컥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우리 헤어진 지 아직 반나절밖에 안 지났다는 말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아인 또한 알렉세이와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인은 차갑게 몸이 식은 알렉세이를 끌어안았다.

“나도요.”

알렉세이는 아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오메가 페로몬을 깊이 들이마셨다. 영원히 닫혀서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었다. 그런데 언제나 꾸는 꿈과 달리 아인이 알렉세이를 위해 창문을 열어줬다. 알렉세이는 지금 이 순간 최고로 행복했다.

“왜 이러고 있어요.”

아인은 찬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알렉세이 때문에 속상했다. 얼른 그를 방 안으로 끌고 들어와 이불을 덮어줬다.

알렉세이는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두 눈 가득 차오른 희열을 얼른 감췄다. 아인에게 동정심을 샀다. 그 누구도 동정하지도,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는 인간 병기를 자신의 가이드는 똑같은 사람으로 취급했다.

정말이지 순진하고 착하기 그지없는 오메가였다.

알렉세이는 자신을 두려워하던 과거를 잊기라도 한 듯 이젠 걱정하기 바쁜 아인을 더 철저하게 속이기 위해 표정을 우그러트렸다. 입술 끝을 축 늘어트린 채 울먹이는 알렉세이를 보는 아인의 눈에 걱정이 한가득했다. 너무 좋아서 미치고 팔짝 뛰겠다.

“아인이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에휴, 답답이. 나 보고 싶으면 그냥 왔다고 말하지. 누가 오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사서 고생해요.”

아인이 종을 흔들어서 시종을 불렀다. 갑자기 도련님 방에 나타난 1황자를 본 시종이 멈칫했다.

“린, 1황자 전하께서 하루 머물고 가실 거야. 손님 방 좀 준비해줘.”

알렉세이는 얼른 아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눈을 촉촉하게 만들었다.

“너랑 같은 방 쓰면 안 돼?”

“우리 집에 방 많아요.”

“그래도 다른 방에는 네가 없잖아.”

아인은 괜히 번거롭게 한 것 같아 린의 눈치를 봤다. 린이 알아서 방을 나가줬다. 아인은 알렉세이와 같이 침대에 누웠다. 혼자 쓰는 침대였지만 데굴데굴 구를 만큼 넓었다.

물론 알렉세이는 이 침대보다 넓은 침대에서도 여백의 편안함을 누리는 대신 아인을 끌어안았다. 그런 그가 아인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알렉세이가 아인의 정수리에 코를 문질렀다.

“좋다.”

그가 익숙한 알파 페로몬으로 아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다. 임신한 탓에 더 알파의 페로몬이 반가웠다. 아인은 알렉세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코를 킁킁거렸다. 알렉세이가 한 말에 동감했다.

‘좋다.’

허벅지 사이를 벌리고 들어온 굵은 다리 한 짝이 아인의 부드러운 음낭을 문질러댔다. 자연스럽게 페니스가 발기해 잠옷 바지가 불편해졌다. 더 큰 문제는 앞이 아닌 뒤였다. 봄바람 들어찬 콧구멍처럼 오메가 구멍이 벌렁거리고, 미끄덩한 애액이 나오려고 했다.

‘이놈의 새끼가! 때찌! 때찌!’

주먹으로 신성한 우리 집에서 음란한 행위를 시도하려고 한 알렉세이를 흠씬 때렸다. 알렉세이는 물만두 같은 아인의 주먹에 맞으며 아야, 아야 엄살을 피웠다.

이렇게 약한데 어떻게 던전에 가서 마물을 잡나 걱정됐다. S급 에스퍼라는 것도 사기 같았다.

“가만히 있어요. 우리 집에서 허튼짓하면 확 쫓아낼 줄 알아요. 엄마 아빠도 있는데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그렇지만 아인아, 생각해봐. 구멍이 있는데 넣지 못하면 그게 고자지, 알파야?”

“알렉, 혹시 나랑 만나는 거 섹스하고 싶어서예요? 날 사랑해서가 아니라?”

“절대 아니야. 오해하지 마. 난 사랑이 99%고 섹스가 1%밖에 중요하지 않은 알파야.”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듣기는 좋았다. 아인은 볼에 마구 뽀뽀를 퍼부어대는 알렉세이 때문에 간지러워 까르르 웃었다.

“정말이야. 아마 내 사랑을 눈으로 볼 수 있으면 깜짝 놀랄걸. 내 세상에는 오직 너밖에 없어.”

아인은 부끄러워서 알렉세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쩜 혀에 버터를 발랐는지 청산유수였다.

“내 레아에 들어와 봐. 말뿐만이 아니라는 거 보여줄게.”

가이드로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인은 레아에 들어가는 방법을 몰랐다. 알렉세이의 메마른 땅에 물을 쏟아부어 본딩을 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아인은 최근까지 디디가 잠자는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넣는 장난을 친다고 믿었을 만큼 가이드와 에스퍼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평범한 일반인, 그리고 베타 엄마인 레이나는 아인을 품에 숨기고 보호할 줄만 알았다. 아인에게 ‘네가 이런 존재이니 이런 걸 알아둬야 해.’ 하며 가르쳐주지 않았다.

물론 그건 레이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자식을 키우는 법에 대한 정답은 없었고, 아인은 자신을 사랑으로 키운 그녀를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 없이 고생 한번 해본 적 없는 귀족 여인이 아들을 홀로 키웠다. 사업이 망해도 힘들다는 약한 소리 안 하고 자신을 키워준 레이나를 아인은 존경했다.

안 배워서 몰랐으면 이제라도 배우면 된다. 아인은 알렉세이에게 어떻게 그의 레아에 들어갈 수 있냐고 물었다.

다행히 그 나이가 되도록 어떻게 가이드로 태어나 그것도 모르냐는 군말이 따라붙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아인의 무지를 지적하지 않고 손을 잡아 제 심장에 올렸다.

“닉스를 움직이는 법은 알아?”

“아니요.”

“우리 매칭률 낮았으면 나 고생 좀 했겠는걸?”

그는 곤란하다는 듯 말했지만 달콤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에테르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신체에 영향이 가기 때문에 살려면 에스퍼로 각성하고 바로 다룰 줄 알아야 하거든. 그런데 가이드는 닉스가 과도하게 쌓이지 않는 한 이상을 겪지 않기 때문에 평생 자기가 가이드라고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대.”

알렉세이가 한 말이 큰 위안이 되었다. 아인은 거 보라는 듯 턱을 치켜세웠다. 오만하기는커녕 귀엽기만 했다. 알렉세이는 크크 웃었다.

“눈을 감고 네 안에 있는 심장을 느껴봐.”

아인은 알렉세이의 안내를 따라서 눈을 감았다.

“네 힘은 심장에서 시작돼 전신에 흐르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가고 있어. 한번 심장에서 머리로 이동하는 흐름을 상상해봐.”

의식을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혈관을 타고 돌고 있는 힘이 느껴졌다.

“네 안에 강이 흐르고 있어. 이제 머리에서 어깨로 갔어. 그다음은 허리, 무릎, 발, 반대쪽 무릎, 허리, 어깨, 머리. 한 바퀴 전신을 돌고 심장에 돌아온 닉스를 느껴 봐.”

자신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손바닥에서 알렉세이의 심장이 자신의 심장 박동에 맞춰서 뛰고 있었다. 그건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의 목숨을 마치 자신이 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널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너 자신 그 자체야.”

알렉세이의 마지막 말에 아인은 눈을 떴다. 그렇다면 알렉세이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건, 자신에 대한 사랑이란 의미이기도 했다.

“맞아. 네 생각. 내 모든 건 너라는 세상이야. 어서 와, 아인아. 내 사랑에.”

눈앞에 하얀 꽃밭이 펼쳐졌다. 향긋한 꽃향기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 정도로 짙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풍경이 아인을 감동케 했다. 황무지에 불과했던 알렉세이의 레아에는 캐모마일 꽃들이 눈밭처럼 피어나 있었다.

하얗게 빛나는 꽃들은 힘들게 꽃을 피운 만큼 여린 꽃잎과 가는 줄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 무엇보다 강인해 보였다.

“아….”

알렉세이가 하얀 꽃 사이에서 아름답게 웃었다.

“네가 만들어준 거야.”

“….”

“네가 날 구해준 거야.”

“…으.”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자신의 닉스였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그의 레아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왜 울어? 이제 와서 나 책임 못 지겠다고 해도 소용없어.”

바보. 그는 바보다.

“난 너 없으면 죽어. 이 꽃들을 봐서라도 날 버리지 말아줘. 이렇게나 예쁜데 다 죽어 버리면 아깝잖아.”

아인은 두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자신이 그를 버릴까 봐 계속 두려워하니, 앞으로는 불안해하지도 걱정하지도 않게 확실히 말해줘야겠다.

“사랑해요.”

“아!”

“사랑해. 아직도 조금 무섭긴 하지만, 날 위해 일부러 약하고 하찮은 척하는 당신이 너무 좋아요.”

그가 고개를 숙여 아인의 정수리에 입맞춤을 했다.

“고마워, 아인아. 날 사랑해줘서. 나도 널 많이 사랑해.”

아인의 얼굴을 들어 올려 알렉세이가 키스했다. 입 안으로 들어온 혀가 뜨거운 뱀처럼 미끄러져 잇몸을 훑었다.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현실에서는 이쯤 되면 호흡이 곤란해 헐떡이는데 이곳에서는 숨을 쉬지 않아도 괜찮았다. 영혼 상태여서 호흡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손이 아인의 상의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만지작거렸다. 입술이 빨리느라 정신 팔린 사이, 빛보다 빠른 나쁜 손이 아인의 바지를 내렸다.

알렉세이는 그의 힘에 밀려 휘청거리는 아인의 입술을 물었다. 슬금슬금 몰아 아인을 캐모마일 꽃밭에 앉힌 그는 아인을 눕히는 데까지 성공했다. 알렉세이가 입술을 떼고 빨갛게 달아오른 아인을 내려다봤다.

“해도 돼?”

"싫어요. 여긴 밖이잖아요."

아인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야외플이라니! 야한 만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플레이다.

“그럼 현실에선 해도 돼? 거긴 침대니까?”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여기가 다른 사람들은 들어올 수 없는 알렉세이의 레아여도 뻥 뚫린 야외는 싫었다. 이 마지노선까지 넘으면 돌이킬 수 없는 변태가 될 것 같은 기분이랄까.

꽃밭 풍경이 사라지고 아인의 방이 나타났다. 여전히 아인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알렉세이는 아인의 잠옷 단추를 풀며 속으로 사악하게 웃었다.

부모님이 있는 집에서 섹스를 할 수 없다고 해놓고, 간단한 수작을 부리자 침실에서 해도 된단다. 이렇게 순진하니까 자신 같은 알파 새끼한테 사로잡힌 거지 싶다.

레아는 청순한 캐모마일 꽃이 가득한 데 반해, 속마음은 능구렁이 수백 마리가 든 알렉세이가 능력을 사용해 침실에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아인은 혹여나 제 소리가 방 밖에서 들릴까 봐 오들오들 떨며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알렉세이는 아인의 젖꼭지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앗!”

처음에는 젖꼭지로 잘 느끼지 못했는데 자꾸 예뻐해주니까 이젠 조금만 건드려도 자지러졌다. 혀로 유두를 그루밍하는 고양이처럼 할짝할짝 핥았다.

아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눈가가 촉촉해졌다. 알렉세이는 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면서 즐거움을 느낄까 생각했다. 가학적인 취향이었다.

반대쪽 젖꼭지를 집게손으로 쭉쭉 잡아당기며 계속 젖꼭지를 빨았다.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만 위로 까뒤집어 아인의 표정을 살폈다.

통통하게 살이 붙은 분홍색 유륜을 한쪽은 앞니로, 다른 쪽은 엄지손톱으로 마구 긁었다. 아인이 다리로 침대 시트를 비비며 바동거렸다.

알렉세이는 쭙쭙 소리가 날 만큼 강하게 젖꼭지를 빨았다. 그에게 깔린 아인이 허리를 튕길 때마다 야트막하게 부푼 배가 느껴졌다. 오메가를 난폭하게 몰아붙여 엉엉 울리고 싶었던 알파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소중하게 다뤄야 했다.

지금의 행복은 그가 절제하고 인내해야만 가질 수 있는, 한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알렉세이는 아인 위에서 물러나 옆에 누웠다. 배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옆으로 할 생각이었다.

젖이 빨린 아인이 숨을 헐떡이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부어오른 젖꼭지는 새하얀 육신에서 유독 빨갛게 익어 야해 보였다.

젖은 입가를 혀로 핥아 닦아주고, 알렉세이는 얼른 제 바지를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 페니스가 튀어나왔다. 한껏 성질난 그것은 오메가 구멍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상태였다.

아인의 왼쪽 다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옆으로 누운 아인과 마주 본 채 알렉세이는 발기한 자지를 아인의 아래에 문질렀다. 구멍 위를 쓱쓱 지나가며 건드렸다. 오메가 구멍이 자지와 문질러질 때마다 조여드는 게 느껴졌다.

몇 번 문지르지도 않았는데 알렉세이의 기둥이 흠뻑 젖을 만큼 아인이 애액을 흘렸다. 이 야해 빠진 오메가를 어떻게 잡아먹어야 할까. 오늘은 한입에 꿀꺽 삼켜야겠다.

입술로 아인의 볼을 쪽쪽 빨아 먹으며 구멍에 귀두를 조준했다. 삽입에 실패했다. 미끄러져 엉뚱한 곳을 찌르고 말았다.

알렉세이가 혀를 차며 다시 한번 좆을 처넣는데 튕겨 나왔다. 세 번째 시도 때는 자지를 손으로 잡고 구멍에 직접 물렸다. 큼지막한 귀두를 삼키기 위해 아인의 구멍은 주름이 사라질 만큼 늘어났다.

“읏.”

아인이 고운 눈썹을 찡그렸다. 알렉세이는 아인이 아파하는가 싶어 멈칫했다. 그런데 밑으로 오물오물 자지를 씹어 먹는 발칙함이 고통으로 인한 신음이 아니었음을 알렸다.

갈비뼈에 하얀 거죽을 씌어놓은 것처럼 납작한 아인의 가슴에도 변화가 일었다. 알파의 손을 타면서 통통해진 분홍색 유륜과 젖꼭지가 좀 더 위로 솟아오른 게 보였다.

알렉세이는 오메가든, 베타든 타인의 가슴을 보는 건 아인이 처음이었지만 그의 가슴이 몹시 야해 빠졌다고 확신했다. 부들부들 떨면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알렉세이를 올려다보는 아인의 귀여움에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아인 앞에만 서면 인내심이 쥐뿔도 없어졌다. 귀두를 물린 구멍에 단번에 좆을 박아 넣었다.

“아앗.”

아인이 붙잡힌 팔다리를 달아날 것처럼 휘저었다. 알렉세이는 어깨에 올린 다리를 단단히 바투 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입술을 물어뜯듯 거칠게 키스를 했다.

아인이 입을 벌려서 알렉세이의 혀를 받아냈다. 알렉세이는 아인의 입 안을 혀끝으로 샅샅이 훑으며 하반신을 움직였다.

쩝쩝. 첩첩. 아인은 위든 아래든 잘 받아먹었다. 애액으로 허벅지까지 더럽혀진 아인의 구멍에 좆을 박을 때마다 질척한 마찰음이 났다. 좆기둥을 바늘구멍에 밀어 넣는 것처럼 조임이 상당했다. 언제쯤 되어야 우리 아인이는 자신의 물건을 넙죽 받아먹을 수 있을까.

“흐으. 흐아. 아앙.”

키스가 끝나자 아인이 알렉세이의 어깨에 눈가를 비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매일 하는데 아직도 좆 받아먹길 버거워했다. 다 자신의 탓이었다.

더 열심히 그의 몸을 열고 안에 정액을 싸질러 길을 들였어야 했는데, 마음이 약해서 많이 봐줬다. 이렇게 반성해도 결국 아인이 힘들어하면 봐주고 말 알렉세이였다.

아인의 민둥한 좆이 알렉세이의 배를 찔러댔다. 수줍어서 빨갛게 익은 얼굴이 예뻐 죽겠다. 좆질하는 만큼 쉬지 않고 뽀뽀를 퍼부었다. 아인을 만나지 못한 과거의 그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았을까 이해되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

천천히 쳐올리는 힘에 의해 아인의 몸이 들썩거렸다. 촉촉하게 땀이 맺히기 시작한 아인의 척추기립근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부드러운 마사지로 긴장이 풀리자 좀 더 수월하게 진입할 수 있었다. 뜨겁고 미끈미끈한 점막이 거대한 성기에 빨판처럼 달라붙었다.

그가 나가려고 하면 가지 말라며 붉은 속살이 잡아당기고, 넣으려고 하면 깊숙이 받아내겠다고 조임을 풀었다. 좆에 착착 달라붙는 속살 맛이 끝내줬다. 제정신을 유지하기 벅찰 만큼 황홀하고 기분 좋았다. 내벽 주름이 닳을 때까지 아인의 안에 피스톤질을 하고 싶었다.

비공식적으로 SS급 에스퍼가 된 알렉세이이니, 마음만 먹으면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섹스를 할 수 있을 거다. 한 달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도 생존이 가능한 에스퍼의 몸이지 않은가.

물론 그런 극한 상황에 놓여도 살아남는 에스퍼도 본딩을 한 가이드의 닉스가 없으면, 시한부 인생이었다.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 인간을 사랑하는 거였다. 욕심을 다 채우려고 들면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될 것이다. 가이드는 에스퍼와 달리 평범한 사람이니 말이다.

알렉세이는 관계를 하며 세심하게 아인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라도 제가 힘 조절을 못 해 그를 아프게 만들지 않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쾌감에 녹진하게 녹아내린 아인은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숨을 헐떡였다.

“아! 앗. 아아. 하읏.”

손으로 야무지게 자지를 물고 있는 구멍을 만져서 확인했다. 뜨끈한 열기가 느껴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붓지 않았다. 그가 구멍 주위를 만져주자 아인이 젖꼭지로 알렉세이의 가슴을 문지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뒤로만 가버린 것이다.

알렉세이는 이러니까 자신이 힘든 거라고, 마음속으로 야한 오메가를 만나 절제하는 삶을 사는 제 신세를 한탄했다. 말랑말랑한 하얀 궁둥이를 손으로 우악스럽게 쥐어 잡았다. 퍽퍽, 좆질을 하니 안에서 투명한 점액질이 좁은 구멍을 비집고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알렉세이의 어깨에 올라간 한쪽 다리 때문에 접합부가 공중으로 많이 노출되어 있었다. 유연한 오메가의 신체가 가위처럼 크게 벌어진 채 구멍을 확 쪼그라트렸다.

알렉세이는 좆을 강하게 조이는 힘에 못 이겨 하마터면 쌀 뻔했다. 간신히 참고 다시 피스톤질을 이어나갔다. 이것도 운동이라고 하면 할수록 체력이 붙는지 배와 허벅지는 물론 가슴까지 온통 제가 싼 정액으로 더럽혀진 아인이 잠들지 않고 버텼다.

알렉세이가 여태 싸지 않은 것과 참으로 대조되는 결과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임신으로 식탐이 늘면서 살이 붙은 몸 곳곳에 잔근육들이 보였다. 워낙 미약한 변화였지만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빨아대는지라 모를 수 없었다.

알렉세이는 섹스로 다져진 아인의 잔근육을 눈으로 탐미했다. 힐링 포션을 아공간에서 꺼내 잔뜩 애액을 싸질러 목말랐을 아인에게 먹였다. 체력의 한계에 도달했던 아인은 바로 회복되었다.

아인은 만약 자신이 게임 캐릭터였다면, 지금 상황은 마치 서열 1위의 만렙 유저가 뉴비를 데리고 다니면서 레벨 업을 시켜주는 것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역시 노가다만큼 근력 쌓기에 좋은 게 없었다.

아인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절대 지치지 않는 알렉세이를 봤다. 그가 “왜?” 하면서 여우처럼 눈웃음을 지었다.

“아니에요.”

아인은 저 혼자 한 생각을 말할 수 없어서 키득키득 웃었다. 게임을 모르니 설명해봤자 이해 못 할 터였다. 알렉세이는 엄마 아빠 몰래 장난친 아이처럼 웃는 아인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아인아, 정말 고마워.”

“갑자기?”

“항상 그런 생각 해왔거든. 나 같은 놈 받아줘서 무지 고맙다고.”

부끄러워서 눈꺼풀만 끔뻑거리던 아인은 대답을 바라는 것처럼 알렉세이가 계속 쳐다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앞으로도 계속 고마워하세요.”

“풋. 정말 너 엉뚱한 건 알아줘야 해.”

알렉세이가 드디어 아인의 다리 한쪽을 어깨에서 내려줬다. 그러나 계속 아인에게 자지를 삽입한 상태였다.

그가 이만 자라면서 아인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줬다. 아인은 알렉세이는 싸지 않았는데 이대로 끝나는 건가 싶었다. 모처럼 비싼 힐링 포션 먹어서 기력이 회복되었는데 너무 아까웠다.

혹시 자신은 계속 가만히 있고, 그는 움직여서 힘들어 그만하는 건가 싶었다. 안 되겠다. 자신이 해줘야겠다. 알렉세이의 팔을 풀어내고 그를 반듯하게 눕혔다. 결합된 걸 뽑아내니 후두둑 안에 고인 애액이 침대 시트로 떨어졌다.

“왜 그래?”

“가만히 있어요.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요.”

역시나 뽑아낸 좆은 여전히 발기된 상태였다. 지독한 지루 새끼를 애인으로 둬 이젠 아인도 척척박사였다.

돌덩이같이 단단한 허벅지를 낑차 낑차 들어 올려 무릎을 세우게 했다. 알렉세이가 의아해하면서도 아인의 지시를 따랐다. 아인은 그의 하반신에 올라타 자지를 손으로 잡고 구멍에 맞췄다. 그리고 그대로 내려앉아 삽입했다.

“흐아앙.”

집이어서 소리를 크게 내면 안 되는데 참지 못하고 교성을 질러버렸다. 몸무게가 그대로 가중되는 체위여서 옆으로 했을 때보다 깊게 좆이 박혀 들었다.

실수로 자궁을 건드려 눈물 나게 아픈 한편 기분 좋았다. 약간의 고통이 가시고 난 뒤, 아인은 알렉세이의 식스팩이 선명한 배를 두 손으로 짚고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자신이 멸치이긴 하지만 그림 그린다고 의자에 오래 앉아 있어서 엉덩이에는 살집이 많았다. 전형적인 오리 궁둥이 체형이었다. 옷 입을 때는 창피해서 싫은데, 이럴 땐 좋은 것 같았다. 질펀한 엉덩이가 알렉세이의 하체와 부딪힐 때마다 쿠션감 때문에 그다지 아프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적극적으로 행위를 이어나가는 아인의 행동에 몽롱하게 취했다. 이 세상은 정말 살 만했다. 처음 페르디안 백작저에 찾아왔을 땐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다.

저 혼자 알렉세이의 좆을 가지고 뒤로 자위하던 아인이 몇 번 하지도 않고 지쳐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기특한 아인을 돕기로 했다. 아인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골반을 잡고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흐앙. 아앙. 아아아.”

착착착착. 빠르게 살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팔을 움직였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힘줄이 불거졌다. 알렉세이는 제 위에서 정신없이 박히는 아인의 모습을 눈으로 집요하게 좇았다.

“좋아, 좋아요. 앙. 어떡해. 나 어떡해.”

알렉세이가 박아주니, 아인이 손으로 앞을 조몰락거리며 자위했다. 그러다가 부족하다 싶었는지 그것은 내버려 두고, 젖꼭지를 손으로 잡아당겼다.

아인과 같은 미인이 자발적으로 좆 위에 올라타서 박히는데, 유두를 괴롭히며 구멍을 조이니 아무리 알렉세이가 지독한 지루여도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흐으응응.”

오랫동안 참았던 만큼 뜨거운 정액이 범람하는 강물처럼 아인의 배 속을 덮쳤다. 임신으로 얕게 부푼 배가 더 빵빵해졌다.

아인은 하도 이런 경험을 자주 해서 그런지 예전과 달리 신기하긴 해도 무섭진 않았다. 헥헥거리며 알렉세이 위에 도로 엎어져서 숨을 골랐다. 알렉세이가 그런 아인을 추슬러 안아 들었다.

아인은 알렉세이의 목에 팔을 두르고, 허리에 다리를 감아 코알라처럼 매달렸다. 알렉세이가 욕실로 이동했다. 욕조 가득 따뜻한 물을 받았다. 아인은 평범한 은색 수도전을 보고 1황자 궁에서 본 황금 수도전을 떠올렸다.

내일 눈 뜨자마자 부모님한테 바꿔달라고 할 거다. 인테리어 소품 하나로 욕실의 품격이 달라 보이는데, 그 정도 투자는 해도 됐다.

그가 더럽혀진 아인의 몸에 물을 끼얹어 씻기고, 욕조에 장미 입욕제를 풀었다. 아인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회복제 맛이 나는 시원한 힐링 포션 한 병을 더 원샷 했다.

“하아~, 살겠다.”

욕조 벽에 등을 기대고 누운 채 눈을 감았다. 피폐물 BL 소설에 악역수로 빙의해 이런 대우 받으며 사는 거면 나름 선빵한 거였다.

알렉세이가 각인은 부하가 되는 거라고 했던 제 말처럼 착실하게 아인의 시중을 들어 그를 씻기고 난 뒤, 제 차례가 되었을 때 후다닥 씻었다. 아인은 알렉세이에게 안겨서 욕실을 나왔다가 더럽혀진 침대를 보고 절망했다. 황궁과 달리 여기는 아인의 스윗 홈이었다.

침대 시트를 새로 갈면 부모님도 알게 되고, 수년 동안 얼굴 보고 살아 가족 같은 시종들도 알게 되었다.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될 것이다.

마치 깨진 독에 물을 가득 채워야 하는 콩쥐처럼 막막하고 서러웠다. 아인은 바보처럼 이 일을 어쩌나 싶어 울어버렸다. 알렉세이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인은 저도 동참한 결과물인데 울먹이며 알렉세이를 원망을 가득 담아 째려봤다.

이유를 들은 알렉세이가 아인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그래? 별거 아니네. 내가 해결해줄게. 잠깐만 기다려.”

더러워진 침대 시트와 이불, 베개 커버를 벗겨낸 그가 그것들을 가지고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 새로운 침구가 들려 있었다. 아인은 속으로 ‘초능력자 만세!’를 외쳤다.

“이제 자자. 이리 와.”

알렉세이는 아인을 끌어와 품에 안았다. S급 가이드여서일 거다. 그가 가이딩을 할 생각이 없어도 에테르가 정화되는 건.

눈으로 보기에는 자그마한 오메가를 품고 있는 건 알렉세이였지만, 실상 알렉세이가 느끼기엔 반대였다. 아인의 거대한 어둠이 알렉세이를 감싸 안았다. 닉스의 안락함에 알렉세이는 사지가 녹아내리듯 평안해져 잠들었다.

***

꿈에서 어린 알렉세이를 잠재우기 위해 제논이 등을 두드렸다. 오메가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걸 눈앞에서 목격한 탓에 드문드문 어린 시절 기억이 날아간 알렉세이였다. 그동안 잊고 있던 기억의 조각이 반갑기만 했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알렉세이가 철없이 오메가 아버지에게 칭얼거렸다.

‘제논. 알렉은 여기 싫어요. 다시 태양궁으로 돌아갈래요.’

어리고 멍청하면 말이라도 어눌해서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든가.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천재여도 아이는 아이였다.

제 감정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고, 속에 담아둘 줄 몰랐다. 어린 알렉세이는 애인이 생긴 황제에게 쫓겨난 제논의 심장에 그렇게 대못을 박았다.

‘이제부터 모래궁이 알렉이랑 아빠의 궁이야. 다시 태양궁으로 못 돌아가.’

‘왜~ 왜~. 싫어요. 알렉은 모래궁 싫어요.’

제논의 옷을 흔들면서 졸랐다. 제논은 웃으면서 울상을 짓는 아이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알렉은 왜 여기가 싫어?’

‘여기는 바람이 쌩쌩 불어요. 알렉은 무서워요.’

‘뭐가 무서워. 아빠가 우리 알렉 옆에 항상 같이 있는데.’

알렉세이는 언제 떼를 부렸냐는 듯 빵끗 웃었다. 제논의 말이 맞았다. 태양궁에 있을 때는 제논과 다른 방에서 지냈지만, 모래궁에서는 같은 방에서 지냈다. 알렉세이는 속으로 저울질하다가 모래궁에 사는 게 더 좋다고 결론 내렸다.

‘알렉은 모래궁이 좋아요.’

제논과 함께여서 좋았다.

‘제논도 좋지요?’

아빠도 나랑 같이 있어서 좋지?

‘그럼. 좋고말고.’

그렇게 대답한 제논의 심정이 어땠을지, 어린 시절의 꿈을 꾸는 알렉세이는 지금에서야 알 것 같았다.

꿈속 장면이 변했다. 제논이 장난감을 달라고 화내는 알렉세이를 위해 손수 바느질을 해서 곰돌이 인형을 만들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바닥을 굴러다니며 짜증을 부렸다.

왜 더 멋진 장난감을 주지 않느냐는 불만이었다. 태양궁에서 알렉세이는 비단으로 만든 공과 커다란 유리구슬, 아름다운 사파이어 눈을 가진 호두까기 인형을 갖고 있었다.

제논이 바늘에 손가락을 찔려가며 만들어준 곰 인형은 형편없고 초라했다. 허술한 바느질은 고르지 못했고, 바느질 땀 사이의 거리가 넓어서 솜이 삐져나왔다. 알렉세이는 씩씩거리며 곰 인형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싫어! 나 아버지한테 돌아갈래!’

더 이상 마른 빵과 건더기도 없는 차가운 수프만 먹기 싫었다. 여름인데도 찬 바람이 불어서 밤이 되면 이불을 둘둘 말고 자야 했다. 그런데 왜 제논은 모래궁이 좋다는 걸까.

어린 알렉세이가 봤을 때 모래궁은 정말 이상한 곳이었다.

‘황자님, 우리 황자님’ 하면서 뒤를 귀찮게 졸졸 쫓아다니던 시종들은 사라지고, 게으름뱅이들만 모여 있었다. 심부름을 시키면 세월아 네월아 돌아오지 않아 제논이 직접 일 처리를 해야 했다.

알렉세이는 작은 콧구멍으로 뿌뿌 뜨거운 숨을 뿜어내며 방에서 뛰쳐나갔다.

‘알렉, 돌아와.’

제논이 애타게 불렀지만 무서울 것 없는 아이는 알파 아버지와 오메가 아버지랑 함께 지냈던 태양궁으로 달려갔다. 평범한 아이처럼 알렉세이가 덜 똑똑해서 길을 찾지 못했다면, 그런 비극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태양궁에 도착한 알렉세이는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다시 예전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수순처럼 알렉세이는 그동안 제논과 황제가 지냈던 방으로 향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알렉세이를 보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해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들은 어린 황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리기만 했다. 알렉세이는 날렵하게 몸을 날려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부모님 침실에 이상한 남자가 있었다.

어른 알렉세이는 꿈을 통해 자신이 어렸을 때 헬링턴과 만났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린 알렉세이의 눈에 비친 남자는 은발에 구릿빛 피부를 가진 오메가였다. 덩치가 무척 크지만 잘생겨서 어린 알렉세이는 남자를 마음에 들어 했다. 남자와 똑같이 은발인 아이는 침대 위에서 퍼즐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알렉세이와 비슷한 또래처럼 보였다.

알렉세이는 자신 또래의 아이를 처음 만나서 예쁜 은발 아이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너는 누구야?’

은발 아이가 고개를 들어 알렉세이를 쳐다봤다. 헬링턴이 당황한 듯 아,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렸다.

‘보인다고?’

헬링턴이 의자에서 일어나 알렉세이에게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1황자 전하. 저는 헬링턴 유르한이라고 합니다.’

헬링턴의 자기소개는 정말 이상했다. 유르한이라는 성은 황제와 그의 배우자 오메가,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만 사용할 수 있는 거였다.

‘아니야! 이 거짓말쟁이!’

알렉세이는 가까이 다가온 헬링턴을 밀어버렸다. 그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럴 의도는 없었기에 알렉세이는 몹시 당황했다.

은발 아이가 으앙앙 큰 소리로 울었다. 헬링턴은 놀란 아이를 달래기 위해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으나, 알렉세이의 뺨에 불꽃이 튀었다.

황자가 방문했다는 소식에 달려온 황제가 휘두른 싸대기에 맞은 거였다. 가벼운 알렉세이는 헬링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멀리 날아가 바닥에 엎어졌다.

‘흐항앙. 아파. 아파.’

황제가 우는 알렉세이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감히.’

‘폐하, 진정하세요. 아직 1황자께서는 어리세요.’

‘헬, 그대는 가만히 있어. 태의를 불러서 진료케 할 때까지 안정을 취하도록 해.’

‘저랑 제 배 속 아이는 괜찮습니다. 폐하, 제발 그 손 놓으세요.’

알렉세이는 우는 것도 잊은 채 알파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목이 졸려서 얼굴이 시뻘게졌지만 숨 쉬는 것조차 잊을 만큼 충격이 컸다.

헬링턴이 알렉세이에게 그냥 황자가 아닌 ‘1황자’라고 했다. 그건 숫자 1 다음에 2가 와서였다. 저 납작한 배에 아이가 있단다. 그래서 헬링턴이 자기소개를 할 때 스스로를 유르한이라고 밝힌 거였다.

그제야 알렉세이는 저와 제논이 황제에게 버림받았음을 깨달았다. 황제가 침실 밖으로 알렉세이를 던져버렸다.

‘치워.’

그는 알렉세이가 마치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듯 복도에 버렸다. 기사들이 알렉세이에게 이만 돌아가시라며 동정 가득한 눈을 했다. 알렉세이는 하늘이 무너졌나 천장을 올려다봤다.

태양궁의 천장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뒤늦게 알렉세이를 찾으러 쫓아온 제논과 황제가 마주치게 되었다. 황제가 제논을 비난했다.

‘정신머리를 어딘가 가져다 버렸나 보지? 아님 네가 시켰어? 이 사람 유산시키면 다시 네가 황후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보지?’

제논은 황제가 뭐라고 떠들든 귀담아듣지 않았다. 퉁퉁 부어오른 알렉세이의 오른쪽 뺨을 보고 눈물을 가득 머금었다.

‘네가 뭔데 내 아들을 때려! 네가 뭔데 내 아들을 때리냐고!’

제논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바락바락 대들었다. 황제가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알렉세이를 때렸다. 알렉세이는 대리석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앞니가 부러져서 피가 났다.

‘아악! 개새끼. 죽어! 죽어 버려!’

제논이 황제를 때리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기사들에게 붙잡혀서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싫다는 오메가에게 사랑한다 매달리고 애원하던 황제가 비정한 눈으로 제논을 내려다봤다.

‘네 아들이 다시는 내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해. 내가 네 아들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라고.’

‘흑흑흑. 정말 왜 그래요. 폐하,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절대 싫다고 안 할게요. 아프다고도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

제논이 무릎 꿇고 빌었다. 알렉세이는 부러진 앞니보다 우는 제논의 모습이 더 아팠다.

‘…네 눈에는 내가 개새끼로 보이지?’

알렉세이는 정작 본인이 배신당한 것처럼 슬퍼 보이는 황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제논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럼 아니에요?’

‘하! 그래서였어?’

황제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런 그를 헬링턴이 걱정스럽게 보며 침실로 데려가려고 했으나, 흥분한 황제는 헬링턴의 손길을 뿌리쳤다.

‘제논, 정원에 어느 날 새 둥지가 생겼어. 난 유심히 그 둥지를 관찰했어. 그런데 어느 날 뻐꾸기가 날아와 둥지 안에 든 알을 떨어트리고, 제가 낳은 알을 놓고 떠나더라고.’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왜 갑자기 황제가 뻐꾸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알이 부화했지. 어미 새는 정성스럽게 자기 새끼인 줄 알고 뻐꾸기 새끼를 키워. 하루 종일 먹이를 잡아 와 남의 새끼에게 먹이지. 그런데 어미 새가 알게 돼버렸어. 그동안 자신이 속았다는 걸.’

황제는 흐느끼는 제논에게서 등을 돌려 헬링턴의 허리를 끌어안고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제논이 엉금엉금 기어서 알렉세이를 끌어안았다.

‘알렉, 흑. 어떡해. 흑흑. 앞니가 흑흑. 많이 아파?’

알렉세이의 얼굴은 퉁퉁 부어서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었다. 제논이 바닥에 널브러진 알렉세이를 안아 들었다. 태의가 바쁘게 달려와 황제의 침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제논은 태의를 얼른 붙잡았다.

‘제발 도와줘. 알렉이 다쳤어.’

태의는 제논의 손길을 뿌리쳤다. 다친 알렉세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에스퍼이지 않습니까. 가만히 두면 치유될 겁니다.’

제논은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멍하니 태의의 등을 바라봤다. 아직도 제논은 황제의 변화가 믿어지지 않았다. 서럽다 못해 가슴에 한이 맺힐 만큼 그가 원망스러웠다.

사랑하지도 않는 알파에게 끌려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가 원망스러웠으나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에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돌연 애 딸린 오메가를 데려왔다. 헬링턴은 제논과 달리 우성 오메가였고, A급 가이드였다. 제논은 아들과 함께 태양궁에서 쫓겨났다. 그들이 함께 누웠던 침대에 황제는 다른 오메가를 눕혔다.

제논은 혹이 난 알렉세이의 머리통을 연신 쓰다듬으며 모래궁으로 돌아갔다.

제논과 황제, 알렉세이 사이에는 다시는 건너갈 수 없는 강이 놓였다. 제논과 알렉세이는 그 사건 이후 다시는 태양궁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건더기 없는 차가운 수프와 마른 빵만 먹어서 배고픈 상태에 익숙해졌고, 제논은 손빨래를 하고 직접 청소하는 일에 능숙해졌다. 또 다른 변화라면 알렉세이가 제논이 만들어준 허접한 곰돌이 인형을 가지고 놀게 된 거였다. 제논을 기쁘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비단 공도,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구슬도, 사파이어 눈을 가진 호두까기 인형도 필요 없다고 알렉세이는 제논에게 무언의 위로를 건넸다.

그들은 앞으로도 그렇게 버려진 궁에서 행복하게 지낼 거라 여겼다. 헬링턴을 황후로 들이기 위해 황제가 황후 제논을 죽이러 쳐들어오기 전까지 말이다.

어른 알렉세이는 드디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소멸된 ‘그날’을 보게 되었다. 지금의 그가 당시 상황 중 기억하는 거라고는 그를 숨기며 안심시키기 위해 웃었던 제논의 서글픈 미소뿐이다.

사라진 기억은 이러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황제가 휘청거리며 모래궁에 쳐들어왔다. 형식적으로나마 버림받은 황후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그들의 소임을 다했다. 황제에게 무기를 버려달라고 간곡하게 사정했으나, 그는 들은 척도 안 했다.

기사들과 황제가 뒤엉켜 있는 틈을 타 제논이 어린 아들을 안아 들었다. 알렉세이는 무서웠다. 비록 S급 에스퍼로 각성했다고 해도, 그는 무엇도 해쳐본 적 없는 아이였을 뿐이었다.

감정이 요동치자 에테르가 날뛰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알렉세이는 속수무책이었다. 어서 진정해야 했다.

제논이 아직 가이드를 만나지 못한 알렉세이에게 항상 능력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 의미를 알겠다. 제논이 알렉세이가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아무리 어릴 때부터 괴물처럼 강한 에스퍼가 되었다 할지라도, 알렉세이는 제 또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무능하고 연약한 존재였다. 제논이 검을 든 황제의 눈을 피해 알렉세이를 침대 밑에 밀어 넣었다.

-아아, 제논. 당신은 어떻게 그 순간 미소 지을 수 있었나요.

어른 알렉세이는 꿈에 개입해 제논과 어린 자신을 구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꿈.

‘알렉, 절대 나오지 마.’

‘흐으. 싫어요. 흑. 제논도 빨리 들어와요. 알렉 무서워요. 제논도 얼른 숨어요.’

‘아빠가 숨으면 우리 알렉을 지킬 수 없어. 아빠는 괜찮아.’

제논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강인해졌다. 아이를 낳은 오메가들이라고 다 그런 부모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 알렉세이에 대한 오메가 아버지의 사랑은 컸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날 왜 배신했어.’

‘저는 폐하를 배신한 적 없습니다.’

‘어서 뻐꾸기 새끼 내놔.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거야. 내놔! 내놓으라고!’

황제가 발광을 했다. 기사들이 황제에게서 검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페도로프는 A급 에스퍼였다. 그 자리에서 기사 다섯 명을 찢어 죽였다. 제논은 피로 얼룩진 처참한 광경을 보며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당신이 했던 수많은 사랑한다는 말에 한순간이라도 속았던 날 원망해.’

그것이 제논이 한 마지막 말이었다. 제논을 죽인 황제와 침대 밑에 숨은 어린 알렉세이의 눈이 마주쳤다.

날 봤어! 숨이 턱 막혔다. 공포에 젖은 아이는 한 번도 한 적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바지에 오줌을 싼 것이다.

그런데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A급 에스퍼인 그가 알렉세이를 발견하지 못할 리 없었다. 무언가 그를 조종하고 있는 듯 임무를 마친 황제가 휘청휘청 비틀거리며 현장을 떠났다.

꿈에서 깨어난 알렉세이는 그동안 사라진 기억으로 놓쳤던 진실을 알게 되었다. 황제는 세뇌 능력에 당한 사람 같았다.

그러나 유르한 제국에서 정신계 에스퍼 중 세뇌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밝혀진 이는 단 둘뿐이다. 알렉세이와 제논의 알파 아버지 제이든이었다.

제이든과 제논의 사이는 몹시 좋았다. 그가 황제를 조종해 자기 아들을 죽일 이유는 없었다. 또한 당시 제이든은 제논의 무릎 위에서 놀고 있던 알렉세이에게 여름휴가를 떠난다며, 기념품을 사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제이든은 완벽하게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 세뇌 능력에 당했을 리 없는데 세뇌당한 사람처럼 구는 황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건 호라이슨이 황제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세간에는 황궁 밖에서 바람을 피운 황제가 사생아와 제 오메가를 함께 입궁시킨 걸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꿈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마치 황제가 헬링턴이 임신한 것처럼 굴었던 점이었다. 만일 호라이슨의 동생이 태어났다면, 알렉세이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르한 황실에는 3황자가 없었다. 오직 황제만이 헬링턴이 임신했다고 믿었다는 뜻이다. 헬링턴이 유산을 했다면 그 점 또한 밝혀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황제는 지금의 호라이슨을 그때 배 속에 든 아기로 여기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호라이슨이 황제의 아들이 아니라고는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알렉세이는 어떻게 잃어버린 기억들을 되찾게 되었을까 생각했다가 자신의 팔에 안겨서 자는 아인을 봤다.

“나 너 때문에 이제 많이 괜찮아졌나 보다.”

제논이 죽고 난 뒤, 알렉세이는 이상한 아이가 되었다. 머리 한구석이 고장 났는데 이게 원래 이렇게 태어난 건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고장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비정하고 냉혹한 성정은 알렉세이의 천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자신은 마음을 많이 다친 거였다. 알렉세이는 아인이라는 붕대가 자신의 상처를 돌돌 감싸 새살을 돋게 해줬다는 걸 깨달았다. 고마워서 잠든 아인에게 뽀뽀를 쪽쪽 퍼부었다.

아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귀찮아했다.

“우웅. 뭐야. 꺼져.”

“킥.”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 있을까? 아인 페르디안이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알렉세이는 아인의 등을 토닥여주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모래궁에 있는 그의 침실로 공간 이동해서 갔다. 가설 하나를 세웠으니 그걸 증명할까 싶다. 알렉세이가 되찾은 어린 시절 기억을 통해 세운 가설은 이러했다.

황제가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제논을 살해했다. 그 일로 인해 헬링턴은 황후가 됐다. 그렇다면 헬링턴이 황제의 배후에 있는 흑막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빠르게 의복을 갖춰 입고 책상에 앉았다.

1황자라 할지라도, 친자식도 아닌 알파가 황제의 오메가인 황후를 아무런 준비 없이 만날 순 없었다. 알현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시종장에게 건넸다. 식사를 하며 답장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헬링턴은 저녁이 되도록 답장을 주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그의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세뇌 능력이 아닌데 세뇌 능력처럼 상대를 홀릴 수 있는 힘에 대해 조세핀과 알아보았다.

가설은 헬링턴이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확신으로 변했다. 알렉세이의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3황자는 어디에 있나요? 제 사랑하는 동생을 보고 싶습니다.」

헬링턴이 많이 당황했을 거다. 자처해서 가만히 있는 벌통을 건드린 곰이 되었지만, 꿈에서 제논의 죽음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조세핀은 세뇌 능력에 집착하는 알렉세이에게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황후 헬링턴이 가이드라는 사실은 진실이니, 그는 에스퍼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럼 그 힘의 대척점에 놓인 ‘흑마법’을 사용했을 거란 의견이었다.

애초에 에스퍼들이 초능력을 가지게 된 이유가 마족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인류가 사용하는 마법 중에는 에스퍼들의 능력과 비슷한 게 없었다.

“흑마법은 평범한 마법과 다릅니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마법을 연구하고 수련을 해서 어둠의 힘을 쌓는 게 아닙니다. 마족과 계약을 해 그 힘을 사용하는 겁니다.”

흑마법은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국가에서 금지한 음지의 영역에 속한 힘이었다. 조세핀은 마탑의 수장으로 있기에 백마법사의 적, 흑마법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헬링턴이 어떤 마왕의 부하와 계약했을지 그 능력을 통해 악마의 이름을 점쳤다.

“마족 오세는 사람을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고, 사람을 환각으로 미혹하거나 발광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헬링턴이 제논의 모습으로 다른 알파와 자는 모습을 황제에게 보였을 가능성이 있겠네.”

“네. 더불어 황제의 이성을 흔들어 살해하게 하는 것까지도요.”

“…씨발.”

마족 서열 57위. 마계를 다스리는 군주 중 한 명인 오세에 대해 조세핀과 대화하면서 알렉세이는 억울함에 눈물을 흘렸다. 망할 원수를 바로 코앞에 두고도 그동안 몰라봤다니.

조세핀이 용사 요르가 치열한 전투를 벌인 72명의 마족들에 대해 쓴 책을 펼쳤다.

“마족은 자신의 이름을 아는 자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복종합니다. 물론 마족을 완전히 복종시키기는 몹시 어렵기 때문에 이름을 안다고 할지라도, 부하로 삼을 순 없습니다.”

알렉세이는 SS등급이었다. 자신이 마족을 죽일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여겼다. 조세핀은 고개를 저었다.

“용사 요르조차 그들의 이름을 알아내 마계로 돌려보냈을 뿐입니다. 1황자 전하, 위험하니 마족을 죽일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들은 던전에서 죽이는 마물과는 비교도 안 되는 존재이니까요.”

조세핀은 혈기 넘치는 에스퍼를 진정시키고 현명한 대처법을 알려줬다.

“헬링턴이 마족과 계약한 흑마법사라는 걸 드러내 폐위시키고, 마족의 힘에 홀린 황제가 제논에게 누명을 씌워서 죽였음을 밝혀내세요. 그게 1황자 전하께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입니다.”

알렉세이도 굳이 위험하게 마족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건 제논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제논을 죽인 황제와 배후에 있는 황후를 벌하는 것뿐이었다.

애 아빠가 되었는데, 절대 허튼짓해서 아인과 아기를 두고 죽을 순 없었다. 조세핀에게 인간과 계약한 마족을 마계로 돌려보내는 법을 배운 뒤, 알렉세이는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했다.

페르디안 백작저, 아인 페르디안이 지내는 3층 침실에 딸린 테라스에 앉아 커튼 너머를 바라봤다. 기적처럼 그와 본딩을 한 오메가가 커튼을 걷어내고 창문을 열었다.

“어서 와요.”

알렉세이는 버림받은 개처럼 축 앉아 있다가 활짝 웃으며 아인을 올려다봤다.

“응.”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너무나 행복한 일이었다. 물론 알렉세이가 돌아갈 곳은 언제나 자신의 가이드가 있는 데였다. 아인이 왔으면서 왜 말을 안 하냐며 꿍얼거렸다.

알렉세이는 그의 잔소리조차 좋았다. 아인의 방에 딸린 욕실에서 씻고 그가 준 잠옷을 입었다. 조세핀이 봤으면 아인을 황궁에서 내보낸 의미가 없지 않냐고 한 소리 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것은 감금이 아니었다. 아인은 자발적으로 그와 함께해 주고 있었다.

사랑하는 약혼자의 침실을 밤에 몰래 방문하는 건 장인 어른한테 ‘도둑놈의 새끼’라고 얻어터질 만한 행동일 뿐이었다.

밤늦게 같이 야식을 먹자고 아인을 찾아온 샤를이 팔짱을 끼고 알렉세이를 노려봤다. 알렉세이는 헛기침을 하며 등 뒤로 손을 숨기고 아공간을 열었다. 임신하면서 식탐이 많아진 오메가를 위해 항상 상비해 두는 간식들을 꺼냈다.

“아인이가 먹고 싶다고 해서 배달 왔어. 이만 가보도록 할게.”

아인이 알렉세이 손에서 간식들을 챙겨 들었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한 알렉세이는 얼른 모래궁에 있는 본인 침실로 돌아갔다.

피눈물을 흘리며 녹아내리는 검은 슬라임과 눈이 마주쳤다. 누가 천재 화가 아니랄까 봐 쓸데없이 잘 그렸다. 금방이라도 캔버스에서 검은 슬라임이 자신에게 손을 흔들 것 같았다.

그림 속 검은 슬라임의 눈치를 보며 알렉세이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헬링턴이 흑마법사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동안 그토록 원망하던 황제가 그냥 마족의 힘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던 것뿐이라는 사실이 알렉세이를 더욱 혼란케 했다. 물론 황제가 이용당해 제논을 살해한 것뿐이라고 하더라도, 알렉세이는 그를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괜히 원망해야 하는 마음이 어지러워져 기분만 더러웠다.

황제의 탄신일이 몹시 기대됐다. 모두의 앞에서 황후가 흑마법사라는 게 밝혀지고, 과거에 황제가 죄 없는 황후를 살해했으며, 2황자가 황제의 아들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 이 나라가 뒤집어질 것이다.

알렉세이는 눈두덩이 위에 올린 팔을 치우고 중얼거렸다.

“보고 싶다. 우리 아인이.”

샤를과 언제쯤 야식을 다 먹을까 시간을 가늠하고 바로 자신의 제2의 침실이 된, 발코니로 공간 이동했다. 뭘 먹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아인이 곯아떨어져서 자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고 먼저 자버린 아인이 서운했다. 창문을 닫고 방에 들어와 침대 밖에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너한테 위로받고 싶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아인이 눈을 번쩍 뜨더니 외쳤다.

“까꿍!”

당황해서 크게 떠진 알렉세이의 눈이 미소로 가늘어졌다.

“어때요. 놀랐죠? 나 배불러서 졸렸는데 안 자고 기다렸어요. 히히.”

“응. 고마워.”

얼른 침대에 올라선 알렉세이는 아인을 꼭 끌어안았다. 황제에 대해 첨예했던 원망과 분노가 녹슨 것 같아 기운을 잃었던 알렉세이는 아인과 아기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황실 정리를 멈추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다.

궁에서 일하는 요리사들을 의심하고, 음식마다 독이 들었는지 기미를 보게 하는 걸로는 그의 불안이 가라앉지 않았다. 자신의 가이드와 아이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유르한 황실에서 위험 요소들을 싹 다 도려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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