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인은 가족들과 아침 식사를 하고, 이따 프란츠와 만나서 놀기로 했다. 도주가 아닌 본격적인 외출은 처음이어서 무지 설렜다.
체사레에게 슬쩍 함께 가자고 했는데 애어른은 바쁘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아인은 토끼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자는 어린이한테 중요한 일이 있어봤자 낮잠 자는 거겠지 싶어 살짝 토라졌다.
혼자 드레스룸으로 갔다. 시종들이 이때가 기회다 싶어 달려왔다. 그리고 아인만 모르는 귀족 사회 패션의 최신 유행을 간단히 브리핑했다. 도련님의 검소한 취향에 맞춰 최대한 디자인은 수수하지만, 재질과 색으로 승부수를 던진 옷을 보여주었다.
아인은 분홍색 셔츠를 다섯 살 이후로 입어본 적 없다고 적극 거부했다. 정작 다섯 살 때도 분홍색 옷은 입어준 적 없으면서 말이다.
도련님의 사교 활동만 목놓아 기다리던 의복 담당 시종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평소처럼 우중충한 검은색 바지와 흰 셔츠를 가져오는 척했다.
매칭률 검사를 하면서 매직 미러에 모습을 드러낸 아인은 그들이 수년 동안 지켜본 모습과 굳건하게 똑같았다. 마치 그들의 도련님은 흰색 셔츠와 검은 바지를 문신으로 새겨놓은 듯했다.
아인이 입은 옷을 본 제국민들은 그의 시종 같은 옷차림을 보고 백작 부부가 학대한다고 떠들어댔다. 아인 페르디안이 그림을 그려서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는데 고작 저런 거적때기를 입히냐며, 대중은 분노했다.
귀족 사회에서 검소한 옷차림은 미덕이 아니었다. 화려하고 비싼 옷은 귀족의 신분을 증명하고, 얼마나 가문에서 사랑받고 있는지를 유추할 수 있게 해주는 지표였다.
페르디안 가문에서는 아인의 옷을 보고 분노하는 팬들에게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해야 했다. 아인이 입은 옷은 평범해 보이지만, 엘프 마을에서 구입한 최고급 실크를 장인이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것이라고. 워낙 팬들의 지랄이 심해서 엘프 마을에서 원단을 구입한 영수증까지 공개해야 했다.
그렇지만 페르디안 가문에서 일하는 의상 담당 시종들이 아름다운 도련님을 시기 질투해 저런 초라한 디자인의 옷을 입혔다는 비난은 피해갈 수 없었다.
아인이 황궁에 있어서 그런 거라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1황자 궁에서 시종이 찾아와 아인의 옷을 받아 갔다. 도련님께서 무려 황실에서 준 의상이 마음에 안 든다고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아인의 골수팬들 중 고위 귀족들이 많았기에 그들은 이런 속사정까지 꿰뚫고 있었다. 그렇게 아인의 패션 테러 행위는 페르디안 가문에서 일하는 시종들의 잘못이 되었다.
그들도 나름 유명 패션 아카데미에서 졸업장을 딴 수재들이었기에 이런 불명예스러운 오명을 벗고 싶었다.
시종1이 눈짓을 보냈다. 옷을 가지고 오던 시종2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3은 얼른 테이블에 딸기주스를 따랐다. 눈치 없는 아인이 딸기주스를 마시려고 들었다. 시종2가 얼른 테이블 위로 넘어졌다.
“아이구야.”
“히스,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그런데 어쩌죠, 도련님? 옷이 더러워지고 말았어요. 딸기 씨까지 붙어서 회생 불능이에요. 준비해둔 옷을 입어야겠어요.”
“똑같은 거 열 벌 있잖아. 아무거나 가져와.”
시종1이 뻔뻔하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양심에 털이 난 존재라 순진한 도련님에게 거짓말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옷이 너무 오래돼 삭아서 버렸습니다.”
“아, 아깝게 그걸 왜 버려. 앞으로 10년은 더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인이 끔찍한 소리를 했다. 10년 동안 같은 옷을 입겠다고?
“어쨌든 그렇게 되었으니, 이 분홍색 셔츠를 입도록 하세요.”
분홍색 루즈핏 셔츠였다. 소매에 황금빛 프릴 스트랩이 달려 있었다. 아인의 눈에는 마법 소년이 갑자기 변신 마법을 부릴 것 같은 의상이었다.
“이 바지 좀 보세요. 도련님, 하얀색 벨벳이라니. 너무나 고급스럽고 아름답지 않습니까.”
귀여운 아기 물범이 떠올랐다. 가뜩이나 삐쩍 마른 주제에 엉덩이만 커서 저 바지를 입고 걸어 다니면, 다들 아인의 엉덩이를 보고 놀릴 것 같았다. 아인은 오늘 외출을 취소해야겠구나 싶어 얼른 프란츠에게 연락했다.
“프랑, 미안한데 나 오늘 같이 못 놀 것 같아.”
“왜? 나 다 왔어. 너희 저택 앞이야.”
“미안. 그런데 우리 집에 분홍색 옷밖에 없나 봐. 시종들이 엄청 이상한 걸 나보고 입으래.”
“기다려 봐. 내가 봐줄게.”
시종들은 프란츠가 와서 제발 자신들의 편에 서주길 기도했다. 아인은 프란츠에게 하소연하기 위해 부담스러운 옷을 입은 채 기다렸다.
오렌지색 셔츠와 남색 바지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프란츠가 드레스 룸으로 들어왔다.
“우와! 아인아, 너 무지 예쁘다. 잘생기고, 섹시하고, 고급스러워 보여! 진짜 놀랍다. 네가 이런 옷을 입는 날이 올 줄이야. 이러고 나가면 알파들이 다 너한테 반해서 쫓아오는 거 아니야?”
친구라고 믿었건만 프란츠가 되지도 않는 말로 아인을 현혹하려고 했다. 프란츠가 주인 주위를 뱅글뱅글 도는 강아지처럼 굴면서 말했다.
“이 소매에 달린 프릴 스트랩 좀 봐. 센스 죽이는데. 아인이 머리랑 눈 색에 맞춘 거지?”
“예, 그렇습니다. 프란츠 님.”
지원군이 나타났다. 시종3은 슬그머니 눈꽃 모양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보석함에서 꺼내왔다. 프란츠가 얼른 그것을 받아 아인의 가슴팍에 달았다.
아인은 얼떨결에 프란츠에게 끌려서 나오게 되었다. 프란츠가 이 모습을 샤를과 레이나에게도 보여줘야 한다면서 그들을 찾아갔다.
집무실에서 서류 작업 중이던 샤를이 벌떡 일어났다.
“맙소사! 내 아들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오메가로 자라나다니. 아인아….”
아무리 봐도 이거 짠 거다. 아인은 거대한 흑막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계획한 거라 믿었다. 시녀들과 함께 정원에서 배드민턴을 치던 레이나가 프란츠에게 끌려다니는 아인을 보고 손에서 채를 놓쳤다.
“아인아… 이럴 수가. 내 아들이! 내 아들이!”
충격적이리라. 아들이 분홍색 셔츠에 흰 바지를 입었으니, 입에 게거품을 물어도 이해할 수 있었다.
“드디어 사람처럼 옷을 입었어! 누구야. 이런 엄청난 공은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이번 달 월급 두 배 쳐줄게.”
백작과 백작 부인의 반응이 궁금해 아인을 쫓은 시종 셋은 조용히 백작 부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이럴 게 아니야. 당장 기념해야지, 오늘 아인이가 처음으로 옷을 차려입은 날이니 성대하게 축하하자.”
그동안 도련님이 이상한 고집을 부려 속 썩던 백작 부인의 마음을 알기에 시녀들이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시종장은 파티 준비를 하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저택으로 달려갔다.
아인은 레이나까지 분홍색 옷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체사레에게 마지막으로 검증받기로 했다. 프란츠가 “너 정말 오늘 멋지거든. 내 말 맞을걸.” 하며 자신만만해했다.
“아니거든. 프랑, 나랑 내기할래?”
“그래,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아인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프란츠에게 자신이 내기에서 이기면 쿠키 셔틀로 써주겠다고 아옹다옹했다. 시종들에게 물어서 동생을 찾았다.
체사레는 아인의 예상과 달리 샤를처럼 상단 일을 보고 있었다. 입이 떡 벌어졌다. 아인을 향해 수줍게 웃던 체사레는 어디 가고 그는 상단 직원을 무시무시하게 째려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서류가 너풀너풀 공중을 날아 바닥에 떨어졌다.
“지금 이걸 최선이라고 가져온 겁니까. 확실해요? 다시 해오세요.”
직원이 시무룩해져서 떨어진 보고서를 주워서 나갔다. 아인은 체사레를 동생으로 둬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뒤늦게 아인을 발견한 체사레가 깜짝 놀라며 당황했다.
“저… 형, 언제부터 오셨어요?”
“방금. 직원 혼낼 때부터요.”
아인은 무서운 동생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쭈굴쭈굴. 최대한 어깨를 웅크린 채 체사레 눈치를 봤다.
“그… 오해예요. 제가 평소에는 친절하게 혼내는데, 저 직원이 엄청나게 큰 잘못을 저질러서 그만.”
“응… 그렇구나.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데?”
진짜 큰 잘못을 저질렀나 보다. 하긴 착한 체사레가 괜히 드라마 속 싸가지 없는 재벌 2세 남자 주인공처럼 굴 리 없었다.
“글쎄 맞춤법을 틀렸지 뭐예요. 하 참. 어이없어. 도대체가 보고서 써오는 기본이 안 되어 있어.”
아인은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았다. 체사레를 출판사 편집장으로 만났으면 동화책 출간은 꿈도 못 꿨을 거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으응. 그냥 외출하기 전에 뭐 사다 줄 거 있나 싶어서요.”
“형, 서운하게 왜 존댓말 써요.”
체사레가 손가락에 에그롤 과자를 끼었다. 작은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에 앉은 체사레에게서 성공한 사업가의 후광이 보였다. 아인은 위대한 체사레에게 감히 반말을 써도 되나 걱정되었다.
나중에 뽀브스가 선정한 청소년 사업가 재벌 1등으로 선정되면 축하의 말을 전해야겠다. 촐싹거리는 프란츠도 체사레 앞에서 얌전을 떨었다……는 아니었다.
“와, 네 동생 엄청 멋지다.”
“응. 맞아.”
아인은 뿌듯해져서 프란츠에게 턱을 치켜들었다. 자신이 존댓말을 썼다고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과자를 먹는 체사레와 서류가 잔뜩 쌓인 책상 위에 올려진 잉잉이 인형을 보고 웃었다.
어쨌든 아직 어리니깐.
“체사레, 형 놀러 갔다 올게.”
“네!”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한 체사레가 웃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가는 아인을 붙잡는 동생의 말에 프란츠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형, 오늘 무지 예쁘세요.”
프란츠가 재수 없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인은 손으로 프란츠의 손바닥을 때리듯 마주쳤다.
“내가 이겼다. 앞으로도 이렇게 입고 다녀. 네 시종들이 너 때문에 마음고생을 얼마나 하는 줄 알아?”
“뭐? 시종들이 왜 마음고생을 해?”
“에휴. 말하자면 길다. 네 팬들이 오죽 열혈 추종자여야지.”
프란츠의 소원은 앞으로 시종들이 입으라는 옷을 군말 없이 입기였다. 아인은 알겠노라 대답했다.
어차피 매번 프란츠가 옷 입을 때마다 곁에서 지켜볼 게 아니어서 대충 그러는 척하려는 수작이었다. 그런데 시종 삼인방이 나타나 계약서를 내밀었다.
“이런 계약은 무조건 증거를 남겨야 합니다. 저희가 서류를 준비해 왔습니다.”
아인은 만년필을 건네받았다. 눈을 질끈 감고 서류에 이름을 적었다. 시종들은 언제 나타났냐는 듯 계약서를 가방에 넣고 사라졌다. 프란츠가 잉잉 우는 아인을 억지로 마차에 태웠다.
“그만 울어. 이만 진실을 받아들이지 그래. 솔직히 너 재수 없을 정도로 잘생기고, 아름답다고.”
“훌쩍. 친구야. 고맙다. 너도 엄청 잘생겼어.”
“야, 아인 페르디안. 너 솔직히 내 말 안 믿지.”
“응.”
고개를 끄덕이는 아인을 보며 프란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변 인물들이 문제였다. 레이나는 유르한 제국 최고의 미녀이고, 주치의 디디는 무려 엘프였다.
감옥에 있느라 오랫동안 함께하지 못했지만 샤를은 어떠한가. 갓 태어난 아기도 반해서 기어 올 만큼 엄청난 미남이었다.
애초에 페르디안 가문의 시조부터가 ‘잘생긴 기사 한 명쯤은 이 제국에 있어도 괜찮잖아.’라는 황당한 이유로 작위를 받은 미남이었다.
그 후 마법이라도 부려서 얼굴을 복사하기라도 했는지, 귀족이 될 만큼 잘생긴 시조를 빼닮은 후손들이 계속해서 태어났다.
저택 복도에 걸려 있는 역대 가주들의 초상화를 보면 너무 잘생긴 탓에 이질적이어서 소름 돋았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랐으니 아인이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믿어도 어쩔 수 없지 싶었다.
자꾸 화려한 옷에 적응하지 못한 아인이 몸을 움츠렸다. 프란츠는 어쩔 수 없이 부스럭거리는 아인을 쳐다보고 제 얼굴을 비교하게 됐다.
속으로 자신은 못생기지 않았다고 외쳤다. 다만 아인 페르디안이 비정상적으로 잘생긴 것뿐이었다.
***
수군수군. 프란츠와 함께 제나 쿠키를 사러 줄을 선 아인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줄을 선 사람들이 아인을 보고 옆 사람과 뭐라 뭐라 떠들어댔다. 힐끔거리는 눈빛이 딱 학창 시절 왕따였던 과거의 교실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흔히 일진이라 불리는 잘나가는 놈이 아인에게 너 고아냐고 큰 소리로 물으면서 반 아이들의 따돌림이 시작되었다. 심각한 폭력이나 폭언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여름에 에어컨 코앞이라 추운 자리에 아인을 앉게 한다든지, 주번도 아닌데 쓰레기통을 비우라고 하는 식이었다. 이제 곧 수업 시간인데 빵 심부름을 가야 하는 일도 있었고, 체육 시간에 같이 배드민턴을 할 짝을 구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자신의 책상 서랍에 쓰레기가 가득 넣어져 있고, 책가방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잃어버리고는 했다. 스승의 날에 반 아이들이 모은 돈이 사라지자 아인이 범인으로 몰리기도 했다.
초중고 12년 동안 그런 짓을 당했다. 선생님은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인은 그렇게 묵묵히 학교를 다니고 졸업했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워낙 마음이 상처투성이여서 아이들의 따돌림을 신경 쓸 정신머리가 없었을 뿐이었다.
“아인이야. 아인 페르디안이라고.”
자신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누가 옆 사람 팔뚝을 퍽퍽 때려댔다. 어떤 이는 펄쩍펄쩍 뛰며 호들갑 떨었다. 마치 예전에 진주가 방에서 바퀴벌레 나왔다고 침대에 뛰어 올라갔던 모습 같았다.
‘그래, 내가 그 아인 페르디안이다. 어쩌라고.’
“장난 아니다. 실물 처음 봐. 진짜 끝내준다. 인간이 아닌 것 같아.”
“머리 작은 것 봐. 완전 인간 복숭아다.”
‘인간 맞거든. 누구 마음대로 날 과일 취급해.’
“저… 먼저 지나가세요. 저희는 괜찮아요.”
앞사람이 가까이 서 있기조차 싫은지 아인과 프란츠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아인은 이래봤자 네 손해다 하며 기꺼이 자리를 양보받았다. 앞으로 이동하자 그 앞사람도 자리를 양보했다. 그 앞앞 사람도, 그 앞앞앞 사람도….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2시간짜리 줄을 서지 않고 가게에 입성할 수 있었다. 프란츠가 뭐 잘못 먹었는지 아인에게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렸다.
“친구 잘 둔 덕에 빨리 왔네. 앞으로 아인이 너랑 쿠키 사러 와야겠다.”
아인은 입술을 오리처럼 삐죽 내밀었다.
‘그래, 네 친구가 국민 기피남이라 좋겠다.’
프란츠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라고 했다. 자기가 첫 외출을 기념해서 사주겠단다. 역시 프란츠만 한 친구가 없었다.
국민 왕따랑 어울려주는데 감사히 여길 줄도 모르고, 자신이 참 배은망덕했다. 프란츠에게 얼마나 사도 되냐고 물었다. 제나 쿠키는 곰돌이 틴 케이스를 크기에 따라 다섯 단계로 나눠서 팔았다.
“제일 큰 거 사도 돼.”
“칭구양. 고마웡.”
만일 프란츠가 애 딸린 유부남이 아니고, 자신도 변태이지만 잘생긴 알렉세이가 없었으면 방금 썸이었다. 아인은 유리 진열장에 달라붙어서 달콤한 잼이 듬뿍 발린 쿠키들을 들여다봤다.
황홀하다. 달콤이가 이름값 하는지 아주 단 것만 보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직원에게 종류별로 한 개씩 담아달라고 했다.
사람 몸통만 한 곰돌이 틴 케이스에 차곡차곡 보석 같은 쿠키가 담겼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이건 서비스예요.”
직원이 ‘너처럼 설탕중독자인 녀석은 처음이다. 우리 가게 와서 돈 많이 썼으니 또 호구질 하러 오라고 준비했어.’ 라는 의미가 담긴 뇌물을 건넸다.
아인은 손바닥만 한 곰돌이 틴 케이스를 덤으로 받았다. 프란츠와 구매한 쿠키와 차를 마시기 위해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공짜라서 더 소중한 곰돌이 틴 케이스를 손에 꼭 쥐고 자리에 앉았다. 시종이 아인이 산 어마어마한 쿠키가 든 종이봉투를 들고 옆에 섰다.
아인은 자신과 프란츠의 시종에게 쉬고 있으라며 자리를 사줬다. 한국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이곳에서는 음식값과 자릿값을 별도로 받았다.
프란츠가 자기는 수십 번 넘게 와도 그런 거 받은 적 없었다며 툴툴거렸다. 아인은 의아해졌다.
‘그럼 왜 받은 거지? 혹시 호라이슨의 추종자가 독극물 테러를 하기 위해 준 건가?’
그러고 보니 텔레비전에서 유명 아이돌에게 팬인 척 다가온 안티가 본드를 넣은 포도 주스를 건넸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기쁨을 줬던 곰돌이 틴 케이스가 갑자기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잘못 먹었다가는 달콤이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아인은 가게 안에 있는 쓰레기통에 직원이 준 선물을 버렸다.
은밀하게 지켜본다고 여겼지만 실상은 아주 노골적으로 아인 페르디안을 관찰하고 있던 사람들의 입이 동시에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열렸다.
그들은 아인에게 안 들리게 하겠다며 속삭이듯 말했지만, 그 소리들도 모이자 제법 컸다. 물론 정확한 내용까지 다른 테이블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한 소리로 뭉쳐 웅얼웅얼 들릴 뿐이었다.
“시종한테 버리라고 시키지 않고, 자기가 직접 버리는 거 봤어? 상대방 오해하지 말라고 아주 단호하게 대응하네.”
“페로몬 안 느껴지는 거 보니까 각인한 것 같더라. 각인 전에 한번 맡아봤어야 했는데.”
“부럽다. 부러워. 도대체 그분은 전생에 무슨 공을 세워서 남자 관리 확실한 저런 참한 오메가를 만난 걸까.”
아인은 자신이 쓰레기통에 곰돌이 틴 케이스를 버리자 가게 안이 어수선해지는 걸 느꼈다. 우연의 일치이리라. 제자리에 돌아와 프란츠와 오렌지 루이보스 차를 마시면서 쿠키를 먹었다. 시종들에게는 다즐링 홍차를 사줬다.
오독오독 앞니로 쿠키를 야금거리며 먹고 있는데, 갑자기 가게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뭔가 싶어서 출입구를 쳐다봤다. 짧은 펠러린이 달린 청녹색 코트를 입은 중년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착각이 아닌지, 중년 여인이 아인을 보고 웃었다. 눈가에 접힌 주름이 흉하지 않고 세월의 고상함처럼 느껴질 만큼 미인이었다.
머리카락과 눈 색이 다르지만 중년 여인과 비슷한 이미지의 잘생긴 알파를 아인은 알고 있었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 함께 침대에서 뽀뽀를 했던 알렉세이 유르한이었다.
세상에는 똑같이 생긴 사람이 세 명 있다고 하더니만, 정말인 것 같았다. 제나드와 알렉세이, 그녀가 몹시 닮아 있었다.
중년 여인이 성큼성큼 걸어서 아인이 있는 테이블까지 왔다. 시종들과 기사들이 일어나 그녀에게 허리를 숙였다.
“이사벨라 체이서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고용인들뿐만 아니라 가게 안에 있는 모든 귀족들이 일어나 그녀에게 살짝 무릎을 굽혔다. 아인도 눈치껏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다들 자리에 앉으세요.”
공작 부인의 한마디에 귀족들이 착석했다. 존멋이었다. 권력 맛에 취하겠다. 이런 게 바로 군대와 신분제 사회에서만 볼 수 있다는 ‘계급이 깡패다’의 표본이지 싶다.
아인에게 이사벨라가 웃으면서 동석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아, 예. 공작 부인께서 저희와 함께해 자리를 빛내주신다면 영광입니다.”
시종이 공작 부인의 외투를 받아 가려고 했다. 이사벨라가 더위 때문에 땀을 흘리면서도 이를 거절했다.
“괜찮으니, 물러나거라.”
아인과 프란츠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녀가 눈을 찡긋했다. 상체를 테이블에 숙이고 은밀하게 귓속말을 시도하기에 그들도 덩달아 상체를 숙이고 귀를 기울였다.
“사실 급하게 나오느라 안에 잠옷 차림이랍니다. 어제 밤늦게 드라마를 보다가 늦잠을 잤지 뭐예요.”
공작 부인이라는 상위 포식자 계급이면서 왜 백작 아들과 같은 쩌리에게 이렇게 살갑게 대해주는지 모르겠다. 불안감에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아인의 손을 이사벨라가 덥석 잡았다.
“아….”
왜 하필 이런 기회가 임신하고 나서야 찾아오는 걸까. 여자랑 연애해도… 되는 거겠지?
아인은 비록 그녀가 연상이지만 엄청난 미인이기 때문에 마음을 받아주기로 했다. 알렉세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똑같은 얼굴이라면 여자 쪽이 좋았다.
머릿속에서 이사벨라와 결혼식장에 들어섰다. 알렉세이가 으앵으앵 우는 달콤이를 안고서 손수건으로 젖은 눈가를 찍었다.
마음이 약해진 아인은 이사벨라의 손아귀에서 손을 뺐다.
“죄송해요. 저 임신한 오메가예요. 공작 부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풋.”
프란츠가 입에서 홍차를 뿜어냈다. 얼른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지만 더러우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놀고 헤어져야겠다. 이사벨라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내가 언제 아인 공자에게 사랑 고백을 했던가요?”
“제 손을 잡으셨으면서.”
아인은 레이나 빼고 여자 손을 잡는 게 처음이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발그레한 뺨을 식히기 위해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내가 오해하게 했나 보군요. 미안합니다.”
그럼 사귀지도 않을 거면서 왜 합석하자고 하고 손을 잡는단 말인가. 어차피 달콤이 때문에 사귈 수 없는데도 이사벨라에게 차인 것 같아 야속함을 느꼈다.
“드디어 내 조카의 가이드가 바깥나들이를 했다는 소리를 들어서 만나 뵙고 싶어 급히 왔습니다. 다시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나는 알렉세이 유르한의 고모 이사벨라 체이서예요.”
쪽팔려. 어디 쥐구멍 있으면 숨고 싶다.
“공작 부인, 아인이는 원래 엉뚱해요. 이해해주세요.”
프란츠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몹시 귀엽네요. 이런 모습에 1황자 전하께서 푹 빠졌나 봅니다.”
그녀가 온화하게 웃으면서 아인을 이해하고 넘어가 줬다. 프란츠는 제법 공작 부인과 안면이 있는지 친근하게 대화했다. 아인은 슬쩍 귓속말로 언제 공작 부인을 만나봤냐고 물었다.
“눈치가 없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을 수가! 제나드 체이서. 이사벨라 체이서. 두 이름 듣고 뭐 느끼는 거 없어? 둘이 모자지간이라고.”
하지만 제나드는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였다. 그의 풀네임까지 자신이 기억하기에는 이 소설은 너무나 거칠고 엄청난 19금 이야기들이 넘쳐났다.
“어? 그럼 제나드와 알렉세이가 사촌이네.”
도플갱어들인 줄 알았는데 셋이 만날 걸 걱정할 필요 없겠다. 이사벨라가 작게 쿡쿡 웃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 아인 공자가 좋은 오메가 같아서 한시름 놓입니다.”
“공작 부인,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아닙니다. 장차 이 나라의 황후가 될 분이 아니십니까.”
황후라니. 꿈도 꿔본 적 없었다. 물론 1황자인 알렉세이가 황태자가 되고, 황제가 되어 자동으로 자신의 신분도 상승하겠지만 그것을 염두에 두고 그를 만난 적 없었다.
자신같이 평범한 방구석 폐인이 황후가 되는 건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대에서 살았을 때 학창 시절에 한 번도 반장은커녕 조장조차 되어본 적 없는 자신이었다.
아인은 진지하게 황후가 되지 않기 위해 미혼부가 되어야 하나 고민해봤다. 자신은 그림 그리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하다못해 달리기도 잘 못할 만큼 평균 이하에 속한 사람이었다. 이런 자신이 황후가 되면 이 나라가 망할지도 몰랐다.
예상치 못했던 중압감에 명치가 아팠다. 슬쩍 눈치를 보며 야트막한 배를 쓰다듬었다. 황후 되기 싫어서 도망가는 건 너무 양아치인가?
알렉세이가 무지 상처받을 것 같다. 그렇다면 방법은 2황자가 황제가 되는 거였다. 문제라면 원작 속 착한 황자님은 어디 갔는지, 속에 악역수가 들어간 것처럼 자신에게 이상한 캔버스를 보내 테러를 가한 존재라는 거였다.
겉과 속이 다른 2황자가 유르한 제국을 다스리면 나라 꼴이 가뜩이나 개판인데 더 끔찍한 지옥으로 변할지 몰랐다.
할 수 없이 이 나라의 명운을 위해서는 알렉세이가 황제로 즉위해야 했다. 그럼 자동적으로 아인은 황후가 된다. 끄응. 엄청난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어머, 아인 공자, 어디 아픈가요? 안색이 안 좋아요.”
“공작 부인, 비혼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자기 이게 무슨 개망나니나 할 것 같은 질문일까요? 설마 우리 순진한 알렉세이를 농락하고 딴 생각이세요?”
눈치가 겁나 좋았다.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게 사전에 저지하는 기술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사벨라의 입꼬리가 올라갔으나 눈매는 몹시 매서웠다. 당장 알렉세이랑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앞에 놓인 뜨거운 차를 얼굴에 끼얹어 버릴 것만 같은 살벌함이었다.
어째서 드라마와 현실은 반대인 걸까. 드라마에서는 보통 너 같은 건 우리 아들이랑 안 어울린다며, 돈 봉투나 받고 꺼지라고 하는데. 공작 부인은 돈 봉투는 안 꺼내고 ‘비혼주의’라는 단어 하나 꺼냈다고 사람을 죽일 것처럼 굴었다.
아인은 벌벌 떨며 말을 바꿨다.
“저는 적극 반대합니다. 당연히 알파와 오메가가 만났으면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호호호. 맞아요. 아인 공자의 생각이 참 바릅니다. 백작 부부께서 아들을 참으로 잘 키우셨습니다.”
실패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고 미래에 황후가 되게 생겼다. 아인은 자포자기하며 창밖을 내다봤다.
‘달콤아, 아빠 이제 황후 되게 생겼어. 물론 그 전에 황태자비가 되겠지만, 그 말이 그 말 아니겠니?’
“결혼한대!”
“이제 곧 결혼하나 봐.”
“대박, 어머니. 아인 페르디안이 결혼한대요.”
가게 안에 있던 귀족들이 죄다 휴대용 통신 마도구를 들고 아인 페르디안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지인에게 날랐다. 아무리 눈치 없는 아인이어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소란이었다.
오랫동안 집착광공을 피하고자 자발적 감금 플레이를 했던 아인에게 이러한 외적 자극은 과도한 스트레스와 공황 상태를 가져왔다.
아인은 친구고, 시종이고, 공작 부인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그 자리에서 도망쳐 버렸다. 가게 밖으로 뛰쳐나왔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이 다 아인의 이름을 불렀다.
“으으으.”
몸이 얼어붙었다. 무서워서 찌질하게 다 큰 어른이 울고 말았다. 대놓고 구경꾼이 몰려와 그런 아인을 구경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아인은 이대로 자신이 숨을 쉬지 못해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익숙한 알파 페로몬이 아인을 보호하듯 감쌌다. 그가 손으로 아인의 눈을 가린 채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괜찮아. 나야.”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아인의 이름을 불러대던 관중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하늘 높이 올라갔다. 알렉세이는 마치 파티에서 춤을 출 때처럼 아인의 허리를 끌어안고 걸었다.
웬디를 구하러 온 피터팬처럼 알렉세이가 웃었다.
“왜 그렇게 얼어 있어. 아인아, 별거 아니야. 다들 널 좋아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뿐이야.”
아인은 펑펑 울면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웅얼웅얼 하소연했다. 제대로 논리 있게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알렉세이가 기똥차게 알아들었다.
“황후가 되는 게 그렇게 싫어?”
“훌쩍. 나는 진짜 그런 높은 자리에 앉을 만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토끼한테 갑자기 숲속의 제왕 호랑이가 되라고 하면 되겠어요?”
“그러네. 우리 아인이는 귀여운 토끼인데, 호랑이 하라고 하면 안 되지.”
그가 손끝으로 아인의 눈가를 쓸어 눈물을 닦아냈다. 아인은 알렉세이가 제 마음을 알아줘서 고마웠다.
“그럼 황후 자리가 부담되는 거 빼면 나랑은 결혼하고 싶은 거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큰 문제가 있는 게 아니면 알렉세이랑 결혼해 아이에게 가족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레이나와 샤를을 통해 완벽한 가정이 얼마나 큰 행복감을 주는지 배워서 더 ‘가족’이란 구성체가 욕심났다.
알렉세이는 변태지만 좋은 사람이니 믿고 그에게 ‘남편’과 ‘아버지’ 역할을 줄 수 있었다.
“알았어.”
“응? 그게 끝이에요?”
“난 무엇보다 네가 소중해. 모든 걸 다 포기한다고 할지라도 너 하나만 택할 수 있다면 상관없어.”
과연 집착광공이었다. 원작과 달리 좋은 쪽으로 풀려서 다행이긴 하지만, 자신 때문에 황제 자리를 포기하는 건 싫었다. 도대체 어쩌라고 이러나 싶다.
열심히 호라이슨이 이 나라의 황제가 되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설명했지만, 그는 그러냐며 심드렁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망하라고 해. 우리는 다른 나라 가서 살면 돼.”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편이 계속 찜찜했다. 알렉세이의 도움으로 무사히 자신의 방과 연결된 3층 테라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알렉세이가 바람둥이처럼 손으로 쪽 뽀뽀를 날리며 작별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아인은 통신 마도구로 제나 쿠키 가게에 버리고 온 프란츠에게 연락했다.
당황해서 먼저 집에 와버렸다는 소리에 마음씨 착한 친구는 다음에 맛있는 거 사라고 할 뿐 화내지 않았다.
“원래 임신하면 기분이 극적으로 바뀌더라. 아인이 너도 너무 안 좋은 쪽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말고, 달콤이를 위해서라도 잘 먹고 잘 쉬어.”
“고마워. 프랑.”
“됐어. 우리 사이에. 공작 부인께서 너한테 미안하다고 전해달래. 자신이 못되게 굴어서 네가 도망친 줄 알더라고. 내가 일단 너 숨는 병 있다고 알려드렸는데 다음에 네가 잘 말씀드려.”
배려심 있기도 하지. 어쩜 뒤처리를 이렇게 깔끔하게 해줬을까.
“프랑, 사랑해!”
“오냐. 쉬어라.”
통화를 끊고,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아 메리골드 입욕제를 뿌렸다. 옷을 벗고 손으로 물을 떠서 몸에 살짝 뿌렸다. 뜨거운 온도에 몸을 적응시킨 후 발부터 물에 담갔다. 한 거는 없었지만, 하루의 노고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역시 전생에서도 그렇고, 현생에서도 방 안에서만 갇혀 살아서 그런지 약간 사람들이 무서웠다. 친구들처럼 친한 사람들은 괜찮았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여러 명 몰려 있는 곳은 무리였다. 광장 공포증 같기도 했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린 꽃잎을 잡는 놀이를 하다가 수도전이 드디어 금빛으로 바뀐 걸 봤다. 이게 뭐라고 기쁜지 모르겠다.
“헤헤. 예쁘다.”
우울했던 기분이 풀렸다. 목욕을 다 하고 나왔을 땐 상쾌하기까지 했다.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며 <대파로도 때리지 말아라>를 읽었다. 샤를이 자신의 인터뷰가 실렸다면서 선물해준 에세이였다.
내용을 살피니 고아들이 어른들의 폭력과 폭언에 노출되어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쓴 거였다. 글쓴이는 유르한 제국에서 후작이라는 높은 직위를 가진 귀족이었다.
그는 1년 전 가족들과 외국으로 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사과 하나 훔치려다가 가게 주인에게 대파로 두들겨 맞는 고아 아이를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이야기는 더 확장되어 잘못된 귀족주의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이어졌다. 힘없는 아이들을 학대하는 어른과 평민을 학대하는 귀족이 같다는 맥락이었다.
귀족들이 스스로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은 명령과 매질이었다. 귀족이란 이유로 다른 계층을 배척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권위를 위협하면 같은 귀족도 무리에서 제외하는 배타적 이기주의를 그는 꼬집었다.
그 사례로 하인리히 후작은 샤를 페르디안 백작과의 인터뷰를 에세이에 실었다. 10년 전, 같은 귀족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샤를 백작은 억울한 감옥 생활을 하고 나온다.
그러나 귀족 사회는 그들의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로 치부하며 샤를 백작을 따돌린다. 이 따돌림은 사업을 하는 데에까지 영향을 끼칠 만큼 잔인했다.
그런데 기디언 백작이 사실 죽지 않고 시종으로 위장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귀족들의 태도가 백팔십도 돌변한다.
샤를 백작이 귀족을 죽인 귀족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돌변한 귀족들의 태도에 환멸을 느낀 샤를 백작은 그를 반겨주는 귀족들이 있는 파티에서 떠나버린다.
샤를 백작은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던 중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풀칠을 하지 않은 전단지를 아이가 벽에 붙이는 모습이었다.
샤를 백작은 신기해하며 마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비법을 전해 듣고 아이에게서 그 아이디어를 사려고 한다. 바로 그 아이가 페르디안 백작 가문에 입양된 체사레였다.
아인은 아버지의 인터뷰를 통해 그가 자신 때문에 이렇게나 힘든 일을 겪었구나 싶어 죄송했다.
반면 샤를은 과거 자신이 아들을 구해낼 수 있었고, 비록 힘든 시기를 겪기는 했지만 귀족주의에서 벗어나 똑똑한 아이를 입양할 수 있게 머리를 틔워준 ‘가르침’을 감사히 여긴다고 인터뷰했다.
자신의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그는 정말이지 멋졌다. 아인은 웃긴 제목만 보고 가벼운 편견을 가졌던 걸 반성했다. 하인리히 후작은 썩어버린 귀족 사회의 원인 또한 자신의 에세이에 정확하게 저술해뒀다.
그는 귀족들이 이렇게까지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 데 열중하는 것은 그들이 모두 에스퍼와 가이드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능력자는 계급과 상관없이 태어났다.
지금의 귀족들은 그들의 선조가 유르한 제국 건국 시기에 큰 공을 세운 능력자였기 때문에 귀족 신분을 가질 수 있었지만, 후손들까지 다 능력자인 건 아니었다.
점점 이 세상은 능력자들의 탄생이 줄어드는 추세였다. 평범하게 태어난 귀족들과 평민을 구분 지을 게 없어졌다는 뜻이다.
이에 귀족들은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포장하기 위해 상대적 박탈감과 공포심을 이용했다. 과장되고 화려한 의상과 호화로운 파티와 같은 차별성을 두고 피지배계급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시종들이 외출하겠다는 아인에게 이상한 옷을 입히려고 했는지 그 이유가 이 책에 나와 있었다. 자신의 시종들은 아인이 귀족다웠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하인리히 후작은 이대로 가다가는 귀족이 자멸하고, 부패한 나라는 몰락할 거라고 걱정했다. 정책 장관인 그는 누구든지 유르한 제국을 위한 의견이 있으면, 성별·나이·신분에 상관없이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달라며 글을 맺었다.
아인은 에세이를 다 읽고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만년필을 꺼내 들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 되고, 그들의 자식이 귀족이 되는 신분 세습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능력 위주로 관직을 뽑는 시험을 치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현대에서도 부에 따라 배움의 격차가 크고, 불평등한 사회가 이어지기는 했지만 평민 중에서도 똑똑한 아이들은 분명 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사회 계급 간의 이동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보다는 나았다. 체사레처럼 귀족 가문에 입양되는 경우는 찾아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아마 처음이니 후작이 직접 인터뷰하지 않았을까 싶다.
과거 시험을 실행한 조선 시대 왕들이 얼마나 깨어 있는 군주인지 이곳에서 살아보니 알겠다. 각 관직에는 그 일에 필요한 지식을 공부한 자들을 뽑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관직 시험에 3대 동안 합격한 사람이 없으면 귀족 직위를 회수하자고, 다른 귀족들이 알면 도끼를 들고 뛰어올 만한 문구도 첨가했다.
아인은 편지를 잘 동봉하고 시종을 통해 하인리히 후작에게 보냈다. 그리고 자택 근무가 끝난 체사레와 체스 게임을 한 뒤 잠자기 위해 방으로 돌아왔다.
늦은 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시종장이 다급히 마중을 나갔다. 아인은 창문을 통해 누가 찾아왔나 밖을 내다봤다.
시종장이 아인의 방문에 노크를 했다.
“도련님, 하인리히 후작께서 만나 뵙고자 찾아오셨습니다. 밤이 늦었으니 다음에 다시 오라 돌려보낼까요?”
아인이 백작 아들에 불과해도, 1황자의 가이드라 고위 귀족인 후작을 돌려보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인은 감명 있게 읽은 에세이 작가를 만나보고 싶었다.
후작을 만나려면 잠옷을 벗고 귀찮게 격식 있는 옷차림으로 갈아입어야 했지만, 다행히 페르디안 백작저의 응접실에는 비대면으로 만날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 대인기피증 따위 없지만, 귀찮으니 후작을 그렇게 만나기로 했다.
“응접실에서 만날 거야. 존, 차 부탁해.”
아인은 응접실로 향했다. 비밀의 문을 열고 그림 뒤에 숨어서 후작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후작이 아무도 없는 응접실을 보고 당황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인리히 후작 각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디 계십니까.”
“그림 뒤에 있습니다. 후작께서 밤늦게 찾아온 탓에 이런 만남을 가지게 된 점 사죄드립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너무 아인 공자를 만나 뵙고 싶은 나머지 편지도 없이 무례하게 찾아온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후작이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존이 잔에 홍차를 따라주고 혹시 모를 불상사가 벌어질까 봐 서슬 퍼런 눈으로 후작을 감시했다. 알렉세이가 보내준 기사들 또한 후작을 범죄자처럼 둘러쌌다.
다행히 하인리히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아인이 겪은 비극은 유르한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이 유명했다. 후작은 페르디안 백작저에서 보이는 과민반응을 이해하고 넘어갔다.
“다름이 아니라 아인 공자가 보낸 편지를 읽고 발걸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인 공자께서는 1황자 전하의 반려가 될 분이지 않습니까,”
후작은 긴장한 듯 뜨거운 홍차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공자께서 하신 말씀은 그저 탁상에서 끝나고 말 이야기가 아닌 정책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인 공자가 결혼을 하시면 그런 힘을 가진 권력자가 되실 테니까요.”
아무 생각 없이 보낸 건데, 아인의 위치가 문제였다. 평범한 귀족 자제나 평민이 그런 이야기를 적어 보냈다면 하인리히 후작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뛰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유력한 황태자 후보의 매칭 가이드가 보낸 편지였다. 훗날 이 나라의 황후가 될 오메가가 쓴 이야기를 후작이 가볍게 넘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본인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인식하지 못한 아인의 잘못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아인 공자와 미래를 함께 지향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미래요? 지금 저한테 청혼하신 거예요?”
아인은 샤를보다 더 나이 많아 보이는 후작을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물론 외모는 후작이 연상이지만, 실제 나이는 샤를이 열 살 연상이었다.
“아니! 절대 아닙니다. 1황자 전하를 지지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후작이 어찌나 놀랐는지 벌떡 일어나 해명했다. 꿈에 가득한 아저씨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아인은 그제야 하인리히 후작의 바람을 알아차렸다. 아인이 황후가 되어 편지에서 이야기했던 정책을 실행해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에세이에서는 부담 없이 생각을 적어서 보내라고 하더니만, 완전 부담되는 반응이었다. 황후가 될 자신이 없어서 도망칠까 고민까지 했던 사람에게 말이다. 선뜻 그러겠노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인 공자와 같이 깨어 있는 분이 이 나라의 미래를 염려해주신다면, 보다 많은 백성이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알렉세이의 고모인 공작 부인은 아인을 앞에 두고 황후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입에 올렸지만, 후작은 그러지 않았다. 반역으로 비칠 수도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었다.
아인은 후작이 말하지 않았지만 공작 부인과 똑같은 걸 바라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끙 앓는 소리를 냈다. 하다못해 현대에서 부반장이라도 해봤으면 그 부담스러운 자리를 수긍했을 터다. 계속되는 아인의 망설이는 태도에 하인리히 후작이 침묵했다. 들뜬 목소리가 탁하게 가라앉았다.
“설마… 말뿐이셨습니까.”
물론 아인을 책망할 일은 아니었다. 이상은 높으나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선 수많은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기존의 귀족들은 말도 안 된다며 거세게 들고 일어설 것이다. 하루아침에 고착화된 계급 사회에 유동성을 부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하인리히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몽상을 꿈꾸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뀔 거라고 믿었다.
하인리히라고 평생 그림만 그리던 화가가 갑자기 정치를 할 수 있으리라고 보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아인이 가진 엄청난 존재감과 팬덤이었다. 하인리히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손바닥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 땀을 무릎에 문질러 닦았다.
그림 속 금안이 그를 보고 있었다. 매직 미러를 통해 본 엄청난 미인이 저 뒤에 숨어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아인이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제국민들은 그야말로 환호했다. 그동안 저택에 숨어 살았던 천재 화가가 저런 엄청난 미인이었다니! 뚜렷한 사교 활동이 없어서 수도 귀족임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페르디안 가문의 존재가 새삼 부각될 정도였다.
기존의 아인이 예술을 사랑하는 귀족들만의 아이돌이었다면, 지금의 아인은 동화책과 캐릭터 사업으로 제국민 모두에게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동안 그가 은둔하게 된 스토리 또한 얼마나 드라마틱하단 말인가. 어린 시절 겪은 불운한 사고, 아버지의 부재, 가문의 몰락, 가난을 극복해낸 천재성.
사람들이 아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아름다운 우성 오메가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동화책 <골든 보이의 대모험>에 나와 있듯 그가 불굴의 의지로 성장하며 역경을 이겨낸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최근 기디언 백작이 죽으며 아인의 인생은 한 편의 소설처럼 권선징악 결말로 마무리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제국민들은 그런 아인을 보며 가슴속에 ‘희망’을 품었다.
하인리히는 그런 아인이 백성들을 위해 평민도 귀족이 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겠다고 발표하길 바라는 거였다. 그 이후의 모든 작업은 그가 처리하면 됐다.
그가 만들려는 제도는 귀족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법이었다. 찬성하는 기존 귀족들이 없다시피 할 테다. 백성들의 단합된 지지가 몹시 필요한 이유다.
하인리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특별한 삶을 살았던 만큼 아인이 특별한 생각을 하는 존재라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인 공자.”
“….”
응접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의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왜 그러십니까.”
“알겠어요.”
“네?”
하인리히는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 미래… 함께 그려보자고요.”
하인리히는 응접실에 기사들과 시종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정확히 되짚어 물을 수 없었다. 당장 목이 날아갈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주제니 말이다. 정말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되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럼 나중에 보겠습니다. 아인 공자.”
“예, 살펴 들어가세요. 후작 각하. 시종장은 후작님을 배웅해드리도록 해.”
시종장이 응접실 문을 활짝 열었다.
“후작 각하, 가시죠.”
후작은 시종장의 안내를 받으며 페르디안 저택을 벗어나는 내내 얼떨떨했다. 정말? 정말 하겠다고?
마차에 올라타 본인의 저택에 돌아오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을 때에야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역시 골든 보이를 그린 화가다웠다.
***
아인은 후작이 돌아간 뒤, 가벽 뒤에서 나왔다. 늦은 밤중에 일어난 작은 소동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아인은 3층 계단을 올라 방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통신 마도구를 찾아 알렉세이에게 연락했다.
“여보세요.”
“응. 아인아.”
“…알렉, 미안해요.”
“갑자기?”
“내가 낮에 황후 되기 싫다고 했잖아요. 나랑 달콤이 때문에 알렉이 다 포기하겠다고 했는데 말리지 않아서 미안해요.”
만일 평범한 사람이 음식점에 가서 맛없다고 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런데 유명 먹방 방송인이 맛없다고 하면 그 가게는 망할 것이다.
아인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1황자인 알렉세이의 연인으로, 그리고 달콤이의 아빠로 살아가려면 자신에게 얹힌 왕관의 무게를 책임져야 함을 알게 되었다. 아인의 편지를 받고 한밤중에 달려온 하인리히 후작이 참 많은 가르침을 주고 갔다.
“알렉, 나 때문에 하나도 포기하지 말아요. 나는 알렉이 황태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사실 아인아, 내가 황제가 되려는 진짜 이유는 말이야….”
갑자기 발코니 창문이 열리고 알렉세이가 걸어 들어왔다.
아인은 ‘뭐야? 여태 저기 있었어? 아니야, 아닐 거야. 설마 또 그랬을까. 나름 황자야, 아인아. 정신 차려. 그래, 아니야. 공간 이동해서 왔겠지.’ 마음속으로 엎치락뒤치락했다.
알렉세이가 자연스럽게 침대로 아인을 데려가 눕혔다. 너무나 물 흐르듯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인은 두 눈 멀쩡히 뜬 채 잠옷이 벗겨지고 말았다. 어라?
그다음 정신을 차리자 구멍에 자지가 들어와서 열심히 쑤셔지고 있었다. 목놓아 앙앙 울면서 언제나처럼 지루 황자에게 제발 싸달라고 사정하고 나서야 필로우 토크에 돌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왜 알렉세이가 황제가 되고 싶었는지 그 이유를 듣고자 아인은 무려 다섯 시간 동안 육체노동을 했다는 거다.
비싼 거위 털 베개를 베려고 해도 굳이 자기 팔을 베라고 억지를 부리는 알렉세이에게 진 아인은 불편함을 감수하며 근육질 팔을 벴다. 여전히 젖꼭지를 살살 어루만지는 나쁜 손이 있었지만, 젖꼭지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모른 척하니 알렉세이가 본론을 꺼냈다.
어린 시절 황제가 오메가 아버지에게 바람을 피웠다는 누명을 씌워서 죽였는데, 최근 잊었던 어릴 때 기억을 되찾았단다.
원작 소설을 읽을 때는 알 수 없었던 알렉세이의 비밀을 들을 수 있었다. 이래서 그렇게 원작에서 성격파탄자고, 나쁜 새끼로 컸던 걸까 싶었다. 아인은 그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알렉세이랑 외국 나갈 생각을 해 미안했다. 그의 등을 쓸어주며 위로했다.
“그런데 흑마법사라면 위험한 존재 아니에요?”
“걱정 마. 내가 이겨. 나 이제 SS급 에스퍼거든.”
씨익 웃는 알렉세이의 미소가 개구쟁이 같았다. 원작 소설을 읽은 아인은 SS급 에스퍼라는 등급을 듣고도 워낙 머릿속에 박힌 기억 때문에 S급 에스퍼라고 필터링해 들었다.
“그래서 황제 탄신일에 파티가 열리면, 그때 다 깨부술 거야. 이 나라가 완전히 뒤집어지겠지. 아인아, 혹시 모르니까 넌 황제한테 인사만 하고 가족들이랑 페르디안 저택으로 피신해. 알았지?”
“네. 그럴게요. 너무 걱정 말아요.”
아인은 알렉세이의 계획에 반역, 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았다. 썩은 고인물을 정화하는 작업이니 이것은 ‘개혁’이었다. 진심으로 그의 복수가 성공했으면 싶었다.
그런데 알렉세이의 개혁이 끝나면 호라이슨은 어떻게 되나 싶었다. 그에게 2황자를 유배 보낼 거냐고 물었다.
“그 녀석 진짜 황족도 아니었어. 헬링턴이 다른 알파랑 낳은 자식을 황제의 자식이라고 속인 거거든.”
“어… 그러면 그냥 궁에서 내보내요?”
“아니. 죽일 건데. 내 이복동생도 아닌데 여태 황족 행세를 해 온 죄인이야. 죽여 마땅하지.”
헉. 질겁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호라이슨이 원작 악역수일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추론이 진짜면 그가 너무 불쌍했다.
만일 그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의 알렉세이가 그에게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소설에서 악역수가 못된 짓을 저지르고 다녔어도 끔찍하게 살해하는 건 광공이 잘못했다.
악역수는 광공이랑 같이 자주면서 가이딩도 성실히 해줬다. 오랜 세월 자기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악역수를 두고 다른 오메가를 사랑한다며 각인하다니!
그러니까 알파들 데리고 협박하러 갈 수도 있지! 그걸 못 참고 죽이냐! 제이콥 보니까 딱 봐도 알파 다섯 명은 맨손으로 때려죽일 것 같더구만.
지금 생각해도 완전 화났다. 가재가 게 편을 들 듯 아인은 악역수 편이었다. 괜히 죄 없는 지금의 알렉세이를 때리며 화냈다.
‘쌍놈의 새끼. 이번에도 바람피우면 죽을 줄 알아.’
알렉세이는 이유도 모른 채 아인의 눈치를 봤다.
“왜? 그 녀석 죽이지 마?”
“아니… 그게 아니라….”
호라이슨이 원작 악역수만 아니라면, 아인도 2황자를 죽이는 일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볼 방도가 없어서 답답했다.
“알렉, 혹시 내가 2황자를 만나 봐도 될까요?”
“안 돼.”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표정이 무시무시해서 아인이 울먹이니까 알렉세이가 바로 표정을 풀며 그를 달랬다.
“안 돼. 아인아. 그 새끼가 너한테 무슨 짓을 저지를 줄 알고. 황제 탄신일에 참석해서도 아무것도 먹지 마. 마시는 것도 안 돼. 개인 잔이랑 음료 챙겨서 와.”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다 같이 먹는 음식인데 거기에 설마 독을 타려고. 아인의 무른 생각을 꿰뚫어 본 듯 알렉세이가 말을 덧붙였다.
“독은 힐링 포션으로도 못 고쳐. 포이즌 포션이라고, 힐링 포션보다 더 구하기 어려운 아이템이 필요해.”
아인의 손에 깍지를 낀 알렉세이가 손등에 키스를 했다.
“독을 먹고 힐링 포션을 먹으면 독에 손상된 장기가 회복되기는 해. 그런데 독을 해독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손상이 가해지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면 힐링 포션을 계속 마셔야 해. 그러다 힐링 포션이 떨어지면 죽겠지. 너도, 우리 아기도.”
아인은 얼른 몸을 구부려 달콤이를 감쌌다. 상상만으로도 무서웠다. 임신이 실감 나지 않는데도 소중하게 느끼지는 달콤이였다. 끊임없는 식욕으로 자기 여기 있다고 존재감을 알리는 달콤이를 어떻게 자신의 부주의로 잃을 수 있단 말인가.
알렉세이에게 반드시 가족들 잔과 음료까지 챙겨서 황제의 탄신일 파티에 참석하겠노라 약속했다.
“응. 괜히 꾸물거리지 말고, 파티장 빠져나가. 친구들은 이유 말하지 말고 억지 부려서라도 내보내.”
아인은 굳건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세이가 그의 속마음과 과거를 진실하게 털어놔 준 덕에 좀 더 우리 사이가 가까워진 것 같았다.
아인도 응접실에서 하인리히 후작을 만나고 온 이야기를 해줬다. 알렉세이가 어떻게 그런 놀라운 생각을 했냐며 아인을 칭찬했다.
그가 황제가 되면 반드시 귀족 시험제도를 시행하겠다며 힘을 보태줬다. 아인은 다시 꼬물꼬물 움직이는 알렉세이의 그것 때문에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이 알파 때문에 못 살겠다.
못 이기는 척 다리를 벌리고 이미 정액으로 흠뻑 젖은 구멍을 내보였다. 알렉세이가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처럼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아인은 갈급하게 자신을 취하는 그의 등을 쓸어줬다.
그에게 사랑받는 내내, 달콤한 밀어가 잠자리를 가득 채웠다.
네가 너무 좋아. 사랑해. 내 귀여운 오메가. 우리 아기 가져줘서 너무 고마워… 아인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 앞에 나타나줘서 감사합니다. 나 사랑해줘서 감사합니다….
아인에 대한 추앙의 말은 어느새 존경심을 담게 되었다. 아인은 자신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커다란 알파를 손으로 보듬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알렉세이의 키가 더 큰 것 같다. 자신은 그대로인데 도대체 뭘 먹어서 이렇게 쑥쑥 자라는 걸까.
전생에 혹시 알렉세이는 소설에 나오는 광공이 아니라 다른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광공이라고 무서워했던 게 미안할 정도로 순하고 다정했다.
아인은 만일 알렉세이가 전생에 광공이 아니었다면 무엇이었을지 상상해봤다. 잭에게 팔려 온 콩나무. 아니면 라푼젤의 머리카락이려나. 둘 중 예쁜 것은 후자이니, 그가 공주님의 머리카락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열심히 알렉세이의 은회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알렉세이가 아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커다란 고양이처럼 고롱고롱 목울음 소리를 냈다.
사람을 데리고 사는지, 짐승을 데리고 사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하반신은 발정 난 짐승이고 상반신은 다정한 연인이니 말이다.
그러다 문득 아인은 행복한 한편, 체기가 얹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지금 알렉세이에게 이런 대우를 받고 있어야 하는 존재는 진짜 아인이 아닌가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지친 아인의 입에 힐링 포션을 쏟아부어서 회복시킨 알렉세이가 그를 욕실로 데려가서 씻겼다. 황궁에서 훔쳐 온 침구류로 깨끗해진 침대에 그와 나란히 누웠다.
아인은 알렉세이의 품에 안겨서 쌕쌕 잠이 들었다. 호라이슨이 진짜 아인 페르디안인지 알아볼 계획은 세우지도 못했는데 시간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
밤에는 가이드의 품에서 평온을 찾지만, 아침이 되면 알렉세이는 바빠졌다. 최근 마탑 관측소가 발견하는 던전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유르한 제국에는 하급 던전만 생기고 있었지만, 다른 나라 사정은 달랐다. B급과 C급 던전이 심심치 않게 생겨 에스퍼가 던전 클리어를 못 해 게이트가 열리는 곳이 발생했다.
밖으로 나온 마물들은 사람을 잡아먹고, 마을을 파괴했다.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불탔다.
혼란을 막기 위해 아직까지 몇몇 나라에 국한되어 벌어진 그 일은 비밀에 부쳐졌지만, 하늘을 손바닥 하나로 가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물들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에 의해 점점 타국에서 벌어진 비극이 유르한 제국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 S급 에스퍼로 알려진 알렉세이에게 마물에 전복된 나라들이 구조를 요청했다. 유르한 제국이 다른 나라와 달리 멀쩡할 수 있는 건 다 알렉세이 덕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실상은 유르한 제국에는 하급 던전만 생겨서였지만, 달리 말하면 이 일이 알려지면 유르한 제국이 이 사태의 주범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황제 페도로프는 군말 없이 도움을 청한 나라에 1황자를 파견했다. 그것을 빌미로 유르한 제국은 여러 나라에 빚을 지우고, 조공을 받으며 더욱 부강해졌다.
알렉세이는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던전을 벗어난 마물들을 무찔렀다. 세상이 멸망해 가는 것만 같았다. 부모를 잃고 엉엉 우는 아이들을 볼 때면 심장이 저릿했다. 예전에는 이런 적 없었는데, 달콤이 아버지가 되면서 남의 아이도 자신의 아이처럼 느껴졌다.
아인은 단순히 알렉세이를 가이딩해 준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감정을 알려줬다. 알렉세이는 하늘을 뒤덮은 가고일들을 올려다봤다.
가고일들이 입에서 불을 뿜었다. 세상이 붉게 타올랐다. 멸망한 세상 같았다. 가고일들이 발가락으로 쥐고 있던 돌덩어리를 하늘에서부터 떨어트렸다. 폭탄이 투하된 듯 집들이 파괴되었다.
알렉세이는 눈에 보이는 족족 아이들을 이동시켰으나 그리 효율적인 대처가 아니었다. 공격을 퍼붓는 가고일들을 죽이는 게 더 적은 사상자를 낼 것이다. 숫자만 놓고 따지면 말이다.
그러나 그가 하늘에서 가고일과 싸우면, 지상에서 아이들을 구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힘없는 아이들은 제일 먼저 죽을 테다. 생명에는 무게가 없었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정답을 알았다. 그는 도피아 왕국을 구하기 위해 온 에스퍼였다. 그러니 전투를 하는 게 맞았다.
결심하는 즉시 하늘로 비상했다. 얼음 송곳 수천 개를 만들어내 가고일에게 퍼부었다. 가고일은 공격당하는 동안에도 지상을 파괴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싼 가고일에 의해 알렉세이도 불타기는 했지만, SS급 에스퍼의 몸은 재생 속도가 몹시 빨랐다. 검은 그을음만 그가 불탔다는 증거로 남은 채 그는 순식간에 멀쩡해졌다.
쉬지 않고 얼음 송곳을 뿌려댄 결과, 하늘을 빼곡하게 뒤덮은 가고일들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쿵! 쿵! 쿵쿵쿵!
어마어마한 수의 가고일들은 죽을 때도 지상의 존재에게 위협이 되었다. 마물이 죽고 나온 보석을 숨어 있던 어른들이 뛰쳐 나와 주웠다.
서로 보석을 차지하기 위해 기껏 살려놓은 목숨끼리 칼을 휘둘러 사상자를 만들었다. 아이들은 빽빽 울면서 저 보석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어른들이 가지려고 해 저들도 가지겠다며 덤벼들었다.
알렉세이가 힘들게 구한 아이들이 어른들의 손에 죽어 있었다. 알렉세이는 허망하게 아비규환이 된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를 두려워하며 사람들이 빛을 본 바퀴벌레처럼 무너진 건물 사이로 흩어졌다.
칼에 찔린 아이의 손에 보석이 꼭 쥐어져 있었다. 알렉세이는 눈뜬 채 죽은 아이의 눈꺼풀을 닫아줬다.
“잘 자. 아가야. 그거 있으니까 악몽 안 꿀 거야. 내 가이드도 하나 가지고 있는데 효과 좋대.”
아이를 땅에 묻어주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부모가 애타게 찾고 있을지 모르니까.
알렉세이가 아지랑이처럼 사라지자마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다시 뛰쳐나왔다. 흩어진 보석을 주우며 부자가 됐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죽은 아이의 손에 들린 보석 또한 살아남은 자에게 빼앗겼다. 어쩌면 마왕은 인류를 타락시키기 위해 마물을 죽이면 아이템이 나오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황궁으로 돌아온 알렉세이는 얼른 씻고 페르디안 저택으로 공간 이동했다. 발코니에 도착해 창문이 대문인 양 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인이 웃으면서 두 팔을 벌렸다.
알렉세이는 자신보다 훨씬 작은 오메가인 그의 품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안겼다. 하아, 살 것 같다.
그의 페로몬, 그의 닉스, 그의 미소,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황폐화된 알렉세이를 회복시켰다. 아인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를 바로 침대로 데려가서 안았다. 관계를 거듭할수록 알렉세이의 더러워진 에테르가 눈부시게 투명하고 반짝이도록 정화되었다.
아공간에 가득 들어 있는 힐링 포션을 꺼냈다. 다른 아이템은 굳이 챙기지 않아도 힐링 포션은 꼭 다 수거했다. 아인이 맛있다면서 마셨다. 또 달라고 해서 잔뜩 내놨다.
아인은 이 귀한 물약이 백 개도 넘게 아공간에 쌓일 만큼 오늘 알렉세이가 많은 생명을 죽이고 왔을 거라고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을 사는 그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해서 기뻤다. 그만큼 알렉세이가 아인이 있는 유르한 제국이 안전할 수 있도록 열심히 싸웠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씻고 나온 아인이 곯아떨어졌다. 알렉세이는 아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눈을 감았다. 죽은 아이를 발견한 부모가 우는 꿈을 꿨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잠에서 깬 알렉세이는 얼른 아인의 배를 더듬었다. 무사해. 우리 아이는 무사해.
끝내 지키지 못한 이름 모를 아이에 대한 슬픔이 눈꼬리에 살짝 눈물로 맺혔다가 말랐다. 커튼을 뚫고 일출의 붉은 빛이 방 안으로 서서히 들어왔다.
알렉세이는 눈물 자국이 난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오늘 하루도 바쁘겠지만, 아인아, 다녀올게.
잠든 그에게 키스를 하고 알렉세이는 마탑으로 공간 이동했다. 그리고 조세핀으로부터 받아든 연구 보고서를 읽고 너무 놀라 뒷걸음질 쳤다. 갑자기 늘어난 던전 생성 기점이 바로 황후 헬링턴에게 알렉세이가 편지를 보냈던 날이었다.
“경고이겠군. 내가 보낸 편지에 대한….”
알렉세이는 괴로워서 일그러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아무리 다른 나라 백성이라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타국에 오해받을 수 있다고 여겼던, 하급 던전만 생성된 이유가 정말 본국에 있었다니. 황후 헬링턴도 외부의 의심을 피하고자 유르한 제국에는 보여주기식으로 던전을 만들었겠지.
“황후를 당장 죽여야 해.”
“그게 그가 원하는 걸 겁니다. 1황자 전하가 자기를 죽이러 왔다며, 1황자 전하의 행동을 반역으로 몰 생각이겠죠.”
조세핀은 이런 순간에조차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황후를 수많은 귀족들 앞에 세울 수만 있다면, 그때가 언제이든 상관없습니다. 그가 계약한 마족을 불러낸 흑마법사임을 밝혀내는 게 우리의 목표이니까요.”
알렉세이는 황후에 대한 분노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황제의 탄신일 파티까지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일 그가 아인과 그의 가족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치면 어쩐단 말인가.
아인은 무사해도 그의 가족들이 죽으면, 아인의 원망은 알렉세이를 향할 것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상이다. 알렉세이는 손으로 보고서 종이를 우그러트렸다.
“황후가 타국에 던전을 만들었다는 상관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자료이니, 무용지물이겠군.”
“예, 맞습니다.”
살인도 시체와 범행도구가 나오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다. 일개 인간이 던전을 생성해낸 일을 증명해내기 위해선 무조건 황후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밝혀야 했다.
마계와 인간계를 연결하는 포털은 오직 두 가지 경우에만 열렸다.
첫 번째는 마왕과 마계의 왕자 공주들이 마물을 인간계에 보내기 위해 던전을 만들었을 때고, 다른 하나는 흑마법사가 마족과 계약하기 위해 일회성 마법진을 연성했을 때다.
그러니까 오세하고만 계약을 해서는 황후는 던전을 열 수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엄청난 존재였다.
“조세핀, 마법사 몇 명 더 추가로 페르디안 가문에 머물면서 그들을 보호해줬으면 싶어. 부탁할게.”
조세핀은 흔쾌히 알렉세이의 부탁을 들어줬다.
“걱정 마십시오, 1황자 전하. 안 그래도 지원자 몇 명 더 받아놨습니다. 다들 아인 공자와 한집에 살 수 있다니까 너도나도 간다고 나서더군요. 하하.”
알렉세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들 중 알파가 있으면 거세를 한 다음 페르디안 저택에 보내고, 일 끝나면 힐링 포션을 먹여서 회복시켜주겠다는 엽기적인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조세핀은 아직도 알렉세이가 갈 길이 멀다고 느꼈다. 혀를 끌끌 차며 오메가 마법사로만 일행을 뽑았다고 말했다. 활짝 웃는 모습이 몹시 얄미웠다.
“역시 조세핀이야. 믿었어.”
“됐습니다. 제발 평범하게 좀 구세요. 이러다가 아인 공자가 놀라서 도망가겠습니다.”
알렉세이가 바로 정색하며 불안해했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조세핀 눈치를 보는 게 꼭 어린 시절에 호라이슨에게 당하고 복수를 계획했던 시절의 모습 같았다.
“설마 아인 공자를 또 감금하려는 건 아니겠죠? 그땐 정말 저 다시는 1황자 전하 안 볼 겁니다!”
“…감금이 아니라 보호도 안 돼?”
어이구야. 머리야. 조세핀은 ‘이걸 언제 사람 만드나.’ 한탄했다. 매칭 가이드를 만나서 다정한 성격으로 변하는 듯싶더니만 아직까지도 나쁜 습성의 뿌리를 뽑지 못했다.
“지금 아인 공자는 대마법사인 제가 마탑 마법사 수십 명을 끌고 가서 만든 보호 결계 안에서 멀쩡하게 잘 지내고 계십니다.”
“하지만… 상대는 마계의 왕족들 중 한 명과 계약했을지 모르는 흑마법사인데?”
동그랗게 눈을 뜬 알렉세이가 귀여운 척했다. 손바닥 하나를 펴고 그 위에 뭐가 올라가 있는 척 쓰다듬었다.
“아인이는 이렇게 작고 귀엽고 연약해서 내가 보호해줄 건데도?”
13살 때 호라이슨의 두개골을 부숴도 되냐고 물었을 때도 저런 모습이었다. 안 된다고 하니, 시무룩해져서 ‘다리는 잘라도 돼?’ 했던가. 그런 알렉세이를 지금과 같이 멀쩡한(?) 수준까지 끌어올렸으니 자신이 아직도 결혼을 못 한 거지 싶었다.
조세핀은 아무 말 없이 알렉세이를 노려봤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보던 알렉세이가 ‘아인이 다리 안 자를 거야.’라며 사족을 덧붙였다. 자기 딴에는 안전하게 감금할 거라고 피력하고 싶었나 보다.
조세핀은 다 큰 1황자를 자신이 아무리 달래고 말려봤자 들어 처먹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해보세요. 다시는 아인 공자의 미소를 보지도, 사랑한다는 말도 들을 수 없을 테니까. 그때 저한테 도움을 청해봤자 저는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조세핀은 얼굴에서 감정을 싹 걷어내고 담백한 표정을 지었다. 알렉세이가 얼른 아인을 손바닥에 올려두고 쓰다듬는 척하던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아아, 제논. 네 아들은 아직도 아이 같아. 신이 이 무지한 아이의 손에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려줬으니, 나라도 잘 가르쳐야지 어쩌겠어.’
아카데미 시절에 안면만 있고 별로 친하지 않았던 동기의 아들을 어쩌다가 보모처럼 돌보게 되었나 싶다.
조세핀은 어린 1황자가 오메가 아버지를 잃었다는 소리에 걱정하기는 했지만, 황자이니 어련히 주변에서 잘 보살펴줄까 싶어 신경 끄고 지냈었다.
그런데 폭주하려고 했다며 황제가 알렉세이를 시종 한 명 없이 오리하르콘 벙커에 가뒀단다. 아무리 S급 에스퍼이고, 매칭 가이드가 없다고 해도 알렉세이는 황실에서 실력 좋은 가이드에게 부족하나마 닉스를 넘겨받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아이의 경우 육체가 작기 때문에 아무리 등급이 높아도 에테르의 양이 적었다. 어렸을 때 각성한 에스퍼는 육체가 자라야 에테르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한마디로 어른이 되고 나서야 폭주든 뭐든 한다는 뜻이다. 황제는 단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능력 좀 쓴 거 가지고 자기 아들을 폭탄 취급하며 벙커에 처넣은 거였다.
그제야 조세핀은 알렉세이를 도와줄 주변인이 한 명도 없음을 알아차렸다. 당장 벙커로 찾아가 어둠 속에서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얼굴을 푹 파묻고 조세핀을 쳐다보지 않았다. 제논의 아카데미 친구라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칭얼칭얼. 알렉세이가 울면서 호라이슨이 자기 곰돌이 인형을 망가트렸다고 고자질했다. 아빠 친구라는 말 한마디에 아이는 경계심을 무너트리고 껴안아달라며 짧은 두 팔을 내밀었다.
조세핀은 그런 아이를 버리고 오리하르콘 벙커를 나갈 수 없었다. 알렉세이에게 흥분해서 요동치는 에테르를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마탑으로 데려갔다.
마탑에서 알렉세이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다. 아직 마탑주가 되기 전이라 전대 마탑주에게 눈칫밥을 먹어가며 연구실에 아이를 숨기고 키웠다.
알렉세이가 페르디안 저택을 지킬 추가 지원 인력을 데리고 사라졌다. 조세핀은 연구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제논….”
문득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태양처럼 빛났던 아름다운 오메가가 보고 싶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책에 파묻혀 사는 조세핀은 도서관 유령처럼 아카데미에서 지냈다.
도서관에서 마법 공부를 하고 있으면 검술부가 훈련하는 모습이 보였다. 제논은 알파에 비해 힘이 약하다는 단점을 기술로 보완할 만큼 창술에 능통한 무인이었다.
타인의 공격을 부드럽게 흘려내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무희가 춤을 추는 듯했다. 다들 그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기사가 될 거라고 여겼다. 모두의 예상대로 제논은 황실 기사가 되었다.
아카데미 1학년 때부터 사귀었던 알파와 곧 결혼할 거라는 소식이 조세핀 같은 아웃사이더에게도 전해질 만큼 제논은 유명인이었다. 그랬던 제논이 갑자기 황후로 책봉되었단다. 아카데미 동기들은 의아하게 여겼으나 황후라는 높은 지위에 오른 제논을 자랑스러워했다.
제논은 1년 뒤 아이를 낳았다. 다들 그가 황제에게 사랑받으며 잘 사는 줄 알았다. 제논은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힘이 있는 긍정적인 오메가였고, 그가 반려 알파에게 사랑받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탑에서 은둔하던 조세핀은 제논이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이상하다고 여겼다. 제논이 얼마나 밝은 사람인지 알아서였다.
그렇지만 사랑하던 알파가 다른 오메가와 아이를 데려왔으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만일 처음부터 제논이 황제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알렉세이를 방치하지 않고 즉시 달려가 돌봤을 것이다.
알렉세이에게 그가 황제의 손에 살해당했노라 들었을 때 분노했다. 아이는 충격으로 기억을 잃었지만 황제가 제논을 죽였다는 사실만은 잊지 못해 마음에 병이 생겼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어느새 황제가 바람을 피운 황후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귀족 사회에 파다하게 퍼졌다. 황후를 죽이고 나오는 황제의 모습을 시종 여럿이 보고 말을 날랐기 때문이었다.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제논의 죽음을 감추려고 했던 황제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렇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제논도, 그 소문을 퍼 나른 시종들도 어느새 이 세상에서 사라져 황제의 살인을 입증할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황후를 살해한 일에 대한 소문은 퍼졌지만, 황제는 폐위되지 않았다. 안달리시아 공작에게 몇몇 귀족들이 찾아가 지금 황제를 처단해 달라고 요청하였다가 목이 잘려서 수도 성문에 내걸렸기 때문이었다.
그 귀족 가문의 식솔들 또한 반역자로 몰려 노예로 전락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자 누구도 지금의 황제를 갈아치울 생각을 못 했다.
황제는 그렇게 사랑하는 막냇동생의 지지를 등에 업고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최근 안달리시아 공작의 결혼식에 황족 전원이 참석한 걸 보면 정말 둘의 사이가 좋은 것 같긴 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황후 시해 사건을 빌미로 황제 자리에 앉을 수 있었음에도 직접 그 사실을 고발한 귀족의 목을 베어 형의 위치를 견고히 해준 동생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조세핀조차 죄를 짓고 멀쩡한 황제 때문에 억울하고 열불이 뻗쳤다. 제논의 아들인 알렉세이의 심정은 오죽할까.
지금 알렉세이는 황제와 황후의 죄를 밝히기 위해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다. 버림받은 들개는 늑대가 되어 돌아왔다.
조세핀은 어서 빨리 모두에게 그들의 죄를 밝힐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랐다. 그리고 이제 그날이 머지않았다.
그는 무기력하게 누워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었다. 오래전 아카데미 시험을 볼 때 필기도구를 가져오지 않은 소년에게 한 소년이 연필을 빌려줬다. 조세핀은 풀리지 않는 마법 공식이 있을 때마다 제논에게서 받은 연필로 계산을 했다.
그럼 놀랍게도 풀리지 않던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조세핀은 그 연필로 종이에 영혼을 부르는 마법 공식을 적었다.
창조신은 이를 지켜보다가 종이를 불태워 버렸다. 조세핀이 놀라서 책상에서 멀어졌다. 종이가 다 타고 남은 자리에 검은 재가 모여 글자를 남겼다.
-운명을 거스르지 말지어다.
전 회차에서는 이걸 알아차리지 못해 운명이 뒤틀렸다. 마법사는 이미 제논이 죽고 난 뒤, 영혼 강령 마법을 시도한 전적이 있었다. 본인은 마법 술식이 잘못돼 실패한 줄 알지만, 아니었다. 마법은 반만 성공했다.
이번에는 그 덕에 김아인을 데려올 수 있었다. 전 회차에서는 김광태가 이곳에 불려왔었다.
호라이슨의 몸에 들어간 김광태는 엄청난 변수가 되었다. 원래라면 조세핀이 학대받는 알렉세이를 데려가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지만, 착한 호라이슨이 알렉세이를 챙기고 돌아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다.
황후 헬링턴 또한 황제 페도로프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 클 뿐이고, 나쁜 계부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알렉세이가 좋은 사람으로 클 수 있게 돌볼 만큼 좋은 계부도 아니었다.
헬링턴은 알렉세이에게 매우 무심했다. 이번 회차에서도 알렉세이에게 편지를 받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미 멸망해버린 지난 세상에서 황족들은 그럭저럭 척지지 않고 지냈다. 알렉세이는 지금과 달리 1황자로 대우받으며 싸가지 없이 자랐다. 그는 에테르가 오염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몰랐고, 가이드의 고마움 또한 느끼지 못했다.
아인이 해주는 가이딩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자기 오메가를 배척하며 엉뚱하게 제이콥과 바람을 피웠다.
불운하게 남창이 된 아인을 동정하기는커녕 경멸했다. 아인을 벌레처럼 짓밟고 비웃었다. 그럼에도 매칭 가이드가 생긴 1황자는 당연하게 황태자가 되었다. 착한 호라이슨이 황위를 넘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태자 알렉세이는 감정을 모르는 쓰레기였다. 황태자가 된 그가 폐위당한 건 쓰레기 짓을 일삼았기 때문이지, 아인이 자기 발목을 붙잡아서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스스로의 감정도 깨닫지 못한 채 자기 가이드를 죽였다. 어리석은 에스퍼는 2차 각성을 했음에도 도움을 받을 가이드가 없어 폭주해 세상을 멸망시켰다.
조세핀이 연구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창조신을 보려고 들었다.
God is no where. (신은 어디에도 없다.)
God is nowhere. (신은 여기에 있다.)
이제 그 모든 이야기들은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