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날이 밝았다. 알렉세이는 옆에 자고 있는 아인이 깨지 않도록 조심히 일어났다. 살짝 입을 벌린 채 쌕쌕 고운 숨을 내뱉는 아인에게 키스를 하고 황궁으로 공간 이동했다.
모래궁 시종들이 이른 새벽부터 새로운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1황자가 황태자가 되길 바라며 케르베로스 기사단에 입단한 기사들은 정복을 입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세이 또한 시종장이 준비해둔 화려한 의상을 갖춰 입었다. 하얀 정복에 그동안 던전 클리어를 하고 받은 수많은 메달들을 주렁주렁 달았다.
마족이 나타나 난장판이 된 태양궁 무도회장은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을 위해 지금쯤 깨끗이 정비되었을 터다.
“가자.”
알렉세이를 필두로 케르베로스 기사들이 뒤를 따랐다. 황위를 물려받는 이는 즉위식을 치르기 전, 황위를 물려주려는 황제를 찾아가야 한다. 예의를 다해 아침 인사를 올리고 함께 식사를 하는 게 전통적인 황실 예법이었다.
태양궁에 나타난 알렉세이를 황제를 모시는 시종들이 정중하게 맞아들였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1황자 전하께서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리러 오셨습니다.”
시종장의 부름에도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그가 자신을 끝까지 거부하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았다. 다시 한번 시종장이 알렉세이의 방문을 알렸으나 안은 감감무소식이었다.
할 수 없이 황제에게 문을 열겠다는 말을 올리고, 시종장이 문을 열었다. 알렉세이는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목에 밧줄을 감고 황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페도로프에게 한 번도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지 못했다. 그는 끝까지 알렉세이가 정식으로 황위를 잇는 영광을 누리지 못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아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거다.
알렉세이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화를 내며 황제의 시신을 불태우는 순간, 지는 거였다. 그는 끝까지 자신이 헬링턴에게 속아 제논을 살해했음을, 알렉세이가 자기 아들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페도로프는 본인이 믿고자 하는 바를 부정당하자 견디지 못해 자살한 거다.
그의 죽음은 알렉세이에게 그렇게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비겁함이 알렉세이에게 수치로 다가왔다.
‘당신 같은 사람의 아들이어서 정말 창피해. 난 절대 당신처럼 살지 않을 거야.’
“시종장은 선황의 시신을 내려라. 짐은 이제부터 유르한 제국의 황위 계승자로서 홀로 즉위식을 치르고자 한다. 준비에 미흡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예, 전하.”
시종들이 새로운 황제를 위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알렉세이는 천장에서 내린 선황의 시신을 검시하게 했다.
나중에 알렉세이가 황제가 되고자 페도로프를 암살한 거란 뒷말이 나오지 않기 위함이었다. 유르한 제국 귀족들만큼 소문을 좋아하는 이들도 없었다.
가장 예상되는 시나리오는 알렉세이가 힘으로 협박해 황위를 내놓으라고 했는데, 선황이 이를 거부해 살해당한 거라는 내용이었다. 페도로프의 시신은 온갖 검사를 하느라 칼에 난도질당했다. 아름답고 강한 에스퍼의 마지막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초라한 임종이었다.
그가 없어도 황제 즉위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알렉세이는 정해진 시간에 태양궁에서 가장 큰 홀에 들어섰다. 붉은 융단이 깔린 길을 걸었다. 궁중악단이 나팔을 불며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알렸다.
원래대로라면 선황이 황좌에서 일어나 왕관을 알렉세이에게 넘겨줘야 했지만, 페도로프가 죽은 관계로 알렉세이는 그럴 수 없었다. 수도 귀족들은 새로운 황제의 살기등등한 모습을 보고 숨을 죽였다. 그는 황좌에 앉아서 스스로 왕관을 머리에 썼다.
“제102대 유르한 황제, 알렉세이 유르한이십니다. 귀족들은 새로운 태양을 위해 예의를 갖춰 절을 올리기 바랍니다.”
안달리시아 공작이 알렉세이 황제의 즉위를 선포하였다. 마법사들이 새로운 황제를 축하하기 위해 마법으로 하늘에 반짝이는 붉은 폭죽을 만들었다.
귀족들은 왜 페도로프가 보이지 않나 의아했으나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수많은 귀족들 속에 아인도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 함께 침대에 누워 있던 자신의 알파인데도 갑자기 알렉세이가 너무나 멀고 낯선 존재로 느껴졌다. 아인은 달콤이가 그들의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라도 되는 양 배를 문지르며 불안을 달랬다.
남자가 임신 못 하는 현대에서 살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는 주제에 이 조그마한 존재에게 꽤나 많이 의지하는 것 같다.
“고개를 들라. 짐을 위해 즉위식에 참석해준 귀족들은 고맙다. 앞으로 짐은 황제 재위 기간 동안 어버이 같은 군주가 되고자 한다.”
근엄한 얼굴로 알렉세이가 홀 안을 훑어보고는 으름장을 놓았다.
“내 백성의 목숨을 귀히 여기고, 자식처럼 돌볼 것이다. 땅이 있어야 하늘이 존재할 수 있듯, 만백성이 황제를 우러러보니 짐이 하늘일 수 있다. 그대들이 내 땅을 짓밟고 올라선 자들이라 할지라도, 명심하라. 백성들이 나의 자식임을.”
너희가 아무리 귀족이어서 평민보다 신분이 높다고 해도, 황제인 내가 백성을 자식처럼 여기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귀족우월주의가 가득한 유르한 제국의 귀족들에게는 날벼락과도 같은 소리였다. 하나 반박하고 나서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S급 에스퍼가 황제였다.
어떻게 그가 한 말에 개길 수 있겠는가. 주먹은 가깝고 권력은 멀다고들 하는데, 이 경우는 권력도 주먹도 가까웠다.
황제 알렉세이가 통치 이념에 대해 말하는 식순이 끝났으니, 이제 귀족들이 축하를 위해 파티를 즐기면 됐다. 황제가 편히 즐기라며 자리를 피해줬다.
황제의 매칭 가이드인 아인의 주위로 귀족들이 꿀에 꼬인 벌처럼 달라붙었다. 어떻게든 미래의 황후에게 줄을 대기 위한 검은 속내가 친절한 가면 아래 자리했다.
제이콥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곤란해 보이는 아인에게 다가갔다. 오메가로 보기에는 엄청난 덩치의 제이콥이었다. 그는 귀족들을 밀치고 아인을 구해냈다.
제이콥이 아인을 데리고 후미진 정원으로 향했다. 친구들이 미리 빠져나와 아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슈리아가 손에 들고 있는 샴페인을 원샷 하고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모두 소리 질러~”
“예~.”
“예에~.”
프란츠와 제레미까지 합세해 셋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인은 왜 저러나 싶어 어리둥절했다.
“내 친구가 이제 황후다. 다들 내 밑으로 짜져.”
“풋.”
프란츠가 아인을 웃겼다. 제레미도 황후 친구가 생겼다며 좋아했다. 친구들 덕분에 실컷 박장대소했다. 다들 이제 결혼하는 거냐며 아인에게 질문했다.
하루가 백 일처럼 느껴질 만큼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치고 있었다. 아인은 알렉세이라면 지치지 않고 결혼을 추진할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콥이 호들갑을 떨며 커다란 근육질 가슴을 손으로 추켜올렸다.
“어머 어머. 이제 아인이가 내 조카며느리 되는 거야? 소오름. 나 완전 나이 많은 것 같잖아. 힝힝.”
“아, 진짜. 가슴 좀 출렁이지 마. 코맹맹이 소리도 완전 혐오스럽다고. 도대체 우리 중에 알파도 없는데 왜 자꾸 가슴을 강조하는 거야.”
프란츠가 가슴 부심 쩌는 제이콥에게 한 소리 했다. 제이콥이 입을 못생기게 삐죽 내밀고는 프란츠를 째려봤다.
“절벽 주제에. 왜 부러워? 이렇게 자꾸 가슴을 치켜올려줘야 탄력 있고 예쁜 모양이 되거든.”
전혀 의학적 지식과 관련 없는 제이콥만의 믿음이었다. 차라리 딸기 우유를 마시면 가슴이 커진다는 속설이 더 신빙성 있게 들렸다. 그렇지만 아인은 압도적인 제이콥의 가슴이 그 어떠한 과학적 증거보다 신뢰 갔다. 슬쩍 뒤를 돌아서 손바닥으로 가슴을 받쳐봤다.
원작 소설에서 알렉세이는 제이콥의 가슴에 홀렸다. 지금은 볼품없는 멸치와 연애 중이지만 잠재적 변태가 언제 큰 가슴을 찾아 떠날지 몰랐다.
“아, 씨. 순진한 아인이한테 도대체 뭘 가르친 거야. 이 오크야.”
몰래 따라 한다고 했는데 프란츠가 봤는지 제이콥에게 화냈다. 제이콥도 어린애 앞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겠다며 혀를 찼다. 친구들이 아인에게 절대 제이콥의 행동을 따라 하지 말라고 뜯어말렸다. 아인은 제이콥과 자신의 가슴을 번갈아 보며 시무룩해졌다.
연애는 처음이라 잘 모르지만, 이래 봬도 19금 BL 소설을 읽은 몸이었다. 공수끼리의 사랑이 어떤 건지 정도는 알았다.
광공은 가슴골 사이에 자지를 넣고 피스톤질을 해주면 좋아했다. 그런데 아인은 예나 지금이나 멸치였다. 오직 떡대수만 할 수 있는 패시브 스킬을 사용할 수 없었다. 지금도 자신의 알파와 잠자리를 가지는 횟수는 충분했지만, 그가 너무 좋아진 만큼 불안도 커졌다.
평범한 아인에게 질려서 알렉세이가 언제 삼촌의 남자와 눈이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수를 친구로 둔 게 패착이었나 보다.
아인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제이콥의 매력이지만, 그는 수많은 독자들이 좋아했던 원작수였다. 분명 아인은 모르는 멋짐 포인트가 있을 것이다. 제이콥 앞에만 서면 악역 캐릭터에 빙의한 아인은 한없이 작아졌다.
“괜찮아, 아인아, 가슴 작은 오메가 좋아하는 알파도 많아. 풋. 아, 미안. 폐하께서 과연 만족하실까 싶어서.”
제이콥이 마지막에 웃음을 터트렸다. 왠지 기분 나빴다. 자신감 가득한 제이콥의 얼굴에 흐르는 개기름이 부티 났다.
아인은 아직도 이해되지 않고 공감되지 않는 <집착광공은 능욕을 멈춰!> 내용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 소설의 세계관 때문에 제이콥과 같은 오메가가 이 세계에서 인기인인 걸지도 몰랐다.
누가 봐도 제이콥의 표정은 학교에서 인기 있는 인싸 같고, 아인은 점심시간에 같이 앉아서 밥 먹어줄 친구도 없는 아싸의 표본 같았다.
살이 많이 빠져 더욱 완벽한 근육돌이가 된 제이콥은 미국 하이틴 영화에 나오는 럭비선수 같았다. 남성미가 쩌는 이 오메가를 사랑하지 않을 게이, 아니 알파가 없기에 자신만만한 것이리라.
아인은 BL세계에서 인기 없는 스타일인 친구를 걱정해주는 착한 제이콥을 마음속으로 질투하는 못난 자신이 싫었다.
“위로 고마워. 콥콥아. 그런데 넌 덩치가 그렇게 큰데 어떻게 공작님 품에 안겨?”
“….”
“혹시 네가 공작님 안아드려? 난 알렉이 이렇게 안으면 품 안에 쏙 들어가서 숨쉬기 힘들거든.”
제이콥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아인은 자각하지 못한 채 제이콥을 사과 껍질처럼 돌려 깎았다. 친구들이 배를 잡고 웃느라 숨을 헐떡였다.
“뭐야. 너희들 왜 이렇게 웃겨.”
슈리아가 하도 웃어서 눈물을 그렁거렸다.
“아인이 승!”
제레미는 가운데서 제이콥과 아인의 손을 잡고 권투 경기의 심판처럼 아인의 손을 들어 올렸다. 프란츠가 제이콥의 어깨를 두드렸다.
“콥콥아. 아인이 좀 그만 부러워해. 아인이는 천상계 영역에 있는 미인이라고. 넌 색다른 매력으로 공작님을 함락시켰잖아. 그걸로 만족해.”
“흥! 내가 뭘 아인이를 질투했다고. 나도 울 자기한테 엄청 귀엽고 깜찍하다는 소리 많이 듣거든. 오늘 아침에도 얼마나 나 붙잡고 괴롭혔는지 알아?”
“그래, 그래.”
착한 프란츠가 제이콥을 달랬다. 아인은 친구들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제이콥과 기 싸움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콥콥아. 혹시 나한테 서운한 거 있으면 말해줄래. 난 너랑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씨~. 야, 아인 페르디안. 솔직히 내가 너보다 12살 많거든. 근데 자꾸 친구라며 말 놓지.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
맞다. 제이콥 ‘떡대수 아저씨’였지. 이렇게 보니 나름 동안계에 한 획을 그은 그였다.
“응, 콥콥이 형.”
“그리고 너 나한테 폐하가 황자 시절 때, 소개팅 시켜준다고 두 번이나 불러놓고 엿 먹인 거 기억나냐. 와, 진짜 신분제만 없었어도 너 그때 한 대 맞았어.”
엿을 먹이다니. 이건 진짜 오해였다. 자신이 알렉세이를 쓰레기 취급할 때라 어떻게든 그를 원작수에게 떠넘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말이다.
“아주 둘이 정분나서 좋아 죽더만. 그런데 네 알파를 왜 나한테 소개해준다고 해. 아주 사람을 가지고 놀지.”
제이콥이 그렇게 느꼈는지 몰랐다. 아인은 재빨리 사과했다. 제이콥이 한결 누그러진 기세로 아인의 사과를 받아줬다.
“뭐 됐어. 나도 그 덕에 지금 남편 만나서 신분 세탁 제대로 했으니까.”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제이콥은 진정한 능력자였다. 철혈의 공작이라 불리는 안달리시아 공작을 홀린 제이콥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시종이 아인을 데리러 왔다.
“폐하께서 페르디안 백작저에 돌아가지 마시고 태양궁에 머물라 하십니다. 모시겠습니다.”
“애들아, 나 이만 갈게. 나중에 또 보자.”
“그래, 아인아. 이제 널 편하게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날도 얼마 안 남았네.”
프란츠는 좋은 일인데 왜 눈물 나지, 하며 코를 훌쩍였다. 슈리아가 ‘아인아, 아인아. 아인아.’ 자신의 이름을 연거푸 불렀다. 제레미는 황후가 되면 안아볼 수 없다며 아인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친구들이 다 달려들어서 아인을 안았다. 제이콥이 형 소리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듣자고 해서 아인은 그를 ‘형’이라고 불러줬다.
제이콥이 좋다며 웃었다. 하여간 은근 콥콥이도 속 빈 강정이었다. 이러니 미워할 수 없지 싶다. 아인은 기사들에게 둘러싸여서 시종의 안내를 받아 태양궁에 입성했다.
모래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규모의 정원이 있었다. 크리스털 분수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햇빛에 물방울이 반사되어 무지개가 어른거렸다. 아인은 화려한 분수를 넋 나간 채 구경했다.
정원에 핀, 한 송이도 시들지 않은 꽃들을 보고 있노라니, 요정 나라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나 장미 화원이 인상적이었다.
장미의 품종을 개량해서 꽃의 크기와 색이 몹시 다양했다. 향이 진한 꽃들이 모여 조화롭게 섞인 향기는 페로몬처럼 황홀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좋은 궁이 있는데, 자기 아들을 모래궁 같은 황폐한 데서 지내게 한 페도로프한테 다시금 분노가 치밀었다. 아인은 주먹을 불끈 쥐고 시종을 따라서 태양궁 안으로 들어갔다.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궁의 문은 모두 금으로 도장되어 있었다. 화려한 로코코 양식의 장식들이 사치를 미덕으로 여기던 프랑스 절대 왕정 시대를 떠올리게 했다.
아인은 복도를 걸려 있는 역대 황제의 초상화를 보며 걸었다. 이제 이 마지막 줄에 알렉세이의 초상화도 걸리게 될 터였다.
괜히 뿌듯해서 제이콥처럼 가슴을 앞으로 잔뜩 내민 채 걸었다. 제이콥과 달리 아인의 모습은 당당해 보이기는커녕 작은 종달새가 재롱을 부리는 것 같았다.
황제의 침실을 지키는 기사들이 아인을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들이 양쪽으로 문을 당겨 열었다.
“어… 저… 청소가 안 되어 있는데요?”
호텔 투숙객이었으면 바로 클레임 걸었다. 침대에 장미 꽃잎이 뿌려져 있었다. 바닥에도 꽃잎들이 흩뿌려져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청소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크흠.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지시하셨습니다.”
아인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것 같아 시종은 “로맨틱하지 않습니까.” 하고 직접적인 힌트를 줬다. 별로 기뻐 보이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오시면 가이드님께서 기뻐하는 척 좀 해주세요.”
아직 황제와 혼인을 한 사이가 아니어서 가이드님이라는 칭호로 부르는 듯했다. 아인은 알겠다고 답하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토끼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아, 진짜. 이딴 게 왜 올라와 있는 거야.”
레이나가 재산 증여 목적으로 잉잉이 인형을 줬다고 착각해서 애지중지한 탓에 알렉세이가 크게 오해한 것 같았다. 아인은 정상적인 성인 남성이었다. 토끼 인형을 좋아하는 건 체사레 같은 아이들이나 가능했다.
아인은 턱에 호두를 만든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모솔 아니랄까 봐.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차원까지 쪼그라들겠다.
물론 자신도 알렉세이를 만나기 전까지 모솔이었지만, 현대에서 온갖 대중매체를 접하며 이런 이벤트가 프러포즈에 적합하지 않음은 알고 있었다.
나뭇가지 같은 팔다리와 달리, 마음속으로는 제이콥처럼 헬창의 피가 들끓는 아인이었다. 마초까지는 아니어도 너튜브를 보며 제2의 금종국을 꿈꾸던 아인의 취향을 전혀 저격하지 못한 이벤트였다.
침실과 연결된 또 다른 문이 열렸다. 캐모마일 꽃을 한가득 끌어안은 알렉세이가 걸어 들어왔다. 절대 자신이 감동받을 리 없다고 여겼는데, 와. 뭐야. 왜 눈물 나지?
모래궁에서 그토록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한 캐모마일은 싹이 나는 것 같아서 기대하면, 다음 날 쥐어뜯기고 짓밟혀 있었다.
범인을 잡기 위해 야간 순찰을 돌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알렉세이와 그 짓을 하느라 번번이 못 했다.
어쨌든 절대 자랄 수 없는 돌 틈 사이에 기적처럼 날아와 꽃을 피웠던 캐모마일을 보고 자신이 얼마나 그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던가.
그 기적의 꽃은 바람에 꺾어져 버렸지만, 자신이 느낀 감동을 알렉세이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어 정원에 캐모마일 씨앗을 심었던 거다. 그래서 꽃을 피우지 못하는 황무지를 보고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모른다.
알렉세이가 그런 사정을 알 리 없건만 캐모마일 꽃을 들고 청혼을 하려고 하는 듯해 울음이 터져버렸다.
그의 레아에 캐모마일이 피어나서 가져온 것일 테다. 절대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
“사실 너한테 꼭 주고 싶은 꽃이 있었어.”
아인은 알렉세이가 말을 시작해 고개를 들고 그에게 집중했다.
“어느 날 아무것도 없는 모래궁 정원에 꽃 한 송이가 핀 거야.”
“흡.”
아인은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절대 필 수 없는 돌 틈에 날아와 자란 모습이 몹시 기특했어. 이렇게나 강하고 아름다운 꽃이 있다고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날 괴롭히기 위해 호라이슨이 꺾어버려서 너한테 보여주지 못했어. 그 녀석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건 다 파괴해버리거든.”
캐모마일 꽃다발을 내밀며 알렉세이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태양궁 정원에서 본 장미들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척박한 환경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이 하얀색 꽃이 아인은 장미보다 더 좋았다.
“나 사실 너무 화나서 그 녀석 궁까지 찾아가 백장미를 다 태워버렸었다? 돌 틈 사이에 날아와 피어난 그 꽃으로 고백하면, 네가 내 사랑도 기적처럼 받아줄 거라고 믿었거든.”
알렉세이가 우는 아인에게 작은 보석함을 내밀었다. 붉은 벨벳 위에 고정된 반지에 다이아몬드가 캐모마일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나랑 결혼해줄래?”
“예! 예! 무조건 ‘예’예요.”
아인은 무릎 꿇은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알렉세이 품에 폭 안긴 채 하염없이 울었다. 그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아인은 그동안 자신이 모래궁에서 알렉세이를 위해 캐모마일 꽃을 키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했다.
“정말? 아인이 너도 그 꽃을 보며 나한테 보여주고 싶었어?”
알렉세이도 그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아인의 말에 몹시 기뻐했다. 보석함에서 반지를 꺼내 그가 아인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웠다. 그림 그릴 때는 더러워질 수 있어서 못 끼겠지만, 평상시에는 계속 끼고 있을 거다.
“내 레아에 캐모마일이 핀 건 우연이 아닌, 우리의 사랑 때문이었어.”
그의 높은 코가 아인의 코를 문질렀다. 너무나 행복한 아인은 지금 떨어지는 낙엽만 보고도 까르르 웃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둘이 부둥켜안은 채로 침대로 향했다. 서로 떨어지면 편하게 갈 수 있을 텐데 굳이 그 불편한 자세를 유지했다.
서로 눈치 보지 않고 옷을 벗어 던졌다. 아인은 상의를 벗었다가 볼록 튀어나온 배를 보고 멈칫했다. 반면 알렉세이의 배는 액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식스팩이 확실하게 보였다. 아인은 슬그머니 벗은 옷으로 상체를 가렸다.
“왜 그래? 잘 감상하고 있는데.”
변태 아저씨처럼 말하지만 놀랍게도 알렉세이는 스무 살이었다. 아인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딴청을 피웠다. 알렉세이가 바지까지 벗어 던지고 아인을 자기 쪽으로 쭉 잡아당겼다. 앙상한 몸에 배만 불룩했다. 이제 와 뒤늦게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깊어진 만큼 내 외모를 신경 쓰게 되었다고 말하긴 창피했다.
빙그레 웃은 그가 아인의 뺨에 뽀뽀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쉬지 않고 입술을 들이밀어서 아인을 간지럼 태웠다. 웃다 보니 어느새 상체를 가린 옷은 빼앗기고, 바지는 벗겨졌으며, 침대 위에 누워 알렉세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능범이었다. 알렉세이는 얄밉게 혀로 아인의 젖꼭지를 할짝대며 예쁜 눈웃음으로 무마하려고 들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싶었다. 커다란 손이 몸을 부드럽게 쓸어내릴 때마다 긴장이 풀려나갔다.
알파 페로몬이 아인을 질식시킬 것처럼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오메가 페로몬도 덩달아 배출되어 침실 안의 공기가 달콤한 냄새로 끈적거렸다.
그가 아인의 손을 가져가 제 뺨에 붙였다. 예전에 해외 토픽에서 숲에서 다친 개를 치료해줬더니 집까지 따라와 함께 살게 되었다는 사연이 떠올랐다.
개가 갈수록 덩치가 커져서 대형견이라 그런가 보다, 하며 주인이 키웠단다. 그런데 개가 애교 부리는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개가 아닌 늑대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지.
알렉세이는 꼭 주인이 자신을 버리지 않도록 개인 척했던 그 늑대 같았다.
“히이잇. 간지러워.”
가슴에 달라붙은 알렉세이가 자꾸 혀로 젖꼭지를 문질러댔다. 머리통을 밀어내도 포기하기는커녕 더 저돌적으로 달라붙었다.
“앗. 아앗.”
젖꼭지를 빨아올리는 엄청난 힘에 가슴까지 위로 따라 올라갔다. 알렉세이가 붕 뜬 아인의 허리를 팔로 받쳐줬다. 아인이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침대 시트를 쥐어뜯었다. 하얀 천이 물결을 그렸다. 아인은 무릎 사이를 꼭 붙이고 구멍에서 애액이 흐르지 않도록 애썼다.
자연히 엉덩이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알렉세이가 아인의 한쪽 볼기를 잡고 주물러서 뭉친 근육을 풀어 주었다. 꼭 붙어 있는 아인의 다리 사이를 열기 위해 그가 무릎을 잡았다.
“열어줘.”
“…으.”
“열어줘, 아인아.”
아인은 창피해서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다리를 벌렸다. 시선이 닿자 활짝 열린 구멍이 음파음파 입질을 하며 열렸다가 닫혔다. 미끄덩한 점액질이 그곳을 빠져나와 엉덩이골로 흐르는 게 느껴졌다.
얼굴은 물론 가녀린 어깨와 침으로 번들거리는 야한 젖꼭지, 심지어는 임신으로 볼록해진 배까지 빨갛게 익었다. 알렉세이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아인의 구멍에 조심스럽게 손가락 한 개를 넣었다.
얼마나 자신의 오메가가 흥분했는지 손가락이 들어가자마자 주르륵 애액이 새어 나왔다. 쿨쩍 쿨쩍. 안은 이미 흠뻑 젖어서 알파 자지를 받아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알렉세이는 조바심 내지 않고 두 번째 손가락을 넣었다. 아인이 알렉세이의 손가락을 꽂은 채 엉덩이를 흔들었다. 아인은 세상에서 제일 야한 오메가였다.
이러니 자신이 미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알렉세이는 아플 정도로 발기한 자지를 잡고 겨우 손가락 두 개를 넣은 구멍 주위를 배회했다.
그런 알렉세이의 행동에 아인의 눈매가 장난하지 말라는 듯 매섭게 변했다. 알렉세이는 샐쭉 토라진 아인이 귀여워서 웃었다. 큼지막한 귀두로 주름을 헤집듯 밀고 들어갔다.
아인이 알렉세이에게 두 팔을 벌렸다. 알렉세이는 그를 안아주며 하반신을 바투 붙여서 깊게 삽입했다.
“아!”
쭉 미끄러져 들어간 길이만큼 뒤로 오랫동안 빼내고 다시 처넣었다.
“앗!”
그 짓은 점점 횟수를 거듭할수록 빠르게 반복되었다. 좆 박는 힘에 아인이 너풀거렸다. 가벼운 아인이 침대 헤드로 밀려났다. 이러다가 머리를 부딪힐 것 같아 정수리 위에 베개를 놔줬다.
알렉세이는 위로 올라간 아인을 밑으로 쭉 끌고 내려갔다. 아인이 만져주지도 않은 페니스로 정액을 뿜어내는 기특한 일을 해냈다.
알렉세이는 방금 사출해 예민해졌을 아인의 페니스를 손으로 살포시 잡고 흔들었다. 자지를 품고 있는 내벽이 좁아들었다. 뒤를 쑤시며 앞을 만져주니, 어쩔 줄 몰라 하며 아인이 엉엉 울었다.
“흐아앙. 아아. 흑흑. 그만해. 이 바보야.”
“정말? 내 자지 좋아서 물을 질질 쌌으면서?”
“훌쩍. 흐응. 아앗. 앙.”
아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불알까지 처넣을 기세로 씹질을 하는데 아인이 다다다 말했다.
“젖꼭지도 빨아주세요.”
“뭐?”
“씨~, 다 알아들었으면서 훌쩍. 젖꼭지. 젖꼭지는 왜 안 빨아주냐고요.”
젖꼭지를 빨아주지 않는 게 서운했던 모양이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용기를 낸 아인이 귀여울 뿐이었다. 알렉세이는 얼른 아인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젖을 물리기 위해 오메가의 유방이 커지고 있었다. 처음 아인을 안았을 때와 지금의 몸태가 완전히 달랐다. 손에서 부드럽게 뭉그러지는 가슴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이로 잘근잘근 씹어 먹지 않아도 입 안 가득 침이 고일 만큼 달콤한 살결이었다. 아인이 팔로 알렉세이를 잡아당기며 밑에 물고 있는 자지를 구멍으로 조였다.
아인은 두 다리로 알렉세이의 엉덩이를 잡아당겨 더욱 깊게 자지를 넣게 했다. 무서워했던 알파와의 섹스인데 언제 그랬냐는 듯 아랫입으로 맛있게 쩝쩝 좆을 먹었다.
커다란 자지가 배 속에 들어차 아인의 몸을 양분하려는 것처럼 말뚝을 박아댔다. 이렇게 문을 두드려대는데 자궁 문이 열리지 않을 리 없었다. 알파의 본능이 오메가의 자궁에 씨물을 잔뜩 쏟아부으려고 들었다. 알렉세이는 달콤이가 다칠까 봐 얼른 좆을 밖으로 빼냈다.
아인의 무릎을 손잡이처럼 잡은 알렉세이는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엄청난 양의 정액을 뿜어냈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정액에 아인은 흠뻑 젖어버렸다.
오메가 자궁에 들어가 있다고 착각한 알파의 신체가 허공에 노팅을 했다. 아인은 속눈썹에 정액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흐릿한 시야로 눈앞에 펼쳐진 엄청난 광경을 목격하였다.
엄청난 굵기와 길이를 자랑하는 그의 귀두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자궁에 정액을 뿌리고 흘리지 못하게 하려는 알파의 고약한 짓은 실제로 보니 실로 엄청났다.
곧은 기둥이 활처럼 휘었다. 오메가의 안에 들어가면 절대 빠지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느껴졌다.
예전이라면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을 텐데, 이제는 좆맛을 알아 도리어 구멍이 가려울 뿐이었다. 타락해버렸다. 뇌를 꺼내서 물에 깨끗이 씻어야 했다.
아인은 노팅 중인 좆을 손으로 만졌다. 알렉세이가 움찔했다. 홀린 듯이 몸을 일으켜 그의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정액에 절여지다시피 한 모습으로 아인은 알렉세이의 노팅 중인 좆에 혀를 가져다 댔다.
“읍.”
알렉세이가 급히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아인은 고양이가 우유를 먹듯 혀로 기둥에 묻은 정액을 핥아 먹었다. 가뜩이나 단단한 그의 허벅지가 터질 것처럼 근육을 부풀렸다.
입을 크게 벌리고 귀두를 앙 깨물었다. 만두처럼 말랑하면 욱여넣을 수 있을 텐데, 돌처럼 딱딱해 그럴 수 없었다. 아인은 자신의 대담한 행동에 알렉세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도 모른 채 고개만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씹. 아인 페르디안. 너… 너… 나 좆 터져서 죽게 만들려고 작정했지.”
입에서 커다란 귀두를 뱉어낸 아인은 순진무구하게 웃었다.
“히히. 궁금해서 한번 해봤어요.”
남의 속이 새까맣게 타는 줄도 모르고, 이제 호기심을 해결했다며 씻으러 가려고 했다. 알렉세이는 아인을 붙잡아 도로 침대에 눕혔다.
노팅 중인 좆을 구멍에 넣을 순 없으니, 다른 데를 범해줄 것이다. 아인의 두 다리를 잡아서 오른쪽 어깨에 올렸다.
마른 허벅지는 틈새가 살짝 벌어져 있었지만 알렉세이의 것이 굵으니 괜찮았다. 아인의 허벅지 사이에 좆을 넣고 흔들었다. 아인의 황금빛 눈동자가 놀라움에 커졌다.
이대로 젖을 빨고 싶지만, 아인의 하체가 접히면 배가 눌릴 터라 그럴 수 없었다. 똑같이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체위라 할지라도 정상위로 하는 것과는 태아에게 가는 부담이 달랐다.
대신 손으로 통통한 유두를 비틀었다. 아인이 활어처럼 튀어 올랐다. 어깨에 올려둔 다리가 탈출하려고 들었다. 알렉세이는 손으로 아인의 다리를 단단히 붙잡고 허벅지 틈을 계속 공략했다.
오메가 구멍에 비하면 대단하지 않은 부위인데도 흥분되었다. 하긴 아인의 신체인데 어디인들 섹시하지 않겠는가. 하다못해 자신은 아인의 발바닥에 좆을 비비기만 해도 사정할 거다.
“으. 으응. 응.”
구멍에 넣는 것도 아닌데 놀랍게도 아인이 숨을 헐떡이며 느꼈다. 단순히 젖꼭지가 만져진다고 이러는 게 아니었다. 벌어진 입으로 침을 흘리며 아인이 발기했다.
알렉세이는 허벅지 안쪽조차 성감대인 이 오메가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풀리지 않는 노팅 때문에 정신없이 허벅지를 사용해버렸다. 둘은 동시에 절정에 다다랐다. 어깨에서 다리를 내려주자 아인의 다리가 아무렇게나 벌어진 채 붉게 쓸린 살갗을 내보였다.
“아프겠다. 왜 말 안 했어.”
얼른 힐링 포션을 아공간에서 꺼내 아인에게 먹였다. 아인이 기분이 좋아서 아픈 줄도 몰랐다는 앙큼한 소리를 했다.
그들은 더러워진 몸을 씻으러 가야 했지만 침대에서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을 계속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인에게 팔베개를 해준 알렉세이는 제 품 안에 안긴 그를 다정한 눈으로 들여다봤다. 아인 또한 자신을 따스한 눈빛으로 들여다보는 알렉세이의 입술에 쪽 기습적으로 뽀뽀를 했다.
히히히. 하하하. 서로를 보기만 해도 좋은 그들은 웃었고, 분위기는 다시 농염하게 무르익었다.
“이번에는 씻으면서 할까.”
“안에 물 들어가면 안 돼요.”
“걱정 마. 물속에서 안 해. 황제 전용 온천에서 하늘 보면서 할 거니까.”
순식간에 침대 위에 있던 그들은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에 있었다.
“단언컨대 이번에도 좋아할 거야. 기대해도 좋아.”
***
태양궁으로 들어설 때부터 크리스털로 만든 분수를 보고 돈지랄이 엄청난 곳이구나 느끼기는 했지만, 황궁 안에 온천을 만들었을 줄 몰랐다.
평범한 온천을 기대했던 아인은 알렉세이의 변태력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유르한의 피는 범상치 않았다.
각종 야한 포즈를 취한 모습의 벌거벗은 미남 조각상들이 온천 주위에 늘어서 있었다. 역대 황제들이 이곳에서 무슨 짓을 했을지 시청각 자료를 보고 있는 양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아인의 뇌는 이미 글러먹었다. 저 조각상들이 너무나 군침 도니 말이다. 조각상에 달린 페니스 크기가 엄청났다.
온천에서 목욕한다는 핑계를 대며 저기 올라타 엉덩이로 절구질하는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인이 빤히 돌 자지에 눈길을 주자 알렉세이가 질투를 하는지 손으로 그의 눈을 가려버렸다.
“내 것이 더 커.”
“크흠. 뭐 그렇긴 해요.”
누가 썼을지 모르는 걸 탐내느니 자신의 알파 거나 잘 활용하기로 했다. 알렉세이가 아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온천에 입수하기 전 그가 온천물을 뿌려서 아인의 몸을 씻겨줬다. 아무리 힐링 포션으로 HP를 회복했다고 해도 정신적 피로감이 남아 있었는데,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부드럽게 마사지를 하면서 자신을 씻겨주는 알렉세이는 어느덧 훌륭한 세신사가 된 듯했다. 이 능력을 현대에서 살렸으면 목욕탕의 신이 되었을 거다.
아인은 그와 함께 온천 안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따뜻했다. 온천 주위에 그려진 마법진이 물 온도를 조절하는 듯싶었다.
손으로 물을 끼얹을 때마다 피부가 매끄러워지는 게 느꼈다. 물이 참 좋았다. 여기서 삶은 달걀만 먹으면 딱인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기막힌 눈썰미로 아인의 아쉬움을 눈치챈 알렉세이가 물었다.
“뭐 먹고 싶어?”
“삶은 달걀이랑 식혜요.”
요리책을 집필하면서 모래궁 요리사들의 천재성을 쥐어짠 덕에 한국에서 먹었던 대부분의 음식들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임신해서 지구 음식이 그리운 아인에게 천만다행이었다.
새로운 요리에 대한 모래궁 요리사들의 의욕과 학구열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인이 한번 먹고 싶다고 말한 음식은 잠 한숨 자지 않고 연구해 만들어냈다.
맛이 똑같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은 매번 얼추 비슷하게 만들어냈다. 샤를 상단에서는 아인의 입덧 때문에 하나둘씩 개발되는 음식들을 제품화해서 판매했다.
모래궁 요리사들은 샤를 상단에 레시피를 제공하게 되면서 순식간에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물론 세상은 불합리한 곳이기 때문에 한 것도 없으면서 음식에 대한 아이디어만 제공한 아인이 가장 큰 비율로 정산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어느덧 모래궁 요리사들은 아인을 요리 스승으로 모셨고, 세상 사람들은 아인을 엄청난 미식가이자 천재 요리 연구가쯤으로 여겼다.
프란츠가 서점에 아인 페르디안 위인전이 나왔다며 보내 준 걸 잠깐 봤는데, 참 자신이 엄청나더라.
자신은 세 살 때 백작 부인의 초상화를 완성하고(그래, 낙서했겠지.), 다섯 살 때부터 맛없으면 식사를 거부했을 정도로 엄청난 미식가였으며(그냥 음식 투정이거늘.), 열 살 때부터 억울하게 잡혀간 아버지를 대신해 가문을 돌봤다고 한다. (열심히 돈 번 엄마가 억울할 듯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뻥으로 가득한 위인전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끝까지 읽으니까 나중에는 난폭하고 잔인한 1황자를 순한 양으로 탈바꿈했다고 적어놓았다. 원래부터 알렉세이는 착했는데 말이다.
어느덧 아인의 머릿속에는 도망치려고 했던 가이드를 무섭게 쫓아와 협박했던 알렉세이는 없었다.
엄청난 다정함으로 중무장한 채 본인이 무해하다고 아인에게 세뇌 중인 알렉세이가 휴대용 통신 마도구로 연락을 넣었다. 시종이 금방 삶은 계란과 식혜를 가져왔다.
황제인 알렉세이가 직접 온천 입구까지 나가 음식을 받아와서 아인에게 대령했다. 물속에서 먹으면 체할 수 있다고 해서 잠시 물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양모 담요가 젖은 어깨에 둘러졌다. 앉은 자리에서 달걀 다섯 개를 작살냈다.
임신하면서 부쩍 식욕이 많아지고 식탐을 부리게 되어서 몸무게가 어느새 5kg이나 늘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5kg이나 되지 않을 테니, 이건 다 아인의 몸에 축적된 지방 무게였다.
먹는 걸 줄여야 하는데 자꾸 옆에서 알렉세이가 더 먹어보라 부추겨서 짜증 났다. 알몸이어서 배가 볼록한 게 더 잘 보이는지라 이제 그만 먹기로 했다. 그런데 알렉세이가 목 막히겠다며 살얼음 동동 띄운 식혜를 입에 대줬다. 식혜를 마시자 계란이 다시 입에 당겨서 할 수 없이 3개나 더 먹게 되었다.
맙소사. 아인은 자신 앞에 수북하게 쌓인 계란 껍데기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100kg짜리 덤벨로 운동하는 제이콥 같은 헬창도 아니면서 그 많은 계란을 다 먹어버렸다. 이러다가는 살쪄서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될지 몰랐다. 여태 몸무게 가지고 스트레스 받은 적 없는데, 갑자기 체중이 늘어서 우울했다.
울상을 짓는 아인에게 알렉세이가 눈치 없이 부족하냐고 물었다.
“씨! 내가 돼지인 줄 알아요! 왜 자꾸 먹으래. 흡. 히끅. 이거 흑, 다 먹어서 나 이제 살찌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너한테 살찔 데가 어디 있다고. 원래 단백질은 살 안 쪄.”
맞는 말이었다. 단백질은 살 안 찐다. 그런고로 치킨도 살 안 찐다. 이 세상에는 절대 풀리지 않는 난제가 있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아인은 달걀을 먼저 먹었기에 이제 닭을 먹기로 했다.
“알렉, 혹시 치킨 먹고 싶어요?”
자신이 먹고 싶으면서 괜히 알렉세이에게 물었다. 알렉세이가 통신 마도구로 치킨을 준비시켰다. 치킨을 기다리는 동안 아인은 계속 단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온천 와서 씻는 건 30분이고, 먹는 게 1시간째였다. 알렉세이가 치킨 오기 전에 소화시켜야 하지 않겠냐며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온천 주위를 돌면서 걸으려고 했는데 그에게 덜렁 들렸다.
자신을 온천탕 둘레를 장식하고 있는 야한 조각상에게 데려갔다. 뒤에서 사람을 끌어안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조각상이었다.
조각상 어깨 부위에 관절이 있어서 팔이 움직였다. 아인의 다리가 조각상 팔에 고정되었다. 구멍을 내놓은 채 눕게 되었다. 역시 이 녀석들 포즈가 엄청나더니만 그냥 있는 관상용이 아니었던 거다.
알렉세이가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인의 구멍을 빨기 위해 무릎을 꿇고 수면 위로 얼굴만 내놓았다.
“으으으. 이 변태. 그만해요.”
수치심으로 빨갛게 익은 아인은 구멍을 오물거리며 알렉세이의 혀를 거부했다.
“아인아, 진짜 변태가 어떤 건지 보여줄까.”
“헉, 아니요. 절대 안 볼래요.”
“그래, 잘 생각했어.”
알렉세이가 아인의 구멍 안으로 혀를 넣고 미꾸라지처럼 안을 유영했다.
“아아. 아! 으아앗.”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조각상에 붙잡혀 잔뜩 벌어진 다리를 버둥거렸다. 가랑이 사이에서 고개를 든 알렉세이가 떨어지겠다고 걱정했다.
그러면 그만하면 되는데 알렉세이가 애액이 묻어 번질거리는 입술로 다시 구멍을 빨았다. 아, 하얗게 눈앞이 점멸하였다.
이러면 아인까지 알렉세이와 싸잡혀서 변태로 여겨질 텐데 좆을 세워 버렸다. 알렉세이가 눈을 빛내며 구멍에 쑤셔 넣었던 두툼한 혀를 뽑아냈다.
투명한 애액이 뿜어져 나와 온통 그의 입 주위가 젖었다. 그가 제 입 속에 뭐가 담겼는지 굳이 입을 벌려 아인에게 보여줬다. 한꺼번에 먹는 게 아니라 쩝쩝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애액을 삼켜서 아인에게 수치심을 줬다.
알렉세이가 무릎을 꿇은 상태로 반만 일어섰다. 아인의 발기한 성기를 덥석 입에 물고 혀로 굴렸다. 구멍은 손가락을 넣어서 천천히 쑤셨다. 자지에 비하면 한없이 가는 손가락이 아쉽다는 듯 구멍이 쉼 없이 오물거렸다.
알렉세이가 목구멍으로 아인의 것을 통과시켰다.
“흐아. 아아. 으으응.”
가슴이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내밀어졌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젖꼭지가 가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임신으로 유선이 발달한 가슴이 더욱 봉긋해지고, 쾌감에 젖은 유두가 미약하게 떨렸다.
구멍에 좆질을 할 때마다 자꾸 젖꼭지를 만져대니, 몸이 느낄 때마다 반사적으로 젖꼭지가 예민해졌다. 아인의 입은 점점 벌어져 입가로 침이 흘러내렸다. 정신없이 아인의 성기를 빨던 알렉세이가 고개를 들었다. 쾌락에 취해 초점이 몽롱해진 아인을 올려다보며 수줍게 웃었다.
누가 보면 첫사랑에게 고백하기 위해 편지를 건넬 것 같은 표정이지만, 정작 그는 흉측하도록 혈관이 부푼 자지를 구멍에 찔러 넣었다.
온천 안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에 에스퍼 두 명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를 봤다. 황제가 그의 가이드와 온천으로 왔다는 소식을 입수해 호위하러 온 제제와 아론이었다.
그들은 온천 입구 앞에서 음식 배달을 온 시종과 마주쳐 치킨을 황제에게 전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안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 전달할 수 없었다.
“어차피 폐하는 S급 에스퍼이니까 우리가 호위 안 해도 돼. 가자.”
“진짜? 우리 그냥 가도 돼? 이 치킨은.”
“어차피 아인 공자 지금 바빠서 못 드셔. 다 식어 빠진 걸 드시게 할 순 없잖아. 우리가 먹자.”
아론은 제제의 등을 떠밀었다. 제제가 땅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제제. 너 혼날래?”
“아론 형, 난 진심으로 근무 시간에 근무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진심은 무슨. 아주 온천 안으로 뛰어 들어가 구경하고 싶어서 미치려고 하는구만.
“정 일하기 싫으면 형 먼저 가. 난 여기 있을래.”
나중에 뭐가 되려고 이럴까. 아론은 제제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제제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 갔다.
“아, 싫어. 싫다고. 더 들을래.”
아론은 얼른 눈치를 보며 제제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SS급 에스퍼의 귀를 피할 순 없었다. 알몸에 가운만 거친 알렉세이가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는 듯 그들 앞에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해 나타났다.
그는 아론의 손에 들린 치킨을 빼앗더니, 제제를 노려봤다. 아론은 철없는 기사단 막내가 걱정되어서 곁눈질로 그를 쳐다봤다.
“너희, 퇴근해.”
시무룩해진 제제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미련 가득한 눈으로 온천 입구를 쳐다봤다. 어차피 문이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알렉세이는 커다란 몸으로 제제의 시야를 가리며 경계했다.
제제가 오메가만 아니었어도 독점욕 강한 우성 알파가 자기 오메가를 노리는 거라 여겨져 큰 싸움이 벌어졌을 것이다.
“와, 퇴근이다. 합법적 퇴근이야.”
아론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일부러 신난 척했다. 제제가 저 모자란 형을 어쩔 거야, 하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아론은 울컥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제를 잘 챙겨서 데리고 갔다.
제제가 복도를 걸으면서 아론에게 물었다.
“아론 형, 나중에 나 히트사이클 오면 같이 할래?”
“뭘?”
“아까 폐하랑 아인 공자가 하던 거 말이야.”
“….”
난생처음 받아본 오메가의 플러팅에 아론은 당황스러웠다. 그에게 제제는 친동생 같은 아이였다. 그는 아론 같은 에스퍼가 아닌 우수한 형질의 알파 가이드를 만나서 사랑을 해야 했다.
“뭐 이렇게 무턱대고 고백하냐.”
“넌 뭐가 그리 잘났다고 그렇게 무성의하게 거절하냐.”
아론의 말투를 따라한 제제가 아론의 발을 꾹 밟고 도망쳤다. 그렇지만 아론은 제제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다. 같은 에스퍼를 사랑한 에스퍼의 등이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운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론은 호라이슨을 따라 함께 감금된 주다를 떠올리며 복도에 어두커니 서서 백색 탑을 쳐다봤다.
***
인간계를 침략하려고 하는 마왕을 견제하기 위해 창조신은 에스퍼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힘을 온전히 견딜 수 없었다.
창조신은 자신의 힘을 빛과 어둠으로 나눠서 인간에게 각각 나눠줬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필수 불가결한 관계에 놓이게 된 이유다.
유르한 제국을 건립한 에스퍼 유르한에게는 대마법사이자 연인인 오메가가 있었다. 그러나 유르한의 가이드가 처음부터 가이드였던 건 아니었다.
그는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유르한과 함께 파티를 짠 에스퍼였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막 생겼을 무렵에는 가이드보다 마물과 마족을 공격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에스퍼를 더 위대한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용사 파티는 가이드 한 명 없이 전원 에스퍼로만 꾸려지게 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가이드를 무능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일행들은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에테르가 오염되었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용사 일행은 마왕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마계와 인간계를 연결하는 무지개다리를 끊어놓는 것을 끝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희대의 병신으로 불릴 뻔한 그들은 영웅일 수 있었다. 무지개다리가 파괴되어 지금까지 마물은 던전을 통해서만 인간 세계에 나올 수 있게 되었고, 마족들은 흑마법사에게 소환되어야만 인간계에 올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뭐 대단하다면 대단하고, 하찮다면 하찮은 업적이긴 한데 영웅들은 그 업적을 끝으로 죽을 위기에 놓였다. 유르한의 연인이었던 헤더는 죽어가는 유르한을 끌어안은 채 오열했다.
대마법사인 헤더의 경우 마계에서 에스퍼 능력보다 마법을 사용해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 유르한의 레아가 결국 폭주하는 에테르를 견디지 못해 붕괴하기 직전에 헤더의 레아가 변화했다.
그는 나중에 황후가 되어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마치 하늘을 걷는 기분이었어요. 그 황홀함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유르한의 가이드로 각성하는 순간, 영혼의 빈 조각이 딱 들어맞는 퍼즐에 의해 완성되는 것 같았죠. 저 개인으로서도 시한부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해탈의 순간이기도 했어요. 에테르 부작용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니까요.’
에스퍼도 운명의 짝을 만나면 가이드로 각성할 수 있다. 최초의 2차 전직자 헤더의 말을 빗대 이런 현상이나 이런 현상을 겪은 사람을 ‘스카이 워커’라고 불렀다.
가이드와 에스퍼가 매칭될 경우, 두 사람의 성향에 따라 땅과 하늘 역할이 결정되었다. 에스퍼였을 때는 땅이었던 레아가 위로 이동하는 경험을 한 헤더는, 이 이동을 몹시 감명 깊게 느낀 듯했다.
언제나 땅을 기어 다니며 혈관이 썩어들어 가고, 관절이 뒤틀리는 경험을 하다가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 얼마나 가뿐했을까.
가이드는 에스퍼와 달리 정신적으로만 힘들 뿐 신체적 고통이 전혀 없었다. 에테르 부작용에 시달리는 에스퍼에게 가이드가 되는 건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A급과 B급과 같이 등급이 높은 에스퍼의 경우,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위험만큼 엄청난 대우를 받기에 2차 전직에 대한 바람이 없었다. 충분히 고통을 감내할 만하다는 소리였다.
또한 E급과 F급처럼 아예 하위 등급이면 가벼운 스킨십 가이딩만 받아도 일상생활이 가능하니, 에스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전무했다.
그러나 C급과 D급과 같이 어중간한 등급의 에스퍼는 ‘스카이 워커’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컸다. 황궁에 들어가 기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작용이 만만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A급 에스퍼, 더군다나 베타인 주다가 호라이슨을 짝사랑해 가이드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을 때, 아론은 속으로 그를 멍청이 취급했다.
A급 에스퍼를 버리고 가이드가 되고 싶다고? 남들은 제발 높은 등급으로 각성할 수 있도록 간절하게 기도한다. 손에 쥔 게 아깝지도 않은지 가이드 등급이 어떻게 책정될 줄 알고 그런 모험을 한단 말인가.
에스퍼일 때는 높은 등급이었어도, 가이드로 변화하면서 하위 등급이 될 수도 있었다. 또한 에스퍼가 가이드가 될 확률은 아주 희박했다.
사과나무 밑에 입을 벌린 채 누워서 사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수준이었다. 어쩌면 더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일일지도 몰랐다.
그 누구도 ‘스카이 워커’ 현상이 언제, 왜, 어떻게 일어나는지 몰랐다. 간혹 에스퍼와 에스퍼끼리 연인일 때 누구 한 명이 가이드로 변하는 일이 있어 ‘완전한 사랑’을 단서라고 여길 뿐이었다.
제제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지금 그 아이가 꿈꾸는 있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아론은 조소했다.
“그게 가능하면 난 진작 가이드였게.”
백색 탑에 빼앗겼던 시선을 돌려 정면을 봤다. 오래전 어린 수습 기사를 잘 챙겨주던 다정한 선배 기사가 저 탑에 있었다.
알파 에스퍼였던 소년은 마음속으로 끙끙 앓으며 제발 자신이 가이드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소년은 어느새 청년이 되었고, 선배 기사는 우리의 주군을 버리고 가버렸다.
아론은 멈췄던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