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오늘은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알렉세이는 오메가 아버지를 살해한 알파 아버지에게 결국 복수해냈다.
그가 비록 자살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도피를 택해 알렉세이의 얼굴에 끝까지 똥칠을 했지만, 정당한 황권을 잇기 위해선 제 손으로 죽이지 못할 상대였다. 알렉세이는 오히려 잘됐다고 여겼다.
알파 아버지를 홀린 사악한 흑마법사를 이따가 불태워 죽일 것이며, 그 흑마법사의 아이 또한 먼 섬으로 유배 보낼 예정이었다.
제논이 죽고 나서 그토록 기다리던 가이드도 만났고, 자신은 가이드랑 각인과 본딩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청혼을 받아줬다. 자신은 모든 걸 이뤘다.
모든 게 제 손으로 들어왔고, 세상눈에도 그렇게 보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에도 왜 통쾌하고 기쁘지 않은지 모르겠다.
제논의 무덤이 있는 곳은 황족들이 묻히는 묘지가 아니었다. 침대 밑에서 기절했던 어린 알렉세이는 눈을 뜨자마자 피에 젖은 오메가 아버지를 마주하게 되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죽은 제논을 묻어주러 오는 이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어린 자신이 직접 제논을 수레에 실어 모래궁 뒤뜰로 날랐다. 제논과 함께 모래궁 앞마당에 꽃씨를 심을 때 썼던 작은 모종삽으로 땅을 팠다.
눈물에 젖은 긴 속눈썹에 흙먼지가 묻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매운 눈을 비빌수록 눈은 더 아파 왔다.
아무리 어려도 S급 에스퍼여서 능력을 사용하면 순식간에 땅에 구덩이를 팔 수 있었지만, 가이드를 만나기 전까지는 능력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제논의 말이 떠올라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계속 땅을 팠다.
꽃잎처럼 작고 여린 손톱이 깨져도 금방 회복되었다. 그러나 알렉세이의 마음에 생긴 상처는 켜켜이 쌓일 뿐이었다. 아침에 시작한 구덩이 파기는 하늘이 새빨간 핏빛으로 물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훌쩍. 훌쩍. 제논 흑. 알렉이 잘못했어요.’
용기를 냈어야 했다. 저보다 약한 황제인데 무섭다고 제논의 등 뒤에 숨어선 안 됐다. 자신은 아이여서는 안 됐다. 괴물이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는 어린 알렉세이의 심장에 대못처럼 박히며 피를 철철 흘리게 했다. 제 손으로 판 구덩이에 제논을 밀쳐 빠트렸을 때, 알렉세이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구덩이에 버린 건 오메가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알렉세이 또한 감정을 버렸고, 인간다움을 버렸다.
제논 위에 흙을 이불처럼 덮었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 한때 황후였으나 길거리 비렁뱅이처럼 버려진 불쌍한 오메가의 안식처. 그리고 자신의 기억을 조각조각 내 묻어버린 무덤.
어른이 된 알렉세이는 제논을 묻은 뒤, 아무리 그가 보고 싶어도 찾아오지 않았다. 황제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제논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이곳을 무섭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비석 하나 없는 터였지만 알렉세이는 제 손으로 파낸 자리를 한눈에 알아봤다. 그곳에서 그는 오래전 자신이 묻었던 기억의 조각들을 찾을 수 있었다.
손에 든 꽃다발을 땅에 내려놓았다. 푸른 잉크로 염색한 장미였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파란색 장미이니, 알렉세이 멋대로 꽃말을 붙이기로 했다.
이 푸른 장미의 꽃말은 이제부터 ‘행복’이었다.
“그 자식,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안 하고 자살했어요. 목을 매달고 죽었더라고요. A급 에스퍼라 숨이 끊어질 때까지 30분은 걸렸을 거예요.”
바람이 불었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고작 30분밖에 고통스럽지 않아서 짜증 나요.”
나뭇잎 하나가 뺨에 찰싹 달라붙었다. 마치 그런 못된 말 하지 말라고 제논이 화내는 것 같았다. 알렉세이는 푸른 장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서 화나요. 난 도대체 그동안 뭘 바랐던 걸까요. 내가 견딘 인내와 분노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슬프지 않은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이걸로 다 끝날 거예요. 그 흑마법사를 불태워서 죽여 버릴 거거든요. 그러니까 제논도 편히 쉬어요.”
원래 바람이 잘 머물지 않는 모래궁인데 유난히 바람이 불어닥쳤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알렉세이는 개구진 인상이 되었다. 꼭 제논이 머리를 쓰다듬은 것 같아 알렉세이는 손으로 정리하지 않았다.
“다음에는 내 가이드도 데려올게요. 제논한테 아인이 소개해 주고 싶어요.”
알렉세이는 뒤돌았다. 밤새 자신에게 안기느라 지친 아인이 잠들었을 시간을 노려 빠르게 전 황후, 헬링턴의 화형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다.
헬링턴에게 이제 자신이 새로운 황제가 되었음을 보이기 위해 왕관을 쓰고, 더운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망토를 둘렀다. 시종들이 길 위에 벨벳 카펫을 깔았다.
십자가에 묶인 헬링턴에게서는 그동안 보인 그림 같은 온화함이 온데간데없었다. 가끔은 그가 자신을 아끼는 게 아닐까 착각하곤 했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초조함만이 가득했다.
“제발 펠을 불러줘. 죽기 전에 한 번만 펠을 보고 싶어.”
페도로프를 펠이라고 부르는 헬링턴의 눈에서 독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간절하게 알렉세이에게 빌었다.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단상을 둘러싼 집행관이 청초한 오메가의 미모에 홀려서 멍하니 그만 바라봤다.
“성화를 가져오도록.”
던전을 열었던 만큼 평범한 흑마법사는 아닐 것이라 여겨 준비한 성화였다. 어렵게 교황에게 부탁해 가져온 성물인 만큼 설령 헬링턴이 마왕의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불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 마왕을 죽이기 위해 선조 유르한은 마계에 갔다. 그와 함께한 용사 파티에 가이드가 한 명만 포함되어 있었어도, 그들은 마왕을 죽이는 임무에 실패하고 인간계에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헬링턴 또한 이 자리에 없지 않았을까? 제논도 죽지 않았고? 만약이라는 가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생각해봤자 괴로울 뿐인데 말이다.
자신을 있게 한 뿌리마저 원망할 만큼 이 순간의 알렉세이는 미련했다. 성화를 헬링턴에게 가져다 댔다. 감정에 휘둘려 사형집행인이 아닌 자신이 직접 헬링턴에게 불을 붙였다.
“으아가가아악.”
언제나 부드럽고 낮았던 음성이 고통으로 불쾌한 쇠 긁는 소리처럼 바뀌었다. 헬링턴의 비명 소리에 새들도 놀라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사람이 아닌 것이 성화에 닿자 진흙처럼 녹아내렸다.
헬링턴은 참았다. 페도로프가 얌전히 벌을 받으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세이에게 오세가 죽고, 그는 페도로프에게 손목이 붙잡혀 끌려 나왔다.
복도에 선 그가 헬링턴의 뺨을 때렸다. 통증보다는 그가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 아팠다.
‘도대체 왜 그랬어! 나한테 왜 그랬냐고!’
‘사랑해서 그랬어요.’
‘사랑? 하, 사랑이라고. 네 사랑 때문에 난… 내 사랑은 어떻게 됐냐고. 아주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잖아! 죽어. 죽어.’
페도로프가 헬링턴을 주먹으로 때렸다. 헬링턴은 그를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고작 매 몇 대 맞아준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었다.
그가 몇 대 때리지도 않고 어린아이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안쓰러워서 품에 넣고 보듬어주고 싶었다. 헬링턴이 다가가자 그가 매섭게 손을 쳐냈다.
‘얌전히 죗값을 받아. 그게 무슨 벌이든지.’
‘네. 그럴게요. 그럼 저한테 화 푸실 거죠?’
헬링턴은 페도로프가 자신을 이제 사랑하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 자신은 그와 각인까지 한 오메가이니 절대 그럴 일 없는데 말이다. 괜한 걱정이었다. 그럼에도 붉은 핏줄이 터지도록 자신을 증오하는 시선이 두려웠다.
‘황군은 흑마법사를 백색 탑에 끌고 가도록.’
헬링턴은 순순히 능력 제어구를 찼다. 그런데 페도로프도 같이 가는 줄 알았건만 자신을 지켜보기만 했다.
‘펠, 펠, 절 혼자 두지 마세요.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헬링턴을 보며 페도로프는 눈물만 뚝뚝 떨어트렸다.
‘제논… 제논….’
‘제발 당신 입에 다른 오메가 이름 올리지 마요. 싫어. 이것들아. 놔! 놓으라고!’
헬링턴은 몸부림쳐서 자신을 결박한 황군을 떨쳐냈다. 페도로프가 그에게 달려와 안기는 헬링턴의 머리채를 잡아 목을 뒤로 꺾었다.
‘얌전히 벌 받으라고 했지.’
‘그럼 나 보러 와 줄 거예요?’
‘그래….’
‘너무 화내지 마세요.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그저 페도로프를 달래기 위한 말이었다. 죄책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과에 페도로프는 눈물을 거둬들였다. 그는 왜 이 흑마법사가 자신에게 술수를 부려 제논을 죽이게 했는지 알고 싶었다.
‘날 왜 사랑하게 된 거야?’
페도로프는 헬링턴이 왜 자신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 알고자 물었다.
‘당신이 날 가이드로 만들어줬어요.’
‘아!’
‘우린 운명이에요.’
페도로프는 헬링턴의 머리채를 놓아줬다. 헬링턴을 황군에게 떠나보내고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짝이 아닌 존재를 갖고자 욕심을 부렸던 건 헬링턴이 아닌 그였다.
헬링턴은 페도로프의 약속만 믿고 알렉세이가 자신을 화형시키려고 해도 견뎠다.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얌전히 벌을 받는데 왜 그가 약속대로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는 걸까.
“제발. 흐윽. 제발 알렉세이, 자비를 베풀어 한 번만 그 사람을 만나게 해줘. 내가 다 잘못했어. 다 잘못했으니까 페도로프만 만나게 해줘.”
얼마나 보고 싶으면 페도로프를 만나게 해달라는 문장을 불타는 와중에도 완벽하게 말하는 걸까.
알렉세이는 비록 헬링턴이 술수를 부려 제논을 죽게 한 장본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권력이 아닌 페도로프를 사랑해서 그랬음을 인정했다. 물론 그렇다고 용서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복수를 완성했다는 생각에 잠시 가라앉았던 분노가 재점화되었다. 알렉세이는 죽어가는 헬링턴이 사랑하는 남자와 똑같은 얼굴로 그를 비웃었다.
“그 새끼 뒈져서 못 봐. 어차피 너도 곧 죽잖아. 지옥 가서 둘이 만나면 되겠네.”
“….”
그래서는 안 됐다. 아무리 원망해도 제 알파 아버지인데 헬링턴의 심장을 후벼 파고자 고인을 모독했다. 헬링턴의 팔다리가 홍수에 무너진 토사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아니야. 아니야. 펠! 펠!”
헬링턴을 이루는 형체는 이제 얼굴과 몸통밖에 없건만 이 질긴 것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 헬링턴은 페도로프의 애칭을 애타게 부르며 비명을 질렀다. 성화에 불타는 고통 때문에 질렀던 비명과는 조금 다른 소리였다. 그건 피가 절절 끓어오르는 듯한 저주 가득한 울음이었다.
“네가 죽였지. 용서 못 해! 아버지, 당신의 아들을 대신해 알렉세이 유르한에게 복수해주세요.”
알렉세이는 얼굴이 반쯤 무너져 내린 헬링턴을 만만하게 여겼다. 어차피 그가 곧 소멸할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알렉세이가 마족 오세를 손쉽게 죽일 만큼 강한 SS급 에스퍼라 할지도 자만해서는 안 됐다.
선조 유르한은 자신의 힘을 과신한 자였다. 마물을 죽일 수 없는 가이드를 무능하다 여기고 에스퍼만 모아서 마계로 떠나는 우를 범했다.
유르한이 가진 과신과 지금의 알렉세이가 범한 자만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다. 오만한 에스퍼를 마왕의 아들이 불러낸 포털이 집어삼켰다.
헬링턴은 다 타서 사라져 버렸지만 그가 있던 자리에 아이템이 남았다. 사형집행자와 형 집행을 지켜보기 위해 참석한 관료 귀족들은 기겁했다. 눈앞에서 황후였던 흑마법사가 마물처럼 사라진 것도 놀라운데 아이템을 남겼다.
그건 그동안 황후로 모셨던 헬링턴이 사람이 아니었다는 의미이자, 백색 탑에 갇힌 호라이슨 또한 마족이란 소리였다.
그들 중 가장 직급이 높은 하인리히 후작이 앞으로 나섰다. 새로운 황제가 사라졌으니, 당장 그 죄를 누군가에게 물어야 했다. 마족의 아들 호라이슨 또한 성화에 불태워서 죽여야 했다.
백색 탑에 갇힌 호라이슨을 끌고 오라고 기사를 보낸 그는 다음 명령을 내렸다.
“마탑에 당장 사람을 보내 마탑주께 이 사태에 대해 알려라. 황제 폐하께서 어디로 끌려가셨는지 모르니, 한시가 급하다.”
마탑으로 황군이 들이닥쳤다. 급박한 상황을 전달받은 조세핀은 그들이 자만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황후가 죽고 나온 아이템을 감정해 헬링턴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헬링턴의 독침
A급 (레어 아이템)
마왕과 인간 계약자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마왕자가 죽었다. 마왕자가 품은 독기에 죽지 않으려면 페도로프 유르한의 영혼을 소환하세요.
무기 분류: 다트
공격 속도: 빠름
공격력: +4999
*잠재 옵션
잠재 능력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대단한 흑마법사일 거라 짐작하고 있기는 했지만 밝혀진 정체는 더 엄청났다. 마왕의 핏줄을 반이나 이은 반인반마라니.
오세에게 마계로 돌아가라 계약을 들먹여도 보낼 수 없었던 이유가 밝혀졌다. 오세는 계약에 의해 인간계에 불려온 게 아니었다.
마왕은 던전에 오세를 보낸 뒤, 클리어되지 못한 던전에서 오세가 나오는 방법을 통해 그를 인간 세계에 잔류시켰을 것이다. 마왕자를 지키라며 호위 역할로 붙여줬을 테지. 그러니 아무리 알렉세이가 ‘마계의 열쇠’를 들고 약속을 지키라 외쳐봤자 소용없었던 것이리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차피 마왕자는 죽었고, 그의 자식 또한 성화로 불태워 죽이면 되는 일이었다. 공간 이동 능력을 가진 알렉세이가 황궁으로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믿고 싶지 않지만 마계로 보내졌을 확률이 컸다.
조세핀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오세의 거울을 챙겨와 연구했다. 그걸로 마계를 볼 수 있었는데, 마계의 시간은 인간계에 비해 10배 빠르게 흘렀다.
알렉세이라면 물 한 모금 안 마신 채 한 달을 버틸 수 있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가만히 누워서 누군가가 구출해줄 때까지 기다린다는 조건하에 산정한 기간이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마계가 어떤 곳인 줄 알고 황제를 거기 둔단 말인가. 그를 다시 인간계로 불러들일 방법을 용사 요르에게 물어봐야 했다. 조세핀은 비석이 있는 밀실로 향했다.
“용사 요르시여, 큰일 났습니다.”
조세핀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용사 요르에게 알렸다. 어떻게 알렉세이를 데려오는지 방법을 묻자 용사 요르가 혀를 찼다.
“유르한이 마계를 벗어날 때 무지개다리를 파괴했음을 알 것이다. 너 또한 두 세계를 오고 가는 게 힘들다는 걸 알고 있지 않느냐.”
“정말 방법이 없습니까. 마왕자는 그를 마계로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래, 맞다. 마왕자면 다시 그 아이를 인간계로 불러올 수 있지. 하나 이미 죽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할 말을 잃었다. 대신 마왕자의 아들 호라이슨이 있노라 알렸다.
“그 아이가 마왕에게 왕족으로 인정받았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럼 왕세손을 지키기 위해 호위 마족을 붙였을 테니, 가서 확인해 보아라.”
“호위가 있는지 어떻게 알아내면 됩니까.”
헬링턴의 경우, 제논을 제거하기 위해 마족의 힘을 빌렸기 때문에 이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나 호라이슨은 아직까지 에스퍼 능력 말고는 특별한 힘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하긴. 허허. 위협을 가하면 마족이 마왕의 왕세손을 지키기 위해 나타날 거 아니야.”
조세핀은 통신 마도구로 백색 탑에 간 황군에게 연락을 취했다. 용사 요르가 절대 선이라고 믿는 조세핀은 그가 하는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조세핀은 비정한 명령을 내리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팔을 잘라보십시오. 다리도 좋습니다.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됩니다. 마족이 나타나 그를 보호하거든 제게 알려주십시오.”
황군은 호라이슨을 공격했다가 마족이 나오면 자신들은 어떻게 하냐며 두려워했다. 오세에게 목숨을 잃은 동료들 때문에 에스퍼들은 겁쟁이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강한 마족이라 할지라도 성화가 있으면 죽일 수 있으니, 너무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조세핀은 초조하게 밀실을 왔다 갔다 하며 결과를 기다렸다. 1시간이 흐르고 나서 황군에게 연락이 왔다. 마족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조세핀은 호라이슨을 억울하게 고문했다는 사실에 양심이 찔렸다. 제 죄책감을 덜고자 그가 A급 에스퍼니 어차피 회복될 거라 속으로 되뇌었다.
정 회복 속도가 더디면 힐링 포션이라도 전달해주면 된다며 자기합리화를 마쳤다. 젠장. 죄인이건만 큰 빚을 진 기분이었다.
조세핀은 아무리 그가 마왕자의 아들이어도 마음이 안 좋았다.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과 똑같이 생긴 마족의 아이에게 동정심을 품어버렸다.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쓰디쓴 침을 삼켰다.
“…정말 방법이 없는 겁니까. 용사 요르여.”
“마계에 갔으니 마왕자와 마공주들이 많을 거 아니냐. 그들에게 부탁해 인간계에 돌려보내 달라고 해봐야지 어쩌겠느냐.”
정말 말도 안 되는 해결책만 내놓았다. 듣고 있기 짜증 났다. 마왕자와 마공주가 순순히 그를 돌려보내 줄 리 없지 않은가. 알렉세이를 보자마자 죽이려고 들 게 분명했다.
“아니면 마왕을 죽이고 히든 직업을 선택해 마왕이 되든가. 인간계에 소환되어 오면 된다.”
“이 인간계에 마왕을 소환할 수 있는 흑마법사가 존재하기는 합니까.”
“왜 없어. 지금까지 계속 그 아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느냐.”
“호라이슨 말입니까.”
“마왕의 피를 이었으니 얼마나 뛰어난 흑마법사이겠느냐. 그러니 마왕을 부를 자 또한 그 아이밖에 없지.”
조세핀은 알렉세이를 구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그에게 고문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호라이슨이 협조적으로 알렉세이를 소환해줄 것 같지 않았다.
말 안 듣는다고 또 고문을 할까. 그게 먹힐까. 아니, 애초에 알렉세이가 마왕을 죽일 수나 있을까. 마음속이 복잡했다. 그 어떠한 선택도 내릴 수 없었다.
“무지개다리를 복원할 수는 없습니까.”
“할 수 있지. 하면 마물들이 좋다고 인간계로 쏟아져 들어올 텐데 괜찮으면 해봐도 좋고.”
“…정말 너무하십니다. 알렉세이는 유르한 제국의 하나뿐인 황제 폐하이십니다. 그가 돌아오지 않길 바라시는 겁니까!”
격분한 조세핀은 용사 요르의 비석에 파이어 볼을 퍼부어 부숴 버리고 싶었다. 그의 태도에서 은근하게 비협조적으로 구는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 난 알렉세이가 돌아오지 않고 마왕을 죽였으면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가 인간계로 돌아올 방법은 마왕을 죽이고 새로운 마왕이 되어 인간계에 소환되는 것뿐이라 말하는 것이다.”
머리를 망치로 맞은 기분이었다. 용사 요르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숙업을 알렉세이가 대신하길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왕이 된 알렉세이가 돌아오지 않길 바랐기에 호라이슨이 적의를 품도록 미리 조세핀을 이용해 고문을 시킨 거였다.
“의도하신 겁니까. 의도하신 건가요! 마왕에게 인정받은 왕세손이든, 그렇지 않고 흑마법사가 되든 결국 호라이슨이 알렉세이를 불러들일 수 있는데 왜 저에게 그를 고문하게 만드신 겁니까! 그가 절 증오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까!”
“빨리도 알아차렸구나.”
“으아아아. 네가 무슨 용사야!”
조세핀이 마력을 손에 응집해 비석에 던졌다. 비석은 흠 하나 나지 않았다. 요르는 마력을 반사해 오히려 조세핀에게 되돌려줬다. 조세핀은 자신이 던진 마력에 맞아서 날아갔다.
“쿨럭.”
내상을 입은 그는 피를 토했다.
“나도 이만 윤회의 굴레에 들어서고 싶구나. 아무리 창조신께 숭고한 임무를 받았다고 하지만… 힘들다. 힘들어.”
“알려줘! 알려달라고. 어떻게 하면 다시 알렉을 데려올 수 있는지 말하라고!”
조세핀은 바닥을 기어서 비석에 다가갔다. 아무리 주먹으로 비석을 내리쳐도 손만 까져서 피날 뿐이었다.
“흐윽으흑. 흑. 알렉. 알렉세이. 흑.”
아들처럼 키운 황제가 마계에 떨어졌다. 그가 아무리 강한 에스퍼라 할지라도 걱정되어 견딜 수 없었다.
“인간계와 마계의 시간이 흐르는 속도 차이는 1 대 10.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살 수 있는 기간은 한 달. 마계의 시간으로는 300일.”
용사 요르의 말에 오열하던 조세핀은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조세핀. 선택해라. 마계의 음식을 먹는 순간, 알렉세이는 이지를 잃고 마물이 될 것이다. 어서 이 사실을 전달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를 마물로 전락시킬 것이냐.”
“아아. 안 돼. 안 돼.”
조세핀은 헐레벌떡 일어나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지도 않은 채 달려 나갔다. 아인에게 어서 레아에 접속해 알렉세이에게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전해야 했다.
잔인한 일이었다. 아무리 죽지 않는다고 해도 마시지도, 먹지도 말고 버티라니. 그리고 기껏 해결책이라며 이런 부탁을 해야 하는 처지가 엿 같았다.
‘폐하, 마왕이 되어서 인간계에 소환되어 주세요. 가능하다면 마왕자나 마공주에게 인간계에 보내달라고 부탁해서 오는 게 더 좋아요.’
이게 말이야 방귀야.
“크엉엉엉. 으엉엉.”
마탑주는 주변 시선도 상관하지 않고 눈물 콧물 다 짜내며 아인 페르디안을 찾아갔다. 놀란 그에게 마계로 떨어진 황제의 소식을 전했다. 임신한 오메가가 충격을 받아 복통을 호소했다.
다행히 그가 힐링 포션을 넉넉하게 가지고 있어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조세핀은 아인에게 힐링 포션 하나를 얻어 백색 탑으로 향했다.
호라이슨에게 잘못했다고 빌어야 했다. 제발 우리 알렉세이를 인간계로 데려와 달라고 무릎 꿇고 애원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 호라이슨은 없었다. 황군에게 연락해 어디로 끌고 갔냐고 물었다.
“뭐?”
호라이슨이 도망쳤단다. 당연하다. 그는 A급 에스퍼다. 강한 능력자이니, 황군들을 물리쳤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순순히 고문을 당해줬단 말인가.
넋을 놓고 멍하니 있던 조세핀은 헛웃음을 지었다. 전혀 맡아지지 않는 피 냄새와 깨끗하게 정돈된 침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은 이곳에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었다. 가슴을 무겁게 내리눌렀던 돌이 사라졌다.
조세핀은 무능한 황군이 자신들의 실수를 덮고자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황군에 대한 문책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는 휴대용 통신 마도구에 대고 말했다.
“당장 찾아야 합니다. 반드시 호라이슨을 찾아 제 앞에 끌고 오세요.”
용사 요르의 꾀에 넘어가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다행으로 여기기로 했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마왕을 소환할 수 있는 흑마법사에게 도와달라고 무릎을 꿇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든 시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은가. 조세핀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어떻게든 황제를 되찾을 것이다.
***
백색 탑에 황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호라이슨을 창으로 위협하며 밧줄에 엮어서 데려가려고 했다. 호라이슨은 알렉세이가 약속대로 실로니아 섬으로 유배를 보내기 위해 황군을 보낸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통신 마도구가 울렸다. 황군이 통화를 끝내고는 검을 빼 들어 호라이슨을 해하려고 했다. 주다는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황군이 인형처럼 이지를 잃은 채 굳었다.
호라이슨은 주다가 세뇌 능력을 사용했음을 알아차렸다. 은신과 은폐밖에 사용하지 못했던 정신계 에스퍼가 세뇌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같은 에스퍼인 호라이슨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에스퍼 등급이 변동되어 레아가 새롭게 개설되었구나.’
주다는 호라이슨을 묶은 포승줄과 손목에 찬 능력 제어구를 풀어줬다. 호라이슨은 주다의 눈을 보지 않으려고 했으나 턱이 붙잡혀 보고 말았다.
“왜 아인 페르디안의 몸을 차지하고 싶었습니까. 말씀해주세요.”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의지와 달리 입술이 움직였다.
“알렉세이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그를 사랑합니까?”
“응.”
세뇌에 의해 대답은 그렇다고 했지만 그건 호라이슨이 가진 감정 중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다. 알렉세이를 향한 감정은 온전하게 사랑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했다. 그에게 받은 상처를 보상받고 싶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질문이 ‘사랑하냐?’였기 때문에 답은 ‘사랑한다.’가 되었다.
주다의 표정이 안 좋았다. 그는 목이 메는지 몇 번이나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사실 2황자 전하께서 만난 흑마법사는 저입니다. 당신이 황제가 되고 싶어 한다고 믿었기에 왕관이 필요하다고 했을 뿐이고요. 두 영혼을 바꿀 수 있는 흑마법사 따위 어디에도 없습니다.”
“….”
주다의 눈동자는 호라이슨을 옭아매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호라이슨은 뭐라 말하고 싶었으나 그가 질문을 하지 않았기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호라이슨의 두 손을 가져가 손등에 입을 맞췄다. 주다의 입술이 너무나 부드러워 손끝이 딸깍 미세하게 튀었다.
“이제부터 저는 알렉세이입니다. 당신은 아인 페르디안이고요. 알렉세이는 2황자와의 황위 경쟁에서 진 패배자입니다. 새로운 황제는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다.”
‘왜 그런 세뇌를 거는 거야. 이 바보야.’
“우리가 황군으로부터 도망치는 이유는 숙청을 당하기 않기 위함이죠.”
주다의 눈이 하얗게 빛났다가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단순히 세뇌에 의해 의지 없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자유의지까지 동조시키려면 잠재의식 깊숙이 명령을 새겨 넣어야 했다. 부작용이 있는 만큼 세뇌가 풀리는 조건을 거는 제약을 둠으로써 이를 상쇄하였다.
“기간은 당신이 날 사랑할 때까지.”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 주다는 호라이슨이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날이 영원히 오지 않으리라 여겼기에 그런 제약을 걸었다.
“자, 가시죠. 아인.”
호라이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를 일으켜 세우니, 호라이슨이 주다에게 팔짱을 끼었다. 그는 난생처음 보는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알렉, 당신과 함께라면 난 어디로 가든 좋아요.”
“고마워요.”
“우린 언제까지 도망쳐야 할까요?”
“죽을 때까지.”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난 당신이 황자가 아니어도 사랑하니까.”
주다는 죄인이 아니기에 아론에게 억지를 부려 호라이슨을 감시하는 역할로 백색 탑에 머물고 있었다. 제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한 주다는 열쇠로 감옥 문을 열었다.
알렉세이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호라이슨을 섬으로 보내주겠다고 해놓고, 죽이려고 황군을 보냈다. 복수를 꿈꾸기에는 그는 유르한 제국의 황제라는 엄청난 권력자가 되었다. 물론 애초부터 에스퍼로서도 이기는 게 불가능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저 도망치는 게 상책이었다. 그들은 어둠을 틈타 황궁을 벗어났다. 주다는 황궁을 벗어나자마자 로브를 사서 호라이슨에게 입히고, 튼튼한 마차를 구입했다. 마부석에 앉은 주다는 마차를 몰아 수도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그들이 떠나고 나서야 조세핀이 백색 탑에 도착한 거였다. 엇갈리는 운명 속에서 아인은 자신의 에스퍼를 되찾고자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본딩으로 영혼이 이어진 그들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레아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알렉세이의 레아에 그가 없었다. 아인은 혹시라도 그가 마계에서 뭔가 먹었을까 봐 걱정되었다.
“알렉! 알렉!”
목이 터져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처음 알렉세이는 자신이 떨어진 곳이 마계라는 걸 몰랐다. 알렉세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헬링턴이 무슨 술수를 부려서 자신을 감금했다고만 생각했다.
갑자기 동굴에 갇히게 된 그에게는 10080분이라는 제약이 걸려 있었다.
이는 인간계에 넘어온 마물들에게 걸린 제약과 똑같았다. 그동안 마물들은 마왕이 만들어준 던전을 통해 인간계로 건너왔다. 에스퍼들이 일주일 동안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으면, 마물은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인간계에서 마계로 온 알렉세이도 이 제약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 알렉세이를 가뒀던 동굴이 사라졌다.
인간계와 똑같은 마을 풍경이 나타났다. 알렉세이는 곧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자각하게 되었다. 그는 일주일 동안 던전에 갇혔던 거였다.
알렉세이는 경계심을 품고 주위를 살폈다. 꽃집에서 평범한 꽃이 아닌 독을 뿜어내거나 날카로운 이빨로 쥐를 씹어 먹는 식충식물을 팔고 있었다.
과일 가게에는 붉은 사과나 포도가 아닌 색이 수백 개나 되는 눈알이 진열되어 있었다. 조그마한 마물들이 까르르 웃으며 입에 커다란 뼈다귀를 사탕처럼 물고 돌아다녔다.
알렉세이의 외모는 마계에서 놀랍도록 눈에 띄었다.
“인간이다!”
“용사다!”
“어떻게 무지개다리를 넘어온 거지?”
체구가 작은 마물들은 알렉세이가 무서운 괴물이라도 되는 양 도망쳤다. 녹아내리는 진흙 덩어리처럼 생긴 마물이 알렉세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이 침을 뱉었다. 반사적으로 피한 자리에 침이 떨어지자 땅이 파였다. 하마터면 산 채로 녹아내릴 뻔했다. 위험한 마물 같아서 불로 태워서 죽였다.
도망갔던 마물들이 동지를 잃고 슬픔이라도 느꼈는지 일제히 무기를 들고 덤벼들었다. 알렉세이는 일단 도망쳤다.
마물들을 한꺼번에 몰살하려고 하면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유일한 마을일지도 모르는 곳을 없앴다가는 큰 낭패였다.
좁은 골목을 뛰어다니면서 마물들을 따돌렸다. 간신히 도망쳐 숨을 골랐다. 어떻게 해야 다시 인간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공간에서 ‘마계의 열쇠’를 꺼내서 읽어봤으나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용사 요르는 흑마법사가 소환해 인간계로 건너온 마족을 도로 마계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그들의 이름을 기록했을 뿐이었다.
“하, 미치겠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봤자였다. 무언가를 파괴하는 데에밖에 사용하지 못하니, 지금처럼 막막한 상황에서 그 힘은 아무짝에도 소용없었다.
계속 마계에 있으려면 인간인 걸 들키면 안 되니 변장을 해야 할 듯싶었다. 이대로는 마물들에게 쫓기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아공간에서 마속성을 가진 아이템을 뒤졌다. 목이 없는 기사 듀라한의 로브를 뒤집어쓰고, 얼굴에 해골 가면을 썼다. 마물들과 다른 피부를 가리기 위해 손에는 장갑을 꼈다.
골목을 나와 아직도 인간을 찾느라 어수선한 시장을 통과했다. 여관에서 단서를 얻기로 했다. 알렉세이는 눈에 띈 가게에 들어갔다. 앞치마를 맨 고블린이 음식을 서빙하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꿈을 꾸고 있나 싶을 정도였다. 수많은 던전을 클리어하면서 한 번도 마물에게 이지가 있을 거라고 여기지 않았다. 마물들 또한 외모만 다를 뿐 인간과 똑같이 산다는 점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어머 자기, 언데드구나. 어쩐 일로 대낮에 관 속에서 기어 나왔데? 호호호호.”
테이블에 앉으니 고블린이 메뉴판을 건넸다. 언데드한테 지렁이 수프가 제일 인기 있다고 추천해줬다.
“식사는 됐고, 숙박을 하고 싶은데….”
“무슨 농담을 하고 그래. 언데드가 무슨 숙박이야.”
언데드들은 땅에서 잠을 자기 때문에 집이 필요 없는 종족이었다. 진짜 언데드가 아닌 알렉세이는 곤란함을 느꼈다. 괜히 해골 가면을 쓴 것 같다.
어차피 인간계로 돌아갈 방법만 알아내면 되니, 숙박은 포기하고 고블린에게 혹시 정보를 살 수 있는 정보 길드가 어디 있는지나 묻기로 했다. 사람처럼 사는 마물들이니 정보 길드 또한 있으리라.
“뭘 알고 싶어서 정보를 사겠대. 언데드면 땅에 처박혀 무덤이나 지킬 것이지.”
트롤이 피가 가득 찬 커다란 잔을 테이블에 탕 내려놓았다. 옆에 앉은 트롤들이 그를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여관 안의 시선이 다 자신에게 몰려 있음을 느꼈다.
“인간계 던전에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궁금해서. 왜? 넌 그 방법 알아?”
“뭐야. 너 언데드 주제에 개념 있는 녀석이었잖아?”
트롤이 갑자기 알렉세이에게 호감을 보였다. 붉은 털북숭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위로 들어 올렸다.
“다들 이 젊은 언데드 청년을 위해 잔을 들어주십시오. 위험한 인간계에 가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없어도 진정한 마물인 해골 새끼를 위하여!”
마물들이 발로 땅을 두드리며 사기를 북돋는 소리를 냈다. 트롤이 저 개념 있는 언데드에게 한턱내겠다면서 고운 흙 파이를 시켰다.
도저히 사람인 알렉세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거절했다. 트롤에게 다시 어떻게 던전에 갈 수 있느냐 물었다.
“던전 마물이 되려면 당연히 영주님을 찾아가 자원입대해야지. 도대체 어디 살다가 와서 그런 것도 몰라.”
“…내가 땅속에서 잠만 자서.”
“하하하. 그래. 맞아. 언데드니 당연히 그랬겠지.”
알렉세이는 소란스러운 여관에서 기회를 봐 빠져나왔다. 영주님이라면 마족일 텐데 혹시 인간인 걸 알아볼까 봐 걱정되었다.
성을 찾기는 쉬웠다. 워낙 규모가 커서 눈에 보이는 곳을 향해 걸어가기만 하면 됐다. 문지기로 보이는 오크가 자원입대를 위해 왔다는 소리에 안내자를 붙여줬다.
입대 지원서를 작성하고 기숙사를 배정받았다. 4주 동안 훈련을 받고 던전에 투입되어 인간을 죽이러 갈 거란다.
그동안 마물들이 이런 식으로 인간계에 넘어왔다니. 생각보다 체계적으로 침략하고 있었음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알렉세이의 가명은 스켈이었다. 같은 기숙사 방을 배정받은 마물은 라미아였는데, 종족 특성상 하체는 뱀이지만 상체는 아름다운 미녀였다.
알렉세이는 라미아와 한 방에서 지내기 부담스러워 1인실로 바꿔달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생식기도 없는 언데드 주제에 무슨 내외를 하냐며 기숙사장이 짜증을 부렸다.
어쩐지 여관에서 트롤들이 언데드라며 깔볼 때부터 이상하다 했다. 그것이 없다는 소리가 설마 그런 의미였을 줄이야.
어쨌든 알렉세이에게는 그것이 있기 때문에 마을에서 관을 사 와 방에 들여놨다. 혹시라도 자는 동안 라미아가 자신을 덮칠지 모르니 조심해야 했다. 다른 이에게 더럽혀지면 아인에게 버림받을 거다.
바람이 났다며 제논을 살해한 황제 때문에 알렉세이는 다른 이와의 관계에 대한 강박증이 있었다. 다행히 라미아는 알렉세이를 언데드라고 생각해 관속에서 자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던전을 통해 인간계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훈련을 받았다. 너무 쉬워서 자신이 강하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설렁설렁 한다고 했는데도 교관에게 들키고 말았다.
교관이 알렉세이에게 등급 측정을 하러 가자며 어디론가 데려갔다. 마탑에 있는 용사 요르의 비석처럼 마계에도 그런 존재가 있었다. 알렉세이는 비석에 써진 이름을 보고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이름은 그동안 알렉세이가 믿었던 세상을 부정하고 있었다.
“교관님, 용…사 헤더는 인간계에 묻히지 않았습니까? 그가 왜 이곳에 있는 거죠?”
격양된 목소리가 나왔다. 유르한 제국의 초대 황제와 결혼한 황후이자 대마법사. 에스퍼였으나 최초로 가이드가 된 스카이 워커. 그는 인류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그런데 헤더의 영혼이 마물들의 등급을 측정해주는 역할을 마계에서 하고 있었다고?
교관은 알렉세이의 물음에 용사 요르와 한 계약에 대해 알려줬다.
“용사 요르가 마족 72명의 이름을 받아 간 건 알지? 글쎄 그놈이 인간계에 소환된 마족을 도로 마계에 돌려보내겠다고, 자기 친구 반려를 마왕에게 팔아치웠다는 거 아니야. 으하하하.”
손끝이 얼어붙었다. 유르한 제국에서는 아직도 비석에 스스로의 영혼을 봉인해 나라를 보살피는 영웅 요르를 숭배하며, 그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용사 요르 이외의 영웅들도 황궁에 묻혀 있었다. 황군에 소속된 가이드들은 입단식 때 헤더의 무덤을 찾아가 가이드 맹세를 했다. 그런데 그 밑에 헤더의 시신이 없다는 의미였다.
“하여간 인간들이 더해. 작은 희생은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다 이거지.”
알렉세이는 용사 헤더의 비석에 다가갔다. 그의 비석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마계로 떠난 젊은 영웅들의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마왕은 던전을 만들어 계속 인간계를 침략했고, 용사 요르는 인류를 지키겠다며 동료를 배신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배신이 없었다면, 흑마법사에 의해 마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한 마족들이 계속 넘어와 진작 마왕과의 싸움에서 인류는 졌을 터다.
마물들은 인간계를 침략하기 위해 단합해 힘을 합치건만, 인간은 인간계를 지키겠다며 단합하지 않으니 말이다.
오히려 일부 인간들은 흑마법사랍시고 마계에서 마족을 불러들였다. 헬링턴이 마왕과 계약한 흑마법사가 낳은 아들이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아주 오싹했다.
인류를 침략하고자 한 마왕이다. 인간계에 불려와 고작 자기 아이만 낳게 하고 떠날 리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마왕은 ‘마계의 열쇠’에 의해 돌려보내진 거다.
마왕의 이름은 바알이었다. 그걸 몰랐으면 마왕을 돌려보내지 못했을 테니, 용사 요르는 친구를 배신한 자이긴 하지만 여전히 인류를 구원한 용사였다.
용사 요르에게 배신당한 유르한과 헤더도 불쌍하지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용사 요르 또한 불쌍했다.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왜 인간은 금지된 힘을 얻고자 하는가. 마족은 우리의 천적이거늘 인간의 힘으로는 이루지 못할 일을 어떠한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이루려고 할까.
알렉세이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만일 자신도 마왕을 불러내 제논을 살릴 수 있었다면, 기꺼이 그랬을 테니까.
“야, 헤더. 이 녀석 등급 어떻게 되냐.”
교관이 무례한 말투로 헤더에게 물었다. 헤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교관이 녹색 침을 비석에 뱉었다.
“이게 죽으려고. 새끼야, 또 불려 나오고 싶지. 간만에 몸 만들어줄까?”
알렉세이는 교관의 태도를 참을 수 없었다. 헤더는 이런 대우를 받을 존재가 아니었다. 바지를 만지작거리는 마물의 추잡함을 통해 헤더가 어떤 일을 겪었을지 짐작되었다.
교관이 비석에 흙뭉치를 올렸다. 흙이 사람 형태로 뭉쳐지더니 매끄러운 피부를 가진 청년이 나타났다. 알몸으로 웅크린 헤더의 머리채를 교관이 휘어잡았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두 갈래로 갈라진 혀로 헤더의 뺨을 핥았다. 알렉세이는 결국 교관의 머리통에 얼음 기둥을 날려서 그를 죽여 버렸다. 헤더가 달달 떨면서 알렉세이를 올려다봤다.
알렉세이는 얼굴에서 해골 가면을 벗었다. 무릎을 꿇고 자신의 선조에게 예를 갖췄다.
“제102대 유르한 제국의 황제 알렉세이 유르한. 위대한 영웅 헤더 유르한께 인사 올립니다.”
“흐흑. 흑. 훌쩍. 요르가 흑, 나 구하라고, 흑, 보낸 거 맞죠? 흑. 나 진짜 오래 기다렸어요. 흑. 너무 힘들었는데 나만 마계에 가면 되는 거니까. 흑.”
요르에게 배신당해 마계에 온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희생했던 것 같다. 알렉세이는 오래전 창조신의 명령을 받았던 영웅들에게 존경심을 품었다. 그들만큼 인류의 안전에 이바지하는 영웅은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예. 맞습니다. 헤더. 용사 요르께서 당신을 구하려고 절 보내셨어요.”
알렉세이가 마계에 오게 된 것도, 헤더를 구하게 된 것도 전부 우연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인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헤더를 위해 거짓말을 했다.
알렉세이는 자신의 로브를 벗어 헤더에게 둘러줬다. 얼굴에 다시 해골 가면을 쓰는 그를 보며 헤더가 불안해하는 기색으로 주변을 살폈다.
“빨리 도망가야 해요. 방금 그는 단순한 마물이 아니라 서열 72위 안드로말리우스예요. 다른 마족들이 눈치채고 우릴 죽이러 올 거예요.”
알렉세이는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헤더를 등에 업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물들의 눈을 피해 마을을 벗어나야 했다. 등에 업힌 헤더에게 어떻게 인간계에 돌아갈 수 있냐고 물었다. 던전에 마물인 척 잠입해 인간계로 넘어가려던 시도는 이로써 완전히 물 건너가 버렸다.
“돌아갈 방법은 없어요. 우린 이렇게 계속 도망치면서 살아야 해요.”
“…그게 무슨. 마왕은 인간계에 던전을 열어서 마물을 보내잖아요. 새로 생성된 던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니었어요?”
“맞아요. 그렇게 갈 수는 있죠. 그런데 그건 말 그대로 마물로서 가는 거잖아요. 알렉세이같이 강한 에스퍼가 마물이 되면, 사람들이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해 세상이 멸망할 거예요.”
알렉세이의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던 거다. 자신이 한 발상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이제야 알아차렸다.
“던전 게이트가 열려서 마물이 된 알렉세이가 세상으로 나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인류는 마왕이 아니어도 멸망하겠죠. 당신, SS급 에스퍼잖아요.”
헤더는 인간계로 돌아갈 생각 말고 알렉세이에게 마계에서 죽으라고 했다.
“그럼 헤더… 당신께서도 인간계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마계에 남을 생각으로 오신 겁니까.”
“예. 어쩔 수 없었어요. 저 하나 희생해서 마족들의 목에 목줄을 채우는 거래였어요. 마족과 마물들에게 붙잡혀 능욕당하지 않게 풀려나는 것만으로도 전 만족해요.”
알렉세이는 자신이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 속에 달콤이까지 있어서 우리 아인이 힘들 텐데 자신이 곁을 지키지 못해서는 안 됐다.
“전 꼭 돌아가야 합니다. 제 가이드가 절 기다리고 있어요. 지금 임신 중이에요. 저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게 할 순 없다고요.”
“알렉세이….”
헤더가 알렉세이의 사연을 듣고는 망설였다. 무언가 방법이 있는 듯한데 그가 끝까지 입을 열려고 들지 않았다.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돌아갈 방법을 알려주세요. 헤더.”
“죄송해요.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아서 안 알려드리는 거니까 포기해주세요. 알렉세이의 가이드께 죄송한 일이지만, 이건 인간계의 명운이 달린 일이에요.”
그놈의 인간계. 영웅들이 얼마나 인간계를 위하는지 충분히 알겠다. 그러나 알렉세이에게는 인간계보다 자신의 가이드와 아이가 우선이었다. 반드시 헤더의 입을 열게 하겠노라 다짐했다.
그의 곁에서 환심을 사다 보면 방법을 알려줄지 몰랐다. 알렉세이는 하늘을 날아 모래사막에 도착했다. 마물들이 사는 마을과 한참 떨어진 장소였다. 땅에 내려와 헤더를 내려놓았다.
“그 인류를 위해 그럼 우리는 마물들과 마족들한테 평생 쫓겨 보도록 하죠.”
알렉세이는 잔뜩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고, 헤더는 어떻게든 알렉세이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알렉세이. 능력을 사용해 에테르가 오염되었을 텐데 제가 가이딩해 드릴게요.”
“아니요. 당신은 그럴 수 없습니다. 전 제 가이드랑 본딩을 했거든요. 제 에테르가 폭주해서 죽으면 알아서 살길 찾으세요.”
알렉세이는 영웅에게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싸가지 없게 말했다. 어떻게든 헤더의 비위를 맞춰서 알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복귀 방법을 알아내야 하는데 말이다. 곧바로 한숨을 깊게 내쉬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을 험하게 했습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랬어요.”
“…알아요. 충분히 이해해요. 밤이 되기 전에 안전지대를 건설하도록 해요. 조금이라도 쉬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도록 하죠.”
대마법사인 헤더가 손가락을 이용해 수인을 만들었다.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얇은 보호막이 생겼다.
“결계 밖에서 우리가 보이지 않을 거예요. 마력 소모 때문에 7시간밖에 유지하지 못하니까 그 전에 떠나야 해요.”
알렉세이는 아공간에서 마른 빵 두 개와 생수를 꺼냈다. 던전에 진입할 생각으로 훈련에 참가하니, 초급 마물 아이템이라며 주더라. D급 던전의 입구에서 얼쩡거리는 하급 마물을 죽이면 나오던 아이템이었다.
일단 이거라도 먹기로 했다. 헤더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설마 이걸 먹었냐고 물었다.
“아니요. 그동안은 던전에 들어가려고 지급품으로 가지고 있었죠.”
“어쩐지 정신이 멀쩡해 보이더라니. 절대 마계에 있는 그 무엇도 먹어선 안 돼요.”
“네? 그게 무슨.”
설마 굶어 죽으라는 건가? 알렉세이는 등급이 높아서 그동안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안 먹을 수는 없었다. 최대 한 달밖에 버티지 못했다.
“인간계보다 마계의 시간은 10배 빨라요. 인간계에서 하루는 마계에서 10일이죠.”
어쩐지 10일 동안 물 한 방울 안 마셨는데 살 만하다 했다.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거다.
“우린 인간계에 소속된 자들이어서 우리의 시간은 인간계 기준으로 흘러요. 그런데 만일 마계의 음식을 먹으면 우리의 시간도 여기에 맞춰지고, 마물이 되어버릴 거예요.”
“하! 하… 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왔다. 매칭 가이드가 곁에 없는 알렉세이는 능력을 사용할수록 죽어갈 것이다. 그런데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결국 아사한다. 결론은 죽는다는 것밖에 없었다.
마계 기준으로 따지면 300일 동안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을 수 있었다. 거의 1년 동안 굶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뒤로는 어떻게 생명 활동을 이어나간단 말인가. 자신이 살 수는 있는 걸까.
“그런데도, 그걸 알면서 당신은 여기로 기어들어 왔다는 거지?”
애꿎은 헤더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인간계를 구하려고 한 영웅이니 존경해야 마땅하건만, 그가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절망한 알렉세이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삼켰다.
이제 행복해지려나 싶었는데, 다 망했다. 헤더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자기한테 인간 세계 음식이 많다는 위로를 건넸다. 퍽이나 희망적인 이야기였다.
헤더가 아공간에서 빵과 물을 꺼내 알렉세이에게 배분해줬다. 알렉세이는 거절하지 않고 챙겨서 자신의 아공간에 넣었다.
헤더는 아공간에서 장작을 꺼내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알렉세이는 헛웃음을 삼켰다.
“고작 불 피우는데 마법으로 붙이지, 힘들게 부싯돌은 왜 써요.”
“제가 보조 마법밖에 못 써서요. 공격 마법 쓸 수 있었으면 진작 제 힘으로 도망쳤죠.”
헤더가 어떻게 그것도 모르냐는 듯 오히려 알렉세이를 책망했다. 대마법사로 후대에 전해 내려오던 헤더가 고작 보조 마법밖에 사용하지 못한단다. 놀랄 만한 일이었다.
“설마 7서클은 되죠?”
“…나 때는 3서클도 엄청난 거였어요. 요즘은 아닌가 봐요.”
망할. 아무짝에도 도움 안 될 짐이었다. 그러고 보면 7시간 동안 은신 마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은 인간계에서 고작 42분 마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시간 상대성에 의한 대마법사였던 것이다.
***
인간계와 마계의 시간이 10배 차이가 난다는 건 그들의 생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능력을 사용해 에테르가 오염되는 속도가 마계에서는 10배 느려졌다.
이는 굉장히 좋은 소식이지만, 부상을 당했을 경우 10배 느리게 회복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쩌면 마계에서 알렉세이는 최강자가 된 것일지도 몰랐다. 부상만 당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헤더가 눈치를 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 몸은 계속 유지되는 건가요?”
“응. 죽기 전까지는. 죽으면 다시 비석으로 영혼이 돌아가. 그럼 또 마족이 몸을 만들어서 죽이고, 비석으로 돌아가면 또 몸을 만들어서 죽이고, 뭐 그런 거지.”
알렉세이는 헬링턴을 죽이기 전에 제논을 살려달라고 고문이라도 할 걸 그랬다 후회했다. 마왕자이니, 그 정도는 식은 수프 먹기였을 텐데 복수에 눈이 멀어서 그냥 불태워 죽여 버렸다. 그 때문에 마계에 떨어져 고생 중이고 말이다.
“아인이 보고 싶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웅얼거렸다.
“너 울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헤더가 반말을 하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발끈하며 고개를 들었다.
“안 울거든요. 그리고 왜 반말하세요?”
“네가 너보다 천 살은 더 많겠다. 그럼 반말해도 되지.”
맞는 말이었다. 알렉세이는 다시 의기소침하게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헤더가 장작불을 괜히 부지깽이로 쑤시다가 물었다.
“애 아빠라고 했지? 황제가 후계자를 남겨두고 왔으니, 그래도 유르한 제국은 걱정 없네.”
“결혼 못 했어요.”
“뭐? 결혼도 안 하고 임신부터 시켰어? 이런 쓰레….”
헤더가 끝맺지 못한 말은 알렉세이가 마저 완성시켰다.
“네, 맞아요. 저 쓰레기예요. 가이드가 나 싫다고 도망쳐서 러트 중인데도 쫓아가 잡아 왔거든요. 뭐 아인이도 제 러트에 휘말려 히트가 와서 둘이 잘 풀리게 되긴 했죠.”
“와! 내 후손이 이런 쓰레기일 줄이야.”
헤더와 유르한의 자손이 대대로 황실 족보를 이어나갔으니, 어쨌든 그들이 한 핏줄이긴 했다. 헤더가 누굴 닮아서 이런 후손이 태어났는지 모르겠다며, 알렉세이가 유르한 쪽을 닮았다고 자기랑은 선을 그었다.
“자기 얼굴에 침 뱉기니까 그만하세요. 저도 많이 반성했어요.”
“근데 네 가이드가 너 받아준 거야? 떡정이 이래서 무섭지.”
어이가 없었다. 역사서에 위대한 영웅으로 기록된 대마법사 가이드가 이런 캐릭터일 줄이야. 거기다가 첫 만남 때와 이미지가 너무 많이 다르지 않은가. 이제 안전하니 볼 장 다 봤다 이건가?
“아인이가 먼저 저한테 본딩해줬어요.”
“얼씨구. 걔도 제정신은 아니네.”
“그건 맞아요.”
알렉세이는 자화상으로 아인이 그렸던 검은 슬라임을 떠올렸다. 나중에는 붉은 피눈물을 그려 넣었었지. 마음이 안 좋았다. 헤더가 그게 무슨 말이냐며, 제대로 설명해보라고 닦달했다.
시간은 많고, 앞으로의 계획은 무산되어 할 게 없었기 때문에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인의 굴곡진 삶은 물론이고, 왜 자신이 이곳에 보내지게 되었는지 복수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았다.
헤더는 용사 요르가 알렉세이를 보낸 게 아니었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충격을 받은 듯 침묵하였다. 어차피 망한 인생이어서 누굴 걱정해주고, 달래줘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모래 위에 무기력하게 그냥 드러누워 버렸다. 자신이 이제 죽을 테니, 아인에게 해가 가기 전에 본딩을 깨야 했다. SS등급에서 더 등급이 높아질 일은 없을 테니, S등급으로 하락하면 자연스럽게 지금의 레아가 파괴되면서 본딩도 깨질 거다.
새로운 레아는 예전처럼 척박하고 아무것도 없는 쓸쓸한 황무지이겠지. 외롭게 마계에서 죽어갈 걸 생각하며 하늘을 봤다. 인간계와 마계의 하늘이 똑같아서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만일 돌아갈 방법이 있으면 해보긴 할 거야? 죽을 수도 있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말 있어요? 아까는 없다면서요.”
“위험해서 그래. 정말 위험한 방법이거든.”
“뭔데요. 나 SS등급 에스퍼라고요. 내가 못 할 게 뭐가 있어요. 나 혼자 마왕도 죽이겠다.”
알렉세이의 호언장담에 헤더가 창백해져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마왕 죽이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마왕을 죽이러 마계에 왔던 용사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마왕을 죽이면 네가 마왕이 될 테니까.”
“아….”
“2차 전직을 하라면서 히든 직업으로 마왕이 나올 거야. 네 의사와는 상관없이 넌 마왕이 되어버릴 테고. 그럼 네가 인간계에 돌아가려면 아주 빼어난 흑마법사가 널 소환해줘야 해.”
헤더는 오랫동안 마계에 있으면서 그들이 마왕을 죽이지 않고 돌아간 일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영원히 인간계에 머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흑마법사의 소원을 들어준 후 대가를 받고 다시 마계로 돌아오게 될 거야.”
알렉세이의 머리를 헤더가 쓰다듬어주며 웃었다.
“우리 최악의 계획을 하나 세우자. 만일 마왕자와 마공주들을 찾아가 우리를 인간계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는데, 들어주지 않으면 그때 마왕을 죽이러 가는 거야.”
“방금 죽이면 안 된다면서요.”
헤더가 심통 가득한 알렉세이의 뺨을 두 손으로 찌부러트렸다.
“역시 넌 유르한을 닮았어.”
알렉세이는 그의 손을 치워냈다. 헤더가 일어나서 마법 스탬프를 꺼냈다.
“네가 마왕을 공격해. 정확하게는 마왕이 죽기 직전까지. 내가 마지막 한 방을 날려 죽일게. 그럼 2차 전직은 내가 할 거고, 난 널 인간계로 보낼 수 있어.”
용사였던 이가 마왕이 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알렉세이는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었다.
헤더가 마왕이 되면, 그동안 용사 헤더가 인류를 위해 해온 모든 업적을 부정당하게 될 것이다. 심장을 관통당한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을 만나고 싶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소리도 하지 않는 자신의 비겁함이 괴로웠다.
“괜찮아. 어차피 난 마계에 아주 오래 있어서 더 있는다고 해도 달라질 거 없어. 오히려 마왕이 되면 날 괴롭힌 마족들과 마물들을 다 죽여 버릴 수 있고 좋지 뭐.”
농담처럼 말하지만 헤더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가 얼마나 큰 희생을 하는지, 그가 얼마나 어리석은지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선량함을 이용해 혼자 마계에서 살아 돌아가고자 하는 건 결국 자신이다.
“그런 최악의 상황이 되지 않도록 마왕자과 마공주를 잘 설득해 봐요.”
“…말이 통할 상대들이 아니긴 한데, 그래, 부딪쳐 보자.”
마왕을 죽일 수 없을 거란 전제는 이미 그들 머릿속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 은신 마법이 풀렸다. 그들은 걸을 때마다 푹푹 발이 빠지는 모래사막을 걸었다.
능력을 사용해 하늘을 날면 좋겠지만, 후일을 위해 에테르가 오염되지 않도록 능력을 최소한으로 사용해야 했다. 어쩌면 그들은 마왕을 죽이러 가야 할지 모르니 말이다.
헤더의 안내를 받아 마족의 현자라 불리는 포르카스를 찾아갔다. 그는 마왕의 자식 중 온순한 성정을 가진 걸로 유명하다고 했다.
포르카스는 약초와 마정석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연금술사이며, 특기가 투명 마법이었다. 헤더는 마족들 중 유일하게 동굴에 처박혀 혼자 연구하는 포르카스하고만 안면이 없다고 했다.
그는 평소에는 노인의 모습으로 있지만, 특별히 정해진 모습은 없다고 했다. 나흘 동안 걸어 사막 끝에 도달한 그들은 포르카스가 사는 동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알렉세이는 마족이 자신을 보자마자 공격할까 봐 꼴깍 침을 삼켰다. 동굴 안에 들어가자 젊은 남자가 알몸으로 절구에 약초를 빻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헤더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위대한 현자에게 해답을 찾고자 온 방랑자입니다.”
포르카스가 짓찧은 약초를 젖꼭지에 얹었다. 알렉세이는 그가 젖꼭지를 다친 줄 알았다. 그런데 약초를 떼어내니 젖꼭지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거길 염색한 거였다.
“응? 뭐야? 이 선량한 얼굴들은. 너희 진짜 예쁘게 생겼다.”
분명 마왕자 중 가장 온순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변태라는 말은 없지 않았는가. 알렉세이도 어디 가면 꿇리지 않는 상급 변태였지만, 포르카스는 넘사벽 지존이었다.
“뭘 묻고 싶어서 왔어? 예쁜이들?”
알렉세이는 아인에게 자신이 포르카스 같은 혐오스러운 존재였을까 봐 걱정되었다. 인간계로 돌아가면 앞으로는 아인의 구멍을 하루에 한 번밖에 빨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열 번도 넘게 그의 바지를 벗겨서 혀로 구멍을 유린하고 싶으니, 이건 많이 참는 거였다. 이런 발상부터가 글러 먹은 변태라는 증거임을 알렉세이는 당연히 몰랐다.
“저희는 마왕자 헬링턴 님께 심부름을 받아 마계에 왔다가 다시 인간계로 돌아갈 방도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헤더는 사기꾼이었다. 알렉세이는 자신이 말한 복수 이야기에서 그가 이런 거짓말을 생각해낼 줄 꿈에도 몰랐다.
“그럼 잘 찾아왔어. 내가 너희를 인간계에 보내 줄 수 있으니까.”
알렉세이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순조롭게 해결되었다고 여겼다. 그런데 알렉세이의 얼굴을 포르카스가 손으로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 바지를 벗기려고 들었다.
“대가로는 너희와의 섹스를 받을게. 너희도 손해 볼 건 없잖아.”
알렉세이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사수했다. 이런 식으로 돌아가 봤자 아인에게 사랑받을 수 없었다. 더럽혀진 알렉세이를 경멸할 아인의 눈빛이 생생하게 상상되었다.
마음이 아팠다. 배 속에 있는 달콤이가 유창하게 말하는 상상이 끼어들었다.
‘아빠는 걸래 남창이야, 우리 앞에서 꺼져.’
“안 돼요. 전 임자가 있는 몸이라고요. 그냥 우리를 인간계에 돌려 보내주세요.”
“웃기네. 야, 얼굴 좀 반반하다고 세상이 쉽게 네 뜻대로 굴러갈 줄 알아?”
엉덩이 가벼운 인상이었던 포르카스의 얼굴이 우그러지더니 무서운 송곳니를 가진 늑대처럼 변했다.
“네 구멍에는 특별히 내 씨물을 잔뜩 부어서 임신시켜주마.”
알파에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알렉세이의 생각을 꿰뚫어 봤는지 포르카스가 비열하게 웃었다.
“마족에게 강간당하는데 네가 계속 우성 알파일 수 있을 것 같아? 오메가로 만들어서 내 아이를 계속 낳게 해주마. 으하하하하.”
헬링턴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 짐작되었다. 소환된 마왕이 계약자를 이런 식으로 범했던 거겠지. 앞으로 만날 마왕자와 마공주들이 다 이런 식이라면 아주 곤란했다. 알렉세이는 손에 에테르를 둘러서 포르카스의 머리통을 한 대 툭 쳤다. 아이템이 떨어졌다.
「포르카스의 투명 망토
B급 (레어 아이템)
무기 분류: 방어구
방어력: 낮음
효과: 망토를 착용한 사용자를 투명하게 만든다.
*잠재 옵션
잠재 능력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적당히 때려서 협박해 인간계로 돌려보내 달라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머리가 터져서 죽어버렸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크리티컬 공격이 터져버린 것이다.
“알렉세이! 도대체 무슨 짓이야! 죽이긴 왜 죽여!”
“실수였다고요, 실수. 나도 이렇게 쉽게 죽을지 몰랐어요.”
포르카스는 마족 서열 31위나 될 만큼 높은 계급이었다. 그의 지식을 마왕이 높게 쳤기 때문이었다.
힘으로 서열을 따지면 그리 대단치 않은 하급 마족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쉽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헤더가 알렉세이의 등짝을 마구 때렸다. 포르카스처럼 만만한 상대가 없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거냐며 혼냈다.
“그깟 구멍에 좆 들어가는 게 뭐 대수라고, 난 아주 십수만 번도 넘게 당했다고. 그것도 못 참아서 일을 크게 만들지. 어!”
화를 잔뜩 내던 헤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마왕자를 만나러 가보자.”
알렉세이는 헤더에게 포르카스의 망토를 건넸다. 헤더는 창조신이 자신들을 마왕을 죽이러 가는 여정으로 이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분께서 기어코 용사에게 너희의 임무를 끝맺으라고 하신다.
헤더는 이 투명 망토가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그 용도가 짐작되었다. 그래도 일단 최악의 시나리오에 도달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치기로 했다.
***
‘미친. 도대체 마족 새끼들은 왜 다 이따위냐고!’
두 번째로 만난 마왕자 가마긴은 흑마처럼 생긴 마족이었다. 헤더는 그를 만나기 전, 30개의 악마 군단을 통솔한다는 후작이라며 가마긴의 신경을 거슬려선 안 된다고 했다.
알렉세이도 아인에게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웬만하면 마계의 후작 말을 잘 듣겠노라 결심했다. 그런데 알렉세이를 보자마자 흑마가 거대한 말 자지에서 쿠퍼액을 뚝뚝 흘리는 거다.
역겨웠다. 더러워서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내 이상형을 만나 기쁘군. 그래, 인간계에 가고 싶다고?”
가마긴이 검은 혀를 길게 빼서 날름거렸다. 알렉세이는 포르카스 때처럼 어처구니없이 죽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려 가마긴을 외면했다.
“아름다운 그대와 식사를 하면서 대화하고 싶은데 내 초대를 받아주겠어?”
“죄송하지만, 후작님. 저희는 인간계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마계의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알렉세이를 대신해 헤더가 완곡하게 거절했다. 화난 가마긴이 콧구멍으로 뜨거운 불을 뿜어냈다.
“헤더,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난 저 아름다운 알파에게 물은 것이야.”
가마긴은 알렉세이의 환심을 사고자 흑마에서 사람 모습으로 변신하였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사내는 키가 2m였고, 무쌍의 날카로운 눈매와 진한 눈썹이 몹시 남성적인 미남이었다.
그리고 흑마였을 때 달고 있던 말 자지가 사람일 때도 똑같이 달려 있었다. 알렉세이의 것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크기였다.
알렉세이는 흑마일 때는 그나마 동물이라 생각해 넘길 수 있었으나, 그가 사람의 모습이 되자 같은 사내의 것을 보게 되어 매우 불쾌했다.
아인의 페니스는 분홍빛을 띠고 있고, 생김새도 예뻤다. 알파인 알렉세이와 형태는 비슷했으나 색깔과 크기가 완전히 달라 ‘오메가’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해줬다. 이래서 다들 오메가를 소중히 여기고 보호해야 한다고 했구나. 백날 귀로 들을 때는 몰랐던 걸 느낄 수 있었다.
알렉세이는 자랑스럽게 말 자지를 앞으로 내밀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가마긴 때문에 구역감을 느끼고 닭살이 돋았다. 태생적으로 알파는 알파와 상극이었다.
헤더는 알렉세이가 포르카스 때처럼 사고를 칠까 봐 얼른 가마긴의 앞을 가로막았다.
“후작 님, 어서 식사하러 가시죠.”
“하! 헤더. 아주 네가 주제넘게 구는구나. 감히 어디서 내 눈 앞을 가리는 것이야.”
가마긴이 헤더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잡고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으으으으.”
헤더가 발을 바동거리며 괴로워했다. 계속 그가 에스퍼였으면, 아무리 치유계 능력자라 해도 신체 능력을 이용해 저항할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사랑하는 유르한을 위해 가이드가 된 그였다.
아무런 힘이 없는 일반인과 똑같았다. 헤더는 가마긴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한 채 숨을 헐떡였다.
그때는 유르한을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그를 위한 가이드가 되었다. 인간계에 돌아와 유르한과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가이드여서 어디가 불편하거나 나쁠 거 하나 없다고 믿었다. 마계와 이어진 무지개다리가 끊겨 방심하고 있던 인간들에게 다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최초의 흑마법사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오메가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학대를 당하고 폭언을 들으며 방에 갇혀 지냈다.
얼마나 끔찍한 학대를 당했는지 당시 20살이었던 오메가를 그 누구도 제 나이로 보지 않았다.
오메가의 마음속에 지옥을 만든 건 다름 아닌 그의 부모, 즉 인간이었다. 마족이 찾아와 세상을 멸망시키라고 유혹한 게 아니었다.
오메가는 부모에 대한 증오와 세상에 대한 엄청난 환멸로 거대한 마법진을 연성했다. 오메가가 부른 존재는 마왕, 바알이었다. 오메가는 바알에게 자신의 복수를 대신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바알은 대가로 오메가를 자신의 반려로 삼겠노라 하였다. 처음 보는 괴물조차도 오메가에게 그리 잔혹하게 굴지 않았다. 그런데 낳고 키운 부모는 왜 그랬단 말인가.
마왕은 제일 먼저 오메가의 부모를 죽였다. 그다음은 오메가를 강간한 마을 사내들이었다. 오메가의 소원을 들어준 마왕은 자신의 계약자에게 노팅을 하고 마계로 떠났다.
그 뒤로 인간계에 남겨진 오메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마족을 부르는 방법을 설파했다. 수많은 흑마법사들이 탄생해 마족들을 인간계로 소환하게 되었다.
다섯 용사 중 요르는 인간계에 온 마족들이 일으키는 범죄를 막기 위해 마족들의 이름을 수집했다. 마족들에게 이름을 얻기 위해 그는 그들이 원하는 걸 들어줘야 했다.
마족들이 원하는 건 최초로 에스퍼에서 가이드가 된 헤더였다. 헤더는 인류를 위해 마계로 보내져 마족들에게 온갖 생체실험과 강간을 당했다. 수천수만 번 죽고 살아나길 반복했다.
헤더를 통해 마족들은 에스퍼에서 가이드가 되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마족들에게는 스카이 워커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마왕자들에게는 인간인 알렉세이가 ‘가이드가 될 알파’ 정도로 비쳤을지 모르겠다.
선천적 에스퍼인 마족들은 아주 긴 세월이 걸리겠지만,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자멸해 버릴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런 그들이 한 명이라도 가이드를 만들려고 드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가마긴이 알렉세이를 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가이드가 둘은 되어야지.’ 생각을 하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대가 내 수청을 들겠다면 헤더를 놓아줄게. 어때? 나랑 자겠어?”
“후작님, 제가 가이딩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그냥 인간계로 보내 주세요.”
가마긴의 두꺼운 눈썹이 일그러졌다. 감히 인간 주제에 대화를 가로챘다.
“마계에 있는 온갖 것들의 정액을 다 받아먹더니 네가 뭐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후작님.”
헤더는 마족들에게 굴복한 지 오래였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청했다. 알렉세이는 마족에게 복종하는 용사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회의감이 들었다.
“넌 이리 오거라. 이름이 무엇이냐.”
알렉세이의 허리를 끌어안은 가마긴이 귓가에 속삭이듯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알렉세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하하. 겁을 먹은 것이냐. 귀엽기도 하지. 걱정 말거라. 내 너를 아주 예뻐해줄 것이다. 내 아이를 열 명만 낳아주면 인간계로 돌려보내 주마.”
여전히 헤더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바짝 엎드려 있었다. 가마긴이 헤더의 머리통에 발을 올렸다. 알렉세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가마긴의 머리통을 몸통에서 뽑아버렸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알렉세이, 이게 무슨 짓이야.”
“제가 존경하는 용사를 함부로 대한 마족입니다. 이번에는 뭐라 하지 마세요.”
가마긴이 죽은 자리에 아이템이 생겨났다. 마족 중에서 손꼽히는 강자임에도 나온 아이템은 별 볼 일 없었다. 알몸인 상태로 죽어서 그런 듯했다.
「가마긴의 만화경
D급 (일반 아이템)
무기 분류: 잡동사니
방어력: 없음
효과: 사용자가 보고 싶어 하는 걸 환상으로 볼 수 있다.
*잠재 옵션
잠재 능력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참 쓸모없는 아이템이었지만 알렉세이는 몹시 마음에 들었다. 이걸로 마계에서 지낼 300일 동안 아인이를 매일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가요, 우리. 다음 마왕자는 어디 있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헤더는 바닥만 보고 걸었다. 알렉세이는 이럴 때 뭐라고 위로를 건네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침묵을 택했다.
후작을 죽인 그들을 죽이기 위해 성에 있는 마물들이 나타나 알렉세이와 헤더의 앞을 가로막았다.
알렉세이는 최대한 에테르 사용을 자제해야 하기 때문에 검을 들었다. 이런 잡몹들 상대로는 굳이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됐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마물들이 절단되어 피를 흘렸다.
사선 베기, 가로 베기, 세로 베기.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마물들의 두꺼운 근육은 갈라졌고, 단단한 쇠로 된 방어구가 망가졌다.
마물들을 다 죽이고 나자 알렉세이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피에 절어 있었다. 가이드라 능력도 못 쓰고, 마법사라 검술도 못 하는 헤더는 멀리 떨어져 그런 알렉세이를 지켜봤다.
마왕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런 알렉세이가 마계에 온 게 우연은 아닐 거라고 봤다. 그가 이곳에 오기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헬링턴이라는 마왕자가 선황 페도로프를 사랑하게 된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헬링턴이 제논을 죽이지 않았다면 알렉세이는 복수할 일도, 마계에 올 일도 없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제논이 안타까웠다. 제논을 잃고 망가진 채 살았다는 알렉세이도.
헤더는 하루 종일 알렉세이와 함께하며 그가 살아온 지난날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창조신께서는 그냥 나중에 보상해주면 다 된다고 여겼을지 모르겠다.
마계에 살면서 창조신에 대한 믿음이 약해져서일까. 그분이 가끔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다.
“알렉세이, 너 우선 씻어야겠다.”
“아아, 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네요. 오늘은 성에서 쉬고, 내일 다시 길을 떠나도록 해요.”
알렉세이는 성을 뒤져서 욕실을 찾아냈다. 피에 젖어 잘 벗겨지지 않는 옷을 낑낑거리며 벗었다.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았다. 물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체력적으로는 힘들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몹시 피로했다. 연기가 폴폴 올라올 정도로 뜨거운 물에 발부터 담그며 들어갔다. 욕조에 등을 기댄 채 가마긴의 만화경을 꺼냈다.
“아인 페르디안이 보고 싶어.”
만화경이 사용자의 바람에 맞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알렉세이는 자신과 함께 욕조에 앉아 있는 아인을 봤다. 만화경을 쥐지 않은 반대쪽 손을 수줍게 들어 올려 흔들었다.
“안녕, 아인아. 잘 있었어?”
아인이 방끗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아인아. 잘 있었어?]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아, 진짜 어이없네. 이거 그냥 앵무새잖아.”
[아, 진짜 어이없네. 이거 그냥 앵무새잖아.]
사용자가 환상을 진짜라고 믿지 않도록 가마긴의 만화경에는 제약이 걸려 있었다. 그 누구도 자기가 한 말과 행동을 따라 하는 상대를 그리워하는 이로 착각하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타인으로 인지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렇지만 그를 따라 하는 앵무새이기에 더 좋은 점도 있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알렉세이는 욕조 가득 받아놓은 뜨거운 물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했다. 그리움은 입 밖으로 내뱉으니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알렉세이는 아인이 혹시라도 레아에 와 있을까 그곳을 들여다봤다. 그의 불안한 감정 때문에 캐모마일 꽃잎이 바람에 흔들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껌껌한 하늘이 된 아인의 레아에서 아름다운 별빛과 달빛을 볼 수 없었다. 너도 내가 많이 보고 싶은가 보구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인아, 나 잘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두 손을 확성기처럼 입 옆에 붙이고 외쳤다.
“밥 잘 먹고, 스트레스 받지 마.”
말하고 보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싶었다. 어떻게 각인이랑 본딩을 한 알파가 사라졌는데 스트레스를 안 받겠는가.
“스트레스 조금만 받아.”
말을 정정하고 손을 내렸다. 아인이 레아에 접속한 시간과 알렉세이가 레아에 접속하는 시간이 겹치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알렉세이는 레아에서 바로 나왔다. 알렉세이를 찾아 레아를 돌아다니던 아인은 알렉세이의 목소리를 듣고 전력으로 달려갔으나, 그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으흑흑흑. 이 바보 새끼야. 왜 금방 가고 그래.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아쉽게 엇갈린 걸 아니, 못 만난 게 더 아쉽고 속상했다. 본딩을 해서 알렉세이의 레아에 언제나 아인의 닉스가 깃든 탓에 서로 언제 접속하는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그가 잘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마음이 놓였다. 전해야 하는 말이 많았다. 꽃밖에 없는 허허벌판에서는 그것들을 제대로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아인이 생각해낸 방법은 만화였다.
레아에 접속할 때 옷이 그대로인 걸 보면 신체에 닿은 물건을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림과 글을 통하면 정확하게 정보를 전할 수 있었다. 마침 자신은 웹툰 작가 출신이지 않은가.
현실로 돌아온 아인은 시종장에게 부탁해 커다란 캔버스를 가져오게 했다. 자로 칸을 나누고 만화에 익숙하지 않은 알렉세이도 헷갈리지 않도록 읽는 순서를 화살표로 표시했다.
첫 번째 칸에는 알렉세이가 사라진 걸 알게 된 조세핀을 그렸다. 그가 용사 요르를 만나고 들은 이야기들을 자세하게 말풍선에 적었다.
혹시라도 알렉세이가 돌아오지 못할까 얼마나 걱정되는지 몰랐다.
그런데 정말 그가 마왕이 되어야만 돌아올 수 있는 걸까? 마지막 칸을 그리다가 멈칫했다. 조세핀이 전해준 용사 요르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정의의 편을 의심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아인은 만화를 그린 캔버스를 들고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 알렉세이의 레아에 들어갔다. 역시나 손에 캔버스가 들려 있었다. 꽃밭 위에 캔버스를 놓았다. 다행히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뜬 아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부디 마계의 음식을 먹기 전, 자신이 놔두고 온 캔버스를 발견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