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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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는 마왕자들을 찾아가 인간계에 보내달라고 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죽이게 되었다. 도대체 이 미친 마족 새끼들이 건장한 알파의 구멍을 왜 노린단 말인가.

헤더는 해탈한 듯 알렉세이가 그들을 죽여도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마공주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마왕의 자식 중 공주는 단 한 명, 56위 그레모리뿐이었다. 마공주는 일정한 거취를 정해두지 않고 붉은 사막을 낙타를 타고 떠돌아다닌다고 했다.

그녀를 찾고자 헤더와 알렉세이는 하염없이 사막을 걸어 다녔다. 불지옥에서 벌을 받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알렉세이는 왜 자신이 이렇게 초라하게 몰락하였나 한탄하다가도 가마긴의 만화경으로 아인을 보며 힘을 얻었다.

모래 언덕은 바람에 따라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생겨나 방향을 잡기 힘들었다. 그들이 왔던 장소도, 지형이 바뀐 모래 때문에 처음 온 장소처럼 느껴졌다.

하늘이 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지평선 끝자락에 저무는 태양과 함께 한 인형이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미녀가 황금빛 낙타를 타고 있었다. 금실로 수놓은 검은 벨벳에 하얀 레이스로 장식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알렉세이 눈에는 마치 타조처럼 보였다.

“공주님, 공주님. 잠시만 저희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모래에서 허우적거리며 걷던 헤더가 전력을 짜내 마공주에게 달려갔다. 공주가 낙타 위에서 헤더를 내려다봤다.

“헤더, 네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공주님, 제발 저희를 인간계로 돌려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공주님은 절 동정하셨잖아요.”

마족과 마물들에게 강간을 당해 팔다리가 부러지고 구멍으로 내장을 쏟아내면 그녀가 그런 헤더를 치유해줬다.

그레모리가 낙타 위에서 무릎을 꿇은 헤더를 내려다봤다. 헤더를 치유해준 건, 육체가 죽으면 49일 뒤에나 영혼에게 다시 몸을 입힐 수 있기 때문에 여간 귀찮은 게 아니어서 그랬던 것뿐이었다.

“헤더. 내가 동정한다고 널 돌려보내 주면 마족들의 에테르는 누가 정화해주니?”

“….”

착각이었다. 그녀 또한 마족이었음을.

“계약을 하고 싶습니다. 저희를 인간계로 보내 주시는 대가로 무엇을 원하십니까.”

알렉세이는 적어도 공주님이니 자신의 구멍을 노리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 그동안 만났던 변태 마왕자들과 달리 성희롱하지 않는 걸 보면 기대를 걸어볼 만했다.

“그대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제 것으로 만들도록 하죠.”

“그게 무슨 의미죠?”

“말 그대로입니다. 당신이 애타게 사랑하는 존재를 향한 감정을 저에게 돌려놓겠다는 겁니다. 그럼 그대는 인간계에 돌아가서 절 애타게 찾겠죠?”

마족들은 아직도 인간계를 넘보고 있었다. 그레모리는 알렉세이를 통해 인간계로 넘어가 왕위를 이어받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레모리는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우성 알파에게 엄청나게 끌렸다. 그를 자신의 남편으로 삼고 싶었다. 인간이니 헤더처럼 가이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온몸을 전율케 했다.

마족에게 인간은 언제든지 가이드가 될 수 있는 존재쯤으로 여겨졌다. 그레모리는 우성 알파에게 자신과 계약하겠냐고 물었다.

“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없던 이야기로 하죠.”

알렉세이는 뒤돌아서 가려고 했다. 그레모리는 유일한 자신의 가이드, 아니 가이드가 될 인간을 이대로 놓칠 수 없었다. 헤더 한 명을 차지하기 위해 마족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저 남자를 납치해 가이드로 만들면 가둬놓고 혼자서 가이딩을 받을 수 있었다. 머리 위에 쓴 왕관을 들어 부메랑처럼 날렸다. 알렉세이의 정수리 위에서 천사 링처럼 왕관이 부유했다.

“Velim me promeréntem ames.”(나는 너의 사랑을 받아 마땅하다.)

이제 우성 알파는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알렉세이가 뒤돌아서 낙타에 올라탄 그녀를 황홀하게 올려다봤다.

“가자, 인간.”

그레모리가 손을 내밀었다. 알렉세이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낙타 등에 올라탔다. 헤더는 모래폭풍을 일으키며 달리는 황금 낙타를 붙잡기 위해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위를 계속 뛰었으나, 그들은 어느 순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아. 알렉세이. 이 일을 어떡해.”

절망한 헤더는 모래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뜨거운 태양에 검붉게 탄 얼굴은 피부 껍질이 하얗게 벗겨져 화끈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켜 나아갈 수 없었다.

그 어떠한 고난과 시련이 있어도 자신을 구해주러 올 거라는 믿음으로 버텼건만 그 믿음은 배신당했고, 유일한 희망 또한 사라져 버렸다. 온몸에서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모래에 쓰러진 헤더 위로 모래바람이 불어와 그를 덮었다. 그는 그대로 땅에 묻혀 영원한 안식을 맞이하고 싶었다.

***

그레모리는 빨리 이 우성 알파를 제 오메가로 만들고 싶었다. 그를 실컷 범해서 자궁을 만들고 그 안에 씨물을 잔뜩 붓다 보면 어느새 가이드가 되어 있겠지.

헤더는 유르한을 사랑해 가이드가 되었다. 그레모리의 능력으로 알렉세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지금, 이 우성 알파 또한 가이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은신처로 우성 알파를 데려갔다. 이 우성 알파는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공간에 들어서게 되었다.

사막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그레모리는 해체하고 이동하기 쉬운 천막에서 살고 있었다. 3m나 되는 원통형 천막은 버들가지로 골조를 짜고, 그 위에 두꺼운 낙타 가죽을 덧댄 구조였다.

황금 낙타를 천막 밖에 세워두고, 그녀는 우성 알파를 자신의 천막에 집어넣었다. 그레모리는 실내를 살피느라 두리번거리는 우성 알파를 침대에 던졌다.

“바지 벗어.”

그레모리는 본론부터 꺼냈다. 빨리 자신의 가이드를 가지고 싶었다. 아이는 스무 명 정도 낳게 할 거고, 아이들이 에스퍼로 태어나면 같은 구멍을 사용할 생각도 있었다.

어쩌면 반인반마들이니 운 좋게 헬링턴처럼 스카이 워커가 될지도 몰랐다. 그럼 그레모리는 마계를 위해 제 아이들을 강한 마족들에게 반려로 보내 줄 것이다.

인간에게 최대한 많은 아이를 낳게 해서 가이드를 뽑는 게 관건이었다.

알파인 그레모리는 자신이 오메가로 몸을 바꿀 생각 따위 전혀 하지 않았다. 비효율적이어도 이 인간의 형질을 바꿀 생각이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바지를 내려야 하는데 이 우성 알파가 거부했다. 왜 그러지? 능력은 먹힌 것 같은데?

“빨리 벗어. 나 러트 오는 약 먹게.”

“전 결혼을 약속한 오메가가 있습니다. 아무리 공주님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약혼자가 아닌 존재와는 잘 수 없어요.”

“…미친. 너 알파 맞아? 무슨 개 같은 순결주의 타령이야. 빨리 바지 벗지 못해!”

그레모리는 우성 알파의 바지를 벗기기 위해 인간 남자의 위에 올라탔다.

“비켜. 비키라고. 내 몸에 손 하나 까딱하기만 해 봐. 혀 깨물고 죽어 버릴 테니까.”

“죽어. 죽으면 다시 살려서 범하면 되니까.”

“그럼 공주님을 죽이겠어요.”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사랑하면 당연히 자신과 섹스하고 싶어 해야 하는데, 이 미친놈이 제 감정을 무시할 만큼 정조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레모리는 우성 알파의 팔다리를 잘라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성관계를 갖기로 했다. 독수리 발톱처럼 휘어진 칼을 빼 들었다. 알렉세이가 왜 자기를 공격하려고 하냐고 따졌다.

“다치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구멍을 벌리는 게 좋을 거야.”

사랑하는 공주님이 알렉세이의 몸을 원하고 있었다. 앞은 아인 페르디안과 수없이 사용한 중고였지만, 뒤는 새것이었다. 그녀를 사랑하건만 도저히 우성 알파인 그는 그녀에게 구멍을 대줄 수 없었다.

그레모리가 알렉세이의 팔을 자르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알렉세이는 피부에 에테르를 둘러서 몸을 보호했다. 쾅! 크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피부가 아닌 거대한 철문을 두드렸을 때나 날 법한 충격음이었다.

“뭐야. 너.”

그레모리는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아 당황했다. 고작 인간이 마족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레모리는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보호막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안타까운 눈으로 사랑하는 공주님을 보다가 피곤해서 눈을 감았다. 그레모리는 공격당하는 와중에 너 따위의 공격은 모기 수준이지, 라는 듯 자는 알렉세이의 태도에 크게 분노했다.

그를 제 가이드로 만들어야 하는데 죽이겠다고 칼을 휘둘렀다. 그러든가 말든가 알렉세이는 레아에 도착해 있었다. 아인 페르디안이 만들어놓은 캐모마일 꽃을 무감하게 보다가 캔버스를 발견해냈다.

신기한 그림이었다. 칸을 여러 개 나눠서 인물의 행동과 말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알렉세이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전하겠다며 자신의 레아에 캔버스를 두고 간 오지랖 넓은 오메가 때문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다 마지막에 등장한 아인의 캐릭터가 한 대사를 읽고 눈을 떠, 그를 공격하던 공주의 멱살을 잡았다. 아인 페르디안이 두고 간 캔버스에는 이런 대사가 있었다.

“보고 싶다.”

알렉세이의 정수리 위에서 부유하던 공주의 왕관이 비행 능력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공주를 그는 손쉽게 죽일 수 있었다.

그레모리가 죽고, 그녀는 아이템을 남겼다.

「그레모리의 기회의 화살

E급 (일반 아이템)

무기 분류: 화살

공격 속도: 빠름

효과: 화살에 맞은 존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한다.

*잠재 옵션

잠재 능력이 해제되었습니다.

다산의 축복: 화살에 맞은 존재는 그 어느 종족의 아이도 임신할 수 있습니다. 임신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레모리가 죽고 나온 아이템이 생각보다 무척이나 형편없었다. 이딴 걸 어디에 쓰라고 나왔나 짜증 냈다가 옵션이 마음에 들어서 챙기기로 했다.

‘다산의 축복’이라… 달콤이를 낳은 뒤 상콤이와 매콤이가 생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알렉세이는 아이템을 잘 챙겨서 아공간에 넣어뒀다. 마공주가 죽자 그녀의 천막과 황금 낙타가 모래알이 되어 바람에 휩쓸려 사라졌다.

알렉세이는 중간에 헤어진 헤더를 만나기 위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헤더는 헤어졌던 지점에 여전히 엎어져 있었다.

“흐윽윽윽. 흑흑.”

“헤더.”

“흑흑흑.”

우느라 목소리가 귀에 안 들어오나 보다. 헤더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알렉세이? 여긴 어떻게?”

“어떻게는요. 마공주가 건 세뇌를 풀고, 날 강간하려고 한 마족을 죽이고 왔죠.”

알렉세이는 아인이 레아에 남긴 캔버스 그림 덕분에 그레모리의 세뇌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아무리 정신계 능력에 당했다고 해도, 한순간이라도 아인을 사랑하지 않았던 게 믿기지 않았다. 둘이 함께 피워낸 캐모마일을 보고 비웃었던 스스로가 낯설었다.

덕분에 알렉세이는 지금의 자신이 되기까지 얼마나 아인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제논, 이사벨라, 조세핀, 아인과 같이 소중한 사람들의 조각으로 이뤄져 있었다.

다시는 자신의 안에서 그들의 조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이제 우리를 인간계로 돌려보내달라고 부탁할 마왕자와 마공주는 더 이상 없어요.”

그는 자신을 걱정해서 울고 있던 헤더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죠, 마왕 죽이러.”

“아….”

헤더는 용사였다. 다섯 명의 용사들은 1000년 전, 창조신께 마왕을 죽이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인간계로 복귀했다.

세 명의 용사는 이미 죽었으나, 두 명은 인간계와 마계에 비석이 되어 남겨졌다. 용사들에게 아직 남겨진 숙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결국 여기까지 도달했다. 헤더는 포르카스의 투명 망토를 둘렀다.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가이드가 된 용사는 더 이상 무적의 에스퍼가 아니었다. 그는 마왕에게 한 대만 맞아도 죽어버려 비석으로 돌아갈 것이다.

알렉세이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진행하기 위해 마왕성으로 향했다. 아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령 그가 잘못되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했다. 아무런 시도조차 안 한 채 이대로 계속 마계를 떠돌아다닐 순 없었다.

이제 마계에서 297일이 지났다. 알렉세이에게는 남겨진 시간이 별로 없었다. 헤더에게 인간계의 음식과 물을 얻어서 먹을 순 있었지만, 그 양이 충분한 건 아니었다.

1주일에 한 끼씩 식사를 하며 버텨왔다. 에테르 오염을 막기 위해 능력을 최소한으로 쓰려고 했지만, 이미 혈관에 도는 에테르가 구정물처럼 더러워 잘 흐르지 않았다.

아마 마계의 시간이 인간계보다 10배 느리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송장이 되었을 것이다.

마왕성 앞에는 머리가 아홉 개 달린 드래곤, 히드라가 있었다. 각각의 머리들은 서로 다른 의지를 품고 움직이며 침입자를 막기 위한 경계를 섰다.

알렉세이는 오른손에 A급 무기 듀란달을 소환했다. 다섯 용사를 보좌하던 12기사가 사용한 전설의 검으로, 공격력이 높다기보다는 내구성이 좋은 편이었다. 부러지지 않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택한 무기다.

왼손에도 12기사 중 한 명이 사용한 A급 무기 부르트강을 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피부가 질긴 거인을 무찌를 때 사용했다고 한다. 알렉세이는 양손에 내구성이 높은 검 두 자루를 들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드래곤의 머리 두 개를 자랐다. 남은 머리들이 알렉세이에게 불을 뿜어 공격했다. 알렉세이는 피하지 않고 머리 두 개를 잘라냈다. 나머지 머리들이 독가스를 뿜었다.

숨을 참았음에도 독에 중독된 알렉세이는 추락하고 말았다. 낭패다. 해독하지 못하면 계속 생명력이 깎일 것이다. 일단 중독 상태로 빠르게 히드라를 잡고 해독할 방법을 찾기로 했다.

히드라가 추락한 알렉세이를 발로 밟으려고 했다. 알렉세이는 총알처럼 비상해 독을 뿜었던 머리 두 개를 잘랐다. 이제 셋만 처리만 된다.

빠르게 생명력이 줄어들었다. 약해진 몸을 지탱하기 위해 에테르가 빠르게 전신을 돌았다. 순간적으로 기운이 폭발하듯 생겨났다.

이 전지전능한 힘만 있으면 창조신도 죽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에테르에 몽롱하게 취한 알렉세이는 판단력을 상실한 채 양손에 든 검으로 히드라를 죽였다.

거대한 드래곤이 죽자 해독제 아이템이 나왔다. 천만다행이었다. 해독제를 먹고 회복한 알렉세이는 잠시 바닥에 앉아 쉬었다.

한편, 인간계에서는 오세의 거울을 통해 조세핀과 아인이 치열한 알렉세이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마계에 보내진 알렉세이를 찾기 위해 무작위로 좌표 입력을 하다가 우연히 마왕성을 찾아냈다. 그 뒤로는 좌표를 이동하지 않고 계속 마왕성만 지켜보며 기다렸다.

아인이 레아에 놔두고 온 캔버스를 보고 알렉세이가 마왕성으로 올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예측대로 알렉세이는 홀로 마왕성에 왔다.

아인은 그가 마왕을 죽이고 마왕이 되는 것도, 도망간 호라이슨을 찾아내는 것도, 그에게 알렉세이를 소환해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모두 걱정되었다.

아직까지 아인의 마음속에는 호라이슨이 악역수, 진짜 아인 페르디안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남아 있었다. 그 추측이 맞는다면 호라이슨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건 잔인한 일이었다.

일단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제쳐두고, 알렉세이가 무사히 마왕을 죽일 수 있기만 기도하기로 했다. 그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인간계 시간으로 몇 시간만 있으면 그가 생존할 수 있는 기간이 끝난다.

조세핀은 오세의 거울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진심으로 알렉세이를 걱정하는 게 느껴졌다. 아인은 원작 광공을 바꿔놓은 존재가 조세핀이었구나 싶어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손에 땀이 고이도록 긴장한 채 알렉세이를 지켜봐서 그런지, 그가 무사히 거대한 드래곤을 해치우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휘청거리는 몸을 손으로 책상을 짚어 지탱했다.

“조심하십시오. 아인 공자.”

조세핀이 이만 쉬자고 제안을 했다. 따뜻한 차를 마시다 보면 진정될 거라며 주전자에 물을 부었다. 찻잔에 하얀 꽃잎을 띄운 그가 뜨거운 물을 붓고 꿀을 넣어줬다.

“감사합니다. 조세핀.”

“그런 말씀 마세요. 임신한 몸으로 얼마나 힘드십니까. 잘 버텨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그게 아니라… 그동안 알렉을 훌륭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아휴, 왜 눈물이 나지? 늙어서 주책이야.”

아직 중년에 불과한 조세핀이 다 늙은 노인처럼 말하며 눈물을 닦아냈다. 마계에 알렉세이를 보내고 쌓인 마음속 걱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조세핀이 몸의 중심을 잃어버릴 만큼 크게 흐느껴졌다.

아인은 자신에게 타 준 차를 조세핀 손에 쥐여줬다. 손바닥으로 감싼 찻잔으로부터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면서 경직된 몸이 이완되었다. 조세핀은 호호 불어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가 아차, 싶었다. 아인에게 줬던 건데 그가 마셔버렸다.

“괜찮을 거예요. 알렉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에스퍼잖아요.”

“맞습니다. 그는 SS급 에스퍼니까요.”

아인은 고개를 갸웃, 자신이 잘못 들었나 보다 하고 넘겼다. <집착광공은 능욕을 멈춰!>에서 알렉세이는 S급 에스퍼였고, 매칭 검사를 했을 때 알게 된 그의 등급도 S급이었다.

아인은 쉬는 동안에도 책상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이 시계도 10배 느리게 흘렀으면….

오세의 거울 속 알렉세이가 성문을 열었다. 조세핀은 힐끔 아인의 눈치를 봤다. 히드라를 죽일 때도 수위가 걱정되었지만, 성안에 들어오니 본격적으로 알렉세이가 칼춤을 췄던 것이다.

그가 마물들을 죽이며 피를 뒤집어쓰는 잔인한 장면을 이 이상 임신부에게 보여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까도 다리를 후들거리지 않았는가.

“아인, 여기는 제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아인은 알렉세이의 레아에 접속해 있으세요.”

“저도 그가 걱정돼요.”

“최악의 경우 달콤이가 유르한 제국의 희망입니다. 배 속 황손을 지키셔야죠. 아인이 보기에는 너무 잔인합니다.”

달콤이를 들먹이니 아인도 계속 고집을 피우고 오세의 거울을 지켜볼 수 없었다. 조세핀은 알렉세이의 레아에 있으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 제일 먼저 알아차릴 수 있다는 말로 달래서 아인을 소파에 눕혔다.

아인은 눈을 감았다. 광활한 레아에는 여전히 캐모마일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꽃밭에 누워 배를 문질렀다.

“달콤이 너~ 너 때문에 아빠가 아버지가 잘 싸우는지 못 보잖아.”

저 혼자 달콤이를 책망하다가 아인은 배 속에 든 아이가 무슨 잘못인가 싶어 얼른 사과했다.

“미안. 아빠가 불안해서 그랬어. 그게 알렉의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르니까. 아니겠지? 절대 아닐 거야. 소설에서는 이런 내용 없었잖아. 그렇지?”

태아의 태동이 배에 닿은 손바닥으로 전해져 왔다. 마치 불안해하는 아빠의 감정을 전달받아 아기도 벌벌 떠는 것 같았다.

“어쩜 좋아. 너무 무서워. 달콤아. 아빠 너무 바보 같지? 네 아버지 꼭 돌아올 텐데 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한대?”

배를 끌어안고 울었다. 이건 꽃가루 때문에 눈이 매워서 우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달콤이 너는 아버지 돌아오지 못할까 봐 무서워하지 마.

***

마왕성의 중심부에 있는 마왕을 드디어 만났다. 알렉세이는 마물들의 피로 전신이 붉게 물든 모습이었다.

마왕과 전투하기 전, 힐링 포션이라도 마셔서 체력을 회복하고 싶은데 호라이슨을 치유하는 데 다 사용해버려서 없었다.

파리 몸에 사람 머리가 달린 거대한 괴물이 알렉세이를 보고는 분노하였다.

“너구나! 내 아이들을 죽인 게. 곱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널 죽이면 네 영혼을 봉인해 영원히 내 자식을 낳게 해주마. 네가 죽인 내 자식보다 더 많은 아이를 임신시켜주마.”

“뭐래. 씨발. 파리가 엥엥엥 시끄럽네.”

알렉세이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벼서 마왕을 도발했다.

크앙아앙앙. 거대한 마왕의 울자 마왕성이 진동했다. 마왕이 등 뒤에 달린 투명한 날개를 파닥였다. 알렉세이는 땅에 발을 깊게 박아 넣었으나 뒤로 날아가 버렸다.

마왕이 움직일 때마다 세상이 진동하는 것만 같았다. 여섯 개의 손에는 살벌한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하나같이 휘둘러질 때마다 위력이 엄청났다.

차라리 머리가 아홉 개 달린 히드라가 나았다. 아홉 개가 따로 노니까 합이 맞지 않는 오합지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왕은 머리가 하나이고, 명령을 내리는 주체도 하나이기 때문에 여섯 개의 손이 제 몫을 단단히 해냈다. 히드라는 머리가 많은 게 단점이었다면, 마왕은 손이 많아서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었다.

손이 두 개밖에 없는 알렉세이는 양손을 모두 이용해도 마왕의 공격을 다 막아낼 수 없었다. 옆구리로 철퇴가 날아들었다.

푸학.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폐를 찔렸다. 알렉세이는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날아갔다.

다행이라면 척추를 다치지 않았다는 거였다. 마계에서는 회복이 늦기 때문에 무턱대고 몸을 굴릴 수 없었다. 일단 부상을 회복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문을 향해 달렸다.

마왕 바알이 겁먹은 쥐새끼처럼 도망치는 알렉세이를 비웃었다.

“푸하하하하. 자신만만해하더니 어딜 가는 것이냐.”

쿵. 쿵. 쿵. 거대한 파리는 날갯짓을 하지 않고 걸어서 알렉세이를 쫓았다. 일부러 겁을 주기 위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존심 상해 알렉세이는 이를 앙다물었다.

“이리 와 날 죽여야 할 거 아니야. 으하하하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천장을 울렸다. 문고리를 잡은 알렉세이는 안도감에 표정이 풀어졌다가 등가죽이 찢어져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본능적으로 아픈 등을 보호하려고 손을 뒤로 보냈다. 웅크린 알렉세이에게 바알이 다가왔다.

그는 어느새 인간형으로 변신해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다. 병신같이 도망치기 바빠 적이 뭘 하는지도 살피지 못했다.

마왕 바알은 원래 모습은 끔찍한 데 반해 인간형은 헬링턴을 떠올리게 할 만큼 잘생긴 청년이었다. 은발이 아름다운 걸 보면 피가 어디 가는 건 아닌 듯하다.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도 알렉세이는 바알을 보며 헬링턴과 호라이슨을 떠올렸다. 바알이 부상을 입어 피가 범벅이 된 알렉세이를 뒤집었다.

웅크리고 있던 알렉세이는 바알이 자신의 뒤를 노리고 있음에 어이없었다. 바알이 바지를 끌어 내렸다. 알렉세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인아. 아인아. 아인아.’

자신의 가이드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가 자신을 구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알렉세이는 손에 단검을 소환해 뒤로 휘둘렀다. 바알을 공격한 A급 무기가 부러졌다.

바알은 알렉세이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당해줬다. 바알의 엄청난 생명력에 그런 공격은 티끌 같은 상처만 입힐 뿐이기 때문이었다.

바알은 이 아름다운 우성 알파를 짓누르고 굴복시켜 마족들의 씨받이로 삼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러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의 자식들이 이 인간 놈에게 다 죽었다. 바알은 인간의 구멍에 거대한 흉물을 가져다 댔다. 이대로 밀어 넣기만 하면 됐다.

알렉세이는 이제 끝인가 싶어 모든 걸 포기하고 울었다. 언제나 강자였던 그도 마왕 바알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아, 안 돼. 이대로 포기하면 아인이랑 달콤이는 누가 지켜.’

아름다운 미망인이 된 우성 오메가를 수많은 알파들이 하이에나처럼 노릴 것이다. 꽃이고, 보석이고 뭐 그딴 잡스러운 걸로 아인의 환심을 사려고 들겠지.

고작 알렉세이가 준비한 캐모마일 꽃다발 하나에 감동할 만큼 착하고 소박한 아인이었다. 세 치 혀를 가진 알파가 사랑한다, 좋아한다, 지껄여대면 마음이 약해 넘어갈지 몰랐다.

결혼을 약속한 알파는 마계에서 죽어버렸고, 배 속에 있는 달콤이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하니 아인이 재혼한다고 해도 원망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이 세상에서 진심으로 아인을 사랑하는 알파는 오직 자신뿐이었다.

자신이 죽고 아인에게 접근하는 새끼들은 다 아인의 아름다움과 엄청난 재산과 명성을 노리고 접근한 좆뱀 새끼들이다.

재혼하면 아인이를 방에 가둬놓고 하루 종일 강간하고, 달콤이는 새아버지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노예처럼 부려질 게 분명했다. 아인이를 닮은 달콤이가 더러운 걸레로 바닥을 닦는 모습을 상상해버렸다.

흑흑. 달콤아, 아버지가 미안해. 아버지는 그래도 너와 아빠를 지키기 위해 본딩을 깨…는 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잖아!

각인한 걸 생각지 못했다. 알렉세이가 죽으면 아인도 죽을 것이다. 절대 안 된다. 내 오메가! 내 아이! 모두 지켜내야 한다.

그곳에 에테르를 둘러 외부의 침입을 막았다. 바알은 이런 경우는 처음이어서 이 참신한 미친놈은 뭔가 싶었다. 알렉세이는 어처구니없어 하는 바알을 밀치고 그의 아래에서 벗어났다.

바지를 추켜올려 다시 입었다. 절대 몸을 사리면서 마왕 바알을 이길 수 없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야만 상대할 수 있다.

얼마나 오만했으면 가이드가 없다고 에테르를 아끼려고 들었단 말인가. 그동안 하루에도 수십 곳의 던전을 돌며 자신의 능력을 착취하는 페도로프에게 반감을 품었지만, 그 덕분에 아공간에 무기들이 한가득 있었다.

알렉세이는 양손에 무기를 소환했다. 바알을 한 번 공격할 때마다 무기가 부러져도 상관없을 만큼 많았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바알은 그가 미친놈의 스위치를 눌러버렸구나 싶었다. 인간형으로 있다가 괜히 공격만 당해 생명력이 반이나 깎였다. 다시 원래 모습으로 변신했다.

이번 용사는 혼자면서 다섯 명이 우르르 몰려왔을 때보다 더한 몫을 해냈다. 1000년 전 용사 일행은 마왕을 만나러 오지도 못한 채 인간계로 내뺀 병신들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골로 가겠다 싶었다. 구더기를 소환해 용사를 뒤덮었다. 그에게 구더기를 붙여 피부부터 시작해 근육과 뼈, 내장 등 모든 걸 갈아먹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구더기들의 이빨이 용사의 피부를 파고들지 못했다. 이빨이 부러진 구더기들은 적으로부터 공격받았을 때와 똑같이 생명력이 줄어 있었다.

그것들은 이빨 없이 계속 마왕의 명령을 이행하고자 용사를 깨물었다가 결국 생명력을 다 써서 소멸해버렸다. 용사 주위에 수백 개의 아이템들이 떨어졌다.

알렉세이는 미니 폭탄 287개를 습득하게 되었다. 바알은 저딴 허접한 미니 폭탄 가지고는 자신을 죽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주춤하고 뒤로 도망치고 말았다.

“나보고 널 죽이러 오라고 했지?”

알렉세이의 한쪽 입꼬리가 재수 없게 올라갔다. 새롭게 얻은 아이템을 모두 습득 처리해 아공간에 넣은 그는 손에 미니 폭탄을 소환했다. 굳이 허리를 굽혀서 일일이 주울 필요 없었다.

바알은 용사에게 불을 뿜었다. 에테르로 전신을 휘감은 그는 무적 상태여서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부상이 서서히 회복되는 게 보였다.

지금 회복 속도를 추산해 보면 인간계에서는 부상당하자마자 순식간에 회복되었을 테다.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등급일 것이다. 젠장.

마음이 다급해졌다. 마족들의 씨받이로 만들려고 했던 계획은 전면 수정되었다. 놔두면 후환이 두려운 존재는 애초부터 싹을 없애야 했다.

미니 폭탄들은 미미하게나마 바알의 생명력을 깎아내며 시야를 연기로 가려버렸다. 인간계에서 대장간이라도 했던 놈인지 용사가 무기를 쉬지 않고 던졌다.

A급 무기를 아깝지도 않은지 딱 한 번 공격하고 버리는 용도로 창처럼 던져대니, 공격해야 하는 순간에 방어하기 급급했다. 바알은 날개로 몸을 감싸 보호했다. 미니 폭탄을 다 사용했는지 더 이상 연기가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

이제 제대로 저놈을 공격해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찰나, 은회색 머리 용사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에테르를 많이 사용했을 텐데, 주먹에 엄청난 양의 에테르를 응집해 다가오고 있었다.

바알은 그가 저 공격을 하면 에테르가 고갈될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은 저 공격에 당한다 할지라도 생명력이 간당간당하게 남을 것이다.

에테르를 잃은 에스퍼를 공격하면 그가 이긴다. 바알은 엄청난 생명력만 믿고 오만하게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넣은 인간을 만나다니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용사도, 마왕도 서로에게 하는 마지막 공격이 될 것이다.

알렉세이의 주먹이 바알에게 닿았다. 그는 바닥을 보이는 에테르를 쥐어짜며 주먹에 쏟아부었다. 레아가 무너져 가고 있었다. 광활한 대지가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아인이 황무지 같던 자신의 레아에 피워준 캐모마일 꽃들이 모두 꺾여서 바람을 타고 별 무리가 되어 흩어졌다. 마왕의 생명력 또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바알도 당하고만 있지 않고 알렉세이에게 여섯 개의 손으로 무기를 찔러 넣었다.

***

“아아, 안 돼. 알렉! 알렉!”

알렉세이의 레아에 있던 아인은 갑자기 땅에 엄청난 지진이 일어나자 이상함을 감지했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땅이 부스러지며 점점 작아지는 게 눈에 보였다.

설원처럼 빼곡하게 피어난 하얀 캐모마일 꽃이 누가 뜯기라도 한 것처럼 잘려져 나갔다. 꽃들이 바람을 타고 휘날렸다. 빛이 되어 사라졌다. 점점 그렇게 사라지는 꽃은 많아지고, 레아는 원래의 황폐한 모습을 되찾아 갔다. 본딩이 깨졌다.

“으흑흑. 안 돼. 이러지 마. 사라지지 마.”

아인은 울면서 캐모마일 꽃들을 붙잡았다. 꽃잎을 손에 쥐어도 캐모마일은 빛의 조각이 되어버렸다. 하늘에 떠 있는 아인의 레아가 아인을 집어삼키려고 했다.

땅에 바짝 달라붙어 올라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인의 레아가 아인을 데려가 버렸다. 검은 닉스가 출렁이는 자신의 레아, 바다가 나타났다. 두 사람의 꽃은 이제 없었다.

“으아아악. 안 돼. 흑. 안 돼. 알렉. 훌쩍.”

레아가 파괴된 에스퍼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인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가이드의 정신 상태에 영향을 많이 받는 닉스가 폭주했다.

아인은 닉스에 집어삼켜져 잠들어버렸다. 조세핀은 슬픔에 잠겨 잠들어버린 아인과 달리, 아인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알렉세이와 본딩은 깨졌을지 모르지만, 그와 각인한 아인이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세핀은 알렉세이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살뜰하게 아인을 보살폈다.

A급 에스퍼들을 불러서 이인의 닉스를 빼기 위해 손을 잡게 시켰다. 비효율적이기는 하지만, 손을 잡아 가이딩을 한 끝에 아인이 일주일 만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조세핀은 아인이 잠든 내내, 배 속 아기가 잘못될까 봐 호라이슨에게 주려고 얻은 힐링 포션을 수저로 떠서 끼니때마다 아인에게 먹였다. 그 덕에 아인은 오랫동안 잠들었던 게 무색하게 시간의 공백을 느끼지 못했다.

아인은 자신이 레아에서 바로 현실로 돌아왔다고 믿었다. 소파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오세의 거울을 보고 있던 조세핀이 아인을 붙잡을 새도 없이 그가 달려 나갔다.

아인은 모래궁에 가면 알렉세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두 사람이 함께 했던 그곳으로 갔다.

그토록 꽃을 피워내 그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으나, 누군가 짓밟고 줄기를 뜯어내 그러지 못했던 정원은 돌보지 않은 사이 하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질투에 눈이 멀어 매일 밤, 꽃을 괴롭히던 호라이슨이 사라진 덕이었다.

생명력이 강한 캐모마일은 모진 고난을 겪었음에도 아름답게 세상에 나왔다. 기특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바랐던 알렉세이에게 보여주는 일은 이제 할 수 없었다.

아인은 캐모마일 꽃밭에 엎어져 통곡했다. 배가 찢어질 듯 아파서 정신없는 와중에도 힐링 포션을 꺼내 마셨다. 이 상황이 되어서도 아이는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인은 달콤이가 괜찮아진 걸 느끼고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제 손으로 모래궁 가득 피어난 캐모마일 꽃들을 쥐어뜯으며 화풀이했다.

“지금 피어서 뭐해!”

하얀 손은 줄기를 뜯으면서 나온 풀물에 젖어 들었다. 꼭 손조차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아인은 손아귀에 쥔 꽃 무더기를 내팽개치며 화냈다.

“소용없잖아. 아무짝에도 쓸모없잖아. 흐흑.”

아인은 괴로워 머리를 땅에 찧었다. 퉁, 퉁, 퉁. 넋이 나가 자학하고 있는 아인을 알렉세이가 불렀다. 아인은 충격이 너무 커 환청을 들은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땅에 내리찍던 이마를 부드러운 손이 감싸 보호했다. 눈물로 더러워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하나뿐인 에스퍼, 그리고 알파, 알렉세이 유르한이 말했다.

“돌아왔어. 너랑 결혼하려고.”

“흑. 뭐야. 뭐냐고!”

잔뜩 성을 내며 그를 주먹으로 때렸다. 알렉세이가 아인의 어리광을 받아줬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아인과 눈을 마주하기 위해 그 또한 기꺼이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아인의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청혼하자마자 사라져서 미안해. 다시 한번 허락받을게. 나랑 결혼해줄래?”

아인은 알렉세이의 목을 끌어안은 채 그를 넘어트렸다. 알렉세이가 달콤이 다친다면서 아인의 배와 거리를 벌려줘서 다행히 배가 눌리지 않았다.

“자꾸 사람 성질나게 하죠!”

“미안. 근데 네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바보. 멍청이. 똥개.”

아인은 알렉세이에게 심한 욕을 퍼부으며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혼냈다.

“알렉이 이제 마왕이어도 좋아요. 세상 사람들이 다 날 비난하더라도 당신의 오메가가 될래요.”

그가 아인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하며 답했다.

“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

“정말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알렉의 레아가 파괴되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아… 나 에스퍼 등급 떨어졌어.”

알렉세이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아인은 상관없었다.

알렉세이는 자신의 목을 꼭 끌어안고 놔주지 않는 아인 때문에 목이 졸렸지만,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자신도 그가 연약한 오메가가 아니었다면 온 힘을 다해 꽉 끌어안아 터트려 버렸을지 몰랐다. 그만큼 아인이 그리웠고 반가웠다. 아인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이제 A급 에스퍼겠네요? 괜찮아요. 오히려 잘됐어요. 앞으로는 에테르 때문에 아플 일 없을 거 아니에요.”

자기 에스퍼가 등급이 떨어졌는데 칭찬하는 가이드는 아인밖에 없을 것이다. 그 모든 게 자신을 위해 한 말임을 알아 알렉세이는 서운하기는커녕 기뻤다.

“앞으로는 우리 섹스도 일주일에 한 번만 해요. A급이면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겠다.”

‘어딜.’

은회색 눈이 가늘어졌다. 진짜 그가 A급 에스퍼여도 알렉세이는 아인과 하루 한 번씩은 섹스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아인과 섹스하는 게 무진장 좋으니 말이다!

“안 돼. 나 S급 에스퍼야. 네 가이딩 없으면 난 혈관 터지고, 피부 녹아내리고, 피눈물 흘리면서 죽어버릴 거야.”

섬뜩한 말이었지만 협박이 아닌 사실이었다. 만일 이사벨라를 따라 아인의 전시회를 가지 않았더라면, 알렉세이는 결국 그런 죽음을 맞이했을 거다.

“등급 떨어졌다면서요. 그런데 아직도 S급이에요?”

심각해진 아인의 눈썹이 찌푸려져 알렉세이는 손으로 눌러서 펴줬다.

“응. 나 SS급으로 등급 올랐었거든. 전에 말했잖아.”

“아….”

아인은 자신이 흘려들었던 SS급이란 소리를 떠올렸다. 알렉세이도, 조세핀도 그 말을 했는데 S급에 꽂혀서 잘못 들었다고 치부해버렸었다. 등급이 올랐는데 알렉세이의 레아가 변하지 않아 전혀 몰랐다.

어쩌면 알렉세이가 SS등급이 되었던 건 게임으로 따지면 개발자도 예상하지 못한 버그가 아니었을까.

“언제 마계로 돌아가야 해요? 나 기다릴게요. 알렉 기다릴 수 있어요.”

애절하게 알렉세이를 보는 아인의 눈빛이 너무나 달콤했다. 알렉세이는 좀 더 아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말하지 않고 싶었지만, 그를 속 썩일 수 없어 오해를 풀어주기로 했다.

“나 마왕 안 됐어. 인간 맞아.”

“어떻게요? 마왕을 죽여야 소환되어서 돌아올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용사 요르가 알려준 방법은 그거였다. 알렉세이가 귀엽게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인의 콧방울을 살짝 잡고 흔들었다.

“마왕을 죽일 마지막 공격을 다른 용사한테 양보했거든. 그가 나 대신 마왕이 되어서 날 인간계로 돌려보내 줬어.”

아인의 눈이 커졌다.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알렉세이를 다시 꽉 끌어안았다. 알렉세이는 자꾸 임신한 오메가가 배 속에 든 아기를 조심히 다루지 않아 속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배가 눌리지 않게 허리를 떨어트리고 목만 아인에게 붙잡힌 채 등을 토닥이려니 요상한 자세가 되었다. 모든 걱정거리가 사라지자 아인은 그제야 자신이 쥐어뜯은 꽃들이 아까워졌다.

아인은 벌떡 일어나 꽃밭에 생긴 땜빵을 보고 속상해했다. 알렉세이가 아인의 옆으로 다가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 광경이 네가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네. 아름답죠?”

“응. 너무 아름다워.”

알렉세이 머릿속에서 모래궁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황폐했던 예전의 모습은 사라졌다. 아인이 가꿔준 아름다운 캐모마일 꽃들이 슬픈 기억들 위로 눈처럼 소복하게 쌓였다.

“네가 내 레아에 두고 간 캔버스 덕분에 마왕을 무찌를 수 있었어.”

아인이 알렉세이의 손을 꼭 잡아줬다.

“날 그리워하는 네 마음이 날 구원했어. 사랑해, 아인아.”

“나도, 사랑해요.”

알렉세이는 아인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나란히 꽃밭 위에 앉아 얼굴을 마주하고 키스했다. 아인이 쥐어뜯은 꽃잎이 바람에 나풀나풀 날아갔다.

신은 어디에도 없다.

신은 여기에 있다.

그러니 저 날아가 버린 꽃잎에도 신은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사라진 세계,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게 된 평행세계에서 알렉세이는 세상을 멸망시켰다.

그런데 멸망한 세계를 위해 지구에서 용사가 소환되었다. 지구용사가 세상을 구했다. 그는 알렉세이를 구원했다.

창조신은 지구용사를 데려온 목적을 달성했기에 그가 원하면 다시 지구에 있는 집에 데려다줄 수 있었다.

정원에서 키스를 나누던 그들은 모래궁에서 머물던 침실로 향해 잠자리를 가졌다. 아인은 한 달 사이에 더욱 무거워진 배 때문에 정상위로밖에 사랑을 나눌 수 없었다.

알렉세이는 아인을 배려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그의 허리 짓에 오히려 아인이 감질나서 더 해달라고 졸랐지만, 알렉세이는 키스만 해줄 뿐이었다.

아인은 관계가 끝난 후 알렉세이가 해주는 팔베개를 베고 그의 품에 안겼다. 서로의 페로몬을 흠뻑 들이마시며 사랑을 확인했다. 행복했다.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랄 만큼.

그가 아인의 금발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인아, 나한테 다시 본딩해 줄래?”

아인은 알렉세이에게 키스하며 그의 레아에 들어갔다. 처음은 잠자다가 얼떨결에 하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아인의 의지로 알렉세이의 가이드가 되고자 하는 거였다.

그들은 다시 그 누구도 가를 수 없는 완전무결한 페어가 되었다. 알렉세이는 괜찮은 척했지만 아인이 본딩을 거부할까 봐 긴장하고 있었는지, 그제야 안심하고 잠들었다.

마왕과 싸우자마자 돌아와서 아인을 달래고 섹스까지 했으니 많이 힘들 테다. 아인의 눈에도 알렉세이 눈 밑에 고인 피로가 보였다.

아인은 자신의 에스퍼 품에 안겨 잠들었다가 창밖으로 떠오르는 일출의 눈부심에 눈을 떴다. 창문이 없던 침실에 창문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아인을 가두고 집착만 하던 예전의 알렉세이가 아닌 것이다.

태양궁으로 그들의 침실을 옮겨서 모래궁 침실에 창문을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직도 이곳에는 아인과 관련된 물건들이 치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가 이제 아인이 자기를 버리고 떠나지 않을 거라 믿기에 창문이 생긴 거였다. 아인은 창밖으로 보이는 붉은 하늘을 바라봤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그때를 느낄 수 있다고 하던데, 아인도 지금이 자신의 마지막 순간임을 느낄 수 있었다.

창조신: 지구용사님, 저희 세계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의 웹툰에 댓글을 달았던 정신 나간 독자는 진짜 창조신이었다. 아인은 그가 자신을 지구로 다시 데려다 놓을까 봐 겁났다.

치킨, 피자, 햄버거, 떡볶이, 김치볶음밥들이 그리워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은 있지만 이제 그것들을 다 여기서도 맛볼 수 있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 세계의 먹을 게 아무리 거지 같아도….

지구에는 알렉세이가 없지 않은가.

아인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창조신은 당황해서 허공에 글자를 적었다.

창조신: 당신의 귀환을 강요할 생각 없습니다. 이만 눈물을 거두세요.

“그렇다면 왜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거죠?”

창조신: 지구용사 님께서 지구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생각해 물어본 거였답니다. 당신의 의사는 충분히 알았으니, 대신 저희 세계를 구해주신 보답으로 소원을 하나 들어드릴게요.

아인은 딱히 생각나는 소원이 없었다. 다정한 부모님과 귀여운 동생, 상냥한 알파, 달콤이까지. 자신은 이미 가진 게 많았다. 그렇다고 소원권을 필요 없다고 버리기에는 아까웠다.

곰곰이 생각하던 차에 벽에 흉물스럽게 걸려 있는 검은 가5나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블랙 슬라임으로 시작해 가5나시가 된 자신의 자화상이었다.

이런 거 침대 맞은편에 걸어두면 자다가 가위눌릴 것 같은데 알렉세이는 퍽 강심장이었다. 하긴 그는 마왕까지 죽이고 온 에스퍼이지 않은가.

아인은 벽에 걸린 자화상을 내려서 이젤에 고정시켰다.

“이 그림을 수정하고 싶어요. 지금 그려놓은 거 밑에 다른 그림을 그려놓았거든요.”

창조신: 시간을 되돌려야 하는 일이네요. 음….

창조신이 망설였다. 힘든 일인 것 같아 아인이 다른 소원을 빌려고 했는데, 허공에서 문장이 바뀌었다.

창조신: 알겠습니다. 세상을 구원해주셨으니 이만한 소원 또한 들어드려야죠. 대신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그래도 그 소원을 비시겠습니까?

“네. 좋아요.”

아인이 수락하자 붓대가 유리로 된 하얀 붓이 나타났다. 아인은 의자를 가져와 이젤 앞에 앉았다. 캔버스를 하얀 붓으로 문지르자 검은색 칠 밑에서 밝은 금색의 그림이 나왔다.

캔버스에 선을 휘휘 그으며 그림을 되돌리고 있는데 침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깊은 잠에 빠졌던 알렉세이는 아인의 목소리가 웅얼웅얼 들려 정신을 차리게 위해 노력했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그 뒤부터는 쉬웠다. 팔을 접고 몸을 옆으로 눕혔다. 수면 아래에 있던 의식을 되찾았다. 알렉세이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자신 옆에 누워 있어야 할 아인이 없었다. 그의 빈자리에는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맴돌았다. 알렉세이는 침대 밖에서 이젤을 펴고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끔찍한 트라우마로 자기 모습을 검은 슬라임이라 믿었던 아인이 그린 자화상이 이젤에 놓여 있었다. 나중에는 붉은 피눈물까지 그려놓아서 아주 기괴했었지.

그런데 그가 붓을 움직일 때마다 그 검은 괴물 밑에서 아름다운 아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제 캔버스에서 검은색이 완전히 사라지고 밝은 금빛만이 있었다. 창밖에서는 완전히 해가 떠올라 투명하고 하얀 아침 햇살이 유리창을 통과해 침실 안을 환하게 밝혔다.

아직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너무 아름다운 기적이어서 현실적이지 않았다. 마치 동화 속 왕자님이 저주에 걸려 괴물이 되었는데, 진정한 사랑의 키스로 저주가 풀려 다시 아름다운 왕자가 되는 순간을 훔쳐본 것만 같다.

아인이 그림을 복구하자마자 손에 들린 유리 붓이 사라졌다. 눈앞에 있는 자화상을 보며 아인은 깨달았다. 자신 또한 어둠 속에 갇혀 있었음을. 왜 그때는 자신의 모습이 이렇게 생겼다고 여기지 않았던 걸까.

오랫동안 양부모에게 학대받아 왔다. 양부모의 딸은 자신을 개무시했고, 학교에 가도 고아 새끼라며 왕따를 당했다.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믿었다.

그래야 버틸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은 괜찮지 않았던 거다.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눈가리개가 떨어진 기분이었다. 알렉세이는 아인이 그를 구원했다고 했지만, 사실 알렉세이도 아인을 구원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구원한 존재인 것이다.

드디어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딘 기분이었다. 아인은 자신의 자화상을 다시 침대 맞은편 벽에 걸었다.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알렉세이가 눈을 뜨고 있었다.

“어떻게 한 거야?”

환영 마법을 사용하면 똑같은 상황을 연출할 수는 있겠지만, 캔버스에는 그 어떠한 마법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인이 침대에 도로 누워서 알렉세이의 팔을 벴다.

“검은 괴물 아래 원래 저 그림을 그렸었거든요. 그 그림을 복구한 거예요.”

알렉세이는 그 복구 방법을 물은 거였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그림 감상이나 하기로 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캔버스 속 아름다운 금발 오메가를 감상했다. 아인의 얼굴을 눈치 보지 않고 감상할 수 있다니….

그림이 걸려 있는 위치도 그렇고, 참 혼자 보면서 딸치기 좋은 그림 같다.

***

알렉세이의 부재는 비밀에 부쳐졌으나 안달리시아 공작이 황제 권한 대행자 역할을 하면서 알 사람은 아는 일이었다. 불안으로 나라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려던 시점에 때마침, 마계에서 황제가 돌아왔다.

유르한 제국은 매직 미러를 통해 이와 같은 공식 발표를 했다.

‘황제 알렉세이 유르한이 마왕을 무찌르고 무사히 귀국했다.’

매직 미러 앞에 모습을 드러낸 황제 알렉세이는 다행히 건강한 모습이었다.

전 세계는 유르한의 황제가 마왕을 죽였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 알렉세이는 마왕을 무찌르고 창조신에게 큰 선물을 받았으며, 이를 자신의 결혼식에서 공개하겠다고 하였다.

황제 알렉세이가 없는 동안 유일한 황실 핏줄로서 대리 통치를 하던 안달리시아 공작은 새로운 황제에게 인계를 마치고 물러났다.

안달리시아 공작은 알렉세이보다 항렬이 높은 황족으로서 황제 자리에 욕심을 부릴 만도 하건만, 신혼의 달콤함에 빠져 더 이상 집무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했다.

이에 사람들은 냉혈 공작 안달리시아가 푹 빠진 덩치 큰 오메가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제이콥은 여러 방송국의 초대를 받아 매직 미러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사람들은 제이콥의 호탕하면서도 애교 있고 밝은 성격에 푹 빠졌다. 과연 저렇게 성격 좋은 오메가이니 공작께서 좋아하게 되었구나 하였다.

하나 실상은 완전 달랐다. 안달리시아는 제이콥의 도발적인 육체미에 넘어간 멍청이였다. 그 누구도 감히 공작 앞에서 커다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걸으며 노골적으로 유혹하지 못했으나 제이콥은 달랐다.

저택 내에서 티팬티를 입고 돌아다녔고, 커다란 가슴을 손으로 모아 흔들며 돈과 권력과 아름다움을 가진 우성 알파를 손에 넣은 거였다.

뭐 세상에는 몰라도 좋은 게 있는 법이긴 했다.

어쨌든 유르한 제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에스퍼와 가이드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는 나란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눈을 황홀하게 해주는 존재이기에 그들의 2세가 더욱 기대되었다.

방송국과 신문사는 연신 아인의 배 속에 있는 황손 달콤이의 미래 얼굴을 유추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그 시류를 타고 화가들은 사랑스러운 아기 그림을 그리며 달콤이랍시고 돈을 벌었다.

비슷한 시기에 임신한 오메가와 베타 여인의 아이들은 모두 젤리, 마카롱, 푸딩과 같은 단 디저트의 이름을 딴 태명을 가지게 되었다. 달콤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얼마나 제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황제 커플의 결혼으로 유르한 제국이 얻은 경제 효과는 약 3000골드로 추정되었다. 제국민들은 아름다운 황제 커플의 얼굴이 그려진 찻잔 세트와 기념주화, 우표, 티셔츠와 같은 굿즈를 구입했다.

이 굿즈들은 다른 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아 황실의 보고를 가득 채워주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황제의 결혼식 기간 동안 유르한 제국에 방문하는 관광객의 수 또한 급증하였다. 수도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숙박업과 상업의 호황을 불러와 제국민들은 부유해질 수 있었다.

황제 알렉세이와 아인 페르디안의 결혼식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햇살이 아름다운 오후였다. 하늘조차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주는 것만 같았다.

온 제국민들의 관심을 독차지한 커플이었지만 정작 결혼식은 황제라는 엄청난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조촐하게 열렸다.

물론 결혼식장을 장식한 엄청난 양의 캐모마일 꽃으로 장식하는 바람에 벌과 나비들이 몰려들어 한차례 소란이 일었지만, 소중한 사람들만 결혼식에 초대했다는 점에서 역대 황제의 결혼식과 달리 소박한 축에 속했다.

유르한 제국의 귀족들이 참석하지 않은 대신, 결혼식은 매직 미러를 통해 실시간으로 방송되었다.

황제 알렉세이의 결혼 주례는 무려 교황이었다. 교황은 마왕을 무찌른 용사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기꺼이 유르한 제국을 방문해주었다.

사회자가 개식 선언을 했다. 양가 어머님의 화촉 점화 순서가 되었다. 당연히 매직 미러를 통해 그들의 결혼식을 보던 제국민들은 알렉세이 황제 측에서는 대리인이 나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 그렇구나. 황제 알렉세이가 마왕을 죽이고 창조신께 받은 선물은 바로….

***

결혼식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알렉세이는 모래궁 뒤편, 어렸을 때 자신이 직접 제논의 시체를 묻은 곳에 왔다. 바람에 실려 온 꽃씨 때문에 궁터 뒤에도 소담한 캐모마일 꽃이 피어 있었다.

그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흙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제논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느끼고자 했지만 소용없었다. 마계에서 그는 이미 죽은 자를 마족들이 살릴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왜 인류의 적인 마족들과 계약하는 흑마법사들이 계속 생겨나는지 그 이유 또한 깨달아 버렸다. 헬링턴을 흑마법사라는 이유로 성화로 불태워 죽인 주제에 눈물 나도록 마족과 계약하고 싶었다.

“흐흐흑. 흐으윽.”

알렉세이 내부에서 마왕 헤더를 불러내 제논을 살려달라고 부탁하자는 악마와 그러면 안 된다는 천사가 싸웠다. 왜 천사는 알렉세이에게 슬픔과 상실을 견뎌내라고만 강요할까. 악마의 손을 들어주면 안 되는 걸까.

두 손으로 움켜잡은 흙 속의 작은 돌멩이들이 손바닥을 찔렀다. 아무리 그가 칼에 찔려도 죽지 않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는 위대한 존재이나 평범한 아들이기도 했다.

제논의 무덤 앞에서 웅크린 채 있던 알렉세이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헬링턴이 미웠다. 그 녀석 때문에 자신의 오메가 아버지가 죽었으니까.

그러나 헬링턴이 악이라고 처벌한 알렉세이조차 선이 아니었다. 결국 흑마법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는가.

알렉세이는 왜 자신이 선하지 않아 이런 유혹에 시달릴까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나쁜 놈이었고, 악당이었다. 세상을 상대로 마왕을 죽였지만 새로운 마왕이 생겼다고는 말하지 않은 사기꾼이었다.

그러니 변명을 하자면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른 자신이 제논을 살리는 잘못을 저지른다고 해도, 어떻게 되는 건 아니라는 거다.

알렉세이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새로운 마왕의 이름을 아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빚이 있었다.

“마왕 헤더는 부름에 응답하라.”

잔잔한 실바람이 불어왔다. 알렉세이는 말에 더 힘을 실어서 마왕을 불렀다.

“마왕 헤더는 부름에 응답하라.”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헤더가 자신을 속인 건가 싶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Pacts sunt servanda!”(계약은 지켜야 한다.)

분노를 담은 주먹이 땅을 내리쳤다.

“마왕 헤더는 부름에 응답하라.”

스아아아. 커다란 검은 뱀의 환영이 나타났다. 흙 위를 뱀이 지나가는 소리가 나더니 소환진이 그려졌다.

검은 뱀이 튼 똬리 주변의 땅이 검게 죽고, 피어난 꽃이 말라 바스러졌다. 그동안 알렉세이가 저지른 수많은 악행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도 있었으나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죄도 있었다. 호라이슨의 울음이 웅웅웅 귀를 울렸다

‘네가 임신한 날 알파들한테 강간하게 했어. 그래서 훌쩍. 그래서 훌쩍….’

호라이슨은 납작한 배를 감싸 지키고자 했으나 이미 그의 배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랬으니까.

“아, 젠장. 이게 무슨.”

혼란스러워서 머리를 짚었다. 아인은 인안나 신전에서 몸을 파는 남창이었다. 알렉세이는 자신의 가이드가 그런 더러운 존재라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인이 하는 모든 말들이 그에게는 순간의 위기를 넘기고자 하는 거짓말처럼 들렸다. 그에게 실망한 만큼 그를 상처 주고 싶었다. 미성숙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었다.

스스로를 살해하고 싶은 충동이 불기둥처럼 솟아올랐다. 이 충동을 견디지 못하면 소환진을 완성시킬 수 없음을 직감했다.

지옥에서 절규하는 죄인들의 비명 소리가 알렉세이의 내면에서 휘몰아쳤다. 마왕을 부르고자 한 대가였다. 알렉세이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 불지옥의 죄인 중 자신이 있었다.

“몰랐어. 정말이야.”

어차피 닿을 수 없는 해명이었다. 사과를 받아야 할 존재는 어딘가로 도망쳐 버렸다.

“알았으면 안 그랬을 거야.”

아니. 그럴 리가. 그때의 자신은 아인이 다른 알파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믿어 더욱 그를 증오했을 거다. 그 비정한 사내가 저지른 죄를 알렉세이는 부정할 수 없었다.

‘내 분노는 정당해! 네가 감히 나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지껄일 수 있어. 으아아아! 죽어! 죽어 버려!’

그렇게 외치는 호라이슨을 미쳤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미치지 않았다. 알렉세이만 기억하지 못한 거였다. 그래놓고선 호라이슨이 자신의 곰 인형을 망가트렸다고 미워했다니. 정작 미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는 자신이었는데 말이다.

“아, 그래서였던가. 꿈속에서 제논이 ‘이번에는’이라고 했던 게?”

알렉세이의 절망과 비탄과 슬픔과 후회로 점철된 온갖 부정적인 기운으로 소환진이 완성되었다. 마왕 헤더는 약속대로 용사 알렉세이를 만나러 인간계에 소환될 수 있었다.

알렉세이는 검은 비늘로 뒤덮인 헤더를 올려다보며 절망했다. 원래 모습을 완전히 잃은 헤더가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계약자는 이름을 밝히지 마라.”

“….”

알렉세이는 마왕 헤더를 올려다봤다. 이미 그는 알렉세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마족이 계약자의 이름을 듣지 않겠다는 건 한쪽에 굉장히 불공평한 계약을 맺겠다는 뜻이었다.

검은 마왕이 눈물에 젖은 알렉세이의 눈가를 자상하게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왔노라. 그 대가로 용사 요르의 비석을 달라.”

“예. 그러겠습니다. 마왕이시여.”

“소원은 이뤄졌다.”

마왕은 자신의 복수를 이루기 위해 사라졌다. 과거 그를 속인 동료를 마왕은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

알렉세이는 헤더가 사라진 자리에서 흙이 뭉쳐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깜빡이지 않고자 부릅떴다. 흙이 뭉쳐서 사람이 되었다. 제논이 살아났다.

“제논! 제논!”

알렉세이는 아이처럼 제논에게 매달렸다. 그 매달림에는 아마 어린 시절의 알렉세이가 하고자 했던 이런 말들이 담겨 있지 않을까 싶다.

‘아빠, 보고 싶었어요. 아빠, 내가 아빠 복수를 했어요. 나 잘했지요? 이제 아빠를 아프게 하는 나쁜 아버지는 없어요. 나랑 같이 다시 태양궁에서 살아요.’

제논은 그의 다리에 매달려 울먹이는 알렉세이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아빠는 항상 우리 알렉을 지켜봤단다. 우리 알렉, 많이 슬프고 아프고 힘들었을 텐데 잘 커줘서 고마워.”

조세핀이 알렉세이를 통제할 때마다 했던 고삐 같은 말을 제논 입에서 드디어 듣게 되었다. 알렉세이는 제논이 살아난 게 믿기지 않아 연신 그의 다리에 얼굴을 비비며 어리광을 피웠다.

다른 세계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죄악을 알게 되는 대가를 치르고 되찾은 제논이었다. 아무리 그 기억이 아프다고 해도 제논을 살린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알렉, 이만 진정하고 아인이 소개해줄래? 내일 네 결혼식인데, 서로 얼굴도 모른 채 식장에서 만나면 아인이가 당황하지 않겠니?”

“아. 네!”

정신을 차린 알렉세이는 아인이 있는 작업실을 향해 뛰어갔다. 제논이 알렉세이의 뒤를 쫓으며 외쳤다.

“알렉, 뛰지 마렴. 다쳐.”

오직 제논만이 S급 에스퍼인 알렉세이가 다칠까 봐 걱정했다. 황궁에서 일하는 의원들은 알렉세이가 다치든 말든 회복될 거라며 신경도 안 쓰는데 말이다.

제논은 알렉세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느낄 아픔을 걱정해주는 거였다. 알렉세이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제논.”

얼마나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제논과 침실에 방문하자 아인이 깜짝 놀라며 기뻐했다. 한눈에 제논이 알렉세이의 오메가 아버지임을 알아보더라.

***

레이나와 제논이 단상 위에 있는 촛대에 불을 밝혔다. 위풍당당하게 황제 알렉세이가 식장에 입장했다. 아인은 하얀 정장에 캐모마일 부토니에를 하고 있었다. 알파 신랑과 오메가 신랑이 맞절을 했다.

그들은 미리 준비해온 혼인서약서를 읽으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교황이 알렉세이와 아인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하였다.

두 사람의 정수리에 손을 얹은 교황이 마지막으로 축복을 내렸다.

“창조신께서 두 사람의 앞날을 위해 그동안 지은 모든 죄를 사하신답니다. 존재하지 않는 일에 너무 목을 매 불행해지지 마라 말씀하십니다.”

교황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졌다. 알렉세이는 교황의 말을 듣고 결심했다. 이미 사라진 세계에서의 일 때문에 아직도 괴로워하는 호라이슨을 찾아야겠다고.

호라이슨도 그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우리의 악연은 이미 끝난 것이었음을. 그에게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었다. 알렉세이는 그가 그걸 깨달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다.

신전에 있는 시계탑에 신관이 올랐다. 양쪽 귀를 솜으로 틀어막고 종을 울렸다. 땡그랑. 땡그랑. 알렉세이와 아인이 신전에서 나오는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꽃가루를 뿌려줬다.

제논은 예쁘고 어린 부부를 위해 박수를 치다가 외알 안경도 빼버린 채 울고 있는 조세핀을 발견했다. 누가 보면 자기 아들 장가보내는 줄 알 거다. 제논은 그에게로 다가가 손수건을 건넸다.

“훌쩍. 감사합니다.”

조세핀은 누가 줬는지 보지도 않고 손수건으로 콧물을 팽, 풀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돌려주기 위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어어어어.”

“고마워. 조세핀. 우리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이였는데, 네가 알렉을 그렇게까지 챙겨줄 줄 몰랐어.”

조세핀은 사실 식장에서 내내 제논의 뒤통수만 바라보느라 결혼식을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제논은 뒤통수도 잘생긴 걸 어쩌란 말인가.

“어… 어… 그게….”

병신 쪼다처럼 그가 말을 걸자 더듬거리며 제대로 대답도 못 했다. 속상해 죽을 것 같았다.

“우리 같이 식사할래? 참고로 데이트 신청이야.”

제논은 아직도 피부가 탱탱한 20대였고, 조세핀은 40대였다. 그와 같이 있으면 자신은 추잡한 아저씨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잘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조세핀은 세계가 멸망해도 제논과 자신이 잘 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레이나와 샤를이 다가와 제논에게 함께 식사하자는 제안을 건넸다. 제논이 그들을 따라갔다. 바보처럼 눈앞에서 기회를 놓친 조세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탑에 돌아가서 연구나 해야겠다 싶었는데, 페르디안 가문 사람들과 잘 가는 듯싶던 제논이 뒤돌아서 조세핀을 불렀다.

“뭐 해, 안 오고.”

조세핀은 쭈뼛거리며 과거 아카데미 최고의 인기남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오늘부로 회춘 마법을 연구하기로 했다. 자신이 대마법사여서 다행이었다.

***

사라진 호라이슨을 찾기로 마음먹은 알렉세이는 대외적으로 2황자를 백색 탑에서 병사하였다고 공표했다. 죄인 신분을 벗겨주기 위함이었다.

호라이슨을 추종하던 수많은 알파 귀족들은 어디로 갔는지 반기를 들기는커녕 의문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마왕을 죽이고 온 S급 에스퍼 황제가 두려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저 호라이슨의 몸을 취하기만 했을 뿐 그를 진정으로 아끼지 않았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비록 호라이슨과 황위를 두고 경쟁했던 사이였지만 씁쓸했다.

그렇게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랑받았던 유르한의 백장미 2황자는 잊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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