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황궁 요리사들에게 잡채와 불고기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먹고 있던 아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응? 왜 그래? 뭐 더 먹고 싶은 거 있어? 아인이 네가 좋아하는 탕수육 만들어 오라고 할까?”
“아니~. 내가 뭐 먹보인 줄 알아요.”
알렉세이는 입을 닫았다. 임신한 아인은 귀여운 먹보였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삐질 게 분명했다.
“알렉. 호라이슨을 어디에 묻었는지 혹시 알려줄 수 있어요? 한번 갔다 오고 싶어서요.”
당연히 무덤 따위 없었다. 알렉세이는 아인의 앞에 불고기가 담긴 접시를 밀어주며 좀 더 먹어보라고 권했다. 아인은 거절하지 않고 로메인에 불고기를 맛깔나게 싸서 먹었다.
울 달콤이 덕에 아인이가 살쪄서 너무 좋았다. 빵빵하게 볼살이 붙은 얼굴이 예뻐 죽겠다. 알렉세이는 아인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아인의 뱃살을 살살 쓰다듬었다.
“아! 진짜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데!”
“그냥 너 좋아서 만진 거야. 어서 먹어.”
“씨. 그렇게 내 뱃살 만지는데 어떻게 먹어요. 알렉은 내가 고추 만지면 밥 먹을 수 있어요?”
경우가 달랐지만 임신한 오메가의 심기를 건드려봤자 좋을 거 없었다. 알렉세이는 납작 엎드려서 아인의 눈치를 봤다.
아인은 ‘뱃살성애자’라느니 뭐니 하는 이상한 용어를 사용해 알렉세이를 혼내고는, 뜬금없이 제이콥을 질투했다.
“제이콥 뱃살이 내 뱃살보다 더 많으니까 알렉은 콥콥이가 더 좋지요?”
“아니야. 내가 그 오크를 왜 좋아해.”
“콥콥이는 턱살도 있고, 뱃살도 있고, 가슴도 큰 오메가잖아요. 흥!”
아인의 심미안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천재는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여서 그런 듯했다. 아인의 이상형과 한참 동떨어진 자신인데 받아줘서 다행이었다.
“어쨌든 호라이슨 좀 만나고 싶어서 그러니까 빨리 무덤 어디 있는지 불어요.”
더 이상 속일 수 없겠다 싶었다. 할 수 없이 이실직고했다. 호라이슨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아인이 이상하게 기뻐했다. 그 녀석이 아인을 괴롭혀서 그림을 못 그릴 뻔했던지라 그런 아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 알렉… 아니에요. 혹시라도 호라이슨을 찾으면 줄 게 있으니까 꼭 좀 말해주세요.”
“알았어.”
황제로서 집무도 봐야 하고, 아인과 신혼도 보내면서 밤마다 부종으로 고생하는 다리도 주물러줘야 해서 알렉세이는 달콤이가 태어나고 나서야 호라이슨을 찾을 수 있었다.
그를 찾는 과정에서 알렉세이는 주다가 등급이 낮아지며 세뇌 능력을 가지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주다는 자기는 알렉세이이고, 호라이슨은 아인 페르디안이 되었다는 세뇌를 걸고 함께 살고 있었다.
주변의 눈을 속이기 위해 머리카락 색까지 은회색으로 염색한 주다는 간 크게도 북쪽 설원에 가서 폐위된 황태자이자 델리칸 공작으로 위장해 성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매직 미러가 보급되기는커녕 외부인이 오고 갈 수 없는 버려진 땅이기에 다들 주다의 말만 듣고 따르고 있었다. 호라이슨은 그곳에서 아인이라 불리고 있었고, 간간이 그림을 그려서 아이들에게 나눠준다고 했다.
설정 놀이에 심취한 그들은 어쨌든 행복해 보였다. 알렉세이는 뼈가 시릴 정도로 추운 북부의 설원에 도착해 두꺼운 망토를 여몄다. 이대로 모른 척 떠날까 싶었다. 괜히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 세뇌가 풀리면 호라이슨은 다시 예전의 불행을 되찾을 테니까.
그는 아인에게 1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외박을 허락받고 델리칸 공작 성에 시종으로 위장해 들어갔다.
주다는 그곳에서 존경받는 성주였다. 추운 날씨 탓에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대부분 숲으로 사냥을 나가 먹을 것을 조달했는데, 그는 황실 기사였던 만큼 사냥 실력이 몹시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종종 S급 에스퍼 능력을 사용해서 사냥을 했다는 세뇌를 하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B급 에스퍼가 되었음에도 A급 에스퍼였을 때보다 더 대단한 능력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시종이 된 알렉세이의 하루 일과는 지붕에 쌓인 눈을 쓸어내는 것으로 시작됐다. 날마다 성안에 쌓인 눈을 쓸다 보면 하루가 다 가 있었다.
머리카락을 검게 염색해 콧등까지 가린 음침한 시종에게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델리칸 공작의 성에 머문 지 3일째 되는 날, 주다가 사냥을 떠나면 호라이슨의 방에 들어가는 알파가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북쪽 설원은 낮은 기온과 잦은 눈보라 때문에 난방을 몹시 중요하게 여겼다. 자연스럽게 화염 능력을 가진 에스퍼가 대우받는 분위기였다.
화염 능력을 가진 에스퍼는 성주가 자리를 비우면 성에서 왕 노릇을 하며 돌아다녔다. 그가 마음먹고자 하면 따먹지 못하는 오메가 시종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화염 능력자 에스퍼는 아름다운 호라이슨을 되먹지도 않은 협박을 하며 강간하고 있었다. 자기가 없으면 이 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얼어 죽을 거라며, 공작님이 곤란해져도 괜찮겠냐는 말을 하며 말이다.
그런 수준 낮은 협박에 질질 짜며 당하는 호라이슨을 보며 알렉세이는 전생에서 그가 했던 모든 말들이 사실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알렉세이의 세계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럴 수 있었던 거다.
강도가 칼을 들고 와도 무섭지 않은 알렉세이와 달리, 그는 바나나만 봐도 두려워했다.
어리석은 호라이슨을 이대로 가만히 두면 그는 계속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지다가 부서지고 망가져 버릴 터였다. 알렉세이는 사냥에서 돌아온 주다에게 어떻게든 힘을 내서 웃어주는 호라이슨을 보며 결국, 괴롭겠지만 그에게 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알렉세이는 앞머리로 감췄던 얼굴을 드러내고 호라이슨 앞에 나타났다.
“호라이슨.”
“알렉, 언제 염색한 거예요? 그런데 왜 날 2황자 이름으로 불러요. 장난치지 말아요.”
“호라이슨. 넌 화염 에스퍼야. 그 쓰레기 새끼가 없어도 이 성을 지켜낼 수 있는 강한 존재라고.”
“…알렉.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밖에 해줄 말이 없어서 미안하다. 그런데 난 전생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내 행복을 누릴 거야.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아아아아. 아아아아악!”
호라이슨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시종들이 영주 부부가 머무는 방에 들어오려고 했다. 알렉세이는 얼른 그에게 아인에 전해주라고 했던 물건과 자신의 선물을 건네고 공간 이동 능력으로 유르한 황궁으로 돌아갔다.
겨울이 순식간에 온화한 봄이 되었다. 얼음과 눈밖에 보이지 않던 세상에 빨강, 노랑, 하양, 분홍과 같이 색색의 꽃들이 보였다. 그는 망토를 벗어서 아공간에 처박았다.
아인과 자신의 아이가 보고 싶었다. 모래궁에 아인이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이 있었다.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캐모마일 꽃들이 그를 반겼다. 호라이슨이 있던 세상과 대비되는 자신의 눈밭이었다. 언젠가 그 녀석에게도 이런 따스함이 깃들기를 바랐다.
알렉세이는 황자 시절 자신의 침실이었던 방문을 열었다. 아인이 책상에 앉아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기 침대에 누워 있는 루트비히가 천장에 달린 모빌을 보고 까르르 웃었다.
유모가 침을 질질 흘리는 아기의 입가를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줬다. 아인은 그림을 그리는 내내 침대 쪽으로 시선을 던져 루트비히를 확인했다.
“알렉, 언제 왔어요? 벌써 와도 돼요? 아직 일주일 안 됐는데?”
“응. 괜찮아. 이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어. 그 녀석이 알아서 이겨내야 할 차례야.”
알렉세이는 루트비히를 안기 전 손을 씻고 옷 또한 새로 갈아입었다. 볼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른 아기는 굉장한 우량아라 아인이 안아주기 힘들어할 정도였다.
알렉세이는 아인이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제왕절개를 제안했는데, 힐링 포션으로 아이를 꺼내자마자 바로 회복한 덕에 아인은 다행히 임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을 수 있었다.
만일 그냥 자연분만을 해야 했다면, 우리 루비를 낳느라 아인이 고생해서 둘째는 꿈도 못 꿨을 것 같다. 알렉세이가 안자마자 루트비히가 쩝쩝 입맛을 다셨다.
“알렉 들었어요? 루비가 아빠라고 했어요.”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지만, 자신의 황후님이 그렇다고 하니 오늘 아빠라고 들은 걸로 치기로 했다. 알렉세이는 흰 빵처럼 부푼 부드러운 아기 뺨에 입을 맞췄다.
아인이 임신했을 때 5kg이 쪘다고 뭐라 했는데 루트비히가 태어났을 때 몸무게가 6.2kg이었다. 엄청난 우량아는 배 속에서 오메가 아빠의 양분을 다 빼앗아 먹은 듯했다.
“으아앙앙앙. 으아앙앙.”
“루비, 배고파? 1시간 전에 분명 먹였는데 왜 또 배고파하지?”
아인이 알렉세이에게서 루트비히를 데려갔다. 아기가 무거워 팔을 부들부들 떨며 젖을 먹였다.
그만 먹여야 할 것 같은데 황실 유모가 우성 알파는 저 정도로 태어난다며 걱정 말라고 했다. 알렉세이도 그랬다니 믿기로 했다.
루트비히가 나중에 우성 오메가로 발현할 걸 아는 체사레만 페르디안 저택에서 서류를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호라이슨은 폭탄을 던져놓고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알렉세이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한 말이 믿기지 않았다. 정말 자신이 화염 능력자라고? 자신은 가이드였다. 언제나 손을 잡고 남편에게 가이딩을 해주지 않았는가.
그런데 정말 자신이 손을 잡았던 그는 가이딩을 받았던 걸까. 그가 알렉세이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호라이슨은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봤다.
금발과 금안을 가진 아인 페르디안의 모습이 보였다. 가위를 가져와 살짝 머리카락 끝을 잘랐다. 금색이었던 머리카락이 잘리자 은색이 되었다. 자신은 아무래도 세뇌에 걸린 듯했다.
이 세뇌를 건 존재는 그동안 자신의 에스퍼인 줄 알았던 델리칸 공작이겠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휩싸여 두 팔로 어깨를 감싼 채 울었다. 왜 그는 자신을 속인 걸까. 도대체 델리칸 공작은 누구이고?
알렉세이가 주고 간 물건들을 살폈다. 그레모리의 기회의 화살이었다. 아이템 능력을 살펴보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할 수 있게 용기를 주는 능력이 있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걸 왜 준 걸까. 버리려고 했다가 자신 같은 존재에게는 꼭 필요한 능력이지 싶어서 허탈하게 웃었다. 잠재 옵션으로 다산의 축복이 걸려 있었다. 종족이나 성별과 상관없이 임신 확률을 높여서 임신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었다.
알렉세이는 델리칸 공작이 베타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호라이슨은 그와 함께하는 내내 전혀 맡을 수 없는 페로몬을 떠올리며 텅 빈 웃음을 흘렸다. 그동안 그를 협박했던 화염 능력자를 찾아갔다.
알파는 호라이슨이 제 발로 찾아오자 좋아하며 옷을 벗기려고 들었다. 호라이슨은 알렉세이의 말을 믿고 불덩이를 상상했다.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손바닥에 불이 피어올랐다.
화염 에스퍼인 알파가 놀랐다. 호라이슨은 추운 날씨 탓에 방 어디에나 있는 난로에서 부지깽이를 꺼내와 그동안 자신을 협박했던 놈을 찔렀다.
“아악.”
살 타는 매캐한 냄새가 났다. 알파는 뜨거운 부지깽이에 찔려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배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막았으나 그는 죽고 말았다.
이렇게 쉽게 처리해 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니. 자신을 억압하고 괴롭힌 괴물은 사실 별거 아니었던 거다.
사냥하러 떠났던 델리칸 공작이 돌아왔다. 그가 잘 있었냐며 다정하게 호라이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냥을 하면서 능력을 사용했다며 가이딩을 해달라고 손을 잡았다.
호라이슨은 그의 거짓말을 들으며 그가 왜 자신을 이렇게까지 속이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봤자 그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델리칸 공작은 자신에게 잠자리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한 침대에서만 잠을 자는 부부 사이였다. 거짓 가이딩을 받은 그가 식사를 하자며 자신을 데리고 식당에 갔다. 오랜만에 순록을 잡아 왔다고, 내일 자신에게 블러드 푸딩이랑 고기를 먹게 해주겠다고 했다.
접시에 놓인 핏물 가득한 고기가 지겨웠다. 양송이수프와 감자샐러드가 먹고 싶다고 했다. 성 밖 주민들은 황송해하며 먹을 음식을 남편 잘 만나 성에서 아무것도 안 한 채 받아먹으면서 그런 말이나 했다.
델리칸 공작은 자신의 철없는 투정에 화내지 않았다. 그것들은 이 설원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식재료였다. 델리칸 공작은 알겠다고 했다. 그는 식사가 끝나고 바로 성을 나섰다.
남자는 양송이와 감자 한 부대를 짊어지고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식탁에는 양송이수프와 감자샐러드가 올라왔다. 왜 블러드 푸딩이랑 순록 고기가 없냐고 물었다.
“양송이와 감자 한 부대와 바꿨습니다. 아인, 다음에도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꼭 말씀해주세요. 당신이 먹고 싶은 게 생겼다니 기쁩니다.”
아, 이 남자 정말 상종 못 할 호구이구나.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괜히 제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식사를 다 하지도 않고 짜증 내며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알렉세이가 자신에게 주고 간 상자를 열어봤다.
아인 페르디안이 저술한 동화책이 한 권 있었다. 제목은 <핑키는 외로워>였다. 토끼 마을에서 가장 귀엽게 생긴 분홍색 토끼 핑키는 사랑스러운 외모와 달리 못된 토끼다. 하지만 핑키에게는 나쁜 토끼가 된 이유가 있다.
사실 핑키는 전생에 왕따 토끼 골든 보이였다. 그런데 자신과 달리 현생의 골든 보이가 사랑받으며 지내 질투심을 느끼고 못된 토끼가 된 거였다.
핑키는 아무리 골든 보이를 괴롭혀도 행복할 수 없었다. 전생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아무리 자신의 인기가 많아져도 다른 토끼를 믿지 못하고 외로울 뿐이다.
핑키 때문에 토끼 마을을 떠났던 골든 보이가 친구들을 데리고 돌아오면서 핑키의 입지가 좁아진다. 멋쟁이 토끼가 되어 돌아온 골든 보이에게 토끼 마을 친구들이 잘 보이고 싶어, 과거 그를 괴롭혔던 핑키를 추궁한다.
핑키는 괴로워하며 토끼 마을을 떠난다. 그런 핑키를 갈색 토끼 기브가 따라나선다. 기브는 핑키를 몹시 사랑했다. 기브는 핑키에게 나쁜 기억은 다 잊고 자신과 행복하게 살자며 청혼한다.
핑키는 기브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기브와 함께 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숲속에 오두막을 짓는다. 핑키가 그 오두막에서 기브와 아기 토끼를 낳고 알콩달콩 사는 것으로 동화는 끝을 맺는다.
동화책 사이에 이상한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 봉투가 굉장히 두툼했다.
「친애하는 아인에게
나는 지구에서 김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태어나서부터 부모에게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내가 있던 보육원 원장과 선생은 악마였습니다. 아이들끼리 싸움을 시켜서 서로를 증오하게 했고, 먹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물고문을 가했습니다.
나는 운 좋게도 마음씨 착한 부부에게 입양되었습니다. 그 지옥을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그들은 나를 한동안 아껴주었어요. 불임이었던 부부가 아이를 가지기 전까지요.
나는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임신 소식을 알게 된 부부는 나를 버리기 위해 보육원을 알아보더군요. 부부는 나 때문에 매일 밤 싸웠어요.
“저딴 걸 왜 데려왔어! 그러기에 내가 필요 없다고 했잖아!”
“당신도 아인이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착한 아이 같다며!”
“그거야 내 새끼 안 생길 줄 알고 그랬지.”
나는 혹이었습니다. 짐이었습니다. 부부는 나를 마트에서 장난감을 사는 것처럼 입양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있던 보육원은 아이를 파양하고 싶거든 부부에게 후원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습니다.
예상과 달리 반품이 힘든 장난감이었던 겁니다. 다른 보육원들도 아이를 버리는 비용을 원하더군요.
지구에서는 먹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때 처리비용이라는 걸 냅니다. 나 또한 버리기 위해선 그런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부부는 그 돈이 아까워 나를 그냥 키우기로 합니다. 주변에도 입양을 했다고 실컷 떠들어댄 탓에 남 보기에 안 좋겠다 싶었겠죠.
동생이 태어났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이였어요. 그러나 부부는 나를 시종처럼 부렸습니다. 무시하고 혼내고 다그치고 때렸습니다. 내 동생 또한 부부를 보고 배워 나를 함부로 대했습니다.
나는 그 집안에서 어떻게든 사랑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학교에 가도 고아라면서 친구들이 따돌렸습니다. 날 거지라고 욕했고, 교과서를 찢었고, 신발을 쓰레기 소각장에 버려서 맨발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나는 힘든 유년기를 버티고 스무 살이 되었습니다. 부부는 나에게 키워준 대가로 돈을 내놓으라며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적금 통장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대학교 등록금이었고, 저는 절대 내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난 세상으로 홀로 나왔습니다.
웹툰이라는 걸 그렸습니다. 내가 보낸 동화책을 그리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무명이었습니다. 세상은 나를 개미처럼 여기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도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나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트럭에 치여서 죽었는데 어린아이 몸에서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젊은 부부가 나를 자기 아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내 양부모에 비하면 아주 상냥하고 착한 분들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사랑받고자 노력했어요. 친자식이란 노력을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이더군요.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 없어서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물론 아인 페르디안으로 사는 게 마냥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기디언 백작이 저를 끌고 가 나쁜 짓을 하려고 했던 사건은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나는 다행히 아빠에게 구해질 수 있었습니다.
아빠는 날 위해 그를 죽이고 1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원망하는 대신 절 구했다고 기뻐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 이렇게나 사랑해주는 착하고 다정한 아빠가 왜 당신과는 사이가 나빴을까.
모두가 거짓말이라고 여겼던 당신의 말을 진실이라고 가정해봤습니다. 정말 당신이 어떠한 일을 겪었고, 그 범인을 아빠라고 오해했던 거라면 나는 당신이 저지른 모든 행동이 비난받아야 하는 게 아니라 위로받아야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더 이상 아빠에 대한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우리의 아빠는 절대 그럴 존재가 아닙니다. 기디언 백작이 어쩌면 당신을 해한 범인이었을지 모릅니다. 나에게 미수로 그쳤던 그 사건이 당신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겠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호라이슨은 샤를을 아직까지 원망하고 있었고, 그가 범인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인은 기디언 백작을 언급했다. 호라이슨은 강력한 원망과 저주로 눈앞을 가리고 있던 눈가리개를 풀고 생각해 봤다.
아인이 기디언 백작을 만났던 생일날이 바로 자신의 모든 비극이 시작된 그날이었음을 깨달았다. 호라이슨은 전생에서 애먼 사람을 붙잡고 괴롭혔던 거였다.
「아빠는 정말 억울했기에 당신을 차갑게 대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당신은 엄마가 죽은 걸 아빠가 화풀이한 거라고 믿었지만, 그날 가장 죄책감에 시달렸던 존재가 당신이기에 그렇게 믿었던 게 아닐까 감히 그 마음을 헤아려 봤습니다.」
호라이슨은 너무 괴로워서 아인의 편지를 계속 읽기 힘들었다. 한참 숨을 가다듬기도 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도 한 후, 마음이 진정되었을 때 다시 편지를 펼쳤다.
「아빠는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들의 모함을 받고 더 크게 화났고, 배신감을 느꼈을 겁니다. 당신은 사랑받은 아들이었어요. 이런 이야기가 이제 와 무슨 소용이 있고, 위로가 될까 하지만요.
그렇지만 아인, 이만 받아들이세요. 우리를 괴롭힌 괴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괴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해요. 나는 내 괴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그 괴물의 이름은 기디언도, 샤를도, 알렉세이도 아닙니다. 당신을 괴롭게 하는 존재는 이제 당신 자신밖에 없어요. 잔인한 말이겠지만 말이에요.
제 말이 당신 귀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어요.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지껄이냐 화났습니까? 많이 재수 없었을까요? 그렇다면 보란 듯이 잘 살아주세요. 나 또한 그리 지낼 터이니.
당신의 아인으로부터.」
아인의 괴물은 보육원 원장이고, 양부모이고, 동생이고, 학교 친구들일 거다. 호라이슨은 그동안 자신이 붙잡고 놓지 못했던 기억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호라이슨은 편지를 접어서 다시 동화책 사이에 껴놓았다. 동화책을 다시 서랍에 넣고 닫았을 때, 델리칸 공작이 침실로 들어왔다.
벽에 걸린 거울 속 델리칸 공작은 더 이상 알렉세이가 아니었다. 그는 주다 에르펜서였다. 그가 백색 탑에서 자신에게 걸었던 세뇌가 무엇인지 떠올랐다.
‘이제부터 저는 알렉세이입니다. 당신은 아인 페르디안이고요. 알렉세이는 2황자와의 황위 경쟁에서 진 패배자입니다. 새로운 황제는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다. 우리가 황군으로부터 도망치는 이유는 숙청을 당하기 않기 위함이죠.’
너는 내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기사였던 너는 편하게 황궁에 머물 수도 있는데 모든 걸 버리고 나를 택했다.
‘기간은 당신이 날 사랑할 때까지.’
네가 이 조건을 걸었을 때, 무슨 심정이었을지 감히 헤아려 본다. 나에 대한 너의 사랑은 비참함이었다. 호라이슨은 거울 속 주다의 얼굴을 보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델리칸 공작, 아니 주다가 놀라서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아인.”
“내 이름은 아인이 아니야.”
“….”
“호라이슨이야.”
주다의 눈이 부릅떠졌다. 세뇌가 풀렸다는 건 호라이슨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주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을 틀어막은 그는 기쁨의 눈물을 조용히 쏟아냈다.
“주다. 비록 내가 너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계속 날 좋아해줄래?”
“예. 호라이슨. 당신께서 한 번도 저에게 좋은 사람인 적 없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사랑하겠습니다.”
호라이슨은 아무리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되짚어서 나쁜 놈이라 말한 주다 때문에 심통이 났다. 얄미워서 발을 꾹 밟았다. 호라이슨의 성격 나쁜 행동에도 주다는 행복해서 웃었다.
호라이슨도 뭐 이런 바보 같은 놈이 다 있나 싶어서 웃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곁에서 그 모진 일들을 겪고도 계속 자신을 좋아해주는 거겠지 싶다.
“주다, 이거 볼래? 얼마 전에 알렉세이가 와서 나한테 아이템 하나를 주고 갔는데….”
호라이슨은 주다에게 그레모리의 기회의 화살을 보여줬다.
“이거 사용하면 베타의 아이도 임신할 수 있겠더라고. 우리 아이 가질래?”
주다가 얼른 침대로 뛰어가 어서 오라며 손짓했다. 호라이슨은 웃으면서 아이템을 자신의 손바닥에 찔렀다. 화살은 하얀 빛이 되어 사라졌다.
왜 고백을 돕는 능력을 가졌는데 기회의 화살이란 이름인지 알겠다. 호라이슨은 자신에게 행복해질 기회를 주고 간 알렉세이를 이만 마음속에서 놔주기로 했다.
“사랑해. 주다.”
아이템의 효과로 인해 사랑하는 남자에게 고백하게 되었다. 주다가 그런 호라이슨에게 입을 맞췄다.
“저도 사랑합니다. 호라이슨.”
지옥에서 탈출한 호라이슨은 하얀 꽃밭처럼 아름다운 설원에 세워진 성에서 자신의 갈색 토끼와 아이를 낳고 오순도순 행복하기 살기로 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아이를 무사히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디디 외전) 하늘을 날고 싶어
뭐든지 어중간한 게 문제다. 이왕 에스퍼일 거면 A급이면 얼마나 좋을까. 뭐. 모든 에스퍼들이 그렇게 생각할 거다.
디디는 C급 물리계 에스퍼였다. 흔한 등급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절망할 정도는 아니긴 했다. 그렇지만 가진 능력이 매우 하찮은 게 디디가 엘프 마을을 떠나 자신을 가이드로 만들어줄 이를 찾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디디는 나뭇잎만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이건 숲에 사는 엘프에게 매우 편리한 능력이긴 했다. 아침마다 집 앞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쉽게 치울 수 있으니 말이다.
간혹 마을 사람들에게 의뢰비를 받고 가을이면 마당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것밖에는 썩 좋은 게 없었다. 그런 주제에 에스퍼랍시고 능력을 사용하는 족족 에테르는 오염되어서 가이딩을 받아야 했다.
항상 엘프 마을에는 에스퍼보다 가이드가 적어서 가이딩을 받으려면 엄청난 경쟁률을 뚫어야 했다. 돈도 많이 들고, 잠깐 손잡아주는 주제에 비위까지 맞춰줘야 하니 그냥 이딴 쓸데없는 능력은 버리고 자신이 가이드가 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자신의 생각을 들은 친구들이 비웃었다.
“푸하하하. 에스퍼가 가이드가 되는 건 인간만 가능한 거라고.”
“왜 엘프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아직까지 엘프 중에서 스카이 워커가 나오지 않았지만, 그건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고작 가이드들 비위 맞춰주기 싫어서 가이드 될 생각이나 하냐? 한심하긴.”
“너는 매칭 가이드가 있으니까 그런 소리 할 수 있는 거지.”
디디는 매칭 가이드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엘프 마을의 모든 가이드가 매칭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새롭게 태어난 엘프가 가이드로 각성하길 기다려야 했다.
디디 또래의 에스퍼들은 치열한 구애로 어린 가이드들을 사로잡았다. 유일하게 매칭을 하지 않은 가이드가 두 명 있었지만, 디디는 절대 그들과 페어를 맺고 싶지 않았다.
한 명은 엘린시아라고 아주 지독한 입 냄새가 나는 빨간 머리였다. 디디만 보면 가이드를 해준다며 키스를 하려고 들었다.
디디는 엘렌시아에게 입 냄새에 좋은 약초를 선물해 봤지만 그 새끼는 그것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주둥이만 들이댔다. 정말 짜증 나 죽을 것 같은 녀석이었다.
두 번째는 고티엔이었다. 고티엔은 우오거와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엘프였다. 키가 3m나 되는데 디디의 구멍에 자지를 넣고 싶어 했다. 물론 에스퍼와 가이드가 가이딩을 하다 보면 섹스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고티엔의 자지는 디디의 다리보다 굵었다.
디디는 마을에 남은 두 가이드 중 한 명과 페어를 맺느니 차라리 가이드가 되겠다 마음먹었다. 가이드가 되면 시한부 환자처럼 마음 졸이며 살지 않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단 말인가.
폴이 디디를 비웃으며 대충 맞춰서 살라고 했다. 고티엔은 자신이 봐도 살짝 너한테 무리 같으니, 엘렌시아를 선택하라는 조언까지 했다.
“입 냄새 그까짓 거 지내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키스 안 하고 섹스만 하자고 해.”
“미쳤냐! 내가 왜 그 새끼랑 섹스를 해. 그냥 손만 잡을 거야.”
조안이 혀를 쯧쯧 찼다. 디디를 잡아먹겠다며 두 가이드가 벼르고 있으니 조심하란다. 디디는 이게 다 엘프 마을에 에스퍼밖에 없어서 그런 거라며 짜증 냈다. 다들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데 아이까지 안 낳으니까 디디처럼 젊은 엘프가 고통받는 거였다.
친구들과 느티나무 밑에서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 디미트리가 이리 와 앉아 보라고 했다.
“디디, 너도 이제 나이도 있는데 가이드를 정해 정착해야 할 거 아니야. 언제까지 그렇게 헤프게 살 거냐.”
“헤프게 살다니요. 아버지. 저는 아직 그 상종하기도 싫은 가이드 둘이랑 손밖에 안 잡아봤어요. 방금 한 말 취소해주세요.”
“크흠. 뭐 그래. 아무튼 결혼해라.”
“네?”
갑자기 무슨 결혼 타령이란 말인가. 자신이 연인을 데려온 것도 아니고, 누구를 만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고티엔이 네가 참 마음에 든다고 하더구나.”
“…아버지, 노망나셨어요?”
“그게 아버지한테 할 소리냐! 닥치고 내일 고티엔이 와서 청혼할 테니까 짐 챙겨서 집 나가.”
“설마 또 노름했어요? 심심하면 노름 말고 밭이나 갈라고 했잖아요. 아니, 노름도 잘하면 몰라. 자꾸 돈을 잃는데 왜 하는 거래.”
디디는 이놈의 집구석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엘프들은 오래 사는 만큼 할 게 없어서 마약이나 노름에 중독되어 살았다. 디디의 아버지 디미트리는 노름에 중독된 경우였다.
남의 집 아버지들은 노름을 하면 돈 따서 부자가 되던데, 디미트리는 백 번 게임에 참가하면 한 번 이기는 똥손이었다. 디디는 눈에 보이는 대로 가방에 처넣었다.
“너! 너 뭐 하는 거야. 얼른 그만두지 못해.”
“이젠 아버지랑 더 이상 같이 못 살아요. 난 알아서 살 테니까 아버지 똥은 아버지가 치워요.”
가방에 닥치는 대로 넣다 보니 쓸데없는 것들만 담아버렸지만, 디디는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집을 나와 버렸다. 디미트리가 달려 나와서 애원했다.
“디디, 한 번만 봐줘라. 눈 딱 감고 고티엔이랑 결혼하기만 하면 돼. 다시는 노름 안 하마. 밭에 당근이랑 너 좋아하는 양배추도 심을게.”
워낙 작은 엘프 마을이었다. 당연히 한 집에서 소란이 생기면 다 알 수밖에 없었다. 디디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디미트리를 따돌리고자 나뭇잎들을 움직여 장막을 펼쳤다.
망할 아버지. 그러니까 어머니가 인간이랑 바람나서 도망가지.
디디는 일단 인간 마을에 가서 어머니를 찾아보기로 했다. 어머니 집에 머물면서 자신을 가이드로 만들어줄 에스퍼를 찾으면 될 것 같았다. 룰루랄라 산에서 내려왔다. 한참 걸어서 인간 마을에 도착했다.
엘프 마을과 달리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어머니를 찾나 싶었다. 그냥 길 가던 사람을 붙잡고 자신이랑 비슷하게 생긴 엘프 못 봤냐고 물어봤다.
“하 참. 웃기는 소리를 하네. 차라리 나한테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아달라고 해. 에잇!”
남자가 신경질을 내며 디디의 손을 뿌리쳤다. 왜 저래? 미쳤나? 인간은 엘프들과 달리 쉽게 화를 내는 듯싶었다.
몇몇 인간들을 붙잡고 물어봤지만 다들 벌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모른다며 다급하게 가버렸다. 생각과 달리 인간 세상에서 살기가 쉽지 않겠다 싶었다.
디디는 산을 타고 내려와 배고팠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딜리셔스’라는 특이한 상호명을 가진 음식점에 들어가서 테이블에 앉았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 때문에 귀가 아팠지만 메뉴판에 있는 과일 메뉴를 싹 다 시켰다.
검은 양복을 입은 종업원이 물었다.
“술은 뭐로 가져다드릴까요?”
“됐습니다. 식사만 할 거예요.”
종업이 뭐 이런 엘프가 다 있냐는 듯 어이없어했다. 디디는 술을 강매하는 불친절한 식당에 잘못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서 몸을 비비며 춤을 췄다. 참 엘프나 인간이나 노는 걸 좋아했다. 디디는 테이블마다 앉아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는 인간들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저럴 시간 있으면 밭에 토마토나 심을 것이지.
“안녕, 예쁜이. 혹시 혼자 왔어? 우리 합석할까?”
야하게 가슴이 파인 옷을 입은 남자가 술병을 들고 디디의 맞은편에 앉았다. 발정기를 맞이한 인간인 듯싶었다.
“저기 자리가 많은데 굳이 왜 저랑 합석하시려고 해요?”
“하하하. 너 엄청 재미있다.”
“저는 재미없는데요? 저리 비키세요. 저 밥 먹어야 합니다.”
“으하하하하. 밥 먹는대. 아, 나 죽겠다.”
남자가 소파에 엎어져서 박장대소했다. 종업인이 마침 예쁘게 깎은 과일을 내왔다. 디디는 손으로 사과를 집어 먹었다. 토끼 모양으로 자르니까 모양도 예쁘고 맛도 더 있는 것 같았다. 다음에도 자신도 토끼 모양으로 사과를 깎아야겠다.
미친 남자가 뭐라 하든 말든 디디는 듣지 않았다. 토끼처럼 귀가 길어서 듣고 싶지 않아도 너무나 잘 들렸지만 미친 것들한테는 무시가 답이었다. 배불리 식사를 하고 계산서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서 계산을 해야 하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니까 자신에게 과일을 가져다준 종업원이 달려왔다.
“벌써 가시게요?”
“네.”
“즐거운 시간 되셨나요?”
“아니요. 식당 안이 너무 시끄러워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더군요.”
뭐 이런 엘프가 다 있나, 하는 표정을 종업원이 또 지었다. 그래도 직업 정신이 투철한 직원이어서 얼른 표정을 바꿨다. 엘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변화여서 디디는 신기하기만 했다.
“12실버입니다.”
디디는 빨리 계산하라며 동전을 건넸다.
“지금 장난하나. 너 돈 없지!”
갑자기 종업원이 디디의 멱살을 붙잡았다. 디디는 겁에 질려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여기 돈 있잖아요.”
“이게 무슨 돈이야!”
엘프 마을에서 사용하는 돈을 인간이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잔뜩 화난 종업원이 디디를 끌고 어딘가로 데려갔다. 오우거처럼 덩치가 큰 남자들이 나타나서 디디를 방에 가두고 못 나가게 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인신매매? 뭐 그런 것 같았다. 인간은 엘프를 납치해서 다른 사람에게 파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다. 그렇게 팔려 간 엘프들은 귀중하게 모셔지며 비단옷을 입고 보석을 두른다고 들었다.
디디는 별로 걱정할 거 없겠다 싶어서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 자신의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밖에서 잠긴 문을 열고 남자가 들어왔다. 아까 자신의 테이블에 앉으려고 했던 발정기를 맞이한 남자였다.
“이야. 우리 또 보네.”
“안녕.”
“어라? 눈치 따위 개나 줘버린 줄 알았는데 상황 파악이 되나 보지? 나한테 잘 보이려고 인사한 거야? 예쁜이?”
“사람은 개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아닌가 봐. 개소리 좀 하지 마.”
갑자기 눈앞에 번쩍 별이 날아갔다. 알파가 디디의 뺨을 때린 거였다.
“…왜 때려.”
“왜긴. 엘프들이 어떻게 사는지 몰라도 인간들은 처먹었으면 돈을 내야 해. 그런데 네가 돈이 없으니까 대가를 치러야 할 거 아니야.”
남자가 디디의 멱살을 잡았다.
“도망갈 생각 하기만 해. 확 그 귀 잘라서 개한테 던져줄 테니까. 릴, 앞으로 우리 가게에서 일할 엘프니까 데려가서 교육시켜.”
디디의 테이블을 담당하던 종업원이 달려와 허리를 깊게 숙였다.
“넵. 사장님.”
“야, 인간. 나 이제 여기서 일해서 과일값 갚을 거니까 너한테 맞을 필요 없는 거네?”
디디는 남자의 뺨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남자가 살벌하게 디디를 노려봤다.
“노려보지 마. 그렇게 안 봐도 너 나한테 반한 거 아니까.”
“풋. 역시 재미있어. 너.”
“넌 재수 없으니까 입 닥치고 있어.”
디디는 릴에게 어서 가자고 했다. 릴이 헐레벌떡 디디의 뒤를 쫓았다. 디디는 더러운 직원 숙소를 안내받았다.
릴은 디디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줬다. 디디는 그렇게 인간 세상에 나온 첫날, 무도회장의 종업원이 되었다.
***
12실버를 벌기 위해 디디는 일주일 동안 무도회장을 돌아다니며 서빙하였다. 그런데 발정기를 맞이한 인간들이 엘프 종업원을 보고 엉덩이를 한 번씩 툭툭 쳐댔다.
디디는 참지 않았다. 주먹으로 손님의 대가리를 날려버렸다. 사장놈이 디디를 불러서 지랄했다. 너 때문에 합의금 물어줬다며 디디 앞으로 빚을 달았다.
어영부영 무도회장에서 일한 지 벌써 1년째. 인간들에게는 엄청난 기간일지 모르겠으나 엘프인 디디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장놈이 대걸레질을 하고 있는 디디에게 다가와 엘프들은 다 너 같으냐고 물었다. 디디는 엘프 마을에 있던 엘프들을 떠올렸다. 다들 디디처럼 귀가 뾰족하긴 했다.
“네. 그런데요.”
“하… 됐다. 너랑 무슨 말을 하냐.”
그러고 보니 하루에 열 번씩 사장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무도회장이 이렇게 넓은데 자꾸 얼굴을 보게 되는 걸 보면 사장도 참 할 것 없는 새끼인 것 같았다. 대걸레로 메인홀을 다 닦은 디디는 화장실 청소를 하기 위해 이동했다.
레몬으로 화장실 타일을 문질러야 곰팡이가 지워졌다. 주방에서 쓰고 남은 레몬 껍질을 모아둔 통을 열었다. 레몬을 바닥에 던져서 발로 밟고 화장실 타일에 비볐다. 대충 발로 문지르다 보면 청소가 끝났다.
“야! 너 청소 똑바로 안 해!”
“아, 진상 새끼. 진짜 졸졸 따라다니면서 지랄하는 것 좀 봐.”
엘프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종족이었다. 가끔씩 디디는 자신의 주둥이에 생긴 문제가 종족 탓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이다.
“나 사장이다. 네 고용주라고. 말 좀 함부로 하지 마. 너 생긴 건 그렇게 예뻐서 도도하게 굴면 내가 더 반할 줄 알고 그러나 본데 어림없어.”
사장의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디디를 힐끔거리는 눈동자가 초롱초롱했다. 쯧쯧. 1년 동안이나 발정기를 유지하는 인간 사장을 보며 혀를 찼다. 사장의 앞섶이 두툼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바닥에서 더러워진 레몬 껍질을 쓰레받기에 빗자루로 쓸어 담았다. 바퀴가 달린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고 청소 카트를 밀고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복도를 물걸레로 문지르고 있는데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배고플 때는 먹어야 했다. 청소 도구를 버리고 주방으로 향했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감자를 까고 있던 한슨이 벌떡 일어나 식품 보관함 앞을 막았다. 디디는 한슨을 밀치고 사과를 다섯 개 꺼냈다.
“디디! 가게 음식 좀 그만 먹어. 너 그러다가 영원히 여기 묶여 살면 어쩌려고 그래.”
한슨의 말은 지당했다. 디디는 손에 든 사과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가게에서 사용하는 사과는 맛있지만 매우 비싼 거였다. 이걸 먹으면 디디는 빚이 늘었다. 그런데 직원 식당에 가면 맛없는 고기가 나왔다. 그걸 먹으면 빚이 안 늘었다.
디디는 사과 다섯 개 중 한 개만 먹기로 했다. 한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나도 모른다. 어차피 사장이 너 좋아하잖아. 빚 따위 안 갚겠다면서 확 덮쳐 버려.”
사과를 토끼 모양으로 깎던 디디는 한슨이 말하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빚은 청소를 해야 없앨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또 다른 방법이 있는 거였어?”
한슨이 이런 순진한 엘프에게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한 건가 싶어 했다. 디디는 한슨을 졸라서 또 다른 빚 청산 방법을 알아냈다.
그동안 디디가 깬 고가의 접시와 성희롱한 인간을 때리고 지불한 합의금, 가이딩 비용으로 생긴 빚이 사장과 자면 사라진다고 했다.
“왜 사장하고 자면 내 빚이 사라지는 거야?”
“사장님이 널 좋아하잖아. 이 바보 엘프야. 사장님이랑 자면 넌 이 무도회장의 안주인이 되는 거라고.”
디디는 무도회장의 안주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매일 노름에서 지는 아버지 때문에 짜증 나서 인간과 바람난 어머니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인간 마을에 머물면서 자신을 가이드로 만들어줄 에스퍼도 찾아야 했다. 참 바빴다.
물론 지난 1년 동안 디디가 이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건 없었다. 엘프들의 시간은 너무 느리게 흘렀다. 한 10년 정도 후에 어머니를 찾으러 가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렀다. 디디는 어느새 ‘딜리셔스’의 총지배인이 되어 있었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빠른지 고작 10년 사이에 마을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무도회장은 아무도 찾지 않는 폐물이 되어 버렸다.
엘프 때깔을 벗지 못해 모난 돌이었던 디디는 이제 인간들과 융화되어 잘 지냈다. 사장이 디디에게 물었다.
“디디. 사실 나 너 좋아해. 내가 가볍게 행동해서 믿음직스럽지 못했겠지만, 사실 너한테 떨리는 마음이 창피해서 숨기려고 그랬던 거야. 제발 이제 내 마음 좀 받아주면 안 돼?”
디디는 사실 사장의 이름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사장은 그냥 사장으로 불러도 되는 존재였기에 굳이 이름을 알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관심이 가지 않는 인간일 뿐이었다.
“죄송해요. 사장님. 전 사장님한테 관심 없어요.”
“무려 10년 동안이나 밀당하고 사람 피 말려놓고서 그냥 거절만 하면 되는 줄 알아? 이렇게 된 거 힘으로라도 널 갖겠어.”
사장이 디디를 덮치려고 했다. 디디는 겨우 C급 허접쓰레기일라도 에스퍼였다. 사장놈을 쥐어 팼다. 사장이 어흑흑 서글프게 울었다.
“사랑해! 사랑한다고!”
디디는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사장이 자신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고, 수명도 짧은데 10년 동안 결혼도 하지 않고,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자신에게 빚을 지워서 이곳에 머물게 하는지.
그 모든 걸 알게 되면 그땐 자신도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고, 용사 헤더처럼 스카이 워커가 될 수 있는 걸까. 어쨌든 사장이 자신의 에스퍼가 아닌 건 확실했다.
디디는 무도회장 ‘딜리셔스’를 빠져나왔다. 어차피 이쯤 해서 어머니를 찾으러 가려고 했다.
이제 디디는 길을 가는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자신처럼 생긴 엘프가 어디 있는지 묻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그냥 돈을 들고 정보 길드를 가면 됐다.
10년 동안 모아둔 월급을 몽땅 의뢰비로 지불했다. 인간 사회에서는 역시 돈이 최고였다. 어머니는 제르 마을에서 약제사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바로 어머니를 찾아갔다.
하늘을 지붕 삼아 먹고 자며 유르한 제국의 최남단에 있는 제르 마을에 도착했다. 어머니가 일하는 약방에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앉아 있었다.
“돌로시아. 아까 나간다더니 언제 돌아왔어요.”
노인이 디디를 어머니 이름으로 불렀다. 아마 그들이 몹시 흡사하게 생겨서 착각한 것 같았다. 디디는 제대로 찾아왔구나 싶어 약방 안에 털썩 앉았다.
“안녕하세요. 돌로시아를 만나러 왔는데 혹시 그녀는 언제 돌아올까요?”
“아… 네가 디디구나.”
노인은 디디를 아는 듯했다. 다리를 쩔뚝거리면서도 약방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며 불안해했다. 디디는 이 노인이 50년 전 어머니가 자신과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게 한 인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주름진 피부와 얼굴 곳곳에 피어난 검버섯이 추악했다. 머리카락은 새하얗게 세었는데, 그것마저 잔뜩 빠져 두피가 훤히 보였다. 이렇게나 못생기고 볼품없고 초라한 남자 때문에 가족을 버린 어머니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디디는 괜찮았다. 어차피 인간은 오래 살지 못하고 어머니는 혼자가 될 테니까. 자신과 아버지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기에 마냥 기다리기로 했다. 노인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으흐흑흑.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그녀가 없으면 살 수 없어요.”
노인이 연골이 다 닳아 불편한 다리로 디디에게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디디는 왜 저러나 싶었다. 인간에게는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엘프 마을을 떠난 어머니가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느껴지나 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차피 찰나다. 한순간 인간과 나들이를 떠난 것뿐이다. 그녀와 자신과 아버지가 살아갈 날은 아직도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디디는 그 대수롭지 않은 일 때문에 인간이 자신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괜찮아요. 다리도 불편한 것 같은데 이만 일어나요.”
“돌로시아가 당신을 버린 뒤 얼마나 슬퍼했는지 모릅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미안해했나 싶었다. 어차피 인간이 죽고 엘프 마을로 돌아올 거면서.
“당신! 왜 그러고 있어요.”
외출을 나갔던 어머니가 돌아와서 무릎 꿇은 노인을 발견했다. 디디가 대단한 악당인 양 뺨을 때렸다. 어이없었다. 자신이 꿇으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저 노인이 미안하다며 알아서 꿇은 거였다.
노인이 돌로시아를 꼭 끌어안으며 울었다. 디디는 이 촌극을 계속 지켜보기 껄끄러웠다.
“미안해요. 돌로시아. 그렇지만 나는 그대를 보내지 못해요.”
“내가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요. 당신이랑 같이 죽을 거라니까.”
어머니가 비위 좋게 노인의 검버섯 위에 키스했다. 디디는 그녀가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신기하기만 했다.
“돌아가. 디디, 난 너랑 돌아가지 않을 거야.”
디디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조만간 엘프 마을로 돌아올 것이다.
“억! 윽.”
숨을 헐떡이며 울던 노인이 가슴을 손으로 부여잡았다. 자식과 남편을 버리고 자신과 야반도주한 엘프 연인이 이대로 자신을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은 오늘내일하는 노인이 견디기에는 큰 충격이었다.
허무하게도 노인이 죽어 버렸다. 디디는 이제 다 끝났구나 싶었다. 어머니와 함께 돌아가려고 그녀를 보는 순간, 그녀가 피를 토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쿨럭.”
“설마… 인간 따위랑 본딩한 거야? 얼마 살지도 못하는 인간한테 왜 그런 짓을 했어!”
디디는 다급하게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어머니가 영원히 자신과 아버지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실감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노인을 끌어안은 채 쓰러진 어머니가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사랑하니까.”
“…흡. 흑. 어머니… 어머니… 죽지 마.”
디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엘프도 죽는다는 걸 알아 버렸다. 죽음이란 굉장히 슬픈 일 같았다.
“사랑하니까 다 버릴 수 있었어. 디디, 미안하다.”
결국 인간에게 본딩한 어머니는 죽어 버렸다. 디디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다들 이러는 걸까.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절대 가이드가 되겠다는 바람 따위 마음속에 품지 않았을 거다.
디디가 본 사랑은 굉장히 어리석고 합리적이지 못했다. 소모적이며 손해가 막심한 잘못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자기 연인과 죽음을 함께하는 순간을 보고 말았다.
그녀의 사랑은 엄청난 호기심을 자극해버렸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디디는 10년만 더 인간 사회에 머물기로 했다. 어머니와 노인이 운영하던 약방을 디디가 물려받아서 약제사로 살았다.
100년도 아닌 고작 10년이었다. 그사이에 디디는 자신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보지 않았다. 그런 디디 앞에 레이나가 나타났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디디에게 매달리며 자기 아기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디디는 그녀를 따라 페르디안 백작저로 향했다.
***
그녀의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무려 S급 가이드였다. 디디는 계속 우는 아기를 달래기 위해 입에 손가락을 물렸다.
아인은 빠르게 자랐다.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을 디디는 처음 보았다. 그건 몹시 신비로운 일이었다. 엘프는 그렇게 빠르게 나이를 먹지 않았다.
땅에 씨앗을 심으면, 새싹이 나오고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자연의 섭리가 인간의 생에 집약되어 있었다.
제 목을 가누지도 못하던 아기가 어느새 뒤집기를 했다. 그러더니 기었다. 참 빠르다 싶었는데 어느새 걷고 있었다. 디디는 그 모든 순간이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 아쉬웠다.
갓난아기일 때는 천장에 달린 모빌이 돌아가는 것만 봐도 호기심 때문에 만지려고 들더니만, 말을 할 줄 아는 어린이가 되니 소심하고 겁이 많아졌다. 디디는 그게 꼭 모자란 제 탓 같았다.
만일 디디가 S급 에스퍼였다면 아인은 아무런 악몽 없이 밝은 아이로 자라날 수 있었을 거다. 아이의 내면에 자리한 닉스는 디디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컸다.
아인은 입을 닫고 혼자 웅크려서 지냈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상처받고, 타인을 자기 세계에 들이지 못한 채 배척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닉스 중독 현상이었다.
에스퍼가 에테르 오염으로 신체적 고통을 받는다면, 가이드들은 정신적인 문제로 고통을 받았다. 레이나에게 S급 에스퍼인 알렉세이 유르한을 만나게 해주는 게 어떻겠느냐 제안했다.
레이나는 울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화냈다. 평범한 베타 여인인 레이나는 가이드를 함부로 몸을 굴리는 남창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반면 샤를은 진지하게 디디의 제안을 고민해 보겠다고 했다.
***
아인이 이른 나이에 우성 오메가로 발현했다. 열병을 앓고 일어난 아이는 놀랍게도 밝은 성격으로 변해 있었다. 디디는 그런 아인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이전과 뭐가 달라졌는지 알아냈다.
성격이 밝아진 아인은 종이만 보이면 일단 연필로 뭔가 그렸다. 화가는 그림에 자기 혼을 담는다고 하더니만 그래서 성격이 밝아진 것일지도 모른다.
아인이 그림을 완성할 때마다 페로몬과 함께 닉스가 빠져나가 그림에 담겼다. 디디는 레이나에게 자신이 알아낸 바를 말하며 아인의 생일에 스케치북을 선물해주라고 했다.
생일날 아인은 스케치북을 선물 받고 몹시 기뻐했다. 디디는 기뻐하는 아인을 보면서 행복해졌다. 그리고 오늘같이 좋은 날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엄청난 사고가 일어났다. 나쁜 알파가 아인을 납치해 가려다가 붙잡혔다. 샤를이 나쁜 알파를 끌고 가서 죽였다.
샤를은 인간의 법에 따라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귀족을 죽이는 것은 아무리 같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죄란다.
엘프 마을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디디는 인간들과 어울려 지낸 지 벌써 30년째였지만 아직도 인간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인간들은 약한 자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야 하는 법을 기득권층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써먹을까.
레이나는 아인을 홀로 키우게 되었다. 샤를이 없어 S급 에스퍼인 알렉세이에게 아인을 소개시켜주기로 한 일은 무산되었다. 디디는 이렇게까지 오래 페르디안 백작저에 머물 생각이 없었지만, 아인이 성장하는 모습이 신기해 좀 더 머물기로 했다.
그렇게 디디는 페르디안 백작저에 무려 20년 동안이나 머물게 되었다.
꼬맹이였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던 아인은 이제 유르한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디디는 아인의 그림이 좋았다. 아인은 자기가 보는 방식으로 자연을 묘사했고, 그건 엘프의 사상과 비슷했다.
인간은 절대 나뭇잎에 감정이 없다고 여겼지만, 아인은 나뭇잎에 감정을 담을 줄 아는 화가였다. 디디는 아인이 잠들 때마다 방에 몰래 들어가 입에 손가락을 물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인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잤다. 디디가 이불을 내리고 입에 손가락을 넣어서 닉스를 빼가려고 하니까, 잠든 줄 알았던 아인이 일어났다.
“디디. 자꾸 장난치지 마요.”
디디는 더 이상 아인의 닉스를 몰래 가져갈 수 없겠구나 싶었다. 레이나는 페르디안 가문에 벌어진 비극 이후, 아인을 더욱 꼭꼭 숨기고 보호하려고 들었기 때문에 아직도 아인이 알렉세이를 만나지 못했는데, 큰일이었다.
디디는 생각했다. 아무런 지위도 없는 엘프가 1황자인 알렉세이를 만날 수 있는 방도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회해서 접근하면 될 듯싶었다. 알렉세이에게는 이사벨라라는 고모가 있었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디디는 정보 길드를 찾아갔다. 돈만 있으면 인간 사회에서 알아내지 못할 정보란 없었다. 인간들은 참 돈을 좋아했다.
이사벨라는 제나 쿠키를 좋아해서 자주 가게를 들른다고 했다. 디디는 매일 제나 쿠키 가게에 가서 매장 안에 죽치고 있었다. 엘프인 그는 매우 눈에 띄는 존재였다.
이사벨라가 먼저 디디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매우 호감 가는 성격이었다. 디디는 이런 인간의 조카라면 알렉세이 또한 좋은 인간이겠구나 싶어서 안심됐다. 아인과 알렉세이를 이어주기 위해 그녀에게 아인 페르디안의 전시회 티켓을 두 장 선물해줬다.
이사벨라가 매우 기뻐했다. 디디는 조카와 함께 가보라고 은근슬쩍 말을 얹었다. 그녀가 이 티켓으로 알렉세이와 전시회에 가게 된다면, 알렉세이는 드디어 자기 가이드를 만나게 될 테고 아니라면 자기 팔자인 거였다.
디디는 임무를 완수했기에 더 이상 제나 쿠키를 사기 위해 가게에 가지 않았다. 알렉세이가 아인을 찾아 페르디안 백작저로 쳐들어왔다. 이거 참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샤를과 레이나는 아인을 보호하겠다며 야반도주를 하려고 했다. 저택을 버리고 간다기에 디디는 자신한테 달라고 했다. 어차피 저들이 돌아올 것임을 알아서 잠시 맡아주기 위함이었다.
결국 아인은 알렉세이에게 납치되어 황궁에 끌려갔다. 샤를과 레이나가 울었다. 디디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S급 에스퍼와 동시대에 S급 가이드가 나타난 거다. 그들은 유르한과 헤더와 같이 완벽한 소울 메이트였다.
또한 가이드와 에스퍼의 관계는 날개를 한 짝만 가지고 태어나는 새와 같았다. 자기 짝을 만나야 온전히 하늘을 날 수 있었다. 아인과 알렉세이는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디디의 예상대로 아인은 알렉세이와 연인이 되어서 본딩과 각인을 하게 되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디디는 자신을 뺀 주위 인간들은 다 제 짝을 만나서 행복한 것 같아 씁쓸했다.
도대체 자신을 가이드로 만들어줄 운명의 짝은 어디에 있는 걸까?
별관에 머물며 절구에 약초를 찧던 중이었다. 아이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간 눈앞에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어린 에스퍼는 지금 자기의 모습으로는 디디를 유혹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의 능력은 미래를 보는 거였기에 디디에게 그들이 함께할 미래를 보여줬다.
디디의 눈앞에 있는 아이가 사라지고 어른이 나타났다. 체사레는 양손에 봉투를 들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식탁 위에 봉투를 내려놓고 사과를 꺼냈다. 진지한 표정으로 사과를 토끼 모양으로 깎았다.
디디는 참한 체사레가 좋았다. 집중하는 동안 그도 모르게 튀어나온 입술이 몹시 섹시했다. 쪽! 기습 뽀뽀를 했다. 체사레가 손에서 과도를 내려놓고 디디를 번쩍 안아 들었다.
“사랑해요, 디디.”
잘생긴 얼굴이 웃었다. 세상이 환해지는 것 같다. 역시 엘프고, 인간이고 예쁘고 잘생기고 봐야 했다. 디디는 체사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그의 얼굴을 구경했다.
닉스가 천천히 에스퍼에게 빨려 들어갔다. 어째서 제 것을 강탈당하는데도 이토록 내면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만 같을까. 미래의 디디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미래는 거기서 끝났다. 참으로 영리한 아이였다. 미래를 본 디디는 아이의 이름이 체사레임을 알았다. 아마 체사레도 디디의 이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체사레는 너무나 당연하게 디디가 잡아줄 것임을 안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디디는 자신의 에스퍼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찌릿. 전기가 통했다.
디디의 안에 자리한 레아가 산산조각 났다. 그 파편들은 아주 작은 조각이 될 때까지 파괴되어 먼지가 되었고, 그 먼지보다 더 작아져 결국 빛이 되었다. 빛은 무지개처럼 여러 색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모든 색들이 다 합쳐지니 검은색 어둠, 닉스가 되었다. 이제 디디의 안에는 새로운 레아가 존재하게 되었다.
체사레가 말했다.
“찾아다, 내 가이드.”
디디는 자신의 에스퍼를 보며 웃었다.
‘찾았다, 내 에스퍼.’
솔직히 엘프 마을을 떠나올 때, 디디는 자신이 진짜 스카이 워커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보지 않았다. 그건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아주 특별한 기적이었다. 엘프 친구들도 가이드가 되겠다는 디디를 비웃지 않았는가.
스스로도 믿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계속 자신의 에스퍼가 나타나 주기만을 기다렸다. 디디는 궁금했다. 왜 무도회장의 사장이 이상한 핑계를 대며 빚을 지워 자신을 자꾸 묶어뒀는지. 어머니는 왜 얼마 살지 못하는 인간에게 본딩을 해 결국 죽어버렸는지.
그들은 어리석어 보였고, 불행한 바보처럼 느껴졌다. 사랑이 그런 감정이라면 왜 인간들이 문학과 그림과 노래와 같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사랑을 표현하려고 하는지 의아했다.
이제 디디는 알 것만 같았다. 최초의 S급 가이드였던 용사 헤더의 말대로 사랑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이 감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하기에 그토록 다들 ‘사랑’을 중요하게 여긴 거였다.
미래에서 체사레를 사랑하고 돌아온 디디는 생각했다. 이 아이는 도대체 언제 자랄까. 너무나 먼 미래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디디는 아인을 보고 아이가 얼마나 빨리 어른이 되는지 배웠다.
빨리 자신의 에스퍼가 자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