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호라이슨 외전) 모두가 나를 나쁘다고 한다 (2) (22/23)

S급 에스퍼의 수면제가 되었다 5권 (완결)

목차

호라이슨 외전) 모두가 나를 나쁘다고 한다 (2)

제이콥 외전) 못난이 전성시대

호라이슨 외전) 모두가 나를 나쁘다고 한다 (2)

자신을 그렇게 싫어하는 주제에 알렉세이는 항상 자신의 옆에 있었다. 괜히 힐끔거리며 자신을 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왜 보냐고 화냈다. 자신은 알렉세이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알렉세이는 시종들이 안 보일 때면 슬그머니 자신의 옆에 다가와 손을 잡았다. 자신이 알렉세이의 눈을 보지 않기 위해 땅만 보고 있으면, 그는 너무 짜증 나는지 말을 더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누, 누가 너 좋아서 그러는 줄 알아! 나도 엄청 싫은데 가이딩 받는 것뿐이니까 착각하지 마.”

우리의 첫 만남이 최악이어서 그랬을 거다. 그가 자신을 그렇게까지 싫어하게 된 건. 어쨌든 자신은 알렉세이의 가이드였기 때문에 모래궁에 머물렀다.

페르디안 백작저에 혼자 돌아가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알렉세이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자신이 어딘가에 가려고만 하면 그가 졸졸 쫓아다니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래서 그때의 자신은 조금쯤은 그가 자신을 좋아하게 된 거라 믿었다.

1황자의 생일이 되자 황궁에서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자신 또래의 귀족들이 몰려들었다. 자신은 돈과 작위를 위해 아버지를 몰락시킨 패륜아로 유명했기에 다들 대놓고 모여서 비난했다.

귀족 소년들은 알렉세이에게 저런 것이 가이드가 되어서 참 안됐다고 했다. 알렉세이는 그들의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파티장에서 부유하는 자신을 챙겨주지 않았다.

그때 마음씨 착한 호라이슨이 다가왔다.

“아인 백작,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알렉세이의 동생 호라이슨이라고 해요.”

이미 알고 있었다. 호라이슨은 매우 눈에 띄는 에스퍼였다. 샹들리에에 반사된 은발이 찬란하게 빛났다. 바다처럼 따뜻한 두 눈이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다. 호라이슨에게 홀릴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홀렸을 거다. 그가 자신에게 손을 잡아도 되냐고 물었다.

“아인 백작은 S급 가이드였죠?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아름답고 상냥한 닉스네요. 이렇게 훌륭한 가이드를 만나다니, 형은 축복받은 것 같아요. 형의 가이드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아인 백작.”

호라이슨이 왜 자신에게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는지 알 것 같았다. 귀족들의 시선이 호라이슨의 말 몇 마디에 바뀌었다. 에스퍼들이 우르르 다가와서 자신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들의 질문을 거절하는 건 무례한 일 같아서 같이 대화를 나눴다. 알렉세이가 그런 자신을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무도회장을 나가버렸다.

자신의 닉스를 탐내는 에스퍼들에게 가이딩을 해주다 보니, 늦은 밤이 되었다. 그렇게나 많은 에스퍼를 상대했음에도 알렉세이를 가이딩했을 때보다 덜 피곤했다. 과연 S급 에스퍼란 엄청난 존재구나 생각했다.

시간이 늦어서 조용히 모래궁으로 돌아갔는데, 마법등이 다 꺼진 자신의 방에 알렉세이가 있었다.

“헉!”

예상치 못했는지라 너무 놀랐다.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에 비친 은회색 눈이 사납게 빛났다.

“하여간 걸레는 어쩔 수 없나 보지. 알파들 사이에서 실실 헤프게 웃음이나 흘리고 다니고, 아주 구멍이 근질거려서 좋았겠어?”

이왕 이런 이야기가 나왔으니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기로 했다. 침을 꼴깍 삼키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없는 용기를 쥐어짜며 아픈 과거를 자신의 에스퍼에게 꺼냈다.

비록 그 이야기가 자신의 상처를 헤집는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돈과 섹스를 밝히는 천박한 오메가라는 오해를 풀 수만 있다면 괜찮았다. 알렉세이에게 피가 철철 나는 과거를 고백했다. 그러면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사이좋게는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사실 나 인안나 신전에 들어가고 싶어서 간 거 아니야. 집에 있었는데, 무서운 알파들이 창문을 깨고 들어와서 날 강간했어.”

믿기지 않겠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날 강간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인안나 신전에 팔았어. 내 이름으로 빚을 잔뜩 져서 그거 갚느라고 열심히 손님을 받아야 했어.”

알렉세이가 당황해서 그게 정말이냐고 물었다. 그가 앉아 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가 자신을 안아줬다. 울음이 터졌다.

“흑. 훌쩍. 그래서 빚을 다 갚고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 아빠가 일하는 데 찾아갔는데, 아빠가 나보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했어. 난 갈 곳이 없어서 그냥 거기 있었던 거야. 누군가 날 구해주러 오길 바라면서… 흑흑.”

“괜찮아.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돼. 너 힘들잖아.”

알렉세이가 자신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고 입맞춤을 했다. 그는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다며 자신의 등을 쓸어줬다.

우리는 그렇게 멀었던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알렉세이는 자신만 보면 빙그레 웃었다.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고,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손을 잡고 다녔다. 자신은 이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이 계속될 거라 믿었다.

그런데 알렉세이는 자신을 강간한 범인들을 잡고 싶었던 것 같다. 저택에 몇 명이나 무단 침입했냐, 그 녀석들의 머리와 눈은 무슨 색이었냐, 키는 얼마 정도 되었냐, 이것저것 물었다.

그가 하루에 한 개씩만 물어서 자신은 얼마나 많은 단서를 알렉세이에게 제공했는지도 몰랐다. 차라리 그 새끼들을 잡지 않는 게 자신에게는 더 좋았을 거다.

무려 유르한 제국의 1황자가 자기 가이드를 강간하고 인안나 신전에 팔아치운 범인을 잡고자 했다. 당연히 그들은 잡힐 수밖에 없었다. 알렉세이가 그들을 모래궁에 데려왔다.

자신을 망가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잔인한 알파들은 겁먹은 쥐새끼처럼 움츠려 있었다. 알렉세이가 자신에게 그 녀석들이 맞냐고 물었다.

“아….”

다시 그들을 보자 숨이 턱 막혔다. 알파들은 무려 황실 기사들이었다. 그동안 선량한 가면을 쓴 채 약한 자를 보호하고, 황족을 지키고, 나라를 수호하는 존재인 척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거다.

“아인아, 맞지? 이 녀석들이지? 걱정 마. 내가 너 괴롭힌 녀석들 싹 다 죽여버릴 거야.”

분노로 가득 찬 알렉세이의 주위로 하얀 에테르가 넘실거렸다. 에스퍼인 그 녀석들도 그것을 느끼고 다리를 벌벌 떨었다. 그들 중 리더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눈만 위로 올려 자신을 사납게 노려봤다. 씨익 웃는 표정이 불길했다.

“저… 1황자 전하. 사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입 닥쳐.”

“저희가 1황자 전하의 가이드님과 관계를 가진 건 사실이나. 절대 강압적으로 한 게 아니라 서로 좋아서 했습니다.”

이제 죽는구나 싶어서 땀을 뻘뻘 흘리던 나머지 녀석들이 리더의 재치 있는 발언에 얼른 동의했다.

“맞아요. 저희는 아무런 잘못 없었다고요. 다 저 녀석, 아니 저 가이드님이 저희를 유혹해서 제발 힛싸를 달래달라고 애원했어요.”

“웃기고 자빠졌네. 아인아, 네가 말해봐. 이 녀석들 다 거짓말하는 거 맞지?”

“그때 섹스하면서 찍어둔 영상이 있어요. 저희라고 자기 아버지까지 골로 보낸 오메가랑 자는데, 나중에 무슨 문제가 생길 줄 알고 아무런 대비를 안 해뒀겠어요.”

리더는 당장 자기네가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영상이라니. 그런 걸 찍었다고? 사악한 알파가 복화술로 말했다.

‘잘해라.’

무엇을 잘하란 말인가. 자신은 정말 피해자였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세상은 손가락질하며 자신을 나쁘다고 했다. 알파가 자신만만하게 알렉세이에게 확인해보겠냐고 물었다.

“영상 어디 있어? 영상 내놔!”

이성을 잃은 자신은 리더에게 달려들어 그의 옷을 헤집었다. 나머지 알파들은 죄인처럼 알렉세이의 처벌을 기다리는 척했다.

아무리 뒤져도 영상 기록 마도구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은 녀석을 깔아뭉갠 채 넋을 놓았다. 리더가 말했다.

“당연히 안전한 데 뒀죠. 가이드님.”

알렉세이가 자신을 리더 위에서 일으켜 세웠다.

“너희가 한 말이 맞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테니까 영상 내놔. 만일 내 가이드가 거짓말한 거면 살려주고, 너희가 거짓말한 거면 너희 가문을 몰살시켜 버릴 거야.”

“아니에요. 알렉세이. 제발 그거 보지 마세요.”

자신은 그 녀석들이 벌 받는 것보다 알렉세이가 자신의 영상을 보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필사적으로 알렉세이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의 은회색 눈은 복수에 눈이 멀어 그런 자신을 보지 못했다.

“내가 보는 게 싫다면, 저 녀석들을 다 재판장에 세우고 법정 증거 자료로 제출할게.”

바닥에 넘어진 리더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녀석도, 자신도 그 영상이 공개되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피해자가 되려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영상을 봐야 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아파하고 짓밟히고 뭉개졌는지 평가하고, 가해자에게 죄가 있는지 판단해야 했다. 그건 자신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흑. 흡. 내가 그랬어요. 흑. 내가 유혹한 거 다 맞아요. 저 알파들한테 히트 같이 보내자고 했어요.”

알렉세이가 마주 잡고 있던 자신의 손을 빼냈다. 경멸 가득한 눈빛 속에는 자신에게 받은 상처가 깊게 박혀 있었다. 그가 인안나 신전에서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을 입에 올렸다.

“역겨워.”

눈물만 흘러내렸다. 그의 모욕에도 그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면 당장 저 악마들이 자신의 영상을 알렉세이에게 보라고 들이밀 것 같았다. 그렇게 자신과 알렉세이의 거리는 두 걸음 가까워졌다가 열 걸음 멀어졌다. 아니, 열 걸음이 아니라 백 걸음이었다.

알렉세이는 그 사건 이후로 자신과 잔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 죽이러 다녔다. 1황자가 그러고 다니니 황실 분위기가 흉흉했다. 그러나 황제와 황후는 알렉세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를 말릴 존재는 착한 이복동생 호라이슨밖에 없었다.

호라이슨은 방황하는 알렉세이를 붙잡으려고 노력했으나, 사이 좋았던 형제 사이에 금이 갈 일이 발생했다. 바로 2황자를 열렬히 추종하는 아놀드 후작이 벌인 일 때문이었다.

호라이슨은 자기를 끔찍이 아끼는 아놀드 후작과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 아놀드 후작은 유명한 문인이었기에 호라이슨에게 시와 소설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줬다. 그런데 그 아놀드 후작이 호라이슨을 황태자로 만들고 싶어서 1황자가 마실 차에 독을 탔다.

아무리 에스퍼여도 독에 당하면 해독제를 먹기 전까지 끊임없이 생명력이 깎여 나갔다. 평범한 사람이 아닌 알렉세이는 독을 먹어도 바로 죽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놀드 후작은 자기 목숨을 바쳐 2황자의 정적을 제거하고자 했다.

아놀드 후작은 황족 시해 죄로 사형당했다. 단두대에 올라가면서도 그는 알렉세이가 죽으면 호라이슨이 황태자가 될 거라며 웃었다. 정작 호라이슨은 황위를 바라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알렉세이는 그렇게나 친하게 지내던 호라이슨을 적대하게 되었다. 호라이슨은 자신의 무고를 증명하고자 황태자 자리를 양보했다. 알렉세이는 이른 나이에 황태자가 되었다.

가뜩이나 S급 에스퍼여서 엄청난 무력을 가진 존재에게 권력까지 생겼다. 본격적인 그의 괴롭힘이 시작된 건 자신이 황궁에 와 처음으로 히트사이클을 맞이하면서부터였다.

시종에게 부탁해 억제제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약을 주기는커녕 시종장이 찾아와서 이랬다.

“가이드님이 왜 이 모래궁에 머물고 계신지 그 이유를 잊으셨습니까. 황태자 전하를 잘 모셔서 에테르를 정화하기 위함입니다.”

알렉세이가 자신을 홀대해서 모래궁에서 일하는 궁인들도 모두 자신을 막 대했다. 시종장은 자신을 황태자의 가이드가 아닌 남창으로 취급했다.

물론 자신은 인안나 신전에서 일한 오메가가 맞으니, 그런 대우는 부당한 게 아닐지 몰랐다. 그들의 생각대로 자신은 닳고 닳은 걸레이니 말이다.

“어차피 귀한 구멍도 아니니, 황태자 전하와 동침하시죠. 황태자 전하는 독에 중독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입니다. 어서 후사를 남겨 이 위대한 유르한 황실을 안정케 해야 합니다.”

독에 중독된 알렉세이를 위해 던전에 기사를 보내 해독제를 찾고 있지만, 쉽게 일이 진척되지 않는 듯했다.

시종장은 자기 할 말만 하고 휙 가버렸다. 억제제가 없는 자신은 양 무릎을 꼭 붙이고 구멍에서 흘러내리는 애액을 참아냈다. 온몸에서 열이 나고 알파의 성기를 그곳에 넣고 싶었다.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이 침실 안을 가득 채웠다. 홀로 침대에 누워 바지를 내렸다. 발정열에 제정신이 아닌 자신이 자위를 하고 있는데, 같은 궁에 사는 우성 알파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알렉세이가 자신의 침실로 뛰어 들어왔다. 우리는 처음 관계를 맺었다. 알파와 잔 자신은 히트사이클의 열기에서 벗어나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알렉세이가 울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오메가 페로몬에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던 스스로를 용서치 못했다.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자신은 괜찮았다고, 좋았다고, 알렉세이의 울음을 그치게 할 수만 있다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느새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해버렸다.

“괜찮아요. 알렉세이. 저는 어차피 처음도 아니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오메가예요. 인안나 신전에서 일할 때는 이것보다 더 힘들게 당했어요.”

“끔찍해. 더러워. 역겨워….”

그는 자신을 그렇게나 싫어했다. 오랜만에 눈물을 보인 알렉세이는 자신의 눈을 더 이상 보지 않았다. 그가 사라지고 난 뒤, 시종이 자신의 침실에 들어와서 알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궁에서 나가시라 하셨습니다. 당장 짐 챙겨서 나가세요.”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맨몸으로 이곳에 와서 가이드 노릇을 했다. 황실에서 준비해준 마차를 타고 페르디안 백작저로 향했다. 마차에서 내렸지만 도저히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자신은 붙잡을 곳이 필요했다. 누군가의 보호가 절실했다. 유일하게 살아 있는 가족, 자신의 아버지가 일하는 샤를 상단에 찾아갔다. 그곳은 고작 몇 년 사이에 엄청난 규모의 상단으로 성장해 있었다.

자신이 샤를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 직원이 상단주님은 저택에 계신다고 했다.

“상단주님과 약속은 잡으신 건가요?”

“아들이에요. 아인 페르디안이라고 하면 절 만나주실 거예요.”

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상사에게 소식을 전하러 갔다. 높은 직급인 듯한 직원이 와서 자신에게 이만 돌아가라고 했다.

“저는 아빠의 아들이에요. 만나게 해주세요.”

직원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상단 소유의 마차에 태웠다. 마차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며 샤를이 자신을 반기며 안아주는 상상을 했다. 비록 그와 안 좋게 헤어지긴 했지만, 그가 자신을 몹시 사랑하기 때문에 오랜만에 본 자신을 반길 거라고 생각했다.

어마어마한 대저택 앞에 마차가 멈췄다. 마차에서 내렸다. 회색빛 하늘에서 쌀알 같은 눈이 내렸다. 첫눈을 본 자신은 몹시 설렜다.

직원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문양의 양탄자가 대리석 바닥에 깔려 있어서 포근한 분위기를 풍겼다.

창문마다 걸린 커튼 또한 여러 가지 색의 실을 사용해 무늬를 짜낸 자카드 소재로 몹시 두툼하고 따뜻해 보였다.

이제 이 집에서 살겠구나 싶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아이가 샤를보다 먼저 나타났다. 아이는 자신을 노려보고는 씩씩거렸다. 직원이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인사했다.

“안녕, 체사레. 아버지는 어디 계시니? 손님이 왔다고 전해줄래?”

체사레가 자기가 안내해주겠다고 나섰다. 자신은 아이를 따라서 커다란 초상화가 걸린 복도를 걸었다. 초상화 속 체사레는 샤를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화목해 보였다.

아빠한테 입양된 아이일까?

자신은 이 집에 살게 되면 체사레와 친하게 지내야지 싶었다. 그런데 체사레가 돌연 자기 뺨을 때렸다. 깜짝 놀라서 아이를 쳐다봤다. 체사레가 한 대 더 강하게 뺨을 쳤다. 아이는 독기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아빠 절대 안 빼앗겨.”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쪽 뺨이 눈에 띄게 빨개져서 부풀어 올랐다. 아이는 큰 소리로 울면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빠. 아빠~.”

아이가 샤를에게 두 팔을 벌렸다. 샤를은 경악하며 체사레를 안아 들었다. 자신도 예전에는 저 아이처럼 샤를의 품에 안겼었는데,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레이나가 죽기 전의 평범했던 일상과 행복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사라져 버렸다.

“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아빠. 아빠. 체사레 아파요. 호 해주세요.”

샤를의 시선이 아이의 부푼 뺨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가 잔뜩 화나서 시종을 불렀다.

“당장 내쫓아. 도대체 누가 들인 거야.”

“아빠. 아니에요. 오해예요. 내가 때린 거 정말 아니에요.”

자신은 시종들에게 끌려가면서도 해명했지만, 샤를의 귀는 오직 체사레에게만 열려 있었다. 체사레가 샤를의 어깨 너머로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아이는 정말 자기 아빠를 빼앗기지 않도록 최고의 계략을 펼쳤다.

저택에서 쫓겨났다. 시종들이 대문을 쾅 매섭게 닫아버렸다. 저택에 들어갈 때는 쌀알처럼 작았던 눈이 어느새 눈보라로 변해 있었다. 추워서 오들오들 떨며 눈길을 걸었다.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걸으니,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해 툭툭 치고 갔다.

그러다 눈밭에 넘어졌다. 슬픔으로 심장이 조여들었다. 길에 쌓인 눈이 다 녹아 물웅덩이가 될 때까지 일어나지 않고 울었다. 온몸이 젖은 채 페르디안 저택으로 갔다.

아무도 찾지 않아 폐가가 된 저택은 샤를과 체사레가 있던 따뜻한 저택과 달랐다. 창문에 매달린 커튼은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얇고 헤져 있었다.

하늘에서 눈보라가 몰아쳤다. 깨진 유리창으로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흔들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집 안으로 휭휭휭 흉흉한 소리를 몰고 다녔다. 유령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일단 더 이상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깨진 유리창을 가구를 밀어서 가렸다.

덜덜덜 떨면서 젖은 옷을 벗었다. 알몸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따뜻한 물로 씻었다. 드레스룸에 가 입을 만한 옷을 뒤졌다. 다행히 샤를이 입었던 오래된 정장이 남아있었다.

아무거나 껴입었다. 부엌으로 가서 뭐 먹을 게 있나 음식 보관 마도구를 열어봤지만, 아무것도 든 게 없었다. 배가 고팠다. 페르디안 저택에 돌아와 봤자 배고프기만 한데 그걸 바보처럼 잊었다.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 무용을 하고 싶었다. 어디를 가야 먹을 걸 주는 걸까. 학문, 검술, 마법 같은 실용적인 전공을 공부했으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무능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 와 춤추는 법만 배운 지난날이 후회되었다.

일단 하루만 참아보기로 했다.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눈을 뜨자 알렉세이가 자신의 코앞에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얼굴을 뒤로 피했다.

그는 자기를 싫어해서 그런 줄 알고 기분 나빠했다.

“안 그래도 너 같은 거 나도 역겨워.”

“…미안해요. 놀라서 그랬어요.”

“잘 지내는 거 보니 좋네. 네 에스퍼는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데 넌 아주 좋나 보지?”

자신의 어디가 좋아 보이는 걸까. 자신은 이렇게나 힘들고 아픈데. 그가 왜 자신을 찾아와서 시비를 거는지 알 수 없었다. 아, 아니다. 가이딩을 받으러 왔을 거였다.

잠자는 사이 젖꼭지가 불어 터져서 옷에 닿으니까 아팠다. 알렉세이는 자신이 눈뜨자 바로 가려고 들었다. 등 돌린 그를 얼른 붙잡았다.

“잠깐만요. 알렉세이. 배고파서 그런데 돈 좀 주고 가면 안 돼요?”

“하! 이제 네 가이딩 받으면 비용을 내라 이거지? 아주 네 밑바닥이 훤히 보인다. 나도 진짜 불쌍해. 왜 하필 내 가이드가 너일까.”

알렉세이는 그러면서 돈을 주지 않았다. 황태자인 그가 돈이 없어서 그럴 리는 없고, 자신의 가이딩을 돈으로 사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자신은 돈이 몹시 필요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돈 버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몸 파는 거. 하지만 그곳에 가서 자학하고 싶지 않았다. 간절하게 알렉세이에게 부탁했다.

“알렉세이. 돈 좀 주세요. 너무 배가 고파요.”

그의 눈은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흐리멍덩해졌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알렉세이 눈에는 자신이 얼마나 모순되어 보였을까. 비싼 보석이 달린 옷을 입고 배고프다며 돈을 달라고 하다니 말이다.

그는 자신의 말을 거짓말로 여겼다. 자기 가이드는 거짓말만 늘어놓는 탐욕스러운 오메가이니까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그는 절대 가이딩의 대가로 돈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의 부탁을 곧이듣지 않고, 화대를 달라는 뜻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본인에게 물어보지 않았으니, 그냥 그렇게 짐작할 뿐이다.

궁지에 몰려 있던 자신은 알렉세이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보지 못했다.

“거짓말 좀 그만해! 그렇게 돈이 좋아? 그럼 또 네가 좋아하는 인안나 신전에 기어들어 가서 몸이라도 팔든가!”

그것은 자신의 에스퍼가 내린 시험이었다. 자신은 차라리 홀로 페르디안 백작저에서 굶어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버텨야 했다. 알렉세이가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해 눈앞에서 사라졌다.

마음이 텅 비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기간이지만, 자신을 애지중지하며 손을 잡고 다니던 자신의 에스퍼가 그리웠다. 그 녀석들만 아니었어도 자신은 사랑받는 가이드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아무도 없는 고요한 저택에서 눈 내리는 풍경을 지켜보다가 외투를 챙겨 입었다. 알렉세이가 황궁에 먹을 것을 가지러 간 줄도 모르고 자신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반겨주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건 자신에게 손목을 칼로 긋고, 밧줄에 목을 매달며,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았다.

자신은 지옥으로 회귀하였다. 사제장은 자신의 피골을 빼먹는 자였지만, 그는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게 안아주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돌아올 줄 알았다.”

사제장은 이번에도 또 그렇게 말했다. 황태자의 가이드가 인안나 신전에 왔다는 소식에 알파 에스퍼들이 몰려들었다. 자신은 바로 손님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을 망치려고 드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자신도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고 망가트렸다. 아무도 자신을 이 지옥 속에서 구해주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자신의 에스퍼가 찾아왔다. 그가 손에 들린 빵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침대에서 다른 알파와 뒹굴던 자신을 잡아떼어냈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뭐가 부족해서 이래!”

“알면서 왜 물어봐요. 나 돈 필요해서 몸 팔았어요.”

“…너 정말 최악이구나.”

그가 자신을 침대 밖으로 끌어 내렸다. 알렉세이가 자신과 자던 알파를 죽였다.

모래궁에 갇혔다. 밤마다 짐승처럼 그에게 범해졌다. 아침이 되면 그는 절망감에 휩싸여 괴로워했다. 자신의 몸을 알게 된 알렉세이는 더 이상 손만 잡는 가이딩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절제할 줄 모르는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자신처럼 천박하고 돈이나 밝히는 악한 오메가를 안고 싶어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어느 순간부터 그가 먹을 것에 최음제를 타서 자신에게 먹였다. 자신이 괴로워하며 알파를 원하면,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침대로 향했다.

알렉세이가 점점 망가져 가는 게 눈에 보였다. 귀족들은 황태자가 독에 중독되어 시한부라는 압박감에 그렇게 변한 거라며 뒷말을 했다.

하지만 자신은 알았다. 그는 그냥 더러운 걸레랑 자기 싫은데 가이딩 때문에 자꾸 잠자리를 가지게 되어서 괴로운 거였다.

***

알렉세이는 직접 던전으로 해독제를 찾으러 다녔다.

그러다가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 군에서 고용한 길드 소속 가이드 제이콥을 만나게 되었다. 제이콥은 알파라고 해도 믿을 만큼 엄청나게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열성 오메가였다.

그런데 알렉세이가 못생긴 그 오메가를 데려와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오메가야. 너 따위와 완전히 다르게 이 오메가는 내가 처음이야.”

왜 그가 자신에게 제이콥을 데려와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오메가가 생겼으니 꺼져달라는 걸까.

“알렉세이. 그만해요.”

제이콥도 자신처럼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교태가 섞인 몸짓으로 열성 오메가가 알렉세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저렇게나 덩치가 큰데 알렉세이와 함께 있으니 품 안에 쏙 들어갔다.

제이콥을 보는 알렉세이의 눈이 자신을 볼 때와 달리 따스했기에 자신은 그들의 관계를 수긍하기로 했다. 조용히 모래궁을 나와 페르디안 백작저로 향했다. 아무도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저택에 먹을 건 여전히 없었다. 자신이 아는 곳이라고는 모래궁, 페르디안 백작저, 인안나 신전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냥 또 그곳에 찾아갔다. 그런데 더 이상 인안나 신전에 히트사이클을 보내려고 오는 오메가들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근처 생선 가게에 들어가서 물었다.

“아휴, 인안나 신전 찾아대는 오메가들 때문에 아주 내가 장사를 못 하겠어.”

주인은 짜증을 내며 생선 비린내를 맡고 꼬인 파리를 손으로 휘휘 내쫓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동전을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소매에 달린 금 단추를 떼서 생선 가게 주인에게 건넸다. 그가 웃으면서 냉큼 금 단추를 챙겼다.

“황태자 전하께서 인안나 사제들을 깡그리 잡아들여 다 죽였대. 이제 성매매가 불법이라네? 인안나교도 다 끝났어.”

전혀 꿈조차 꿔보지 못했던 기적이었다. 인안나 신전에서 있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눈물을 삼켜냈다. 자신은 눈꼬리에 매달린 물기를 닦아내고 웃었다. 가슴 속에서 따뜻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자신이 알렉세이를 사랑하게 된 건.

생선 가게 아저씨는 발정 난 오메가들이 저 좋아서 몸 팔아대는 걸 왜 나라에서 막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다.

생선 가게를 나왔다. 금 단추가 돈이 된다는 걸 알게 된 자신은 빵집에 갔다. 이 나이가 되도록 한 번도 물건을 사본 적이 없어서 금 단추 하나에 얼마나 많은 빵을 살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주인에게 왼쪽 소매의 금 단추를 떼서 건넸다.

“빵을 사려고 하는데….”

빵 주인이 화들짝 놀라며 당장 빵을 포장해드리겠다며 가게 문을 닫아버렸다. 그가 커다란 수레를 가져와서 가게 안에 있는 빵을 쓸어 담았다. 이렇게나 많이 줄지 몰랐던 자신은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신나서 콧노래를 부르다가 알렉세이가 왜 돈 없어서 몸을 팔았다는 소리에 화냈는지 그 이유를 뒤늦게 알게 되어 시무룩해졌다. 수레를 끌고 페르디안 백작저에 돌아가는데 길거리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상의를 탈의한 오메가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종교 탄압이 웬 말이냐! 우리는 돈을 벌고 싶다! 인안나교를 박해하지 마라!”

그들 중 예전에 자신을 가여워해서 돌봐주던 오메가들도 몇몇 보였다. 평민인 오메가들은 히트 때마다 큰 거금을 벌어서 귀족만큼 사치를 부리며 살았다. 갑자기 다른 평범한 베타들처럼 일하면서 푼돈을 벌려니 적응하지 못한 것이리라.

자신이 있던 인안나 신전에는 귀족들을 만나서 후원자를 잡으려고 하거나, 첩이 되어 신분 상승을 노리는 부류가 굉장히 많았다. 오로지 ‘돈’과 ‘권력’만을 추구하는 오메가에게는 인안나 신전이 기회의 장소였을 것이다.

반면 그들의 맞은편에서는 인안나 신전에 팔려 갔다가 법 개정으로 구해진 오메가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대부분 알파 아버지가 노름을 하고 오메가 자식을 팔러 많이들 왔다.

인안나 신전이 있기 때문에 어떤 오메가는 돈을 많이 벌어서 좋다고 하고, 어떤 오메가는 오메가라는 이유만으로 가족들에게 큰 재화로 여겨지며 버림받았다.

“이 더러운 자본주의자들아! 인안나 신전은 사회의 악이야. 뿌리를 완전히 뽑아야 한다고. 우리 오메가들이 왜 이런 대우를 받으며 사는데! 다 너희 같은 것들 때문이다!”

의견이 다른 오메가들끼리 몸싸움이 붙었다. 그들 사이에서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얼른 빵 수레를 끌고 자리를 떴다.

페르디안 백작저에 돌아온 자신은 음식을 보관해두는 마도구를 열어서 빵을 잔뜩 넣었다. 보기만 해도 든든하고 행복해졌다. 괜히 혼자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앞으로 몇 달 동안 배고플 걱정은 없겠다.

그동안은 기운 없이 침대에 누워 지냈지만, 갑자기 삶의 의욕이 샘솟았다. 먼지 구덩이로 변한 저택을 청소하고 싶어졌다. 청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일단 시종들이 하던 행동을 비슷하게 따라 해 봤다. 몸으로 하는 노동은 엄청나게 고됐다.

몇 시간 하지도 않았는데 쓰러져서 잠들어 버렸다. 어중간한 시간에 잠에서 깨서 먼지와 땀으로 더러워진 몸을 씻었다. 금 단추와 바꿔온 빵을 먹고 있는데 알렉세이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넌 내가 다른 오메가를 만난다는데 신경도 안 쓰이나 봐?”

“….”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는 초조해 보였다. 아마 가이딩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았다. 알렉세이가 차 대접도 안 해주냐며 뭐라고 핀잔을 했다.

“찻잎이 없어서요. 알렉세이, 빵 드실래요? 너무 포근포근하고 맛있어요.”

그가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을 경멸하는 알렉세이의 눈빛이 멋대로 자신 안에서 다르게 해석되었다. 꼭 그가 수줍어 보였던 거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다른 오메가를 사랑하고 있었다.

“씹. 그렇게 귀엽게 굴면 내가 봐줄 거라고 믿나 본데 네 발정 난 페로몬 때문에 아주 머리가 어지러워. 빨리 바지 내리고 테이블에 엎드리기나 해.”

알렉세이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가 자신의 뒤에서 박는 내내 머리통과 목덜미에 코를 문대며 냄새를 맡았다. 청소를 하느라 체력을 소진한 자신은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는 자신의 안에 사정을 한 뒤에도 한참 동안 나가지 않았다. 자신을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꼭 알렉세이 또한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정말 말도 안 되는 망상이었다.

알렉세이가 넌 질투도 안 나냐고 물었다. 사실 너무 그가 원망스럽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버림받을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전혀 질투하지 않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 넌 그런 놈이었지.”

그가 거칠게 자신의 안에서 성기를 뽑아냈다. 구멍 밖으로 정액이 흘러내렸다. 알렉세이가 문득 자신의 구멍에 손바닥을 휘둘렀다.

“악.”

“뱉지 말고 잘 품고 있어. 그렇게 좆물을 싸줬는데 여태 임신도 못 하다니. 넌 아주 쓸모없는 오메가야. 너 같은 게 무슨 우성이라고. 차라리 그… 그… 콥… 콥… 그래, 콥콥이! 내 새로운 애인 콥콥이가 너보다 빨리 임신하겠다.”

알렉세이의 말이 비수가 되어 꽂혀 들어왔다. 이제는 이런 말로 상처받지 않을 만도 한데 번번이 처음 듣는 사람처럼 아팠다. 언제 왔었냐는 듯 그가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해 사라졌다.

바닥에 떨어진 바지를 추슬러 입었다. 알렉세이가 아이를 원하는 줄 몰랐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여러 알파들을 상대해야 했던 탓에 피임약을 많이 먹었는데, 그것 때문에 여태 임신이 안 된 것 같았다. 여러모로 그에게 부족하고 못난 오메가 가이드였다.

배 속에 우성 알파의 정액을 담기 위해 오랫동안 찬 바닥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납작한 배를 손으로 문지르며 빌었다.

“제발, 제발 임신해서 알렉세이가 나만 좋아하게 되어라. 다른 오메가 만나지 말고, 나 임신했다고 기뻐해주라. 아가야, 생겨라. 아빠가 진짜 예뻐해줄게. 제발 생겨라.”

도대체 누구에게 그렇게 빌었는지 모르겠다. 몇 시간이나 질리지 않고 배를 문지르며 그랬다. 알렉세이는 자신을 페르디안 백작저에서 다시 모래궁으로 불러들였다. 시종들이나 쓰는 작은 침실을 내주며 앞으로 여기에서 지내라고 했다.

알렉세이가 콥콥이라는 애칭을 사용할 정도로 아끼는 열성 오메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자신에게 그와 뽀뽀하는 모습을 보였다. 모래궁 시종들은 황태자 전하가 좋아하는 오메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엄청나게 아부하며 그를 받들어 모셨다.

모래궁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중, 호라이슨이 자신을 찾아왔다.

“아인 백작, 백작이 황태자 전하에게 핍박받으며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지 마세요. 그 녀석은 구제 불능이에요.”

아니다. 알렉세이는 구제 불능이 아니다. 인안나 신전을 없애주지 않았는가. 그가 비록 그 법을 자신을 위해 제정한 게 아닐지라도 괜찮았다. 자신에게는 알렉세이가 구원자였다.

“제 가이드가 되어주세요. 오랫동안 당신을 좋아했어요.”

“아….”

그건 정말 믿기지 않는 기적이었다. 자신 같은 걸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니. 호라이슨이 손을 내밀었다.

“뭘 망설이는 건가요? 아인 백작께서는 황태자 전하와 본딩도, 각인도 하지 않았잖아요. 더 이상 아인 백작께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제 페어 가이드가 되어주세요.”

자신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 말하고 호라이슨의 손을 잡지 않았다.

***

호라이슨이 간 뒤 살짝 후회했다. 알렉세이에게 사랑하는 오메가가 생긴 이상, 그가 싫어하는 자신이 떨어져 나가 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얼른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을 떨쳐냈다. 콥콥이는 C급 가이드였다. S급 에스퍼인 알렉세이를 제대로 가이딩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그는 독에 중독되어 힐링 포션을 장복 중이었다.

호라이슨에게 생각할 기회를 달라고 해놓고, 곧바로 그를 쫓아갔다. 그런데 아무리 같은 오메가여도 에스퍼인 호라이슨을 자신이 붙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할 수 없이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 바람궁으로 향했다.

호라이슨이 방금 헤어져 놓고 자기를 만나러 온 자신을 의아해하면서도 반겼다.

“아인 백작, 무슨 일이신가요?”

“저… 그게…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요. 알렉세이한테는 저밖에 없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호라이슨에게 허리를 숙이고 인사했다. 그가 자신의 손을 잡고 허리를 펴줬다.

“괜찮아요. 이만 일어나세요. 아인 백작께서는 황태자 전하가 좋은 거죠?”

“…네… 주제넘게도 그래요.”

“주제넘다니요. 아인 백작처럼 아름답고 착한 가이드가 어디에 있다고.”

사람들은 다 자신을 나쁘다고 하는데 호라이슨은 자신을 둘러싼 소문에 편견을 가지지 않는 유일한 존재였다. 거절해놓고도 이런 좋은 에스퍼를 놓치는 게 옳은 일인가 싶었다.

“황태자 전하가 정말 부러워요.”

호라이슨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애교살이 부풀어 올랐다. 눈꼬리에 살짝 눈물이 맺혀서 햇살에 반짝였다. 거절당한 게 창피한지 빨개진 양 볼을 타고 눈물이 미끄러져 내렸다.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요?”

“네. 가이딩 해드릴게요.”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부디 모래궁에 들어온 그 오메가를 조심하세요. 길드에서 파견된 용병 가이드 출신이어서 그런지 무척 질이 좋아 보이지 않더군요.”

남을 험담할 줄 모르는 호라이슨이 이런 말을 할 줄 몰라 깜짝 놀랐다. 자신을 걱정해서 해주는 말 같았다.

그가 이만하면 됐다며 자신을 놓아줬다. 화염 에스퍼여서 그런지 에테르조차 따스한 사람이었다.

“고마워요. 아인 백작.”

선한 그의 미소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왜 사람들이 호라이슨을 유르한 제국의 백장미라고 하는지 이해가 갔다. 다음 생에는 이 호라이슨처럼 강하고 착한 오메가로 태어나고 싶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그 사랑을 되돌려줄 수 있는 그런 존재 말이다.

***

그때 그런 소망을 품어서 호라이슨의 몸에 빙의한 걸까. 물론 이제는 아무리 겉껍데기가 같아도 속에 든 알맹이가 엉망진창이면 같은 존재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은 호라이슨이 되어도, 그처럼 강인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되지 못했다. 전생에서처럼 똑같이 진흙탕을 뒹굴고, 남을 미워하고, 세상을 원망하기 바빴다.

어쨌든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호라이슨과 헤어져서 모래궁에 돌아오니 시종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했다.

“맙소사. 완전 더러워. 황태자 전하께서 아시면 얼마나 충격받으실까.”

어디가 더럽다는 거지? 얼굴에 뭐가 묻었나 손으로 만져봤지만 아무것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오물이 묻은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도망자처럼 구석진 골방으로 도망쳤다.

시종들이 자신을 가리켜 헤픈 걸레라고 했다. 다음 날, 자고 있는 자신의 방으로 알렉세이가 쳐들어왔다. 그가 잠에 취한 자신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너… 너. 어제 바람궁에 갔었어?”

“네. 왜 그러세요?”

자신은 분위기 파악을 참 못 했다.

“…설마 호라이슨 가이딩했어?”

“네.”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기에 당당하게 답했다. 그전까지는 난폭하게 자신을 안기는 해도 때린 적은 없는데, 그가 자신의 뺨을 때렸다.

아프지는 않았다. S급 에스퍼가 전력으로 때렸으면 자신의 머리통은 터졌을 거다. 찰싹, 하고 뺨을 맞아 고개가 돌아갔다. 살짝 얼얼한 뺨을 붙잡고 그를 올려다봤다.

맞은 건 자신인데 알렉세이가 울고 있었다. 그제야 그가 이상한 오해를 했다는 걸 눈치챘다.

“아, 알렉세이. 그게 아니라.”

“닥쳐! 닥쳐! 닥쳐! 더 이상 네 말 따위 듣고 싶지 않아. 어떻게 내 동생이랑 잘 수 있어. 이 더러운 오메가야. 세상 사람들이랑 다 자도 내 동생이랑은 그래선 안 됐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데 입이 손바닥에 틀어 막혔다. 이성을 잃은 알렉세이가 자신의 잠옷 바지를 벗기고 바로 제 바지도 내려 성기를 꺼냈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구멍을 찢어버릴 것처럼 좆이 들어왔다. 아파서 비명을 질러도 입이 손바닥에 틀어 막혀서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했다. 페로몬조차 풀어주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구멍은 훈련된 대로 애액을 흘리고 좆을 조였다.

인안나 신전에는 알파뿐만 아니라 베타들도 많이 왔다. 페로몬 없이 애액을 흘리는 오메가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엄청 천박하게 느껴졌다.

알렉세이가 화를 내듯 허리를 흔들다가 사정을 하지 않고 구멍에서 좆을 뽑아냈다.

“벌려, 이 걸레야.”

입을 벌렸다. 알렉세이가 자신의 목구멍에 좆을 쑤셔 박고 사정하였다.

“앞으로 네 자궁에 좆물 부어주는 일은 없을 거야. 혹시라도 딴 새끼 아이 배 놓고 내 새끼라고 우기면 너도, 네 새끼도 죽여 버릴 줄 알아.”

그가 바지를 추슬러 입고 나가버렸다. 목구멍과 그곳이 쓰라리고 아팠다. 그렇지만 이대로 알렉세이를 보내면 영원히 오해를 풀 수 없을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짐승처럼 기어서 따라 나갔다.

복도를 청소 중이던 시종들이 우스꽝스러운 자신을 몰골을 보고 비웃었다. 알렉세이가 다행히 아직 복도에 있었다.

“알…렉….”

기도에 열상을 입어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S급 에스퍼인 그가 듣지 못할 리 없었다. 제이콥이 알렉세이를 안고 등을 쓸어주고 있었다. 왜 알렉세이가 저 오메가의 품에서 상처 입은 모습으로 위로받고 있는 걸까. 진짜 상처받아야 하는 존재는 자신인데….

‘아니에요. 아니에요. 정말 아무 일 없었어요.’

이 해명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선명하지만, 아마 당시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그저 입만 뻐끔거렸을 거다. 자신은 하염없이 제이콥에게 안겨서 우는 알렉세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를 끌어안은 제이콥이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나 심각한 순간에 저 오메가가 웃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가 호라이슨의 말을 떠올렸다.

조심하라고, 길드 가이드 출신이어서 위험해 보인다고 했었다. 어쩌면 호라이슨과 자신이 잤다는 소문을 낸 게 제이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왜? 이미 알렉세이는 그의 알파가 아니었던가.

그 일이 있고 나서 알렉세이는 피도 눈물도 없는 황태자가 되었다. 호라이슨은 자신이 끔찍한 오해를 받는다는 걸 알게 돼 알렉세이를 만나 해명하려고 했지만, 알렉세이가 호라이슨을 만나주지 않았다.

모래궁에는 제이콥이 흘리는 야한 신음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듣고 싶지 않은데 덩치가 큰 오메가여서 그렇지 목소리도 컸다. 자신은 페르디안 백작저로 돌아갔다. 아무도 자신을 말리지 않았다.

혼자 적막한 저택을 유령처럼 배회하며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보관해두는 마도구를 열어서 빵을 꺼내 먹었다.

“우웁.”

갑자기 구역질이 났다. 빵이 상했나 냄새를 맡아봤지만 멀쩡했다. 마법으로 보관된 빵에는 곰팡이도 피어 있지 않았다. 설마 임신한 건가?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안에 정액을 쏟아부었을 때도, 빵을 먹고 있었기에 금방 자신이 언제 임신한 건지 추측할 수 있었다. 티도 나지 않는 배를 내려다보며 울며 웃었다.

“히히히. 히히히. 내 아기. 알렉 아기. 우리 아기. 예쁘다.”

모자란 사람처럼 배를 쓰다듬으며 좋아했다. 너무나 소중한 아이였다. 그가 임신한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사랑해줄 거라는 착각에 휩싸여 하루 종일 콧노래를 부르고, 괜히 미친 사람처럼 뜬금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혹시 자신의 착각일지 모르니, 진짜 자신이 임신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아무런 지식이 없는 자신은 막연하게 황궁에 있는 태의를 찾아가서 물어보면 될 거라고 여겼다. 황궁에 가서 태의를 찾았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꼬장꼬장한 인상의 태의가 자신을 탐탁지 않게 바라봤다.

“저… 그게 혹시 제가 임신했는지 알 수 있을까 해서요.”

태의가 놀라면서 어서 여기 앉으라고 자리를 안내했다. 황태자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니, 대우가 달라졌다. 괜히 언제나 주눅 들어 푹 숙이고 다니던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자리에 앉았다.

태의가 검사 마도구를 건넸다.

“화장실을 가셔서 소변을 보고, 이 마도구에 묻히세요. 만약 임신이라면 마도구에 붉은 줄 두 개가 뜰 것이고, 아니면 한 줄이 나올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검사 마도구를 받은 것만으로도 이미 임산부가 된 것 같았다. 얼른 화장실에 가서 마도구를 사용했다. 붉은 줄 두 개가 떴다.

“읍. 흑흑. 흑흑.”

화장실 안에서 입을 틀어막고 혼자 울었다. 오줌이 묻어서 더러운데도 그걸 손에 꼭 쥐고 놓을 수 없었다. 태의가 밖에서 기다리다가 울음소리에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아인 백작, 무슨 일이십니까.”

“아… 저… 아무것도 아니에요. 훌쩍.”

얼른 눈물을 닦아내고 화장실을 나왔다. 코가 빨개진 자신을 보고 태의가 눈에 띄게 기대하며 물었다.

“임신하셨나 보죠?”

“네. 훌쩍.”

“축하드립니다. 이 나라를 위해 아주 장한 일을 하신 겁니다. 우성 오메가와 우성 알파, 거기에 S급 에스퍼와 S급 가이드의 아이이니 얼마나 대단한 황손께서 태어나실까요. 하하하하.”

태의가 임신 초기에는 조심해야 한다면서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이것저것 영양제를 챙겨줬다. 안 좋은 소문 때문에 자신을 싫어하던 태의조차 자신이 임신하니 잘해줬다.

마음속에서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뭐든지 잘 될 것만 같았다.

태의원을 나왔다. 신이 나 얼른 알렉세이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모래궁이 소란스러웠다. 시종들이 바쁘게 파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슨 날인가 싶어서 괜히 어슬렁거리며 구경하다가 알렉세이를 찾았다.

알렉세이가 제이콥을 끌어안고 그에게 연신 뽀뽀를 했다. 제이콥에게서 더 이상 희미한 페로몬 냄새가 나지 않았다. 가슴까지 파인 야한 옷을 입은 제이콥은 보란 듯이 목덜미에 새겨진 각인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설마 하고 알렉세이를 쳐다봤다. 알렉세이에게서도 아무런 페로몬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우리 아이가 배 속에 있는데, 그가 다른 오메가와 각인을 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기둥을 손으로 짚고 버텼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어서 나가세요.”

“그게 무슨… 난 황태자 전하의 가이드입니다.”

“황태자의 가이드는 무슨. 당신 잘렸어. 이제 우리 황태자 전하의 가이드는 제이콥 님이라고.”

시종이 어깨로 자신을 밀치고 지나갔다. 충격을 받아 힘이 없던 자신은 그만 바닥에 넘어졌다. 알렉세이가 힐끔 시선을 줬다. 그는 자신을 공격한 시종을 불러서 혼내기는커녕 넘어진 자신을 보고 비웃었다.

“아… 아니야. 아니야. 알렉세이. 제가 당신의 가이드잖아요. 왜 저런 못생긴 열성 오메가 따위랑 각인한 거예요. 난 10년이나 함께한 당신의 페어라고요.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그럴 수 있어요. 흑.”

미련하게도 자신의 에스퍼에게 집착하며 매달렸다. 다른 가이드였으면 이 세상에 에스퍼 따위 널리고 널렸다면서 가버렸을 텐데,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왜일까. 당신이 인안나 신전을 없애고, 오메가를 보호하는 법을 제정해서? 아님, 자신을 찾으러 인안나 신전에 온 유일한 존재여서? 그것도 아니면, 자신은 왜 알렉세이를 놔주지 못하는 걸까. 호라이슨이라는 좋은 에스퍼에게 가이드가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았음에도….

당시의 자신은 그 집착의 이유를 사랑이라고 믿었다.

알렉세이에게 기어가 그를 올려다봤다. 눈물에 더러워진 자신의 얼굴을 보고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추하게 무슨 짓이야. 그리고 감히 너 따위가 어디서 황태자비를 못생긴 열성 오메가라고 하지?”

바닥을 짚은 자신의 손등을 알렉세이가 구둣발로 지르밟았다.

“아악. 아파. 아파요. 아아악.”

손을 얼른 빼내서 다른 쪽 손으로 감쌌다. 건드리기만 해도 아픈 걸 보면 손등 뼈에 금이 갔을지도 모르겠다. 손등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흐흐흑흑. 흑흑. 흑. 알렉세이. 제발 그러지 마세요. 나 임….”

임신했다고 말하려다가 얼른 입을 닫았다. 자고 있던 자신을 찾아와 강간하듯 안았던 그가 한 말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자신과 아이를 죽인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 아이는 알렉세이의 아이였다. 그러니 죽이지 않을지 몰랐다. 자신을 업신여기던 태의조차 자신을 축하해줬지 않는가.

제이콥이 알렉세이의 팔뚝을 잡아 커다란 가슴골에 넣고 문질렀다. 그가 보란 듯이 제이콥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싼 채 키스했다. 그리고 자신은 보고 말았다. 절망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알렉세이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는 걸.

알렉세이를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을 상처주기 위해 일부러 제이콥처럼 못난 평민 출신의 열성 오메가, 그것도 C급 가이드를 골라서 각인한 거였다.

아랫입술을 피가 날 때까지 깨물었다. 그가 자신에게 휘두른 칼날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알렉세이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그를 증오하는 마음이 자신 안에 공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S급 에스퍼, 유르한 제국의 황태자인 그를 자신같이 아무것도 없는 오메가가 해할 수는 없었다. 그런 자신의 눈에 제이콥이 들어왔다.

아무런 힘이 없는 자신은 자신을 도와줄 유일한 존재, 호라이슨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가 손등을 다친 자신을 보고 놀라 귀한 힐링 포션을 건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인 백작. 도대체 왜 다친 거예요.”

“알렉세이가 제 손등을 발로 밟아서 뼈를 부러트렸어요.”

“헉.”

착한 그는 어떻게 자기 가이드한테 그런 난폭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거냐며 분개했다. 호라이슨이 조심스럽게 자신을 안아줬다.

“아인 백작, 그런 에스퍼의 가이드 따위 되지 말아요. 당신에게 버림받으면 에테르가 폭주해 죽어버리는 주제에 그는 너무 주제를 모릅니다.”

자신은 울면서 고개를 들어 호라이슨을 봤다. 호라이슨이 자신에게 물었다.

“입 맞춰도 될까요?”

“…네.”

자신은 알렉세이를 몰락시키기 위해 호라이슨과 기꺼이 키스를 했다. 같은 오메가끼리여서 그런지 별다른 감흥은 안 느껴졌다. 반면 에스퍼인 그는 자신의 입술을 걸신처럼 허겁지겁 빨며 닉스를 가져갔다.

에테르가 정화된 그가 황홀한 시선으로 자신의 눈을 들여다봤다.

“아인 백작처럼 아름답고 완벽한 가이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칭찬 고마워요. 황자님.”

“황자라는 칭호는 거리감이 느껴져서 별로입니다. 편하게 호라이슨이라고 불러요.”

자신은 호라이슨의 품에 안겨서 생각했다. 한 번도 타인에게 적의를 품어본 적 없는 자신이었지만, 그동안 자신의 안에 악귀들이 갇혀 있었던 거라고 해도 믿길 만큼 나쁜 계획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호라이슨, 부탁이 있어요.”

“무슨 부탁이요? 어떤 것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자신의 닉스를 맛본 에스퍼는 황홀경에 빠져 판단력을 잃은 듯했다. 자신의 부탁은 다 들어준다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알렉세이를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시켜주세요.”

“…그게 무슨….”

“어려운 부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는 자기 아이를 임신한 가이드가 있음에도, 평민 출신의 열성 오메가, 그것도 고작 C급에 불과한 가이드와 각인을 했습니다.”

호라이슨이 벌떡 일어났다. 그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했다. 혹시 다른 알파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말에 자신에 대한 호감이 사라진 걸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 호라이슨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

아놀드 후작 사건 때문에 벌어진 형제 사이는 자신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오해를 받고 심각하게 틀어진 후, 아직도 복구되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진 걸로 보였다.

“이런 미친 새끼를 봤나. 아, 미안합니다. 아인 백작.”

“아니에요. 호라이슨. 그런데 호라이슨도 이제 절 아인 백작 말고 이름으로만 불러주세요. 전 이제 호라이슨의 가이드잖아요.”

“아….”

자신이 그의 가이드가 되겠다는 소리에 호라이슨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을 안아주며 앞으로 잘해주겠다고 맹세했다. 진작 그의 가이드가 되었어야 했다.

호라이슨은 이 사실을 당장 황제와 황후께 알려서 알렉세이를 폐위시켜 버리겠다고 했다. 그는 말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종을 시켜서 자신을 페르디안 백작저까지 마차로 모시게 한 후, 바로 황제 부부를 만나러 갔다.

제이콥과의 각인을 기념하기 위해 파티를 열었던 알렉세이는 황제에게 불려가 뺨을 맞았다. 알렉세이는 이유도 모른 채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당했다. 억울한 그는 황제에게 물었다.

“도대체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십니까!”

“진정 몰라서 그래? 네가 네 가이드에게 한 짓을 생각해라. 이 금수만도 못한 새끼. 꼴도 보기 싫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라.”

알렉세이는 이 모든 게 아인 페르디안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의 눈에서 지옥 불 같은 분노가 끓어올랐다. 황태자 알렉세이는 델리칸 공작이라는 새로운 작위를 받고 황궁에서 쫓겨났다.

다행히 먼 지방으로 유배되지는 않아서 수도에 있는 저택에서 지내게 되었다. 황실에선 왜 알렉세이를 폐위했는지 그 이유를 발표하지 않았다.

알렉세이의 뒤를 이어 황후의 소생 호라이슨이 황태자가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호사가들은 황후의 입김이 작용했노라 떠들었다. 사람들은 알렉세이를 불운의 황태자라고 부르며 동정했다.

알렉세이는 이를 으득으득 갈며 아인을 찾았으나, 그가 바람궁에서 호라이슨과 함께했기에 잡아 올 수 없었다. 그제야 그는 두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지독한 배신감이 알렉세이를 휘감았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가이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알렉세이 델리칸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

알렉세이는 어렸을 때, 오메가 아버지가 황제에게 살해당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황제는 자신의 오메가 아버지가 다른 알파와 바람을 피웠다며 죽였다.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어린 시절 기억들이 듬성듬성 날아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메가 아버지가 왜 죽었고,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버려진 궁에서 알렉세이는 그 어떠한 돌봄도 받지 못한 채 굶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또래의 아이가 찾아왔다. 그 아이가 알렉세이에게 물었다.

“어? 너 왜 여기서 살아? 네 이름은 뭐야?”

알렉세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가 금세 재미를 잃고 가버릴 거라고 여겼다. 예상대로 아이는 모래궁을 떠났다. 그리고 먹을 것을 잔뜩 든 시종들과 다시 돌아왔다.

시종들은 모래궁을 쓸고 닦고 청소했다. 침실에 버려져 있던 제논의 시신을 잘 추슬러서 묻어주기까지 했다. 제논이 죽은 후 씻지 않아 더러운 알렉세이를 따뜻한 물에 씻기고 좋은 옷을 입혔다.

이 엄청난 변화가 믿기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방금 자신이 만난 아이가 새로운 황후 헬링턴의 아들, 호라이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알렉세이는 그 아이가 미웠다. 원래 황후 자리는 제논의 것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오메가 아버지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헬링턴이 황후 자리를 빼앗았다고 탓할 수 없었다.

알렉세이에게는 호라이슨을 미워할 자격이 없었다. 오히려 호라이슨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황후에게 부탁해 잘 지내게 되었으니 고마워해야 했다.

호라이슨은 황제와 황후와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 알렉세이를 데리고 다녔다. 황제와 황후는 알렉세이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호라이슨만 예뻐하고 챙겼다. 착한 호라이슨은 그들 사이에 껴서 알렉세이의 눈치를 보며 챙겼다. 그게 더 비참했다.

겉으로는 호라이슨과 친한 척했지만, 속에서는 그 아이에 대한 열등감이 점점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제논의 여동생이자 알렉세이의 고모 이사벨라가 황궁으로 찾아왔다.

“알렉세이,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디디라는 엘프가 알렉세이의 가이드를 알고 있다며 절 찾아왔습니다.”

“네? 제 가이드요?”

“아인 페르디안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S급 가이드인 우성 오메가입니다. 지금 알렉세이의 가이드는 닉스에 심각하게 중독된 상태래요. 한시가 급해요. 어서 그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그… 제 가이드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이사벨라와 알렉세이는 페르디안 백작저로 향했다. 그러나 저택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사발레가 당황해서 어서 아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알렉세이는 작은 몸을 견디지 못하고 흘러넘친 닉스의 흔적을 따라 갔다.

평범한 이사벨라는 S급 에스퍼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해 낙오되었다. 알렉세이는 혼자 아인을 찾아냈다. 아인은 인안나 신전에 있었다. 왜 이런 데 있나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있는 방의 문고리를 뜯어내서 문을 열었다.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가이드가 자기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알파와 섹스를 하고 있었다. 아인의 몸에서 닉스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상대는 일반인은 아니고, F급 정도 되는 에스퍼로 보였다.

설마 자신의 가이드는 가이딩을 해주며 돈을 벌고 있었던 걸까? 오메가들이 히트 때 알파들과 섹스를 하고 돈을 버는 것처럼?

사제장의 멱살을 잡고 왜 자신의 가이드가 여기서 몸을 팔고 있는지 따져 물었다. 사제장은 그 어떠한 강요도 없었다며 영상 기록 마도구에 촬영된 자료를 공개했다.

영상 속 아인은 제 발로 인안나 신전을 찾아와서 순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게 끝이었다. 자신의 가이드는 히트랍시고 쉽게 몸을 파는 헤픈 오메가들처럼 가이딩을 해주고 돈을 받는 존재였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자신의 가이드는 자신을 두고 다른 알파와 자선 안 된다. 제논은 바람을 피워서 죽었다. 그럼 자신의 가이드도 죽을 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 거다.

오직 한 사람이랑만 섹스를 하고 사랑해야 했다. 그 규칙을 어긴 아인 페르디안은 지상 최악의 죄인이다. 제논처럼!

“역겨워.”

“….”

“내 가이드가 이딴 더러운 남창이었다니. 돈이 그렇게 좋아?”

“….”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제논을 죽이던 황제의 칼,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던 제논의 모습. 그 모든 게 한데 뒤섞여 알렉세이의 눈앞에 펼쳐졌다.

“널 만나기만을 기대한 내가 바보 같아. 너무 불쌍해. 우웩.”

알렉세이가 처음 아인 페르디안을 보고 토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논을 잃은 기억이 생생한 알렉세이는 아직도 그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오메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경멸로 치장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만큼 연약한 존재였다.

광대처럼 얼굴에 하얀 가루를 바른 아인이 방에서 도망치는 알렉세이를 따라 나왔다.

“같이 가요. 나 1황자 전하의 가이드잖아요.”

해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아인은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제발 아인 페르디안이 자신의 가이드가 아니길 빌었다. 그러나 마탑에서 매칭률 검사를 한 그들은 높은 매칭률을 기록했다.

용납할 수 없었다. 알렉세이는 울면서 검사실에서 뛰쳐나왔다.

호라이슨이 슬픔에 잠긴 알렉세이를 위로했다. 이 세상에 수많은 가이드들이 있는데 왜 하필 아인 페르디안이 자신의 짝일까 싶었다. 호라이슨은 알렉세이에게 왜 아인을 싫어하냐고 물었다.

여러 이유들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문란한 오메가라는 거였다. 호라이슨은 알렉세이에게 아인이 자발적으로 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훌쩍. 진짜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흑. 왜 하필 내 가이드가 그런 존재인 걸까. 너무 속상해. 훌쩍.”

“형, 무언가 오해가 있을지 몰라요. 형 가이드분이랑 이야기해 보면 안 될까요?”

그는 모든 걸 가졌기에 착했고, 알렉세이가 형인데 마치 자기가 형인 것처럼 말했다. 한마디로 재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호라이슨이 없으면 다시 모래궁에 버려질 것임을 알아 어울렸다. 알렉세이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슬금슬금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인이 그들의 대화를 쥐새끼처럼 몰래 엿들었다. 역시 아인 페르디안이 싫다.

어쨌든 아무리 알렉세이가 아인 페르디안을 싫어한다고 해도, 그에게는 아주 매혹적인 오메가 페로몬과 닉스가 있었기 때문에 자꾸 자석처럼 끌리게 되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냄새도 맡고 싶고, 껴안고 싶고 그랬다. 인정하기 싫지만 아인은 몹시 예쁜 오메가였다. 신이 저지른 유일한 잘못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이 힐끔거릴 때마다 아인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러면 입 안 가득 커다란 사탕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단침이 고였다. 헤.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쳐다보게 됐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됐다.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아인 주위를 얼쩡거리며 전전긍긍 맴돌게 되었다. 마치 그 아이가 자신의 목줄을 쥐고 개처럼 끌고 가는 것 같았다. 그게 정말 싫었다. 자유를 박탈당한 기분이었다.

호라이슨에게 이 현상을 상담하니, 자신이 아인에게 사로잡힌 거라고 했다. 별로 좋은 어감은 아니었다. 아인 페르디안이 모래궁에 머무는 내내, 시종들은 그 아이를 욕했다.

악독한 오메가. 세상에 다시없을 나쁜 악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멍청이를 상대로 참으로 거창한 욕을 해댔다. 마음이 안 좋았다. 그래도 자신의 가이드인데. 그렇게 떠드는 시종들한테 한마디 해줬다.

“너희들은 뭐가 그리 잘나서 뒤에서 남 흉이나 보는 거야. 할 일 없으면 청소나 해.”

옹기종기 모여 있던 시종들이 빛을 본 바퀴벌레처럼 흩어졌다. 괜히 뿌듯해서 코를 손으로 쓱 문질렀다.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생일이 되었다. 원래는 아무것도 없이 넘어갈 뻔했는데 가족 식사 자리에서 호라이슨이 이를 언급해서 파티를 열게 되었다. 황후 헬링턴은 자신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다행이면서 불행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대외적으로 귀족들에게 알렉세이는 버림받은 황자처럼 비치지 않을 수 있었다. 알렉세이는 몰랐는데 아인은 사교계에서 꽤 유명한 인사였다. 나쁜 쪽으로 말이다.

자신에게 달라붙은 귀족들이 아인을 흉봤다.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워서 전 재산과 작위를 빼앗았다고 했다. 그런데 누명이면 무죄가 나와야 하는데, 왜 그의 아버지는 벌을 받은 걸까? 정말 다들 그 판결이 이상하다고 못 느끼는 건가?

무언가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속상했다. 뭐라고 해야 저 귀족들의 입을 닥치게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호라이슨이 나서서 파티장에서 소외당하던 아인에게 말을 걸었다.

“아인 백작은 S급 가이드였죠?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아름답고 상냥한 닉스네요. 이렇게 훌륭한 가이드를 만나다니, 형은 축복받은 것 같아요. 형의 가이드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아인 백작.”

크리스털 잔에 든 사과주스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호라이슨이 어찌나 유창하게 말하던지, 알렉세이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지켜만 봤다.

자신의 가이드가 호라이슨을 위기에서 구해준 백마 탄 왕자님처럼 바라봤다. 찌릿, 심장이 따끔거렸다. 호라이슨은 어떻게 하면 좌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영리한 녀석이었다.

비난의 눈길을 보내던 귀족들이 호감을 가지고 아인에게 다가갔다. 아인은 사람들에게 파묻혀 호라이슨에게 살짝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소리 없이 움직이는 입 모양이 그리 말했다. 호라이슨은 별거 아니라며 난처해하며 손을 내저었다. 부끄러운지 테이블에 내려놓은 크리스털 잔을 다시 손에 쥔 호라이슨이 사과주스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핑크빛인 게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아인이 호라이슨의 가이드여도 좋겠다는 말이 나왔다.

알렉세이는 참을 수 없어서 파티장을 뛰쳐나왔다. 답답한 마음에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지만, 안에서 A급 에스퍼인 호라이슨이 들을까 봐 차마 속마음을 뱉어내지 못했다. 자신이 아인을 구해주고 싶었다.

호라이슨이 했던 매너 있는 태도, 다정한 웃음, 사교적인 화술 그 모든 게 자신이 하려던 거였다. 그런데 자신은 그러지 못하고 생일 파티의 주인공인데 이렇게 도망쳐 나왔다.

모래궁으로 혼자 터덜터덜 돌아갔다. 아인의 침실에 들어갔다. 그 아이의 페로몬으로 가득한 방 안이 안정감을 줬다. 침대에 누워 이불에 코를 파묻었다.

“제논, 흑. 제논. 저 지금 너무 속상해요.”

찔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분명 자신이 더 강한 에스퍼인데 호라이슨에게 이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다못해 자신의 가이드조차 알렉세이보다 호라이슨을 더 좋아했다.

아인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자신의 가이드마저 호라이슨의 사람이 되지 말라고.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호라이슨을 좋아하더라도, 아인만은 자신의 가이드이니 자신만을 좋아하게 해달라고.

그런데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인에게 호라이슨의 페로몬이 잔뜩 묻어 있었다. 둘이 함께 오랜 시간 있다가 온 것이다.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올랐다.

“하여간 걸레는 어쩔 수 없나 보지. 알파들 사이에서 실실 헤프게 웃음이나 흘리고 다니고, 아주 구멍이 근질거려서 좋았겠어?”

그런 모욕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 분노가 엉뚱하게 독설을 쏟아내게 했다. 아인이 울면서 뛰쳐나갈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아인이 알렉세이에게 좀 더 다가왔다.

“사실 나 인안나 신전에 들어가고 싶어서 간 거 아니야. 집에 있었는데, 무서운 알파들이 창문을 깨고 들어와서 날 강간했어.”

어둠 속에서 빛나는 금안이 반짝였다. 밤하늘의 달도 별도 아인 페르디안의 눈보다는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알렉세이는 아인이 똥을 주워서 금을 만들었다고 우겨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 아이가 하는 이야기들을 다 믿었다. 그리고 아인을 강간하고 인안나 신전에 팔아치웠다는 새끼들을 지옥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자신은 그 범인을 찾고 싶어 하는데 아인이 이야기하길 꺼려서 하루에 한 개씩 질문해 범인의 단서를 모았다.

알렉세이는 운 좋게 아인이 말한 조건에 일치한 알파 기사들을 황궁 연무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을 끌고 아인에게 데려갔다. 호라이슨이 파티장에서 아인을 구해냈듯 자신도 그를 구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호라이슨을 봤던 그 달콤한 눈웃음으로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하길 바랐다. 그런데 아인은 하얗게 질려서 푸르게 질린 입술을 달달 떨었다. 범인들이 말했다. 아인이 히트사이클이 와서 유혹했다고 했다.

“흑. 흡. 내가 그랬어요. 흑. 내가 유혹한 거 다 맞아요. 저 알파들한테 히트 같이 보내자고 했어요.”

설령 히트가 온 아인이 유혹을 해서 잤다고 해도, 그 영상을 촬영한 새끼들은 나빴다. 아인이가 제 발로 인안나 신전에 갔어도, 아인이와 잔 알파들이 못됐다.

그럼에도 자신은 아인이 다른 알파들과 잤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서 또 저질러선 안 되는 죄를 입으로 범했다.

“역겨워.”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이 강물처럼 흘렀다. 그 강물은 알렉세이의 과오였기에 보고 있기 힘들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됐다. 결국 아인은 또 알렉세이 때문에 울었다.

알렉세이는 자기들 잘못이 없다고 시시덕거리며 아인의 방에서 걸어 나가는 녀석들을 복도에서 산 채로 불태웠다. 방음 마법을 걸어서 그들의 비명은 외부에 새어나가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그들이 죽을 때까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봤다. 재가 되어 사라진 알파들이 바람에 휘날렸다.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기다려. 너희는 반드시 내가 산 채로 불태워 죽여 버릴 거니까.”

자신의 가이드를 안았던 존재를 다 찾아내서 불태웠다. 손을 뽑아버리기도 하고, 칼로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기도 했다. 잔인한 자신의 행동에 귀족들이 경계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제논을 잃어 입지가 좁은 자신을 정통 후계자라는 이유만으로 지지하던 귀족들이 하나둘씩 떠나갔다. 그렇지만 자신은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아인 페르디안을 가진 존재가 없으면, 자신이 유일무이한 첫 알파가 되는 거였다.

호라이슨이 무고한 학살을 멈추라며 알렉세이를 설득했다. 무고한? 아니, 그들은 전혀 무고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이드랑 잔 새끼들은 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다. 그런데 왜 그 새끼들을 죽이는 게 잘못이란 말인가.

그 일로 호라이슨과 다투고 말았다. 흥분한 나머지 능력을 써버려서 호라이슨이 다쳤다.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호라이슨은 이해한다고 받아줬다. 자신은 그와 다시 의좋은 형제가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알렉세이가 마실 찻잔에 독이 들어 있었다. 범인은 금방 색출되었다. 호라이슨의 열렬한 추종자 아놀드 후작이 독단적으로 알렉세이에게 독을 먹인 거였다.

아놀드 후작은 단두대에 오르면서도 웃었다. 언젠가 알렉세이가 죽을 거라며. 그러나 알렉세이는 S급 에스퍼였다. 아놀드 후작의 바람과 달리 독에 중독되어 생명력이 깎여 나가도 회복 속도가 더 빨라서 아무리 기다려도 죽지 않았다. 풀리지 않는 피로감과 두통이 따르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다 아인이 히트사이클을 맞이했다. 자신이 멀쩡하다는 알렉세이의 생각과 달리 그의 몸은 독에 중독된 상태를 엄청난 위기라고 느낀 듯했다. 아인의 페로몬을 맡자 그 속에 담긴 닉스에 홀려 아인과 몸을 섞게 되었다.

첫 경험이었다. 미숙하게 아인을 더듬으며 가지고자 들었다. 성교육을 받지 않은 알렉세이였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생각과 달리 너무나 황홀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들 자신의 가이드를 넘봤던 거구나, 알렉세이가 죽은 그들을 순간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끔찍하게도 말이다.

그 녀석들과 자신이 별반 차이 없는 존재였다는 걸 깨달았다. 후희를 끝낸 알렉세이에게 남은 거라고는 자책과 죄책감뿐이었다.

“괜찮아요. 알렉세이. 저는 어차피 처음도 아니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오메가예요. 인안나 신전에 있을 때는 이것보다 더 힘들게 당했어요.”

“끔찍해. 더러워. 역겨워….”

그 모든 말들이 가리키는 건 알렉세이였다. 그는 아인을 모래궁에서 내쫓았다. 곁에 두고 있으면 또다시 잘못을 저지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

자신이 쫓아내 놓고 아인이 단 한 번도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사실에 알렉세이는 화났다. 아인이 없으니까 잠도 오지 않고, 하루 종일 짜증만 나고, 독 때문인지 머리도 띵하고 몸이 무거웠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페르디안 백작저에 찾아가기로 했다. 아인은 팔자 좋게 쿨쿨 자고 있었다. 알렉세이에게 조금의 애정도 없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거였다. 그래서 알렉세이도 아인을 좋아하지 않기로 했다.

잠든 아인의 옆에 누워 닉스만 가져갈 생각이었는데, 그만 입이 아인의 젖꼭지에 가서 달라붙었다. 뭐 어쨌든 실컷 빨아 먹었다. 안개에 가려진 것 같던 눈앞이 맑아지고, 정신이 개운해졌다. 한결 몸이 가벼워진 게 느껴졌다.

잠에서 깬 아인이 알렉세이를 보자마자 돈타령을 했다. 알렉세이는 기분이 확 나빠졌다. 인안나 신전에서 그가 가이딩을 해주고 돈을 벌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알렉세이는 아인에게 그 수많은 손님들 중 한 명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알렉세이는 돈을 주고 싶지 않았다. 돈을 주는 순간, 그는 아인에게 ‘손님’이 되니까. 그런데 아인은 계속 배가 고프다는 어처구니없는 핑계를 대며 돈을 달라고 우겼다. 입고 있는 옷에 달린 단추들을 팔아도 1년 내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화가 났다. 이렇게 나쁜 너인데 어째서 예뻐 보이는 것일까.

“거짓말 좀 그만해! 그렇게 돈이 좋아? 그럼 또 네가 좋아하는 인안나 신전에 기어들어 가서 몸이라도 팔든가!”

그런 말을 했다고 정말 인안나 신전에 가서 몸을 팔 줄은 몰랐다. 알렉세이는 할 수만 있다면 아인을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모래궁에 데려가 아인이 다른 놈들이랑 뒹굴 생각 따위 못 하게 안아 버렸다.

이런 행동을 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괴로웠다. 아인 페르디안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갈망을 변명할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알렉세이는 최음제를 사용해 아인을 발정 나게 만들었다.

그가 먼저 자신을 원했다고, 그러니 이건 괜찮은 거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하지만 알렉세이는 이런 변명을 누가 했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아인과 섹스를 한 영상을 가지고 있던 쓰레기들이었다.

알렉세이를 몰락시키는 건 아인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한 행동들이 그를 무겁게 짓눌러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알렉세이는 그렇게 망가져 갔다.

귀족들은 그가 독에 중독되어 시한부라는 압박감에 그렇게 된 거라고 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까짓 독으로는 S급 에스퍼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만 주며 시간을 보냈다.

***

황제는 던전에 자신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어려서부터 던전에 보내려고 했는데 호라이슨이 막은 탓에 아직까지 안 가고 버틸 수 있었던 거다. 호라이슨은 어려서도 그러더니, 아놀드 후작 사건 이후로도 자신을 잘 챙겼다.

고맙긴 하지만, 솔직히 이복동생의 친절은 알렉세이의 열등감만 키웠다. 그렇지만 호라이슨에게는 죄가 없었다. 알렉세이도 그와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나름 사이좋은 형제처럼 지냈다.

사람과 처세에 서툰 알렉세이는 호라이슨에게 종종 상담을 하곤 했다. 그 아이는 뭐든 능숙하게 잘하니까 말이다. 호라이슨은 어떻게 해야 아인과 관계를 진척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알렉세이의 말에 질투심을 이용하라는 조언을 해줬다.

“뭐? 질투? 어떻게?”

“다른 오메가를 좋아하는 것처럼 연기하세요.”

“…그러다가 그냥 날 버리고 다른 에스퍼에게 가버리면 어떻게 하라고.”

“질투 작전이 통하지 않는 건 애초에 마음이 없다는 뜻이라고요. 이거 읽어보세요. 질투 작전은 모든 로맨스 소설의 클리셰라고요.”

호라이슨이 로맨스 소설책 한 권을 건넸다. <기사와 공주님>이라는 제목이었다. 바보 같은 소리다 싶어서 코웃음을 쳤다. 머릿속에서 호라이슨의 말을 지워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심심해서 그냥 책을 읽어봤다. 책을 읽는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다.

소설을 읽은 알렉세이는 생각을 바꿔 먹었다. 호라이슨의 말대로 질투를 일으키는 게 아주 좋은 작전처럼 느껴졌다.

알렉세이는 소설 속 기사가 공주를 짝사랑하듯 아인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가 자신의 가이드인 이상 친하게 지낼 필요는 있다고 여겼다.

던전에 가면 길드 소속 가이드들이 에스퍼들을 위해 대기 중이었다. 저 가이드 중 하나를 골라서 호라이슨의 말대로 질투 작전을 펼쳐보기로 했다.

가이드들을 쭉 훑었다. 너무 잘생긴 오메가를 데려가면 아인이 꼬실지 모르니, 오크처럼 못생긴 저 열성 오메가에게 애인 대행을 시켜야겠다. 아인은 하다못해 같은 오메가인 호라이슨에게도 살살 웃음을 쳐대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오크에게 가서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도와줄 것을 명령했다.

“네. 좋아요. 제 이름은 제이콥이라고 해요. 황태자 전하.”

알렉세이는 오크를 데리고 모래궁에 갔다. 아인에게 당당하게 인사를 시켰는데, 아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알렉세이를 버리고 자기 집에 가버렸다.

알렉세이는 무심한 아인 페르디안에게 상처받았다. 오크가 그런 알렉세이를 위로해줬다. 생긴 거와 달리 오크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오메가였다.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알지도 못하는 오크조차 알렉세이를 이렇게나 생각해주는데 말이다. 공간 이동 능력을 써서 페르디안 백작저에 쳐들어갔다.

“넌 내가 다른 오메가를 만난다는데 신경도 안 쓰이나 봐?”

“….”

아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가 없다 이거다.

“전혀 질투하지 않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 넌 그런 놈이었지.”

알렉세이는 아인을 식탁에 엎어놓고 거칠게 안았다. 그건 가이딩이 아니었다. 화풀이였고, 강간이었다.

“뱉지 말고 잘 품고 있어. 그렇게 좆물을 싸줬는데도 여태 임신도 못 하다니. 넌 아주 쓸모없는 오메가야. 너 같은 게 무슨 우성이라고. 차라리 그… 그… 콥… 콥… 그래, 콥콥이! 내 새로운 애인 콥콥이가 너보다 빨리 임신하겠다.”

오크가 자기소개 할 때 분명 이름을 말했는데 기억나는 거라고는 ‘콥’ 한 글자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크를 콥콥이라고 불렀다. 잔뜩 성질을 내고 모래궁에 돌아와 후회했다. 관계가 좋아지기는커녕 악화되었다.

자신이 아인 페르디안을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쓸데없이 속상했다. 호라이슨을 찾아가서 따지니까 제대로 되는 과정이라고 했다.

아인을 다시 모래궁으로 불러들였다. 호라이슨의 충고에 따라 콥콥이와 애정 행각을 하는 모습을 아인에게 보여줬다. 아인이 고개를 푹 숙이며 기운 없어 했다. 눈꼬리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그의 슬픔은 자신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거라 여겼기에 알렉세이는 더 신이 나 콥콥이를 사랑하는 척했다. 그러다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아인이 호라이슨을 만나러 바람궁에 갔다가 호라이슨의 페로몬을 잔뜩 묻힌 채 나타났다. 떠들기 좋아하는 시종들은 아인이 호라이슨과 잤다며 욕했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호라이슨을 만나러 득달같이 쫓아갔다.

“야, 이 새끼야. 너 뭐야. 내 가이드랑 잤어? 잤냐고! 분명 우리 잘 되게 도와준다고 했잖아.”

호라이슨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호라이슨이 알렉세이의 손을 뿌리쳤다.

“이미 아인 백작과 네 사이는 끝났어.”

오랫동안 착한 척하는 게 재수 없다고 여기긴 했지만 그게 본모습이라고 믿었던 알렉세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호라이슨은 알렉세이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서 조종했던 거였다.

호라이슨 또한 에스퍼였다. 아인과 같은 가이드를 탐내지 않을 리 없었는데… 자신은 이복동생을 싫다고 해놓곤 참 좋아하고 믿었던 거다.

“아니야! 아니라고!”

“아인 백작이 내 가이드가 되고 싶다고 했어. 여기서 행패 부리지 말고 꺼져.”

“설마… 너희 잤어?”

“어. 그런데? 오메가끼리라고 못 잘 거 없지. 둘 다 좆 달리고, 구멍도 있는데.”

믿을 수 없었다. 아인이 호라이슨과 잤단다. 알렉세이는 아인의 침실로 달려갔다.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하면 순식간에 도착할 텐데,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공황 상태였다. 잠자고 있던 아인을 강간했다.

괴로워하는 아인의 표정을 보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그가 원망스럽고,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방을 나서는데 콥콥이가 서 있었다. 그가 자신을 끌어안고 등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별 볼 일 없는 오메가였지만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아낀다는 게 느껴졌다.

콥콥이와 장소를 옮겼다. 그가 말했다.

“황태자 전하, 사실 저는 어렸을 때 오메가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다는 누명을 쓰고 알파 아버지에게 살해당했어요. 그때부터 혼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 몰라요.”

자신도 그랬다. 알렉세이의 눈빛이 달라졌다. 콥콥이가 다르게 보였다.

“저랑 페어를 맺은 에스퍼는 몹시 문란하고 돈을 밝히는 알파였어요. 전 그와 페어를 맺었을 때,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았고요. 그래서 황태자 전하에게 질투 작전을 함께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흔쾌히 수락한 거예요. 황태자 전하는 잘 되길 바랐거든요.”

알렉세이는 콥콥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게 되었다. 선하게 웃는 열성 오메가는 그 자신이었다.

“만일 괜찮다면, 저랑 페어를 맺지 않으실래요?”

“네 페어 에스퍼는 어쩌고?”

“버림받았어요. 다른 가이드가 좋다며 절 버렸어요.”

콥콥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알렉세이는 콥콥이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키스했다. 그들은 빈방에 들어가서 몸을 섞었다. 알렉세이는 충동적으로 콥콥이에게 각인을 했다.

알파와 오메가의 각인은 호르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알파는 각인한 오메가와 번식을 하기 위해 상대방을 더 아름답게 보고, 상대방의 페로몬을 더 감미롭게 느끼게 된다. 각인의 마법으로 알렉세이는 콥콥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알렉세이는 콥콥이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따뜻함이 차올랐다.

“콥콥아, 이름이 뭐야?”

“…제이콥이에요.”

“그래, 제이콥. 좋은 이름이야.”

알렉세이는 제이콥의 입술에 키스했다. C급 가이드와 각인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어차피 그는 여태 잘 지냈다. 아인의 가이딩이 없어도 괜찮을 거다. 한 번도 에스퍼로 살면서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이제부터 제이콥을 자신의 가이드로 삼아서 행복한 가정을 꾸릴 거다. 알렉세이는 제이콥과 쉬지 않고 섹스를 했다. 모자란 닉스의 양 때문에 에테르를 만족스럽게 정화하려면 그래야 했다.

며칠을 그렇게 섹스만 했는지 모르겠다. 시종들을 불러서 제이콥과 각인을 했으니, 기념 파티를 준비하라고 했다. 제이콥이 수줍게 알렉세이의 자지에 키스를 했다.

“고마워요. 알렉.”

***

초대한 손님이 없음에도 모래궁에서 각인 기념 파티를 여는 건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알렉세이는 파티를 감행했다.

예상대로 아인 페르디안이 왔다. 시종들이 이제 알렉세이의 가이드가 아닌 아인을 내쫓으려고 했다.

“아… 아니야. 아니야. 알렉세이. 제가 당신의 가이드잖아요. 왜 저런 못생긴 열성 오메가 따위랑 각인한 거예요. 난 10년이나 함께한 당신의 페어라고요.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그럴 수 있어요. 흑.”

아인이 처음으로 알렉세이에게 매달렸다. 추악하게도 희열을 느꼈다. 더 많이 자신에게 달라붙어서 애원했으면 싶었다.

“추하게 무슨 짓이야. 그리고 어디서 감히 너 따위가 어디서 황태자비를 못생긴 열성 오메가라고 하지?”

알렉세이는 자신의 발아래 굴복한 아인 때문에 참을 수 없이 기뻤다. 그 자리에서 박장대소를 할 뻔했다. 진작 그는 이렇게 자신에게 관심을 줬어야 했다.

고작 몸이나 팔고, 아버지를 배신한 페르디안 가문의 수치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상처받았던 걸까. 호라이슨과 잔 아인도, 자신의 가이드를 빼앗은 호라이슨도 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아인의 손등을 구둣발로 짓밟았다.

“아악. 아파. 아파요. 아아악. 흐흐흑흑. 흑흑. 흑. 알렉세이. 제발 그러지 마세요. 나 임….”

갑자기 울면서 뭔가 이야기하려던 아인이 입을 굳게 닫았다. 제이콥이 알렉세이의 팔을 잡아당기며 애교를 부렸다. 알렉세이는 보란 듯이 제이콥에게 키스했다. 아인이 울면서 파티장에서 도망쳤다.

자신을 배신한 가이드에게 복수했는데도 뛸 듯이 기쁘지 않았다. 글레이즈 도넛을 먹고 손가락에 끈적끈적한 설탕의 흔적이 남은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 알렉세이는 이제 더 이상 아인 페르디안과 얽힐 일이 없을 거라 여기고 신경 끄기로 했다.

그런데 황제로부터 이상한 호출을 받았다. 아무런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알렉세이의 뺨을 때리고,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시켰다. 알렉세이는 델리칸 공작이라는 작위를 받고 황궁에서 내쫓겼다.

왜? 도대체 왜? 설마 아인 페르디안이 황제에게 술수를 부린 걸까? 그 달콤한 페로몬과 환상적인 잠자리 실력으로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렸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인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매력적인 우성 오메가였다.

알렉세이만 모든 것을 잃었다. 형제도, 황태자의 지위도, 그리고 오랜 가이드도… 제이콥이 자신의 새로운 가이드이긴 했지만, 알렉세이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아인 때문에 상실한 기분이었다.

이 기분을 어디에 풀어야 할지 몰랐다. 제이콥이 상실감에 폐인이 된 알렉세이에게 알몸으로 회초리를 들고 왔다.

“알렉, 기분이 풀릴 때까지 절 때려주세요.”

“…무슨 미친 소리야.”

“전 맞으면서 강압적으로 섹스하는 걸 좋아해요. 나와 함께 플레이를 하다 보면 알렉세이의 기분도 나아질 거예요.”

제이콥은 알렉세이의 안에 숨어 있던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일깨워줬다. 그는 연상의 노련한 오메가의 지도에 따라 어둠의 맛을 보게 되었다. 그가 안겨주는 엄청난 열락에 푹 빠져 알렉세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섹스만 하며 지냈다.

알렉세이의 세계에는 오직 섹스밖에 없게 되었다. 제이콥의 등급이 낮은 건 문제 되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아인이 사라지면 자신에게 엄청난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헛것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S급 가이드 따위 별거 아니었다. 그러다 제이콥을 호위하고 있는 에스퍼 기사들에게 연락이 왔다. 아인이 건달을 사서 제이콥을 강간하려고 했단다.

“하! 어이가 없네.”

우리의 관계는 끝난 게 아니었다. 기력 없이 침대에 쓰러져 있던 알렉세이의 눈에 비록 잔혹한 분노라 할지라도 생기가 돌아왔다. 그는 얼른 옷을 챙겨 입었다. 아인 페르디안을 가둔 밀실로 향했다.

“감히 내 가이드를 강간하려고 하고,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했네.”

예전에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인의 페르몬을 맡을 수 있었는데, 더 이상 아무 냄새도 맡아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다른 오메가에게 각인했다는 사실이 그제야 피부에 와 닿았다.

혈관을 타고 개미가 돌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피부를 손톱으로 박박 끓었다. 마약 중독자처럼 금단증상을 느끼게 된 거였지만 알렉세이는 자각하지 못했다.

“내 오메가를 강간하려는 건달들은 어디에 뒀지?”

알렉세이의 물음에 충실한 기사가 답했다.

“감옥에 가뒀습니다.”

“데려와. 어차피 그 새끼들은 돈 받고 고용된 알파들이잖아. 돈을 받았으면 일을 해야지. 내 오메가 대신 저 오메가를 강간하게 하면 되겠네.”

기사들이 감옥에서 알파 둘을 꺼내왔다. 알파들은 황태자였으나 이제는 공작으로 좌천된 알렉세이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며 꼼짝 못 했다. 겁먹은 쥐새끼처럼 벌벌 떠는 그들에게 알렉세이가 말했다.

“너희가 그렇게 오메가를 잘 강간한다고? 그럼 저것도 한번 조져봐. 만일 살아 있으면 너희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서로를 곁눈질로 보던 알파 둘이 다급하게 ‘예!’ 대답했다. 알파들은 주춤하는 듯싶더니만 아인에게 코를 처박고 페로몬 냄새를 맡고는 바로 발정했다. 바지를 내리고 발기한 물건을 손으로 만졌다.

알렉세이가 굳이 이 추잡한 광경을 지켜볼 필요는 없었다. 일만 시키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아 구경꾼을 자처했다. 알파들은 처참하게 아인을 짓밟았다.

알렉세이가 그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괴롭히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부류이기 때문이었다. 아인의 손톱이 바닥을 긁어대느라 뒤집혀서 빠졌다. 알파 중 하나가 만년필을 가져와 아인의 하얀 엉덩이 피부에 상처를 냈다.

비명 소리, 그리고 저를 그렇게 만든 존재가 바로 알렉세이인데도 구원을 바라는 간절한 눈빛. 이 모든 게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아인의 엉덩이에 걸레 남창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그 누구보다 그에게 어울리는 단어였지만, 알렉세이는 속에서 천불이 끓어올랐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아인 페르디안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그저 오랫동안 사이 나빴던 페어였을 뿐인데 말이다.

알파들이 피를 흘리는 엉덩이 상처를 손톱으로 긁었다. 아인은 울면서 살려달라고 외쳤다. 알렉세이는 귀가 들리지 않는 양 모른 척했다. 아인이 알렉세이에게 기어가려고 했지만, 날개뼈를 한 명이 짓밟아서 방해했다.

“으으으으으.”

아인은 괴로워하며 신음을 흘렸다. 고통밖에 없는 흐느낌조차 잔인한 알파들은 흥분 거리로 여겼다.

“야, 궁금하지 않냐? 알파 둘이 동시에 노팅하면 과연 누구 아이를 임신하게 될지.”

“킥킥. 당연히 내 애지. 내 정액이 더 세.”

“미친. 내기해볼래?”

벌레처럼 발로 밟혀서 움직이지 못하는 아인이 알렉세이를 붙잡고자 팔을 내뻗었다. 발가락이 움찔 떨렸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알렉세이.”

알렉세이가 입꼬리만 올린 채 차갑게 비웃었다.

“잘 어울리네. 이안 백작.”

유치하게 틀린 이름으로 불렀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알렉세이를 향해 필사적으로 뻗었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알파 둘이 아인에게 달라붙어서 삽입했다. 그리고 그들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노팅을 시도했다. 알렉세이는 배가 터져서 죽은 아인을 보고도 실감하지 못해 무감각했다.

“치워.”

시종장이 시종을 시켜서 아인의 시체를 가져갔다. 알렉세이는 더 이상 아인 페르디안을 신경 쓰지 않아서 좋다고 되뇌었다. 그러나 복도를 걷는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

그는 등 뒤에 있는 알파 둘을 아인과 똑같이 배를 터트려서 죽였다. 사방으로 살점과 피, 찢어진 내장이 날아갔다. 하이에나들이 파먹은 시체 조각처럼 난도질 된 파편들이 알렉세이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알렉세이는 멈췄던 발걸음을 옮겼다. 시종장은 소각장에서 아인을 태웠다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복도 창문 밖으로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공기가 습기를 머금자 피 냄새가 더 진하게 맡아졌다.

그는 침실로 돌아와 깨끗이 목욕을 했다. 그리고 각인을 한 오메가를 안았다. 더, 더 많은 닉스가 필요했다. 능력을 사용했으니 더욱 제이콥에게서 닉스를 빼앗아야 했다. 더럽혀진 에테르가 더디게 정화되었다.

제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앞에 놓인 건 산송장 같은 제이콥이었다. 건장한 체격이었던 오메가가 어느새 삐쩍 말라비틀어져 죽어가고 있었다.

“…제이콥. 날 왜 말리지 않았어.”

“괜찮아요. 저 더 견딜 수 있어요.”

알렉세이는 제이콥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누구도 문장에 다른 의미가 담길 수 있음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이콥을 쉬지 않고 안았다. 제이콥이 침대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알렉세이는 그런 제이콥을 끌고 가 다시 관계를 맺었다. 눈앞에서 알파 둘에게 능욕당하던 아인 페르디안이 잊히지 않았다.

제이콥의 얼굴 위로 알렉세이의 눈물이 떨어졌다. 살려달라며 울었던 아인의 얼굴이 제이콥과 겹쳐졌다. 알렉세이는 제이콥, 아니 아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네가 잘못한 거야.”

“흐흑흑흑.”

“그렇지만 용서해줄게. 다시 시작하자.”

“도대체 뭘요. 뭘 용서하고 다시 시작하자는 거예요! 내가 아니라 아인 백작한테 말하는 거잖아요. 지금!”

제이콥이 알렉세이의 뺨을 내리쳤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 정신이 돌아왔다. 알렉세이는 만일 각인이 없었다면, 살과 근육이 다 빠져 해골밖에 남지 않은 제이콥을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가.”

“….”

“가, 제이콥. 이러다가 내가 널 죽일지도 몰라. 어서 나한테서 도망쳐.”

알렉세이가 물러나자 제이콥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네발로 기어서 도망쳐 방을 나갔다. 제이콥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헐레벌떡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올랐다.

그는 오른손이 불편하게 느껴져 들어 올려서 확인했다. 다섯 손가락이 뒤엉켜 있었다.

“제논이 그랬는데. 내 가이드 만나기 전까지 능력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흡흑. 흑흑.”

와닿지 않았던 오메가 아버지의 걱정이 무엇이었는지 알렉세이는 알 것만 같았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달은 지금에서야 말이다. 그는 숨만 쉬며 가만히 있었다.

에테르가 전신을 돌 때마다 더러워지고 있었다. 에스퍼들은 가이드가 없으면 시한부 인생이다. 그런데 알렉세이는 그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주인을 몰라보고, 자신이 그의 주인인 양 굴고 싶어 했다. 그가 자신의 이복동생과 섹스를 하든 뭘 하든, 버리지 않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했다.

***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알렉세이는 아인의 처음이 자신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어두운 방 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누가 방문을 열었다.

아인인가 하고 눈만 들어 올려 쳐다보니, 호라이슨이었다. 그가 알렉세이의 멱살을 들어 올렸다.

“이 미친 새끼야!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 줄 알아. 감히 누굴 죽여!”

한참 늦었네. 이제야 아인이 죽은 걸 알다니. 호라이슨이 알렉세이의 뺨을 마구 때렸다. 알렉세이는 뭉그러진 손으로 그 손을 막아냈다. 호라이슨이 알렉세이의 상태를 보고는 조소했다.

“하! 하! 병신. 네가 네 꼴을 자처한 거야.”

안다. 이제 그런 것쯤은.

“죽지 마. 죽어도 오리하르콘 벙커 들어가서 죽여. 이 씹새끼야. 넌 폭주하는 것도 민폐다. 수많은 사람들의 죄 없는 목숨 빼앗지 말고, 죽을 거면 너 혼자면 뒈져.”

황태자가 된 호라이슨 뒤로 수많은 에스퍼 기사들이 보였다. 혹시라도 반항하는 알렉세이를 제압하기 위해 기사단 전체가 공작저로 온 것이었다. 알렉세이는 반항하지 않았다. 두 팔이 들려서 일으켜졌다.

호라이슨은 평온해 보이는 알렉세이의 표정을 보고 이성을 잃고 격분했다. 알렉세이가 아는 한, 언제나 어른스럽고 뭐든지 능숙했던 호라이슨이 말이다.

“넌 더 절망해야 해. 산지옥에서 불타는 괴로움을 느껴야 해. 그게 네가 아인을 죽인 벌이야.”

알렉세이는 이미 그러고 있었다. 호라이슨은 그 정도는 어림도 없다는 듯 말했다.

“아인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어. 넌 그냥 내 말 한마디에 휘둘려서 그를 죽인 거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축 늘어졌던 알렉세이의 고개가 번쩍 들어 올려졌다.

“난 그에게 내 페어 가이드가 되어달라고 했는데 거절당했어. 넌 아직도 네가 억울하게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당했다고 생각하지? 전혀 아니야. 넌 자업자득이야.”

호라이슨은 말로 알렉세이를 죽이고자 들었다. 어차피 알렉세이의 몸은 스스로의 힘을 견디지 못해 에테르에 잠식되어 죽어갔다. 그러니 영혼이라도 상처 내고 불구로 만들어놔야 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아인은 네 아이를 임신했어. 그런데 네가 엉뚱한 오메가와 각인을 했지. 황제 폐하께서는 알파의 페로몬을 받을 수 없어서 유산하게 될 황손 때문에 분노해 널 내쫓은 거야. 모든 게 다 네 잘못이야. 알렉세이 델리칸.”

언제나 호라이슨과 함께 유르한이라는 성을 사용했던 알렉세이는 델리칸이라고 불리자 그게 마치 자신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아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인아. 아인아!”

알렉세이는 그를 붙잡고 있던 에스퍼 기사들을 물리치고 공작저에 위치한 소각장으로 향했다. 아인의 시체를 불태웠던 날, 비가 내렸다. 분명 제대로 불타지 못하고 남아 있을 것이다.

알렉세이는 제 안에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짜내서 에스퍼 기사단을 뿌리치고, 소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검게 타다 만 쓰레기 더미를 뭉툭한 손으로 휘저으며 아인의 시체를 찾았다.

“어… 어… 이게…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나는 그냥 잘해보려고 그랬는데….”

지능까지 낮아져 버릴 걸까. 어눌한 발음으로 말하는 주제에 말까지 더듬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알렉세이는 피부가 검게 타 쓰레기랑 뒤엉킨 채 녹아내린 아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아…아인아…아인아….”

알렉세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에스퍼로 평가되었지만 사실 가장 연약한 존재였다. 아인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었다.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레아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대로 폭주해서 죽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무너진 레아가 더 커다랗게 뭉쳐지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에테르가 증식하고 있었다. SS등급으로 2차 각성하게 된 것이다. 왜 하필 이럴 때 각성한단 말인가.

에스퍼 기사들이 소각장에서 시체를 끌어안고 있는 알렉세이를 체포했다. 알렉세이에게서 아인의 시체를 빼앗았다. 알렉세이가 돌려달라고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더 이상 아인 페르디안의 에스퍼가 아니었다.

그 어떤 것도, 아인의 머리카락 한 올도 소유할 수 없는 타인이었다. 알렉세이는 오리하르콘 벙커에 갇히게 되었다. 그가 그곳에서 폭주해 죽길 바라는 사람들은 물과 먹을 것을 넣어주지 않았다.

그는 한 달 동안 천천히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정작 알렉세이를 죽인 건 배고픔과 갈증이 아니었다. 가이드가 없어서 정화하지 못한 에테르가 날뛰어서 심장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의 거대한 폭탄이 되었다.

작은 심장에서 시작된 폭발은 서서히 뻗어나가 유르한 제국을 집어삼키고, 더 나아가 그 주변 나라, 그보다 더 멀리 떨어진 대륙, 마지막으로 인간계 전역을 파괴했다.

알렉세이 델리칸은 세상을 파괴하는, 지상에 강림한 가장 강력한 마왕 노릇을 하면서도 계속 아인 페르디안을 떠올렸다.

만일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그를 반드시 아껴주겠노라고,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고, 소중하게 대해주겠다고 생각했다.

창조신이 알렉세이 델리칸에게 물었다.

‘후회하는가.’

‘네. 후회합니다.’

‘너는 그에게 용서받을 것 같으냐.’

‘아니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창조신은 그 아인 페르디안이 아닌 다른 아인을 지구에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용서받지 못하고, 똑같은 비극을 반복해 세상을 멸망시킬 수 없으니 말이다.

호라이슨은 왜 자신이 이런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파괴된 세계는 셀 수 없이 많은 별과 행성으로 가득한 은하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은하계들이 수억 수조 수경 수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모여서 하나의 작은 구슬로 집약되었다.

그는 그 작은 구슬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눈앞에 있는 존재가 정말 창조신이라면 어째서 자신의 꿈에 나타나, 알렉세이가 자신을 잃고 후회했던 걸 알려주나 싶었다.

‘아이는 부모에게 신이다. 부모의 세상은 오로지 아이를 위주로 돌아간다.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창조신은 같은 내용인데 아이와 부모라는 주체를 바꿔서 다시 말했다.

‘부모는 아이에게 신이다. 아이의 세상은 오로지 부모를 위주로 돌아간다.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호라이슨은 설마 하고 자신이 안은 구슬을 들여다봤다.

‘너의 신은 네가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길 바란다. 이것이 이미 소멸된 세계의 알렉세이 기억을 너에게 보여준 이유다. 호라이슨, 너는 더 이상 아인 페르디안이 아니다. 그 이름은 이제 너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호라이슨은 창조신을 보고 있음에도 그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오메가인지 베타인지 알파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심지어는 아이인지 청년인지 노인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어둠인 줄 알았으나 빛이었고, 빛이라 눈부셔했으나 어두워서 볼 수 없었다.

‘네가 원한다면 전생의 기억들을 지워줄 수 있다. 그러겠느냐.’

‘아니요. 이제 괜찮아요. 반드시 하고 싶은 게 있으니, 제 기억도 슬픔도 모두 안고 가려고 합니다.’

‘그래, 어리석으면서 현명한 답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호라이슨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주다의 갈색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부담스럽게 왜 자는 사람을 지켜보고 있나 싶다. 그렇지만 기분 나쁘긴커녕 하늘을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어!”

잠에서 깨어난 호라이슨이 놀라자 주다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호라이슨의 레아에 가득 피어 있던 하얀 동백꽃이 바람에 휘날렸다. 주다의 입이 벌어졌다. 그의 레아에서도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하얀 동백꽃은 상처받은 호라이슨의 영혼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하고, 상대의 감정을 의심했던 꽃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나의 사랑을 경멸하는 것입니까?’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하얀 꽃잎이 사랑을 머금자 파르르 떨리며 수줍은 호라이슨의 뺨처럼 붉게 물들었다. 붉은 동백꽃도, 하얀 동백꽃도 모두 같은 동백꽃인데 그저 색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의미가 전혀 다르게 변했다.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호라이슨은 붉게 물든 자신의 레아를 둘러봤다. 주다의 레아가 안개처럼 자신의 레아 위에 올라갔다. 두 레아가 합쳐진 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그들은 에스퍼끼리는 불가능한 본딩을 맺은 거다.

호라이슨의 성향은 땅이었기에, 아래쪽에 위치하게 되었지만 왜 2차 전직을 ‘스카이 워커’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가이드가 된 호라이슨을 주다가 멍하니 바라봤다.

호라이슨은 주다의 손을 잡았다. 찌릿. 스파크가 튀었다. 주다의 에테르를 호라이슨의 닉스가 정화하였다. 호라이슨은 문득 주다에게 묻고 싶었다. 전생에서는 모두가 자신을 나쁘다고 했다.

“주다, 나 착해?”

“네!”

“얼마만큼 착해?”

“세상에서 제일 착하십니다.”

아아, 그래. 이런 바보 같은 주다이니 계속 자신의 곁에 붙어 있는 거겠지. 호라이슨은 그의 입술에 쪽 입술을 맞추고 말했다.

“나 임신한 것 같아.”

“헉! 너무 좋아요. 너무 행복해서 미치겠어요.”

“방금 태몽 꿨어. 그런데 너무 스케일이 커서 개꿈일 수도 있으니까 기대는 하지 마.”

“그래도 기쁩니다. 호라이슨이 저와의 아이를 상상해주신 것만으로도 전 충분히 행복해요.”

주다가 호라이슨의 두 손을 붙잡고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호라이슨도 덩달아 웃어버렸다. 바보 같은 소리였다. 헛소리 말고 빨리 임신 검사 마도구나 구해 오라고 했다. 시종들을 시키면 되는데 주다는 직접 성 밖으로 달려 나갔다.

가이드로서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은 이제 새로운 에스퍼를 만나 사랑받게 되었다. 이쯤 되어도 완벽한 해피엔딩이다 싶은데, 눈 속에서 조난당한 샤를 상단의 마차를 주다가 구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샤를 백작은 북대륙에 있는 광산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마정석이 나왔다. 샤를과 상단 직원들은 땅에 파묻힌 마정석의 양이 엄청나, 남대륙으로 옮기는 철도사업을 하고자 사전 탐사를 왔다가 그런 사고를 겪게 된 거였다.

주다는 샤를과 상단 직원들에게 따뜻한 꿀차를 대접했다. 모닥불 앞에서 양모 담요를 두른 조난자들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샤를이 통신 마도구를 빌려 알렉세이 황제에게 연락을 취했다. 알렉세이가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해 바로 샤를을 데리러 왔다.

주다가 떠나는 샤를과 상단 직원들에게 배웅 인사를 했다. 호라이슨은 샤를을 뚫어지게 지켜보다가 그에게 두 팔을 쭉 뻗었다. 아무리 안아달라고 해도 소용없었던 전생의 샤를과 달리, 샤를이 호라이슨을 단단하게 끌어안아 줬다.

“죄송해요. 제 의도가 아니었어요.”

호라이슨은 과거에는 하지 못했던 사과를 전했다. 샤를은 호라이슨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해악을 끼쳤던 일을 떠올렸다. 아놀드 후작이 보석 상점에서 페르디안 가문 사람들을 다 죽이려고 했었다.

“아놀드 후작의 일이라면 이제 괜찮습니다. 그는 실종되었으니까요.”

“그거 말고도 또 있어요. 아주 오래전 일이에요.”

생각이 깊은 그는 같은 귀족을 죽이고 받아야 했던 과한 형량 또한 후작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떠올려내고, 호라이슨의 사과를 받아줬다. 호라이슨은 그냥 이대로 그가 오해하게 두기로 했다. 이 이상 밝히는 건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 뿐이었다.

“아마 아놀드 후작은 제 둘째 아들처럼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조차 그가 에스퍼라는 걸 몰랐으니, 아주 낮은 등급이었겠죠. 그랬으니 자기 죽음은 보지 못해 그리한 거 아니겠습니까.”

샤를이 호라이슨의 등을 쓰다듬어줬다. 그의 따스한 품에서 호라이슨은 하염없이 울었다.

“죄송해요. 흑.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아놀드 후작이 과잉 충성해서 저지른 독단적인 범죄이지 않습니까. 당신께서 아인이를 괴롭혔던 일 또한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제 예상대로 호라이슨 님께서 착하고 좋은 분이어서 오히려 저는 좋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알렉세이는 묵묵히 부자의 이별을 기다려줬다. 호라이슨은 마지막 남은 전생의 미련을 이것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잘 가세요. 샤를 백작.”

“호라이슨 님도 건강하십시오.”

알렉세이의 공간 이동 능력으로 상단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갑자기 복작복작하던 실내공간이 텅 비자 추위가 몰려왔다. 으스스 몸을 떠는 호라이슨을 주다가 팔로 감싸 안았다. 호라이슨은 아직 납작한 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호라이슨 님, 왜 그러세요? 우리 선물이가 어디 아프대요?”

“아니야, 그런 거. 그냥 만져봤어. 하여간 너도 너무 호들갑이야.”

호라이슨은 자신을 유리 취급하는 주다를 구박하며 침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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