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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하여간 희한했다.
눈을 뜬 순간부터 몸이 무거웠다. 꼭 어깨에 뭔가가 올라앉은 것처럼 몸이 뻐근했다. 감기라도 오려나 보지. 메이슨 테일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실 몸이 가벼우면 이상한 때이긴 했다. 이번 임무가 이어진 것이 벌써 두 달째인 것이다. 즉, 벌써 두 달째, 집은 됐으니 지붕이라도 있는 곳에서 잠들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으로 살고 있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이 짓도 진짜 그만둘 거예요.”
마침 비슷한 생각 중이었는지 팀원인 클락이 씨근덕대며 한 말에 메이슨은 “아아.” 하고 싱겁게 쪼갰다. 놈은 3년 째, 임무를 맡을 때마다 저 소리를 했고 여전히 이 짓을 하고 있었다.
“진짜라니까요? 가자마자 제출하려고 사표도 다 써놨어요. 제 사표 읽어 볼래요?”
제가 원래 작가가 꿈이라 글을 기가 막히게 잘 쓴다며 놈은 멍청한 소리를 했고 메이슨은 “사표를 왜 정성들여 쓰는데?” 하고 미간을 구겼다.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니까요? 팀장님은 그런 거 없어요? 꿈같은 거?”
“있지, 왜 없냐. 사람을 뭘로 보고―.”
“팀장님이 꿈이 있다구요?”
팀장님처럼 메마른 사람이? 놈이 무례하게도 그렇게 말했고 메이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아. 지금 당장, 김이 폴폴 날 정도로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따뜻한 우유 한 잔 마시고 바짝 마른 침대에서, 더 이상 졸리지 않을 때까지 자는 거.”
진짜 달콤한 꿈이 아닐 수 없었다. 상상만으로도 몸이 묵직해져 오는 기분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 아 진짜….”
팀장님은 사람이 왜 그래요? ―놈은 질린다는 듯이 말했고 메이슨은 시계를 확인하며 “너야말로 왜 그러냐. 적진 앞에 두고.” 했다. 여유 부리고 있긴 하지만 사선을 넘나드는 작전이긴 했다. 이제 준비가 되면 그들은 타깃의 아지트인 지하 벙커에 잠입해 타깃을 죽이든 이쪽이 죽든 하게 될 것이었다.
“뭐가 왜 그래?”
뒤에서 희한한 표정으로 마스카라를 바르던 애슐리가 물었고 클락은 “누님, 팀장님 진짜 메마른 것 같지 않아요?” 하고 동의를 구했다.
“팀장님은 꿈이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마른 침대에서 자는 거래요.”
“아, 그거 좋은데…….”
애슐리에게 립스틱을 건넸던 프레드는 달큼한 꿈을 꾸듯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고 애슐리는 클락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네가 과하게 질척거리는 거라는 생각은 안하냐? 세상 어느 용병이 시집 따위를 읽어.”
“시집 읽는 게 어때서요? 아 진짜 때려치우고 말거라니까요, 이 메마른 직업. 책 보면 창피한 일인 줄 알고. 뇌에 근육들만 차서….”
“이게 누구보고 근육이래? 고릴라같이 생겨서 시집 들고 질질 짜는 게 얼마나 징그러운 줄 알아?”
놈은 기어코 한 대 더 맞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해서는 품에 둔 사표를 움켜쥐는 놈을 보며 메이슨은 픽픽 웃으며 “카드빚은 다 갚았냐?” 하고 놀렸다.
“이 팀은 정말 여유롭네요. ―준비는 다 됐습니까?”
밖에서 망을 보던 아론이 힐끗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3개월 전에 메이슨의 팀으로 차출된 그는 계획이 결정된 직후부터 내내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었다. 툭 건드리면 ‘사실 이 작전은 무기상 알타를 사살하는 작전으로…,’ 하고 줄줄줄 불 것 같은 초췌한 얼굴이었다.
그는 적진에 매춘상으로 잠입한다는 이 작전을 가장 반대했었다. 지하 벙커에서 두 달째, 한 걸음도 나오지 않는 타깃을 열 두 명의 팀원으로 사살할 방법은 이것뿐이라는 점에선 동의 했지만 여전히 이 계획이 탐탁지 않은 듯 했다.
“여기 있을래?”
슬쩍 묻자 아론은 메이슨의 물음이 자존심 상했는지 “필요 없습니다.”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립스틱을 바르던 애슐리가 은밀한 눈으로 아론을 훔쳐보는 게 보였다. 메이슨의 시선에 그녀가 멋쩍은지 씩 웃는다.
“흠.”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좋은 남자는 아닐 텐데. 용병 일 하는 놈들이 대체로 그렇긴 하지만 저놈도 평범한 쓰레기였다. 어차피 그녀도 모르진 않겠지만.
메이슨은 총들을 점검했다. 작아서 숨기기 좋은 타우러스Taurus의 22구경 피스톨을 발목 쪽에 챙긴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너무 늦어지면 의심할 테니 슬슬 출발할까.”
메이슨은 힐끗 원래 타깃에게 가기로 되어 있던 두 명의 매춘부들과 가드들을 쳐다봤다. 기절한 채 손목이 묶인 가드들 앞에 벌벌 떨며 앉아 있는 매춘부들은 둘 다 금발에 흰 얼굴이었다. 이런 곳에 두더지처럼 숨어 있는 주제에 취향 참 확실하다. 이쪽은 덕분에 일이 쉬워졌지만.
메이슨은 그녀가 더는 놀라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한…, 삼십 분 쯤 뒤에 댁으로 돌아가시면 될 것 같네요.”
알타의 성기는 주인 따라 죽은 뒤일 테니. 인상이 사나운 탓인지 왈칵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들을 뒤로 하고 메이슨은 애슐리를 앞세워 그녀들이 타고 왔던 지프에 올라탔다.
메이슨은 흘러내린 구트라의 스카프를 귀 뒤로 시원하게 넘겼고 아론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흘겼다. 얼굴을 꼭꼭 숨기고 들어가도 모자랄 판에 무슨 개짓이냐는 눈이었다.
“어차피 미국인 얼굴인데 가려서 뭐해.”
“…―당신은 이게 장난 같습니까?”
작전 자체에 불만이 있는 놈은 날카롭게 반응했다. 클락이 툭 치며 “야, 왜 그래?” 하고 말렸지만 아론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따위로 허접하게 짠 작전으로 대강대강…. 목숨이 싸구려인 건 당신뿐일 텐데 왜 다른 사람까지 헐값 취급당해야 됩니까.”
놈은 도발적으로 말했지만 메이슨은 심드렁히 귀를 후볐다.
“그러게 겁나면 그냥 있으라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시발, 말이라도 맞춰봐야 하는 게 아니냐구요!”
“아. 네가 그런 얼굴만 안하면 안 들킨대도.”
메이슨은 이렇게 말하면 놈의 성질이 더 날뛸 것을 알면서도 손사래를 치며 “시집은 네가 읽어야겠다.” 하고 놈의 섬세함을 비꼬았다. 놈의 얼굴이 시뻘게지며 눈에 불꽃이 튀는 것이 보였지만 메이슨은 모래바람을 맞으며 알타의 벙커 입구가 작게 보이는 것을 쳐다봤다.
사실 평소였다면 메이슨도 적당히 놈을 달래 자신이 다 책임질 테니 믿고 따라와 달라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은 그도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무거웠던 어깨는 점점 강하게 짓눌리는 것이, 완전히 돌덩이를 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원혼이라도 눌러 붙었나. 확실히 원한이라면 지지 않게 쌓긴 했다. 오늘도 하나 쌓을 예정이기도 했고.
알타의 벙커 입구가 보였다. 메이슨은 더 말하려는 아론을 저지하며 지프에서 뛰어내려 벙커 입구를 지키고 있는 놈들에게 팔을 휘저어 불렀다.
?이봐! 이봐!?
메이슨의 외침에 벙커 앞에 서 있던 놈들이 총을 겨누며 “뭐야, 너!” 하고 외쳤다. 빙고. 보자마자 쏴서 죽여 버리는 것만 아니면 됐다.
메이슨은 콧노래가 나려는 것을 숨기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놈들은 딱 봐도 미국인처럼 생긴 놈이 무기도 없이 다급한 얼굴로 다가오자 당황한 얼굴이었다.
?연락 받고 여자 데리고 왔는데, 문제가 생겨서….?
메이슨은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어설픈 아랍어로 말했고 놈들은 지들끼리 쳐다보며 의아한 얼굴을 하다가 총을 겨누고 다가왔다.
애슐리는 이야기 한 대로 기절한 척 하고 있었고 메이슨은 그녀를 들춰 매고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이년이 약을 좀 처먹었는데, 아 시발, 물 있어??
?야, 뭐야 너.?
?아, 물 있냐고!?
메이슨은 미친 사람처럼 버럭 소리 질렀다. 그의 박력에 놈들은 움칠했고 뒤에 서 있던 아론도 덩달아 움칠했다.
?이년이 얼마짜리 년인데…, 물, 물 없어??
그가 울 것처럼 당황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하자 그들 중 한 놈이 다가와 애슐리를 살폈고 한 놈은 얼빠진 얼굴로 물을 건넸다. 툭, 메이슨은 실수인 척 놈이 건넨 물을 바닥에 쏟아버렸고, 되레 버럭 ?이 썅…, 장난해!?? 하고 소리 질렀다.
애슐리를 살피던 놈은 멀쩡히 자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곧 메이슨이 그녀의 뺨을 후려갈기며 ?이년아! 일어나!? 하고 소리 지르자 뒤로 물러났다. 벙커 앞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치는 모습에 놈들이 움찔움찔했다.
?안에 의사 있어??
?뭐??
?의사 있냐고! 야, 늬들 얘 죽으면 책임 질 거야!??
메이슨이 버럭 묻자 ?이, 이 새끼가 왜 이래?? 하며 그를 쳐다봤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정말로 죽기 직전인 사람처럼 눈을 파르르 떨며 그는 ?시발, 이년을 얼마 주고 샀는데―, 이년이 죽어버리면 난 파산이라구!? 하고 울먹였다.
?의사 없어? 돈이라면 낼 테니까,?
메이슨은 이년 좀 살려 달라며 매달리듯 눈을 굴렸고 놈들은 당황하며 지들끼리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메이슨이 빨리 빨리 불러달라고 재촉하자 결국 한 놈이 안에 무전을 했다.
?무슨 일이야??
벙커가 열리고 의사인 듯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메이슨은 그를 보자마자 애슐리를 업고 ?고마워, 고마워!? 하고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막무가내로 의사를 끌듯이 붙들고 안으로 들어가는 메이슨을 막지는 못했다. 아론이 급하게 그의 뒤를 따랐고 메이슨은 의사에게 ?침대! 빨리요!? 하고 독촉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침대가 있는 방을 향해 달리는 의사의 뒤를 쫓으며 메이슨은 몰래 씩 웃었다.
이거 참. 속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빙글거린 그는 ‘나 참, 이딴 게…,’ 하고 중얼거리는 아론을 힐끗 쳐다봤다. 그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설마 이따위 계획이 통할까 싶었는데, 정말로 통하니 기가 막힌 듯 했다. 사실 ‘이따위 계획’ 이기 때문에 통한 거지만. 이런 계획은 뒤 돌아서서 제대로 생각하면 ‘미쳤냐?’ 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딱 정당했다. 어차피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멀쩡한 계획으로는 빈틈을 찾을 수 없을테니 말이었다.
메이슨은 앞서가는 의사에게 대뜸 ?알타는 어디 있어요?? 하고 물었다.
?저기. ―아, 이거 알타가 부른 여자야??
의사는 별 생각 없는 듯 안쪽의 방을 가리켰고 메이슨은 땀을 닦으며 웃어 보였다. 굽어지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CCTV와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의사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컥, 의사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꼬꾸라졌고, 아론이 그를 붙잡아 열려있는 빈 방 안으로 던져 넣었다.
“일어나, 애슐리.”
무거워 죽겠다. 어깨에 들춰 매여 있는 애슐리에게 투덜대자 그녀는 “내가 뭐가 무거워?” 하고 작게 신경질을 부리면서도 일어났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 쉬자. 몸이 무거워.”
어깨를 두드리는 메이슨의 말에 그녀는 어린애도 아니고…, 하는 투로 쳐다봤다.
“뭐야. 감기야?”
“몰라.”
“―왜 짜증이야.”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흘겼고 메이슨은 수염이 성성이 난 뺨을 긁으며 주변을 살폈다. 겁 많은 알타의 침실 입구엔 네 명의 남자가 지키고 있었다.
“―…츠.”
저게 감옥이지, 아지트냐. 메이슨은 낮게 혀를 찼다. 사실 알타의 벙커는 가드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안에서 문을 잠그면 대포를 가져오지 않는 한 문을 열 수가 없고, 발견되지 않은 쥐구멍이 많기로 유명해서 문제였다. 대포로 문을 여는 사이 놈이 도주할 게 뻔하니까.
역시 이런 일엔 이런 수밖에 없단 말이지….
메이슨은 빙긋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여자 데려왔,?
밝게 인사하며 친한 척 하려던 그는 순간 멈칫, 표정을 굳혔다. 아주 잠시였지만 순간적으로 목뒤가 서늘했던 탓이었다.
?―뭐??
메이슨이 멈칫하자 놈들이 다가왔고, 애슐리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메이슨은 다시 비굴한 미소를 만면에 올린 채 말했다.
?여자 데려왔는데요. 밖에서 식사 중이신지 저희보고 데리고 들어가라고 해서요.?
힐끗. 애슐리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 보였고, 메이슨은 좀 더 여유로운 얼굴로 웃었다.
잠깐 멈칫하긴 했지만 한 관문을 통과해 들어온 이상에야 문 하나 더 통과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첫 번째 문을 통과한 것 자체가 검증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놈들은 메이슨과 아론이 함께 들어온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 ?이 시간에 뭘 먹어?? 하고 수군대며 일어났다.
쉽게 문이 열렸다. 메이슨은 애슐리를 앞세워 안으로 들어갔다. 메이슨은 빠르게 안을 확인했다. 알타는 침대 앞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메이슨은 아론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했고 놈이 고개를 들었다.
비쩍 마른데다 창백한 얼굴. 쥐처럼 생긴 알타가 “아, 여자? 두 명 불렀는데 왜 하나 뿐이야?” 하고 얼빠진 채 물었다.
“!”
애슐리가 달려가 놈의 입을 주먹으로 퍽, 세게 쳤고 놈은 비명도 못 지르고 쿵! 침대에 엎어졌다. 애슐리는 피로 흠뻑 젖어 앓는 놈의 입을 한 번 더 퍽 내리쳤다. 도망치려는 놈의 머리칼을 붙잡아 입을 틀어막고 “소리 지르면 죽는다.” 말한 것은 메이슨이었다.
“뭐, 뭐―,”
메이슨은 씩, 비열하게 웃었다. 철컥, 일부러 느릿하게 총의 안전장치를 풀며 놈에게 겨눈 그는 애슐리가 놈의 손목을 묶고 입을 틀어막는 동안 침대에 앉아 어깨를 주물렀다. 놈이 번들거리는 눈을 굴려 메이슨은 쳐다봤고, 그는 입술을 쭉 찢어 웃었다. 이런 순간엔 지나칠 정도로 비열한 미소가 도움이 되니까.
“너,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놈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긴. 몰랐으면 이런 감옥 같은데 숨어 있을 리가 없지.
“Zii에 넘기기로 한 설계도. 무슨 깡으로 빼돌렸어?”
메이슨이 싱글거리며 묻자 놈은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냐….
두 달 전, 메이슨이 속한 용병회사 Zii는 알타와 무기회사 BS사이의 천만 달러짜리 거래를 경호했다. BS에게서 돈을 받아 알타에게 건네고 놈에게선 설계도를 가져다 BS에 넘기는 간단한 일이었는데, 설계도의 호송을 맡은 Zii 14팀 팀장 베키가 그 설계도를 들고튀었다.
병신 같은 베키. 미국 최대 규모의 용병회사 Zii는 다른 일로 뒤통수 맞은 적은 제법 있지만 배신자를 놓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베키는 나흘도 못 가 붙들렸고 팔목이 나가기 직전, 자신의 배후를 불었다. 조금 더 빨리 불었다면 양 손 중에 한 손은 건질 수 있었을 텐데….
여하간 놈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예상했던 대로 알타였다.
Zii는 꼴랑 12명인 메이슨의 팀에게 설계도까지 찾아오도록 지시했다. 사실 직접적인 명령은 아니었지만 은밀하게 ‘알타를 죽여도 좋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죽이라는 이야기였다.
알타는 부들부들 떨면서 막힌 입으로 꺽꺽댔다. 메이슨은 놈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설계도. 어디 있어?”
알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실토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놈은 거대 무기상이 될 만큼 약삭빠른 놈이고, 이런 곳에서 두 달이나 버틸 만큼 제 몸을 소중히 여기는 놈이었다. Zii를 상대로 뒤통수 친 건 좀 멍청했지만, 메이슨이 정말로 고문을 가할 것인지 간을 볼 정도로 미련한 인물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놈은 흐으으, 신음 같은 소리를 꺽꺽대며 얼굴로 벽 쪽을 가리켰다.
“…….”
힐끗, 놈이 가리킨 곳을 쳐다본 메이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소리 지르면… 알지? 어차피 이 문 열리지도 않잖아.”
이 겁 많은 놈이 밖에서 쉽게 열릴 문으로 자신의 침실을 지킬 리가 없었다. 메이슨은 고개를 마구 끄덕이는 알타의 입에서 손수건을 빼내 주었다. 놈의 눈이 이리저리 굴렀다.
“애, 애, 액자 뒤에….”
메이슨이 고개를 까딱 하자 애슐리가 액자를 치웠다. 그 안에 작은 금고 문이 있었다.
“그 안에 있어….”
알타가 부들부들 떨며 말했고 메이슨은 놈과 금고를 번갈아 쳐다봤다. 애슐리가 “비밀번호는?” 하고 조급히 물었고 놈이 “463788….” 하고 불었다. 애슐리가 콧노래를 부르며 금고의 문을 쥐었다. 메이슨은 알타의 눈이 순간 번들거리는 것을 보았고, 즉시 들고 있던 총으로 놈의 관자놀이를 퍽! 세게 내리쳤다.
“애슐리! 그거 건드리지 마.”
“―뭐?”
왜, 왜 그래? 그녀가 놀라 물었고 메이슨은 바닥에 넘어진 알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아당겨 일으켰다.
“무, 무슨―,”
“일어나. 네가 열어.”
메이슨의 말에 놈이 흠칫 마른 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애슐리가 질겁하며 손을 뗐다.
“뭐야. 블러핑?”
“―아마. 이렇게 의심 많은 놈이 그런 곳에, 그런 심심한 장금장치가 있는 금고에 천만 달러짜리를 넣어둘 리가 없으니까.”
놈의 반응을 보아 문서 대신 폭탄 같은 게 있을 듯 했다. 폭탄이 터지면 동시에 테이블로 위장한 미니 방공호 같은 데라도 굴러 들어갈 셈이었겠지.
“네 손으로 열게 해줄까, 아니면 진짜를 꺼낼래?”
메이슨이 빙글거리며 묻자 알타는 눈을 굴리다가 물었다.
“나, 날 죽일 거야?”
“글쎄. 상부에선 널 ‘죽여도 좋다’ 고 했어.”
메이슨의 말에 그가 하얗게 질려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죽여도 좋다’ 가 ‘죽여 버려’ 와 동의어라는 걸 아는 얼굴이었다.
“거, 거래를 하지 않을래?”
“거래?”
“침대 밑에 있는 금고에 미사일 설계도랑 내 전재산이 든 스위스 은행의 계좌 열쇠가 있어. 저, 전부 줄 테니 살려줘.”
메이슨이 힐끗, 애슐리를 쳐다보자 그녀가 매트리스를 치웠다. 끼익, 아무것도 없는 것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고 놈은 침대를 열라고 시켰다. 침대 밑의 작은 홈으로 손가락을 넣어 판을 치우자 성인 가슴팍만한 정육각형의 금고 하나가 나왔다.
“5천만 달러정도야.”
놈의 말에 애슐리와 아론의 목에서 꿀꺽하는 소리가 들렸고 메이슨은 미간을 찌푸렸다. 힐끗, 문 앞에 서 있는 아론을 쳐다보자 놈은 약간 마른 입술을 축이며 애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5천만 달러. 어마어마한 금액이긴 했다. 놈은 애슐리와 아론의 동요를 느꼈는지 부들부들 떨면서도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나, 날 살려주면 비밀 번호를 알려줄게.”
“저 안에 든 게 진짜라는 건 어떻게 믿지?”
물은 것은 아론이었다. 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왔다.
“―…,”
메이슨은 헛생각하지 말라고 경고를 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내 무겁던 어깨 탓인지 피곤해 그런 오지랖을 벌이는 것도 귀찮았다. 어차피 아론이 저 돈을 탐내든 아니든 별 수도 없을 텐데―….
“나, 목숨 걸고 사기 칠 것처럼 보여?”
나 목숨 소중한 건 아는 사람이야. 놈이 말했지만 메이슨은 픽 웃었다. 목숨 소중한 거 아는 놈이 Zii와 BS의 뒤통수를 치나.
사실 메이슨으로서는 저 금고 안에 든 것이 진짜든 아니든 놈과 흥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비, 비밀번호는 여기서 나가면 알려줄게.”
“됐어.”
메이슨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철컥, 총을 장전했다. 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메이슨은 ‘역시 어깨가 무거워.’ 하고 생각하며 무심하게 놈을 쳐다봤다.
“그냥 저대로 Zii에 가져다줄래. 비밀번호는 위에 똑똑한 사람들이 알아서 찾겠지.”
금고 통째로 가져다주는 건, 이런 까다로운 일에 고작 12명을 배치한 상부에게 먹일 엿으로 적당했다. 금고나 열쇠를 제법 오랫동안 만졌던 메이슨의 눈엔 저놈 없이 저 금고를 여는 게 얼마나 까다롭고 시발스러울 지 너무나 훤히 보였다.
“자, 잠깐만, 5천만 달러라니까, 잠깐만, 비밀 번호를 말할게! 내 홍채가 필요하고, 지문도 필요하다니까!”
“그러니까―, 됐다고.”
“12, 36.5, 37…,”
놈이 다급하게 기어오며 비밀번호를 쏟아내듯 말했고 메이슨은 미간을 구기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저걸 다 들으면 상부에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건 사양이었다. 이 비밀번호를 알려주면 이사, 베레타는 늘 그렇듯 히죽대며 웃을 테고, 그리고 그 다음에 또 이런 엿 같은 일에 메이슨을 배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팀장, 잠깐―!”
등 뒤에서 아론이 부르는 것이 들렸지만 메이슨은 지체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덜덜 떨며 숨을 삼키는 알타의 입술이 마지막 비밀번호를 말하는 것이 보였지만 못 본 척 했다.
“―!!”
소음기를 부착한 총에서 날아간 총알은 알타의 가슴을 꿰뚫었다. 놈이 쿨럭, 하고 피를 꿀럭꿀럭 쏟으며 무릎을 꿇었다. 허억, 허억, 하고 되도 않는 숨을 뱉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메이슨은….
“…―무, 무슨 짓이야, 아론!”
애슐리가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
메이슨은 미간을 타고 쏟아지는 진득한 핏물에 입술을 달싹였다. 상황을 파악할 새 같은 건 없었다. 아침부터 내내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공기는 폐차를 부수는 압축기처럼 메이슨을 위에서 찍어 눌렀다.
메이슨은 눈을 깜빡였다. 애슐리가 덜덜 떨며 “티, 팀장…, 팀장…,” 하고 불렀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린 뜨겁고 진득한 무언가가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고 눈치 채지 못한 사이 차가운 바닥이 뺨에 닿았다. 잠시 힉, 숨을 내뱉으려 했지만 코와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와 바닥으로 흘렀다. 온몸이 파들거리며 경련했다. 아주 순간적인 일이었다.
눈앞에 불빛이 빠른 속도로 작아져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이마 한 가운데부터 시작된 끔찍한 냉기는 온몸을 감쌌고 손끝부터 감각이 사라졌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애슐리가 비명처럼 소리 질렀고 아론이 저벅거리며 걸어 다가오는 것이 어둑해진 시야로 보였다. 죽은 건지 죽어가는 건지 축 쳐진 알타의 머리를 붙잡은 놈은 그녀에게 총을 겨누고 뭐라고 말했다. 뭔가를 권하는 것 같았지만 더 이상 들을 수는 없었다.
“……―.”
이미 마지막 숨이 흘러나간 뒤기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부터 내내 메이슨을 잡아먹기 위해 어깨에 내려앉아 있던 새까만 기운은 기어코 그를 덮쳐 한 입에 삼켰다.
죽음의 뱃속은 차고 검었다.
* * *
그와 비슷한 시각, LA의 한 저택.
제법 고급 저택인 그곳은 불이 꺼져 있기 때문인지, 약간 외진 곳에 있기 때문인지, 혹은 하늘에 뜬 희끗한 달 때문인지 조금 음침해 보였다. 저택은 너무나 고요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저택 깊은 곳,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오는 습하고 작은 창고 구석. 그 곳에 있는 나무 문 안쪽에선 작은 기계 소리와 물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한참동안 이어지던 소리가 끊어진 것은 한 순간이었다.
끼이익―. 나무 문이 열렸고 안에서 한 남자가 피곤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식은땀에 젖어 지하실에서 걸어 나온 그는 힐끔, 지하실 문을 조금만 열고 틈새로 담벼락 너머를 쳐다봤다. 그의 핏발 선 눈이 희번덕거렸다. 시선 끝에 반짝이는 카메라 렌즈가 걸렸다.
저 지긋지긋한 파파라치 놈들…. 어둠 속에서도 놈들이 담 너머로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고 있는 것이 훤히 보였다. 내일이면 저놈들이 먹고 버린 햄버거의 포장지가 담 밑에 가득이겠지.
남자는 다시 문을 닫고 다른 계단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가 벽에 붙은 버튼을 눌렀다. 그의 손짓에 모든 창의 블라인드가 내려갔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완전히 차단된 거실은 냉랭한 기운이 풍겼다. 툭.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신문 더미가 그의 발에 채였다.
낮에 남자의 매니저 토니 브리짓이 가져다준 그 신문은 온통 자극적이고 신랄한 어조의 헤드라인이 붙어 있었다.
?…헤일리, 레이노아에게 고백?!?
?헐리웃 악동 헤일리 러스크, 미국의 성역 레이노아에게 정말로 사귀자고 말했나. ―지난 밤 헤일리 러스크가 레이노아에게 연심을 고백한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
그리고 그 비난과 조롱 일색의 기사엔 남자의 후지게 나온 사진이 여기저기 박혀 있었다.
?오 마이 갓, 헤일리! 레이노아에게 프러포즈. 드디어 미쳤나?? 자극적인 헤드라인에는 남자가 지난 해 마약 재활원에서 담을 넘어 도망치던 때의 사진을 사용했고 ?헤일리 러스크vs레이칼튼 노아? 기사에는 그가 음주운전으로 사회봉사 명령을 받고 법원을 빠져 나가다 커피를 들고 넘어진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사진이었다.
남자는 발로 신문을 와작 밟으며 돌아섰다.
거실 벽에는 신문과는 달리 아름다운 남자의 사진이 잔뜩 걸려 있었다. 모두 그의 어린 시절 사진이었다.
그는 아역출신 배우였다. 어린 시절의 남자는 아주 잘나갔지만 부모가 갑작스런 사고로 죽은 후 급속도로 망가졌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섹스를 하고 약을 했다. 귀엽고 사랑스럽던 외모는 타락에 찌들어 우울하고 평범해졌다.
유산과 스스로가 번 돈은 천문학적 액수였지만 벌레 같은 친척들에게 뜯기고, 남자 자신의 사치와 사고를 처리하는 사이 재정 상태는 파산 직전에 이르렀다. 이런 소비상황이 계속된다면 1년 안에 파산할 거라는 회계사의 경고가 있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눈에 자신은 여전히 저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역시절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파파라치들에게 찍힌 현재의 사진들은 모두 악의적인 사진들뿐이며, 가끔 찍는 모델 사진도 사진사가 자신을 싫어하기 때문에 엉망으로 보이는 것뿐으로, 당장은 사정이 좀 안 좋지만 조금만 관리를 하면 언제든 저때로 돌아갈 수 있다고 그는 거만하게 생각했다. 그럼 분명 광고며 영화며 잔뜩 들어와 금세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부엌으로 걸어간 그는 냉장고에서 에비앙 생수를 꺼내 마시며 자동응답기를 켰다.
띠―. 비프음이 울리고 곧 27개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그 중 25개는 매니저 토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리스?? ?리스. 전화는 왜 안 받아?? ?너 정말 이럴래?? ?내일 스케줄 있는 거 몰라?? 징징대는 메시지를 스킵하며 삭제했다. ?나 진짜 네 매니저 그만둘 거야!? 25개째 메시지를 심드렁히 삭제하고 나자 ?하이, 헤일리.? 하는 다정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나 로렌이야.? 늘 재수 없다고 생각한 놈이었지만 이번 메시지는 삭제하지 않고 들었다.
?헤일리. 요즘도 그런 이상한 물건 사 모으고 그런다며? 레이첼이 그러는데 네가 그 이상한 짓을 하는데 30만 달러를 썼다더라? 거짓말이지? 너 요즘 파산하기 직전이라고 네 회계사가 그러던데―. 이번에 레이노아에게 명예 훼손으로 고소당하면 물어줄 돈은 있는 거야??
비웃는 투의 말에 턱을 괴고 메시지를 듣던 남자는 샹년, 하고 욕설을 뱉고 메시지를 삭제했다. 역시 이놈은 개자식이었어. 씩씩대며 다음 메시지를 누르자 이번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헤이, 러블리 리스∼. 자기야. 나 레이첼이야. 내가 준 거 써봤어? 어땠어??
남자의 애칭을 부르는 달큼한 목소리에 남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써보긴 했는데 별 효과는 없는 것 같아, 자기야. 그는 응답기에 대고 혼자 대답했다. 그녀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말했다.
?당장 효과가 없는 것 같아도 조금만 참아봐. 이전까지 내가 판 물건들이 다 별 효과가 없었던 건 나도 인정하는데, 그건 다르다니까. 일본에서 직접, 딱 세 개 가져온 거라구. 자기, 내 친구 빌런 알지? 걔가 그걸 쓰고 바로 다음날, 그렇게 튕기던 안젤라가 제 발로 찾아와 직접 침대에 엎어졌대. 다음 달에 빌런이랑 안젤라, 결혼한다더라. ―솔직히 ‘그 일’이 할 때는 좀 무섭고 징그럽긴 하지만, 그래도 결과는 확실해.?
그녀는 달콤한 이야기를 속삭였다.
?기다려봐. 네 소원도 곧 이뤄질 거야.?
그녀의 말에 남자는 30만 달런데 당연히 그래야지. 하며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리고 물을 한 모금 더 삼키려는 순간이었다.
?참, 자기야. 내가 그 이야기 했지??
툭, 남자의 손에서 물병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데구르르, 둥근 원을 그리며 떨어진 물명에서 쏟아진 물이 바닥을 적셨지만 남자는 그것을 쳐다보는 대신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그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 일’을 하고 난 뒤 한동안은 이것저것 조심해야 한다고 하더라. 소원이 안 이뤄지는 경우는 없는데, 원혼이 들어서 종종 뭐가 잘못되는 경우가 있대.?
하하…―, 뭐, 근데 그냥 하는 이야기겠지? 그래도 워낙 ‘그 일’이 그렇다 보니까 그 이야기 들으니 무섭더라? ―웃음 섞인 목소리가 응답기를 타고 흘렀고 남자는 숨을 몰아쉬었다. 커다랗게 떠진 눈으로 시선을 들어 블라인드 사이를 쳐다봤다. 얇은 블라인드 틈새로 희끗한 달이 눈으로 들어왔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착각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양 손으로 가슴께를 쥐어뜯듯 움켜쥐었다.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쿵. 다시 세상이 울렸고 순간 눈앞이 일그러졌다. 아주 찰나의 순간, 주변이 사막처럼 보였고 한 남자가 보였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을 한 평범한 얼굴의 남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쿵.
다시 심장이, 머리가, 온몸이 울렸다. 자동응답기에서 레이첼이 무언가 깔깔대며 말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쿵―….
심장이 멈추는 듯한 소리가 머리를 울렸고 곧 남자는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쏟아놓은 차가운 물이 몸을 적셨고 남자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숨을 뱉었다.
남자의 세상이 흔들리며 무너졌다. 그리고 다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전혀 다른 세상은 사막이었고, 아까 순간적으로 봤던 ‘그 남자’가 있었다. 군인이나 용병인 듯한 그 검은 머리칼의 남자는 부스스한 얼굴로 잠에서 깨어났고, 눈을 뜨자마자 총을 찾아 허리춤에 매고 주변을 살폈다. 그리곤 무심한 얼굴로 주변 동료들을 챙겼다. 그가 힐끗, 어깨 위를 쳐다보았고 그 순간 눈이 마주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메이슨 테일러….
그의 이름을 중얼거린 순간 흐릿하게 겹쳐져 있던 세상이 검게 흐려지며 완전히 분리 되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깊은 밤. 전화를 받지 않는 상대의 태도에 화가 난 매니저 토니 브리짓은 남자, 헤일리 러스크의 집에 쳐들어갔다. 그리고 곧 부엌에서 눈을 크게 뜬 채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는 숨을 안 쉬고 있었고 심장도 멎어 있었다. 놀란 토니가 경찰에 신고했고, 도착한 경찰이 그의 죽음을 확인했다. 파랗게 질려 울먹이던 토니가 ‘다음 주 스케줄은 어쩌죠?’ 하고 멍청한 소리를 하려던 순간. 시체로 판명된 헤일리 러스크가 작은 기침을 뱉었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젊은 경찰이 께름칙한 표정으로 주춤, 그의 심장께에 귀를 가져다 댔다.
당연하게도 헤일리의 심장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이 집에 쥐나 고양이가 있나? 의아해 하려던 순간이었다.
“――?”
귓가에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뭐야. 잘못 느꼈나 생각한 순간 이번엔 확실하게 두근. 작은 박동이 느껴졌다.
“우아악!”
“왜 그래?”
젊은 경찰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자 동료가 놀라 물었다. 젊은 경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사, 사, 살아 있어요….”
살아 있다구요, 이거! 그가 비명처럼 말했고 내내 멍청한 얼굴로 서 있던 토니가 허겁지겁 달려가 그의 심장에 귀를 가져다 댔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고 있었다.
기적처럼.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 *
그리고 역시 비슷한 시각 뉴욕. 영화 ‘셔터’의 시사회장인 하보르 호텔 앞은 한 남자를 부르는 소리와 연신 터지는 플래시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번쩍이는 플래시가 사방에서 펑펑 터졌다.
“레이칼튼 씨! 이쪽 좀 봐주세요!”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레이 씨―,”
“여기요! 여기!”
어지간한 연예인들 따위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아름다운 금발의 사내는 밀려드는 기자에 조금 곤란한 듯 했다.
“레이칼튼 씨! 헤일리가 프러포즈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솔직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역겨웠다고 말해도 아무도 당신을 비난 하지 않아요!”
한 기자의 말에 사람들이 와르르 웃었다. 블랙 수트가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금발의 남자, 레이칼튼 노아는 그의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틀 전. 헐리웃 공식 비치Bitch 헤일리 러스크가 한 패션쇼의 뒤풀이 자리에서 잔뜩 술에 취해 그를 향한 연심을 고백한 일이 있었다. 사실 멀쩡한 정신으로 ‘팬이에요. 좋아하고 있습니다.’ 라고만 해도 누굴 넘보냐며 욕을 한껏 먹을 텐데 헤일리는 온갖 사람들이 쳐다보는 연회 한 가운데에서 지나가던 레이칼튼 노아를 붙잡고 한껏 치덕댔다.
‘저기요, 나 그 짓 진짜 잘하는데.’ 라며 저속한 말을 잔뜩 쏟아내는가 하면, ‘나랑 한 번만 자요. 응?’ 하고 매달리기도 했다. ‘나랑 한 번만 자면 절대 날 못 잊을 텐데.’ 하고 끈적하게 군 그는 이어 ‘나랑 결혼해요.’는 물론, ‘나는 정말로 당신을 사랑해!’라고 고래고래 소리치기도 했다. ‘나랑 사귀어 주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야!’ 도 물론 나왔다.
오 마이 갓 헤일리. 파티장에 있던 모두가 탄식했고 그날 있었던 일은 온갖 SNS는 물론, 다음날 아침 나온 모든 신문과 매체에서 다뤄졌다.
사실 레이칼튼 노아나 헤일리 러스크가 아니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진 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레이칼튼 노아. 레이노아가 누군가. 할아버지는 1900년대 미국의 산업을 이끈 석유재벌 황금손 조지 레이칼튼에 외가는 대대로 정계에서 뼈가 굵은 켈리 가家. 미국 최대 로펌의 설립 이사인 된 레이칼튼 에드거와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 켈리 레베카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의 서러브레드. 그가 바로 노아인 것이다. 현재는 할아버지의 사업을 도와 문화, 국방, 환경 등 미국과 세상을 이롭게 하는 많은 사업에 투자 하고 있었고 손대는 것마다 잭팟을 터뜨려 엄청난 돈을 쓸어 모으는 남자였다.
그리고 반면에 헤일리 러스크는…. 그는 물론 한때 제법 유망한 아역스타로 미국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대부분의 아역스타들이 그렇듯 성인이 되기도 전에 술과 마약과 사치와 섹스에 빠져 스스로를 망친 전형적인 케이스의 헐리웃 아역스타였다. 추잡한 스캔들로만 간간히 신문지상에 오르는 그가 가진 것은 평균보다 조금 반반한 얼굴뿐이었지만 그나마도 레이노아에 대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왕자에게 거리 창녀가 고백한 것 같았고, 누가 봐도 괘씸하고 황당한 일이었다.
“한 말씀 해주시죠!”
“레이칼튼 씨!”
그에게서 한 마디라도 따내 기사를 쏟아내려는 기자들이 하이에나 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러나 레이칼튼 노아는 무척이나 정중하고도 겸손하게도 그들을 향해 사과를 날리고 비서 필 햅슨을 따라 그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그를 향해 쓴 소리를 내뱉는 것은 노아의 품위와 상냥함에 걸맞지 않은 일이긴 했다.
“레이칼튼 씨.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호텔 입구를 돌아본 필이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영화의 최대 투자자인 그가 시사회장에 들려 자리를 빛내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긴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와 그를 향한 취재진이 몰린 탓에 그 앞은 꽉 막혀 시사회장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호텔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도 그의 얼굴을 구경하기 위해 주변에 몰려 있었다.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가 멈춰 서서 주변을 돌아보자 순간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남자의 아름다운 미모는 숱한 연예인들을 쫓아다니는 그들에게조차 생소하고 놀라웠다.
레이노아가 유명한 데에는 그의 화려한 배경 탓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당한 불우한 유괴 사건이라든가, 그의 할아버지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사업능력. 혹은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다정한 성품과 매너. 수십의 파파라치가 매일 따라다님에도 공개되지 않는 비밀스러운 사생활 등… 그가 유명한 이유는 엄청나게 많았다. 그러나 그를 실제로 본 사람이라면 그 유명세의 가장 큰 이유는 저 외모라는 사실을 알 것이었다.
그림 속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화려한 금발과 신비한 녹색 눈, 그리고 뽀얀 피부. 조각으로도 빚지 못할 것 같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훤칠한 키. 누가 봐도 아름다운 얼굴에 모델 같은 몸매를 가진 그의 외모는 그가 미소를 지을 때 가장 빛났다. 그 예쁜 얼굴이 살짝 무너지며 소탈하게 짓는 달큼한 미소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은 전미를 탈탈 털어도 열명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아름다운 미모에 술렁거렸던 기자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셔터를 눌러댔다. 팡! 팡! 팡! 팡! 미친듯이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에 남자는 한숨을 쉬며 “오늘은 돌아가죠.” 하고 필에게 말했다.
필은 준비하고 있던 차를 불렀고 새까만 롤스로이스가 호텔 앞으로 올라왔다.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이 차로 향하는 길을 내 주었다. 기자들은 이 아쉬움을 달랠 길은 사진뿐이라고 생각했는지 집념을 담아 셔터를 눌러댔다. 기자들의 아우성에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어요.” 하고 사과를 한 노아가 차에 올라타려던 순간이었다.
한 기자가 경호원들을 뚫고 팔을 뻗어 그의 어깻죽지를 잡아 당겼다. 멈칫한 노아가 기자를 돌아보았다.
“아, 저…,”
기자는 더듬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분명 붙잡을 때만 해도 생각한 바가 있었다. 붙잡힌 노아가 곤란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 ‘한 마디가 뭐가 어렵습니까? 예? 한 마디만 해주세요!’ 하고 농담하듯 인터뷰를 할 생각이었던 그는 무표정한 얼굴의 노아와 눈이 마주치자 얼어버리고 말았다. 어, 이게 뭐지. 무감해 보이는 녹색 눈동자에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고, 몸이 떨렸다. 그러나 그 차가운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던 것은 순간이었던 듯 곧. 노아가 생긋, 예의 그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붙들린 어깨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의 매력적인 미소에 다시 플래시가 팡팡거리며 시끄럽게 터졌다.
경호원들이 노아의 어깨를 잡았던 기자를 끌어냈다. 기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노아를 돌아보았지만 그 자신도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달칵. 필이 뒷문을 열어주었고 노아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차 문이 닫히기 전.
“뭐? 헤일리가?”
팡팡 터지는 플래시 소리 사이로 한 남자가 놀라서 소리치는 것이 모두에게 들렸다. 전화를 받으며 놀라 소리쳤던 기자는 합, 입을 다물고 주변을 돌아봤다. 헤일리 러스크에게 무슨 일이 있나?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이 모두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봤고 그 사이, 노아가 탄 차의 문이 닫혔고 곧 출발했다.
우왕좌왕하던 기자들은 ‘헤일리가?!’ 하고 외쳤던 남자가 눈치를 살피다 후다닥 자신의 차로 달려가자 모두들 황급히 어딘가로 연락하거나 확인 전화 후 차에 올라탔다.
차에 올라타 호텔을 빠져나가며 노아는 힐끗, 창밖을 쳐다봤다. 몇몇 차는 노아를 쫓아왔고 제법 많은 수의 차들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헤일리 러스크가 죽었답니다.”
필이 자신의 단말기에 들어온 최신정보를 확인해 이야기 했다. 노아가 흘끔 필을 쳐다보았고 필은 “자택 부엌에서 쓰러져 죽어 있는 것을 매니저가 발견했다는 군요. 사인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약물 과다 복용에 의한 급성 심장마비로 보인답니다. 물론 자살일 수도 있고요.” 하고 이어 말했다.
노아는 이틀 전 자신에게 고백하며 ‘사귀어 주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야!’ 하고 소리쳤던 남자가 진짜로 죽어버렸다는 소식을 들으며 놀라는 대신 픽 웃었다.
“가지가지 하네.”
며칠간 그와 얽혔던 스캔들의 장본인이 죽었다는데 관심이나 동정은커녕 귀찮아 죽겠다는 투로 말한 그는 “당분간은 꼼짝도 말아야겠네요.” 하고 웃었다. 한동안은 헤일리 러스크에 대한 동정론과 더불어 생전에 그가 좋아했던 상대인 노아의 심경이나 애도를 전하기 위해 온갖 벌떼들이 모여들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노아는 심드렁히 ‘당분간 어디, 따뜻한 남쪽 나라라도 가 있을까’ 생각했다. 이런 시기에 핑계를 대고 쉬는 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쉬지 않는 쪽이 이미지가 나빠지니까 조금은 칩거하며 마음 아픈 척하는 게 좋았다. 그 남자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질 때까지. ―길어봐야 사나흘이면 다른 스캔들이 터지고 다들 ‘헤일리? 그게 누구―, 아. 그 죽은 애?’ 할 터였다. 헐리웃엔 진짜 별만큼 많은 숫자의 스타가 있으니까.
그나저나 안 그래도 밟아주려던 남자가 이렇게 죽어버리니 조금 허무한 감은 있었다.
‘사귀어 주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야!’
이틀 전. 그 구질구질한 발언에도 노아가 곤란한 얼굴로 경비원만 기다리자, 그 걸레는 곧 씩씩대며 ‘후회하지 마.’ 라고 했다.
‘오늘 날 이렇게 무시한 걸 계속 후회하게 될 거야.’
내내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던 노아는 그 말에 픽,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술에 잔뜩 취해서 초점도 맞지 않던 그가 멈칫 표정을 굳혔고 노아는 고개를 까딱이다가 몸을 숙여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러스크 씨. 당신은 앞으로 평생 지저분한 AV나 찍으며 바닥에서 구르게 될 거예요.’
상스러운 질문에 얼굴을 굳힌 그에게 노아는 상냥하게 웃으며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러니 나보다는 자신의 구멍 걱정을 하는 게 어떨까요?’
이미 곤란할 정도로 헐렁할 텐데. ―그가 정말로 좋아하는 친구의 건강을 염려하듯 친절한 어조로 속삭였고 헤일리의 얼굴은 천천히, 그러나 검어 보일 정도로 새빨갛게 붉어졌다.
노아는 툭툭, 그가 붙들었던 옷자락을 털며 돌아섰다. 등 뒤에서 그가 ‘후, 후회하게 될 거야! 두고 봐!’ 소리 질렀지만 노아는 더 이상 실소도 짓지 않았다.
“……그때 그건, 자신을 밟지 못하게 될 테니 후회할 거라는 이야기였을까?”
노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누군가를 짓밟지 못해 후회까지 하다니, 자신이 그런 성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드한 사디스트는 아닌데…….
노아는 심드렁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흠.”
혹시 설마, 그가 죽은 것에 대해 자신이 후회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주제를 모르는 인간이니 그런 허황된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실은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 배우 하나가 죽어 사라진다고 해도 그는 물론, 세상사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텐데.
오히려 노아는 후회나 동정 대신 ‘지금 죽은 게 차라리 낫지.’ 하고 생각했다. 노아가 AV에서 구르며 살게 될 거라고 속삭인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었으니까. 영화나 드라마, 기타 문화 산업에 매년 수천만 달러를 투자하고 있는 그가 그런 걸레 하나 나락으로 미는 건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멍청한데다가 패악을 부리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도 없는 놈이니 아마 순식간에 구르고 굴러 반년도 안 되어서 수간이나 스캇 영상을 찍었을 지도 몰랐다. 살아 있었어도 어차피 곧 약물 과다복용이나 위험한 것을 밀어 넣다 장 파열로 죽었을 거고 그런 것을 생각하면 지금 죽는 게 나았다.
확실히 지금 죽는 게 낫지. 그가 무심하게 생각하는데 급한 전화를 받은 필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 정보를 재차 확인하는 그의 음성에 노아가 힐끗 쳐다보았고 필은 잠시 통화를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곧 당황한 투로 말했다.
“저, 레이칼튼 씨. 헤일리 러스크가 아직 살아 있다고 합니다.”
헤일리 러스크가 살아 있다. 분명 죽은 지 두어 시간 지난 것 같다는 핫라인을 받았는데 무슨 일인지 정보가 번복 되었다. 헤일리 러스크가 살아 있고 지금 인근 베이커 병원으로 후송 중이라는 것이었다. 이전에 받은 사망 정보가 오보인지 확인했는데 오보는 아니었다. 숨이 멎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일부 사후 경직까지 일어난 상태였는데 갑자기 살아났다는 것이 현장 경찰의 전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답니다.”
죽은 직후도 아니고 숨이 멎고 몸이 식었는데 한참만에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필은 그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일에 놀란 얼굴을 했지만 노아는 그저 별 감흥 없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을 뿐이었다.
* * *
……띠―. 띠―. 띠―.
규칙적으로 짧은 기계음이 멀리서 들렸다. 쉭쉭, 어디선가 바람 새는 소리도 들렸다. 아니…, 제법 가까운 곳인 것 같은데―….
메이슨은 꼼짝도 못하고 누워서 비몽사몽간에 이 소리가 뭘까 생각했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소리였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뇌가 벙벙 울려 제대로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심박계 소리와 호흡기 소리와 몹시 비슷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자신은 틀림없이 죽었을 테니 말이었다.
혹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병원에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전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다른 데도 아니고 뒤통수를 총에 맞아 머리가 깨졌다. 이마 위쪽이 완전히 날아갔다는 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세상은 넓고 희한한 일도 많으니 머리에 총을 맞고 살아난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를 쏜 것은 아론이었고 적진 한 가운데였다. 병원 한 가운데에서 맞은 총이어도 살아남기 쉽지 않을 텐데 하물며 병원과는 120Km가 떨어진 사막 한 가운데, 지하 벙커. 의사라곤 그가 때려서 기절시킨 돌팔이 놈뿐이라니, 부하에게 배신당해 머리에 총을 맞은 메이슨이 죽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는데.
기계음과 쉭쉭대는 바람소리 사이로 수군수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명은 아닌 것 같았다.
“――.”
“……―가 얘 때문에 창피해서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니까요?”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발치에서 들려왔다. 주파수가 미묘하게 안 맞는 라디오처럼 드문드문 들렸다.
“어제 신문들 봤어요? 헐리웃 최악의 망나니가 미국의 성역에게 찝쩍댔다고 온 언론에서 호들갑을 떨며 욕하더라구요. 주제도 모른다고.”
“사실이지. 이쪽은 완전 걸레에 퇴물인데.”
날카로운 말에 흐흥, 가볍게 웃은 여자가 말했다. 덜커덩, 의자에 앉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자살이라니, 그런다고 누가 동정할 줄 아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멍청해서 자살도 제대로 못하잖아요. 여기 이렇게 숨 쉬고 있는 거 안 보여요?”
자살이 아니라 약을 너무 많이 한 거겠죠. 심장마비가 무슨 자살이냐며 여자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원래 리스는 늘 그랬잖아요. 노래는 돼지처럼 꽥꽥대고, 토크쇼에 나가면 조개처럼 입 다물고 있다가 가끔 하는 말이라곤 텅텅 빈 소리나 하고. ―평생을 해온 게 연기인데, 연기는커녕, 머리가 나빠서 대사대로 읽는 것도 못하질 않나…. 정말 볼 거라곤 반반한 얼굴뿐이었는데 그나마도 하도 약을 해서 이젠 그냥 평범한 정키junkie고. 그래도 사고치는 것만은 여느 스타 못지않게 해내기에 큰 돈 남기고 심장마비로 죽어 주는 것도 제대로 할 줄 알았는데―.”
“아아.”
“그러게요.”
솔직하기 짝이 없는 여자의 말에 모두가 아쉽게 한숨을 쉬며 동조했다. 한참 한숨을 쉬던 사람들은 잠깐 말이 없었다. 서로간의 눈치를 살피듯 뜸을 들이던 한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리스가 깨어나진 않겠지?”
그의 말에 다들 펄쩍 뛰었다.
“설마요!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닥터 죠니가 그랬는걸요. 5분만 심장이 멈췄다가 뛰어도 뇌가 맛이 간다던데, 얘는 아주, 아주 질긴 거라구요.”
절대로 다시 깨어날 리가 없어요. ―한 여자가 노골적으로 한 말에 다들 맞아. 그렇죠. 하며 동조했지만 혀가 짧은 한 여자는 불안한 듯 우물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정말―, 혹시 깨어나면 어쩌죠?”
집 인테리어 다시 할 때도 됐는데 리스가 죽어주지 않으면 내 돈으로 해야 하잖아요? ―그녀의 개념 없는 말에 사람들은 모두 마른 침을 삼켰다.
“―….”
메이슨은 천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올리기 위해 애썼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호흡기 소리나 심박계 소리도 영문을 모르겠는데 잡담 소리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용을 보건데 천사들의 잡담은 아닌 것 같았다. 천사는 커녕 악마들의 잡담라고 하기에도 퍽 속물적인 이야기들이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죽은 건 틀림없는데 이 세속적인 대화들은 대체 무얼까. 원래 사람이 죽으면 다들 이런 세상에 떨어지게 되는 걸까? 메이슨은 미간을 살짝 구기며 눈을 뜨기 위해 노력했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눈꺼풀은 물론 손끝도 까딱할 수 없었다. 아니 뭐, 자신은 죽은 사람이니까 몸이 안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뭔가 묘하게 불편하고, 움직이려고 하다보면 움직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사실 좀 아쉬울 것 같기는 해요. 리스가 사라지면 이제 더 이상 그의 기사를 팔아 용돈 벌이를 못할 테니까―.”
“누가 리스 기사를 사줘? 하도 드러나서 이젠 섹스 동영상을 가져다 줘도 500달러도 안 줄 텐데.”
이번 레이노아 일도 그렇고―. 그녀의 빈정대는 말에 여자는 곧 “하긴 그렇죠.” 하고 동조하며 웃었다.
“미안해, 리스.”
네 유산은 내가 꼭 좋은 곳에 쓸게. 그녀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바로 머리맡에서 들렸고 살짝 미간을 구겼던 메이슨은 갑갑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손끝을 움직였다. 끙, 온 힘을 다해 손끝을 움직이기 위해 집중했고 그 순간.
“…――!”
누군가의 손이 얼굴로 다가왔고 곧 호흡기 위에 얹어졌다. 쉭쉭 산소를 뱉던 호흡기가 조심스럽게 치워졌다. 찬바람이 훅, 얼굴을 스쳤다. 작은 숨이 터져 나왔고 내내 힘을 주고 있던 손가락이 움직이며 천근처럼 무겁던 몸이 풀렸다. 눈꺼풀 틈새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
새하얀 천장과 침대 주변에 선 사람들. 띠―. 띠―. 느리고 안정적으로 들리는 심박계 소리와 쉭쉭대는 호흡기 소리.
……역시 병원인가?
메이슨은 멍하니 천장을, 주변을 쳐다봤다. 현실감 넘치는 풍경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나…. 살아 있는 건가? 왜 살아 있지? 그는 천천히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순간 검어졌다 다시 밝아진 세상은 역시 현실이었다.
“근데 왜 이거 안 꺼지죠? 띠――, 하면서 죽는 거 아니에요?”
드라마에서 보면 그러던데? 생글생글 웃으며 말한 여자는 호흡기를 쥔 채 메이슨을 내려다 봤다. 기계 고장 난 거 아니야, 하며 돌아봤던 그녀는 멍하니 눈을 뜨고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 메이슨을 보고 멈칫하더니 이내 비명을 질렀다.
“꺅!!”
“어, 어?” “어머, 어머, 어머!” 사람들이 웅성대며 놀라는 소리가 들렸고 메이슨은 다소 흐릿하고 초점이 안 맞는 눈앞에 다시 눈을 깜빡였다. 빛에 눈이 익숙해지자 조금씩 세상이 선명해졌다.
조금은 살풍경한 병실 안.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 맙소사, 리스……?”
리스? 메이슨은 자신을 향해 부르는 이름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 어지럽고 몸이 뻑적지근하긴 했지만 일어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메이슨은 눈을 끔뻑이며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보다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이마를 더듬거렸다. 이마에 구멍이 없었다. 총알구멍은커녕 붕대 따위도 감겨 있지 않았다.
나 정말 살아 있는 건가? 메이슨은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오른쪽에 있는 커다란 창 밖에서는 잔잔한 바람과 함께 말간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딜 봐도 사후 세계로 보이진 않았다.
“어, 어머…, 너, 너, 너 괜찮, 니?”
더듬거리며 한 여자가 물었다. 그러게요. 저 살아 있는 겁니까? 메이슨은 되물으려다 말고 멈칫 했다. 하얗고 마른 손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남의 손인 줄 알았는데 제대로 자신의 팔에 달린 자신의 손이었다.
“어―….”
내 손이 왜 이러지? 메이슨은 멍하니 손을 내려다봤다. 손등도 손바닥도 모두 생소한 모양이었다. 그는 키 6피트의 건장한 용병이었다. 고아로 나고 슬럼가에서 자랐다. 험한 일 중에 안 해본 일은 거의 없으며 나이 먹고 용병이 된 후에는 매일 뙤약볕에서 삽질, 총질, 주먹질 등 하루도 손을 쉬게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손은 손바닥이고 손등이고 죄 굳은살이 빡빡하게 배고 둔탁했으며 자잘한 상처는 물론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팔에 달린 손은 그 익숙한 손이 아니었다.
그 손 대신 자리하고 있는 것은 파란 핏줄이 비칠 정도로 창백하고 비쩍 마른 긴 손가락이었다.
“―…. …….”
메이슨은 마른 침을 삼키고 힐끗 눈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불 위로 드러난 다리의 실루엣도 자신의 것 치고는 굉장히 가는 느낌이었다. 문득 목이 바짝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미친 것처럼 뛰었다.
“―리스? 괜찮냐고 묻잖니!”
버럭, 중년 여자가 소리 지르듯 물었고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던 중년 남자 둘은 크게 헛기침을 하며 돌아서 나갔다. 젊은 남자는 “의, 의사를 불러올게요.” 하며 뛰쳐나갔고 메이슨은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다가 화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여자를 올려다봤다.
“뭐,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리스가 누구예요?”
살짝 잠긴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잠겨있긴 했지만 투명한 느낌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도 생소하기 짝이 없었지만 목이 잠긴 탓이라고, 메이슨은 애써 생각했다. 손이 낯선 것도, 팔 다리가 평소에 비해 터무니없이 얇아 보이는 것도 다 기분 탓이었다. 평소에 별로 의식해 본 적이 없다가 갑자기 들여다봐서 낯설어 보이는 것뿐이었다. ―현실을 애써 외면한 메이슨의 질문에 중년의 여성은 조금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그래. 리스라고 불러서 미안하구나, 헤일리. 네가 그렇게 무례하게 굴지 않아도 우리가 의절한 건 잘 기억하고 있단다. 그래도 죽어간다기에 걱정 돼서 와 줬더니――. 건방진 게 확실히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는구나. 내가 괜히 왔어.”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가방을 거칠게 챙겨들고 씹어뱉듯 말했다. 헤일리? 걱정? 의절? 메이슨은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말에 미간을 구겼고 그녀는 흥, 하고 거칠게 화를 내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쾅! 세차게 문이 닫혔고 그녀의 뒤에서 눈을 굴리며 눈치를 살피던 젊은 여자는 메이슨이 쳐다보자 헤실거리며 웃었다.
“애칭이 입에 익으셔서 그래. 어릴 때는 사이좋았으니까. ―안나 고모랑 너.”
“……저 여자와 내가 사이가 좋았다고?”
메이슨이 묻자 그녀는 어색하게 헤실헤실 웃다가 “오, 오늘은 기분이 별론가 보네. 건강해 보이는 것 같으니 이만 가볼게.” 하고 도망치듯 병실을 나갔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야기 하고 가라고 메이슨이 붙잡을 새도 없었다.
“……. …….”
혼자 병실에 남게 된 메이슨은 병실 문을 쳐다보다가 다시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일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듯한 마른 손을 쳐다보다가 그는 천천히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가슴이며 손등이며 여기저기 붙은 선들과 링거 주사가 이어져 있었지만 하나 하나 뜯다가 곧 귀찮아져 후두둑 뜯어냈다. 왠지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병실 안쪽 화장실 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붙잡고 메이슨은 심호흡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괜히 긴장이 됐다. 문을 열면 거울이 있을 것이고 거기엔 평소처럼 무심한 자신의 얼굴이 보일 텐데 말이었다.
살짝 마른 침을 삼킨 메이슨은 달칵 문고리를 돌려 문을 확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숨을 들이키며 얼어붙었다.
“!!”
화장실 정면, 거울에 비친 것은 익숙한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거울 속에는 조금 매서운 구석이 있었지만 평범했던 검은 머리카락의 건장한 남자 대신 금방이라도 졸도 할 것처럼 새파랗게 질린 백금발의 어린 남자가 서 있었다.
뭐야 이거? 메이슨은 마른 침을 삼켰다. 뭐야.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누구야 저건? 메이슨은 못 박힌 것처럼 거울을 쳐다보며 한 걸음 물러섰고 그때 달칵, 병실 문이 열리며 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들어왔다. 의사를 불러주겠다며 나갔던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말을 전하긴 한 모양이었다.
“어머, 러스크 씨! 그렇게 일어나 계시면 안돼요!”
링거 바늘을 다 떼어내셨네! 간호사 둘이 살짝 짜증을 섞어 말하며 다가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끌어당겨 차가운 소독솜으로 눌렀다. 힐끗 쳐다보는 눈이 약이 덜 깬 미친놈을 보는 것 같았다. 간호사가 손등을 치료하는 것을 보던 메이슨은 고개를 들어 차트를 넘기는 의사를 쳐다봤다.
“정신이 좀 듭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요? 간밤에 심장마비로 병원에 실려 왔습니다. 몇 분은 심장이 완전히 멎기까지 했다구요. 솔직히 나는 당신이 어떻게 살아 있는 건지, 게다가 어떻게 이렇게 일어나 사방팔방 피를 뿌리며 걷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교회, 안 나가지 않아요?”
기적이 일어날 타입은 아닌데. ―빈정대듯이 중얼거리는 의사의 모습에 메이슨은 식은땀을 흘렸다. 심장마비?
“제가 심장마비로 실려 왔습니까? 총을 맞은 게 아니라?”
“…―헤일리. 현실과 환각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면 아주 심각한 겁니다. 물론 알고 있겠지만요.”
살다 살다 너 같은 정키는 처음 본다는 듯 그가 신랄하게 말했다. 메이슨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거울을 쳐다봤다. 거울 속엔 예의 그 금발의 남자가 후들후들 떨며 서 있었다. 내 눈이 미쳤나. 눈을 깜빡여 봤지만 그 남자는 그 자리에 고대로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라 멍청하게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헤일리? 뭐해요, 다시 누우라니까.”
“―누가 헤일리예요?”
메이슨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 남자가 리스, 헤, 헤일리예요?”
메이슨은 손가락을 들어 거울에 비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의사와 간호사는 눈을 끔뻑거리며 쳐다보다가 저들끼리 뭔가를 수군대기 시작했다. 뭐하는 걸까요? 왜 저러는 걸까요? 약이 덜 깬 거 아니겠어요? 죽을 줄 알았는데 살아난 게 창피해서 미친 척 하는 걸 수도 있죠. ―그들 사이에서 그런 소리가 새 나오는 사이 메이슨은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거렸다. 거울 속 남자도 동시에 얼굴을 더듬거렸다. 눈을 깜빡이자 동시에 거울 속 예쁘장한 남자도 눈을 깜빡였다. 거울 속 남자의 도톰한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스스로의 입술을 만지자 바짝 마른 입술 표면과 잘은 떨림이 느껴졌다.
“…―저거, 접니까?”
목이 콱 잠겨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거울에 비친 낯선 사람이 저입니까? 제가 그 헤일리라는 사람이에요? 메이슨이 무서워 죽겠다는 얼굴로 묻자 의사와 간호사들이 멈칫 그를, 그리고 서로를 쳐다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헤일리?”
의사가 조금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메이슨은 마른 침을 삼키며 다시 힐끗, 거울을 쳐다봤다. 거울엔 여전히 그 백금발의 청년이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헤일리? ―괜찮아요?”
“…――.”
아뇨. 아뇨, 괜찮지 않아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저게 누구라구요? 아니, 내가 누구라구요? ―입 안에 많은 말들이 맴돌았지만 메이슨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목 뒤가 싸늘하게 식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