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ill the lights-2화 (2/29)

02

지금은 헐리웃 비치나 사고뭉치로 이름이 높은 러스크 헤일리가 연예계에 데뷔한 것은 영화 ‘바다를 꿈꾸며’ 에서였다.

해변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스릴러 영화였는데 마지막에 두 컷쯤 나오는 헤일리의 예쁜 얼굴 외에는 볼 게 전혀 없는 영화였다. 영화는 당연히 망했다. 한 평론가는 그 영화에 대해 ‘필름이 아깝다고 느낀 영화는 처음.’ 이라는 짧은 평을 남겼는데 그 평론가 외엔 영화를 본 사람이 전혀 없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망했다.

헤일리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그 다음 영화에서였다.

플라오 감독의 영화 27시간. ―27시간은 레이칼튼 노아, 미국인들이 사랑을 담아 레이노아라고 부르는 남자의 어릴 적 유괴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였다.

유명 여배우인 어머니를 따라 촬영장에 놀러온 아이가 그 어머니를 질투한 무명 배우에게 납치당해서 27시간동안 감금당해 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사건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헤일리가 납치된 레이노아 역이었다.

영화는 실제 레이노아의 인기와 그 레이노아만큼이나 예뻤던 헤일리의 미모에 힘입어 크게 흥행했다. 당시는 사건이 일어난 지 3년이 흐른 무렵이었는데, 당시 잘 나가는 변호사였던 그의 아버지 레이칼튼 에드거와 어머니, 켈리 레베카의 극성스러운 보호로 레이노아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시기라 대중들이 헤일리에게 쏟아 부은 관심은 대단했다.

토니 브리짓이 헤일리를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당시 제법 잘 나가던 매니저였던 토니는 처음 아이를 봤던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전면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기획사 빌딩의 커다란 창 앞이었는데, 햇빛이 어둡다고 느낄만큼 아이는 반짝반짝 빛났다. 꿀처럼 반짝이는 금빛 머리칼이며 바다처럼 새파란 눈동자. 뽀얗고 귀여운 피부나 도자기 인형처럼 완벽한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놀라우리만큼 생기발랄한 표정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이가 말하는 내내 단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아이는 분명 톱스타가 될 거야. 토니는 확신했다. 아이는 톱스타가 될 것이었다. 그저 그런 스타가 아니라 전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하는 엄청난 톱스타.

스스로가 스타가 될 수는 없어도 스타를 보는 눈만큼은 최고라고 자부하던 그였다. 그가 찍었던 사람 중에 10년 뒤에도 유명 연예인이 아닌 사람은 레이노아뿐이었다. ―물론 레이노아는 연예인이 아니어도 충분히 유명하지만.

이런 아이를 맡을 수 있다니, 토니는 자신의 인생에 드디어 볕이 드는구나 생각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도 드디어 그저 그런 돌멩이 말고 진짜 다이아를 깎아 손에 쥘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토니 브리짓이라는 쉬운 이름을 14번이나 이야기 해줘야 외울 만큼 머리가 나쁘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외모와 스타성을 생각하면 아주 작은 흠이었다.

……아주 작은 흠이라고 생각했다. 헤일리가 정말로 멍청해서 밀가루와 헤로인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

16년 간 러스크 헤일리의 매니저 일을 한 토니 브리짓은 힐끗, 병원 침대에 앉아 넋 놓고 거울을 쳐다보고 있는 그를 돌아보았다. 토니는 헤일리가 톱스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자신은 그때 눈이 삐었던 게 틀림없었다. 후광은 무슨…. 다이아 원석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사실은 흔한 유리알에 불과하다는 것을 토니도 이제는 알았다. 그때 번쩍거리던 빛은 아주 잠깐이었을 뿐, 최근 몇 년은 그저 희미한 안개속의 가로등 같은 빛만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은 예쁘장한 겉모습과 그 난삽한 캐릭터 덕에 간간히 일이 들어왔고, 그가 치는 기상천외한 사고들 덕에 화제성은 있었다. 토니가 만들고 싶어 했던 스타는 그런 흔한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것도 스타성이라면 스타성이니까.

하지만 최근 1,2년은 헤일리가 무슨 짓을 하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의 사고도, 상대가 레이노아가 아니었다면 신문에서 다뤄주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헤일리가 사고를 쳤다고 1면에서 다루어 준 게 얼마만인지….

물론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헤일리의 연예인 인생은 거의 끝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레이노아를 건드리다니. 안 그래도 비호감이던 이미지는 바닥을 찍었다. 헤일리가 자살기도인지 심장마비인지 하여간 죽다 살아난 지 일주일. 동정은커녕 목숨 가지고 흥정하는 민폐남 이미지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온 세상이 헤일리를 싫어하고 있었다. 헤일리에게 관심 없는 사람은 있어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 …….”

토니는 힐끗 헤일리를 쳐다봤다.

“뭐…, 물이라도 떠올까? 물 마실래?”

멍청한 얼굴로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헤일리에게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떠다 마실게요.” 하고 짧게 말했다.

평소였다면 ‘병원 물 따위 먹을 것 같아? 뭘 물어봐? 빨리 나가서 에비앙으로 사와!’ 하고 소리를 질렀을 그는 얌전히 앉아서 심각한 얼굴로 거울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 …―.”

기억 상실 탓인가. 오늘따라 헤일리의 빛이 더 아득해 보였다. 스타성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그래도 유난한 성미 탓인지 뾰족해 보이는 무언가는 있었는데 오늘은 그나마도 없었다. 평소보다 둥글둥글해 보이는 것이 영락없는 일반인이었다. 연예인은커녕 엑스트라 사이에서도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무색무취의 맹물이나 아무 색도 없는 백지처럼.

실제로 조금 전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헤일리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 같다는 말을 듣고 허겁지겁 병원을 찾았던 토니는 평연한 분위기를 내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뻔하기도 했었다. 물론 아주 순간적인 일이었고 아마도 후줄근한 환자복 탓이겠지만……. 토니는 오늘따라 아주 달리보이는 헤일리를 힐끗힐끗 흘겨보았다.

“…―.”

헤일리, 정확히는 헤일리의 모습을 하고 있는 메이슨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아무리 보고 또 보고 또 봐도 거울에 비친 얼굴은 달라지지 않았다.

총을 맞으면 아픈 건 당연했다. 팔 다리에 맞아도 아픈 총을 머리에 맞았으니 그 고통은 말도 못했다. 고통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순간이긴 했지만 분명히 치명적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아파서 몸이 쪼그라 든 것은 아닐까. 충분히 온몸이 오그라들만한 고통이긴 했다. ―메이슨은 볼품없이 가늘어진 팔다리를 보며 잠깐 생각하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대단한 고통을 당한대도 얼굴이 예쁘장해 지거나 머리가 금발이 되거나 손발이 고와지고 눈 색이 변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메이슨은 흘끔흘끔 이쪽을 훔쳐보고 있던 중년의 남자를 쳐다봤다. 말끔히 쳐다보자 끔쩍 놀랐던 그는 곧 어색하게 웃었다.

토니 브리짓. MRI를 찍고 있는 중에 허겁지겁 나타났던 그는 자신이 매니저라고 말했다.

‘얘가…, 아니, 제가 연예인이에요?’

이 비리비리한 몸이 운동선수는 아닐 것 같아 묻자 그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진짜구나. 진짜 기억이 몽땅 날아갔구나.’ 하고 탄식했다.

‘다른 건 다 기억력이 나빠서 잊었다고 하겠지만 네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잊다니….’

잠꼬대조차 ?내가 누군 줄 알아!? 헤일리라구!? ?난 스타야! 그런 걸 어떻게 해?? ?내가 나온 드라마가 몇 편인 줄 알아?? 라고 하는 네가…. 그렇게 말하며 토니는 눈물까지 지었다.

악의 없어 보이는 그의 태도에 메이슨은 잠깐,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이다! 하고 사실대로 말해볼까 했지만 말을 삼켰다. 그 자신도 상황 파악이 안됐는데 누구에게 이 상황을 이야기 한단 말인가. 미친 사람 취급당하기 딱 좋았다. 솔직히 메이슨 스스로도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러스크 헤일리. 일명 리스. 24세. 7살 아역으로 시작한 배우생활이 17년째인 제법 유명한 배우. 토니는 메이슨에게 헤일리의 기억을 되살려 보겠다며 그가 찍었던 드라마와 영화들을 줄줄 읊어줬다.

메이슨이 영 모르는 눈치이자 그가 쳤던 몇 가지 사고들도 이야기 해주었다. 재활원에서 담을 넘어 탈출하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일이나 음주 운전으로 두 번이나 걸린 일. 대마초에 취해 웃통 벗고 거리를 뛰어다녔던 일. 수많은 지저분한 스캔들과 가장 최근엔 레이노아에게 찝쩍대다 끌려 나간 뒤 자살기도인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인지 모를 일이 있었다는 것까지.

“―….”

메이슨은 다시 한 번 거울을 쳐다보고 주사자국이 남아있는 하얀 손등을 쳐다봤다.

마법 같은, 뭐 그런 건가. 아니면 현대 과학이 이렇게 좋아졌나. 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었지? 수많은 생각들이 피어올랐다가 사그라졌다. 세상에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아무리 해봐야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프간에서 총질이나 하며 거친 삶을 살던 그가 죽었다 깨어나니 레이노아에게 찝쩍댔다가 차이고 자살한 헐리웃 망나니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그게 현실이었다.

극심한 이질감 사이로 현실감이 들자 아주 조금이나마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딱히 나쁜 일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분명 좋은 일이었다.

좀 비실비실해 보이긴 했지만 이만하면 얼굴도 반반하고 길쭉하니 예전 몸보다 좋은 것 같기도 했다. 구질구질하고 척박하기만 했던 이전 자신의 삶을 생각하면 ‘헐리웃 스타’ 라니 ―물론 들어보니 국민적인 비호감인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과연 인생 역전이라고 할 만한 일이었다. 적어도 머리에 총알구멍은 없지 않은가. 머리에 총질할 동료 놈도 없었고.

“…….”

메이슨은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돌아봤다. 토니가 창밖을 쳐다보며 뭐라고 구시렁대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파파라치 놈들. 악마새끼들. 중얼중얼 씹어 삼키는 그를 두고 메이슨은 훌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물과다복용이니 자살기도니 했지만 사실 심장마비가 온 것치곤 몸 상태는 별 이상이 없었다. 예전에 비해서도 몸이 좀 무겁다는 기분은 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저기요, 브리짓 씨.”

메이슨이 부르자 화들짝 놀랬던 토니는 얼떨떨한 얼굴로 돌아봤다.

“그, 그냥 토니라고 불러도 괜찮아.”

메이슨은 잠깐 고민하다가 “예, 토니.” 하고 친근하게 불렀다. 그가 살짝 어색한 얼굴로 쳐다봤고 메이슨은 싱긋 웃었다.

“저 퇴원했으면 싶은데요.”

“버, 벌써?”

“몸도 괜찮은데 여기서 미적거릴 필요 없잖아요. 헤일리, 아니, 저, 기억도 없는데 앞으로 뭐 먹고 살지 고민 좀 해봐야죠.”

메이슨은 툭툭, 몸을 풀며 말했고 토니는 눈을 끔뻑거리더니 소리쳤다.

“은퇴하려고?”

“아니 뭐 그렇게 거창하게 그런 건 아니고…. 어차피 제가 더 이상 연기를 한다는 것도 무리지 않겠어요?”

고아원에서 크리스마스마다 하는 성탄 연극에도 참여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거친 일만 하며 살아왔는데 몸이 바뀌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연예인으로 살 수는 없었다. 물론 다시 용병이 될 마음도 없었고 아직 무엇을 할 지 제대로 생각해 볼 틈도 없었지만 사실 다시 태어난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기는 했다.

“자, 잠깐만. 그만두다니, 당장 내일 기억이 돌아오면 어쩌려고 그래?”

“기억이 돌아오면 그때 다시 그 일을 하면 되죠.”

“여, 여, 여, 연예인이 그, 그렇게 만만한 일인 줄 알아?! 연예인은 한 번 잊히면 끝장이야!”

토니는 절박하게 소리 질렀지만 메이슨은 덤덤하게 “그래요?” 할 뿐이었다. 어차피 기억이 돌아온다는 건 자신이 아니라는 이야기였고, 그 뒤의 일이야 남 일이었다. 몸 주인인 헤일리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솔직히 아는 사람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을 동정하느라 보너스로 얻은 인생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이 삶이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 모르는 이상에야 어떻게 끝날 지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단 며칠, 몇 시간일지도 몰랐다.

메이슨은 빨갛게 얼굴이 붉어진 토니를 달래듯 말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전 연기 같은 거 못하는데요.”

“아냐. 못하긴 왜 못해. 할 수 있어. 아니, 네가 기억이 없어서 그러는데 넌 원래…,”

토니는 메이슨을 설득하려는지 그의 옷을 붙잡다가 드르륵 울리는 휴대폰을 쳐다봤다. 뜨끔하는 얼굴로 휴대폰을 들고 주춤거리는 그에게 받으시라는 시늉을 하자 그가 “예, 예. 토니입니다.” 하며 굽실굽실 전화를 받았다. 메이슨은 전화를 받는 그를 두고 일어나 옷장을 뒤졌다. 병원에 실려 올 때 입었던 옷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아뇨. 죽다뇨! 안 죽었습니다. 벌써 깨어났는데―, 리스! 나가지 마!”

일단 퇴원 수속부터 밟자고 나서는 메이슨을 부르며 토니가 달려 나왔다. 토니는 병실 문 앞에서 메이슨을 붙잡고 휴대폰 너머 누군가에게 안절부절 못한 목소리로 빌었다.

“아니, 아닙니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빨리 촬영장에 가고 싶다며 뛰어나가서―. 예? 아뇨! 그럼요.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죠.”

예. 물론 알죠. 예. 그럼요, 감독님. 한참을 굽실거린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메이슨을 휙, 무서운 얼굴로 돌아봤다.

“바쁘신가봐요. 저기 집 주소만 알려주시면…, 저 홈리스는 아니죠?”

“너 몸 괜찮다고 했지? 퇴원 할 거라고?”

메이슨이 들은 헤일리라면 홈리스라 하더라도 그다지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아 묻자 토니는 대답 대신 대뜸 물었다. 전장 한 가운데 선 군인처럼 비장한 눈으로 묻는 그의 기백에 메이슨은 더듬거렸다.

“예? 아 뭐…,”

몸은 괜찮은데…, 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메이슨의 팔을 붙잡아 끌고 병실을 뛰어나갔다.

“왜요? 왜 그래요? 왜 그러는 건데요?”

휘청하며 그에게 끌려 메이슨이 다급히 물었고 토니는 토실한 뺨이 떨려 헉헉거리면서도 미친듯이 뛰어 메이슨을 차에 태웠다. 사방에서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툭툭 튀어나와 ‘헤일리다!’ ‘저기!’ 하고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렸다.

“허억, 헉, 토니?”

몸이 얼마나 약한지 그거 잠깐 뛰었다고 숨은 차고 하늘이 노랬다. 사방에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와 차창을 두드리며 달려드는 기자들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줘야,”

병실 슬리퍼에 환자복을 입은 채로 끌려나온 메이슨이 숨을 몰아쉬며 묻자 그는 몰려드는 파파라치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더니 부릉, 엑셀을 밟았다. 메이슨은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꽉 붙잡았다.

“―당장 안 오면 널 죽여 버리겠대.”

“뭐라구요?”

“오늘 촬영에 오지 않으면 네가 맡은 역을 잘라버린다고 했다고!”

다급하게 외친 토니는 카레이서처럼 격하게 핸들을 꺾으며 파파라치들 사이로 차를 돌진 시켰다. 누군가 차 앞으로 넘어지는 것 같았지만 토니는 그야말로 예술처럼 그를 비켜서 좁은 사람들 사이로 빠르고 강하게 차를 몰았다.

사고뭉치 헤일리의 매니저로 일한 16년간의 정수精髓였다.

“대체 무슨―,”

자동차 바퀴가 사람 머리 옆을 1cm간격으로 스치고 지나는 것에 놀란 메이슨이 돌아보자 그는 더 없이 비장한 얼굴이었다. 정말로 목숨을 위협받는 공주님이라도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손잡이 꽉 잡아.”

이를 꽉 깨문 토니의 말에 메이슨은 왜 그러냐고 묻는 대신 본능적으로 덜컥, 사력을 다해 손잡이를 붙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차가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광란의 질주였다.

* * *

등 뒤가 쭈뼛해질 만큼의 속도와 현란한 드래프트로 기자들을 따돌리고 웬 폐허 같은 곳에 차를 세운 토니는 탈진할 것처럼 숨을 몰아쉬는 메이슨에게 충격적인 이야길 했다.

“지금 뭐라고―, …농담이죠?”

메이슨은 기가 막힌 얼굴로 되물었다. 지금 나보고 뭘 하라고?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길 바라며 되묻는 메이슨의 간절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는 무신경하게도 했던 말을 반복했다.

“지금 들어가서 드라마 촬영 할 거라고. ―거기 대사 다 외웠어?”

빨리 외워, 메이크업 할 때는 대본 보기 힘드니까―, 그는 메이슨에게 대본을 챙겨주며 재촉했다. 메이슨은 저도 모르게 대본을 쳐다봤다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니, 무슨 촬영, 연기를 해요 갑자기? 저 그만둔다니까요?”

“그만 두더라도 있는 스케줄은 해야지! 정말 잘리게 내버려 둘 거야? 아무리 기억이 없어도―…, 에고, 벌써 시간이.”

토니는 기막혀 하는 메이슨에게 제대로 설명하기는커녕 어서 차에서 내리라며 다급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메이슨은 그에게 끌려 차에서 내리면서도 뒤로 물러났다.

“잠깐, 자, 잠깐만요, 토니. 잠깐만.”

근육은 한줌도 안 될 듯한 중년의 비만 아저씨 따위, 원래의 몸이었다면 단박에 뿌리칠 수 있었을 텐데 이놈의 몸은 어떻게 된 건지 아무리 힘을 줘도 가랑잎처럼 훌쩍 들려 질질 끌려가기만 했다. 평소대로 사람을 집어던지려고 시도했다간 되레 이쪽 팔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잠깐만요, 응? 아니, 연기라니, 갑자기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다시 한 번 생각을,”

메이슨은 질질 떠밀려가며 정신없이 토니를 설득했다. 이게 바로 자신이 막무가내로 알타의 벙커에 들어갔을 때의 아론의 기분일까. 적어도 자신은 아론에게 뭘 시키진 않았다. 그냥 닥치고만 있으라고 했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라니. 깨어났더니 다른 사람 몸을 뒤집어쓰고 있더라, 보다 황당한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단 반나절 만에 그 생각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토니는 기억이 없어도 어차피 몸은 똑같은데 아무렴 어떠냐는 식이었지만 얼굴 거죽만 같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솔직히 실제 기억상실증 환자라면 글쎄. 갑자기 카메라 앞에 서면 잊혔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몸이 알아서 자연스럽게 연기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쪽은 아니었다. 늘 삶에 치여 드라마 한 편 제대로 본 적도 없는데 그런 게 될 리가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 별로 긴 씬도 아니고.”

“긴 씬이든 짧은 씬이든 전 못해요. 못하는 게 당연하죠. 아무나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게, 게다가 몸도 갑자기 안 좋아지는 것 같아요.”

으으윽, 메이슨은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고통스러운 척을 했고 토니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등을 떠밀었다.

“걸어 다닐 수만 있다면 괜찮아. 그리고 연기라면 어차피 기억이 있을 때도 못했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게 말이 되요?”

도축장에 소 끌려가듯 촬영장에 끌려가고 있는데 신경 쓰지 말라니. 남 일이라고 막 말하는 건지 뭔지, 토니가 남발하는 괜찮아 소리에 메이슨이 미간을 구기며 발칵 소리 질렀지만 토니는 되레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 아무도 너한테 훌륭한 연기를 기대하진 않으니까 말이야. 그냥 얼굴만 보이고 대사만 읽으면 돼.”

그냥 화제성과 더불어 반들반들한 외모가 카메라에 잡히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지금 찍는 드라마는 10시즌에 걸쳐 미국 전역에 방송된 수사 드라마로, 그가 요즘 하고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이도 어릴 때부터 출연한 드라마라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일 뿐, 다른 일들은 죄 끊겼다.

한 때는 밥 먹는 시간 자는 시간까지 쪼개고 쪼개 하루 평균 6,7 건의 스케줄을 소화하던 때도 있었지만 정말로 다 옛날 일이었다.

연기도 못하고 사고만 치고, 성격은 나쁜데다 그나마 장점인 외모도 점점 비루하고 초라해지는 형편이었다. 이미지가 나쁘다보니 광고모델 일은 아예 들어오지 않았고 들어오는 제의는 거의 세미누드 촬영이나 가십에 대한 인터뷰 같은 것뿐이었다.

심지어는 레이노아에게 찝쩍대 국민적 비호감으로 거듭난 상황이었다.

절대로 이 일까지 놓칠 수는 없었다. 죽은 거라면 모르지만 살아 있는 이상에야 먹고 살려면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했다. 돈도 돈이지만 평생을 연예인으로 살아온 그였다. 대중의 기억에서 잊히는 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이었다. 지금은 속 편하게 ‘기억이 돌아오면 그때 일하면 되죠.’ 라고 하지만 정말로 기억이 돌아왔는데 일이 없고 모두에게서 잊힌 뒤라면….

“――.”

토니는 입술을 꾹 깨물고 부르르 떨었다. 그가 벌일 난장과 히스테리가 눈에 선했다. 토니를 산채로 씹어 삼키려고 한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 좀 살려주라. 응? 어렵지 않다니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카메라 쳐다보면서 말하기만 하면 돼.”

제발 이렇게 빌게, 토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빌었고 메이슨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우 진짜….

“정말, 정말로 카메라 보면서 대사만 읽으면 된다구요?”

정말 그렇게 쉬운 일일까 싶었지만 메이슨은 일단 물었다. 그냥 대사만 읽으면 되는 거라면 눈 딱 감고 Zii의 임무를 맡았다고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늘 숨어서 하는 일만 하다가 카메라나 사람들 눈앞에 선다는 게 낯설고 온몸이 꼬이긴 했지만 한 번쯤은 어떻게든―. 메이슨이 스스로를 채 설득하기도 전에 토니가 그의 마음에 생긴 빈틈을 낚아챘다.

“응, 응, 일단 늦었으니 들어가자고. 일단 들어가서 읽다보면 별 거 아니구나 싶을 거야.”

토니는 그까짓 거, 가서 줄줄 읽기만 하면 된다며 메이슨의 손목을 붙잡아 끌고 촬영장으로 들어갔다. 제가 안 내킬 때는 방 안에서 문을 잠그고 꿈쩍도 안하거나 잠수 타는 것이 버릇인 헤일리 러스크의 매니저 경력 16년이었다. 눈앞에 있는 그를 들춰 매고 촬영장으로 가는 건 토니에게 껌 씹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촬영장은 한창 총격전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컷! 거기 잘 좀 잡으라니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렸고 뭔가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낯선 광경에 메이슨은 주춤거리며 주변을 살폈고 그를 문 앞에 두고 뛰듯이 들어간 토니가 감독에게 가 먼저 인사를 했다. 새까만 선글라스를 쓴 풍채 좋은 남자는 토니의 인사에 힐끗, 말없이 메이슨을 노려보았다.

“그게 저기 병원에서 좀 더 쉬어야 한다고, 퇴원할 몸이 아니라고 붙잡는 걸 촬영 늦는다고 뿌리치고 오느라…,”

감독은 듣기도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고 토니는 비굴하게 그의 앞에서 굽실거렸다.

“잠깐만요, 토니 씨. 대본 바뀌었거든요.”

감독 뒤에 서 있던 조감독이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토니를 불러 새 대본을 건넸다.

“대본이 바뀌어요? 갑자기 왜 바뀝니까?”

“왜가 어디 있어요? 그냥 바뀌었으면 바뀐 대로 하면 되죠. ―준비 되면 바로 씬 들어갈 겁니다. 일단 확인하고 대사부터 외우게 하시죠? 그에겐 퍽 긴 대사일 텐데.”

남자는 모자를 눌러쓰며 쏘아붙이듯 말했고 토니는 입을 벙긋대다가 대본을 받아들었다.

“…―.”

메이슨은 그가 대본을 살피는 사이 가만히 주변을 돌아봤다.

토니와 대화했던 감독이라는 남자의 앞에서 누군가가 연기를 하고 있었다. 멀어서 목소리가 잘 들리진 않았지만 카메라 서너 대가 붙어 그들을 찍고 있었고 약간 멀찍이서 찍는 카메라도 있었다. 이상한 판을 든 남자나 솜방망이를 든 남자 등, 그쪽을 중심으로 얼핏 수십은 될 것 같은 사람들이 무거운 무언가를 옮기거나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눈치가 빠른 편인 메이슨은 조용히 촬영 현장을 눈여겨봤다.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것 같기는 했지만 낯설고 생소한 부분이 더 많았다. 메이슨이 만나는 카메라라면 늘 종군 기자들의 카메라나 CCTV, 잠입용 소형 몰카 따위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영화나 드라마라도 좀 봐뒀다면 좋았을 텐데 메이슨은 그런 취미도 없었다. 미리 좀 보면서 살 것을―. 적어도 시 좋아하는 클락이 늘 지껄이는 연예인들 뒷이야기라도 좀 귀담아 들어주며 살 것을 그랬다 싶었다. 그랬다면 지금 이 분위기가 조금은 이해됐을 텐데.

“어머, 저 환자복 입고 온 것 좀 봐. 아프다고 시위하는 거야 뭐야….”

“설정이지 뭐. 심장마비 와서 죽었다 깨어난 얼굴이 저렇게 멀쩡할 리가 있어?”

등 뒤에서 들린 수군대는 소리에 메이슨이 돌아보자 소품을 들고 지나가던 여자들이 뭘 쳐다보냐는 듯 눈을 흘겼다. 그녀들뿐 아니라 촬영장 안에 많은 수의 스태프와 연기자들이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저들끼리 수군수군 대고 있었다. 대놓고 “안 죽고 또 나왔네.” 하고 말하는 커다란 목소리도 들렸다. 싸늘한 눈초리와 수군거림. 촬영장 안에 그를 둘러싼 날카로운 기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

힐끗 그들을 돌아봤던 메이슨은 무심한 얼굴로 다시 촬영하고 있는 곳을 쳐다봤다. 사람들이 ‘오늘따라 분위기 잡네.’ 하고 또 수군댔지만 귀도 안 간지러웠다. 기분 나쁘면 총을 쏴버리는 놈들 사이에서 살았던 메이슨에게 이 정도는 가벼운 농담거리도 못됐다.

메이슨은 그보다 당장 저 사람들과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게 아주 불편하고 곤혹스러웠다. 임무라고 생각하자. 임무. 임무. 임무. 임무 중이라면 연기를 얼마든지 했었다. 사실 연기라고 할 것까지는 못되는 순간의 속임수들이었지만 토니는 그런 거라도 괜찮다고 했다. 나가서 정해진 대사만 읽는 거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일종의 임무라면 괜찮아. 스스로를 세뇌하듯 메이슨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죽어간다더니 왜 여기 있어?”

옆에서 들려온 심드렁한 목소리에 돌아보자 연예인에 대해 잘 모르는 메이슨도 TV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는 나이든 남자 배우가 서 있었다. …이름이 뭐더라? 사이먼?

“……그러게요. 제가 여기 왜 있을까요.”

메이슨은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가장 궁금한 건 바로 메이슨 본인이었다. 여긴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연기라니. 드라마라니. 금세라도 토니가 와서 ‘놀랐지? 농담이었어.’ 라고 할 것만 같았다.

그의 씁쓸한 얼굴에 조금 의아한 눈길을 보냈던 사이먼은 씩 비열하게 웃었다.

“역시 쇼였지?”

“―뭐가요?”

“레이노아 일 때문에 자살한 척 한 거잖아. 안 그래? 그러다 안 통하니까 다시 나온 거고. 물론 세상에, 심장이 멎을 정도로 위독했다가 다음 날 촬영장에 나오는 배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글쎄…, 넌 아니잖아?”

나와야 할 시간에도 숙취 때문에 머리 싸매고 촬영에 빠지는 놈이 퍽이나 그러겠다. ―그는 도발하듯 말했고 메이슨은 “글쎄요.”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라니?”

“마음대로 생각하셔도 되지 않아요?”

메이슨은 힐끗 그를 쳐다봤다가 다시 촬영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메이슨도 헤일리가 진짜 자살기도를 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행복한 꿈을 꾸기 위해 약을 과용한 탓에 그렇게 됐는지는 알지 못했다. 남 일이라고 속편하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쩔쩔매거나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계속해서 이 일을 할 것도 아니었고.

메이슨의 무심한 반응에 사이먼은 조금 의아하게 그를 쳐다봤다. 그는 들고 있던 커피를 홀짝이며 몇 번 말을 삼키더니 슬쩍 물었다.

“뭐…, ―설마 진짜 아팠어?”

하하, 아니지? ―그는 눈치를 살피듯 살짝 웃었고 메이슨은 손을 내저었다.

“신경 쓰지 마요. 살아 움직일 만하니까 나왔겠죠.”

정확히는 끌려 나온 거긴 하지만 여하튼. 곧 연기를 해야 한다는 초조함에 적당히 말하자 사이먼은 왈칵 미간을 구겼다.

“왜, 왜 그래? 죽을병이라도 걸린 거야? 의사가 곧 죽는대?”

울 것처럼 눈시울을 빨갛게 붉히는 사이먼의 물음에 메이슨이 놀라 “예?” 하고 되물었고, 사이먼은 손으로 눈가를 누르며 화를 내듯 말했다.

“아니라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뭐가요?”

“촬영하다가 손 좀 긁힌 것 가지고도 죽는다고 난리 치면서 구급차를 부르며 울었던 네 입에서 괜찮다는 말이 나왔잖아! 머리카락 몇 가닥 잘렸다고 기절했던 건 기억나? 손톱 부러졌을 땐 한 달간 입원했는데…, 그런 네가 괜찮다는 말을 하다니, 진짜 죽을병이 아니고서야 달리 뭐겠어?”

“…….”

메이슨은 이 남자가 자신을 빈정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헤일리가 정신병자였던 건지 알 수 없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사이먼은 메이슨의 반응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오, 하느님, 하느님, 하느님.” 하고 탄식했다.

“얼마나 남았대? 삼 개월?”

“아니 진짜 괜찮…, 아니, 뭐, 좀 기력이 없긴 한데, 별로 죽을 것 같거나 한 건……,”

“설마 삼 개월도 안 남은 건―…!”

사이먼이 버럭 비명처럼 말했고 메이슨은 그의 입을 막았다. “촬영 중인 거 몰라?!” 감독이 짜증을 섞어 소리쳤다. 사람들이 힐끗힐끗 이쪽을 노려보는 것이 보였고 메이슨은 고개를 숙여보였다.

사이먼의 입술을 손으로 막았던 메이슨은 손에 축축한 기운을 느끼고 다시 그를 돌아봤다.

“진짜, 괜찮으니까 좀, 아, 왜 울고 그래요?”

“읍브브, 브―…!”

입이 막힌 채로 왈칵 울음을 터뜨리는 그의 모습에 메이슨은 기겁하며 손을 뗐다.

토니도 그렇고 이 남자도 그렇고, 잘도 저렇게 눈물을 흘린다 싶었다. 평생 목석처럼 뻣뻣하고 뇌까지 근육으로 만들어진 듯한 남자들 사이에서 살다가 이런 인간들을 보니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네가 좋은 건 아니지만, 아니, 싫어하지만 그래도 십년이나 봤는데, ……―맙소사. 넌 내 아들을 닮았다구.”

그, 나약하고, 철없고 멍청한 점이 너무 닮아서 더 싫었다고, 사이먼은 뜬금없이 고백하며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사람들이 힐끗힐끗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메이슨은 그를 안쪽에 세워 슬쩍 우는 것을 가리며 달래듯 말했다.

“…안 죽는다니까요.”

“그럼 삼 개월 뒤에도 확실히 살아 있는 거야?”

“아니 그건―…,”

메이슨은 멈칫했다. 삼 개월 뒤에 확실히 살아 있다고 장담했어야 했는데 순간적으로 ‘아니, 솔직히 당장 내일도 눈을 뜰지 확신할 수가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아니 뭐, 당연히 살아 있지 않겠어요?”

메이슨이 뒤늦게 말했지만 사이먼은 다시 눈가를 누르며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참기 시작했다. 메이슨은 이마를 짚었다.

“리스? 리스, 잠깐 나 좀….”

이 남자를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하던 메이슨은 헤일리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한참 대본을 붙들고 서 있던 토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있었다. 메이슨은 반갑게 그에게 말했다.

“마침 잘 왔어요, 토니. 이분께 나 안 죽는다고 이야기 좀 해줄래요?”

“아니, 너 죽어.”

그러나 토니가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공교로운 얼굴로 대답했고 사이먼은 “역시――,” 하며 벽에 머리를 기대고 숨을 들이켰다. 메이슨은 당황해서 토니를 쳐다봤다.

“―토니?”

“사이먼, 잠깐 저희 배우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토니가 메이슨을 끌어당기며 침통한 투로 말했고 사이먼은 다 이해한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며 눈물을 참고 손을 내저었다. 토니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메이슨을 끌고 촬영장 구석으로 갔다.

“토니. 죽는다니,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요? 안 그래도 이상한 오해를 했던데―. 울잖아요, 저 남자.”

따지듯 말하자 토니가 고개를 들었고 메이슨은 멈칫했다. 토니의 주름진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고 코끝은 발긋발긋하게 얼어 있었다.

“―…. ……왜요?”

메이슨이 주저하며 묻자 토니는 불쑥, 쥐고 있던 대본을 내밀었다.

“뭐예요?”

“봐. ―거기, 댄이 네 역이야.”

메이슨은 훌쩍훌쩍, 분한 얼굴로 우는 토니를 쳐다보다가 찜찜하게 대본을 넘겼다. 댄이라는 이름은 한참이나 나오지 않았고 토니가 직접 페이지를 넘겨주고서야 메이슨은 그가 나오는 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씬 42. 건물 뒤(N)

총소리가 들리고 댄 빗속을 맨발로 달려간다.

댄 (추워서 덜덜 떨며 외친다) 에이미! 에이미! (문득 바닥에 떨어진 에이미의 신발을 발견한다. 댄 괴로워하며) 에이미…! (신발을 주워 든 댄이 고개를 든다)

총성

(눈물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든 댄, 알프레드를 쳐다본다)

알프레드 (비열하게 웃으며) 이거, 미안하게 됐군. 이번엔 내가 빨랐어.

댄 (놀란 눈으로 알프레드를 쳐다보다 고개를 숙여 연기가 흐르는 가슴을 쳐다본다. 손으로 감싸자 피가 줄줄 흐른다. 쿨럭 피를 뱉는다.) 에이미는 어디…(앞으로 천천히 꼬꾸라진다) ?

“…죽는 씬이네요.”

메이슨이 심드렁히 대본을 쳐다보며 말했다. 좀 전의 죽는다는 건 이 이야기였구만. 토니는 메이슨의 말에 새삼 슬픔이 울컥 치밀어 올랐는지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참았다.

“응…. 작가들이 널 자르기로 했나봐.”

저번 달에 선물한 샤넬 가방의 할부가 아직 시작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부르르 떠는 토니를 두고 메이슨은 “그래요?” 하고 눈을 반짝였다.

“요즘 일이라곤 이거뿐인데, 이것마저 잘리면 어떻게 될지….”

“배우는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면 되겠죠.”

회사를 다닌다든가, 가게를 연다든가. 평범한 일이요. 메이슨은 살짝 웃었다. 안 그래도 그만두자고 생각했는데 때맞춰 일이 떨어져 준다니, 이렇게 되살아난 것에 이어 신이 돕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회사를 다닌다고? 가게를 열거나 평범한 일?”

토니는 기억상실이란 정말 무서운 병이구나, 하는 투로 “네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제 손으로는 물 한 병 사먹어 본 적 없는 귀한 몸이었다. 회사를 다녀? 가게를 열어? 차라리 AV를 찍겠다고 달려드는 게 어울렸다.

“―….”

토니는 별 생각 없는 것처럼 웃고 있는 헤일리를 보며 눈물을 훔치고 작게 한숨지었다. 기억이 제대로 있었다면 대본을 받아들고 ‘댄을 죽인다고? 게다가 이게 뭐야? 빗속에 맨발로 뛰잖아? 발에 상처라도 나면 어쩌려고? 안 해! 안 해! 안 해! 시발 쿠거 놈, 죽여 버릴 거야!’ 하고 길길이 날 뛰었을 그가 얌전히 웃고 있는 것을 보니 다행이다 싶은 한편, 안 그래도 멍청했는데 이젠 완전히 바보가 되었구나 싶어 울컥 마음이 씁쓸했다.

“근데 어차피 죽고 끝나는 거, 그냥 기억상실증이라 못한다고 말하고 그만두면 안 되나요?”

“안 돼. 절대 안 돼. 누가 믿겠어? MRI에 외상이 찍힌 것도 아니고.”

심장마비 일도 아무도 안 믿는데 기억 상실이라니. 죄 지은 것도 아닌데 기자들에게 그 사실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헤일리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것을 발표한 뒤에 상황을 상상하자 오금이 저렸던 것이었다. 안 그래도 이미지는 이미 바닥이었다. 엊그제 레이노아에게 더러운 추파를 던졌다가 끌려 나간 뒤 응급실에 실려 갔다 나와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데 이어 기억상실증이라니. 걸레나 약쟁이도 모자라 거짓말쟁이나, 정신병자 이미지까지 씌워지는 건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무슨 생각인지, 토니가 바르르 떠는 것을 보며 메이슨은 뺨을 긁적였다.

“근데 사실이잖아요.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고. 이 드라마 10년 찍었다면서요. 친한 사람들이라든가 많을 텐데, 다들 금세 알지 않을까요.”

많이도 아니고 대화 몇 마디만 하면 어차피 금세 들키지 않을까? 메이슨이 “숨겼다가 들키면 더 이상하지 않나요?” 하자 토니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너 친한 사람 없어.”

토니는 ‘너 정말 기억상실 맞구나.’ 하는 투로 코를 훌쩍였다.

“너 원래 사람 잘 기억 안하고, 모른 척도 잘해. 그냥 사람들은…… 네가 무슨 말을 하던 쟤가 또 변덕부리는구나, 할 거야. 신경 쓰지 마.”

“…….”

기억상실증인데도 티가 안 날 정도라니. 대체 그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토니는 정말로 그 부분에 대해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보다 토니는 다른 게 걱정인 듯 흘끔 대본을 쳐다봤다.

“왜요?”

“아, 아무것도 아냐.”

그가 찜찜한 투로 고개를 저었다. 메이슨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데, “헤일리, 준비 다 한 겁니까? 바로 다음 씬에 들어간다고 했잖아요?” 하고, 내내 이쪽을 신경질적인 눈으로 쳐다보던 조감독이 소리 질렀다.

“어서 준비해. ―켈리! 여기 머리 좀 만져 줄래요?”

“비 맞을 거니 머리는 됐고 옷은 갈아입어야겠네요.”

스태프인 듯한 여자가 메이슨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메이슨은 당황해 “아니, 아직 대사도 다 못 외웠는데―,” 했지만 토니와 켈리는 막무가내로 옷을 벗겨 새로 입히고 신발을 뺏어갔다. 순식간이었다.

“여기 다 준비 됐어요!”

켈리가 감독 쪽을 향해 소리쳤다. 메이슨이 “아뇨, 아뇨, 아직 준비 안됐어요!” 하고 저항해 봤지만 토니가 그를 번쩍 들어 카메라 쪽으로 데려갔다.

“미안, 리스.”

토니가 속삭이듯 말했다. 무슨 말이에요, 왜 그래요, 왜 미안한데요, 되물으려 했을 때는 이미 카메라 앞에 혼자 덜렁 서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자 조금 전까지는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소란스럽던 촬영장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했고, 모두가 그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네가 무슨 행동을 하든 비난하겠다는 눈이었다.

머리가 희끗한 노년의 감독은 삐딱하게 앉은 채로 무감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가 손을 까딱하자 곧 쏴아아――,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머리 위에서 떨어지기 시작했고 한 스태프가 걸어와 슬레이트를 잘깍이며 장면의 시작을 알리고 지나갔다.

메이슨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에 몸을 움츠리며 미간을 찌푸렸고 곧 감독의 입이 열렸다.

“레디, 액션!”

냉정한 큐 사인이 울렸다. 촬영 중임을 알리는 카메라의 빨간 불빛과 새까만 렌즈 구멍은 마치 저격을 예고한 총처럼 그를 향해 겨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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