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ill the lights-3화 (3/29)

03

지난 10년 간 드라마 ‘클루’를 제작해 온 쿠거 라이언 감독은 심드렁한 얼굴로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리스. 헤일리 러스크. 헤일리, 저 망나니…. 쿠거는 헤일리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10년 전. 얼굴이 예쁘고 화제성도 높아서 시청률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 연기는 못하면 가르치면 되지 뭐가 문제냐, 구구절절 편한 소리를 하는 지인의 강력한 추천에 쿠거는 내키지 않아하면서도 그를 캐스팅 했다.

그땐 쿠거도 쉽게 생각하긴 했다. 뭐, 마음에 드는 연기를 하는 배우는 아니었지만 얼굴은 반반했으니까. 캐릭터 이미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외모인 건 사실이라 탐탁찮아 하면서도 그러마 했다. 연기는 가르치면 느는 것이라고, 아직 어리고 제대로 된 코치가 없어 그렇지 조금만 신경 쓰면 금세 저 예쁜 얼굴로 제법 봐줄만한 수준의 연기를 해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헤일리는 첫 촬영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결같이 엉망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아무리 시간을 할애해 가르쳐도 표현할 수 있는 얼굴 표정은 예쁜 척 하며 눈을 홉뜨는 것 한 가지 뿐인데다 대사는 늘 어눌했다. 매니저에게 물 가져와라 담배 가져와라 소리를 지를 때면 아나운서처럼 또랑또랑하게 말하면서 카메라 앞에만 서면 혀가 반 토막이 난 것처럼 대사를 씹어댔다.

성격은 얼마나 유난한지, 쿠거가 본 모든 배우를―여배우까지― 통틀어 가장 성격이 까탈스럽고 더러웠다. 연기는 더럽게 못하면서 자존심은 장인의 그것이었고, 질투도 많고 욕망도 강해 늘 칭얼대며 최고 대우를 바랐다.

설상가상. 그나마 봐줄만했던 얼굴은 10년이 지나는 동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최근엔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퍼석한 피부와 약기운이 남은 동공이 비칠까봐 클로즈업도 오래 할 수가 없었다.

잘라야지, 잘라야지 생각하면서도 비중 있는 캐릭터를 그런 일로 자르기가 쉽지 않아 매 시즌마다 고민하면서도 그를 캐스팅 했는데――.

“―….”

쿠거는 이틀 전 신문의 헤드라인을 본 순간, 드디어 단호히 헤일리 러스크를 자를 수 있는 순간이 왔구나, 생각했다.

본 드라마의 감정적인 몇몇 작가들처럼 헤일리의 주제넘음에 화가 난 탓은 아니었다. 쿠거가 생각하기에 레이노아와의 일은 그저 개인사일 뿐이었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레이노아를 자신의 아들처럼, 남자친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처럼 남 일이니, 하고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꽤 있었다.

사실 뭐, 헤일리가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연애라는 게 딱딱 줄 세워서 조건 맞는 사람들끼리 짝 짓는 것은 아닌데다, 그 남자 수준을 생각하면 그 누구라도 모자랄 터기 때문이었다.

쿠거가 더 이상 헤일리를 드라마에 출연시키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은 다른 이유였다.

레이칼튼 노아가 IBC의 대주주인 레이칼튼 조지의 귀한 손자며, 그 개인으로서도 ‘클루’의 최대 스폰서기 때문이었다. 사원이 사장을 찝쩍이다 거절당했으면, 게다가 그 뒤에 자살소동까지 벌였다면, 딱히 사장님의 지시가 없더라도 중간 관리자가 알아서 사원을 자르는 게 당연했다. 사장님이 껄끄러움에 부서에 걸음하지 않게 되고, 이어 지원이라도 끊기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오늘도 마침 레이노아가 현장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당연히 헤일리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모셨는데, 확인 차 전화를 했더니 웬걸. 토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가 지금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어떻게든 헤일리를 못 오게 해 마주치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아파서 죽어간다던 놈은 기어코 어중간한 시간에 도착했고 쿠거는 결국 노아 측에 다른 날에 방문해 주십사 전화를 해야 했다. 스폰서에게 잘 보여 더 많은 지원을 받게 하지는 못할망정 오겠다는 스폰서의 걸음을 막다니. 밉상인 놈이 그야말로 진상인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

안 그래도 이번 방문은 시기적으로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시즌 초반이나 막바지도 아니고 이렇게 시즌 중간에 현장을 살핀다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조감독인 페니는 이번 일로 미운털이 박혀 제작비에 타격이 있지 않겠냐는 불안한 소리를 했다. 당장 이번 시즌이야 계약한 바가 있으니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다음 시즌에서는 정말 그렇게 될 지도 몰랐다.

쿠거는 새삼 짜증이 나 삐딱하게 앉아 헤일리를 쳐다봤다.

그는 오늘따라 분위기도 흐리멍덩한 것이 꼭 일반인처럼 후줄근해 보였다. 평소엔 뾰족하게 깨진 유리조각 같았다면 오늘은 둥글둥글, 흔한 조약돌처럼 보여서 어디다 카메라 포커스를 맞춰야 할 지 모를 지경이었다. 카메라 감독도 비슷한 생각 중인지 표정이 썩어 있었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죽었다 깨났다니 그 김에 연예인의 기운까지 저승에 놓고 온 모양이지. 안 그래도 찍기 싫은 놈이었는데 이제는 숫제 뉴스 화면처럼 맹숭맹숭. 쿠거는 당장 꺼지라는 말을 삼키며 생각했다.

엿 먹여주마.

쿠거는 오늘 그의 입에서 ‘추워서 못하겠어!!’ 와 같은 투정이 단 한마디라도 나오면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고 그의 죽음은 내레이션이나 등장인물의 대사로 처리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는 방송이며 신문이며 죄다 인터뷰를 해서 놈의 불성실한 태도를 지적하고 꼬집어 안 그래도 잘 매장되어 있는 놈의 무덤 위에 커다란 돌덩이를 얹어주리라. 다신,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도록.

어차피 10분도 못 버틸 게 눈에 선했다. 그 예민한 성격의 헤일리가 병원에서 나온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차가운 비를 맞는다니, 10분이 아니라 30초나 버티면 다행이었다.

쿠거가 살수차를 향해 손을 흔들자 곧 촬영장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흠뻑 젖은 헤일리를 보며 쿠거는 그를 잘라내기 위한 큐 사인을 냈다.

* * *

메이슨은 차갑게 떨어지는 빗방울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감독 쪽을 쳐다봤다. 레디 액션이라는 말에 촬영이 시작된 것은 알겠는데 무얼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첫 대사가 뭐였지? 아니, 대사는 어차피 에이미! 라는 한 단어뿐이었다.

“에이미…,”

메이슨이 어설프게 한 마디를 하자 감독이 기다렸다는 듯이 “컷!!!” 하고 확성기에 대고 말했다.

“야, 대본 안 봤어? 제대로 못해?”

메이슨은 솔직하게 제대로 못 봤다고 말하려다 어느새 수건을 들고 달려온 토니가 ‘제발 오늘만 참아. 응? 마지막이잖아.’ 하고 달래는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거기, 바로바로 다시 들어갈 거니까 나와.”

감독의 호통에 토니는 가져온 수건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눈치를 살피며 빠졌다.

“오늘따라 더 멍청해 보이네. 왜 저래, 초보처럼?”

“10년 내내 저랬는데 뭘 왜 그래 새삼. 자고 일어나면 연기를 까먹는 분인데.”

아 하긴. 깔깔대며 비웃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툭툭 날라 왔다. 사이먼이 힐끗 눈치를 주자 곧 조용해졌지만 수군대는 시선은 여전했다.

모자를 쓴 남자가 다가와 “저쪽으로 뛰어가면서 소리쳐요.” 하고 무성의한 설명을 주고 나갔고 메이슨은 다시 사람들과 카메라 앞에 혼자 서서 차가운 시선을 받았다.

감독의 사인에 다시 살수차에서 물이 쏟아졌다.

레디 액션! 감독의 큐 사인에 메이슨은 앞으로 달리며 “에이미! 에이미!” 하고 소리쳤다. 곧 감독이 팔을 휘저으며 컷을 외쳤다.

“컷! ―야, 헤일리. 너 지금 옆집 강아지 찾아? 더 빨리, 다급하게 헐떡이며 두리번거리고 뛰란 말이야!”

그는 아예 일어나 확성기로 귀가 쩌렁쩌렁해지게 외쳤다.

“알겠어!?”

대답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메이슨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감독은 못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 더 빨리, 다급하게 헐떡이며 뛰겠다고 말했습니다.”

뭐가 잘못 됐나? 메이슨이 재차 정확한 발음으로 대답하자 감독은 희한한 얼굴로 제법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감독님?”

누군가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듯 입술을 깨문 그는 곧 두고 보자는 듯, 잔뜩 독이 오른 얼굴이 되어 다시 “액션!” 하고 크게 외쳤다.

“에이ㅁ―,”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메이슨이 채 에이미라는 단어를 다 말하기도 전에 감독이 “컷! 컷!!”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빗발이 약하다는 둥 살수차를 향해 큰 소리를 쳤고 곧 양동이로 물을 퍼붓는 것처럼 강한 빗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

감독은 빗물이 억수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메이슨을 쳐다봤다. 어떠냐, 하는 듯한 표정에 메이슨이 덤덤하게 “다시 시작할까요?” 하고 묻자 그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

메이슨은 얼굴을 쓸어내리는 척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까부터 내내, 너 한번 엿먹어보라는 의도가 잔뜩 느껴졌는데 순순히 당해주려고 해도 감독은 더 화가 난 얼굴이 됐기 때문이었다. 뭘 바라는 건지 솔직하게 말해준다면 좋겠지만 아마 말하지 않겠지.

메이슨에게도 과거 Zii에서도 저 감독처럼 그를 미워하는 직장 상사가 하나 있었다. Zii 상사의 경우엔 메이슨이 순순히 당해주지 않자 전장에 나가는 그의 총구에 납을 발라놓았다. 다행히 총을 쏘기 전에 발견했고, 다녀와서 놈을 6개월간 병원 침대에서 못 일어나도록 두들겨 놓았지만 어쨌든.

그 뒤로는 직장동료나 상사의 빈정을 너무 상하게 하지 말자는 자기반성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당해주려고 해도 어떻게 해주는 게 당해주는 건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머리가 근육으로 된 용병놈들 따위야 시키는 대로 구르기만 하면 풀리곤 했는데 저 감독은 오히려 그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을 했다.

솔직히 메이슨 입장에선 맨발로 빗속을 뛰는 것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한 엿이라고 저렇게 의기양양한 얼굴로 쳐다보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손톱을 뽑거나 발톱을 뽑는 것도 아니고, 고작 차가운 비를 맞으며 몇 걸음 헤매는 것이 다인데 말이었다.

체온이 떨어진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빗속에서 숨죽이며 타깃을 기다리느라 떨림까지 참아야 했던 수많은 순간들에 비하면 ‘추워서 덜덜 떨며’ 라는 지문이 붙은 상황은 연기라기보다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이었다.

빗물이 아무리 세차봐야 총알도 아닌데 타격이 있을 리가 있을까.

하지만 감독은 빗물이 대단한 무기라도 된다는 양 손을 휘저어 빗물을 더 세차게 만들었다.

“―액션!”

불만이 가득 담긴 큐 사인에 메이슨은 다시 철퍽거리며 “에이미! …―에이미!” 하고 뛰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에이미를 찾아 헤매며 다급한 척 뛰자 이번엔 퍽, 머리 옆으로 대본이 날아왔다. 저도 모르게 살짝 피한 뒤 쳐다보자 감독의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재빨리 고개를 숙이자 촬영장이 고요해졌다.

“……저, 끊을까요?”

카메라를 잡은 누군가가 물었고 감독이 뒤늦게 “컷!” 하고 발작적으로 소리 질렀다. 감독은 뭔가가 잘 풀리지 않는지 씩씩대며 화를 삼켰다. 그 틈에 토니가 눈치를 살피며 큰 수건을 들고 달려왔다.

“괜찮아? 춥지?”

“뭐, 참을만해요.”

메이슨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토니는 깜짝 놀란 것처럼 움칠했다.

“왜요?”

“아, 아니. 기억을 잃은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싶어서―. 그냥 나 혼자 감동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

토니는 울먹울먹한 얼굴로 메이슨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주며 부르르 떨었다.

“근데 에이미가 누구예요?”

내내 부르는데 대체 누군가 싶어서 묻자 토니는 “응?” 하더니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하다가 “쟤야.”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서 이쪽을 보고 있는 사이먼의 다리 뒤에 작은 인영이 보였다. 빨간 머리칼을 귀엽게 묶은 작은 여자애였다.

여자애? 메이슨이 의아하게 아이를 쳐다보다가 “헤일리!” 하는 감독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너 생각해봐. 에이미가 누구야? 어제 만난 섹스 파트너야?”

“아뇨.”

저 어린 애가 어제 만난 섹스 파트너는 아닌 것 같아 대답하자 감독은 “그래, 아니잖아! 이 빗속에, 살인마가 돌아다니는 거리에서 딸을 잃어버렸는데 그렇게 덤덤한 얼굴로 찾으면 되겠어?” 하고 소리쳤다.

딸이라고? ―메이슨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고 감독은 계속해 잔소리를 퍼부었다. 토니는 계속해서 “미안해. 금세 끝날 거야. 오늘따라 감독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하고 그를 달랬다.

메이슨은 굳은 얼굴로, 사이먼의 다리 뒤에서 뚱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에이미―역의 아이―를 쳐다봤다.

“토니. 저 이거 안하고 싶은데….”

“어, 뭐, 뭐? ―아, 감독님, 저희 배우 준비 됐는데, 바로 시작하시죠!”

메이슨이 싫은 얼굴로 말하자 화들짝 놀란 토니는 못 들은 척 감독을 재촉했다. 그가 도망치듯 스태프들 뒤로 숨었고, 다시 감독이 메이슨을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마지막 기회야, 헤일리. 언제까지 네 장면만 찍게 할 거야? 다른 배우들 기다리고 있는 거 안 보여?”

메이슨은 힐끗, 다시 에이미라는 아이를 쳐다봤다. 아이는 계속 그가 쳐다보자 심통 난 얼굴로 혀를 쭉 내밀었다.

“…….”

메이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를, 딸을 잃어버린 역할이란 말이지―…. 안한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 전에 감독의 큐 사인이 들렸다.

“액션!”

입술을 깨문 메이슨은 철퍽거리며 빗물 사이를 뛰었다. 바로 뒤에서 카메라가 따라왔고 메이슨은 감독이 시킨 대로 최대한 헐떡거리며 “에이미,” 하고 외쳤다. 왠지 목이 좀 메는 것 같았다. 메이슨은 일부러 크게 외쳤다.

“에이미!”

빗물과 바람 사이로 과거의 편린이 스치고 지나갔다. 입술로 스미는 빗물에선 씁쓸한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메이슨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스물한 살에 잠시 일하던 바에서 만났던 여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였는데, 특별히 그녀를 사랑했던 건 아니었지만 아이가 생겼을 때는 제법 기뻤다. 고아로 나고 자라 늘 가족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솜사탕처럼 작고 달콤하고 반짝거리던 아이는 메이슨의 팍팍한 인생에 축복 같은 존재였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가 조금씩 자라 방긋 방긋 웃을 때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고 그 무렵 지원했던 경찰에 운 좋게 합격한 뒤로는 행복한 인생만이 펼쳐질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도 부인도 그리 오래 살진 못했다. 몸이 약하거나 병에 걸린 건 아니었다. 그에게서 아이와 아내를 빼앗아 간 건 다름 아닌 메이슨이 붙잡았던 한 강간범이었다.

공교롭게도 아이가 두 살이 되던 날이었다.

그날도 비가 새까맣게 내렸다. 일이 조금 늦게 끝나 급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손에는 작은 케이크와 선물인 인형을 들고, 우산이 없어 몸으로 인형에 비가 젖지 않게 가리며 집까지 뛰어 현관 앞에 섰을 때, 불 꺼진 집 안에서 희미한 비린내가 났다. 그때 왜인지 서늘한 예감 같은 것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었다.

깊숙이 묻어놓았던 기억이 비슷한 상황에서 선명하게 떠올랐고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들자 토니가 ‘대사 해! 대사!’ 하고 손을 휘젓고 있었다.

“……에이미,”

메이슨은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추위 탓인지 기억 탓인지 몸이 조금 떨렸다.

두 번, 세 번, 벨을 눌러도 아무도 나오지 않자 메이슨은 열쇠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열쇠로 문을 여는 손이 너무 떨려 ‘왜 이래….’ 작게 중얼거리기도 했었다.

두 번이나 손이 미끄러진 뒤에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그때엔 이미 인형은 비에 다 젖은 상태였다. 흠뻑 젖은 인형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걸 줍지는 못했다. 눈에 들어온 거실은 온통 피와 살점, 머리카락 같은 것으로 엉망이었기 때문이었다.

“에이미…!”

메이슨은 불현듯 살아나는 그때의 선뜩한 감각을 삼키며 소리 질렀다. 왠지 발가벗겨지는 기분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순간 감독이 “컷!” 하고 소리쳤다.

살수차가 멈췄고 메이슨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겨우 쓸 만한 게 나왔는지 감독이 다시 장면을 확인했고 조감독이 다가와 다음 장면을 설명했다.

“…….”

메이슨은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솜털이 곤두선 뺨을 문질렀다.

과거에는 늘, 죽은 딸이나 아내가 생각나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다물면 그만이었다. 제법 슬픈 기분이 들 때는 혼자 조용한 곳에서 삭히거나 참다보면 금세 사그라졌다. 늘 그래왔기 때문에 메이슨은 자신이 감정을 잘 숨긴다고 생각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놓은 감정이 어쨌든지 웃고 떠들면 금세 다른 생각을 하게 되니까 말이었다.

그러나 슬프고 절박한 척하며 입을 벌려 소리를 지르자 되레 감정이 숨겨지지가 않았다. 그냥 대사만 읽는 건데 상황이 비슷하다보니 숨기는 쪽이 더 어려웠다.

임무 때 하던 짧은 연기는 목적이 분명했다. 며칠 전처럼 누군가를 속여 어딘가에 들어가던가, 기밀을 빼내거나 여하간 그 순간을 애드립으로 잘 때우면서 상대를 몰아붙이면 정신없어진 상대가 쉽게 속아 넘어가곤 했다. 감정을 담을 필요도 없었고 이렇게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다.

연기라는 거, 생각보다 되게 짜증나는데. 메이슨은 좀 당혹스러워 얼굴을 찡그렸다.

“신호하면…, 듣고 있어요?”

뾰족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모자를 쓴 남자가 짜증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메이슨이 싫어 죽겠다는 듯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캡슐 하나를 건넸다.

“이걸 이에 물고 있다가 신호하면 쓰러지면서 깨물어 터뜨려요. 입가에 피 한 줄 쭉. 알죠? ―어제 한 번 죽었다면서요?”

심장 멈췄다고 그러던데 죽는 연기는 잘하겠네요. ―그가 빈정대듯 말했고 메이슨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후다닥, 도망가듯이 사라졌다. 다시 차가운 비가 쏟아졌다. 흐트러졌던 감정을 정리할 새도 없이 감독의 큐 사인이 울렸다.

“에이미―,”

메이슨은 작은 구두 한 짝을 발견해 그 앞에 무릎 꿇었다. 아이의 작은 구두가 빗물이 고인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모습에 싫은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젖은 곰인형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둥글게 흘러나오던 빗물은 현관에 떨어진 핏방울과 섞였었다.

한 번 생각난 옛 기억은 작은 단서에도 쉽게 떠올랐다. 메이슨은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숨기지도 드러내지도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신발을 주워들었다.

―철컥.

총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탕! 곧 이어 총소리가 들렸고 메이슨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쳐다봤다. 내내 대기하고 있던 검은 옷의 남자가 말했다.

“미안하게 됐군. 이번엔 내가 빨랐어.”

어두운 빗속이라 그가 비열하게 웃는 이만 하얗게 보였다. 총구에서 진짜처럼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메이슨은 ‘에이미는 어디…,’ 라는 멍청한 대사를 뱉는 대신 남자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 보는 남자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내를 죽인 살인자 놈처럼 느껴졌다. 그를 죽인 아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연기만 하는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메이슨은 이 순간을 단지 일처럼 사무적으로 해낼 수가 없었다.

울컥, 감정이 격해졌다. 저도 모르게 잇새를 깨물자 미적지근한 액체가 입안에 확 퍼졌다.

“―…,”

피 맛과는 전혀 다른 달큼한 액체가 입안으로 퍼지자 아주 조금, 이성이 돌아왔다.

저 남자는 그놈이 아니다. 그놈일 수는 없었다. 왜냐면 놈은 메이슨이 이미 죽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아이가 죽은 뒤 메이슨은 놈을 잡아 감옥에 처넣는 대신 경찰을 그만 두고 미국에서 가장 큰 용병회사 Zii에 취직했다.

Zii에 신체 포기 각서를 쓰고 용병이 되어 처음으로 한 일은 그 강간범 놈에게 찾아가 그야말로 놈의 몸이 벌집이 될 때까지 총으로 쏘고 칼로 난도질 한 것이었다. 메이슨은 경찰이 와 수갑을 채우는 순간까지 놈의 내장을 찢고 찢었다.

Zii는 메이슨이 빚을 내도 만날 수 없을 만큼 비싼 변호사를 붙여 주었고 그는 3개월의 집행유예를 받고 법원을 나왔다. 그리곤 내내 Zii에서 일했다. 그게 벌써 십여 년 전에 일이었다.

“…―,”

이성이 돌아오자 그 다음 연기는 조금 수월했다.

입을 벌리자 왈칵, 입에 머금고 있던 피가 쏟아졌다. 조금 전 스태프의 말처럼 메이슨은 죽음에 대해 아주 잘 알았다. 총을 맞으면 어떻게 숨이 끊어지는지, 몸이 얼마나 경련하는지, 그 뒤에 몸이 천근처럼 무거워지며 마지막 숨이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그가 숱하게 봐온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가 실제로 겪어본 죽음이었다.

빗물이 흐를 것처럼 고인 땅바닥에 뺨을 대고 누운 채로 헐떡헐떡하며 눈을 굴려 총 쏜 남자를 쳐다보자 그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그가 주춤 물러났고 메이슨은 숨을 뱉었다. 숨이 빠져나가던 순간처럼 목에선 쇳소리가 흘러나왔고 눈가에선 눈물이 흘렀다.

얼굴 위로, 눈 위로 쏟아지는 빗물을 느끼며 눈을 감고 모든 것을 멈추었다.

쏴아아―.

쏴아아아――.

“……. …….”

몸으로 빗물이 새까맣게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메이슨은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고민했다. 뭔가 잘못했나. 아니, 마지막 대사를 못하긴 했다. 좀 구차하지만 지금이라도 눈을 뜨고 ‘에이미는―,’ 하고 말해볼까? 메이슨은 이 장면을 다시 찍어야 된다면 정말 싫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죽은 것처럼 누워 있는 사이, 사람들은 모두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토니는 “저기, 리스가 진짜 죽은 것 같지 않아요? 확인해 봐도 될까요?” 하고 안절부절 못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스태프들은 입을 다물고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쿠거는 멍청한 얼굴로, 쓰러져 있는 남자를 쳐다보다 끔뻑, 눈을 깜빡였다.

뭐지, 이건? 이건 10년간 봐온 그 헤일리 러스크의 연기가 아니었다.

헤일리가 이런 연기를 한다고?

사실 바로 앞 장면은 오랜만에 나온 나쁘지 않은 장면이었다. 빗물 탓인지 늘 하던 뻣뻣하고 예쁜척하는 연기가 아니라 제법 그럴싸한 장면이 나왔다. 숨이 차게 달려와 에이미를 부르는 순간 그가 지어보인 일그러진 얼굴은, 아주 조금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가 있었다. 제법 괜찮은데, 하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그 다음 장면. 바로 그가 총을 맞고 쓰러진 모습은…….

“…―,”

쿠거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건 뭐지? 이게 헤일리의 연기라고? 쿠거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팔에 작은 소름이 돋아 있었다.

그는 컷을 외치지도 않고 바로 옆에서 헤일리의 얼굴을 클로즈업 했던 카메라를 빼앗듯 돌려 장면을 확인했다. 그리곤 다시 얼어붙은 얼굴로 헤일리를 쳐다보았다.

신발을 주울 때부터 그의 표정엔 묘한 감정이 들러붙어 있었다. 추위 때문에 떨리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섬세한 손 떨림은 이상하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파워가 있었다.

신발을 쥔 헤일리의 얼굴은 ‘울고 있다’ 고 쓰여 있던 대본과는 달랐다. 그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쏟아지는 빗물에 헐떡이는 하얀 얼굴은 감정을 드러낼 듯 말 듯 경련했고 곧, 절망에 가까운 슬픔이 찰나의 순간 드러났다. 그 순간, 카메라감독도 참을 수 없었는지 조금 더 헤일리의 얼굴을 클로즈업 했다.

쿠거가 다시 소름이 돋은 것은 총에 맞고 경련하며 알프레드를 쳐다보는 시선이었다. 물기 고인 파란 눈은 놀란 것 같이 크게 떠졌다가 곧 스스로의 상태를 알아 챈 듯 순간 멈칫했다. 눈가에 잔 경련이 일더니 그가 알프레드를 쳐다봤다.

거기서부턴 정말로 기가 막혔다. 천천히 앞으로 무너지듯 넘어진 그가 숨을 헐떡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핏발 선 눈은 지독한 감정으로 번들거렸다. 피를 내뱉는 순간은 절묘했고 후들거리며 경련한 그가 마지막인양 숨을 뱉는 것은 그야말로 전율이었다.

쿠거는 넋을 놓고 빗속에 엎드려 죽어 있는 헤일리를 쳐다봤다.

오늘따라 조약돌 같다고 느꼈던 사내는 사라지고 드라마 '클루'의 댄이 거기에 죽어 있었다.

아름답고 냉정하지만 아주 가끔 딸의 일에는 과도하게 격정적으로 변하는, 쿠거가 10년 전부터 상상했던 그대로의 댄이었다.

토니가 옆에서 ‘리스가 정말 죽었나 봐요!’ 하고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비웃을 수가 없었다. 쿠거 역시 저도 모르게 정말 죽은 건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헤일리 러스크에게 저런 연기력이 있을 리가 없는데. 10년을 그의 연기를 참고 인내하며 봐왔지만 단 한 번도 저런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유치원생 아이가 제 아버지를 속여 용돈을 타내기 위해 하는 연기보다도 더 어색하고 촌스러운 것이 헤일리의 10년간의 연기였다. 아니, 데뷔부터 바로 어제까지 한 모든 연기는 그랬다.

하지만 조금 전 연기는 달랐다. 혹시 착각한 것이 아닐까, 어둡고 비가 쏟아지는 장면이 연출되다보니 얼핏 잘한 것처럼 보인 게 아닐까하고 의심하지도 못할 만큼 완벽한 연기였다. ―혹시 예전에 총 맞고 죽어본 적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정도였다! 아니, 헤일리라면 그런 적이 있어도 제대로 재현해내지 못하는 게 맞는데――.

대체 어떻게 이런 장면이 나오지? 그가 정말 죽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든 것이 쿠거나 토니만은 아닌지 알프레드 역할의 조니가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헤일리가 이런 연기를 한다고? 타인을 진심으로 믿게 만드는 연기를 ‘그가’ 한다고? 말도 안 돼. 이건 틀림없이 우연의 산물로 이뤄진 장면일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쿠거는 시선을 돌리지 못한 채 숨을 죽였다. 조금 전 헤일리를 비웃던 사람들 모두 말을 잊고 서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빗소리 빼고는 모든 것이 멈추어 있었다.

“…컷. 해야 하지 않나요?”

등 뒤에서 상냥한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멍해 있던 쿠거는 “뭐?”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곧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덜커덩, 감독 의자가 넘어졌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 남자, 일어나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인데요.”

추울 것 같은데. 금발의 아름다운 남자는 놀란 쿠거를 향해 장난스레 “컷? 노 컷?” 하고 손가락으로 가위를 그려보였다.

“―레, 레이칼튼 씨?”

쿠거가 당황한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불렀고 노아는 화답하듯 눈을 휘어 순하게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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