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방해해서 미안해요. 놀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약속이 취소되었다는 전갈을 촬영장에 도착한 뒤에야 받아서요.”
그가 설탕을 머금은 것처럼 달큼한 목소리로 말했고 감독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약속을 뒤늦게 취소한 데에 사과했다.
감독은 “죽는 장면을 찍으려는 거예요, 아니면 죽이려는 거예요?” 하고 토니가 절규한 뒤에야 컷을 외쳐 주었다.
“리스! 리스!”
하얗게 얼어서 잘게 떨고 있는 메이슨에게 달려온 토니가 모포로 그를 돌돌 말았다.
“죽지 마, 죽지 마….”
“대체 누가 이런 걸로 죽어요.”
그가 기가 차 말하자 토니는 깜짝 놀라더니 눈을 끔뻑였다. 살짝 베인 상처에도 죽는다고 난리치던 그가 10분이 넘게 찬물을 맞았는데 되레 ‘누가 이런 걸로 죽냐’ 라니.
“기억을 잃는다는 게 이렇게 멋진 일일 줄 알았다면, 진작 내가 네 머리를 프라이팬으로 매일 내리쳤을 텐데.”
토니가 기억상실증은 정말 좋다며 감탄했고 메이슨은 “…그거라면 틀림없이 죽죠.”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건넨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메이슨은 힐끗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이 한쪽에 와글와글 모여 있었고 그들 사이로 훌쩍 키가 큰 금발의 남자가 보였다. 반짝반짝, 달큼한 분위기를 풍기는 아름다운 남자는 메이슨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노아네요?”
저 남자가 왜 여기에 있지? 연예인은 아니지 않나? 눈을 끔뻑대며 메이슨이 작게 묻자 토니는 흠칫하며 물었다.
“레, 레이노아가 기억나?”
그를 보니 기억이 되살아나는 거냐고, 토니는 불안한 목소리로 더듬거렸고 메이슨은 그제야 헤일리가 저 남자에게 추파를 던졌다가 차였다던 사건을 기억해냈다.
“아…. 아뇨. 뭐, 레이노아는 유명인이고 상식 같은 거니까요. 전 기억을 잃은 거지 바보가 된 것도 아니니―.”
자신을 잊은 기억상실증 환자가 그를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냐고 메이슨은 변명했다. 실제로 미국인에겐 상식에 가까운 레이칼튼가의 노아였지만 토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메이슨을 쳐다봤다. 뭔가 미심쩍음이 가득한 시선에, 힐끔 노아를 돌아봤던 메이슨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물었다.
“왜요?”
“아니 그냥…, 낯선 사람을 보는 기색 같지는 않아서. 저, 정말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니지?”
그가 조마조마한 투로 물었고 메이슨은 잠시 멈칫했다가 픽 웃었다.
“기억이 나면 난다고 말하겠죠. 굳이 숨길 이유도 없고. 물론 저 남자가 낯설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쉽게 잊힐 얼굴은 아니잖아요?”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메이슨의 말에 토니는 그의 어깨너머로 레이칼튼 노아를 쳐다보고 “……그건 그렇지….” 하고 수긍했다. 저 인상 깊은 남자를 연예인으로 키울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토니였다.
아쉬운 얼굴로 노아를 쳐다보는 토니의 시선에 메이슨도 다시 흘끔, 노아를 쳐다봤다.
확실히 쉽게 잊힐 얼굴은 아니었다. 단순히 잘생기고 예쁜 얼굴이야 흔하고 널렸지만 그는 정말로 특별했다. 반짝이는 금발. 고결한 피부. 달큼한 미소와 다정한 목소리.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반짝반짝 빛이 나고 그가 웃을 때마다 주변의 공기만 청량해지는 것 같은 환각을 느끼는 것은 한두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
물론 메이슨이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런 이유는 아니었지만.
사실 메이슨은 이전의 삶에서 노아를 본 적이 있었다. 10년 전인가? 노아가 열일곱 살 무렵이었고 메이슨의 회사 Zii에 경호 요청을 해왔었다. 당시 미국 지사에 있던 메이슨이 한 달 정도, 그의 경호를 선 적이 있었다.
그리 오랜 기간도 아닌데다 특별히 친해진 것도 아니었다. 아마 노아 쪽에서는 별다르게 기억도 못할 그런 관계였지만 메이슨 쪽에선 조금 인상 깊었다. 일단은 저렇게 예쁜 사람의 경호도 처음이었고 그리고 그때는 지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때는 저런 달큼한 분위기가 아니라―.
“――.”
메이슨의 시선을 느꼈는지 노아가 웃는 얼굴 그대로 이쪽을 돌아봤고 순간 눈이 마주쳤다.
잠시 멈칫한 그가 난처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고 그의 기색에 사람들이 이쪽을 보며 수군대는 것이 들렸다. 왜 저렇게 기분 나쁘게 쳐다봐? 레이칼튼 씨 괜찮아요? 웅성대는 소리에 짧게 한숨을 쉰 노아는 다시 살짝 고개를 돌려 메이슨을 향해 가볍게 인사하듯 고개를 꾸벅여 보였다.
메이슨은 어색하게 인사하는 대신 살짝 웃었다.
죽었다 깨어난 후, 헤일리가 저 남자에게 추파를 던졌다 자살 기도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제법 놀라긴 했었다. 과거의 세계와 같은 세계가 맞는지 확신할 길이 없던 상황에서 노아의 이름은 ‘현실은 현실이구나’ 라는 깨달음과 동시에 비현실성을 가중시키는 느낌이었다. 메이슨의 일생에서 노아와의 접점은 아주 순간이었고 곧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마주할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심지어 저 남자에게 찝쩍대기까지 했다니 정말로 ‘오래 살고 볼 일’ 이었다.
“아직도 저 남자가 그렇게 좋아?”
옆에서 불쑥 들린 목소리에 돌아보자 사이먼이 애매한 얼굴로 서 있었다. 동정 반 안타까움 반인 그 얼굴에 메이슨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뇨. 뭐, 잘생겼다고 생각은 하지만. ―죽었다 살아나니 취향도 변하나 봐요.”
메이슨은 헤일리와는 달리 완벽한 스트레이트였다. 현장에 여자가 거의 없다보니 저들끼리 욕구를 푸는 놈들도 제법 있긴 했지만 메이슨은 어떻게 같은 물건이 달린 남자를 보고 동할 수가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련 없이 고개를 젓는 그의 모습에 사이먼은 그가 ‘미련이 없는 척’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조금 더 동정의 빛이 깊어졌다.
“그, 그래? 하긴 저 남자는 허들이 너무 높지….”
“네. 그리고 키도 너무 크죠.”
좀 더 작고, 귀엽고,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쪽이 좋다고 무심하게 대꾸한 메이슨은, 이게 농담인지 헛소리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대는 사이먼을 두고 뜨거운 커피를 홀짝였다.
따뜻한 커피를 쥐고 모포를 둘러쓴 지 한참이나 됐는데 여전히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아까 토니에게 끌려올 때도 느꼈지만 예쁘장하다는 것 말고 다른 장점은 없는 듯, 정말 비루하긴 비루한 몸이었다. 원래의 몸이었다면 2, 3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비를 맞고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이면 금세 몸이 따끈해졌을 텐데 헤일리의 몸은 커피 한 잔을 다 마셔가는데도 여전히 뼛속까지 냉기가 돌고 입술이 달달 떨렸다.
“근데 촬영 안 끝났나요? 다시 찍어야 해요?”
캐릭터가 죽었으니 찍어야 하는 장면은 그것으로 끝일 텐데 토니도 그렇고 갈 기색이 없었다. 대사를 못해서 그런가? 죽은 척 엎어졌을 때 사람들 분위기가 이상하긴 했다. 어땠냐면…, 다들 조용히 서서 아주 이상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봤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어이없다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그건 ‘쟤 지금 뭐하냐.’ 라는 눈이었을까?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만약 다시 찍어야 한다면…, 주어진 일이니 하긴 하겠지만 솔직히 정말 싫었다.
“다시 찍다니, 무슨 말이야?”
“다시 찍어? 왜?”
다시 찍어야 하냐는 메이슨의 질문에 토니는 물론, 옆에서 괜히 서성대던 사이먼까지 발끈하고 나섰다.
“아니, 대사도 못하고….”
다시 찍고 싶다는 건 절대 아니었는데 토니는 “대사 따위는 하나도 안 해도 괜찮아!”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네가, 네가 어떤 연기를 했는데…!”
토니는 목이 다 메는 듯 삑사리까지 내며 입술을 달싹였다.
토니가 헤일리의 매니저를 한 지 16년. 그에게 연기력이라는 소양을 포기한 것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오래 전이었다. 연기로 먹고 사는데 연기력은 둘째 치고 두어 줄 되는 대사를 외울 정도의 기억력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빌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이 며칠인가. 내가 너무 과한 기대를 하는 걸까. 대사 정도는 좀 씹어도 되지 않나. 토니조차 그런 생각이 들던 최근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연기는 달랐다. 카메라 앞에 선 그가 이쪽을 쳐다보는 순간 토니는 숨을 삼켰다. 헤일리를 본 것이 16년이었다. 매일매일, 하루에도 수 시간씩 그를 봐왔다. 헤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말하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토니는 짝사랑하는 여자애를 떠올리듯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 앞에 선 사람은 그가 알던 헤일리가 아니었다. 그 낯선 남자는 헤일리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전혀 달랐다. 별다른 대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 선명하게 느껴지는 묘한 박력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 봤을 때 이후로 본 적이 없던 스타의 빛이 보인 듯한 착각에 눈까지 비볐을 정도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니었다. 심지어 헤일리에게서 나올 연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토니에겐 기억상실증은 기적과 동의어였다.
토니의 기백에 메이슨은 살짝 물러나며 “아… 다시 안 찍어도 되요? 그러면 다행이지만….” 하고 수긍했다. 그럼 이제 가도 되는 건가, 하는 말이었는데 두 사람은 펄펄 뛰었다.
“네가 그런 명연기를 해냈는데 왜 다시 찍어? 괴롭히려는 게 아닌 이상에야.”
사이먼은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말하더니 “안 그래, 감독님?”하고 대뜸 물었다. 멀찍이 노아의 앞에서 낮은 자세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쿠거는 화들짝 놀라며 사이먼을 돌아봤다. 내내 그따위로 연기할 거면 때려치워! 하고 소리쳤던 쿠거는 당황한 얼굴로 메이슨을 한 번, 노아를 한 번 살폈다.
“아, 아니 뭐…,”
“난 소름이 다 돋더라. 정말 굉장했죠? 감독님 놀라서 컷도 못 외쳤잖아.”
싱글싱글 웃은 사이먼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고 쿠거는 저 새끼가 왜 저래, 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물론 헤일리의 연기는 전율이 일 정도로 대단했지만 노아의 앞에서 헤일리를 칭찬하다니, 그의 심기라도 상하면 끝장이었다.
물론 노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미소 짓고 있었고, 그런 소소한 것에 신경 쓸 만큼 옹졸한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의 눈치를 살피는 쿠거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다시 안 찍는다고, 그러니 어서 꺼지라고 하려고 손을 내저었다.
“근데 레이칼튼 씨는 어떻게 봤어요?”
하지만 사이먼이 먼저 불쑥, 친근한 투로 물었다. 당신에게 차이고 자살기도 했던 남자의 죽는 연기를 어떻게 봤냐는 어색한 내용의 질문에 당사자보다 주변사람들이 더 놀라 입을 다물고 노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잠깐 의아한 얼굴을 하더니 헤일리를 쳐다봤다.
“…….”
메이슨은 갑자기 이상해진 분위기에 머리칼의 물기를 닦던 수건을 내리며 노아를 쳐다봤다. 메이슨을 쳐다보고 있던 그는 눈이 마주치자 “……글쎄요.” 하며 생긋 웃었다.
“전 좀 늦게 들어와서 제대로 못 봤는데, 아주 멋진 장면이었나 봐요.”
“……못 봤다고요?”
“네. 들어왔을 때는 이미 누워 계셔서…. 그런 굉장한 장면을 놓쳤다니, 아쉽네요.”
나중에 꼭 TV로 확인해야겠는걸요. ―그는 사근사근한 투로 무난한 대답을 했고 사이먼은 살짝 눈을 가늘게 떴지만 곧 어깨를 으쓱하며 “꼭 보세요.” 하고 말았다.
“―….”
노아의 시선이 조금 더 메이슨에게 닿았다가 이내 별 관심 없다는 듯 떨어졌다.
토니는 감독과 노아의 눈치를 살피고 사이먼에게 “괘, 괜찮아요? 왜 그래요?” 하고 물었다. 주변에서 수군수군 사이먼은 왜 노아에게 시비냐는 둥 하는 소리가 들렸고 사실 메이슨도 그렇게 생각했다. 위해주는 건 고맙지만 딱히 노아가 헤일리에게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인기인이라고 해서 곤란한 일을 당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사이먼은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이 “아니 그게―,” 하며 노아를 힐끗 쳐다봤다.
“그게 분명히……,”
노아는 ‘늦게 와서 못 봤다’ 고 했지만 사이먼은 그가 씬 초반에 들어와 헤일리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을 틀림없이 봤다.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이었고 헤일리의 연기가 끝날 즈음엔 그의 얼굴에 묘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촬영장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 사이먼은 노아도 헤일리의 연기에 감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노아의 행실로 보면 적당한 칭찬 한 마디 정도는 해줄 것 같았고 그의 칭찬 한 마디가 터지면, 다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헤일리라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조금 전의 감동에 대해 떠들어 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분명히, 뭐요?”
그게 분명히―, 하고 말끝을 흐렸던 사이먼이 말을 하지 않고 힐끗 힐끗 노아만 살피자 토니가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사이먼은 무심한 얼굴의 헤일리와 감독과 이야기 하느라 화기애애한 노아를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가?”
감탄이 아니었나? 사이먼은 아까 노아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그 표정을 되새겼다. 모두가 넋을 놓을 정도로 대단한 장면을 눈앞에 두고, 당연히 그의 표정에 뜬 감정이 감탄이라고 생각했었던 사이먼은 문득 ‘어…,’ 하고 멈칫했다. 노아의 녹색 눈을 스치고 지나갔던 감정은 감탄과는 조금 달랐다. 그보다는 훨씬 차가운 것이 감탄이라기보단 오히려―…,
“? 사이먼?”
“……잘못 봤나?”
사이먼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잘못 본 것 같기도 했다. 아주 순간적인 감정이었고 그 순간엔 사이먼도 감탄이라고 받아들였으니까. 되새겨 그 감정이 부정적인 감정이었다고 회상하는 것도 애매했다. 감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경멸이나 짜증에 가까운 것 같았다고는 해도, 그래서 더 착각 같았다. 타인을 향해 그런 감정을 보일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노아는 평소처럼 상냥한 얼굴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 * *
“…….”
사실 메이슨은 옷을 가리는 타입이 아니었다. 거적때기든 뭐든 아무거나 주워 입는 타입이었고 하는 일이나 환경 탓에 대부분의 시간을 군복이나 회사에서 지급된 옷들을 몇 년씩 입곤 했었다. 그러니 사실 뭐가 되었든 옷의 형태를 띠기만 하면 별 생각 없이 입을 수 있는 무던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메이슨은 토니가 건네준 옷가지와 속옷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건 벌칙 게임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토니가 준 헤일리의 옷들은 팀원들과 벌칙 게임 때 입으라고 던져주던 여자 옷들과 비슷했다. 작고 화려하고 여기저기 찢어져 있으며 큐빅이나 징 같은 게 눈이 아플 만큼 박혀 있었다. 너덜너덜해 허벅지부터 무릎까지 앞이 훤히 드러나는 바지나, 허리를 넣는 구멍과 목을 넣는 구멍의 크기가 비슷해 입으면 어깨가 훤히 드러날 것 같은 티는 그나마 괜찮았다. 옷가지 사이로 튀어나온 작은 속옷은 보기만 해도 헛웃음이 나왔다.
노아에게 찝쩍거렸다는 말에 헤일리가 게이라는 것을 대강 짐작했었지만 몰랐다고 하더라도 이 속옷을 보면 ‘얜 게이구나’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물건이었다.
핫핑크 호피에 물건은 가려질까 싶은 손바닥만 한 사이즈의 늘어나지도 않는 재질의 브리프.
“…….”
메이슨은 이런 걸 입으면 숨은 쉴 수 있을까 생각하며 화장실로 들어서려다 쿵! 뭔가와 부딪히며 휘청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아앗…….”
들고 있던 옷가지들이 바닥에 흩어졌고 메이슨은 부딪힌 어깨를 문지르며 급히 옷가지를 주웠다. 비 촬영 때문인지 바닥이 흙탕으로 젖어 있었다. 아무리 계집애 옷 같은 것이라도 홀딱 젖은 것보다는 나았다. 비실비실한 헤일리의 몸은 금세라도 감기에 걸릴 것처럼 으슬으슬했다.
몸이 바뀐 탓에 주의력이나 반사신경도 둔해진 건지 평소였다면 부딪히기 전에 피하거나, 부딪혔더라도 이렇게 꼴사납게 뒤로 자빠지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헤일리의 브리프를 본 충격이 너무 커서 약간 정신이 없기는 했지만….
주섬주섬 옷가지를 줍던 메이슨은 멈칫했다. 아주 고급스러운 구두가 그의 형광 호피무늬 브리프를 짓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장실까지 따라오다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이거 좀 징그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머리 위에서 들린 다정한 목소리에 메이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참 키가 큰 노아가 예의 그 웃는 얼굴로 옷자락을 툭툭 털며 서 있었다.
메이슨은 잠깐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말했다.
“……여기 공중 화장실인데요.”
아무나 다 올 수 있는 그런 곳 아닌가? 메이슨이 덤덤하게 말하자 노아는 곧 같잖다는 듯 “아아, 그렇죠.” 하며 픽 웃었다.
“―….”
메이슨은 따라온 것이 아니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별로 믿을 것 같지도 않았고 헤일리의 난봉 탓에 일어난 일들을 일일이 변명하는 것도 약간 귀찮았다. 그보다는 옷을 갈아입는 게 더 급했다. 헤일리의 몸은 체온 조절하는 능력이 없는 모양으로 안 그래도 허여멀건 피부가 이젠 푸르스름하게까지 변해 있었다.
“발 좀 치워주세요. 그쪽이 제…, …아무튼, 밟고 있는데.”
메이슨은 그가 밟고 있는 브리프를 가리키며 말했다. 흙탕이 고인 바닥에서 구둣발에 밟히기까지 했으니 입을 순 없겠지만 워낙에 자극적인 물건이니 수거해 가야 할 것 같았다. 손바닥만한 형광 호피무늬 브리프를 아무데나 굴러다니게 했다가 나이 지긋하신 분이 보고 가슴이라도 부여잡으시면 큰일이니 말이었다.
노아는 힐끗, 자신의 구두에 밟힌 브리프를 쳐다보더니 불쾌한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발을 치우자 흙이 묻어 엉망이 된 브리프가 드러났고 메이슨은 급히 주워 옷가지 사이로 밀어 넣었다.
노아는 헤일리의 난삽하고 괴악한 속옷 취향에 대해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 얼굴이었으나 곧, 말 섞는 것도 싫다는 듯이 메이슨을 지나쳐 화장실을 나갔다.
“…―,”
메이슨은 노아를 돌아봤다. 스쳐지나가며 들린 작은 한숨소리 탓이었다.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그 한숨소리에 메이슨은 저도 모르게 일어나 그를 불렀다.
“노아…, 아니, 레이칼튼 씨!”
메이슨이 그의 경호를 섰던 것은 아주 잠시였지만 그때도 그는 인기가 많았고 스토커나 그루피도 한둘이 아니었다. 연예인도 스포츠 스타도 아닌 고등학생일 뿐이었는데도 말이었다. 당시 메이슨은 그를 동정했었고 때문에 평소 그답지 않은 오지랖으로 그를 부르고 말았다.
노아라는 단어가 거슬렸는지 그가 우뚝 멈춰 섰다.
“전 이제 레이칼튼 씨 안 좋아하고 더는 예전…, 예전처럼 귀찮게 굴지도 않을 겁니다.”
예전에 헤일리가 어쨌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메이슨은 최대한 진심을 담아 말했다.
힐끗, 노아가 메이슨을 돌아봤다. 그는 천천히 메이슨을 기분 나쁜 듯이 쳐다보더니 픽 웃었다. 지랄한다, 하는 투로.
“그거 고맙군요.”
꼭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며 살짝 고개를 기울여 웃은 그가 다시 촬영장 쪽으로 걸어갔다.
메이슨은 잠깐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옷이나 갈아입자’, 하고 시선을 돌렸다.
“…―?”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려던 메이슨은 멈칫했다. 화장실 입구에 하얀 약병이 구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 없이 약병을 주우려던 메이슨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뒤돌아 노아를 쳐다봤다. 그는 이미 촬영장 안으로 들어가 버린 듯 보이지 않았다.
메이슨은 짧게 혀를 차며 화장실 입구에 떨어진 하얀 약병을 주웠다.
“이걸 아직도 먹네―….”
자낙스xanax. 신경안정제였다.
* * *
“오늘 저녁에 스케줄 있어요?”
“괜찮으면 저녁에 함께 식사해요, 레이칼튼 씨~.”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여배우들의 재잘거림에 노아는 상냥하게 웃으며 거절했다.
“죄송해요. 오늘은 스케줄이 잔뜩 밀려서…. 제가 혹시나 저녁 제안을 받아들일까봐 필이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거든요.”
식은땀이 다 나네요. ―노아는 정말로 식은땀이 난다는 듯 힐끗 필을 돌아봤다. 필은 그의 뒤에서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고 노아를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봤죠? 내가 이러고 살아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우울한 얼굴을 했다. 여배우며 감독이며 모두 아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저녁은 드실 테니…, 어떻게 안 되나요?”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잘 하면 시간을 뺄 수 있지 않을까 다들 안타깝게 매달렸고 노아는 힐끗 필을 쳐다봤다. 슬슬 가야 할 시간이라고 막아줄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오지 않는 탓이었다.
“…―?”
촬영장 입구 쪽에 서 있던 필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버석버석 젖은 금발에 앙상한 몸. 너덜너덜한 옷가지를 입은 남자였다. 무뚝뚝한 얼굴로 필과 이야기 하고 있는 헤일리의 모습에 노아는 살짝 차가운 눈을 했다.
옷 꼬라지하고는. 차라리 비에 쫄딱 젖어있던 모습이 나았겠다 싶을 정도로 천박하고 후줄근한 모습이었다. 아까 발에 밟혔던 선정적이고 정신 사나운 속옷도 딱 헤일리 러스크다웠다.
불쾌해. 노아는 흘러내리는 옷자락을 추켜올리는 헤일리를 보며 서늘하게 생각했다. 원래도 싫어하는 남자지만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눈에 거슬렸다.
아까 잠깐 촬영장에 들어왔을 때, 헤일리가 빗속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노아는 순간적으로 그가 헤일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뭐, 원래도 눈여겨본 적이 없는 탓에 그를 못 알아본 것은 큰 일이 아니었는데 순간적으로 겹쳐 보인 다른 사람이 문제였다.
“레이칼튼 씨? 정말 안 될까요? 아무리 바빠도 저녁은 먹으면서 일해야죠. 정말 오래 시간 뺐지 않을 테니까―,”
팔짱을 끼며 친근하게 가슴을 밀어붙이는 여배우의 애교에 노아가 난처하게 웃었고 기다리던 필이 다가왔다.
“레이칼튼 씨. 다음 스케줄 가셔야 할 시각입니다.”
“필. 노아 저녁 시간 좀 빼줘요. 이렇게 젊고 잘생겼는데 여자친구도 못 만들 정도로 바쁘게 굴리다니, 너무한 것 아녜요?”
조감독 페니가 총대를 들고 나섰고 모여 있던 사람들이 옳소! 맞아요! 하며 떠들어댔다. 그들은 필을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었고 힐끗, 손목에 시계를 확인한 필은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레이칼튼 씨의 저녁식사 시간을 뺏고 있는 건 여러분입니다. 벌써 6분이 지났거든요. 이제 식사 시간은 14분이 남았습니다. 14분이면 혼자서 뭐든 드실 수 있는 시간이지만 다른 분들과 함께는 무리일 겁니다.”
이제 13분 남았네요. ―냉담하게 쏟아져 나오는 그의 말에 사람들이 벙쪄했고 노아는 못 말린다는 듯 장난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아, 우리 무서운 비서님께서 그렇다네요. 뭐라도 먹으려면 당장 가야겠네요. 제가 품위 없이 세트장 비품을 훔쳐 먹기 전에요. ―다음에 또 보죠.”
노아는 얼어있는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인사하고 필을 따라나섰다. 뒤에서 아쉬운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쟤랑 무슨 이야기 했어요?”
노아가 힐끗 헤일리를 눈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 치가 무슨 수작이라도 부리더냐 하는 질문이었는데 필은 대답 대신 그에게 하얀 약병을 내밀었다.
“이걸 전해달라고 하던데요. 화장실 앞에서 떨어뜨리신 모양입니다.”
노아는 그가 내민 하얀 약병을 쳐다보다가 주워 툭 안을 열었다. 뭔가 수작이라도 부렸나 했는데 안에 알약은 오후에 확인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하긴. 수작을 부릴 거였으면 필에게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전해줬을 터였다.
‘전 이제 레이칼튼 씨 안 좋아하고 더는 예전…, 예전처럼 귀찮게 굴지도 않을 겁니다.’
아까 헤일리가 등 뒤에서 외친 말이 떠올랐다. 정말일까? 노아는 힐끗,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헤일리를 쳐다봤다.
“레이칼튼 씨?”
뭔가 문제가 있냐는 듯 필이 불렀고 노아는 곧 다시 시선을 돌리고 웃었다. 사실 그의 말이 정말이든 아니든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아아. 별것 아녜요. 어서 가죠, 배고픈데.”
노아는 ‘―근데 오늘 내 저녁 시간 진짜 13분이에요? 농담이었죠, 그거?’ 하며 해사하게 웃었다.
촬영장을 나가며 노아는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지만 딱히 의미 있는 시선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