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조용히 해. 조용히 해. 조용히 해. 조용히…,’
노아는 머리 위에서 반복적으로 들리는 말소리에 힐끗 위를 쳐다봤다. 뭐가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는 커다란 여행 가방 안에 입이 막히고 손과 발이 묶인 채로 쪼그려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아는 숨을 참으며 소리를 죽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숨을 죽이며 있어도 ‘조용히 해. 조용히 해.’ 하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실처럼 가는 빛이 들어오는 가방 틈새로 중얼중얼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조용히 해. 조용히. 소리 내면 이대로 가방을 차도로 던져서 죽여 버릴 거야. 조용히 해. 조용히 해.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노아에게 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친년……. 노아는 속으로 그녀가 미친년이라고 생각했다. 욕이 아니라 정말로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실 제정신이라면 숨죽이고 있는 노아에게 조용히 하라고, 고장난 CD라도 돌리듯이 이야기할 리가 없었다. ―물론 그 이전에, 남의 아이를 납치해 가방에 넣고 돌아다닐 리도 없었지만.
보도블럭 위를 구르는 여행가방의 바퀴는 심하게 덜컹거렸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뭐라도 토했을 것 같았다. 멀미와 탈진으로 노아는 손끝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녀가 손을 묶어놓지 않았더라도 노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숨을 죽이고 앉아서 이 미친년이 자신을 죽이기 전에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주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별로 가망은 없었다. 뉴욕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따위를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동네였고 젊은 여자의 여행가방 안에 어린애가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할 상상력 좋은 사람도 없을 터였다. 혹 누군가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가방을 열어 보자는 이야기를 할 리는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 구해 주지 않을까. 사람들이 자신을 찾고 있을 텐데. 이 정신 나간 여자를 이상하게 여긴 누군가가 가방을 낚아 채 자신을 짜잔 꺼내주지 않을까. 지금 당장에라도. 조금 뒤라도….
아, 아무도 나를 구해주지 않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것은 제법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 어둠 속에서. 저 여자에게서. 죽음의 공포에서부터 그 누구도 그를 구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영원히.
“…칼튼 씨. 레이칼튼 씨? ―괜찮으십니까?”
차 뒷좌석에서 잠들었던 노아는 필의 목소리에 희미하게 눈을 떴다. 눈이 무거웠고 희미하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환각으로 보이던 검은 세계가 사라지고 찬바람이 뺨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열린 차 문 앞에 서 있는 필의 미간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노아는 가볍게 눈을 깜빡거리며 바람이 빠진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 아아…. ……다음 스케줄이 뭐였죠?”
느릿한 노아의 물음에 필은 낮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없습니다. 들어가 쉬십시오.”
노아는 식은땀으로 축축한 이마를 느끼며 두말 하지 않고 “내일은 바쁘겠네요.” 하고 웃었다. 오늘 미뤄진 스케줄은 내일의 빽빽한 스케줄의 빈틈을 파고들어 1분, 1초까지 허투로 쓰지 못하게 만들 터였다. 내일은 식사시간 13분도 정말 농담만은 아니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필의 생각대로 노아는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병원에 안 가보셔도 되겠습니까? 아니면, 로버트를 부를까요?”
주치의를 부른다는 필의 말에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아, 됐어요. 로버트라고 뭐, 특별한 방법이 있겠어요? 약이나 더 독한 걸로 지어주겠죠. ―별 것 아니니 신경 쓰지 마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있다는 그런 거잖아요? ―노아는 홀가분하게 손사래를 쳤고, “하지만 레이칼튼 씨, 지금―,” 하고 무슨 말인지 더 하려는 필을 향해 빙긋 화사하게 웃었다.
“주제넘어요, 필.”
화사한 미소 아래 노아의 녹색 눈이 서늘했다. 필은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고개 숙인 필의 사과에 노아는 손을 내저었으며 “오늘은 이대로 퇴근하세요.” 하고 말했다. 필은 힐끗, 일이 잔뜩 남은 회사 건물을 돌아봤지만 일이 많아서 퇴근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길 하는 대신 그에게 인사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가 정중히 차 문을 닫아주었고 노아는 언제 차가운 눈을 했냐는 듯 생글거리며 쾌활하게 손을 흔들었다. 허리를 숙인 그를 뒤로 하고 차는 노아의 저택으로 향했다.
“…….”
노아는 다시 의자에 깊게 기대고 눈을 감았다. 타이를 느슨하게 만들기 위해 손가락을 타이에 걸자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게 느껴졌고 곧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벌써 20년 전의 일인데도 아직까지 몸은 반사작용을 하고 있었다.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노아는 낮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 영화로까지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스토리가 장절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머니 켈리 레베카에 대한 질투로 미친 여자가 어린 노아를 이리저리 데리고 돌아다니며 도주하다 우연찮게 구조되었을 뿐이었다. 대부분이 아이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유괴사건에서 드물고 운 좋게 노아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영화는 해피엔딩이었고 현실도 영화와 거의 같았다. 이후에 일어난 몇 가지 문제는 대중이 알 필요가 없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노아는 손을 더듬어 재킷의 안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냈다. 자낙스. 아주 오래 전부터 먹던 약은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효과는 미미했다. 먹는 약을 바꾸고 싶지 않아 그대로 자낙스를 먹고 있었지만 주치의 로버트는 다른 신경안정제를 꾸준히 권하고 있었다. 노아 스스로도 슬슬 고집을 버리고 다른 약을 먹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여하간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플라시보 효과인지 그래도 먹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약을 꺼내기 위해 약병을 열던 노아는 약병에 묻은 작은 흙탕물 자국에 멈칫했다.
“―….”
그는 약을 먹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얼룩을 잠시 바라봤다. 아까 저녁에 바닥에 떨어뜨려 생긴 얼룩이었다.
촬영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 끝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빗속에서 덜덜 떨고 있는 남자를 보며 노아는 그가 헤일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에 서 있을 리 없는 한 남자.
다들 그의 연기에 경악에 가까운 경탄을 하고 있을 때도 노아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그를 떠올릴 수가 있었을까. 헤일리와 그 남자 사이에는 공통점 따위라곤 한 가지도 없었다. 헤일리는 노아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천박하고 상스러운 사람이었고 그 남자는…….
노아가 흐릿하게 떠오르는 남자의 얼굴을 선명하게 기억하기 위해 눈을 감았고, 그 순간이었다.
Trrrrrrr―.
노아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필의 전화였다. 노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그의 상태를 아는 필이 이렇게 전화를 했다는 건 필시 급한 일일 터였다.
한숨을 쉰 노아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말했다.
?메이슨 테일러에 대한 새 보고가 들어왔는데…, 그가 현재 임무 중 행방불명되었답니다. ―자세한 보고는 자택의 팩스로 보내겠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추적하시겠습니까? 필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고 노아는 대답대신 천천히 시선을 돌려 자낙스가 든 흰 약병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좀 더 강한 신경안정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이게 다 뭐예요?”
햇살이 쨍하게 들어오는 거실 소파에 앉아 서류들을 넘기며 메이슨은 어이없다는 어조로 물었다.
“네, 네가 어제 준비해 달라던 네 재정 상태 서류들이잖아. 네 개인 회계사인 로렌에게 부탁했더니 울면서 건네줬어.”
드디어 네가 네 재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냐며 말이야. 토니는 더듬거리며 말했고 메이슨은 뺨을 긁적이며 ‘이 동네 남자들은 진짜 자주 우네.’ 하고 생각했다. 사이먼도 토니도 이제는 모르는 남자인 로렌까지, 걸핏하면 울어대는데 도무지 감당이 되질 않았다. 게다가 우는 이유들도 하나같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이게 재정 보고서라는 건 알겠는데요, 여기. 여기. 여기랑 여기. 그리고 여기 전부. 이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돈이 뭐냐구요.”
헤일리의 재산은 크게 두 종류였다. 스스로가 번 큰돈과 부모님이 남겨주신 저택을 비롯한 유산 약간. 그리고 그 스스로가 번 돈과 유산은 줄기차게 어디론가 빠져나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거의 마이너스에 가까웠다. 저택처럼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을 제외한다면 이미 마이너스였다.
빠져나가고 있는 돈은 적게는 몇천 달러에서부터 몇십만 달러까지로 다양했지만 물건 등을 구매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사치도 일부 있긴 했지만 대체로는 어딘가에 송금하고 있는 돈이었다.
메이슨의 물음에 토니는 “아 그거…,” 하고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제일 위에는 네 고모, 안나의 생활비. 매달 4천 달러씩 주고 있지. 그 밑에는 네 삼촌 부부에게 보내는 돈이고. 거기 4천 달러와 2만 달러는 안나의 병원비. 그 밑은 조이의 생활비랑 아이 육아 도우미의 월급…, 그 밑에 이십삼만 달러는 네 사촌인 조이에게 빌려준 돈이라는데….”
아마 기억상실증에 걸리기 전에도 기억을 못했을 거라며 토니는 그 비슷한 종류의 돈들을 설명했다. 이건 조던의 생활비고, 저건 산드라의 이사비용이고, 그건…. 끝도 없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내역에 메이슨은 물었다.
“……왜 친척들 생활비를 줘요?”
심지어 그 안나라는 고모와는 의절했다고 하지 않았나? 메이슨은 호흡기를 떼려고 모여 있던 친척들에게 매달 2만 달러가 넘는 돈을 퍼붓고 있는 헤일리의 지출 상황에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응? 글쎄……? 그냥 네가 줘야 하는 거라며 준 거라 나도 자세히는 잘 몰라….”
“이 사람들 장애인이에요?”
그래서 스스로 돈을 못 버는 거냐고 물은 메이슨은 곧 “아니, 실제로 장애인이라고 해도 제가 이 사람들을 부양할 필요는 없잖아요?” 하고 서류를 살폈다. 장애인이든 생활보호자든 그들을 챙기는 건 나라의 몫이지 의절한 조카의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친척들에게 나가는 생활비 다 끊어주세요. 육아비, 병원비, 다 끊어주세요.”
메이슨은 단호하게 말했다. 호구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마이너스가 되도록 그런 쓰레기 같은 친척들에게 돈을 퍼주다니, 헤일리라면 몰라도 메이슨은 그런 배알 없는 짓을 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토니는 메이슨의 말에 놀랐는지 눈을 끔뻑였다.
“그, 그래도 돼? 그렇게 갑자기…, 아니 나도 네가 그 쓰레기들에게 돈을 주는 건 싫지만, 이렇게 갑자기 끊으면 난리를 칠 텐데…,”
“무슨 난리요?”
메이슨은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토니는 “전화하고 찾아오고…, 네 루머를 퍼뜨린다고 하거나 고소를 한다고 할지도 몰라.” 하고 겁먹은 어조로 말했고 메이슨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헤일리가 왜 이렇게 컸는지, 다는 몰라도 조금은 알만하다 싶었다. 부모는 없고 친척들은 죄 뜯어 먹을 생각뿐이고, 하나 있는 조력자 매니저는 그야말로 심약하기 짝이 없었다. 매달 2만 달러가 넘는 돈을 병신처럼 쓰레기통에 붓고 있는데 고작 전화 오는 게 무섭다고 그 돈을 ‘안 줘도 될까?’ 라고 하다니. 애가 제대로 크면 이상할 환경이었다.
“고소는 제가 해야 될 것 같은데. 여기. 빌려준 돈들, 받기로 한 날짜가 한참 지나있는데요.”
회계사가 괜히 있는 건 아닌지 다행히 공증들은 있었다. 3,4천 이하의 소소한 지출들은 차용증이 없는 경우도 물론 있었지만, 그런 것들을 일일이 챙기지 않더라도 나머지가 워낙에 큰돈이었다.
“제 회계사…, 로렌이라고 했던가요? 이 건들에 대해 독촉장을 보내달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다음 달까지 지급이 안 되면 차압이든 고발이든 하시고.”
“그, 그, 그, 그래도 돼?”
토니는 무섭지만 조금 기쁜 것처럼 물었다. 메이슨은 두툼한 차용증을 휘리릭 넘기며 “네.” 하고 덤덤히 대답했다.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면, 뭐 그때는 다시 변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그렇게 해주세요.”
헤일리가 스스로의 인생을 호구로 만든다고 해서 메이슨이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남이었고, 메이슨은 남 일에까지 오지랖 떠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메이슨은 그저, 자신이 헤일리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동안에는 호구처럼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덤덤한 그의 모습에 토니는 감동이라도 한 양 입술을 깨물며 “역시 기억상실증은 좋아. 기억상실증이 짱이야.” 하고 중얼거리며 로렌에게 전화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 그리고…, 이건 토니의 월급이죠?”
메이슨은 매달 2천 4백 달러가 빠져나가는 것으로 나와 있는 토니 브리짓의 이름을 지목했다. 토니는 흡, 하고 놀란 얼굴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무, 문제라도 있어……?”
조심스럽게 묻는 토니의 표정에 메이슨은 살짝 웃었다.
“저 말고 다른 연예인도 관리 하고 계세요?”
“아, 아니. 너 내가 다른 연예인 함께 관리하는 거 싫어해서….”
토니가 우물거리며 말했고 메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들은 헤일리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 것도 같았다.
“저, 연예인 일 별로 없죠?”
“아, 응? 아…, 아. 아 그게…, 그러니까 말이지….”
갑작스런 그의 물음에 토니는 우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사실 별로 없는 게 아니라 전혀 없었다. 들어오는 거라고는 포르노의 경계에 선 에로 영화나 싸구려 화보집뿐으로, 한 번 발을 잘못 디디면 나락으로 떨어질 그런 일들뿐이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정상적인 배우 일은 조역이고 엑스트라고 사흘 전을 경계로 완전히 끊겼다.
그 전부터 그런 기미를 보이고 있긴 했지만 노아와의 일이 결정타였다. 다들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일을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지난달에 대본을 보내준 곳에서 전화가 와 ‘헤일리 안 쓴다.’ 는 통보까지 했다.
노아가 헤일리에 대해 무슨 코멘트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도 다들 알아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헤일리가 엄청나게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써서 그의 눈에 튈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요즘에는 좀 뜸하긴 한데 그래도 어제 네 연기가 방영되는 다음 달이 되면 분명히 화제가 되고 일이 폭풍처럼 밀려들 거야!”
장담하는 토니의 말에 메이슨은 “그래요?” 하고 건성으로 답했다. 토니는 메이슨이 연예인을 때려치울 것이 두려워서인지 어제부터 내내 그의 연기를 찬양했지만 카메라 앞에 처음 서 본 초짜의 연기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할까. 설령 좀 쓸 만했다고는 해도 헤일리의 이전까지의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 빤했다. 메이슨은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어쨌든 지금은 일이 없다는 거군요?” 하고 되물었다.
“그……, 비슷하지….”
기죽은 토니의 대답에 메이슨은 고개를 “좋아요.” 하고 끄덕였다.
“기한을 두죠. 앞으로 삼 개월.”
“기한?”
“네. 그리고 이거―.”
메이슨은 헤일리의 수표책에 아침부터 연습한 그의 사인을 휘갈겨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토니에게 건넸다.
“육, 육천 달러?”
토니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메이슨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8월까지, 삼 개월 간 그렇게 드릴게요. 앞으로 그, 배우 일이 없어도 석 달은 저 좀 도와주세요.”
당분간 제 옆에서 저에 대해 알려주실 분이 필요하거든요. 헤일리의 친구관계든 가족관계든 그가 헤일리로서 살아가기 위해 알아둬야 할 사소한 비밀들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전장에 나가는 멍청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메이슨의 말에 토니는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사, 삼 개월 뒤에는?”
삼 개월 간만 도와달라니, 그 뒤에는 어쩌겠다는 말인가. 토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이며 물었고 메이슨은 뺨을 긁적이며 웃었다.
“아니 뭐…, 석 달간 일이 없으면 아무래도 그 일로는 먹고 살기도 힘들 거고…, 어차피 토니도 스스로를 위해 새 연예인을 알아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처럼 지는 연예인 말구요.”
“지, 지는 연예인이라니……. 그게, 그게 무슨 말이야….”
“사실이잖아요?”
아무렇지 않은 듯한 그의 말에 토니는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을 했다. 사실이기는 했지만 늘 자기 위치에 ―과한―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헤일리가 ‘저는 한물간 연예인’과 같은 말을 하다니. 펑펑 울면서 ‘난 이제 끝났어!’ 라고 했어도 슬펐을 텐데 그가 담담히 말하니 더 슬펐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토니는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누르며 눈물을 참았다. 저 말을 제 입으로 하는 헤일리는 훨씬 더 슬플 텐데 자신이 울어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 탓이었다.
사실 헤일리가 지는 연예인이든 뜨는 연예인이든 아무 상관없는 메이슨은 이미 관심을 끈 덤덤한 얼굴로 그의 건강검진 기록들을 훑었다. 재정 상태만큼은 아니었지만 건강상태 역시 예상했던 대로 파탄에 다다르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재정 상태 그 이상이었다.
“―근데 이건 뭐야?”
눈물을 참기 위해 뒤를 돌았던 토니는 코를 푼 휴지를 버리려다말고 멈칫해 물었다. 쓰레기통 안에 가득한 하얀 봉투들 때문이었다.
“아 그거요….”
건강검진 기록에 적힌 헤일리가 중독된 것들을―알코올, 코카인, 마리화나, 액스터시 등을― 확인하던 메이슨은 고개를 들고 머리를 긁적였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는 천근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어나 집 주변을 살폈다. 간밤에는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토니가 가리킨 침실로 기어 들어가 기절하듯 잠들었기 때문에 주변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그때는 씻는 것은커녕 침대까지 기어가는 데도 죽을 것 같았다. 목과 어깨는 단단하게 뭉쳐서 금세라도 터질 것 같았고 다리는 후들후들.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까지 아팠다.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는 게 아니라도 사람은 죽을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자신이 묵을 곳에 안전을 확인하지 못한 채 쓰러져 잠들다니, 십여 년간 용병 생활을 한 메이슨으로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지만 헤일리의 비루한 육체는 의지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메이슨은 이번엔 꿋꿋하게 일어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베벌리힐스의 고급 주택 사이에 위치한 헤일리의 저택은 크진 않지만 제법 제대로 인테리어 된 주택이었다. 늘 생사의 갈림길에서 보안과 안전을 챙기며 살았던 메이슨은 느긋하고 한적한 베벌리힐스의 분위기에 몸을 떨며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대문 앞과 수영장, 정원에서 내부 CCTV와 관계없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형 카메라를 발견했지만 숨겨놓은 모양새들이 너무나 순진해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카메라 렌즈의 각을 조금씩 틀어주고 안으로 들어온 메이슨은 집안을 둘러보았다.
침실 두 개, 게스트 룸이 하나, 자쿠지가 있는 욕실과 침실 옆에 작은 화장실, 현대적이고 예쁜 부엌. 2층에는 커다란 드레스 룸과 피트니스 룸도 갖춰져 있었다.
건강한 삶이 가능할 것 같은 아름다운 샐러브리티의 저택은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건강 안티’의 보고였다.
건장한 남자 둘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잘빠진 냉장고 안에는 맥주와 에비앙밖에 없었다. 찬장엔 온통 와인이나 꼬냑, 위스키…. 하다못해 치즈 같은 흔한 안주도 없었다. 피트니스 룸은, 이 방 문을 열어본 적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먼지가 자욱했다. 기구들은 없는 게 없었는데 사용한 흔적도 없고 관리도 해주지 않아 죄 뻑뻑하고 심지어는 녹마저 쓸어 있었다. 식생활과 운동 현황만 봐도 알조인 집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메이슨은 거실에 걸린 액자들을 쳐다봤다. 7피트는 족히 넘을 것 같은 커다란 것부터 손바닥만 한 작은 것들까지. 모두 어린 시절 헤일리의 아름다운 사진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메이슨은 나르시즘을 온몸으로 호소하는 사진들을 감상하는 대신 액자를 유심히 살피다 몇 개를 떼어냈다. 아니나 다를까. 먼지가 앉지 않은 몇 개의 액자 뒤에서 하얀 가루가 담긴 작은 봉지들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정체는 뻔했다. 액자 뒤에 설탕을 꼭꼭 숨겨두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었다.
메이슨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과 화장실 변기 안쪽에서 각각 한 봉지의 약을 더 발견했다. 뭘 이렇게까지 숨겨놨냐 싶지만 찬장 뒤 작은 골을 파 그 안에 약봉지를 넣고 타일을 덮은 곳도 있었다. 코카인만 그 정도로 마리화나는 옷장, 서랍, 침대 밑 등, 정말로 아무 데나 들어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집안에 숨겨진 약들을 모으자 장사하나 싶을 정도로 제법 많은 양의 약들이 휴지통 안에 쌓였다. 그리고 메이슨이 가장 의심이 가는 공간인 지하실을 마저 뒤지기 위해 지하실문을 열던 찰나, 토니가 재정서류와 건강검진 서류 등을 가지고 들어온 것이었다.
“이걸 어디에 다 숨겨 놨…, 아니, 이걸 숨겨둔 데가 기억이 나?”
토니는 한가득 쌓인 코카인과 마리화나에 놀라 물었다.
“아……, 그건 기억이 나더라구요.”
그걸 하나하나 찾았다고 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메이슨은 적당히 대답했다. 약에 대한 사랑이 정말 굉장했구나, 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는 토니의 시선을 피하며 메이슨은 건강검진을 확인했다.
각종 약물과 알코올 중독, 불규칙한 생활 패턴 등으로 스물네 살인 헤일리는 거의 오십대에 가까운 초라한 건강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적색등이다 못해 불이 꺼질 지경인 것이었다.
집 좀 둘러봤다고 벌써 바닥을 보이는 체력에 메이슨은 어깨를 주무르며 일어났다. 이 구질구질한 체력에 맞는 운동량을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심한 운동이라도 했다간 그대로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은 몸이었다.
땀을 닦을 수건과 물병을 챙기는 메이슨의 모습에 토니는 멍청히 “뭐하게? 서, 설마 운동?”하고 물었다.
“네. ―아, 돌아가실 때 인사는 안하셔도 괜찮아요. 당분간 필요한 일 있을 때 전화 드릴게요.”
좋은 오후 보내요. ―메이슨은 얼빠진 채 서 있는 토니에게 손을 흔들고 피트니스 룸으로 올라갔다.
“우, 운동? 운동을 한다고?”
이 집에 이사 온 뒤로 단 한 번도 사용되어 본 적이 없는 피트니스 룸으로 들어가는 헤일리를 보며 토니는 눈을 비볐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너무나 싫어해 요 앞 스타들이 자주 간다는 커피숍에 커피를 사러 가는 것 외에는 단 한 걸음도 걷지 않으려고 하던 헤일리가 운동을 한다니.
“맙소사.”
피트니스 룸으로 들어가는 헤일리의 뒷모습에 어제 그가 연기하던 순간처럼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기억상실증이라지만 사람이 저렇게까지 변할 수도 있는 건가? 이건 차라리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아참.”
피트니스 룸의 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갔던 헤일리가 다시 나왔다. 토니는 상념을 끊으며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저 비행기 타는데 딱히 탑승 거부당할만한 일은 없죠?”
헤일리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묻자 토니가 되물었다.
“비행기? 어, 어디 가는데?”
델타 항공 빼고는 다 괜찮아. 거긴 네가 예전에…, 아니 여하간. ―토니가 우물거리며 말했고 메이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뉴욕이요.”
토니는 뉴욕에는 왜?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메이슨은 대답 대신 웃으며 그에게 다시 손을 흔들고 피트니스 룸으로 들어갔다.
뉴욕 119번가. 메이슨 테일러, 그의 진짜 집이 있는 곳이었다.
* * *
노아가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그날 오전이었다. 어머니, 켈리 레베카의 촬영장을 따라왔던 일곱 살 노아는 어머니가 찾는다는 말에 약간 우울해 보이는 한 여자를 따라 나섰다. 평소에는 그렇게 멍청하게 구는 편이 아니었는데 당시에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생각 없이 그녀를 따라 나섰다. 슬슬 어머니가 약속한 시각도 가까워오던 참이었다.
노아의 어머니 켈리는 타고난 여배우로 타인의 시선을 즐겼다. 그녀는 늘 아기 천사처럼 귀여운 노아를 데리고 여기저기를 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자신이 낳았다고 자랑하기를 즐겼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기 때문에 노아 본인도 카메라에 노출되는 일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촬영장처럼 이 사람 저 사람 다가와 건드리는 공간은 어린 아이에겐 피곤한 일이었다. 때문에 노아는 다른 곳이면 몰라도 촬영장처럼 혼자서 가만히 앉아 몰려드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곳은 아주 싫어했고 켈리는 아이에게 다가오는 여름에 2주 동안 해외에서 보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대신 오늘 두 시간 동안 촬영장에서 함께 기다려 주기로 했었다. 두 시간 만에 끝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촬영은 지루하도록 길어지고 있었고 그래서 그 여자가 노아에게 어머니가 부른다고 하자 저도 모르게 따라간 것이었다.
그녀는 인적이 드문 주차장으로 그를 데려갔다. 약간 이상한데,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그녀가 가방에서 까만 스턴 건을 꺼내들었고 ‘어라.’ 싶은 사이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처음 눈을 뜬 곳은 그녀의 집 지하실이었다. 차갑고 어두운 곳에서 깨어난 노아는 처음엔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움직일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노아의 온몸에 테이프를 발라놓았다. 코를 제외한 얼굴과 팔다리 모두 테이프로 꽁꽁 묶인 탓에 그는 꼼작도 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그 어둠 속에서 떨고 있었을까. 굉장히 오랜 시간이 흘렀다. 노아는 그동안 잠들었고 깼고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끼이익, 무거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옅게 든 선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노아는 숨을 죽이고 죽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그를 살피는 것처럼 서성거렸고 노아는 더 숨을 죽였다. 뭔가가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고 더운 숨이 귓가에 닿았다.
‘깨어있는 거 다 알아.’
코앞에서 내뱉어지는 뜨거운 숨에서 역한 입냄새가 풍겼다. 노아는 확 고개를 들어 머리로 그녀의 턱을 세게 쳐올렸다. 퍽! 강한 소리와 함께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고 노아는…, 그 뒤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잡혀 있던 주인공이 멋지게 도주하는 영화처럼 되진 않았다. 팔다리는 묶여 있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깐 주춤했던 여자는 노아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사정없이 뺨을 여러 번 후려쳤다.
‘이 시건방진 새끼. 네 엄마년이랑 똑같아. 그년처럼 온 세상이 네게 티끌 하나 못 묻힐 것처럼 굴지.’
귀가 먹먹하고 코에선 줄줄 피가 흘렀다. 입 안도 짭짤한 피맛이 느껴졌다. 그녀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막이라도 씐 것처럼 먹먹하게 들렸다.
‘네가 죽으면 그년 얼굴이 아주 볼만하겠지?’
그녀는 우는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 널 구해주러 올 것 같지? 넌 주인공이니까. 넌 특별한 인간이니 이대로 죽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잖아.’
그녀는 킥킥대다가 숨이 막히는 것처럼 헐떡거렸다. 여자는 축 늘어진 어린 노아에게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미안하지만 경찰은 이미 왔다 갔어. 네가 없어졌다는 말에 놀란 얼굴을 하며 걱정하는 척을 했더니 그대로 돌아가더군. ―나는 연기를 아주 잘하거든.’
네 엄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힘없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기는 내가 훨씬 더 잘하는데. 얼굴도 성형으로 어차피 다 비슷비슷하잖아. 대체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왜 나는. 그년이 부자라…, 집안이 좋아서 그래. 아니, 그 큰 가슴을 PD에게 부벼줬겠지. 쓰레기 같은 년.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중얼중얼중얼. 그녀는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리고 그러다 문득 말했다.
‘이 영화는 내가 주인공이야.’
그녀가 냄새나는 입으로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속삭였다.
‘저 잘났다고 잘난 척하고 남 깔보는 못된 걸레년을 엉망으로 만들고 짓밟아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그런 영화…….’
그녀는 천천히 노아의 눈에 붙여 놓은 테이프를 떼어 주었다. 희미한 빛이 들어왔고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평범한 외모였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이 희한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광기와 독기가 잔뜩 범벅된 눈으로 그녀는 히죽 웃었다. 그녀의 손에 커다란 식칼이 들린 것이 보였다.
‘떨어? 떨고 있구나?’
그녀는 어린 노아의 몸과 시선이 떨리는 것에 벅찬 듯이 ‘하하, 기뻐라―.’ 하고 중얼거렸다.
‘좋아. 너처럼 다 가지고 태어나도 어차피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칼에 찔리면 다 똑같이 죽는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려주자꾸나.’
즐겁게 말한 그녀는 칼을 높이 쳐들었다. 칼은 아이의 작은 몸에 닿는 순간 모든 것을 부술 수 있을 만큼 날카롭고 커다랬다.
노아는 숨을 삼키며 눈을 꽉 감았고 그 순간이었다.
딩동. ―딩동. 딩동. 벨소리가 연달아 급히 울렸다. 칼로 노아를 찌르려던 그녀는 덜컥 화를 내며 내부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쿵쿵거리며 올라갔던 그녀가 사라지자 노아는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뭔가 깨는 소리라도 내서 찾아온 사람에게 주의를 끌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전에 그녀가 돌아왔다. 초조한 얼굴을 한 그녀는 ‘왜 다시 돌아왔지? 왜지?’ 하고 중얼중얼 하더니 곧 노아를 휙, 무서운 눈으로 돌아봤다. 밖에선 계속해 딩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황급히 노아를 들춰 안아 먼지가 부옇게 쌓인 커다란 여행 가방 안에 밀어 넣었다. 들어가지 않으려고 저항하려 했지만 온몸이 테이프로 묶인 터라 어쩔 수가 없었다. 노아가 가방 안에 쪼그려 앉게 되자 그녀는 가방을 닫았다. 잠깐, 가방틈새 사이로, 그냥 지금 죽여서 봉투에 시체를 담아 가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초여름인 날씨를 생각했는지 가방을 마저 닫았다.
중간에 택시 같은 자동차에 타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녀는 걸었다. 그녀는 살인하기 좋고 시체를 처리하기 좋은 곳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노아는 그녀가 어딘가에서 가방 끄는 것을 멈출 때마다 긴장했다.
어딘가에 도착한 걸까. 그런 거라면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몰라. 그런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그녀는 그렇게 몇 시간을 노아를 끌고 다녔다. 노아는 조금씩 뜨거워지는 가방 안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죽은 것처럼 늘어졌다. 움직이기는커녕 눈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간간히 사이렌 소리가 들렸지만 그들은 늘 노아를 찾지 못하고 멀어졌다. 더운 낮이 지나가고 밤이 됐는지 조금 추워졌을 때도 사이렌이 울렸다 멀어졌다. 노아는 새삼 실망하지도 않고 숨을 몰아쉬었다.
팔다리는 한참 전부터 감각이 없었다. 덥고, 목이 마르고, 어지럽고, 숨이 막혀 까무룩, 계속해 정신이 끊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노아를 이렇게 죽일 생각인지도 몰랐다.
노아는 뒤로 묶인 양손을 까딱거렸다. 피가 안 통해서 움직이는 기분은 잘 나지 않았지만 손톱에 걸리는 가방이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슥. 슥. 슥. 딱히 소리를 내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가벼운 소리가 났고 쿵! 강한 충격에 세상이 울렸다. 그녀가 가방을 걷어찬 것 같았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노아는 몇 번 더 가방을 긁었다. 곧 쿵! 쿵! 쿵! 가방 위, 옆구리 쪽을 가격하는 것이 느껴졌다. 가방이 기우뚱 쓰러졌고 머리가 울렸다.
‘……,’
노아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다시 휙 들린 가방은 어딘가로 바쁘게 끌려갔다. 쾅! 쾅! 가방이 여기저기에 부딪히는지 온몸이 흔들렸다. 머리가 계속해 울렸고 노아는 눈을 감은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비릿한 지린내가 가방 틈새로 새어 들어왔다. 지이익―!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드디어 가방이 열렸지만 노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 힘도 없었다. 바닥에 보이는 때가 탄 타일과 변기. 화장실 개인칸 안이구나 희미하게 생각했다.
‘시발…, 이게 말이 돼? 미국에 경찰이 이렇게 많았어?’
내가 남자친구에게 맞았다고 신고했을 때는 경찰이 몇 명 왔었는지 알아? 한 명도 안 왔어. 경찰은 바쁘다고 그러던데…, 돈 많은 사람들 일에는 한가해지는 모양이야. ―그녀는 조금 초조한 듯이 손톱을 깨물었다.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어차피 잡힐 거라면, 잡히기 전에 널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어.’
축 늘어진 노아는 귓가에서 그녀의 목소리에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죽는구나, 이제. 어두운 곳에 갇혀서 내내 언제 죽게 될까를 생각했더니 그녀의 말이 별로 충격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말이야. 모든 것을 가진 여자가 밤마다 죽은 아들을 회상하며 슬퍼한다니. 꼭 비련의 여주인공 같잖아.’
노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가 노아의 얼굴을 한손으로 붙잡고 칼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불구의 아들을 평생 뒷바라지 하는 거라면 어떨까.’
그건 별로 낭만적이지 않잖아?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웃었다. 바들바들, 그녀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그녀가 노아의 반쯤 감긴 눈을 억지로 눌러 크게 뜨게 만들었다.
노아의 아름다운 녹색 눈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며 여자는 울컥 화가 치솟은 얼굴로 칼을 내리 찍었다. 픽! 눈알을 향해 찌른 칼은 떨리는 손 탓인지 노아가 얼굴을 돌린 탓인지 그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눈 위로 피가 줄줄거리며 쏟아져 나왔고 얼굴로 흐른 피 탓에 시야가 붉어졌다. 붉게 물든 시야로 그녀가 다시 칼을 쳐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삐꺽――. 밖에서 들린 작은 소리에 그녀가 손을 든 채로 우뚝 숨을 멈췄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화장실로 들어온 것 같았다.
꿀꺽. 그녀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잠깐 눈알을 마구 굴린 그녀는 노아를 다시 가방에 넣고 지퍼를 올렸다. 노아가 소리를 내거나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저벅저벅 걸음소리가 가까워졌고 곧 똑똑. 누군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녀가 사람이 있다는 표시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사람 있어요.’
그녀는 벌벌 떨고 있었지만 목소리만은 태연했다. 심지어는 약간의 짜증까지 섞여 있었다. 다른 칸을 이용하면 되지 않느냐는 되물음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노아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저 상대도 그녀의 태연한 목소리에 곧 옆 화장실을 이용하고 떠나겠지. 아무도 구해주지 않아. 영화가 아니니까. 현실엔 영웅도 없고 언제나 해피엔딩이라는 법칙도 없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고 노아도 알고 있었다.
노아는 눈을 떴다. 그녀가 지퍼를 다 잠그지 않은 탓에 지저분한 화장실 천장이 보였다.
쌕쌕 숨을 내쉬며 깜빡. 깜빡. 눈을 깜빡였다. 이왕이면 지금 이대로 죽었으면 좋을 텐데. 눈을 깜빡이다 어느 순간 뜨지 않는 것이다. 칼은 아플 것 같고, 실제로 살짝 베인 이마는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깜빡. 눈을 뜬 시야가 흔들렸다. 몸이 떨렸다. 죽는 건 사실, 많이 무서웠다.
똑똑. 상대는 무슨 일일지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그녀가 벌컥 화를 내려는 것처럼 일어났고 누군가가 말했다.
‘여기서 사람 죽이면 안 되거든요?’
목소리가 들린 것은 위쪽이었다. 그녀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화장실 문 위쪽으로 빠끔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가방 지퍼의 틈새로 노아는 그 작은 얼굴을 쳐다봤다. 화장실 등을 등지고 고개를 내민 것은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남자라기엔 조금 어린, 소년과 남자의 중간 정도의 나이인 그는 힐끗, 가방 틈새로 시선을 던졌다.
노아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무표정한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메이슨 테일러요?”
노아는 눈을 끔뻑이며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글쎄요? 죽지 않았을까요?”
“……정말 그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메이슨 테일러가 행방불명이라니,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요?’ 하고 물었던 필은 조금 당황해 되물었다. 고개를 갸웃한 노아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아프간에서 작전 중에 행방불명이라니. 죽었다는 이야기죠.”
말해 무엇하냐는 듯 그는 쉽게 말했다. 필은 “하지만 사망이 보고된 건 아닙니다. 시체도 발견 되지 않았고, 보고대로라면 살아 있을 확률이 더 높습니다.” 하고 반박했다.
필과 노아에게 보고된 정보원의 팩트는 이랬다. 1. 메이슨은 두 명의 팀원들과 무기상 알타의 벙커 안에 들어갔다. 2. 그들이 들어간 지 십여 분 후 알타의 침실이 폭발했다. 3. 그 폭발로 현장은 엉망이 되었지만 알타의 것으로 보이는 시신 한 구와 손상이 심해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론 그린이라는 팀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 한 구가 발견되었으며 4. 알타의 금고가 사라졌다.
팩트 상으로라면 사라진 또 다른 팀원, 애슐리 수이와 함께 메이슨이 금고를 들고 잠적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았다.
“Zii에서 십 년이 넘게 일한 사람이, 작전 중에 동료들을 배신하고 금고와 함께 사라졌다?”
이런. 오늘따라 조금 멍청한 소리를 하시네요. 노아는 약간 나른한 투로 그를 가볍게 비난했다. 차라리 동료에게 살해당한 뒤 누명을 썼다면 모를까.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무모한 남자는 아니었다, 메이슨은.
“하지만―, 오천만 달러라면 성자라도 눈이 돌아갈 돈입니다.”
필의 대답에 노아는 조금 지겹다는 듯, 무료한 눈으로 웃었다. 휘어진 눈꺼풀 아래 녹색 눈동자는 아주 이성적이고 차가웠다. 그는 다리를 꼬며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의자에 깊이 기대었다.
“이 이야긴 그만 하죠. 어차피 죽었을 텐데.”
노아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쓸데없는 이야길 한다는 듯한 노아의 태도에 필은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저는…, 그래도 살아 있을 것 같습니다. 계속 위험했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남자니까.”
이번에도 살아남지 않았을까요. 필은 그 남자가 죽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꽤나 유능한 용병이었고 그보다 더 어렵고 대단한 임무들도 해낸 남자였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남자를 제법 오랫동안 지켜봐 온 필은 그 남자가 왠지, 분명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만 같았다.
필의 생각에, 노아는 늘 감이 좋았지만 그는 이런 문제에 대해선 약간 비관적인 면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메이슨이 살아 있을 것 같다는 필의 말에 노아는 픽 웃으며 새파란 하늘이 보이는 창밖을 쳐다봤다.
필은 창에 비친 노아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그는 평소와 똑같이 해사했지만 약간 피곤한 듯 보였다.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시면서 왜 움직이시는 겁니까?”
죽은 것을 확인하는 것이라면 사람을 시키고 보고를 기다리면 될 텐데, 그 빽빽한 스케줄을 모두 취소하고 이렇게 움직이는 까닭이 뭐냐는 필의 질문에 노아는 힐끗 그를 보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필은 자신이 멍청한 질문을 한 것을 깨닫고 곧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그는 자는 것처럼 눈을 감았고 필도 더는 말을 시키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몇 분 지나지 않아 조정석에서부터 연락이 왔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곧 착륙합니다. ―조금 흔들릴 겁니다.?
조종사 루이스의 말에 필은 힐끗, 창밖을 쳐다봤다. 노아의 전세기가 뉴욕JFK공항의 활주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필은 눈을 감고 있는 노아를 돌아봤다. 예민한 그가 이 진동을 못 느꼈을 리가 없는데 그는 눈을 뜨기 싫은 건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건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레이칼튼 씨.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필은 조심스럽게 그를 깨웠고 노아는 아주 느릿하게 눈을 떴다. 잠기운이 없는 그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조금 더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