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LA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들어가는 제트블루의 국내선 출구에선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다.
스튜어디스 제이미는 조금 급히 사람들 사이로 뛰어나왔다. 한 승객이 선글라스를 두고 내린 탓이었다. 새로 산 구두가 발이 아파 걷는 것도 짜증나는데 그놈의 서비스가 뭔지, 선배들의 재촉에 제일 후배인 제이미가 승객을 찾아 뛰었다.
구찌의 S/S 신상 선글라스를 두고 내린 멍청이는 가장 뒷자리 창가 쪽에 앉은 남자였다.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자던 남자. 제이미는 기분 나쁠 만큼 창백하던 남자의 옆얼굴을 떠올렸다.
……어떻게 생겼더라? 뭔가 특징 없는 청바지에 흰 티. 수수해 보이던 분위기 탓에 생김새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법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었는데…. 제이미는 싱겁게 생각하며 남자의 모자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저기요! 손님!”
제이미는 멀찍이 보이는 그 남자의 모자를 보고 크게 불렀다. 남자는 멈추지 않았고 제이미는 더 크게 “손님! 선글라스요!” 하고 외쳤다. 멍청한 것도 모자라 귀까지 먹었냐,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의아한 얼굴을 하더니 곧 제이미의 손에 들린 선글라스를 발견하고 살짝 웃었다.
“아. 이런. 미안해요. 깜빡했네요.”
선선한 투로 사과하며 선글라스를 받아드는 남자의 모습에 제이미는 놀라 굳어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당신 그 걸레, 아니, 헤일리…,”
제이미는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고 남자, 헤일리는 걸레라는 말에도 별반 화내지 않고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제이미는 한참동안 멍청한 얼굴로 헤일리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가방을 챙겨 나온 동료가 “왜 그래? 사람 못 찾았어?” 라고 물었을 때까지.
“걔, 헤일리인 거 알았어?”
“헤일리? 그 망나니 걸레?”
욕하디? 그 또라이 같은 년, 그런 짓을 하고도 잘도 나돌아 다니네. 동료가 질펀하게 그를 향해 욕을 뱉었다.
“어땠어? 걔 별로지? 어릴 때나 예뻤지, 요즘은 뭐, 완전히 썩었더라.”
동료는 제이미가 ‘응. 완전 별로더라. 약냄새 날 것처럼 생겼어!’ 라고 말해주길 기대라도 하는 것처럼 물었지만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던 제이미는 조금 더듬거리며 “아, 아니 뭐…,” 하고 말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좀……,”
“응?”
“아니, 뭐, 그, 그래도 연예인은 연예인이구나 싶은 게….”
웃으니까 뭔가 반짝반짝…. ―제이미는 살짝 붉어진 귓가를 손으로 감싸며 힐끗, 헤일리가 사라진 쪽을 쳐다봤다.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며 헤일리, 메이슨은 선글라스를 썼다. 햇빛이 심한 날이 아니면 선글라스를 거의 쓰지 않고 살았던 그는 토니가 꼭꼭 챙겨준 선글라스의 용도를 새삼 확인했다.
그나저나 사람 면전에 대놓고 걸레라. 동네방네 소문이 날 정도로 난잡하게 산 헤일리가 문제인지 생각 짧고 무례한 대중이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고 싱겁게 생각하며 메이슨은 공항 앞에 늘어선 택시에 올라탔다.
“119번가로 가주세요.”
택시 기사는 바로 출발하는 대신 힐끗, 룸미러로 메이슨을 쳐다봤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혹시 연예인 아니슈?”
“사이먼 웨인 닮았다는 이야기 많이 들어요.”
메이슨은 씩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고 택시 기사는 껄껄 웃었다.
“사이먼? 그보다 훨씬 젊고 훤한데 무슨 말이야?”
손사래를 친 택시 기사는 기분 좋게 공항을 출발했다. 메이슨의 얼굴이 눈에 익는지 룸미러로 힐끗힐끗 계속해 쳐다봤지만 보잉 선글라스를 쓴 상태로는 잘 알 수 없는 모양인지 곧 관심이 끊겼다.
메이슨은 살짝 차창을 내리고 바람을 맞았다. 어느새 약간 더워진 뉴욕의 공기는 부드럽게 뺨을 스쳤다. 택시가 다리를 건너자 약간 축축한 물 냄새가 느껴졌다. 햇살이 수면에 닿아 반짝거리는 것에 눈이 부셨다. 택시의 카 오디오에서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와 귀에 달라붙었다. Don`t ask me why I`m crying…. cause when I start to crumble you know how to keep me smiling. You`re gonna save me from myself. from myself, yes….
그는 살아있다는 건 제법 좋은 일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기분 좋게 웃으며 살랑거리며 날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데 뺨에 시선이 닿았다. 고개를 들자 룸미러를 통해 이쪽을 보고 있던 택시 기사가 화들짝 놀라더니 곧 허허 웃었다.
“아니, 손님 분위기가 너무 부드러워서 나도 모르게…….”
진짜 연예인이신가?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고 메이슨은 선글라스를 올려 쓰며 그냥 웃었다.
택시는 메이슨을 119번가 앞에 내려주었다. 현금 약간으로 값을 치루고 차에서 내린 메이슨은 골목을 돌아 자신의 집이 있는 건물을 올려다봤다. 그의 집은 할렘 가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약간 허름한 건물의 7층에 위치한 작은 아파트였다. 헤일리가 태어났을 때 지어진 이 건물은 낡고 남루했지만 집세가 싸고 관리인이 아주 허술했다. 거의 집에 들어가지 않는 메이슨에게는 제법 괜찮은 집이었다.
메이슨은 입구 우체통에 쌓인 우편물을 집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커다란 굉음을 내며 내려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가며 메이슨은 잠깐 안을 살폈다. 새로운 카메라가 붙은 것은 없나 살피다 문득, ‘……그러고 보니 이젠 안 이래도 되지 않나?’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 보면 헤일리에게 납치나 암살을 시도할 사람도 없었고 죽은 메이슨 자신은 더더욱 그랬다.
“너무 안락한 삶이라 적응이…….”
메이슨은 작게 중얼거렸다. 늘 생사의 갈림길에서 싸우며 살던 그에겐 헤일리의 삶은 너무나 안락해 무서울 정도였다. 모르는 사람이 걸레라고 좀 부르면 어떻단 말인가. 사람들이 싫어해도 괜찮았다. 아는 사람도 아니고…. 메이슨은 덜컹거리며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내가 전생에 무슨 축복 받을 짓을 해서 이렇게 갑자기 인생이 폈지…?” 하고 중얼거렸다. 아니. 이생이 헤일리의 삶이라면, 전생은 메이슨 테일러의 삶인가? ……축복 받을 삶은 틀림없이 아니었는데…….
메이슨은 매 맞는 아내들의 심리처럼 갑작스러운 평화와 평온에 불안해하며 집을 찾았다.
기역자 복도의 가장 끝에 위치한 719호. 메이슨은 회색 문 앞에 서서 문 위쪽, 작은 틈새를 손으로 더듬었다. 헤일리도 다행히 작은 키는 아니라 손가락 끝에 차가운 열쇠가 걸렸다. 달칵.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가득한 익숙한 집안이 보였다.
메이슨은 왠지 조금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집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노아를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강렬한 기시감이었다. 자신이 살았던 흔적을 다른 사람의 몸으로 보고 있다니.
“…….”
메이슨은 어둑한 집안에 불을 켜고 머리를 긁적였다. 헤일리에게 생활태도를 욕하긴 했지만 이쪽도 뭐 그다지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두 달 만에 찾은 집이니 그럴 만도 했지만 여기저기 먼지가 자욱했다.
메이슨은 우편물을 훑어 쓰레기통에 모두 다 넣고 일단 서랍장을 열었다. 아무렇게나 들어있는 녹이 쓴 열쇠들 사이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꺼내든 그는 침실로 들어가 테이블 아래 금고를 열었다. 금고에는 작은 열쇠들이 한줌 들어있었고 메이슨은 열쇠 중 그 중 두개의 열쇠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의 열쇠로 다시 벽장 속 마지막 금고를 열었다.
금고 안에는 작전 중에 쓰던 위조 여권 몇 개와 약간의 금, 달러, 유로, 엔화 등 세계 각국의 현금이 한 묶음씩 들어 있었다. 그리고 또 작은 열쇠 하나. 테이블 밑에서 꺼낸 나머지 열쇠 하나와 이 작은 열쇠는 모건체이스 뉴욕지점에 맡겨놓은 그의 안전금고 열쇠였다. ―진짜 값나가는 건 그쪽에 있었다.
비록 이런 집에서 살고 있기는 했지만 메이슨도 돈을 적게 버는 편은 아니었다. 용병들은 원래 고위험 고수익의 대표적인 직종인데다가 그는 십여 년이나 용병 일을 한 베테랑이었다. 그의 연봉은 어지간히 잘 나간다는 변호사의 연봉보다 높았고 지출도 거의 없던 탓에 그의 계좌엔 엄청난 액수의 돈이 쌓였다.
메이슨은 다시 태어나면 조그마한 카페를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했었다. 그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집 앞에 작은 카페가 있었는데 그 카페의 주인부부가 늘 너무나 행복하고 다정해보였기 때문이었다. 간간히 투닥거릴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존경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선이 너무나 부러웠었다.
용병으로 살면서 실컷 적을 만들고 다녔던 그의 인생에서라면 그런 평화로운 삶은 그저 정말 꿈이라, 누가 물어도 이야기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헤일리의 몸으로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물론 그 카페의 주인부부처럼은 아니겠지만…….
“…….”
메이슨은 조금 씁쓸하게 입술을 문질렀다. 아무래도 계속 혼자 살게 되지 않을까. 결혼했을 때는 정말로 행복했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엄청난 충족감과 만족감이 있었지만 그것을 잃을 때의 충격도 너무나 컸기 때문에 새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엄두가 나질 않았다.
물론 정말로 그의 취향을 관통하는 여자를 만난다면 또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지만. 메이슨은 작고 연약해서 붙들면 부러질 것 같은 유약한 타입의 여자들을 좋아했다. 지켜주고 싶고 보호해주고 싶은 타입의….
그는 침대 밑에 넣어둔 잡지와 DVD를 꺼내 가방에 담았다. 그가 좋아하는 AV 배우의 포르노였다.
돈. 포르노. 그리고 서랍 속에 넣어둔 총 중, 반동이 작아 헤일리의 연약한 손목과 어깨에 무리가 없을만한 글록 17과 원래 자주 쓰던 콜트M1911을 각각 하나씩 챙겨 넣었다.
적당히 다 챙겼나…. 주변을 돌아본 메이슨은 가장 중요한 것을 깜빡했다는 것을 깨닫고 거실로 나갔다. 그는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아내와 아이의 사진이 든 액자를 챙겨들었다.
“…….”
마지막으로 무심하게 안을 둘러본 그는 오래 지체하지 않고 홀가분히 나서기 위해 문을 열었다.
“…….”
“…….”
망설임 없이 걸어 이 건물을 나가려던 메이슨은, 그러나 문을 연채로 멈춰 섰다. 문 앞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사한 금발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 모델의 것처럼 훤칠하고 훌륭한 몸과 완벽하게 딱 맞는 고급스러운 정장. 귀티라는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반짝거리는 분위기. 이런 허름한 아파트는 눈에 담아본 적도 없을 것 같은 남자가 서 있었다.
레이칼튼 노아였다.
* * *
이 남자가 왜 여기 서 있지……? 메이슨은 눈을 끔뻑이며 남자를 쳐다봤고 그도 똑같은 얼굴로 메이슨을 쳐다보았다.
“……어,”
메이슨과 그 사이에 한참동안이나 침묵이 흘렀고 메이슨이 입을 벌려 무슨 말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남자, 노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 예쁜 얼굴이 차갑게 변하는 것에 메이슨이 맹하게도 ‘신기하다’ 고 생각했고 그 순간 그가 메이슨의 멱살을 잡고 쿵! 벽으로 찍어 눌렀다.
“――!”
예상치 못한 공격에 메이슨은 반쯤 피하다 만 채로 벽에 부딪혔다.
“저기,”
“―너 뭐야.”
멱살을 쥔 노아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눈에 새파란 빛이 보일 정도로 화가 난 노아가 씹어 뱉듯이 던진 말에 메이슨은 눈만 끔뻑거렸다. 너 뭐야, 라니. 무슨 뜻으로 하는 질문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헤일리와 안면이 있는 건 확실하니 누구냐는 질문은 아닐 거고 아무래도 왜 네가 여기에 있냐, 라는 질문인 것 같았는데 사실 그건 메이슨이 그에게 물을 말이었다. 그러는 그쪽은 왜 여기 있으시냐, 메이슨이 묻기 위해 입을 열었고 그때였다.
‘―걔가 병신도 아니고 집에 들렀을 리가 없잖아?’
뚜벅뚜벅하는 발자국 소리와 신경질적인 말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그러게. 아 근데 씨발. 걘 돈도 많이 버는 새끼가 이런데 사냐.’
복도 끝에서 들린 낯익은 목소리에 메이슨은 놀란 얼굴로 문 밖을 쳐다봤다.
“어―…,”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고, 메이슨은 상대를 알고 있었다. Zii의 용병들이었다. 저놈들이 왜 여기에 왔지? 집에 들렀을 리가 없다니,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메이슨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가거나 말거나, 노아는 “당신 대체―,”하고 입을 열었다.
“!”
메이슨은 황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재빨리, 그러나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촉이 안 좋았다. 아주 나빴다.
메이슨은 노아가 무슨 짓이냐고 소리치기 전에 그의 어깨와 손을 붙잡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흘린 가방을 챙기고 좁은 집안에서 숨을 곳을 찾으며 메이슨은 문 밖에서 들리는 군홧발 소리에 식은땀을 흘렸다.
노아는 잠시 메이슨의 이상행동에 얼을 빼고 끌려 들어왔지만 곧 이성이 돌아왔는지 그의 손을 쳐내고 뒷머리를 붙잡아 침대에 찍어 눌렀다. 숨을 곳을 찾느라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메이슨은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시트에 뺨이 쓸리며 힉, 숨을 들이켰다.
“이게… 대체 무슨 개수작이죠?”
머리 위에서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자, 잠깐만요, 나중에 사과할 테니까…,”
헤일리의 빈약한 완력으로는 도무지 노아의 팔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물론 팔목을 강하게 내리 찍어 뼈를 살짝 분리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에게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하지만 이럴 시간이…! 메이슨의 눈이 맹렬히 돌아갔고 침실 밖, 현관문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열쇠를 찾는지 주변이 바스락거렸고 ‘그냥 부수지?’ 하는 소리가 들렸다. 메이슨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돌려 노아를 쳐다봤고 노아도 현관 주변에서 달칵거리는 소리에 눈을 가늘게 뜨고 침실 밖을 쳐다봤다. 그 순간, 미묘하게 힘이 풀렸다. 메이슨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고 그를 뿌리침과 동시에 붙잡고 입을 막아 침실 뒤 테라스로 끌고 나갔다. 테라스 앞, 커튼을 휙 치자 간발의 차로 벌컥, 현관문이 열렸다.
“뭐야. 열려 있잖아?”
“누가 들어온 것 같은데…, 그 새끼 사귀는 여자 없다고 하지 않았어?”
“있을 리가 있냐? 일을 그렇게 많이 하는데. 일 년 동안 집에 열흘은 들어가려나? 그 상황에 사귀는 여자가 있으면……. 난 진짜 존경할 거야, 그 새끼.”
킬킬거리는 잡담 소리에 메이슨은 숨을 죽였다. 줄줄이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침착 하려고 노력했다.
상대는 셋. 총은 꺼내들고 있지 않았고 저쪽도 병신은 아닐 테니 노아에게 해를 끼칠 리는 없었다. 문제는 자신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악의 경우라도, 세 명 정도라면 상대가 방심한 사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까 다행히 총도 챙겼…, 메이슨은 들고 있던 가방이 손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흠칫 놀라 커튼 뒤를 쳐다봤다.
침대 아래쪽에 가방이 무성의하게 떨어져 있었다. 아까 노아에게 뒷머리를 붙잡혀 침대에 내리 찍혔을 때 놓친 모양이었다. 아…. 메이슨은 입술을 깨물며 숨을 삼켰고 거실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 새끼, 집에 왔다 갔나본데?”
“여기 금고도 열려 있다, 야. ―와, 이거 진짜 또라이네. 오천만 달러를 들고튀면서 집에 들려 금고를 털어가?”
대체 돈에 얼마나 미치면 그럴 수 있는 거냐고, 놈들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돈에 미쳐? 오천만 달러를 들고튀어? 누가? 내가? 메이슨은 눈을 굴리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도 오천만 달러면 인생 걸어볼만 하지.”
씨발 그게 얼마냐. 나라도 눈이 뒤집히지. 누군가의 말에 다른 놈이 비웃었다.
“좆 되고 싶냐? 그래도 메이슨, 그 새끼니까 지금까지 도망 다니는 거지 너였으면 다음날 잡혀서 대가리에 구멍 생겼을걸?”
“뭐, 그건 그런데 이 새끼도 욕심이 과했네. 베레타는 메이슨이 그럴 리가 없다고, 발견된 아론의 시신도 그 모양인 걸 보면 사라진 쪽은 아론일 수도 있겠다고 그러던데 이렇게 되면 그게 그 새끼가 맞는 거잖아?”
메이슨은 마른 침을 삼켰다. 상황파악은 순식간이었다. 그러니까 아론, 그 새끼가 자신을 죽인 것도 모자라 누명을 씌운 채 금고를 들고 잠적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놈에겐 그 수밖에 없었다. 정직하게 금고를 들고 튀면 행동범위가 좁아질 수밖에 없고 잡히는 시간이 더 짧아질 터였다.
메이슨은 죽은 뒤로 아론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었다. 헤일리로 사는 것이 워낙에 정신없이 일어난 일이기도 했고 아론에대한 복수는 당연히 Zii에서 해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상념에 잠겨있던 메이슨은 품에 끌어안은 채 입을 틀어막고 있던 노아가 손을 들고 있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손을 뗐다.
“…….”
불편한 자세에서 일어난 노아는 잔뜩 짜증난 얼굴로 입가를 문지르며 메이슨을 노려봤다.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파악이 안 되니 입을 다물어주고 있기는 한데 그냥 저놈들에게 이 새끼를 넘겨버릴까 고민이 되기도 하는 얼굴이었다.
메이슨은 그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밖의 눈치를 살폈다. 대충 안을 살피며 놈들이 침실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하고 베란다 밖에서 손을 뻗었다. 더듬더듬, 가방이 손에 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근데 이 새끼 급하긴 했나본데. 이렇게 흔적 줄줄이 흘리고 다니는 놈이 아닌데.”
놈들이 쓰레기통 안 우편물을 뒤지는지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누가 일부러 남겨놨을 수도 있지. 여기 온 것도 이상하잖아?”
“이거―, 집에 들른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누군가 탁자 위, 액자가 사라진 자리의 먼지를 확인했는지 중얼거리듯 말했다. 누군가 총을 꺼내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헤에. 이 근방에 있으려나?”
“아직 집안에 있을 수도 있지.”
문이 열려있었고 이렇게 흔적이 줄줄 떨어진 것을 보면…, 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메이슨은 숨을 죽이고 팔을 더 뻗었다. 집안을 뒤지며 한놈이 다시 침실로 들어왔다. 메이슨은 가방을 향해 뻗었던 손을 황급히 뺐고 마른 침을 삼켰다.
만약에 들키면 뭐라고 할지 머릿속으로 맹렬하게 고민했다. ‘메이슨과 어쩌다보니 아는 사이’ 따위의 이야긴 안 된다. 놈들은 메이슨이 어딨는지 밝히기 위해 감금도 불사할 터였다.
차라리 이야기 해줄 수 있는 거면 괜찮았다. 하지만 저 뇌까지 근육인 놈들에게 ‘내 몸은 죽었고 영혼은 이 몸에 들어와 있다’, 같은 황당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한다고 해도 믿지도 않을 거고.
옷장, 침실 옆에 있는 작은 화장실, 침대 밑까지 뒤진 놈이 베란다를 확인하기 위해 커튼을 붙잡았다. 그의 그림자가 길게, 메이슨을 덮쳤다. 이대로 커튼을 열면 그대로 뛰쳐나가며 놈을 밀쳐내고 가방을 낚아채서…, 메이슨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가던 차였다.
“야. 밖으로 발자국 있다. 먼지가 덜 굳었어.”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야. 밖으로 발자국 있다. 먼지가 덜 굳었어.”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놈은 커튼 앞에서 조금 망설이다가 침실을 빠져나갔다. 거실에서 놈들끼리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메이슨이 이미 이 집을 빠져나갔다는 데에 결론을 모았는지 부스럭대며 집을 나갔다.
“――,”
쿵. 문이 닫히고서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까지 확인한 메이슨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아우 씨발, 아론 그 새끼는 끝까지―.
이미 사망처리 됐겠거니 방심했다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이번엔 정말 운이 좋았다. 조금만 숨는 게 늦었다면. 혹은 오늘 집에 들른 것이 조금만 더 꼼꼼한 놈들이었다면 아마 이렇게 쉽게 넘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자신의 몸이야 어차피 죽었으니 아론과 Zii가 뭘 지지고 뭘 볶든 어차피 남 일이었다. Zii와 상사 베레타가 무슨 개고생을 하든, 아론을 잡든 못 잡든 메이슨으로서는 이제 완벽히 다른 세상의 일이 된 것이었다.
물론 아론 놈은 괘씸했고 헛다리짚느라 뺑이 칠 동료들이 불쌍하기는 했다. 나름 그럭저럭 친하던 놈들에게 오천만 달러에 눈이 먼 병신으로 남는 것도 찜찜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과 헤일리의 비루한 육체로 복수에 뛰어들 수는 없었고 Zii에 살아있는 건 자신이 아닌 아론이라고 이야기 해주는 것도 멍청한 짓이었다.
평화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발로 걷어차고 짓밟아 흙탕물에 첨벙첨벙 담구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게 어떤 천금 같은 기회인데 그런 멍청한 짓을 해. 그야말로 죽었다 깨어나 얻은 행운이었다. 메이슨이 해야 할 일은 이 길로 이 집을 나가 바로 은행에서 돈을 찾고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 거였다.
그가 침착하고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옆에 끌어당겨져 앉아 있던 노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기척에 메이슨은 고개를 들었고 저벅저벅 베란다를 나간 노아는 냉랭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들었다. 그는 조금 나른한 눈으로 힐끗 메이슨을 쳐다보더니 그대로 그 가방을 뒤집었다.
“어―, 우앗!”
와르르. 챙! 가방 안에서 돈 뭉치들, 금, 여권, 총, 적나라한 포르노, 그리고 액자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아 씨, 지금 뭐하는―,”
메이슨은 벌떡 일어나 깨진 액자 사이의 사진을 줍기 위해 달려가 몸을 숙였고 등 뒤에서 노아의 손이 뒷머리를 붙잡았다. 아니, 이번엔 붙잡지는 못했다. 문 앞에서 한 번, 침대로 한 번, 그리고 이번 공격까지, 아무리 그래도 세 번이나 당할 정도로 어수룩하지는 않았다.
메이슨은 공격을 피하며 반발력을 이용해 그의 팔을 강하게 잡아당겨 바닥으로 넘어지도록 만들었다.
“――!”
쿵, 그가 바닥을 짚었고 메이슨은 그 틈을 타 일어났다. 대체 왜 계속 공격을 하는 거냐고 물으려던 메이슨은 멈칫했다.
“…….”
노아의 하얀 손이 깨진 유리조각에 살짝 찢겨져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메이슨은 줄줄 떨어지는 피를 보며 저도 모르게 사과했다.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든 노아와 눈이 마주치자 난처함은 더 깊어졌다. 약간 놀란 듯한 선량한 눈매와 창백한 안색. 굳은 살 하나 없는 고운 손에 줄줄 흐르는 피를 보고 있자니, 정말로 약자를 괴롭힌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었다. 사실 약자라면 비루한 헤일리의 육체를 가진 자신이 진짜 약자일 텐데…, 아니, 하지만 그래도 자신은 사람을 다치게 하는데 프로로 십여 년을 산 사람이었다. 고의는 물론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러니까…. 메이슨은 답지 않게 당황해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니, 그러니까 왜 공격을…, 괜찮아요? 어디 약 상자가 있을 텐데 빨리 상처를,”
어디에 넣어뒀더라? 거실 서랍이던가? 먼지가 부옇게 쌓였을 구급상자를 떠올리며 노아의 상처를 살피려던 메이슨은 휘청하고 넘어졌다.
―쿵!
금세라도 픽 쓰러질 것 같은 연약한 얼굴로 앉아있던 노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강한 힘으로 메이슨을 밀쳐 가슴위로 올라앉으며 어깨를 강하게 짓눌렀다.
“――큿,”
메이슨은 신음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등에 깨진 유리조각들이 눌려 날카로운 고통이 일었다.
곧 눈앞이 번쩍였다. 짝! 노아는 마치 서류를 쳐다보는 것처럼 냉담한 얼굴로 그의 뺨을 후려쳤다. 한 대, 두 대, 몇 대인지 셀 정신도 없이 뺨을 얻어맞았다.
노아의 손이 멈췄을 때 메이슨은 찝찔하게 흐르는 핏물을 느끼며 속으로 욕설을 씹어 삼켰고 노아는 제가 맞은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손이 어찌나 매섭고 야무진지, 추억 속 유약한 도련님에게 몇 대 맞아준다고 생각하기엔 제법 아프긴 아팠다.
“……이봐요, 헤일리 러스크 씨.”
먹먹한 귀를 울린 부름에 메이슨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그를 쳐다봤다. 노아의 아름다운 얼굴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묘한 얼굴로 화를 참는 것처럼 숨을 삼켰다.
“내 말에 대답 잘 해야 할 거예요. 거짓말을 하거나 내가 이해 못할 소리를 지껄이면……, 내가 무슨 짓을 할 지 나도 잘 모르겠거든요? 아마 당신이, 그 멍청한 머리로 상상할 수 있는 짓은 아닐 거예요.”
내가 이런 데에 아마추어라 조절을 잘 못해요. ―살짝 웃는 노아의 말에 메이슨은 ‘먼저 팬 뒤에 질문을 시작하다니, 완전 프로 스타일이신데요…….’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는 차가운 눈을 내리깔며 잠깐 말을 골랐다. 무슨 질문부터 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모르겠는 얼굴이었다.
“이 집을…, 메이슨을 어떻게 알죠?”
노아는 조금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그는 메이슨이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 집에 왔다. 그가 아는 메이슨이라면 분명 죽었을 터지만, 혹시라도, 만약에 살아 있다면 집에 한 가지 물건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아이의 사진. 만약 그가 정말로 오천만 달러가 든 금고를 훔쳐 달아나 현재 살아 있는 거라면 그 일이 충동적인 일이든 계획적인 일이든 그 사진이 집에 없을 터였다. 물질적인 것에는 집착하는 법이 없는 그였지만 그 사진에만큼은 달랐다. 계획적인 일이라면 미리 챙겨서 원정을 떠났을 것이고 충동적이라고 해도 집에 와 물건을 챙겨갔을 남자였다.
사실 노아는 뉴욕에 도착해 메이슨의 집 앞에 섰을 때 조금 멍한 상태였다. 메이슨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고, 이제 그가 죽은 것을 확인할 차례였다. 사진이 집안에 있는지 확인하고 있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 노아는 문을 한참동안 쳐다보고 서 있었다.
메이슨이 정말 죽었을까? ……죽었겠지. 그가 죽은 걸 확인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자신은 울게 될까? 아니면 늘 그렇듯이 ‘이것 봐. 역시 세상은 그렇게 영화처럼 돌아가는 게 아니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냥 살아가게 될까? 아니면……. ―노아는 자꾸 멍해지는 머리로 계속해서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버석거리며 가슴으로 찬바람이 들었다. 누군가 목을 조이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숨이 조여 왔다. 멍하니, 좀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구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정말로, 아무도 자신을 구해주지 않을 거라고 새삼 생각한 순간이었다.
벌컥, 안에서 문이 열리며 전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노아는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도 잊고 순간 멍청이처럼 입을 벌렸다. 차라리 메이슨의 유령이 튀어나왔다면 덜 놀랐을 것이었다.
헤일리 러스크. 노아는 메이슨의 집에서 튀어나왔던 남자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이 집에 있어요?”
처음에 노아는 그가 자신이 메이슨의 집을 찾을 거라는 걸 알고 미리 와 있던 거라고 생각했었다. 당연한 생각이었다. 헤일리는 그런 짓을 할 만한 인간이었고 그거 외에는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Zii의 요원들을 피하며 베란다에서 노아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이 새끼가 메이슨의 정보를 어떻게 알았지? 자신을 쫓아 온 거라면 그보다 먼저 도착해 집에 들어가 있을 리고 없었고 미리 정보를 들은 거라면 유출자는 필 밖에 없는데 그가 그럴 리는 없었다.
게다가 헤일리는 메이슨의 집 문 앞에 서 있던 게 아니라 안에서 나왔다. 열쇠가 있든지 어디에 있는지 안다는 이야기였다. 더불어 헤일리가 챙긴 가방의 열린 틈 사이로 보인 물건들까지 보았을 때, 노아는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반드시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헤일리의 어깨를 내리 누르며 깔고 앉은 노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쳐다봤다. 어깨 뒤로 적은 양이지만 핏물이 배어나오고 입술이 터져 피를 머금고 있었다. 노아가 얼핏 아는 그 계집애같은 헤일리라면 비명을 지르든 울든 그야말로 지랄 발광을 할 텐데 그는 덤덤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동요한 것은 오히려 노아 쪽이었다. 아주 조금. ―표정이 변할 정도도 아니었지만 순간 눈빛이 조금 흔들릴 정도의 동요가 있었다.
뭐지, 이 기시감은. 가슴에서 뭐가 거슬리듯 까득거렸다. 노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이 기분 나쁜 남자를 한대 더 내리치려고 손을 든 순간, 입을 다물고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가 물었다.
“그러는 그쪽은요?”
헤일리는 눈을 똑바로 들고 쳐다보며 물었다.
“그쪽은 어째서 여기에 와 있는 건데요? 무슨 용건입니까?”
노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헤일리의 멱살을 강하게 쥐고 끌어당겨 “질문 따위 하라고 한 적 없는데요.” 하고 웃어보였다. 헤일리는 뺨이 간지러운지 움칠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음…, 하지만 그쪽이 무슨 일로 왔는지 말해주기 전까지는 저도 한 마디도 할 수 없어요.”
그는 덤덤한 얼굴로 말했고 노아는 그 건방진 말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총을 주웠다. 글록 17. 노아는 그것을 남자의 손가락에 대고 말했다.
“손가락이 열개나 된다고 너무 여유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걸요.”
노아는 안전장치를 풀며 장전했다. 방아쇠를 반쯤 당기며 헤일리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약간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있을 뿐 역시 예상한 반응이 전혀 아니었다. 뭐지, 이 기분 나쁜 위화감은.
“――,”
노아는 입술을 꾹 깨물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알이 그의 검지와 중지 사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자신의 손가락 사이로 총알이 지나갔는데도 헤일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겁을 먹거나 얼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덤덤한 파란 눈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 노아는 심장이 기묘하게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너 뭐야.”
철컥. 노아는 다시 총을 장전해 그의 머리에 대고 물었다.
“너 대체 뭐냐고.”
노아는 원래 헤일리에 대해 잘 몰랐다. 관심도 없고 신경 쓰고 싶은 인종도 아니니 그에 대해 모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남자가 저번 주 술에 취해 추태를 부렸던 그와 전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이 남자가 헤일리 러스크라고? 그 걸레, 정키라고? 노아는 뺨에 돋는 소름을 느끼며 그의 시선을 쳐다봤다. 자신이 왜 이 병신에게서 메이슨의 기억을 자꾸 되살리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지만 노아는 벌써 몇 번이나 그런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머리에 댄 총구를 더 바짝 대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방아쇠를 당기는 게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저기요.”
이마에 닿은 총구가 거슬리는지 그의 미간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근데, 이런데서 사람 죽이면 안돼요.”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노아는 숨을 멈췄다.
마치 과거의 언젠가로 돌아간 것 같은 현기증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