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ill the lights-8화 (8/29)

08

열쇠를 찾는 건 힘든 여정이었지만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은행 계좌를 개설할 당시에 약간의 귀찮음으로 생체 인식 비밀번호를 걸어놓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다. 홍채 인식이라든가 지문 인식이라든가, 앞으로도 영원히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메이슨은 집에서 챙겨온 열쇠 두 개를 이용해 금고를 열었다.

은행 앞에 Zii 용병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한둘쯤 있었지만 그 누구도 헤일리와 자신 사이의 연결점을 찾지 못한 듯 힐끗, 연예인이네 하는 눈으로만 쳐다보았다.

메이슨은 특유의 뻔뻔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 개인 금고 속 무기명 채권, 유가증권 등을 몽땅 빼서 가방에 넣고 홀가분하게 뉴욕을 떠날 수 있었다. 이제 정말로 전생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은 없겠구나 생각하며. ―인생에 준비된 어려운 문제지는 다 풀고 쉬운 것만 남은 기분이었다.

LA공항에 도착한 그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몇 번이나 음주운전을 해 면허가 없다는 것이 다소 불편한 점이었지만 그 정도는 아무래도 좋았다. 고작 뉴욕과 LA를 오간 것만으로 세계 일주라도 한 양 몸이 무거운 것도 조금 불편했지만 괜찮았다. 아주 잠깐, 이런 몸으로 24년을 살아온 헤일리에게 존경과 경탄이 들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후진 몸으로 밤새 클럽을 돌고 약을 하고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하는 하드한 삶을 살다니. ―헤일리는 생각보다 대단한 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메이슨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때, 집 앞에 세워져 있던 페라리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오며 “리스!”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리스! 리스!!!”

무심하게 지나치려던 메이슨이 돌아보자 약간 눈에 익은 여자가 무척이나 화난 얼굴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어디서 봤더라, 생각해보니 금세 떠올랐다. 처음 헤일리의 몸으로 눈을 떴을 때 그의 호흡기를 떼던 그 아가씨였다. 그녀의 뒤로 당시에 보았던 몇몇 친척들이 모두 화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메이슨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봤다. 돈줄을 빼앗긴 친척들이 곧 달려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나 바로 달려오다니. 너무나 생각했던 그대로의 전개라 특별히 놀랄 것도 없었다.

“리스, 이게 뭐야?”

화난 황소 같은 얼굴로 달려온 사촌 조이가 두툼한 편지 몇 통을 들이밀며 물었다. 메이슨은 힐끗 그녀가 든 것을 쳐다봤다. 로렌&케이시, 헤일리의 개인회계사의 사무소에서 그녀에게 보내진 편지였다.

“독촉장이네요.”

메이슨이 싱겁게 말하자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가 글을 못 읽어서 물어!?”

“우리보고 네게 빌린 돈을 갚으라는 거냐?”

어느새 다가온 헤일리의 친척들이 화난 얼굴로 물었다. 고모 안나, 삼촌 제이슨, 외삼촌 조던, 사촌 산드라, 콜린, 심지어는 헤일리와 무슨 관계인지 토니도 정확하게 모르지만 매달 2천 달러를 받던 포드라는 사내도 있었다.

“우리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걸 갚아? 이달부터 생활비도 끊는다고? 이 못된 것! 어떻게 네가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어!?”

“갑자기 카드가 안 되어서 백화점에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알아? 돈을 갚으라고? 맥이 다음 달에 빈으로 유학도 갈 텐데 너는 돈을 보태주지는 못할망정 돈을 달라고 해?”

“누구야. 누가 네게 그러라고 시키든? 토니니? 그 맹추 같은 인간이 그러라고 해? 대체 어떤 망할 놈의 감언이설에 홀딱 빠져서 이래?”

앵알앵알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많은 말이 쏟아졌다. 메이슨은 귀를 막고 말했다.

“한 사람씩 이야기하지 않으면 저, 그냥 들어갈 겁니다.”

메이슨의 단호함에 잠깐 멈칫 말을 멈추었던 친척들은 곧 더 크고 화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뭐?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우리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니? 네가 지금 온 가족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몰라서 이래?”

“이런 건방진 새끼가, 부모도 없는 걸 키워놨더니!”

“리스! 진짜 왜 이러는 거야! 저번에 그 트위터 일은 정말 미안하다고 했잖아!”

트위터 일은 또 뭐람. 메이슨은 한 손으로는 귀를 막고 손을 내저은 뒤 대문으로 향했다.

“리스!” “헤일리!”

메이슨이 단호하게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그들이 메이슨을 잡아먹을 것처럼 손을 뻗어 붙잡으려고 했다. 메이슨은 그들의 손을 피하며 “CCTV가 있는 앞에서 사람을 때리시려구요?” 하고 물었다.

“그러지 않으시는 게 좋을걸요. 돈을 달라면서 폭행을 하다니, 강도나 다름없지 않나요.”

뭐 실제로 그런 혐의가 적용될 수 있겠네요. ―메이슨은 딱히 도발하는 투도 아닌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고 그를 붙잡으려고 했던 삼촌 제이슨은 와작 얼굴을 구겼다. 메이슨은 문을 붙잡은 채로 그들을 한 명씩 돌아보며 말했다.

“어차피 한 번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으니 들어드리는 겁니다. 지금 한 분씩 이야기하시든가 아니면 돌아가세요.”

“뭐가 어째? 이년이―,”

튀어나오는 욕설에 메이슨은 어깨를 으쓱하며 문을 닫았고, 문이 닫히기 직전에 발이 끼어들었다.

“내, 내가 먼저 이야기 할래!”

나선 것은 사촌인 조이였다. 주변에서 왜 나서냐는 둥 시끄러웠지만 메이슨은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리스∼.” 하고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부르며 말했다.

“리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응? 이번 달 생활비 진짜 안 줄 거야? 에릭의 베이비시터 월급도 끊다니, 장난치는 거지?”

그녀는 네가 화난 건 알지만 우리 다시 잘해보자는 투로 싹싹하게 말했다. 주변 친척들은 영 못마땅한 투였지만 그렇게 달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지 말리지는 않았다. 메이슨은 찬찬히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게다가 갑자기 독촉장이라니, 내, 내가 이런 돈을 어떻게 갚아? 일도 안 하는데…….”

“일을 왜 안 하는데?”

“뭐? 그, 그야 나는 능력도 없고 회사 일 같은 건 못하니까…….”

“일반 사람들에 비해 많이 모자라다?”

메이슨의 말에 그녀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그, 그렇지, 말하자면.” 하고 어렵게 대답했다. 메이슨은 “그럼 센터에 가봐. 평범하게 생활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많거든.” 하고 말하며 웃었다.

“빌린 돈은, 우선 살고 있는 집과 저 페라리를 팔고 모자라는 건 그 잘빠진 구두와 드레스를 팔아치운 뒤 그래도 모자라면 장기를 팔아서라도 갚도록 해.”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사실 메이슨으로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페라리를 타고 다니고 메이슨도 알만한 명품 브랜드의 시계를 차고 다니면서 돈은 못 갚는다니. 그가 살던 동네에선 ‘장기를 파세요.’ 라고 친절히 말해주는 대신 데려다 조각조각 내서 이미 중국이며 필리핀이며 온 세상에 골고루 보내졌을 일이었다.

“뭐, 뭐라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난 네 사촌이라구!”

“사촌 사이에는 돈을 안 갚아도 좋다고 누가 그래? 네 변호사가 그런 말을 했다면 당장 자르는 게 좋을걸. 그리고, 일도 안하면서 베이비시터를 두 명이나 고용하다니, 한 명은 모자란 널 돌봐줄 도우미인가보지?”

그렇다고 해도 별로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메이슨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조이가 “리스!!!” 하고 괴성을 질렀지만 그는 가장 왼쪽의 여자, 고모 안나를 돌아봤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며 화를 참더니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헤일리. 내 병원비는 종류가 다르지 않니? 다른 건 몰라도 병원비까지 끊다니, 나보고 아파서 죽으라는 거냐?”

“글쎄요. 자식들 놔두고 왜 저한테 그러세요?”

메이슨이 귀를 후비며 심드렁하게 묻자 안나는 기가 막힌다는 투로 되물었다.

“벨라가 얼마나 어렵게 돈을 버는데 그걸 병원비로 달라고 해?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너는 도대체 어떻게 된 애가―,”

“제 돈은 쉽게 버는 돈이니 좀 나눠달라?”

안나는 조금 당혹스러운 듯했지만 곧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그, 그런 말은 아니지만, 하지만, 너는 돈이 더 많으니까,”

“레이노아에게 말하지 그래요? 그 남자가 저보다 돈이 더 많잖아요.”

“노아가 나랑 무슨 사이라고 그런 말을 해? 너 정말,”

메이슨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왜요?” 하고 되물었다.

“그쪽이랑 저도 아무 사이 아닌데 그런 말씀 잘 하시잖아요. ―의절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시는 것 같은데 어렵게 돈을 번다는 따님 벨라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면 친절하게 알려줄 겁니다. ――그리고 당신.”

메이슨은 안나를 새파랗게 질리게 만든 뒤 제이슨을 쳐다봤다.

“부모도 없는 걸 키워놨다구요? 미안한데 좀 제대로 키우지 그랬어요? 술에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거 사진 찍어 팔 생각을 하는 대신에요.”

뭐가 어쩌고 저째? ―소리 지르는 제이슨을 두고 메이슨은 다음 여자를 돌아봤다. 사촌 산드라. 그녀는 파랗게 질려 입술을 떨고 있었고 메이슨은 말했다.

“맥의 유학비를 보태라고? ―지랄한다, 아주.”

메이슨은 더 이상 친절히 말하는 것도 귀찮고 지겨워 씹어뱉듯 말했다.

“자식 가르칠 능력은 안 되는데 유학은 보내고 싶고 백화점에 가 쇼핑도 하고 싶고. 네 모든 욕구는 얼굴 반반하게 태어난 친척놈이 노예처럼 AV라도 구르며 충족시켜 줘야 한다?”

메이슨은 살면서 수많은 쓰레기들을 봐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 정도는 쓰레기 축에 끼지도 못할 만큼 많은 개새끼들을 만나며 살았다. 약하거나 빈틈을 보이면 갈취하고 약탈해 말 그대로 내장까지 내어가는 놈들이 태반이었다. 어린애를 데려다 약을 먹이며 매춘을 시키는 놈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고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 목을 매달게 하는 걸 인생의 유일한 즐거움으로 아는 놈도 있었다. 메이슨은 그런 놈들 사이에서 살아남았다. 뭐, 마지막엔 결국 죽고 말았지만, 여하간. 어쨌거나 이 정도는 간식거리도 안 된다는 거였다.

“봐요. 이제 더 뜯어먹을 것도 없지 않나요? 쏠쏠한 용돈 벌이? 섹스 동영상을 풀어도 오백 달러도 안 줄 거라는 거 알잖아요? 내 유산이 정말 갖고 싶어요?”

메이슨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사람들을 보는 것처럼 그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자신이 헤일리의 병실 안에서 주절거렸던 말이 메이슨의 입에서 다시 나오자 얼굴을 벌겋게 일그러뜨렸다.

“이, 이, 이, 욕심도 많지……! 그렇게 돈을 많이 벌면서 친척들에게 한 푼도 못 쓰겠다는 거냐? 네가 이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생각이 있어!”

“널 완전히 매장시켜 버릴 거야. 못 할 것 같아? 내가 알고 있는 네 더러운 비밀들을 기자들에게 풀기만 하면…,”

메이슨은 피식 웃었다. 피곤하고 졸리고 눈앞에 사람들은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잠깐 어쩔까 고민했던 그는 망설임 없이 가방에서 글록 17을 꺼내들었다. 철컥, 순식간에 안전장치를 풀고 장전까지 끝낸 총을 들고 그들을 돌아봤다. 그냥 처음부터 이렇게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야 들었다.

“무, 무슨 짓이야!?”

“꺅! 리스!!”

총구를 들이민 것도 아니고 총을 꺼내 보이기만 했는데도 기겁하는 친척들의 앞에서 탕!!! 하늘을 향해 한발 갈긴 메이슨이 “잘 들어요.” 하며 말했다.

“내 인생을 망치려면 그전에 보디가드를 고용하는 게 좋을 거예요. 이왕이면 비싼 놈들로.”

하얗게 질린 친척들을 향해 메이슨은 이를 드러내고 최대한 환하게 웃어보였다. 미친놈처럼 보이는 게 목적이었는데, 친척들의 표정을 보건대 제법 성공한 것 같았다.

* * *

하얗게 질린 친척들에게 적당히 독해 보이도록 상큼하게 웃어 보인 뒤 대문 안으로 들어간 메이슨은 정원을 가로질러 가다 문득 멈칫했다. 며칠 전 온 집 안을 뒤지며 온갖 약물을 찾아 버리다 미처 살피지 못한 한 곳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지하실. 메이슨은 정원 구석에 지하실로 들어가는 파란 나무문을 잠깐 쳐다봤다. 마저 정리를 하고 쉬는 게 좋지 않을까. 이성적인 생각과 ‘당장 들어가 침대에 눕고 싶다’ 는 본능 사이에서 메이슨은 갈등했다.

“…….”

지금 당장 수거하지 않으면 터지는 것도 아닌데 뭐. ―특별히 바쁜 일도 없는데 자고 일어나서 해도 되지 않나. 메이슨은 적당히 생각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체력이 좋지 않으니 좀 게을러지는 느낌이 있었지만 사실 이런 부실한 육체로 이전처럼 살았다간 단 하루 만에 다시 심장마비가 올 터였다. 적당히 쉬면서 운동으로 체력을 늘려가는 것이 헤일리의 몸에는 적당했다.

메이슨은 뜨거운 물을 잔뜩 받아 욕조에 들어갔다. 마음에 걸리던 일 두 가지를 한 번에 해치우고 물먹은 솜 같던 몸을 뜨거운 물에 담그자 졸음이 쏟아지면서 몸과 마음이 노곤해졌다.

으, 좋다, 좋아. 메이슨은 밀려오는 행복함에 앓는 소리를 내며 깊게 욕조에 기댔다. 뉴욕에서는 생각보다 일이 꼬이긴 했지만 뭐, 나쁘지 않았다. 여하간 집 정리도 했고 은행에 묻어놨던 재산도 찾았다. 적당히 처분하면 조금 빠듯하기는 하겠지만 베벌리힐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제법 괜찮은 카페를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근방 사람들은 비싼 커피를 좋아하는 듯하니 한껏 좋은 원두를 써서, 금을 갈아 만든 듯한 가격의 커피를 팔면 잘 팔리겠지. 물론 뉴욕 집 앞에 있던 그 행복해 보이던 카페 주인과는 좀 다른 모습이겠지만.

“흠, 흠.”

콧노래를 부르며 목욕을 즐기던 메이슨은 문득 자신의 아랫도리를 쳐다봤다. 자신의 물건이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또 남의 물건이라 꼼꼼히 살피지 않았는데 이렇게 보니 뭔가…….

메이슨은 슬쩍 고환의 뒤쪽을 더듬거렸고 곧 미간을 구겼다.

“……. …….”

뭔가 미묘하다 했더니 고환의 뒤, 어지간하면 스스로의 눈으로는 보지 않는 은밀한 위치에 작은 점 같은 크기의 뭔가가 달칵, 손톱에 걸렸다. 고환 뒤, 애널 앞에 작은 다이아로 피어싱이 박혀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게이 같은 짓이야―, 눈살을 찌푸렸던 메이슨은 곧 헤일리가 빼도 박도 못할 게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낮게 혀를 찼다. 취향은 존중해야겠지만 평범한 아저씨인 메이슨으로서는 참 괴악한 짓이다 싶었다. 잠깐 빼보려고 애를 써봤지만 도무지 어떻게 빼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결국은 그냥 두고 일어났다. 아무렴 어떠냐. 불편한 것도 아니고 당장 볼 사람도 없는데 뭐. 싱겁게 입맛을 다신 그는 몸을 닦고 잔뜩 노곤해져서 침실로 향했다.

뉴욕에서 꺼내온 가방 안에서 꺼내든 것은 총 한 자루와 포르노였다. 나머지 돈이나 약간의 보석과 금, 여권 등은 새로 가까운 은행에 계좌를 만들어 넣을 예정이라 가방 채로 침대 밑에 밀어 넣었다. 쓰기 편하고 손에 맞는 글록 17을 침대맡에 놔두고 침대 옆 커다란 찬장을 열었다.

“…….”

분명 처음 이 찬장을 열었을 때 이미 충분히 놀랐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다시 봐도 놀랍긴 했다. 옷장이나 다른 곳을 보면 정리를 그렇게 잘하던 애가 아니었는데 이 안만은 심혈을 기울여 정리한 티가 났다.

위에서 세 번째 칸까지는 각 나라에서 수집한 게이포르노가 나라별, 종류별, 이름별로 빼곡히 정리 되어 있었다. 이라크에서도 게이포르노가 나온다는 걸 메이슨은 이 찬장을 보고 알았다. 네 번째 칸에는 콘돔이며 총천연색 젤이며 하는 섹스 도구들이 그득히 쌓여 있었고 다섯 번째 칸부터는 메이슨도 알만한 자위기구들부터 대체 어디에 쓰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 흉측한 물건들까지 게이 섹스스토어에서 파는 수백 가지의 물건이 그야말로 예술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

메이슨은 처음 이 꼴을 봤을 때,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약들을 우수수 떨어뜨렸다. 게이에 섹스 중독증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이건 정말 상상 그 이상이었다. 사람의 인생에서 성욕이 차지하는 크기가 이렇게나 방대하고 열정적일 수 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지간하면 평정심을 잃지 않는 그도 인간의 이런 적나라한 내면을 직면한 것에 대해 적잖이 당황했다. 약을 정리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도 정리해버릴까, 그런 생각도 순간 들었다. 물론 같은 남자로서 그건 너무 가혹했기 때문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지만. ―언젠가 헤일리가 이 몸으로 돌아올 지도 모르는데 약은 그렇다 쳐도 이렇게 정성 들여 모은 포르노를 버리는 건 정말 인간으로서는 못할 짓이다 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건 좀 심하다 싶긴 했다. 어린애 팔뚝만 한 흉악한 형광 연두색 딜도를(그 거대한 크기 탓에 사람 몸 안에 넣는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지만 아무래도 모양 상 딜도인 것을) 질린 얼굴로 잠시 쳐다본 메이슨은 자신의 잡지 세 권을 그 앞에 내려놓고 챙겨온 DVD 커버를 열어 CD를 꺼냈다.

“―….”

잡지 세 권에 DVD 한 장이라니. 딱히 그렇게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헤일리의 찬장을 봤더니 약간, 스스로가 너무 성적으로 소박했나 싶은 기분마저 살짝 들었다.

“아니, 집에 잘 들어가지도 않으니까…….”

메이슨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상념을 떨쳤다. 집에 일 년에 며칠이나 들어가며 그 중 또 며칠이나 포르노 잡지를 들춰볼 시간이 있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수긍시킨 그는 꺼낸 CD를 침대 앞 대형 TV에 연결된 DVD 홀에 넣었다. 리모컨을 살피고 몇 번 만지작거리자 영화관처럼 커다란 벽걸이 TV가 켜지며 DVD의 첫 화면이 재생됐다.

메이슨은 사실, 담백이고 자시고 그보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육체와 정신의 성향이 완전히 반대일 때 어느 쪽이 더 강하게 표출되는가 하는 문제랄까. 혹은 게이란 육체적으로 타고나는 것인가 아니면 정신적인 취향의 문제인가 하는 것이기도 했다.

……쉽게 말하자면 그거였다. 자신이 여전히 여자가 나오는 포르노를 보고 세울 수 있는가. 메이슨은 자신은 완벽한 스트레이트라고 믿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았지만 헤일리의 게이성향이 워낙에 뚜렷하니 약간,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세상에는 남자를 혐오하지만 남자에게만 발기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고 성욕이라는 건 아무래도 정신적인 문제보다 육체적인 문제에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아닐 거라고, 여자를 보면 여전히 가슴부터 보는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 아마 여전히 자신은 스트레이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내심 혹시나 싶기는 했다. 저렇게까지 열정적으로 성욕을 충족시키던 몸이었으니 더욱이.

메이슨은 재생되기 시작한 DVD 화면 속 여자에 집중했다. 졸리고 나른하고 피곤하긴 했지만 그래서 그런지 평소보다 조금 더 고양감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 …―,”

목욕 후 알몸으로 나와 특별히 옷을 벗을 필요는 없었다. 메이슨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성기를 쥐고 천천히 문질렀다.

화면 속 여자의 이름은 줄리아였다. 줄리아는 엄청나게 섹시한 기운을 풍기거나 대단히 유명한 AV배우는 아니었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화장을 진하게 하거나 야한 옷을 입는 등의 노력은 하고 있지만 생김부터가 수수하고 얌전한 타입이었다. 원체 마르고 작아서 하늘하늘한 분위기가 어울리는 그녀는 그래도 가슴만은 제법 컸다.

메이슨은 그녀의 가슴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기분도 좋고 성욕도 적당히 올랐다. 성기가 낯설다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말랑한 헤일리의 손은 여자의 것 같아서 더 기분이 좋은 듯도 했다.

“…―, ――,”

아랫도리가 점점 묵직해져오자 메이슨은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축이며 손을 움직였다. 귓가나 뺨으로 슬슬 열이 올랐고 숨은 살짝 거칠어졌다. 메이슨은 힐끗, 단단하게 선 물건을 쳐다보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살색 가득한 화면 안에서 줄리아가 섹시한 비명을 질렀다. 가는 그녀의 허리와 듬성한 음모, 새하얀 엉덩이의 감촉을 상상하며 포르노 속 남자에게 스스로를 이입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철퍽철퍽, 가녀린 줄리아에게 조금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남자는 거칠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평소엔 AV 특유의 그런 과장된 점이 조금 불편했는데 오늘따라 그 심하게 흔들리는 엉덩이가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 흣,”

메이슨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보다 좀 빠르긴 했지만 그래도 확실한 사정감이 끌어 올랐다. 숨을 들이켜며 어느새 입안에 고인 단 침을 꿀꺽 삼켰다. 뺨으로 축축이 젖은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메이슨은 침대 옆 테이블에 티슈를 뽑아 뻣뻣해진 성기에 대고 사정했다.

“―…하…,”

메이슨은 눈앞이 하얗게 흐려지는 사정감에 살짝 떨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지며 잠시 잊고 있던 피곤이 수마처럼 몰려왔다. 정액이 묻은 휴지를 구겨 아무데나 던진 그는 힐끗 TV 속 줄리아를 쳐다봤다. 그녀의 신음 소리가 점점 절정에 치닫고 있었다.

고마워, 줄리아. 다행이야, 너한테 발기할 수 있어서. 메이슨은 잘빠진 그녀의 몸매를 눈으로 흐뭇하게 훑으며 입맛을 다셨다. 자신도 정말 올곧은 스트레이트라고 생각하며 살긴 했지만 헤일리의 게이 정신은 좀 무서울 정도라 살짝 걱정했는데 자위 한 번에 금세 마음이 편해졌다.

역시 사람은 육체보다 정신이지. 생각해보면 헤일리의 몸이 된 이후 남자를 본다고 특별히 성욕이 돋은 적도 없었으니 쓸데없는 걱정이긴 했다.

“하암…….”

메이슨은 길게 하품하며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피로에, 사정의 여운에 마음까지 완벽하게 편해지자 잠이 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 *

이건 꿈이구나. 메이슨은 가볍게 생각했다. 왜냐면 그의 핀업스타, 줄리아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경은 평범한 호텔 방으로, 분위기는 제법 점잖았다. 그녀는 AV에서보다 더 커진 가슴을 흔들며 ‘메이슨.’ 하고 달큼하게 그를 불렀다.

‘아까도 정말 고마웠는데 이렇게 꿈에까지 나와 주다니.’

진짜 오늘 서비스 끝내주네. ―메이슨의 말에 그녀는 방긋 웃었다. AV 안에서는 신음만 지르느라 웃는 법이 별로 없는 그녀였지만 꿈에서는 그의 취향대로 헤실헤실 잘만 웃었다.

‘메이슨…. 메이슨……,’

그녀가 살짝 애달픈 목소리로 다시 불러왔고 메이슨은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끌어다 침대에 엎드리게 했다. 꿈이니 거칠다고 뺨 맞을 일은 없지만 메이슨은 늘 그녀를 상냥하게 다루고 싶었다.

그녀의 하얀 엉덩이가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메이슨은 그녀의 옷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부드럽게 쥐었다.

‘아, 아앙, 하앙! 으으응…!’

가슴을 문지르고 옷 아래로 손을 넣어 클리토리스를 자극하자 그녀는 쉽게 달아올랐다. 치마를 완전히 들어 올리자 축축이 젖은 귀여운 속옷이 보였고 메이슨은 자연스레 그녀의 속옷을 내렸다. 진득하게 애액이 늘어지는 것을 보며 메이슨은 입맛을 다셨다. 뭔가, 살짝 부족한 감이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심히 아쉬울 정도는 아니었다.

‘―…?’

속옷을 벗어 던진 그녀가 문득 뒤를 돌았다.

‘왜? 이 체위는 싫어?’

메이슨의 물음에 그녀는 대답 대신 그를 침대에 눕히고 온몸을 애무해주기 시작했다. 키스는 다정하게 시작했다. 입술을 살짝 빨고 핥은 뒤 상냥하게 입 맞추고 혀를 핥았다.

과연 AV배우. 스킬이 장난이 아니었다. 메이슨은 그녀의 달큼한 키스에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고 그녀의 허리를 손으로 끌어안았다.

‘……?’

보기엔 한 줌밖에 되지 않았던 그녀의 허리는 뭔가 미묘하게 튼튼했다. 놀라 눈을 뜬 메이슨은 그녀가 목덜미 아래를 깊이 빨아오자 어깨를 움츠리며 숨을 삼켰다. 갑자기 허리께가 뻐근해져왔다. 아래가 빠질 것처럼 움칠거렸다. 어느새 가슴께에서 그녀의 금발이 흔들렸다. 그녀는 메이슨의 젖꼭지를 핥고 빨며 애무했고 메이슨은 숨을 삼키며 몸을 뒤로 빼려 했다. 격렬한 위기감이 몸을 덮쳤다. 뭔가, 상당히 이상했다.

‘흣……, 으, 하아,’

입에서 여자들처럼 신음이 나왔고 메이슨은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몸을 스칠 때마다 몸은 기분 나쁠 정도로 움칠거리고 느껴댔다. 아래가 꺼덕하게 서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녀의 애무로 허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녀를 침대에 밀어붙이고 그녀의 깊은 구멍에 성기를 밀어 넣고 흔들고 싶었는데, 일어나 밀어붙이기는커녕 허리 아래로는 힘이 들어가질 않아 허벅지가 후들대며 벌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몸을 더듬던 손이 은밀하게 허벅지를 지나 벌어진 다리 틈을 만졌다. 약간 거친 듯한 젖은 손은 애널 주변을 야하게 문지르다 조금 올라왔다. 달칵, 그 젖은 손에 고환 뒤 다이아 피어싱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 이 걸레 같은…, 이런 걸 잘도 박았네.’

씨발, 아픈 게 그렇게 좋아요? ―목덜미를 빨던 그녀, 아니 ‘그’가 고환을 터뜨릴 것처럼 강하게 쥐어오며 말했다. 목에선 새된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는 혀를 내어 제 입술을 핥으며 예쁘게 웃었다.

‘어……,’

강한 쾌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던 메이슨은 멍청이처럼 신음하며 줄리아 대신에 몸 위에 올라타 있는 상대를 쳐다봤다.

* * *

“…스! 리스으!!”

다급하게 부르며 들어오는 토니의 목소리에 메이슨은 “히익―!” 숨을 삼키며 잠에서 깨어나 벌떡 일어났다.

“우왁!”

메이슨의 비명에 토니가 덩달아 놀라며 비명을 질렀고 깜짝 놀라 깼던 메이슨은 흠칫, 토니를 쳐다봤다.

“……? 토니?”

“노, 놀랐잖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거야?”

토니는 식은땀에 흠뻑 젖은 메이슨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고 잠깐 눈을 끔뻑거린 메이슨은 곧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녜요.”

말도 못 붙일 만큼 단호하고 확고한 투에 토니는 “…그래? 얼굴도 빨갛고 식은땀이 굉장한데……,”라고 우물거렸지만 메이슨은 한 번 더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요.” 하고 잘라 말했다.

토니는 아무 일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며 그를 쳐다봤다. 뭔가 무서운 일이라도 겪은 양 숨도 거칠고 표정도 완전히 썩어 있었다. 게다가 이 묘하게 달큼한 기운은…….

토니는 급히 뛰어 들어오느라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은은하게 붉어진 귓불과 목덜미. 이불 시트를 둘러쓴 그의 몸이 맨몸이라는 거나 침대맡에 있는 작은 휴지뭉치, 그리고 문 옆에 붙은 커다란 티비에 비친 살색 따위였다.

헤일리의 자위행위라니, 딱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라 살짝 미간만 구긴 토니는 음소거 된 채 화면만 돌아가고 있는 포르노를 돌아봤다.

“어? 게이가 아니네?”

뭐야, 저 여자 트랜스야? 토니는 아무리 봐도 진짜 여자처럼 보이는 포르노 주인공에 눈을 끔뻑이며 물었고 그는 왈칵 미간을 구겼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급하게 뛰어 들어왔잖아요.”

메이슨은 한순간이라도 빨리 말을 돌리고 싶어 물었고 토니는 그제야 생각난 듯 아참! 하고 손뼉을 쳤다. 그는 “빨리 TV! TV!” 하고 호들갑을 떨며 발치에 있는 TV의 리모컨을 찾았다.

“그거 봤어? 글쎄, 그 남자. 그 남자가 인터뷰에서 네 이야기를―!”

“그 남자요?”

연예계 이야기 따위라면 아무래도 좋은 메이슨이 손등으로 식은땀을 닦으며 심드렁히 되물었고 토니는 높은 목소리로 “그 남자!” 하고 소리치며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툭, 작은 연결음과 함께 포르노의 살색 화면이 사라지며 한 남자의 얼굴이 화면에 채워졌다.

“――!”

화면에 뜬 얼굴에 메이슨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고 TV화면에 뜬 남자, 노아 레이칼튼은 힐끗 이쪽을 쳐다봤다. 아마도 카메라 렌즈를 쳐다본 것이겠지만 메이슨은 그가 자신을 본다고 느꼈다.

“음소거 취소 버튼이, ―? ―리스? 왜 그래?”

어디 아파? 얼굴이 빨간데? 토니의 물음에 메이슨은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구겼다. 귓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메이슨은 조금 전, 저 남자와 섹스 하는 꿈을 꿨다.

아주 격렬하고 천박한 내용의 섹스였고, 잠에서 깨어난 그의 아랫도리는 축축하게 젖어 반쯤 발기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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