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ill the lights-9화 (9/29)

09

“아……, 헤일리 러스크 씨요?”

리포터의 질문에 노아는 약간은 난처한 것처럼 웃었다. 그럴만한 질문이었다. 헤일리 러스크에 대해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냐니. 그가 노아 때문에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문이 전미에 파다한데 말이었다.

그동안 내내 노아는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삼가왔고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사람들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해왔다. 쓰레기 같은 헤일리에 대해 말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라는 둥, 그런 놈에게도 험한 말 하지 않기 위해 예의를 차리는 노아가 정말 대단하다는 둥,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는 그런 생각들을 했다.

사람들은 노아가 이번에도 곤란해 하며 질문을 패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어본 리포터조차도 아무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아는 곧 난처한 미소를 지우고 말했다.

“최근에 건강이 아주 위험했다고 들었는데 빨리 쾌차하셔서 좋은 드라마, 영화 많이 만들어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예? 아니, 아뇨. 레이칼튼 씨. 우리가 듣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나요?”

이를테면 그때의 일이라든가, 자살기도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분…, 뭐 그런 거 있지 않냐며 리포터가 자극적으로 물었다. 계속 노코멘트였고 오늘도 역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립서비스를 해주다니. 드디어 그에 대해 무언가 말할 기분이 들었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리포터는 머릿속에서 번쩍번쩍 울리는 특종마크에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노아에게 마이크를 깊게 들이밀었고 노아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난처한 얼굴을 했다.

“글쎄요. 그런 건 아무래도 사적인 이야기니까요. 러스크 씨의 프러포즈에 대해선 개인적으로 대답을 해드렸고, 그것에 대해 타인에게 떠드는 건……, 글쎄요. 좀 유치한 행동이잖아요?”

“아,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헤일리가 얼마나 상스럽게 굴었는지 다들 알고 있는 걸요! 심지어 어린애도 아니고 목숨가지고 협박이라니…, 대중 앞에 나선 스타로서 비난 받아 마땅한 행동 아닐까요?”

격렬한 리포터의 반응에 노아는 살짝 웃었다.

“자살기도라니……. 전 심장마비라고 들었는데요.”

“그걸 믿어요? 맙소사.”

여러분, 우리의 노아가 이렇게도 순진하답니다. 리포터는 카메라를 향해 지껄였고 노아는 손사래를 쳤다.

“아,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자살기도보다 훨씬 현실적이죠.”

생각보다 더 많은 헐리웃 스타들이 심장마비로 죽는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노아는 상냥하고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그가 다소 거칠거나 정제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세상에 절 싫어하는 사람도 많은데 하물며 좋아해주는 사람이라니, 감사한 일이죠.”

눈을 휘어 웃는 노아의 말에 리포터는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물더니 한참 뒤에 눈을 비볐다.

“맙소사. 저 지금 당신 등에 날개가 있는 환각을 봤어요.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죠? 우리 모두가 옆에서 본 것만으로도 헤일리에게 질렸는데 말이죠.”

노아는 살짝 미간을 구기며 웃었다. 그녀의 과한 칭찬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살짝 그녀를, 그리고 카메라를 응시한 뒤에 약간의 뜸을 들이다 말했다.

“……제 어머니는 그가 헤로인에 빠졌다는 걸 알았을 때, 그가 참 가엽다고 했었죠. 저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해요. 헐리웃은 아역스타에게 가혹한 곳이고 그에게도 그랬으니까요.”

노아는 웃고 있었지만 약간 씁쓸한 투였다. 리포터는 헤일리는 그 대가로 엄청난 돈을 벌지 않았냐고, 그리고 헐리웃뿐 아니라 어느 곳을 가도 사회는 가혹하다고 냉담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다.

헐리웃의 잔혹함이라면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노아의 납치사건. 20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 일은 여전히 헐리웃의 폐해를 이야기 할 때 꼭 나오는 이야기기도 했다.

탑 여배우를 질투한 한 무명 여배우가 그녀의 아이를 납치해 27시간 동안 여행가방 안에 넣고 다니며 아이를 폭행하고 살해하려 했던 그 일은 영화로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엄청난 시선을 모았었다.

“그러고 보면 영화 ?27시간?에 출연할 당시의 헤일리는 정말 사랑스러웠죠.”

자연스레 영화를 떠올린 리포터가 한숨처럼 말했다. 그 어떤 아이도 레이노아의 사랑스러움을 재연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모두 당시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노아 본인만큼 완벽한 외모는 아니었지만 영화 속 헤일리는 통통 튀는 매력으로 그 역할을 소화했다. 그때의 헤일리는 분명 사랑스럽고 순수한 아이였다.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것이 헐리웃이라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예정된 인터뷰 시간이 끝나자 리포터는 약간의 찜찜함을 삼킨 채 노아를 놓아주었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냐, 은근히 묻는 리포터에게 노아는 ‘제 냉혹한 비서가 오늘 저, 점심이고 저녁이고, 식사 시간은 따로 없으니 일하는 중간 중간 샌드위치를 챙겨 드시라 이야기한 걸 보셨어야 했는데…….’ 하고 우는소리를 하며 자리를 피했다.

실제로 노아는 눈을 돌릴 시간도 없이 다음 스케줄을 향해야 했다. 리무진 안에서 필이 건넨 샌드위치를 꼭꼭 씹으며 서류를 넘기는 그에게  그 옆에서 한참 노트북을 두드리던 필이 문득 물었다.

“근데 정말 헤일리가 메이슨이 살아 있다고 했습니까?”

그의 물음에 샌드위치를 씹던 노아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우물우물. 입안에 든 것을 씹어 꿀꺽 삼킨 노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음, 글쎄요. 생각해보면 나도 그때 제정신이었던 건 아니라 확신은 못하겠네요.”

환각을 보았거나 환청을 들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닌 상태긴 했다.

“역시 좀 이상하긴 하죠. 메이슨과 헤일리라니.”

노아는 입가에 묻은 샌드위치 소스를 엄지손가락으로 닦으며 웃었다.

“그래도 거기서 그 남자가 나온 건 사실이니까요. 관계가 있긴 할 거예요. …―아. 혹시 거기서 헤일리를 본 게 나 하나만은 아니겠죠?”

노아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고 필은 “아닙니다. 저도 거기서 헤일리를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해서….” 하고 말끝을 흐렸다. 필이 처음 엘리베이터에서 헤일리를 봤을 땐, 그가 노아를 스토킹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절대로 거기 있을 리가 없는 남자였다. 하물며 멈춘 엘리베이터 안에 노아와 함께 타 그를 깔고 앉다니. 필이 생각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헤일리 저 쓰레기가 단단히 돌았구나. ―노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상냥하고 좋은 남자가 아니었다. 천사의 날개? 신사? 노아는 그저 계산된 대로 말하고 미소 짓는 타고난 연기자일 뿐으로, 실상은 전형적인 상류층 개새끼였다. 아니 최상류층에서도 정점에 있는 사람답게 그는 전형적인 상류층 개새끼들 사이에서도 특별히 더 악인이었다. 과연 정치가, 배우, 재벌, 변호사의 피를 모두 가진 남자랄까. 타인을 망가뜨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간이었다.

이 일은 지난 주 추잡한 프러포즈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멍청한 짓이었고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지금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갈겨버리는 쪽이 깔끔할 텐데. 필은 그렇게 생각했다. 프러포즈 때는 메이슨의 행방불명과 일이 겹쳐 노아가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가 살아있다는 것도 알았으니 헤일리는 정말 돼지만도 못한 삶을 살다 죽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일의 전말은 필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나도 놀라긴 했지만 솔직히 그쪽이 더 놀라던데요. 메이슨의 생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했던 것까지 생각하면 분명 의도된 일은 아니겠죠.”

노아가 나른한 얼굴로 서류의 다음 장을 넘기며 말했고 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디테일을 보면 확실히 의도된 일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지만.

“참……, 희한한 우연입니다.”

그런 일은 우연으로는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소한 것을 따질 수는 없었다. 우연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헤일리 따위와 노아 사이에 운명 같은 거창한 단어를 쓸 수는 없었다. 필의 말에 서류를 보며 낮게 웃은 노아는 물었다.

“음―…, 헤일리에 대해 조사한 결과는 받아 봤나요? 어때요. 어째서 그런 대단한 우연이 일어났는지 나오던가요?”

고개를 든 노아는 말해보라는 듯 샌드위치의 남은 조각을 입에 넣으며 필을 쳐다봤다. 필은 두드리고 있던 노트북을 쳐다봤다. 헤일리의 조사결과는 통신 기록을 제외하고 대부분 살펴보았다. 대체 헤일리가 어디서 어떻게 메이슨과 만났는가 하는 것을 찾기 위해 눈이 벌게지도록 자료를 뒤졌지만 글쎄. 헤일리와 메이슨은 스펙트럼이 너무나 달라서 하다못해 ‘같은 브랜드의 구두를 애용한다’ 따위의 사소한 접점조차 없었다. 못 본 것이 있지 않을까 아무리 자료를 들고 상상력을 발휘해 봐도 두 사람이 주인이 없는 집에 드나들 정도의 사이가 될 만한 접점은 전혀, 그 어떤 곳에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 전혀 모르겠습니다. 텔레파시라도 주고받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접점이 전무합니다.”

“텔레파시? ―와, 그 정도란 말이죠?”

노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필은 노아에게 헤일리의 자료들을 건넸다. 노아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그가 내민 자료들을 받았다.

“메이슨을 찾는 데에는 여전히 별 단서가 없구요?”

헤일리의 자료를 뒤적이며 노아가 물었고 필은 아쉬운 얼굴로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슨은 분명 솜씨 좋은 용병이었고 베테랑이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작은 단서조차 발견되지 않는 것은 의외로운 일이긴 했다.

“확실히 접점이 있어 보이지는 않네요. 그럴 것 같기는 했는데…….”

중얼거린 노아는 툭, 툭, 자료를 손끝으로 느릿하게 두드리다 고개를 들었다.

“근데 메이슨과의 접점 이외의 자료는 없어요?”

“예? 아. 아뇨. 있습니다.”

조사는 했지만 메이슨과의 접점을 찾는 것 외에는 전혀 들춰보지 않았던 필은 살짝 당황해 발아래 놔뒀던 자료들을 꺼냈다. 후두둑, 손에서 미끄러진 헤일리의 자료들이 주루룩 리무진 바닥으로 쏟아졌다.

“죄송합니다.” 필의 사과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노아는 바닥에 떨어진 헤일리의 자료 몇 장을 주워들었다.

“근데, 헤일리 본인에게도 관심이 있으십니까?”

필은 자료를 챙겨 건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아는 살짝 미간을 구기며 웃었고 필은 그의 생각을 짐작하기 어려워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면 아까의 인터뷰에서도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헤일리에 대한 이야기를 제법 호의적으로 대답해주었다.

“메이슨을 찾는 데에 그를 이용할 생각이십니까?”

노아는 대답하지 않은 채 들고 있는 자료를 무성의하게 넘겼다. 헤일리가 친 수많은 사고와 온갖 중독증, 지저분한 남자관계……. 그는 노아가 알고 있는 대로 난잡하고 한심한 인간이 맞았다. 발정 나서 여기저기 찌르고 다니고 무례하고 천박하고. 딱히 누군가가 나서서 그의 인생을 망가뜨리려 하지 않아도 멋대로 휘청이며 진창에 빠져 구르다 죽을 인물이었다.

“…….”

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 같았지. 분명 지난 주 술에 취해 그를 붙잡고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사귀자는 둥 했을 때는 노아가 알고 있는 한심한 헤일리가 맞았다. 그러나 메이슨의 집에서, 혹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한 그는 ‘그 헤일리’ 가 아닌 것 같았다. 대체 언제부터였더라, 이런 희한한 기분을 느낀 건.

“…….”

노아는 드라마 클루의 촬영 현장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분명 달랐다. 아니,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달랐다.

노아는 살짝 미간을 구기며 심장께를 눌렀다. 처음 촬영장에 들어서 빗속에 선 헤일리를 봤을 때를 떠올리자 쿵, 쿵,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왜 이러지.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을 무시하며 노아는 헤일리의 자료를 성의 없이 살폈다.

“최근 자료는 없어요? 그러니까…, 심장마비가 온 뒤나 그 무렵의 것.”

“아, 그 아래쪽 자료입니다.”

예, 거기서부터. 두툼한 종이뭉치 사이에서 필이 가리킨 빨간 택의 서류를 들자 툭, 발치로 뭔가가 떨어졌다. 헤일리의 사진 한 장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건 이쪽 분류인데.”

필이 급하게 주우려 했지만 노아가 먼저 그 사진을 집어 들었다.

“이거…, 최근 사진이군요?”

필은 의아한 얼굴로 “그렇습니다. 오늘, 조금 전에 찍힌 사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대체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노아는 픽 웃으며 “오늘이라―.” 하고 중얼거렸다. 확실히 달랐다. 심장마비 이전의 헤일리와 이후의 그는. ―이 사진 한 장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말이었다.

성형이나 주사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노아는 사진을 툭툭 쳤다. 달라진 것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날 범해주세요, 따위가 써진 티를 입는 대신 얌전한 색에 목덜미가 제대로 가려진 티셔츠. 덜 찢어진 청바지. 온갖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그의 손과 목에는 약간의 상처가 남은 하얀 살결만 보였다.

술에 취했거나 약에 취했거나 혹은 둘 다에 취해있곤 하던 그는 단지 좀 졸린 듯한 얼굴로 커피 한 잔을 사고 있었다.

노아는 사진을 쳐다보다가 툭, 옆에 던져두며 물었다.

“최근에 그에게 눈에 띌만한 점이 있던가요?”

노아는 무릎에 뒀던 최근의 서류를 넘기며 물었고 필은 “죄송합니다. 최근 것은 아직…….” 하고 말끝을 흐렸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살폈다. 심장마비 일주일 전의 헤일리는 역시 그 훨씬 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술을 마시고 문란한 클럽 파티에 가고…….

“……?”

노아는 문득 서류에 한 지점을 쳐다보며 미간을 구겼다. 심장마비가 일어났던 그 밤. 부엌에 쓰러진 헤일리를 찍은 몇 장의 사진 밑으로 이어진 한 경찰 관계자의 증언이었다.

?……뭔가 무서운 것을 본 것처럼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맥박도 뛰지 않았고 숨도 쉬지 않았다. 심장은 완전히 멎어 있어 사망은 의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죽은 지 5분 이내라면 간혹 심장마사지 등으로 인해 살아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헤일리 러스크의 경우는 시체가 식고 사후경직마저 시작되려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죽은 지 한 시간은 지났을 거고, 주변을 조사하는 데에만 20여 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제 시체를 싣고 나가기만 하면 되는 그런 시각. 어디선가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렸고 소리의 발원지는 놀랍게도 죽어 있던 헤일리였다. ……?

노아는 소설조로 갈겨 놓은 증언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보니 그날, 필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들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미묘하게 걸리는 느낌에 노아는 미간을 구긴 채 서류를 쳐다봤고 문득, 필이 기억이 났다는 듯이 “아, 그러고 보니.”, 하며 말했다.

“최근 헤일리가 배우 일을 그만둘 것처럼 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의 매니저의 입을 통해 나온 말입니다.”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필을 쳐다보자 그가 희한한 소리를 했다. 세상에 제법 많은 수의 헐리웃 스타들이 연예인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할 것처럼 살아가곤 하지만 헤일리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정말로 연예인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길에 엎어져 죽었을 인물이었다. 그가 일을 그만둔다고?

“카페를 차리려고 한다고 하더군요. ―이쪽은 소문이긴 합니다만.”

최근, 근처 카페의 커피란 커피는 모두 마시고 다닌다고 합니다. 필의 말에 노아는 살짝 미간을 구겼다.

* * *

“고마워요.”

메이슨은 점원을 향해 빙긋 웃으며 커피를 받았다. 점원은 살짝, 네가 누군지 안다는 얼굴로 쳐다봤지만 더 말을 걸지는 않았다. 베벌리힐스에선 너 따위 연예인은 자기 집에도 있다는 식이었다. 돌아섰다가 다시 힐끗, 한 번 더 쳐다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메이슨은 역시 근방에 카페를 차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커피를 들고 카페를 나왔다. 근방에 카페는 포화상태이긴 했다. 하지만 잘 찾아보면 한 군데 정도는 제법 괜찮은 자리가 나올 것 같았다. 워낙 땅값이 비싼 동네라 계획한 인테리어를 하려면 모은 재산의 반을 툭 털어 넣어야 하는 위험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만한 곳이 없었다.

적당히 금액에 맞춰 다른 도시로 가는 것은 어떨까도 생각해 봤지만 헤일리의 이미지상 거친 동네는 병신들이 잔뜩 꼬일 것 같았다. 병신을 처리하는 거야 이력이 낫지만 굳이 병신을 처리하며 살 필요는 없었다. 연예인을 지나가는 개처럼 본다는 점에서 이 동네가 좋았다. 이 동네에선 아무도 헤일리를 아는 척하거나 하지 않았다.

“어머, 리스! 리스!”

등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메이슨은 ‘여긴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아 좋아’ 라고 생각했던 것에 창피해하며 돌아보았다. 웬 가슴이 큰 여자 히피가 환하게 웃으며 포옹해왔다.

“―!”

메이슨은 얼결에 그녀의 가슴에 눌리며 그녀와 포옹했다. 그녀에게서 희미한 사향 향기가 났다.

“왜 이렇게 연락이 없었어? 응? 내 메시지 안 들었어? 연락 준다고 해놓고∼!”

살갑게 웃으며 손을 맞잡고 묻는 그녀에게 메이슨은 입술을 달싹였다. 당연히 메이슨이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헤일리와 무슨 관계지? 말하는 걸 들어보면 데이트라도 한 사이 같았는데 헤일리가 얼마나 남자를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면 그건 아니었다. 친구인가? 무슨 관계지? 토니에게 들은 몇 명의 인간관계 중에 이 여자는 없었다. 메이슨이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그녀는 그가 화났다고 생각했는지 눈을 휘며 아양 떨듯 웃었다.

“자기야, 왜 그래? ‘그 물건’ 이 효과가 별로라서 화났어?”

“그 물건?”

헤일리와 물건을 사고팔던 사이인가? 혹시 헤일리의 단골 약 딜러인가. 메이슨이 그녀를 가는 눈으로 쳐다보자 그녀는 뭐라고 생각했는지 변명조로 말했다.

“아니, 아직 효과가 덜 나와서 그렇지 슬슬 보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어제 레이노아 인터뷰 못 봤어?”

네게 굉―장히 호의적이었다고 그녀는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메이슨은 갑자기 튀어나온 레이노아의 이름에 미간을 구겼다.

“자기야 딱 삼 개월만 기다려봐. 진짜 막 감이 온다니까? 오고 있어. 오고 있다구, 그분이. 오늘도 내 꿈에 너랑 레이노아가 잘 되어서 러브러브한 게 보였다니까!”

“―…그래?”

메이슨은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었고 그녀는 “아니 뭐, 꿈이 선명했던 건 아닌데……. 아무튼 삼 개월만 기다려. 응?” 하며 어설프게 말을 마무리 했다.

“좋아. 삼 개월 뒤에 연락할게.”

메이슨은 적당히 대답했다. 조금 전 대화로 어렴풋이 그녀가 누군지 알 것도 같았다. 그녀는 메이슨의 대답에 기뻐하며 아참, 하고 은밀하게 잡아당겨 귓가에 속삭였다.

“근데 새로 물건 하나 들어왔는데 안 살래? 이번 것도 일본에서 왔는데 부적이야. 지난주에 그거랑 같이 쓰면 효과가 단번에 나타난다는데…, 어때? 생각 있어?”

물건은 두 장밖에 없으니까 빨리 결정해야해. 그녀는 너니까 특별히 미리 이야기해주는 거라는 투로 속삭이듯 말했다. 메이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오늘은 돈이 없으니 다음 기회에 보자고 말했다. 싸게 해준다고 들러붙는 그녀를 두고 길을 건넌 메이슨은 손에 든 커피를 홀짝이며 혀를 찼다. 헤일리의 인간관계는 참 파악하기 쉬웠다. 그를 이용할 생각이 없는 노아 같은 사람들은 그를 대놓고 경멸하며 피했고, 그의 등골을 뺄 생각뿐인 사람들은 웃으며 다가왔다.

메이슨은 커피를 홀짝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형 마트에 들려 몇 가지 물건들을 샀다. 막힌 하수구를 뚫을 약품과 얼룩을 지우는 세제와 걸레, 삽과 작은 포대에 든 간이 시멘트. 그리고 필요한 몇 가지를 더 산 그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집 안쪽 계단을 통해 지하실로 향했다.

짐이 무거워 근육이 없는 팔이 후들거렸지만 누구에게 옮겨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지하실 앞에 던지듯 물건들을 내려놓은 메이슨은 땀을 닦으며 지하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안쪽에서 희미한 썩는 내가 풍겼다.

어제 오후 느지막이, 토니의 호들갑으로 잠에서 깼던 메이슨은 당황하고 황당해했다.

그는 노아와 자는 꿈을 꿨다. 건전하게 옆에서 손 붙잡고 자는 꿈을 꿨어도 ‘아 진짜 이상한 꿈이네.’ 했을 텐데 꿈에서 메이슨은 노아와 섹스 했다. 그것도 그가 아는 모든 섹스 중에서 가장 난잡하고 천박한 섹스를.

정신은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메이슨은 여자에게 세울 수 있다고 만족스레 잠들었던 직후에 꾼 그 음탕하고 외설적인 게이섹스 꿈에 입 밖으로 영혼이 흘러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인생 우습게 알지 말라고 신이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혹은 엿 먹으라고 속삭이거나.

TV 속 노아는 조잘조잘 예쁘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꿈 속 노아의 예쁜 입술이 떠올랐다. 어떻게 해줄까요? 아래가 너덜너덜해지게 찔러주길 바라죠? 응? 씨발, 말해보라구요. 그 예쁜 입술은 천박하고 사나운 말을 쏟아냈었다.

토니가 걱정스럽게 어디 아프냐고 묻는 것에 메이슨은 ‘네. 몸이 안 좋은가보네요.’ 하고 이불 속 다리를 움츠렸다. TV속 노아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랫도리가 창피할 정도로 욱신거렸기 때문이었다.

남자들 사이니 자다 일어나서 발기한 게 그렇게 쪽팔릴 일도 아니었지만 그 미묘하게 다른 위치가 욱신거리는 것이 메이슨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꿈속에서 노아가 찢어버릴 것처럼 강하게 쑤셔 주었던 엉덩이 안쪽, 말하기 쪽팔리는 곳이 후들거리는 기분이었다.

?노아가 네 이야기를 하고 있어!? 외에 별다른 용건은 없었던 토니를 돌려보낸 뒤 메이슨은 조금 고민하다가 줄리아의 DVD화면을 다시 켰다.

메이슨은 그녀를 보며 급하게 반쯤 서 있는 성기를 문질렀다. 꺼덕하게 서 있었던 탓에 금세 사정은 할 수 있었지만 그게, 기분이 영 묘했다. 메이슨은 사정을 하고서도 뭔가 하다 만 듯한 그 미적지근한 기분에 얼굴을 구기며 일어났다. 꿈속에서 느꼈던 미칠 것 같은 쾌감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깨끗하게 하고 집 안을 정리하자고 나섰다. 샤워를 하는 사이 손가락 끝에 걸린 다이아 피어싱은 잠들기 전에 비해 아주 아주 아주 아주 미친 듯이 거슬렸지만 여전히 잘 빠지진 않고 그걸 쳐다보느라 허리는 아프고 해서 포기하고 말았다.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 지하실로 가면서 메이슨은 ‘하긴. 아무렴 어떠냐. 누가 아는 것도 아닌데.’ 하고 겸연쩍게 생각하며 마음을 정리했다. 약간 마음에 찜찜함이 남았지만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변태적인 구석이 있다는데 이 정도쯤이야. 진짜 하려고 든 것도 아니고 그저 꿈인데다, 법에 어긋나는 수준도 아니지 않은가. 꿈이라는 게 자기 의지대로 꾸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그런 꿈을 또 꿀 리도 없었다. 누구나 한 번쯤 생각지도 못한 희한한 상대와 섹스 하는 꿈을 꾸는 것이 사람이었다. 메이슨으로 살 때는 옆집 과부인 마리와 섹스 하는 꿈도 꾸었었다. 그녀와 얼마나 사이가 나빴는지 생각하면 노아 정도는 그럴 수도 있었다. 그는 예쁘고 또――, 합리화와 헛소리 사이를 오가는 생각을 굴리며 지하실 문을 연 메이슨은 멈칫하며 표정을 굳혔다.

‘…―,’

복잡한 머리를 잠재울 겸 지하실을 정리하기로 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지하실 문을 여는 순간 섹시하게 입술을 핥으며 천박한 욕을 하던 노아는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으니까.

지하실 안쪽에서는 희미한 썩은 내가 풍겼다. 고약했지만 메이슨에게는 제법 익숙한 냄새였다.

“만나서 진짜 물어보고 싶네.”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메이슨은 마트에서 사온 물건들을 발로 지하실 안쪽으로 밀며 중얼거렸다. 사실 살아서 만났다면 서로가 서로를 소 닭 보듯했을 거고 딱히 이야기를 섞을 일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솔직히 정말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 무슨 생각인지. 아니, 대체 생각이라는 걸 하기는 하는 건지, 하고.

달칵. 지하실 불을 켜자 몇 시간 전, 메이슨이 봤던 광경이 다시 그대로 드러났다.

“―….”

예전에 재정상태를 살폈을 때도 ‘토템’ ‘부적’ 따위의 항목에 상당한 돈을 쓰고 있기에 혹시나 싶기는 했었다. 뭐, 친척들이 쓴 돈도 아니고 헤일리 스스로가 쓴 돈이고 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신경을 썼어야 했다. 그게 이런 것이었다면 말이었다. 메이슨은 이걸 일찍 발견한 것이 그나마 천운이라고 생각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지하실 한켠, 구석진 곳에는 픽션 속에서가 아니면 흔히 볼 수 없는 희한한 광경이 있었다. 둥그렇게 그려진 마법진에 사방에 초가 녹아있고 가운데 고인 피가 썩고 있었다. 테이블 위엔 가정용 대형 믹서로 뭔가를 갈아 버린 흔적이 있었고 여기저기 떨어진 약간의 털은 사람의 것인지 짐승의 것인지 애매했다.

헤일리가 저기서 뭘 했는지는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무언가 위험한 의식 따위를 하고 거기서 사용된 제물을 갈아 하수구에 버린 듯했다.

사실 특별히 못 봐줄 광경까지는 아니었다. 사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만약 사체가 있었다고 해도 메이슨은 그다지 끔찍해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는 전쟁터를 뛰어다니던 사람이었고 온갖 더러운 일에 부려지는 용역이었다. 사람을 죽여본 적은 물론 있었고, 태어나 처음 죽였던 놈은 그야말로 베테랑 경찰들조차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난도질해 살점 조각으로 만들었었다.

그러니 헤일리가 시체로 무슨 짓을 했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지하실엔 시체도 없었고, 누구나 지하실에 시체 한 구쯤은 숨기고 사는 거 아니겠냐고 우스갯소리를 지껄이는 시대인 만큼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뭘 하든 뒤처리는 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에휴…….”

얘가 만약 내 부하였으면 아주 제대로 굴려줬을 텐데. 메이슨은 꽉 막혀서 제대로 내려가지 않고 고여서 썩고 있는 살점과 핏물을 힐끗 쳐다보고 가져온 마스크와 일회용 방독면을 썼다. 그는 사온 약품을 하수구에 줄줄 흘려 넣으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얘도 인생이 많이 힘들었겠거니 생각하려 해도 씻지도 않고 던져둔 믹서며 주술 도구들을 보고 있노라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피비린내가 나는 마법진에 세제를 칙칙 뿌려 지우며 메이슨은 중얼거렸다.

“나도 적잖이 무신경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살긴 했는데….”

목숨 걸린 일에 하도 아무렇게나 작전을 진행시키는 바람에 늘 팀원들의 원성을 사곤 했던 그조차도 헤일리의 안일함에는 좀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파파라치들이 흠을 잡기 위해 매일매일 카메라를 들고 집 앞을 방문하는 입장에서 잘도 이따위로 정리를 해놓고 죽을 생각을 했다 싶었다.

메이슨은 헤일리가 남겨놓은 흔적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지웠다.

하수구에 남은 찌꺼기가 없도록 남은 약물을 남김없이 쏟아 붓고 세제로 피가 튀었을만한 곳들을 닦아냈다. 믹서는 모두 분리해 물에 씻어낸 뒤 약품에 한 번 헹궈 창고 깊숙한 곳에 넣었고 핏자국이 남은 테이블 위는 새 페인트를 발랐다.

빠릿빠릿하게 했지만 서너 시간. 모든 정리가 끝난 뒤 메이슨은 다시 녹초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 인생이라고 딱히 또 그렇게 편한 것만은 아닐지도……. 메이슨이 뒤늦게 생각하며 기듯이 집 안으로 올라가자 돌아갔던 토니가 다시 집에 와 있었다. 그는 집에 없는 줄 알았던 메이슨이 지하실에서 기어 나오자 깜짝 놀란 얼굴로 “거기서 뭐했어?” 하고 물었다.

“청소요. 근데 무슨 일이에요? 집에 간 것 아니었어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던 메이슨은 토니가 대답하기 전에 “아니, 잠깐만요.” 하고 고개를 저었다.

“저 지금 죽을 것 같으니 중요한 게 아니라면 다음에 이야기해줄래요?”

몸이 작신작신 쑤시는 게 심상치가 않았다. 헤일리의 몸은 연약하고 섬세한데 자꾸 예전의 자신일 때처럼 쓰려고 드니 계속해 과부하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사실 지하실 청소도 어제 발견해놓고 오늘에서야 치운 건데도 말이었다. 약물과 술에 절여져 있던 몸이 풀리는 데는 시간이 제법 걸릴 모양이었다.

“중요한 이야기야!”

토니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 주저앉은 메이슨의 앞에 투두둑, 몇 권의 책과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예요?”

메이슨이 살짝 미간을 구겼고 토니는 통통한 볼이 터질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반짝반짝 볼을 빛내며 그는 “네게 새 일이 들어왔어!” 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예?”

“어제 레이노아가 너 안 싫다고 인터뷰 한 것 때문인가 봐! 오늘 아침에 사무실에 나갔더니 갑자기 영화랑 드라마가 들어와 있어서, 아니, 물론 다 주역인 건 아닌데……, 이건 주역이야!”

토니는 약간 머뭇거리며 대본 하나를 들었다. ‘마약과의 전쟁’

“…….”

메이슨은 토니를 빤히 쳐다봤고 토니는 눈을 굴려 시선을 피하며 주섬주섬 다른 대본을 찾아 내밀었다.

“이, 이건 어때? 내가 읽어봤는데 가장 무난하고 괜찮아. 배역은 뭐랄까, 정 많은 게이인데…….”

헤프고 문란한 게이라는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토니는 약간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남자주인공이 브릭 웨먼이 낙점 됐는데, 그 남자랑 베드씬이 있대! 너 그 남자랑 자 보고 싶어 했잖아.”

잘됐지? 뭐 물론 진짜 하는 건 아니지만, 하다가 잘 맞으면 촬영 하고난 뒤에 진짜로 자게 될 수도 있잖아? ―토니는 메이슨이 반드시 이 대본을 고를 거라고 생각했는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쳐다봤다. 메이슨은 무심한 투로 말했다.

“제가 그랬나요? 기억 안 나는데요.”

“아, 그렇지. 너 기억 상실증이지. 그래도 여전히 그런 마음이 들지?”

감독에게 진하게 찍어달라고 꼭 이야기 할게. 토니가 말했고 메이슨은 손으로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른 건 없어요?” 하고 물었다.

“벼, 별로야?”

이게 왜 마음에 안 들지? 토니는 어색한 얼굴로 갸웃갸웃 하더니 몇 개의 대본을 더 내밀었다. 메이슨은 졸음을 참으며 그가 내민 대본을 받아 들었다.

“근데 왜 갑자기 이런 게 들어와요? 일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노아가 TV에 나와서 몇 마디 한 게 그렇게까지 영향력이 크단 말이야? 물론 레이칼튼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노아가 대놓고 그를 키우고 있다거나 밀어준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남자를 싫어하지 않는다.’ 라는 식으로 몇 마디 했을 뿐이었다. 일이 한두 개도 아니고 이렇게 여러 개가 한 번에 들어오다니.

“글쎄……? 워, 원래 들어오려던 일이 노아 눈치를 살피다 괜찮을 것 같으니 들어오는 거 아닐까?”

토니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메이슨은 헤일리가 그렇게까지 여기저기서 쓰고 싶은 배우인가 잠시 고민했지만 뭐, 생각해 보면 들어온 영화가 정 많은 게이 역, ‘마약과의 전쟁_헤로인과 마리화나’ 따위라 토니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노아는 왜 그런 인터뷰를 해가지고……. 메이슨은 살짝 한숨을 쉬며 이 배역들을 어떻게 거절하나 고민했다.

배우 일은 아주 하기 싫다기보다는 좀, 내키지 않았다. 촬영이 아니라 일상에서 마약중독자인 척하거나 헤픈 게이인 척하는 건 괜찮았다. 예전에 용병일 할 때도 그 정도는 했었고 죽기 직전까지만 해도 알타의 벙커에 들어가기 위해 비굴한 포주인 척했었다. 그는 때때로 다른 사람인 척하는 일이 무척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배우 일은 ‘척하는 것’ 만으로는 안됐다. 카메라가 목숨을 위협하는 총처럼 겨눠지고, 감독이 감시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며, 상대 배우가 대사를 뱉으면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발목이 잡힌 것처럼 멈춰 서서 집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속에 있는 감정을 내뱉게 되고 마는 것이다.

메이슨은 그때의 경험이 묘하게 불쾌하고 창피했으며 불편했다. 인생의 편린을 꺼내어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이 낯설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약 중독자, 헤픈 게이 역할은 카페 주인의 이미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정키에 걸레 이미지가 확고한데 거기다가 그런 것까지 추가하고 싶진 않았다.

토니가 내밀었던 다른 대본들 역시 역할은 비슷비슷했다.

“다른 건 없어요? 이게 다라면 전 별로――,”

토니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거절하자고 메이슨이 입을 열자 토니는 당황한 얼굴로 “왜? 왜? 마음에 안 들어?” 하고 더듬거렸다.

“약쟁이 걸레 이미지는 이제 됐어요.”

대체 누가 약쟁이 걸레가 탄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하겠는가. 물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헤일리가 마약과 남자를 병적으로 사랑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내키지 않았다. 메이슨의 말에 토니는 머뭇머뭇하며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 이런 것도 있기는 한데…….”

토니는 ‘아마 이건 안 되겠지만 혹시나…’ 하는 투로 한 권의 대본과 정리된 시놉을 내밀었다.

?리얼Real(가제)?

“감독은 빅 프록터라 흥행은 따놓은 거긴 한데…….”

“―한데?”

말끝을 흐리는 토니의 말을 따라하자 그는 곤란한 듯 뺨을 긁적거렸다.

“아니 그게, 떨어진 역도 조역보단 단역에 가깝고 킬러 역이라 액션도 많은데 감독이 대역 쓸 거면 빠지라고……. 아니, 솔직히 네가 무슨 액션 배우도 아니고 그런 것까지 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

토니는 자긴 좀 그렇다는 듯 말했지만 눈에 진득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메이슨은 무심히 그가 건넨 시놉을 훌훌 살폈다.

별로 대단한 액션이 나올 것 같지는 않은데……. 비치나 정키보다는 킬러 쪽이 커피를 팔기엔 낫지 않을까 싶긴 했지만 역시 뭐 딱히 내키는 수준은 아니었다. 토니는 메이슨이 그나마 시놉을 훑는 것을 보자 혹시나 싶었는지 “관심 있어?” 하고 물었다.

“아뇨. 그다지. 착한 역은 안 들어오나 봐요?”

메이슨은 사정을 빤히 다 알면서도 물었고 토니는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며 “요즘은 악역이 대세잖아.” 라고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역시 착한 쪽이 승리하지 않겠어요?”

이기는 편이 주인공이죠, 뭐. 메이슨은 심드렁히 말했고 토니는 그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감독이 워낙 대단해서 한 번 함께 해보고 싶고 그런 거지, 사실 그건 돈도 얼마 안 줘. 뭐, 나오는 컷도 얼마 안 되고 촬영 기간도 짧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요? 얼마나 주는데요?”

메이슨은 시놉을 내려놓으며 별 의미 없이 물었다. 그러고 보면 헤일리가 돈을 제법 잘 벌긴 했었다. 인생을 망치는 짓에 삼만 달러를 아무렇지 않게 뿌릴 수 있을 정도로.

“응? 오만 달러든가.”

계약서를 확인해봐야겠지만 그 정도였던 것 같네. 토니는 적어서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고 메이슨은 살짝 멈칫했다.

“몇 달이나 찍는데요?”

“길어야 이틀 정도 찍지 않을까? 아, 영화 총 촬영 기간 이야기야?”

서너 달은 될걸? 토니의 말에 메이슨은 조금 더 멈칫했다.

“이틀에 오만 달러?”

“어?”

“사람을 진짜 죽이는 것도 아니고, 고문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고문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이틀에 오만 달러?”

메이슨은 재차 물었다. 조금 따지는 것 같기도 한 투였다. 소파에 늘어진 껌처럼 반쯤 기대어 있던 메이슨이 점점 일어나 그를 덮칠 것처럼 묻자 토니는 “으…, 으응, 너무 심하게 적지? 나도 네게 어떻게 그런 대접을 할 수 있냐고 따져봤지만,” 하고 물러났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메이슨은 내려놓았던 시놉과 대본을 들었다. 이틀에 오만 달러라니. 메이슨은 대본을 내려보며 살짝 미간을 구겼다. 이틀에 오만 달러. 이틀에 오만 달러.

메이슨은 원래 돈을 무척 잘 벌던 사람이었다. Zii 놈들이 ‘이 새끼는 돈도 많이 벌면서 이딴 데 살아.’ 라고 욕설을 뱉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싶을 만큼 돈을 잘 벌었다.

하지만 버는 만큼 일했다. 두 달간 땅 밑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사람 하나를 낚아채는 짓을 하거나, 전쟁 한복판에서 폭탄을 가슴에 달고 총 한 자루 들고 뛰거나, 어쩔 때는 상대편에 잡혀서 고문을 당하거나 하는 일도 빈번하게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질 만한 돈을 주는 대가로 Zii는 메이슨을 그야말로 걸레처럼 썼다. 여기저기 겨 묻은 데도 닦고 똥 묻은 데도 닦고…, 하여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사용했다. 물론 메이슨은 돈 이전에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인생을 Zii에 던지는 미친 짓을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메이슨은 많은 돈을 받는 대신 사람들이 천만금을 줘도 안 할 일들을 기꺼이 했었다. 돈을 벌기 위해 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돈을 받는 것에 있어 충분히 그 값의 일을 해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이틀에 오만 달러라…….”

중얼거리자 토니가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메이슨은 그를 향해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이게 킬러 역이란 말이죠? 감독이 훌륭한 영화의?”

평생 돈을 벌기 위해 일했던 것도 아니었고 물욕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이슨이 도를 닦는 건 아니었다. 이틀만 일하면 오만 달러를 준다는데, 아론같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면 바보 멍청이였다. 슬럼가 깊숙한 뒷골목에 가면 진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삼만 달러면 떡을 쳤다. 이틀이면 영화에 그리 많이 나오지도 않을 거고 킬러 역은 솔직히 해볼 만할 것 같았다.

이틀에 오만 달러. 메이슨의 머릿속에 ‘이렇게 조금만 일하면 카페가 망해도 노후 자금을 넉넉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안온한 생각이 스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 번 해볼까요, 이거?”

메이슨은 슬쩍, 토니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고 토니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기억상실즈으응, 그가 서럽고 기쁜 울음 끝에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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