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ill the lights-10화 (10/29)

10

2주 뒤, 촬영 날이 되었을 때 계절은 이미 완연한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햇살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메이슨은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올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촬영 준비를 하고 있는 그 거리는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건물이나 거리는 물론, 촬영 준비를 하는 스탭들을 힐끗대며 지나가는 사람들마저 낯이 익었다.

“여길 이렇게 금세 오게 되나…….”

메이슨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오늘의 영화 리얼의 촬영지는 뉴욕 120번가, 그의 아파트의 바로 옆 블록이었다.

“응? 뭐라고?”

뒤에서 양산을 받치며 따라오던 토니가 제대로 못 들었는지 되물었고 메이슨은 “아뇨, 혼잣말이에요.” 하고 손사래를 쳤다. 이제 정말 전생과 마주하는 일은 없겠구나, 아쉽게 인사하며 돌아섰던 과거가 약간 창피했을 뿐이었다.

“아, 슬럼가 부근이라 좀 무섭지? 감독이 이왕이면 현실감 있게 찍고 싶어 해서…….”

메이슨의 찜찜한 얼굴이 두려움 탓이라고 생각했는지 토니는 자신도 좀 무섭다며 어깨를 떨었다.

“그래도 사람이 많으니까 괜찮겠지? 혼자 다니지만 않으면……,”

메이슨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도 어차피 사람 사는 덴데 뭐 그렇게까지 쫄 정도야. 여긴 심지어 그리 위험한 거리도 아니었다. 물론 혼자 다니는 사람들을 노리는 강도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뭐. 안 그런 동네도 있던가. 메이슨은 주변을 쭉 돌아봤다. 메이슨의 시선을 느꼈는지 촬영을 준비하는 쪽에서 한 여자가 달려와 인사했다.

“아, 토니 왔어요? 헤일리, 반가워요. 프로듀서 글로리아 수예요. 호텔은 잡았나요?”

“아직요. 어디가 괜찮죠?”

“글쎄요. 호텔은 차를 타고 좀 나가는 게 좋을 거예요. 세 블록은 더 가야 침대 밑에서 바퀴벌레가 안 나오거든요.”

그녀는 아주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늦지 않게 오셔서…… 액션 씬이라 힘들긴 하겠지만 밤 촬영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다면 하루 만에도 가능은 할 거예요.”

사실 씬 수는 얼마 안 되거든요. 그녀는 힐끗, 메이슨을 쳐다봤다. 될 리가 없겠지만. 하는 눈빛으로 살짝 쳐다본 그녀는 곧 싱긋 웃었다.

“하하하, 저희가 좀 일찍 왔죠? 얘가 빅 감독님 광팬이라, 이렇게 일찍 촬영장에 가면 오히려 폐가 된다고 했는데도 감독님 보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토니가 툭, 가만히 있는 메이슨을 쳤고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던 메이슨은 그녀를 향해 빙긋 웃었다.

“하하아…, 그래요? 하긴. 누가 감독님 팬이 아니겠어요. 보는 눈이 있다면 말이죠.”

상큼하게 웃은 글로리아는 그들을 데리고 그늘이 마련되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아쉽게도 감독님은 아직 안 나오셨어요. 먼저 함께 씬이 있는 배우 분을 소개해드릴게요.”

“저, 저희보다 먼저 오신 배우분이 계세요?”

의기양양하게 ‘가장 먼저 촬영장에 온 배우의 매니저’인 양 행동했던 토니는 놀라 물었고 글로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배우를 픽업한 프로듀서’의 자부심 어린 얼굴을 했다.

“어머, 물론이죠. 이번 영화 주연이 누군지 확인 안 하셨나 봐요? 그가 저기에――, 어머, 이런.”

생기 어린 얼굴로 배우를 찾아 주변을 돌아보던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키가 훌쩍 큰 남자에게 뛰어갔다. 그는 지나가는 많은 스태프들처럼 큰 짐을 어깨와 등에 이고 지고 걷고 있었다.

“체이스! 맙소사, 그런 일은 하지 말라니까요.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죠, 체이스에게 이런 일 시키지 말라고 했지?”

“아이쿠, 글로리아. 언제 왔어요?”

훤칠하게 키가 큰 남자 배우는 앗 뜨거, 하는 투로 물건들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이가 드러나도록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와…, 체이스 빌러잖아?”

토니가 감격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고 메이슨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러났다. 체이스라는 남자는 그야말로 얼굴에 ‘사람 좋다’ 고 써놓은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이쪽을 쳐다봤다.

“혹시 체이스는 기억 안 나? 저 남자 섹스 비디오가 있다는 루머가 돌았을 때 너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는데.”

자위 하느라……. 토니의 씁쓸한 말투에 메이슨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오가며 포스터 같은 데서 한두 번 얼굴을 본 일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잘 아는 얼굴은 물론 아니었고 그보다……, 그린 것처럼 잘생긴 남자가 그린 것처럼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고 있으니 약간, 왠지 모를 묘한 거부감이 들었다.

글로리아에게 잔소리를 한바탕 듣던 남자는 눈을 굴리다 멀뚱히 서있는 메이슨과 토니를 발견하더니 “안녕하세요!”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 오기로 했다던 새 배우인가요? 아…―? ―헤일리 러스크?”

그는 약간 놀란 듯한 얼굴을 하더니 곧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헤일리도 작은 키는 아니었는데 남자는 정말로 큰 곰처럼 건장한 몸으로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이야, 실물이 더 아름다우시네요. 반가워요, 체이스 빌러입니다.”

“파파라치들이 쓰는 카메라는 정말 희한하죠? 빌러 씨도 실물이 더 낫네요.”

메이슨이 적당히 웃으며 손을 맞잡자 그는 살짝 놀란 얼굴을 하더니 남은 손을 저었다.

“아뇨, 정말. 진심으로 좀 의외인데요. 생각보다 너무 분위기가 좋아서 사실 꽤 놀란 상태입니다, 지금.”

그는 진심이라는 듯 가슴께에 손을 대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토니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헐떡거릴 정도의 대배우가 매너 좋게 건넨 립서비스에 메이슨은 그냥 웃었다. 이 헐리웃의 사근거리는 분위기에는 정말로 적응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아니, 와―…, 이거 정말―. 굉장히,”

그러나 체이스는 메이슨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한참 얼굴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립서비스가 아닌가? 메이슨이 살짝 미간을 구겼을 때 등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촬영장 앞에 핑크색 페라리에서 그야말로 눈에 확 띄는 빨간 머리칼의 미인이 차에서 내렸다.

“아……,”

메이슨의 손을 붙들고 있던 체이스가 조금 싫은 것처럼 얼굴을 굳혔고 그녀가 “체이스!” 하며 손을 흔들었다. 작게 한숨을 쉰 남자는 약간 텐션이 떨어진 어조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멜리사. 오늘은 일찍 왔네요.”

“어머, 늦게 온 건 저번 한 번뿐이잖아요?”

그녀는 메이슨과 토니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와 인사하며 헤프게 웃었다. 선글라스를 올려 쓰며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그제야 메이슨들을 봤는지 살짝 미간을 구기며 코를 쥐었다.

“어머, 어디서 걸레 냄새 나지 않아요?”

촬영장 꼴 하고는, 진짜. ―그녀가 짜증난다는 듯이 힐끗, 메이슨을 쳐다보더니 곧 그늘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저, 저, 저 년이…―,”

토니가 울컥 중얼거리다 체이스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막았고 그는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요, 헤일리. 그녀가 원래 좀…….”

체이스는 약간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뜨거운 태양 같던 남자의 주변에 구름이 낀 것처럼 어둠이 드리웠다. 인생이 아름답고 행복한 남자 같았는데 그녀에게서는 제법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었다.

별 신경 안 쓴다고 말하려는데, 천막 안쪽 가장 상석에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가 “체이스! 저기요!” 하고 그를 불렀다.

“이것 좀 봐줄래요?”

그녀가 대본을 흔들며 말했고 체이스는 싫은 것처럼 눈을 굴리다가 질질 끌려가듯 그녀에게 걸어갔다. 체이스는 그녀가 퍽 싫은 눈치였지만 티를 내지 못하는 예의바르고 선량한 성품을 타고난 듯 그녀가 묻는 시답잖은 것들을 성실히 설명했다.

“저 쌍년. 예전엔 네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던 게 영화 하나 대박 나서 조금 떴다고 아주―,”

토니가 그녀를 잘근잘근 씹을 것처럼 욕을 했고 메이슨은 “뭐 어때요.” 하고 무심하게 토니를 달랬다. 메이슨은 잠깐 돌아가는 상황을 살폈다. 이번엔 촬영 전에 시간이 넉넉해 조사도 하고 공부도 했더니 제법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감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더니 과연, 두루두루 한가한 얼굴로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메이슨은 지나가는 스태프에게 화장실을 물었다. 바로 옆 건물인데도 따라오겠다는 토니를 두고 화장실로 향했다.

등 뒤에서 “체이스, 저 걸레랑 말 섞지 마요. 조금만 상대해주면 온 세상 남자는 다 자길 좋아하는 줄 안다니까요?” 하는 멜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헤일리에게 남자친구라도 뺏긴 모양이지. 메이슨은 그러거나 말거나 화장실로 향했다. 공항에서 조느라 화장실에 못 들렸더니 좀 급했다.

“―….”

메이슨은 소변기 앞에 서서 물건을 꺼내 소변을 보았다. 졸졸졸, 기운 없이 뻗어나가는 소변을 쳐다보며 ‘피어싱을 빼긴 해야 되는데……. 피어싱 가게로 가야하나. 쪽팔리게 이걸 어떻게 빼달라고 하지.’ 하고 고민하던 메이슨은 문득, 등 뒤에서 시선을 느꼈다.

“…….”

남자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지다니. 메이슨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고 화장실 문 앞에 한 젊은 남자가 굳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

게이 포비아인가? 메이슨은 그를 향해 덮치지 않을 거라는 무심한 시선을 보낸 뒤 소변을 털어내고 지퍼를 올린 뒤 물을 내렸다. 남자는 메이슨이 소변을 마저 보고 옷차림을 정리하고 물을 내린 뒤 손을 씻는 동안 내내 뒤에서 희한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나한테 볼 일 있습니까?”

혹시 헤일리가 알던 사람인가? 메이슨은 무심한 얼굴로 물었고 남자는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볼 일은 없는데.”

볼 일은 없다고 말하며 남자는 더 노골적으로 메이슨을 위아래로 살피고 이쪽저쪽에서 쳐다보며 종국에는 눈을 가늘게 떴다. 메이슨은 그를 지나쳐 화장실을 나갔고 남자도 쫓아왔다.

“나 이제 남자랑 안 자요.”

메이슨은 등 뒤의 남자에게 말했다. 화장실에서 진득한 시선을 보내는 남자야 용건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잠깐 노아와 잤던 그 꿈이 떠올랐지만 얼굴에 드러나진 않았다.

등 뒤에서 쫓아오던 남자는 “그래? 나도 남자랑 안 자는데?” 하고 시시덕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잠깐 고민했던 메이슨은 대꾸하기도 귀찮아 남자를 내버려뒀다. 남자는 등 뒤에서 툭툭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운동 좀 했나 봐?”

“요즘 피부 관리해?”

“코디 바꿨어?”

“보톡스?” “성형?”

“아. 코를 새로 한 건가?”

메이슨은 대답 대신 귀를 후비며 촬영장으로 돌아왔다. 이 또라이 새끼를 어떻게 떼어낼까 고민하는데 글로리아가 달려왔다.

“어머, 두 사람 벌써 만나셨나 봐요?”

제가 소개해 드리려고 했는데. 그녀의 말에 메이슨이 남자를 돌아봤다. 소개를 한다고? 메이슨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시선에 남자는 히죽, 자유분방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팬이라더니, 감독님을 만난 소감은 어때요?”

글로리아가 메이슨에게 물었고 메이슨은 “아.” 하고 작게 신음했다. 남자, 빅 프록터는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 * *

빅 프록터. 그는 작년과 재작년, 2년 연속 헐리웃의 수많은 영화제의 감독상을 비롯, 쓸 만한 상은 모조리 싹쓸이 해버린 욕심 많고 재능 넘치는 젊은 영화감독이었다. 엄청난 흥행 기록을 줄줄이 세우더니 또 자신의 작품으로 그 기록을 줄줄이 깨버린, 최근 헐리웃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감독이었다.

그의 올해의 영화로 기대와 시선을 한 몸에 모으고 있는 영화 리얼은 액션 스릴러물로, MIT를 졸업했지만 방구석에 폐인처럼 살던 한 천재 긱Geek이 우연히 비밀 기관의 특급 정보를 건드렸다가 쫓기게 되는 일견, 흔한 스토리의 영화였다. 메이슨이 맡은 역할은 그 주인공을 살해하려는 음침한 킬러 역이었다.

총도 제대로 쏴 본 적도 없는 너드에게 당하는 킬러라. 메이슨은 제목은 ‘리얼’ 인데 현실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고 생각했다.

“감독을 화장실에서 만났다고?”

토니는 눈을 회전등마냥 뜨고 물었다.

“인사는 잘했어? 뭐라고 했어?”

메이슨은 기대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토니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다 솔직하게 말했다.

“……남자랑 안 잔다고 했는데요.”

“뭐, 뭐? 그런 말을 왜 했어?”

토니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고 메이슨도 작게 신음했다.

“그냥……. 저도 몰라요.”

메이슨은 물음표로 가득 찬 토니의 눈을 외면하며 힐끗, 체이스와 감독이 대본을 살피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쳐다봤다.

엄청난 흥행 기록을 연달아 세우는 감독이라기에 나이가 지긋할 거라 생각한 게 실수였다. 감독은 노아 또래나 될까. 서른이나 먹었을까 싶을 정도로 젊었고 또 독특했다.

“어이, 헤일리!”

체이스와 뭔가를 이야기를 하던 감독이 메이슨을 불렀다. 토니가 메이슨을 데리고 감독에게 헐레벌떡 달려갔다.

“야. 여기, 이거 들고 폼 좀 잡아봐.”

“…….”

메이슨은 남자가 던진 총 한 자루를 받아들고 쳐다봤다. 데져트 이글Desert eagle. 손에 잡히는 무게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살짝 가벼웠다. 모델건인가. 총을 들고 폼을 잡으라니, 별걸 다 시키네 싶었다. 물론 오만 달러를 생각하면 이 정도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지만.

메이슨은 가볍게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장전한 뒤 양손으로 아무데나 총을 겨눴다. 우와. 메이슨의 절도 있는 동작에 체이스가 살짝 놀란 듯 탄성을 뱉었다.

“오……. 연습했어? 장전하는 손놀림이 괜찮은데? 한 손으로 당겨봐.”

감독은 건들대며 말했고 총을 내린 메이슨은 “이건 한 손으로 못 쏘는데요.” 하고 미간을 구겼다.

“왜 못 쏴?”

말이라고 하나. 데져트 이글 따위를 한 손으로 쐈다가 어깨가 나간다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 아닌가. 아니, 일반인들 사이에선 상식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총이 나오는 영화라면 어느 정도 공부는 해야 하지 않나. 메이슨이 대답을 하지 않고 쳐다보자 감독도 모르진 않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

“현실성 따위 뭐 어때, 진짜 총도 아닌데. 빨리 한 손으로 겨눠봐.”

뭐, 그런 건 안 돼? 입으로 물고 장전한다던가. 감독은 시시덕대며 말했고 메이슨은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한 손으로 잡은 총으로 그의 머리로 겨눴다.

툭. 그의 머리에 총구가 닿았고 메이슨은 물었다.

“이렇게요?”

맹한 척 묻자 감독은 멈칫했고 토니가 달려와 메이슨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야, 무슨,” ―죄송하다고 사과하려는 토니를 제지시킨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똑바로 말고 손을 좀 꺾어봐. 그래, 옆으로.”

감독은 메이슨에게 총을 가로로 잡고 쏘라고 말했다.

“……. …….”

이렇게 쏘면 반탄력 때문에 영점도 안 맞고 손목이 얼굴로 날아간다고! 메이슨은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시키는 대로 그냥 겨눴다. 모델건이 아닌 진짜 총을 들었는데 이 짓을 시켰으면 진짜 쏴버렸을지도 몰랐다.

“흠. 흠.”

감독은 메이슨이 총을 든 모습을 보고 히죽거렸다. 체이스가 옆에서 “총 좀 만져봤나 봐요, 헤일리?” 하고 정말로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다행히 나쁘지 않나보네요.”

메이슨은 표정이 썩는 것을 감추며 웃었다. 이런 비현실적인 폼을 보고도 총 좀 만져봤냐는 소리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체이스는 참 대단한 것 같았다. 감독은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더니 다시 말했다.

“헤일리, 그거 다시 두 손으로 잡아봐. 표적은……, 저기.”

메이슨은 오른손으로 총을 쥐고 왼손으로 뒤를 받친 뒤 그가 가리킨 표적,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덥다고 짜증을 부리고 있는 멜리사를 겨눴다. 감독은 당장에라도 쏴버려, 하고 말하고 싶어 입이 간질간질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희한하네. 왠지 이쪽이 더 리얼하고 박력 있는데?”

감독은 두 손으로 잡고 표적까지 제대로 잡자 한결 날카로워진 그의 분위기에 감탄했다.

“근데 이런 장면이 나옵니까?”

대본에서 이런 건 못 본 것 같은데. 대체 무슨 리허설이지 싶어 묻자 감독은 “아니, 그냥 시켜봤어.” 하고 웃었다.

메이슨은 “…―그러세요?” 하며 마주 웃었다. 뭐지, 이 새끼. 메이슨은 그에게서 Zii의 상사였던 또라이 베레타의 향기를 진하게 느꼈다.

“진짜는 이쪽. ――어이!”

감독은 소품 쪽을 향해 누군가를 불렀다. 한 남자가 커다란 가방 하나를 이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지금 시작하면 됩니까?”

가방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남자는 땀을 닦으며 물었고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얘한테 그거, 조립하는 걸 알려줘.”

“예?”

“바스트까지 한꺼번에 찍고 싶어졌어.”

생각보다 모델이 괜찮아서 말이야. ―감독의 말에 남자는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고 메이슨도 남자가 내려놓은 건 케이스에 헛웃음을 지었다.

“촬영에 진짜 총을 써요?”

“뭐 어때? 사람에게 겨누는 것도 아닌데. 진짜랑 가짜는 쥔 사람의 날카로움이 다르다고.”

감독은 싱글싱글 무신경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해? 안 가르치고.” 감독의 말에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이건 권총처럼 일반인이 금세 따라 조립할 수 있는 총이 아닙니다. 저격총이라는 건 굉장히 예민한 거라구요.”

어지간해서는 분해, 조립도 하지 않는 게 상식이라고 항의하는 남자에게 감독은 손을 내저었다. 그는 글로리아와 조감독들을 불러 촬영 준비를 시키며 남자에게 말했다.

“어차피 너도 좀 더 아는 것뿐이지 일반인이잖아? 군대 갔다 왔어? ―잔말 하지 말고 가르쳐. 아무리 봐도 이쪽이 더 샷이 예쁘다고.”

감독이 메이슨을 향해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화면을 자르듯이 대보며 말했다. 남자는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감독은 손을 내저어 그의 말을 잘랐다. 현장은 순식간에 움직였다.

“아 저 또라이새끼가―,”

덜렁 메이슨과 남은 남자는 욕설을 씹어뱉더니 이게 될 리가 있나, 하는 얼굴로 메이슨을 쳐다봤다.

“총 만져본 적 있어요? 촬영할 때 쓰는 모델 건 말고 진짜 총.”

남자는 거들먹대며 말했고 메이슨은 쓰게 웃으며 남자가 내려놓은 총 가방을 쳐다봤다.

“……글쎄요. 제가 총 만질 일이 뭐가 있겠어요.”

블레이져 MOD 93 LRS2 택티컬. 남자가 내려놓은 가방 안에서 나온 총의 이름이었다.

“이게 블레이져 사에서 나온 MOD LRS2 93 택티컬이에요. 혹시 본 적 있어요? 영화에 제법 많이 나왔는데.”

“총은 다 비슷비슷해 보여서요.”

적당히 대답하자 남자는 그럼 그렇지, 하는 투로 한숨을 쉬었다.

블레이져 MOD 93 LRS2 택티컬. 유효사격거리 900m, 스코프를 단 중량 5.45Kg. 스트레이트 풀식 볼트액션 저격총이었다. 제법 괜찮은 총이었지만 솔직히 잘 쓰이는 놈은 아니었다. 묘하게 생겨서 약간 불편하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메이슨의 경우에는 어땠냐면, ―그는 제법 좋아했다. 조준에 섬세한 편도 아니었고 높은 안전성에 명중률도 저만하면 쏠쏠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 운동이라고는 방에서 마우스를 까딱이는 것 외에는 전혀 하지 않았던 너드 한 마리 죽이기에는 참 과분한 총이었다.

남자는 총 조립을 가르치는 내내 자신이 아는 총 지식에 대해 떠벌거렸다. 러스크 씨는 이런 거 잘 모르죠? 남자는 총에 관한 이야기하나가 끝날 때마다 그렇게 지껄였다.

메이슨은 인내심 있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세월아 네월아 총을 조립하는 것도 인내할 수 있었다. 손놀림이 서툴러서 쥐고 있는 부품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세상에 이렇게 쉽게 오만 달러를 벌 수 있다니. 메이슨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길게 하품을 했다.

“――잘 알겠죠?”

총을 들고 씨름한 지 4, 5분쯤 지났을까. 이마에 줄줄 난 땀을 닦으며 남자가 물었고 메이슨은 “알 것 같기도 하네요.” 하고 웃었다. 그는 너 따위가 알긴 뭘 아냐는 듯한 눈으로 흘기더니 말했다.

“다시 한 번 보세요. 다시 분해해 드릴 테니까.”

남자는 다시 또 땀을 뻘뻘 흘리며 총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내 부하가 저러고 있었으면 진짜 뒤통수에 구멍이 나도록 갈겼을 텐데. 물론 저런 놈은 Zii 입단 시험에서 이미 탈락이었지만.

메이슨은 남자가 다시 땀을 뻘뻘 흘리며 총을 분해하는 동안 주변을 돌아봤다. 마침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멜리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더니 “어머, 저기 준비 다 끝났나 보네요? 촬영 빨리 시작하죠?”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 아뇨, 잠깐, 아직 한 번밖에 안 보여드렸는데,”

총을 가르쳐 주던 소품 담당이 당황했지만 심심한 얼굴로 주변을 얼쩡얼쩡 하며 시간을 보내던 감독이 신나서 달려왔다. 그는 어린애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벌써 다 배웠어? 이야, 헤일리. ―어때? 할 수 있을 것 같아?”

“글쎄요. 아직 잘……. 금세 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메이슨은 뜸을 들이며 말했고 감독은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그…래? ……촬영이 길어지겠네.”

감독의 말에 주변을 돌아다니던 글로리아가 힐끗 이쪽을 보더니 토니를 찾았다.

“토니? 호텔 잡았어요? 지금 당장 잡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메이슨을 위한 음료수를 아이스박스에 넣던 토니가 “그래요?” 하며 대수롭지 않게 휴대폰을 꺼냈고 메이슨은 번쩍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일단 한 번 해볼게요.”

하루면 끝낼 수 있는 일을 이틀이나 한다는 건 아무래도 손해 같았다. 메이슨이 손을 들고 말하자 감독은 화색을 띠었고 소품담당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한 번 봐서는 못한다니까요?”

“저도 잘 못 할 것 같기는 한데……, 워낙 잘 설명해주셔서 대충 기억은 나는 것 같아요.”

메이슨은 어떻게 해야 적절히 괜찮게 하는 초보처럼 보일지 고민하며 말했다. 이런 걸 너무 잘해버리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두어 번 실수해 주면 되려나. 물론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해봐야 별일 있겠냐마는 괜히 눈에 띄어 좋을 건 없었다.

“필름 아까운 짓을 하는군.”

선글라스를 올려 쓰며 걸어온 멜리사가 말했고 소품담당은 동의한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촬영은 근처 건물의 옥상에서였다. 준비는 진즉에 다 되어 있었기 때문에 메이슨은 금세 카메라 앞에 서게 됐다.

“일단 한 번 리허설부터 갑니다.”

감독 의자에 앉은 그가 대본을 쥐고 말했다. 팔랑거리는 또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앉아있는 것을 보니 제법 그럴싸했다.

“자, 그럼 총을 조립한 다음에 거기 그거, 조준하는 것처럼 보다가 탕! 한 발만 저쪽으로 쏘는 거야.”

저기 과녁 보이지? 그가 물었고 메이슨은 감독이 가리킨 스코프를 쳐다보다가 “진짜 쏩니까?”하고 되물었다.

“본 촬영에서는 진짜 쏴야지.”

그는 좋은 장면을 위해선 그런 걸 다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슨은 살짝 한숨을 쉬고 그들 앞에서 총을 조립했다.

잘하는 걸 못하는 척하는 건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메이슨은 괜히 더듬는 척을 했고 옆에서 소품 담당이 중얼중얼 부품의 순서를 읊어줬다.

지루해 죽겠네. 메이슨은 어설프게 총을 조립해 한참만에 스코프를 들여다보며 가늠좌로 영점 조절을 한 뒤 당기는 시늉을 했다.

고개를 들자 감독이 영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거…… 좀 빠르게 안 되나?”

그거밖에 못해? 감독은 실망스러운 것처럼 말했고 옆에서 멜리사가 “감독님. 쟤 누군지 몰라요? 헤일리 러스크예요. 그냥 나눠서 찍지 그래요?” 하고 깐죽댔다.

“남자랑 자는 거라면 누구보다 빨리 해낼 수 있을 텐데. 안 그래?”

그녀가 헤프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고 메이슨은 힐끗 그녀를 쳐다봤다.

“어머, 저 표독스럽게 쳐다보는 것 좀 봐.”

메이슨의 덤덤한 눈을 보며 호들갑을 떠는 그녀의 말에 주변 모두가 난감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예쁘고 가슴도 컸지만 촬영장에 있는 모두가 그녀를 싫어하고 있었다. 어지간하게 성격이 나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메이슨은 적당히 그녀를 무시한 채 감독을 향해 물었다.

“한 번 더 할까요?”

감독은 조금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일단 두어 번만 더 해보고 정 안될 것 같으면 손과 얼굴, 따로 가지.”

감독의 말에 멜리사는 히죽히죽 웃으며 “시간 낭비라니까요.”하고 깐죽댔다. 주변 모두가 저렇게 싫어하는 얼굴인데 혼자만 모르고 있다는 게 좀 불쌍할 지경이었다. 헤일리도 좀 저런 이미지였는데 이쪽도 만만치 않았다.

메이슨은 소품담당이 땀을 뻘뻘 흘리며 해체해 준 총을 한 번 더 조립했다. 아까보다 약간 더 빠르게 했는데 감독은 여전히 못 미더운 얼굴이었고 한 번 더를 외쳤다.

탁, 탁, 탁. 메이슨은 이전보다는 좀 더 빠르게 총을 조립했다. 이 정도면 아마추어들로서는 괜찮지 않나 생각했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감독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메이슨이 채 뭐라고 하기도 전에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다시 한 번 하라는 듯이.

살짝 얼굴을 구긴 메이슨이 조금 더 빨리 네 번째로 총을 조립하고 고개를 들자 감독은 약간 구겨진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

“……더 빨리 해요?”

메이슨이 눈치를 살피며 묻자 감독은 눈을 깜빡이더니 “그래. 더 빨리.” 하고 말했다. 메이슨은 대체, 잘하는 아마추어의 선이 어디까지인가 고민하며 툭툭툭 총을 분해해 내려놓다 멈칫 고개를 들었다.

“…….”

자신도 모르게 총을 빠르게 분해했던 메이슨은 조용해진 주변을 그제야 깨닫고 신음을 삼켰다. 모두가 ‘저 새끼, 대체 뭐야?’ 하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소품담당의 경우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 있었다. 멜리사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체이스가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감독이 혼자 열 오른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헤일리. ―더 빨리.”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메이슨은 묵묵히 그를 쳐다보다가 뺨을 긁적인 뒤 고개를 숙이고 다시 총을 조립했다. 툭툭, 총열, 탄창, 손잡이, 델타링, 상부 리시버, 고정핀, 상부 덮개, 하부 리시버…, 순서대로 조립을 마치고 창밖을 향해 영점 조절까지 한 그가 고개를 들려 하자, 감독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대로 당겨.”

방아쇠를 당겨. 감독의 말에 메이슨은 습관처럼 깊게 숨을 들이쉬고 참으며 총을 조준했다. 방아쇠를 당기라니. 촬영이 시작되었다면 거리를 차단했겠지만 아직 리허설 중이었다. 거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미간을 구겼고 그때였다.

저격 렌즈 안으로 새 한 마리가 지나갔고 메이슨은 홀린 것처럼 방아쇠를 당겼다.

탕――!

퍼드득, 새가 약간의 깃털을 떨구며 더 높이 날아갔고 메이슨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자 묘한 얼굴을 하고 있는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가늘게 눈을 뜬 그가 흠, 하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컷―!”

컷? 그의 말에 좀 더 고개를 들자 카메라 뒤에 있던 스태프들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이 잡은 카메라에 언제부터인가 빨간불이 들어와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건 그때였다.

* * *

“저 감독 좀…… 기분 나쁜 것 같아요.”

메이슨의 중얼거림에 토니는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응?” 하고 고개를 들었다.

“왜? 난 좋던데. 특이하고 멋있지 않아?”

“멋있어요?”

메이슨은 그거야말로 기분 나쁘다는 듯이 쳐다봤다.

“완전 천재잖아. 스물두 살 때부터 찍은 영화마다 줄줄이 대박. ―약간 괴짜긴 하지만 원래 천재들은 좀…, 일반 사람들이랑 다른 구석이 있지.”

그 점이 또 멋지다는 듯이 토니는 멀리서 다른 장면을 찍고 있는 감독을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봤다. 아까도 느꼈지만 그는 빅 프록터 감독의 대단한 팬인 모양이었다.

아깐 좀 미쳤었다. 목표도 없이 총을 겨누는 시간 남는 짓은 해본 적이 없어서 저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지만, 사실 업무 중에 그런 실없는 짓을 했다면 동료들에게 엔간히 눈총을 받았을 터였다.

계속 이런 멍청한 짓을 하게 되는 건가. 아론 놈에게 그렇게 맞아 죽긴 했지만 원래는 그리 쉽게 방심하는 타입이 아니었는데 헤일리로 살면서, 그리고 그 카메라라는 놈 앞에 서면 유독 내면의 뭔가를 해체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

아마 카메라가 낯설어 드는 착각이겠지만. 메이슨은 힐끗,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카메라들을 기분 나쁘게 쳐다보며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헤일리,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불쑥 들린 목소리에 돌아보자 체이스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총을 들고 다가와 있었다. 메이슨은 샌드위치를 씹으며 물었다.

“예?”

“아, 식사 중이셨군요. 샌드위치 맛있어요?”

“드실래요? 점심을 드신 것 같기에.”

메이슨은 토니가 넉넉히 사온 샌드위치를 가리키며 물었고 체이스는 넉살 좋게 이를 드러내 웃으며 “하나 주십시오.” 하고 옆 자리에 걸터앉았다. 토니가 “이, 이따위 것을 드신다구요? 그러셔도 괜찮으세요?” 하며 더듬거렸다. 메이슨은 피식 웃으며 ‘이따위’ 샌드위치를 입에 넣었고 체이스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이따위라니, 여기 헤일리 씨도 드시고 있는걸요.”

“아, 아뇨, 그런 이야기가 아닌데.”

토니는 헤일리의 눈치도 살피고 팬심도 표현하고 싶어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고 메이슨은 불쌍한 그에게 “차가운 콜라 좀 갖다 주세요, 토니.” 하고 체이스를 멀리서 바라볼 기회를 건넸다.

“자, 잠깐만 기다려. 금세 갖다 줄게.”

토니는 단비를 만난 양 벌떡 일어나 아이스박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메이슨은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스박스를 뒤지는 그를 쳐다보다가 빤한 시선에 돌아봤다. 체이스가 쳐다보고 있었다.

“―드시죠?”

메이슨이 덤덤히 샌드위치를 다시 내밀자 체이스는 뭔가 감탄한 얼굴로 쳐다봤다.

“헤일리 씨는 알려진 것과 이미지가 정말, 정말로 많이 다르군요.”

“그래요?”

메이슨은 무심하게 대꾸했고 그는 감탄과 호감을 잔뜩 드러낸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예. 아니, 사실은 정말로 편견이 좀 있었거든요. 실례인 이야기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그런 찌라시들은 원래 기사 대신 소설을 써내려가니까 설마 그렇게까지 난잡한 사람일까 싶으면서도 내심, 조금쯤은……, 하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실제로 보니 완전히 다른 사람 같습니다.”

“아니 뭐, 실제로는 조금쯤은 그런 사람이죠.”

메이슨은 겸양처럼 말했지만 사실 토니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헤일리의 기사 대부분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대부분 사실이라고 했다. 소설을 써갈겨 팔아먹던 황색지의 엉망인 신뢰도와 ‘아무리 헤일리라도 그렇지, 걔도 사람인데 이런 짓을 하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이미 매장 됐을 거라고.

“아뇨, 정말. 이렇게 단아하고 매력적인 분일 거라고는 솔직히,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배려도 많으시고 참을성도……, 외모도 물론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시지만 분위기가 정말,”

“저기요?”

찬양을 늘어놓는 그의 말을 끊으며 메이슨은 어색하게 웃었고 그는 “정말 환상적입니다.” 하고 기어코 오글거리는 말을 맺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근데 오해가 좀 있으신 것 같은데……,”

“아뇨, 저는 제 직감을 믿습니다. 당신은 분명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멋있는 분인 게 틀림없어요. 아까 촬영 때도 박수를 치고 싶은 것을 참느라 혼났는걸요. ―혹시 따로 배우셨습니까?”

그가 은밀하게 묻는 것에 메이슨은 샌드위치를 씹으며 대답을 피했다.

“총 다루시는 솜씨가……, 지금 제 사격 코치가 퇴역 군인이었는데 그보다 당신이 나은 것 같았을 정돕니다.”

그는 들뜬 눈으로 말했고 메이슨은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그야 자신은 한 달 전까지 현역이었으니 퇴역보다 나은 게 당연했다. 적당히 잘하는 아마추어처럼 하고 싶었는데 그 감독 놈이 은근슬쩍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사람을 태워서 저도 모르게 손이 움직이고 말았다. 그리 큰 리스크가 있는 짓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건 실수였다.

메이슨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랬어요? 제가 소질이 좀 있나보네요.” 하고 농담처럼 말했다.

“정말 안 배우셨어요? 진짜 그런 거라면 정식으로 배워보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제 코치를 소개해드릴 테니까―,”

바짝 다가오며 부담스러운 제안을 하는 그에게 거절을 뱉으려는 순간, 머리 위에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새큼한 향이 그를 덮쳤다.

촤아악―!

메이슨은 저도 모르게 몸을 피하며 일어났지만 머리 위에서 쏟아진 물이 더 빨랐다. 얼굴부터 목덜미까지 완전히 흠뻑 젖은 메이슨은 살짝 따가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어머? 이걸 어쩌나?”

뒤에서 멜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는 듯한 얼굴로 컵을 흔들며 서있었다. 메이슨은 살짝 혀를 내어 떨어진 물맛을 봤다. 냄새가 지독하게 새큼달큼하다 싶더니 레모네이드인 모양이었다.

“지나가다 냄새가 나기에 걸레인 줄 알고 부었더니―, ……걸레가 맞네? 미안할 일은 아니라서 다행이야.”

그녀가 입을 가리고 호호 웃으며 말했다. 체이스가 “멜리사 이게 무슨,” 하고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찍한 곳에서 체이스를 팬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토니도 “리스!!! 리스!!!” 하고 달려왔다.

“대체 이게 무슨 어린애 같은 짓입니까?”

“저한테 지금 소리 지르신 거예요?”

체이스가 화를 내자 그녀가 울먹이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는 가증스러운 그녀의 얼굴에 당장에라도 화를 낼 것 같은 얼굴을 했지만 그러기엔 진중하고 올곧은 성품이 가로막는 듯 화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거기―! 무슨 일이야?”

좀 전의 소란으로 잠시 촬영이 멈췄는지 멀리서 감독이 쳐다보고 있었다. 메이슨은 “별것 아닙니다.” 손을 내저어 말하고 멜리사를 돌아봤다. 그녀는 메이슨의 무표정한 얼굴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흥, 왜? 감독이 널 맘에 들어 하는 것 같던데, 가서 좆이라도 빨면서 날 자르라고 말해보지 그래?”

“메, 멜리사!”

점잖은 체이스가 그녀의 노골적이고 천박한 단어 선정에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붙잡았지만 멜리사는 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왜요? 당신도 이 걸레에게 푹 빠졌어요? 아까 내가 사온 도시락을 권했을 때는 배가 부르다더니 잘도 여기서 저런 싸구려를 먹고 있질 않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정말 기가 막혀서―!”

내가 이 걸레보다 못한 게 뭐야? 그녀는 그런 얼굴로 메이슨을 돌아봤다. 메이슨은 그녀의 큰 가슴을 잠시 쳐다보다가 말했다.

“멜리사.”

그녀가 네가 할 말이 있냐는 듯한 얼굴로 노려봤다. 메이슨은 천천히 손등으로 물기를 훔치다가 말했다.

“너도 은연중에 느끼고 있겠지만, 사람들은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널 싫어하는 거야.”

몰랐다면 넌 정말 병신이고. …설마 몰랐던 건 아니지? ―메이슨의 말에 그녀는 “뭐, 뭐라고?” 하고 새빨개진 얼굴로 되물었다. 메이슨은 다시 말해주는 대신 그녀에게 안쓰러움을 가득 담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돌아서 화장실로 향했다.

곧 등 뒤에서 욕설 섞인 괴성이 들렸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 * *

“아, 진짜….”

사실 외모는 어딘지 모르게 줄리아를 닮아서 좀 취향이었는데, 성질이 그렇게까지 표독스러울 줄이야. 등 뒤에서 들려오던 멜리사의 쌍욕은 밑바닥에서 평생을 살았던 메이슨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로 참신하고 찰졌다.

토니는 메이슨이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떠난 촬영장에서 일을 수습하는 건지 어쩐지 따라오지 않았다. 사실 레모네이드를 사람 얼굴에 부은 것보다야 덜한 짓이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지랄 발광을 할 걸 알면서 한 말이긴 했다. 뭐, 일이 잘못 돼도 오만 달러를 못 받는 것뿐이니까. 메이슨은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하고 쉽게 생각을 마무리하며 젖은 옷을 팔락거리며 닦았다.

대체로 얼굴에 맞은 터라 옷이 많이 젖지는 않았는데 시럽을 얼마나 넣었는지 달달하고 끈끈한 감이 사라지질 않았다.

“츠.”

메이슨은 잠깐 고민하다가 옷을 벗어 레모네이드가 튄 부분을 비누로 주물주물 빨았다. 꾹 짜서 물기를 제거하고 탈탈 턴 뒤 옷을 입자 서늘하고 축축하긴 했지만 오히려 끈적한 것보다는 나았다. 어차피 볕이 좋으니 금세 마를 거고 좀 더운 감이 있었는데 차라리 시원했다.

메이슨은 젖은 손을 무릎에 탁탁 털어 닦고 화장실을 나섰다.

건물을 나온 그는 슬슬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멜리사가 아직도 씩씩대며 흥분해 있을 텐데 바로 촬영장으로 돌아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글로리아가 일러준 다음 씬까지는 시간도 많았고. 그리고…….

그는 목깃을 팔락거리며 눈만 굴려 주변을 살폈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근처까지 왔으니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Zii 놈들이 주변을 탐색하고 있을까 싶었는데 약간의 흔적이 보이긴 했다. 자신의 아파트 건너편 건물 창에 햇빛에 반사 되어 반짝이는 렌즈 구멍이라든가 건물 앞 꽃집 입구에 놓인 화분에 심어진 카메라 같은 것들이었다. 사용된 제품이 Zii에서 즐겨 쓰던 것들이 아니긴 했지만 여하간 여전히 그들은 자신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쯔…….”

메이슨은 낮게 혀를 찼다. 아직도 아론의 흔적을 못 잡은 모양이지. 아론이 살아 있다는 흔적만 찾는다면 알타의 벙커 안에서 뭉개진 채 발견된 시신이 자신의 것이라는 추론은 어린애도 할 수 있었다.

“아니 뭐 사실 알 바 아니긴 하지만….”

어차피 완전히 남 일이긴 했지만 그냥 뺑이 치고 있을 동료들에게 동정심이 생기는 건 사실이었다. 멍청한 새끼들. 머리가 나쁘면 몸을 더 굴려야 한다고 매번 말했는데도 여전했다. 물론 약간은 집에 흔적을 남겨 버린 자신의 탓이기도 했지만 뭐.

해가 워낙 좋아 옷은 금방 말랐다. 새콤한 향기는 계속해 남아 있었지만 기분은 오히려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슬슬 촬영장으로 돌아가 볼까. 시계를 확인한 메이슨이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왠지 모르게 거슬리는 기분이 힐끗, 길 건너를 쳐다본 메이슨은 그대로 멈춰 서 눈을 비볐다.

“아니 저 남자가 왜 또 저기에…….”

메이슨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길 건너에 메이슨의 눈에 퍽 익숙한 남자가 거칠어 보이는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노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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