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메이슨은 세상 참 좁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가는 곳마다 저 남자가 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 달 새 벌써 몇 번이나 정말 의외의 장소에서 그를 마주치고 있었다.
차라리 베벌리힐스 안에서 봤다면 또 모르겠다. 혹시 노아가 이 근처를 자주 오갈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런 것치고는 바로 앞 아파트에서 십여 년간 사는 동안에는 그를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
메이슨은 남자를 잠깐 쳐다보다가 “아냐, 그냥 신경 끄자.” 하고 중얼거렸다. 괜히 아는 척 해봐야 특유의 쌀쌀맞은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나가면 아는 척 안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라고 할 남자였다.
노아는 그 작던 일곱 살 어린애도 아니었고 위태롭던 열일곱 살 소년도 아니었다. 앞에 그를 둘러싸고 있는 놈들이 좀 위험해 보이기는 했지만 놈들도 설마, ‘그 레이칼튼’을 건드리진 못할 거고 돈이나 좀 구걸할 생각이겠지 싶었다. 어차피 돈이라면 수영장에 쏟아놓고 그 안에서 수영도 할 수 있을 만큼 넘치는 남자니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 생각했다.
“헉……,”
그러나 메이슨은 바로 그다음 순간 숨을 삼켰다. 메이슨은 자신이 길거리 강도 놈들을 우습게 봤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들 중 하나가 품에서 총을 꺼내 노아에게 겨눴기 때문이었다.
* * *
영화 리얼의 감독 빅 프록터는 먹먹한 귀를 후비며 “그래, 그래. 걔가 심했지.” 하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멜리사 아인은 최근 헐리웃에서 가장 핫한 여배우 중 한 명이었다. 얼마 전 방영이 끝난 드라마에서 귀가 안 들리는 초능력자 역을 맡은 그녀는 벌써 제법 큼직한 CF를 다섯 개나 찍었을 정도로 잘나갔다. 배역 빨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대단한 설정을 몰아 줘도 그걸 살리지 못해 사라지는 배우가 모래알처럼 많은 곳이 또- 헐리웃이었다. 배역 빨이든 어쨌든 기회를 잡고 그녀는 핫한 여배우로 뛰어올랐다. 이걸 얼마나 유지하느냐는 그녀의 몫이겠지만 여하간 현재 핫한 만큼 그녀를 찾는 곳은 수도 없이 많았다.
빅은 제작사가 추천한 몇 명의 여배우 중에 그녀를 픽업했다. 나쁘지 않았고 적당히 이미지에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여배우가 그렇게 중요한 영화도 아니었다. 빅은 적당히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고 적당한 장면을 뽑아내면 그뿐이었다.
딱히 그녀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적으로는 싫어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이건 일이었고 그는 프로였다. 그녀가 좋은 장면을 주기만 한다면 그녀가 살인자여도 상관없었다. 성격이 나쁜 여배우는 수도 없이 많았고 성격이 좋은 여배우는 가뭄에 콩 나듯 한두 명쯤 있었다. 하지만 빅이 그 가뭄에 난 콩 같은 성격 좋은 배우들을 캐스팅 하는 건 아니었다.
배우가 성격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걸레든 정키든 쓰레기든 광인이든, 카메라 파인더 안에서 반짝거리기만 한다면 빅은 누구든 기꺼이 찍을 수 있었다.
문제는 사실 그녀가 그렇게까지 반짝거리지 않는다는 데 있었지만.
여하간 촬영장에 있는 모두가 그런 식이었다. 헐리웃 스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밝고 올곧은 성품의 체이스는 그녀에게 비호감을 느끼다 못해 진절머리를 냈지만 촬영장 분위기를 망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녀의 징징거림을 모두 받아주고 있었다. 스태프들은 스태프대로 티 나지 않게 그녀를 피하거나 따돌리고 은연중에 무시했다.
그걸 모르는 건 하룻밤 사이 신데렐라처럼 붕 떠버려 자아도취로 이성을 잃은 그녀 하나뿐이었다.
‘날 좋아하는 게 아니고 널 싫어하는 거야. 몰랐다면 넌 정말 병신이고. …설마 몰랐던 건 아니지?’
헤일리가 덤덤한 얼굴로 물었을 때, 의자에서 일어나 그쪽을 기웃거리던 빅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 크게 웃음을 터뜨린 나머지 모두가 그를 쳐다볼 때까지 웃어버렸다.
“흑…, 감독님도, 흑, 정말 그렇게, 흑, 흑, 그 걸레, 으흐으흐윽……,”
“응? 뭐라고?”
빅은 못 알아들은 척 되물었고 그녀는 허어엉, 하는 울음을 삼키며 히끅대고 말했다.
“감독님도―, 감독님도 그 걸레가 더 좋은 거죠?”
“응? 나 말야?”
“그러니 그렇게, 웃어버리고, 흐으윽,”
그녀가 서러워 죽겠다는 듯이 헐떡이며 말했고 빅은 하도 웃어서 경련이 다 일 지경인 뺨을 문질렀다.
헤일리를 캐스팅한 건 사실 빅의 의지는 아니었다. 몇 주 전 영화의 최대 스폰서가 깡패처럼 배역 하나를 내놓으라고 했고 빅은 약간 반항하다 어떤 무명배우가 해도 상관없는 단역 하나를 던져주었다. 그리고서 다음날, 캐스팅 된 것이 헤일리 러스크라는 이야기를 글로리아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빅은 제법 놀랐다.
헤일리 러스크? 빅도 물론 그를 알고 있었다. 만나본 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빅이 즐겨보는 삼류 가십지에는 그의 소식들이 자주, 빈번하게 떴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기사들은 대체로 외설적이거나 멍청한 소식들이었고 빅은 늘 그의 기사를 보면서 ‘이야, 얜 진짜 어쩌려고 이러냐….’ 하고 혀를 차곤 했었다.
최근에 레이노아 사건과 자살 사건까지 더불어 빅은 가십지를 보며 ‘얘는 이제 진짜 끝장이네’하고 중얼거렸었다. 얼마 전에 실제로 십 년이나 한 드라마에서 짤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를 찍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걸레 이미지의 게이라니. 빅은 예술영화 감독이 아니라 대중영화 감독이었고 대중들은 그를 싫어했다. 빅 본인에게도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고.
단역이니 찍긴 찍어보자, 하고 생각하면서도 영 내키질 않았다. 자기 영화에 오물을 끼얹는다는 기분이 들어 솔직히 좀 불쾌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이미지로 킬러라니. 이건 뭐…, 영화를 우스갯거리로 만들려는 심산인가 싶어 예정된 촬영 날이 되자 촬영장에 나가기조차 싫었다.
느지막이 도저히 안 나갈 수 없는 시간이 되어서야 일어난 그는 촬영장에 도착해서도 바닥에 발을 비비며 뭉그적댔다. 문란한 게이에게 킬러역이라니. 차라리 다른 역이 없을까, 고민하며 화장실에 들른 그는 거기서 헤일리 러스크를 만났다.
실제로 만난 헤일리는……, 글쎄.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인물이었다. 프로필 사진이랍시고 보내왔던 몇 장의 사진은 솔직히 뒷골목에 가면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정키였다. 마르고 피폐하고, 눈은 동태처럼 흐려져 있고.
그러나 실제의 헤일리는 달랐다. 일단 조금의 운동을 한 것 같았고 피부도 묘하게 맑아 보였다. 운동과 피부관리. 거기까지는 알겠는데 그다음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성형을 한 건가? 보톡스를 맞았나? 필러? 몇 가지를 생각해봤지만 특별히 이목구비에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다.
대체 뭘 했는데 이렇게 분위기가 다르지? 빅은 이런 헤일리라면 단역 정도는 찍어볼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총이라고 하면 거시기밖에 안 떠오를 것 같던 남자였는데 의외로, 정말 의외로 그는 빅의 창작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 남자가 총을 들면 어떨까. 왠지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빅은 살짝 가슴이 두근대는 것을 느끼며 그를 불러 총을 들게 했다. 그리고 헤일리가 양손으로 총을 쥐고 멀찍한 곳에 총을 겨눴을 때.
‘맙소사, 감독님, 이건…….’
옆에 서있던 작은 목소리로 체이스가 말끝을 흐렸고 빅은 그가 흐린 말이 무언지 정확하게 이해했다.
이건, 달랐다. 정말로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세상에서 가장 총과 안 어울릴 것 같았던 그 남자는 총을 든 순간 완벽하게 프로페셔널 했다. 총을 든 팔의 각도, 시선, 턱의 방향, 그리고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지는 그 주변의 공기까지. 총을 들고 폼을 잡아보라고 하면 그게 마치 러블리한 소품이라도 되는 양 발랄한 포즈를 취하는 모델들과는 전혀 달랐다.
카메라 파인더로 보면 어떨까? 이 잘게 부서지는 반짝임이 카메라 안에서도 보일까? ―빅은 한시라도 빨리 그를 찍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스스로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약간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헤일리에게 총 조립 후 창 밖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부분까지 할 것을 주문했다. 사실 빅은 그럴듯한 장면이 나오면 정말로 총이 조립되고, 되지 않고는 상관없었다. 적당히 분위기만 살려주면 나머지는 편집으로 어떻게든 만들 수 있으니까 잘하는 척만 하라고 할 셈이었다.
그러나 총을 조립하는 헤일리의 손길은 처음부터 모두의 시선을 붙들었다. 약간 느리긴 해도 그건 분명 유려한 손길이었다. 더듬는 것 한 번 없이 꼼꼼하게 홈을 맞추고 나사를 채우고 부품들을 연결하고, 부품들이 총의 모습을 하기까지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았다. 빅은 은밀히 카메라를 켜도록 했다.
‘방아쇠를 당겨, 헤일리.’
그렇게 속삭였을 때는 그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탕―! 소음기 탓에 줄어든 총성이 방에 흘러들었을 때, 그곳에 있던 모두는 숨을 죽인 채 헤일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찍힌 영상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금, 기가 막힌 장면이 탄생했다는 것을.
헤일리에게 조금 더 비중이 있는 배역을 줬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침까지만 해도 걔는 엑스트라로도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빅은 아쉽게 생각했다.
사실 그 킬러는 전혀 중요한 역할이 아니었고, 그 대단한 장면은 아까우니 반드시 영화에 들어가겠지만 상당히 불쑥 튀어나온 장면이 될 터였다. 보는 눈 없는 멍청한 제작자들은 거길 쳐내자고 할지도 몰랐다. 거기가 이 영화의 유일한 볼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오후에 다른 장면을 찍으면서도 빅은 내내 ‘아쉽다, 아쉬워.’ 하고 생각했다. 자신이 찍고 싶었던 장면, 혹은 자신이 찍고 싶던 것 이상의 장면이 나왔는데 제대로 써먹을 수가 없다니, 이런 엿 같은 일이 있나 싶었다. 내내 그 생각을 하느라 촬영에 집중하고 있지 못하던 차에 촬영장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헤일리가 잔뜩 젖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었고 그 앞에 멜리사가, 그리고 그 옆엔 체이스가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일리에게 날카롭게 발톱을 세운 멜리사가 무슨 짓이든 할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했던 건 사실 그다음 헤일리의 반응이었다.
그는 화를 내거나 울거나 욕하지 않았다. 대신 일견 당연한 이야기를 뱉는 것처럼 ‘사람들은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너를 싫어해.’ 라고 충고했을 뿐이었다.
설마 너 병신이냐고 묻고 떠나는 헤일리의 뒷모습에 빅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배를 쥐고 웃었다. 극적인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남은 영화촬영을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웃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빅은 뒤늦게 약간 후회했지만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웃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흑, 도대체 어떻게 저한테 그런 말을――, 걘 단역이고 전 주인공이잖아요? 사람들이 날 싫어한다면 왜 날 주인공으로 쓰겠어요, 안 그래요?”
멜리사는 이젠 눈물도 안 나는 주제에 계속해서 서럽다는 듯 이야길 하고 있었다. 빅은 그래, 그래. 네가 짱이고 걘 별로야, 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해주고 있었다. 아, 이제 그만 도망가고 싶다. 체이스에게 슬쩍 시선을 건네 봤는데 그는 아까 일로 단단히 화가 났는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체이스도―, 어쩌면 그 걸레 편만 들고, 내가 서러운 게 당연하잖아요? 안 그래요 감독님?”
멜리사는 사실 체이스에게 제법 호감이 있었다. 체이스가 조금만 도와준다면 그녀를 좀 더 달래기 쉬울 텐데. 빅은 체이스에게 다시 한 번 눈길을 보냈다. 여기서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해달라는 시선이었지만 그는 사과 대신 휙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아이구, 머리야.
“흐―…, 으흐으윽, 감독니이임,”
다시 터지는 멜리사의 울음에 빅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빅도 그녀가 대단히 마음에 들어서 함께 영화를 찍고 있는 건 아니었는데 이런 짓까지 해야 되나 싶었다.
“그래그래. 다 이해하지. 체이스도 지금 살짝 부끄러워서 그렇지 화가 난 건 아니야. 조금 있다가 멜리사가 진정하면 체이스도 은근슬쩍 와서 사과를 하겠지. 알잖아, 체이스가 저래 봬도 부끄러움이 많은 남자라 하고 싶은 말을 솔직히 못하는 것뿐이라고.”
빅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줄줄 뱉으며 그녀를 달랬고 그녀가 눈물 콧물을 닦으며 말했다.
“나 진짜, 자존심 상하고 분해서 이대론 영화 못해요.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걔한테 레모네이드 좀 부은 게, 뭐? 걘 예전에 나한테 뭘 부었는지 알아요?”
그녀는 서러워 죽겠다는 듯이 훌쩍이며 헤일리 욕을 실컷 쏟아냈다. 아까도 그렇지 않냐, 분명히 어디선가 몇 날 며칠 연습해놓고 하나도 못하는 척하다가 여우처럼 그럴싸하게 움직이고. 그것만 봐도 소름끼치고 음험하다, 미친년이다, 한참이나 그를 씹던 그녀가 그 끝에 말했다.
“감독님 걔, 자르면 안 돼요?”
“응?”
“어차피 별로 중요한 역할도 아니잖아요? 누가 해도 다 똑같은 역이고, 응? 안 그래요? 내 에이전시에 괜찮은 신인 배우들 많은데 걔들 중에 하나가 해도 괜찮고―,”
여기서 적절한 대답은 ‘그럴까?’ 내지는 ‘그래 당연히 네 말대로 해야지.’였다. 하지만 빅은 저도 모르게 “응?” 하며 멈칫 말을 삼켰고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설마 감독님, 걔 자르는 거 싫으세요? 걔가 나오면 나는 이 영화 못한다니까요!”
“아 그게……,”
망설인 빅의 말에 그녀가 노한 얼굴로 “맙소사!” 하고 벌떡 일어났다.
“나예요, 걔예요? 선택 하세요! 걔가 그렇게 좋으면 걔 주연 시켜서 영화 찍던가!”
‘당연히 너지!’ 빅은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아, 헤일리 주연이라, 그거 괜찮은데.’ 하고 생각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빅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멜리사는 입술을 왈칵 깨물며 얼굴을 붉히더니 팩 돌아 “앨리!!!” 하고 매니저를 불렀다. 매니저를 대동한 그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말릴 새도 없이 촬영장을 나가버렸다.
“멜리사. 멜리사!”
빅은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헤일리 주연이라니. 물론 헤일리를 찍는 건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었고 영화도 잘 나올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럴 수는 없었다. 헤일리는 흥행에 도움이 되는 배우가 아니었다. 도움이 안 되다 못해 보이콧을 한다는 둥 하는 난리가 날 수도 있었고 투자자들도 싫어할 터였다. 아니 물론 그를 밀어 넣은 건 이 영화의 최대 투자자인 NLC였지만 그래도……. 빅은 자신이 왜 계속 헤일리 주연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해 자꾸 생각하며 상황을 정리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여하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이미 찍어놓은 분량은 또 어쩌고. 게다가 체이스 원탑에 주연급 여배우로 가다가 주연급 남자배우라니, 스토리나 영화 흐름도 완전히 변할 터였다.
“어이, 멜리사? 멜리사!”
헤일리를 쓸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빅은 미친 듯이 생각했다. 그를 쓰면 안 되는 이유는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두루마리 휴지를 풀듯이 줄줄 풀려나왔다.
“멜리사…,”
또깍또깍또깍또깍. 힐을 신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는 그녀의 어깨를 빅이 잡아 세웠다. 그녀는 얼굴이 엉망으로 보일 만큼 울고 있었고 빅은 너 대신 어떻게 헤일리를 쓰겠냐, 그게 말이 되냐, 이 영화에서 체이스를 빛내줄 건 너뿐이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당연히 그렇게 말해 그녀를 달래 촬영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게 프로페셔널한 감독의 임무였다.
그러나 그가 그러지 못한 것은 길 건너편 상황 때문이었다. 헤일리가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고 그 끝에 총을 든 깡패 놈들, 그리고 레이노아가 있었다.
* * *
아니 그래도 내가 나설 필요는 없지 않나, 메이슨은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지만 강도 놈이 달칵, 총의 안전장치를 푸는 위협적인 소리에 저도 모르게 달리고 말았다.
나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노아는 왜 이렇게 자주 목숨의 위협을 겪는 걸까. 왤까. 왜 그러는 걸까. 내 앞에서만 이 정도라면 사실은 도대체 얼마나 위험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바람처럼 달린 메이슨은 강도 놈들이 채 뭐야, 하고 쳐다보기도 전에 총을 든 놈의 손목을 걷어차고 있었다.
“너 뭐야, 이 새끼야!”
총을 들고 있던 새끼가 외쳤고 메이슨은 허공으로 휘리릭 돌며 날아간 총을 재빨리 낚아채 노아에게서 가장 가까이 서 있는 놈의 머리를 총구로 찍어 눌렀다.
철컥. 새로 장전하는 소리에 당장에라도 메이슨을 때려 쓰러뜨릴 것 같던 강도들은 모두 멈칫했다.
“…―헤일리?”
그들 사이에 서 있던 노아는 약간 놀란 것 같은 얼굴로 쳐다봤고 메이슨은 그를 쳐다보는 대신 천천히 주변을 돌아봤다. 강도는 셋이었다. 셋 다 어리고 건장한 히스패닉이었는데 손목이 걷어차여 입술을 깨문 놈은 뚱뚱했고, 총 앞에서 손을 들고 있는 놈은 약간 말랐다. 그들 가운데서 가장 키가 크고 험상궂게 생긴 놈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당장에라도 주먹을 날릴 것처럼 “뭐야, 넌?” 하고 물었다.
메이슨은 최대한 덜 헐떡거리려고 노력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비루한 헤일리의 육체는 고작 그거 좀 뛰었다고 이 상황에서 헐떡거리고 있었다.
“야, 그건 내가 너네한테 물어야 되는 거 아니냐? 씨발, 어디서 강도 새끼들이 신분을 물어?”
“뭐, 이 새끼야?”
“너네 친하냐?”
메이슨은 불쑥 물었다. 놈들이 ‘뭐래는 거야, 이 새끼는?’ 하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고 그는 친절히 질문의 의도를 설명해주었다.
“내가 이 새끼를 쏴 죽여 버리면 좋겠냐고.”
메이슨이 툭툭, 총구로 겨누고 있던 마른 놈의 머리를 기분 나쁘게 치며 물었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곧 가장 키 큰 놈이 하,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뭐래는 거냐, 쟤.”
“야, 너 헤일리 러스크지? 씨발, 어디서 걸레년이 오빠들 이야기하는데 나서고 지랄이야, 지랄, 컥!”
메이슨은 총을 쥐고 있는 손을 들어 그대로 나불대는 마른 놈의 뒷목을 가격했다. 뻑! 커다란 소리와 함께 그놈이 컥, 숨을 삼키며 무릎을 꿇었고 메이슨은 다시 제대로 놈의 뒤통수에 총을 겨누며 “뭐라고?” 하고 차갑게 물었다. 크으윽, 뒷목을 붙잡으며 엎어지려는 놈의 머리칼을 붙들고 고개를 세우게 하자 놈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뭐 이 시발, 쏘지도 못할 년이…,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나대고 지랄이야?”
“내가 쏘는지, 못 쏘는지 우리 함께 시험해 볼까?”
메이슨은 히죽, 놈들이 기분 나빠할 만한 미소를 지었다. 잠깐 멈칫했던 키 큰 놈은 곧 표정을 이죽대며 말했다.
“이거 봐라? ……야, 너 지금 기분 내는 거냐? 그거 빈총이거든?”
놈은 그거 총알도 안 들어 있는 거라고 말했고 메이슨은 그들을 향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그럼 쏴도 되겠네?”
메이슨이 마른 놈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했고 놈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빙긋 웃은 메이슨은 힐끗 눈을 굴려 탕! 총을 쐈다. 마른 놈의 머리는 아니었다.
“히, 힉……,”
뚫린 것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려던 뚱뚱한 놈의 소맷자락이었다. 노아를 뒤에서 그를 끌어안아 인질 삼으려 했던 놈은 화약이 튀어 화끈한 손목을 쥐고 덜컥 주저앉았다. 그의 손에서 떨어진 칼이 바닥을 굴렀고 메이슨은 키 큰 놈이 칼을 쥐려고 하기 전에 칼을 향해 한 번 더 총을 장전해 바로 갈겼다. 장전하고 총을 쏜 것은 한 타이밍에 이뤄진 일이었다.
탕! 총소리와 동시에 챙, 칼의 손잡이가 휘리릭 돌면서 칼이 저 멀리로 미끄러져 날아갔다.
“이런. 총알 없다며?”
메이슨은 여유롭게 말하며 웃었다. 당연히 총을 쥐는 순간부터 총에 총알이 차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총알이 있는 총과 없는 총은 무게부터 달랐다.
“너, 너 뭐야?”
메이슨은 힐끗, 노아를 쳐다봤다. 그가 약간 묘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딱히 아직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는데 노아의 고운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아차, 하는 순간 아래쪽에서 철컥,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
힐끗 내려다보자 무릎을 꿇고 있던 마른 놈이 메이슨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놈도 총을 하나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메이슨은 이놈이 노아를 향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눠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노아를 겨눴다면 메이슨은 도박이고 대화고 자시고 바로 총을 버리고 두 손을 들어 보였을 테니까.
“총 치워, 이 걸레년아.”
놈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고 메이슨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놈의 머리에 겨누고 있던 총을 철컥, 느리게 장전했다. 메이슨은 놈이 자신의 배를 쏘거나 말거나 놈의 머리에 겨눈 총을 깊게 들이밀며 그와 눈높이가 비슷해지도록 몸을 숙였다. 그리곤 입술을 찢어 히죽 웃었다.
“――야.” 메이슨은 그를 불렀다.
“뭐, 뭐야? 쏴버린, 쏴버린다?”
마른 놈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고 메이슨은 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속삭이듯 물었다.
“너, 사람 죽인 적 없지?”
눈을 휘어 웃는 메이슨의 말에 놈은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고 메이슨은 이어 말했다.
“난 죽여 봤거든. ――제법 많이.”
놈의 동공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놈의 눈동자에 자신의 잔인한 얼굴이 떠 있는 것을 메이슨은 똑똑히 쳐다보았다. 살짝 몸을 일으킨 메이슨은 약간 떨어져서 차가운 얼굴로 놈을 쳐다봤다. 얼어붙은 놈의 몸이 점점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놈은 입을 열지도 못하고 떨었고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지은 것은 키가 큰 놈이었다.
“하―, 하하―…?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드라마에서 사람 좀 죽여 봤다 이거냐?”
키가 큰 놈은 새로 꺼냈는지 칼을 쥐고 그대로 메이슨에게로 휘둘렀다. 메이슨은 놈을 쳐다보며 가늘게 웃었다.
“펠, 하지 마!”
마른 놈이 비명처럼 소리 질렀고 키 큰 놈은 멈칫했다. 하지만 메이슨의 방아쇠는 멈추지 않았다.
탕!! 커다란 총성이 다시 거리를 울렸다.
“…―이, 미, 미친―,”
다르륵, ―키 큰 놈은 쥐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히익, 힉――,”
메이슨은 힐끗,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벌벌 떨고 있는 마른 놈을 내려봤다. 놈의 관자놀이 옆에 약간의 화상자국이 남아 있었다. 메이슨은 여전히 앉아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상황을 보고 있던 뚱뚱한 놈에게 고갯짓을 했다.
“데려가.”
메이슨은 차갑게 말했다. 뚱뚱한 놈이 약간 실금을 지린 마른 놈과 키큰 놈을 데리고 옆 길 골목으로 도망쳤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메이슨은 노아를 돌아봤다. 죽이네, 살리네 거친 이야기가 오간 한가운데에 있었던 남자답지 않게 그는 순하고 침착한 분위기로 메이슨을 쳐다보고 있었다.
메이슨은 들고 있던 총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런 데 혼자 다니기에 안전한 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비싸 보이는 시계며 구두, 양복 같은 거 말입니다. 메이슨의 말에 노아는 눈을 깜빡이더니 곧 픽 웃었다.
“물론 조금은요. 근데 혹시 당신은 괜한 일에 참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노아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고 메이슨은 그의 등 너머를 쳐다봤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오다 멈춘 듯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노아의 보디가드들이었다.
“당신이 총질을 하는 바람에 내 보디가드들이 제법 긴장했거든요.”
아닌 게 아니라 건장한 형님들이 죄 험상궂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 죄송합……,”
메이슨은 멀리서 나름 긴박했을 그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꾸벅여 보였다. 안 그래도 오지랖일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혹시나. 혹시나 하고……. 생각해 보면 노아가 이런 곳에 혼자 올 리도 없고 놈들이 아무리 미쳐도 인생이 소중하다면 돈은 좀 빼앗더라도 노아를 쏴서 죽여버릴 리는 없는데 왜 달려와 오지랖을 벌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무슨 정의의 사도도 아니고――.
쪽팔려하는 메이슨을 위아래로 쓸어본 노아는 잠시, 메이슨의 젖은 목덜미를 한참 쳐다보다가 말했다.
“아니 뭐, 당신에게 용건이 있기는 했는데……,”
용건? 노아가 자신에게? 메이슨이 눈을 끔뻑이며 무슨 용건이냐고 되물으려는데 등 뒤에서 “씨발, 이게 무슨 일이야――,” 하고 씹어 뱉는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슨이 돌아보자 십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미치겠다는 표정의 감독, 빅과 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깨문 멜리사가 서 있었다.
“씨발, 맙소사, 하느님. 감히 어떻게 제게 이런 짓을――,”
감독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숨을 헐떡이며 들이켰다.
“…―감독님?”
메이슨은 숨을 헐떡이는 감독을 조심스럽게 불렀고 그는 메이슨에게 대답을 해주는 대신 멜리사를 쳐다봤다.
“멜리사.”
멜리사가 흠칫, 설마 하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감독님, 설마―,” 그녀가 주춤 물러났고 감독, 빅은 물었다.
“집에 간다고?”
“지, 지금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거예요?”
그녀는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녀도 빅의 환장하겠다는 표정에 뭔가를 예감한 것처럼 조금 비틀거렸다.
빅은 비틀대는 그녀의 어깨를 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집에 가고 싶으면 가야지. 아무렴.”
이제 더 이상 영화랑 관계없을 사람이 간다는데 말릴 필요는 없었다. 빅은 “조심히 들어가. 어서 가.” 하고 손을 내저었다.
“뭐……! 감독님, 미쳤어요!?”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독, 빅은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래그래. 알겠으니 나중에 연락 할게.”하고 무성의하게 대답해주고 멀뚱히 선 헤일리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감독님! 감독…, 야!!!”
등 뒤에서 멜리사가 미친년처럼 소리 질렀지만 빅의 귀에는 지금 천사의 나팔 소리밖엔 들리지 않았다.
맙소사, 하느님. 제게 어떻게 이런 짓을. 늘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하느님이 이번엔 자신을 배신하려 했다. 아니, 아니다. 배신하려 한 것은 자신이었다. 하느님의 의도를 몰라보고 건방을 떨었던 자신이 하느님을 실망 시킨 것이었다.
어쩌면 이 순간 여기에 서있게 한 것도 하느님의 안배일까. 그래, 그럴 지도 몰랐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촬영 중간에 튀어 나와 길 한복판에서 이런 장면을 마주하게 될 리가 없었다.
헤일리가 길 건너에서 강도들에게 달려갈 때부터 빅은 예감을 느꼈다.
무언가, 나는 지금 대단한 것을 보겠구나. 온몸의 감각이 바짝 섰다. 그건 천재들만이 느낀다는 육감 같은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헤일리가 정확하게 총을 든 강도의 손을 걷어찼고 허공으로 날아간 총을 낚아챘다. 오, 씨발. 빅은 등줄기가 오싹한 것을 느꼈다. 철컥, 그는 약간 마른 남자를 총으로 겨눴고, 그리고 마치 진짜 밑바닥 인간처럼 말하며 웃었다. 입을 나불대던 놈의 뒷목을 총으로 내리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 완벽하게 절도 있는 동작은 어지간한 무술 감독에게서도 본 적이 없던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뭐야, 이건. 빅은 오싹오싹한 감각에 어깨를 떨었다. 멜리사가 옆에서 꺄, 꺄악, 소리를 지르려는 것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봐 닥치게 한 빅은 다시 헤일리를 쳐다봤다.
강도 놈들 중 하나가 이죽대며 ‘그거 빈총이거든?’ 했을 때 빅은 마른 침을 삼켰다. 3대 1. 저기 차가운 얼굴로 서있는 레이노아가 돕는다고 해도 3대 2였다. 자신이 나서 도와주거나 사람을 불러와야 할 상황이었지만 빅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헤일리가 저 순간을 대체 어떻게 모면할지 궁금해 숨이 바짝바짝 차올랐다. 빈총을 들고 어쩔 거지, 헤일리? 빅은 마치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땀이 난 주먹을 쥐고 쳐다봤고 헤일리는 ‘그래?’ 하고 히죽 웃더니 그대로 탕! 총을 갈겼다.
빅은 화들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을 쳐다봤다. 헤일리가 총을 쏜 것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던 뚱뚱한 놈의 소맷자락을 향해서였다. 의도한 것일지는 알 수 없지만 소맷자락을 정확하게 쏴버린 것도 모자라 헤일리는 순식간에 다시 총을 장전해 바닥에 떨어진 칼의 손잡이를 향해 한 번 더 갈겼다.
팽그르르 마치 표창처럼 돌며 날아간 칼이 빅의 발치에서 멈췄다. 헤일리는 조금도 멈칫하지 않고 바로 다시 총을 장전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른 놈의 머리에 총을 겨눴다.
‘하느님…….’
빅은 입술 새로 저도 모르게 하느님 소리가 흘러나가는 것을 느꼈다. 오싹 오싹. 빅은 양어깨를 껴안고 움칠거렸다.
헤일리가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눈 놈에게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그 예쁘장한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비열하고 나쁜 놈처럼 웃은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놈을 쳐다봤다.
‘난 죽여 봤거든. 제법 많이.’ 그렇게 속삭이는 헤일리의 표정은 빅의 시야에선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마른 놈의 눈이 후들거리며 떨렸다. 겁에 질려 살짝 열린 동공은 헤일리의 표정을 상상하게 만들었고 빅은 그 모습에 전율했다.
이건 한 편의 영화였다. 리얼이었다. 자신이 찍어야 하는 그런 영화였다. 이번 영화 제목을 생각 없이 리얼이라고 지었던 것조차 신의 안배처럼 느껴졌다. ――아, 하느님.
빅은 운명을 느꼈다.
빅은 헤일리의 앞으로 걸어갔다. 머리 위에서 작은 천사들이 날아다니며 ‘축 대박’ ‘인생 최고의 영화’ ‘대애바악’ 하고 환희의 팡파르를 울렸다. 멀뚱히 선 헤일리의 뒤로 후광마저 느껴졌다. 이건 내 거야. 빅은 다른 감독이 알아채고 이 남자를 낚아채 갈까 봐, 헤일리를 눈앞에 두고도 전전긍긍한 자신을 느꼈다. 헤일리를 주연급으로 써서는 안 될 현실적인 이유가 두루마리 휴지처럼 줄줄 풀려나왔지만 빅은 그것을 다시 둘둘 말아 쓰레기통에 넣고 불태워버렸다.
빅은 최대한 덜 미친 사람처럼 보이도록 표정을 관리하며 덥석, 멀뚱히 선 헤일리의 양손을 끌어다 붙잡았다.
“헤일리.”
오, 헤일리…――. 감독은 왜인지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고 메이슨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반걸음쯤 물러섰다. 뭔가 묘하게 불쾌한 탓이었는데, 그러나 감독은 오히려 더 부담스럽게 한 걸음 성큼 다가오며 다시 “헤일리.” 하고 불렀다.
그는 마치 프러포즈를 하는 남자처럼 잔뜩 들뜬 얼굴을 했고 메이슨은 우수수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어깨를 움츠렸다. 아, 역시 난 게이가 된 건 아닌가봐. 메이슨은 소름 돋는 와중에도 생각했고 감독은 메이슨의 두 손을 꼭, 강하게 쥐었다.
“나와 함께 대박을 만들어 보지 않을래?”
나와 함께 아이를 만들어 보지 않을래? 하는 것처럼 감독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고 메이슨은 “예?” 하고 되물었다. 멀찍이 서서 발악하듯 울던 멜리사가 달려들 것처럼 악을 썼고 그녀의 매니저가 그녀를 끌고 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동안에도 감독은 내내 메이슨만 쳐다보며 말했다.
“나랑 영화 찍자고.”
어때? 좋지? 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메이슨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래, 이 사람. 뭐 잘못 먹었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미 찍잖아요?”
“아, 그렇지. 그래. 찍고 있지. 근데 어차피 찍는 김에 씬을 살짝 늘리자, 이 말이야.”
감독은 잔뜩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씬도 늘리고, 배역도 좀 더 쩔어 주는 캐릭터로 가는 거야, 어때?”
“……왜요?”
왜 그래야 하지? 메이슨은 싫은 얼굴로 물었다. 씬을 조금 늘리자는 말은 하루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는 이야기였고 메이슨은 이런 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Zii의 상사 베레타, 그 새끼가 늘 이런 식이었다. 메이슨, 일주일이면 끝나는 일이 있는데 할래? 메이슨, 이번엔 진짜 간단해. 메이슨? 나 믿지, 메이슨? ―빅은 그 징글맞은 새끼랑 무서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어설프게 설득당해 ‘설마 이번에도 그럴까’ 하면 ‘아 시발, 역시나.’ 하게 만드는 그런 놈이었다.
“왜? 싫어? 좋잖아, 쩔어주는 캐릭터로 넌 탑배우로 뜨고 난 부자가 되자구. 응?”
“탑배우? 부자?”
메이슨이 눈을 가늘게 뜨고, 꼭 베레타처럼 말하는 그를 쳐다봤고 그는 “그래!” 하고 확신 어린 어조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 있어봐. 네 매니저 어디 있어? 그, 날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던 뚱뚱한 남자. 아니, 네 에이전시랑 통화하면 되나? 번호가 뭐야?”
“잠깐만요, 이봐요.”
헤일리의 에이전시는 헤일리가 사장이고 직원은 토니 하나밖에 없었다. 메이슨이 곤란해 하자 감독은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하이, 글로리아? 당장 헤일리 매니저 좀 이쪽으로 보내줘. 여기 바로 길 건너인데……, 그래. 촬영은 모두 접고.”
그는 당장 무언가 해야 한다는 듯한 열의에 불타 일을 진행시켰고 메이슨은 “감독님? 저기요? 이봐요.” 하고 그를 불렀다. 토니를 부르고 촬영을 접다니, 토니가 무슨 생각을 할지 눈에 훤했다. 불쌍한 토니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을 생각을 하니 살짝 머리가 아팠다.
툭, 전화를 끊어 주머니에 넣은 감독이 이제 이야기해보자는 듯이 말했다.
“자 그럼, 마침 여기 최대 투자자도 계시니 한 번 제대로 이야기해봅시다, 응?”
그가 내내 옆에서 나른한 눈으로 서있던 노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양을 재밌다는 듯이 보고 있던 노아는 감독의 시선을 받자 빙긋 웃었다.
“글쎄요. 난 그런 이야기를 하러 여기 온 게 아니라서요.”
노아는 손목에 찬 점잖은 가죽시계를 힐끗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나와 이야기하고 싶으면 따로 약속을 잡으시죠, 프록터 씨.”
노아는 신사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고 감독은 좋은 기분에 찬물을 얻어맞은 것처럼 얼굴을 구겼다.
“어이, 이봐요. 지금 당신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아니, 저기, 감독님.”
그게 제가 목숨을 구한 건 아니고…, 메이슨은 그를 말리며 살짝 물러났다. 목숨을 구했다기보다는 그냥 남 일에 참견하고 알짱거린 것뿐이었다. 노아는 ‘목숨을 구했다’ 는 대목에서 픽 웃더니 말했다.
“여하튼 영화에 관한 이야기는 따로 새 제작 보고서를 만들어서 제 비서에게 전달해주세요. 헤일리 러스크가 큰 비중으로 나오는 영화를 무슨 수로 흥행 시켜서 제작비를 뺄 건지 말이죠.”
“아……, 보고서를 제출하라?”
감독은 히죽 웃으며 되물었고 노아는 그에게 마주 웃었다.
“글쎄요. 솔직히 좀 미친 생각 같다고 보지만 들어 볼 수는 있겠죠.”
예의바르게 웃는 노아를 보며 감독은 실실 쪼갰다. 자신이 하려는 게 어떤 미친 짓인지 아는 이상에야 이 정도도 아주 긍정적인 반응이라는 얼굴이었다.
“…….”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묘하게 낄 자리가 없었다. 메이슨은 힐끗, 멀리서 토니가 헐레벌떡 겁에 질린 얼굴로 뛰어오는 것을 보았다. 대체 무슨 사고를 쳤나, 그럼 그렇지, 역시 기억상실증은 병일 뿐이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만병통치약이 아니었어, 잠깐 좋은 꿈을 꾸었을 뿐이야, 라고 생각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무슨 사고를 쳤는지도 모르면서 당장에라도 달려와 엎드려 빌며 용서를 구할 것 같은 얼굴의 토니를 맞이하러 감독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메이슨은 그가 토니의 어깨를 안고 긴밀한 이야기를 건네는 것을 보다가 내내 시선을 피했던 노아를 돌아보았다.
“저기, 근데 용건이 있으시다고요?”
노아가 자신에게 무슨 용건이지? 메이슨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노아는 눈을 휘어 빙긋 웃었다. 그의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왠지 살짝 시린 느낌이었다. 그의 시선이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닿았고 메이슨은 눈을 굴렸다.
“용건이 있었는데―…,”
조금 뜸을 들인 노아는 다시 고개를 약간 기울여 메이슨을 쳐다봤다. 뭔가 탐색하는 시선에 메이슨이 미간을 구겼고 노아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이만 됐어요. 쓸데없는 소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오버됐거든요.”
노아는 시계를 보며 말했고 아니나 다를까 기다리고 있다는 듯 검은 리무진이 길 한쪽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며 감색 정장을 입은 필이 나와 대기했다. 노아가 지겹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려 웃었고 메이슨은 힐끗, 그의 입술을 쳐다보다가 휙 시선을 돌렸다. 입안에 고인 침이 꿀꺽 목을 타고 넘어갔다.
“다음에……, 또 보죠.”
“예?”
다음에 또 보자고? 메이슨은 그 상투적인 인사말에 눈을 끔뻑이며 그를 쳐다봤고, 노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더니 이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필에게 걸어가 차에 올라탔다.
메이슨은 홀린 것처럼 그의 뒷모습을 오래 쳐다봤다. 감독과 이야기를 나눈 토니가 기절하듯 엎어져 그를 부축하기 위해 뛰어가기 전까지.
* * *
차에 올라탄 노아는 힐끗, 창 너머로 무덤덤하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헤일리를 쳐다봤다.
“필. 내가 정말 미친 걸까요?”
아니, 나도 내가 좀 미친 건 아는데……, 중얼거린 노아는 흠, 하고 정말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려 웃었다. 노아의 말에 필은 조금 의아한 얼굴을 하다가 말했다.
“레이칼튼 씨는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한은요.”
“하하, 아는 한은?” 노아는 재미있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도 내가 십여 개의 진단명을 가진 정신병자라는 건 아는데, 그래도 제법, 대체로는 이성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노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창밖에 이미 작아진 헤일리를 쳐다보다가 흠, 눈을 휘어 웃었다.
“그랬는데―….”
노아는 말끝을 흐렸다. 노아는 스스로가 제법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뭐, 갖가지 정신병을 앓고는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상황판단을 못하거나 이성을 잃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최상류층의 최상류층으로서, 태어나면서부터 내내 그런 교육 받았고 적성에도 맞아 그렇게 하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일곱 살 때 일어난 유괴사건은 노아의 인생에서 가장 깊은 상흔을 남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진 않았다. 그 일이 있든 없든 노아는 여전히 이렇게 가면을 쓴 것처럼 웃고, 무감하게 일을 했을 스스로를 알고 있었다.
상황판단을 잘못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남에게도 냉정하지만 스스로에게도 냉정했다. 필의 말대로 자신은 대체로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근데 왜 자신은 저 남자가 자꾸 메이슨처럼 느껴지는 걸까.
노아는 가슴을 깔짝이는 선명한 기시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이상한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노아는 내내 헤일리에게서 메이슨을 느꼈다.
2주 전. 노아는 헤일리가 연예계를 은퇴할 것 같다는 이야기에 약간 고민하다 그에게 몇 개의 대본을 보냈다. 헤일리에 대한 기시감의 정체가 아직 확실해지지도 않았는데 그가 다른 세계로 빠지는 건 별로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본을 보내놓고 노아는 내내 헤일리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자신에게 치근댔을 때는 솔직히 말해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그가 했던 말이나 했던 행동 같은 것이야 기억이 났지만 얼굴 표정이나 말투 따위의 세세한 것들은 그다지 기억이 없었다. 제대로 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아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길가에 흔히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발에 좀 채였다고 해도,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노아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 촬영장에서 다시 그를 봤을 때는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빗속에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표정이나 눈빛, 나중에 화장실에서 만나 했던 말의 어조까지도 묘하게 기억이 선명했다.
그다음에 만났던 것도 그랬다. 기가 막힌 상황이기도 했지만 그렇다는 것을 감안해도 이상할 정도로 그때의 모든 것이 기억에 남았다. 자신은 패닉이었고 발작을 일으키던 순간이었는데도,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나 행동, 작은 체온 같은 것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자신을 쳐다보던 그 시선. 그 시선을 마주하고 전율 비슷한 것을 느꼈던 스스로의 감각까지, 그 모든 것이 뇌리에 새겨지듯 선명한 잔상이 남아 있었다.
알고 있는 감각이었다. 메이슨을 만났던 그 모든 시간이 노아에겐 그렇게 남아 있었다. 상대에게는 뿌옇게 흐려져 잘 기억도 나지 않을 십 년 전의 일이겠지만 노아에겐 조금 전에 일어난 일처럼 선명했다.
마치 메이슨과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것처럼 헤일리를 기억한다는 건 노아에겐 아주 특별한 일이었다. 노아는 그것들을 2주 동안 떠올렸고 곱씹었다. 그러는 사이 헤일리는 메이슨과 간간이, 계속해서 겹쳐졌다. 강렬했던 몇 번의 순간들뿐 아니라 사소한 표정이나 말하는 습관, 억양 같은 것까지도 겹쳐졌다.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착각인가 싶으면서도 다시 또 떠오른 헤일리는 메이슨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혀, 조금도 닮지 않은 두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노아는 그 착각에 대해 확인하고 싶었다. 메이슨의 부재에 지치고,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절망하고, 여전히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다 정말로 미친 것은 아닐까. 그를 대체할 것을 찾는 자기 보호 본능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은 아닐까. 메이슨과 헤일리라니, 틀림없이 착각이었다. 하지만 착각일 것이라고 인지하면서도 헤일리를 떠올릴 때마다 이는 선뜩한 감각은 변하질 않았다.
노아는 다시 헤일리를 만나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 헤일리의 촬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노아는 약간의 시간을 냈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지만 여하간, 그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이칼튼 씨? 괜찮으십니까?”
말끝을 흐렸던 노아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자 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아는 빙긋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뭔가, 확인하신다는 건 잘 하셨습니까?”
“아아.”
확실히요. ―노아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예정에 없던 사고로 더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헤일리는 틀림없이 메이슨처럼 보였다. 총을 들고 상대를 협박하고 위협하는 것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헤일리라니, 그건 차라리 헤일리 본인이라기보다 메이슨이었다. 완벽하게 그처럼 보였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노아는 스스로가 떠올린 생각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했다.
“……하지만 멍청한 짓이었어.”
노아는 눈을 감으며 낮게 중얼거리며 자평했다. 오늘은 멍청한 짓을 했다, 라고.
헤일리에게서 메이슨을 느낀 것이 착각이 아니라고 해도 그가 메이슨이 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확인했을까. 그가 아무리 메이슨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는 메이슨이 아니었다. 메이슨의 대용품 같은 건 찾을 생각도 없었고 하물며 헤일리라니.
노아는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며 낮게 혀를 찼다.
감은 눈 안으로 메이슨과 겹쳐지던 헤일리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노아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