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빗속을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비가 퍼붓듯 쏟아지는데 그는 우산은커녕 신발도 제대로 신고 있지 않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헐레벌떡 뛴 남자가 ‘에이미……!’ 하고 누군가를 찾았다. 흠뻑 젖어 하얗게 질린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에이미!’
남자는 주변을 돌아봤다.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거리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행동과는 맞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 사이로 희미한 불안이 스미는 것이 보였다.
남자, 댄 하이헨은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류의 천재들이 대체로 그렇듯 그는 늘 타인을 이해하지 못했고 감정적으로 굉장히 메말라 있었다. 범죄자를 잡는 것에는 천재적이었지만 범죄자나 희생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에는 아주 둔했다. 동료가 살해당했을 때도 슬퍼하기는커녕 범인의 흔적을 찾는데 몰두해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받은 일도 있었다.
어떤 대단한 일이 생겨도 그 딱딱한 표정으로 ?시끄러워.? 라고 말하는 그런 남자였다, 댄은.
그러나 그렇게 이성적인 그로서도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의 하나뿐인 딸, 에이미 하이헨이 사라졌다. 살인마 테이큰이 나타나는 거리에서.
테이큰은 댄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 석 달 전, 아버지가 연쇄 살인범이라는 걸 알게 된 테이큰의 딸은 자살하려고 했고 테이큰은 그녀를 막으려 했다. 댄은 테이큰의 생각을 읽어 그를 중간에 체포해버렸고 그 탓에 그는 딸의 자살을 막을 수 없었다. 댄도 그녀의 자살을 막으려 했지만 조금 늦었고 FBI가 그녀의 집을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싸늘하게 식고 있었다.
320년 형을 받은 테이큰은 송치되며 법원 앞에 서있던 댄에게 이를 드러내 웃어 보였다.
?이번엔 내가 늦었어. 하지만 다음엔 네가 늦을걸.?
미간을 구기는 댄을 두고 테이큰은 감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열흘 후 그가 탈옥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댄은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은 딸을 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댄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테이큰이 탈출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댄은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아이를 데리고 집에 가는 길에 잠시 빵집에 들려 저녁과 아침에 먹을 빵을 사기 위해 지갑을 여는 그 짧은 시간, 발치에 서서 케이크를 구경하던 아이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방금까지 있던 아이가 사라졌는데 누구도 아이를 보지 못했고 누가 데려갔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음엔 네가 늦을걸.?
테이큰의 목소리가 댄의 뇌리를 스쳤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이미 자신은 늦었다. 댄도 알고 있었다. 테이큰은 타깃을 잡고 망설이는 놈이 아니었고 이미 모든 것은 끝났을 것이었다. 알고 있었다. 에이미가,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떠한 순간에도 판단을 흐리지 않았던 그는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미……,’
그렇게 중얼거리는 댄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늘 딱딱하고 차가운 표정만 하던 그의 눈이 작게 흔들리며 떨렸다.
그리고 곧 댄은 그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마치 테이큰이 보란듯이 남겨둔 아이의 작은 구두. 빗물에 흠뻑 젖은 구두를 본 댄의 손이 후들거리며 떨렸다. 그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격정적인 적이 없던 댄의 차가운 얼굴이 일그러지며 끔찍한 고통을 쏟아냈다.
철컥, 차가운 장전음이 들리고 탕! 총성이 들린 것은 금방이었다.
댄은 그 비에 젖은 얼굴을 들어 상대를 쳐다봤다.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원래 다 그렇다는 듯.
‘미안하게 됐군. 이번엔 내가 빨랐어.’
남자, 테이큰은 히죽 웃었다. 댄은 피가 울컥거리며 흐르는 자신의 가슴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테이큰을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그의 살의로 가득한 표정이 크게 클로즈업 됐다.
“어머…….”
17인치의 작은 텔레비전으로 드라마 ‘클루’를 보고 있던 애슐리는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원래 TV를 그리 즐겨보는 편은 아니었던 그녀는 갑자기 한가해진 탓에 띄엄띄엄 보던 드라마를 챙겨보고 있었다. 드라마는 약간 지루했지만 볼만했고 오늘도 약간의 볼만함을 기대했던 그녀는 입을 벌리고 화면을 주시했다.
헤일리 러스크? 애슐리는 헤일리를 알고 있었다. 어지간히 가십에 관심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모두가 그를 알았다. 노래도 연기도 못하는 주제에 트러블을 일으키는 것으로 밥 벌어 먹고살고 있는 헐리웃의 유명한 걸레. 애슐리는 그를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고 최근엔 정말로 ‘얜 안되겠다…….’ 하고 모두가 생각했다.
화면에는 그 헤일리 러스크가 나오고 있었다. 그가 빗속에서 입술을 깨물고 상대를 노려보며 얼굴을 드라마틱하게 일그러뜨렸다.
뭐야, 쟤가 저렇게 예쁘고 멋있었던가? 애슐리는 순간적으로 비에 젖은 헤일리가 제법 청순하고 섬세하게 생겼다고 생각해 버린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과할 정도로 크게 화면에 잡힌 헤일리는 분명 제법 감흥을 일으켰다.
상대를 보는 그 독한 시선, 물기 고인 눈동자, 입술을 잔뜩 적신 비릿해 보이는 피. 애슐리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헤일리가 피를 토하고 무거운 숨을 내쉬고 경련하듯 숨을 들이켜다 다시 내뱉었다. 그리곤 앞으로 꼬꾸라지듯 엎어졌고 화면은 살짝 흔들리며 그를 크게 클로즈업했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눈가에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고였고 곧 그 눈은 생기를 잃었다.
“뭐야, 쟤……?”
애슐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헤일리 러스크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소름끼치는 연기력은 둘째 치고 어디서 본 듯한 그 시선이――.
툭. 애슐리가 그 시선을 어디서 봤는지 떠올리기 직전, 비가 새까맣게 쏟아지며 장엄한 음악이 흘러나오던 텔레비전 화면이 툭 꺼졌다.
“뭐야? ――보고 있잖아!”
중요한 장면인데! 애슐리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 뒤에서 리모컨을 누른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런 걸 보고 있을 때야, 지금이?”
“그럼 뭘 해야 되는데? 밖으로 나가서 Zii에게 자수라도 해?”
애슐리는 차갑게 물었고 남자, 아론의 얼굴은 왈칵 일그러졌다.
“차라리 그게 낫겠지? Zii가 우릴 직접 찾아내면 대가리에 총 맞고 죽는 정도로는 안 끝날 테니까.”
“닥쳐, 애슐리.”
“그러게 왜 메이슨을 죽였어, 이 멍청아!”
그녀는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고 입술을 깨문 아론이 크게 “씨발!” 하고 소리 질렀다.
“그 새끼가 알타를 쏴버리려고 했으니까 그렇지!”
아론도 그때 자신이 미쳤다는 걸 인정했다. 메이슨을 쏴버린 건 정말로 순간적인 반응이었다. 그렇게 해야겠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한 행동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가 알타를 쏘려고 한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누가 자신의 손을 잡고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처럼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원래 아론은 메이슨 테일러를 아주 짜증나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그의 팀으로 차출되었을 때는 그도 나름의 기대를 하고 있었다. 메이슨은 Zii는 물론 다른 부대에서도 유명할 정도로 대단히 뛰어난 용병이었다. 불가능할 것 같은 수많은 임무들을 성공으로 이끌고 살아남은 대단한 베테랑. 그의 팀이 험한 임무를 맡는 건 유명했지만 그 대단한 솜씨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의 메이슨은 그렇게 엄청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임무를 해치웠다. 스킬이 없으면 또 모를까. 그는 일을 안전하게 처리할 능력이 되면서도 늘 순간적으로 상대를 당황시켜 흔들고 그 품 안으로 칼을 쥐고 뛰어드는 무식한 방식으로 일했다.
목숨을 배 밖으로 내놓고 다니는 건 혼자로도 충분하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딱히 그의 작전이 실패한 적이 없다는 건 아론을 더 짜증나게 만들었다.
무기상 알타의 벙커로 들어가는 임무도 그랬다. 그런 병신 같은 방식이 다시 또 통했고 그가 일을 해결하려 하는 순간이었다.
알타가 오천만 달러를 주겠다고 말했다. 오천만 달러. 얼핏 들어서는 그게 얼마나 큰돈인지 감도 오지 않는 그런 돈이었다. 메이슨, 아론, 옆에 있는 애슐리까지, 셋으로 나눠도 자식의 손자까지 풍요롭게 살 수 그런 돈을 주겠다는 알타를 두고 메이슨은 무심한 얼굴로 그를 향해 총을 겨눴다. 아론은 메이슨의 그런 점도 짜증났다. 씨발 새끼. 자기만 쿨한 척한다고 생각했다.
흔들림 없이 겨눠진 총구를 보며 알타가 얼어붙은 얼굴로 비밀번호를 말했다. 12, 36.5, 37……, 그리고 마지막 번호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메이슨은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손가락으로 당겼다.
오천만 달러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아론은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이슨을 멈출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슨 짓이야! 팀장…!’
애슐리가 비명을 지른 다음에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었다. 메이슨의 이마에 검붉은 구멍이 생겼고 푹, 뒤통수로 피가 튀었다. 그가 ‘우와, 이 한심한 새끼.’ 하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고 곧 앞으로 꼬꾸라지듯 쓰러졌다.
그 순간 모든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론은 가슴에 총을 맞고 바닥에서 꿈틀대는 알타의 머리칼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애슐리를 향해 총을 겨누며 말했다.
‘죽을래, 아니면 같이 금고를 열고 나랑 한 배를 탈래.’
애슐리는 죽이겠다는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론은 벌벌 떨고 있는 알타를 끌어다 금고 앞에 세워 홍채를 인식시키고 억지로 지문 인식까지 풀었다. 12, 36.5, 37, ―그러나 마지막 비밀 번호를 말하기 전에 알타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거지같은 일이었다. 괜히 잘못된 비밀번호를 눌렀다가 비밀번호가 다시 세팅되면 홍채 인식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죽은 알타의 눈알을 아무리 가져다 대도 비밀번호는 절대 풀리지 않을 터였다.
어쩔 수 없었다. 아론은 애슐리와 함께 메이슨의 시체를 훼손해 자신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키와 체구가 비슷하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으로, 치열을 확인할 수 없도록 얼굴을 완전히 부순 뒤, 벽에 걸린 블러핑 금고 앞에 시체를 가져다놓고 금고를 총으로 쏴 폭탄을 터뜨렸다.
알타의 침실에는 몇 개의 비밀 통로가 있었고 두 사람은 그의 금고를 가지고 도주했다. 흔적을 지우고 끊어내고 나름 안전한 곳에 처소를 마련했지만 그뿐이었다.
알타의 금고는 여전히 열 수 없었고 Zii의 추적은 시시각각 그들을 조여 왔다. 제법 괜찮다는 금고 기술자와 연락을 했지만 금고 잠금쇠 쪽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어 잘못된 비밀번호를 연속으로 여러 번 누르면 폭발할 것이라는 엿 같은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애슐리의 말대로 할 수 있는 건 고작 드라마나 보거나 피자를 시켜 먹는 수준의 일뿐이었다. 그나마도 수중에 돈이 얼마 없었고 금세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터였다.
“내가 말했지? 팀장은 병신이 아니라고. 걔가 이걸 몰랐을 것 같아?”
애슐리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애슐리는 메이슨과 3년째 같이 일하고 있었다. 메이슨은 대체로 무모한 방식으로 일을 했고 가끔은 진짜 미친놈 같았지만 3년이나 일하면 알 수 있었다.
그는 위기에 강했고 상황 판단이 빨랐으며 사람의 내면을 파고드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용병 짓에도 천재와 범재가 있다면 그는 천재였다. 메이슨은 늘 허술하게 일하는 것 같았지만 상황파악을 잘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된다고 한 일은 실패한 적이 없었고 안 된다고 판단한 일이 잘되는 경우는 없었다.
아론은 늘 그를 병신이라고 투덜댔지만 사실은 아론 쪽이 병신이라는 걸 애슐리는 알고 있었다. 사랑이 웬수지. 애슐리는 자신의 이런 성격이 스스로를 죽이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오천만 달러야.”
아론은 되뇌듯 말했고 애슐리는 “못 열면 그냥 쓰레기지.” 하고 쏘아붙였다. 눈을 치켜뜬 아론은 “뭐가 어째?” 하고 이를 드러냈지만 애슐리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어쩌면 열어도 쓰레기일 수도 있고.”
애슐리는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아론은 화를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리모컨을 그녀를 향해 집어던졌다. 쨍! 애슐리가 고개를 기울여 피한 탓에 리모컨이 텔레비전으로 날아가 모서리에 부딪히며 깨졌다. 애슐리는 미간을 구겼다. 아 시발, 이젠 진짜 심심해서 자살하고 싶겠네…….
“정신 차려, 이 병신아. 오천만 달러고 뭐고 당장 뒈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Zii가 어떤 곳인데. 만약 운 좋게 금고를 열어 오천만 달러를 손에 넣더라도 그 돈을 들고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엔딩은 없었다. 언제 어느 때고 Zii는 배신자를 처단하러 찾아올 테니까.
아론은 입술을 깨물고 애슐리를 노려봤다. 두 사람의 대치상태가 끝난 것은 아론의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렸을 때였다. 아론은 다급히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임시로 만들어 놓은 위조 휴대폰의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프레드 렉터. 함께 Zii 메이슨의 팀원이었던 그는 금고 안 천만 달러 중 삼백만 달러를 주겠다는 아론의 말에 Zii의 내부 상황에 대해 간간이 그들에게 연락을 해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발 긍정적인 소식이 들리길 기대하며 아론은 휴대폰을 연결했다. 휴대폰 너머에서 한가한 음성이 들렸다.
?여어, 살아 있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빨리 상황이나 말해. 설마 처소를 옮겨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론은 날카롭게 물었고 프레드는 흐흐, 낮게 웃었다. ?긴장하긴.? 그는 속편한 것처럼 말했다.
?Zii는 더 이상 메이슨의 시체를 쫓지 않아.?
“……무슨 말이야?”
Zii가 메이슨을 추적하지 않는다고? 그 시체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메이슨의 것이라는 것을 Zii에서 알아차린 걸까? 휴대폰에서 들린 말에 애슐리도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그게 말이야,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Zii는 이번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네??
“손을 떼다니?”
?그게 너든 메이슨이든 상관없이 금고를 들고 튄 일 자체를 없었던 일인 셈 친다고.?
프레드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뱉었고 아론은 눈을 돌려 애슐리를 쳐다봤다. 그녀 역시 놀란 얼굴이었다. Zii가 배신자를 잡지도 않았는데 일에서 손을 떼고 없었던 일로 친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듣고 있던 애슐리가 아론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 폰으로 소리를 키웠다.
“왜?”
그녀는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허황된 말을 믿으라고? 프레드가 두 사람을 배신하고 낚시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거라고 해도 이건 너무 노골적이었다. 프레드는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말이야, 소문인데……. 너 레이칼튼 알지? 그 레이칼튼의 노아가 개인적으로 메이슨을 찾고 있다는 말이 있어. 그래서 Zii에는 손 떼라고 했다고.?
노아가 Zii에 엄청난 스폰서라는 건 알지? ―프레드는 예전에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는 이야기를 했다. 레이칼튼 가에서 Zii에 쏟아붓는 돈을 생각하면 오천만 달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긴 했지만, Zii는 그렇다 쳐도 그가 메이슨을 찾는다고?
“그가? 왜?”
개인적인 친분이라도 있나? 애슐리의 물음에 프레드는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근데 뭐, 당연히 그 금고에 관심이 있는 거 아니겠어??
달리 뭐가 있겠어, 하는 투로 그가 말했다. 그래. 달리 뭐가 있겠는가. 메이슨이 레이칼튼과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닐 거고, 친분이 있다 해도, 친분 정도로 Zii에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나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슐리는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아론을 마주 보았다. 그의 눈에 기대감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프레드는 여하간 잘해보라며 전화를 끊었고, 애슐리는 끊어진 휴대폰을 탁자에 내려놓고 아론을 쳐다봤다.
생각보다 일이 괜찮게 해결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살아남는 것은 물론, 어쩌면 저 금고까지도 팔아치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 정도의 관심이라면 틀림없이 금고를 사주겠지.”
남은 비밀번호를 몰라도 괜찮았다. 레이노아는 그 금고를 만든 장인을 불러다가 그것을 열게 할 수도 있는 남자였다.
금고 안에 들어 있는 게 뭔지, 정말 알타의 말대로 오천만 달러 상당의 재산이 들어 있는 게 아닐 수도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금고 안에 든 것이 쓰레기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거봐. 내 생각은 역시 틀리지 않았어.”
아론은 죽은 메이슨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뭐, 어차피 그는 죽었으니, 자신이 아니라 그가 틀렸다는 건 증명할 필요도 없는 뻔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레이노아를 은밀히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문득, 애슐리의 머릿속에 아까 봤던 드라마 속 한 배우의 시선이 스쳤지만, 아주 잠시였다. 갑자기 바빠진 그녀는 곧 그것을 봤던 것조차 잊고 말았다.
* * *
헐리웃 스타들의 근황이나 사건 사고를 전하는 DBS의 연예정보프로그램, ?The inside?의 이번 주 첫 소식은 대박 행진을 이어가는 감독 빅 프록터의 새 영화에 관한 소식이었다.
화려한 빨간 드레스를 입은 MC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와우, 빅 프록터가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영화 이야기가 첫 뉴스로 뜨나요? 헐리웃 비치들의 수많은 사건 사고를 제치고 말예요. ―어때요, 대니. 그게 첫 뉴스로 뜰만큼 자극적이고 놀라운 소식인가요??
그녀의 말에 대니라는 남자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주 충격적이고 놀라운 소식입니다. 일단 들어보세요.? 그는 속삭이듯 한 손으로 입술을 살짝 가리며 말했다.
?일단 빅 프록터, 그가 멜리사를 울렸답니다.?
?누구요―? ‘그’ 멜리사 아인 말인가요? 맙소사, 요즘 가장 핫한 그녀를 울리다니, 대체 어째서요??
?그게――, 놀라지 마세요. 와우. 헤일리 때문이랍니다.?
짜잔, 하고 놀랍지 않냐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고 MC는 제정신이냐는 듯이 되물었다.
?뭐라구요? 헤일리? 그, 헤일리 러스크 말인가요??
?예, ‘그’ 헤일리 말이죠.?
정말 믿을 수가 없죠. 그렇게 말한 대니는 이어 말했다.
?빅이 최근에 영화를 크랭크인 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잖아요? 체이스 빌러 주연에 그를 받쳐줄 여주인공 역에 멜리사 아인을 캐스팅 해 또 다른 대박작의 행보를 이어가려나, 모두가 기대 중이었죠.?
?누군들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빅과 체이스, 약간 의문부호가 붙기는 하지만 떠오르는 신예 멜리사인데요!?
?예, 예. 맞아요.? 그가 진정하라는 듯이 양손을 까딱이며 말했다.
?환상적인 트리플 플레이가 예상됐지만, 아쉽게도 멜리사는 영화를 하차했습니다. 앞으로는 빅 감독의 B도 듣기 싫다고 선언하면서 말이죠.?
?어머나. 대체 왜 그런 짓을 했죠? 탑배우로 발돋움할 좋은 기회일 텐데요? 흥행과 작품성을 모두 갖춘 빅의 영화를 하차하다니―.?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녀의 질문에 대니는 아주 은밀한 이야기라는 듯이 말했다.
?사실은 하차가 아니라 잘린 거라는 이야기가 촬영장에 아주 파다하다고 합니다. ―말했잖아요. 감독이 멜리사를 울렸다고.?
?멜리사를 자르다니, 왜요? 설마―,?
?그 설마 입니다.? 대니가 단호하게 대답했고 MC는 경악에 찬 소리를 질렀다.
?설마 헤일리 때문에 멜리사를 잘라요!??
MC는 펀치에라도 맞은 양 머리를 빙빙 돌렸다.
?더 놀랄만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빅은 이번 영화에 헤일리를 주조연 급으로 밀기 위해 멜리사를 집으로 돌려보냈을 뿐 아니라 이전에 찍었던 부분을 몽땅 폐기하고 새로운 스토리로 영화를 다시 찍는다는군요.?
맙소사. ―중얼거리듯 말한 MC는 물었다.
?빅이 정말로 미친 걸까요??
빅은 게이도 아니잖아요. 그가 얼마나 애처가인지 내가 안다구요. 그녀가 차라리 빅이 게이라면 이해가 된다는 듯 말하자 대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빅에 말에 따르면 그는 헤일리의 리얼한 연기력에 반했다고 합니다.?
?예? 뭐라구요? 저기요, 대니??
다시 한 번만 말해 줄래요? 예? 그녀는 재차 물었다.
?데뷔한 지 16년, 여전히 엄청나게 초라한 연기력을 자랑하는 그에게, 연기력에 반했다는 말을 했다고요? 빅은 미친 건가요, 아니면 눈이 먼 건가요??
그에게 새 안경이 필요합니까? ―그녀의 믿을 수 없다는 얼굴에 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반응이 당연하죠.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당신, 지난 주 드라마 ‘클루’ 를 봤나요??
?아――, 댄의 죽음 씬 말이군요. 저도 봤어요.?
그녀는 말도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이번 주까지 내내 화제가 된 장면이었죠. 제 주변에서는 하도 난리라 나는 이제 그 댄의 D만 들어도 오금이 다 저려요.?
?왜요? 사실 제법 괜찮은 장면이었잖아요??
?글쎄요. 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그저 헤일리가 평소에 너―무―나 연기를 못했기 때문에 새삼스레 화제가 된 것일 뿐,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았다구요.?
대니는 그녀의 오기로 똘똘 뭉친 말에 작게 웃었다.
?아아, 당신 레이노아의 팬이었죠.?
어깨를 으쓱하며 ?누군들 안 그러겠어요?? 하고 말한 그녀에게 대니는 그건 알고 있냐며 물었다.
?이번 빅의 영화의 최대 투자처가 어딘 줄 알고 있어요? NLC랍니다. 그 레이노아의 투자 회사 말이죠.?
?하?? 그녀가 머리가 터질 것 같다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고 대니는 말했다.
?빅이 제아무리 헤일리를 쓰고 싶었다고 해도 레이노아의 승인이 없으면 불가능 했겠죠. 빅이 이 놀라운 짓을 정말로 저지르고 있다는 건 바로 그 아름다운 남자의 허락이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MC는 대니의 말에 머리가 빙빙 돈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이 모든 정보가 핵폭탄급이었다. 그녀는 이 일련의 사태에 대해 뭐부터 지적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듯 손가락을 돌리다가 한참만에 감상을 말했다.
?얼마 전 노아의 인터뷰는 진심이었군요.?
?인터뷰? 그 동정심 가득한 인터뷰 말인가요? 헤일리를 가엽게 생각한다고 했던, 그 인터뷰 말이죠??
?네―…. 그 인터뷰……. 노아는 그를 진심으로 가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걸까요? 정말 천사인가요, 그 남자?―MC가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이 재차 말했고 대니는 그녀를 향해 안쓰럽다는 듯이 웃었다.
“―….”
커피를 들고 가게 앞을 지나던 메이슨은 전자제품 상점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TV 화면을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려 길을 걸었다.
길을 걷는 동안 저번 주까지는 없었던 묘한 시선들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 헤일리는 몰락해가든 이미 몰락했든, 사람들 눈에 익은 연예인이었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잘나가던 시기도 있었고 그 뒤로 못 나갈 때도 드라마나 영화 등으로 내내 얼굴을 알렸다. 또한 사고는 얼마나 많이 쳤는가. 다른 지역은 둘째 치고 베벌리힐스에 사는 사람이라면 헤일리에 대해 모르기 어려웠다.
때문에 당연히 길을 걷다보면, 아무리 연예인에 쿨한 베벌리힐스라도 늘 약간의 시선이 따라붙었는데 그건 대체로 비호감이나, 경멸, 짜증 등의 시선일 때가 많았다. 가아끔 게이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의 호감 어린 시선이 없진 않았지만, 사실 게이들도 대체로는 헤일리를 싫어했다.
사람들은 늘 그를 향한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고 메이슨은 덤덤하게 그것들을 받아넘겼다. 차가운 시선이 뭐 어쨌단 말인가. 전쟁터에 나가면 다들 서로를 그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총알도 오가는 판에 시선이 오가는 정도야 정겹고 따스하기만 했다. 게다가 메이슨은 원래 남의 시선에 그다지 신경 쓰는 타입도 아니었다. 무신경하고 무심한 인간인 것이었다.
헌데 그런 메이슨도 최근에 시선에는 살짝 신경이 쓰였다. 뭐, 많이는 아니고 아주 약간이었지만 그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변했기 때문이었다.
지난달인가에 찍었던 드라마 클루의 방영일 이후였다. 토니가 드라마를 함께 보자고 팝콘과 피자를 사들고 찾아왔지만 메이슨은 운동이 끝난 후 지쳐 조느라 드라마는 거의 못 봤다.
대체 언제쯤이면 이 몸이 건강해질까, 어쩌면 건강이라는 건 타고나는 거라 헤일리의 육체는 영영 건강해지지 않는 게 아닐까, 내내 이렇게 한 시간 운동하고 나면 죽을 것 같은 몸으로 계속 살아야 하는 걸까, 하고 걱정하며 노곤하게 졸던 메이슨은 토니의 시끄러운 박수소리에 놀라 깨어났다.
토니는 줄줄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감탄을 하는 건지 기도를 하는 건지 모를 희한한 손짓으로 중얼거렸다.
메이슨은 늘 그렇듯 토니가 오버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음 날 클루의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다.
감독은 미안하다고 말하며 자신이 다음에 할 드라마에 꼭 출연해 달라고 말했다.
그의 전화를 끊고 나자 사방에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화가 몇 통 왔다. 어차피 다 모르는 사람들뿐이라 전화를 받지는 않았지만 헤일리가 죽다 살아난 이후에도 연락 한 통 없던 그의 지인들은 어제의 드라마에서 무언가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그에게 연락을 해오고 있었다.
리얼의 감독 빅 프록터는 그 드라마를 보고 나서 더 안달복달했다. 당장에라도 그를 빼앗길 것처럼 빨리 새로 계약을 하자고 메이슨을 달달 볶았다. 너는 내가 발견했다고, 클루의 저 감독은 결국에는 널 자르지 않았냐며, 자기 손을 잡으라고 반쯤은 매달리다시피 계약서를 내밀었다.
토니도 옆에서 메이슨을 달달 볶았고 종국에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왜 안 하겠다는 거야?’ 하고 물었다.
‘오만 달러를 받고 이틀을 찍기로 했잖아요?
어쩌면 하루 안에도 된다면서요? 메이슨은 이들이 왜 당연한 걸 묻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이틀을 찍고 오만달러를 받기로 하다가 좀 더 찍는다는 건 시급이 떨어진다는 이야기였다.
이틀 일하고 오만 달러를 벌 수 있다는 것에 혹해 일을 시작했는데 씬을 늘리자니, 연예인으로서 성공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 메이슨에게는 전혀 메리트가 없는 제안이었다.
너는 톱스타가 되고 나는 부자가 되자, 라고 했던가. ―그걸 말이라고.
메이슨도 톱스타보단 부자가 되고 싶었다. 톱스타 따위 되어 뭘 한단 말인가.
‘더 찍으면 돈 더 줘요? 얼마나 더 주는데요?’
메이슨은 따지듯이 물었다. 그 비율로 한 달을 찍으면 칠십오만 달러였다. 무슨 일을 하든 그런 돈을 받는 건 불가능했고 아니나 다를까, 토니와 감독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니 뭐―…, 물론 엄청나게 많이는 못 주지만…….’
‘리스, 네 이름이 요즘은 많이……. 예전 같지 않고…….’
메이슨은 거 보라는 듯 그들을 쳐다봤다. 이름이 예전 같으면 뭐. 백만 달러라도 준단 말인가.
그러나 그때 빅이 손을 꼽아 계산하더니 ‘근데 그렇게 계산하면 백만도 괜찮지 않아?’ 하고 물었다.
‘오만 달러씩 이틀이면, 한 달 바짝 찍는다고 생각하고 칠십오만 달런데 백만이면 그것보다는 그래도――, 아냐. 미안…….’
역시 이런 계산은 말이 안 되지……. 빅은 어울리지 않게 약간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뭘 준다구요?’
메이슨은 스스로의 귀를 의심하며 물었고 빅은 ‘에?’ 하고 되물었다.
‘뭘 줘요? 백만 달러? 한 달에?’
메이슨이 재차 물었고 빅은 뺨을 긁적였다.
‘아니……, 뭐 한 달보다는 좀 더 걸리겠지 싶기는 한데.’
그래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고 빅이 말했다.
‘내 영화, 그래도 제법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 거라 오래 찍을수록 몇십만 달러씩 추가 비용이 뜨니까.’
‘그러니까 대충……, 한 달에 백만 달러를 준다구요?’
메이슨은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것 같은 얼굴로 물었고 토니는 난처한 얼굴로 ‘리스……, 우리 백만 달러도 많이 받는 거란 말이야.’ 하고 우물거렸다. 메이슨은 그를 돌아봤다.
‘백만 달러?’
‘……미안. 투자자들이 그 이상은 안 된다고…….’
빅은 정말로 미안한 얼굴이었다.
‘정 그러면 내가 사비를 털어서라도 좀 더 맞춰 줄 테니까, 일단 계약부터 하자. 응?’
‘……진짜 줍니까, 백만 달러?’
메이슨은 빅이 하는 말을 흘려들으며 힐끗, 자신에게 진작부터 내밀어져 있던 계약서를 확인했다.
$ 1,100,000.00
아니, 백만 달러가 아니잖아? 심지어 백십만 달러였다. 메이슨은 앞에서 빅과 토니가 ‘그래도 이거 하고 나면 CF같은 것도 좀 들어오고 할 테니까.’ ‘이번에 대박나면 다음 영화는 천만 달러가 될 수도 있다구.’ 하는 소리를 해댔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메이슨이 사막에서 구르고 기고 다치고, 목숨을 팔았다 샀다, 온갖 지옥을 넘나들며 받는 연봉이 사십이만 달러였다. Zii에서도 굉장히 많이 받는 축에 속했고 그런 만큼 남들보다 더 험하고 궂은일을 아주 바쁘게 해야 했다.
근데 백십만 달러. 한 달에――. 천만 달러니 어쩌니 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보다 당장 눈앞에 뜬 빅넘버가 메이슨의 심장에 꽂혔다.
그는 당장 눈앞에 뜬 0의 행진에 홀린 것처럼 펜을 들어 사인을 했다. 쩔쩔 매는 두 사람을 의식해 마지못해 사인한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살짝 손이 떨렸다. 신체 포기 각서를 쓰던 순간에도 떨리지 않던 손이었지만, 뭐. 이틀에 오만 달러도 모자라 한 달 남짓에 백만 달러라니, 떨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로,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기분이었다.
“―….”
TV에서 시선을 돌려 길을 걸어가며 메이슨은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새 인생이 몇 번이나 바뀌었나 생각했다.
죽기 전만 해도 평범한 용병이었는데 깨어나보니 헐리웃의 사고뭉치가 되어 있더라, 까지만 해도 엄청난 변화였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 달은 짧지만 또 긴 시간이었다. 완전히 변했던 메이슨의 인생은 그 한 달 사이 다시 계속해 변하고 있었다.
일단 최근에는 TV에 나오는 자신의 얼굴이 아주 남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저게 내 얼굴이구나, 하는 정도는 인식했다. 초반에 전혀 남처럼 느껴져 화장실 거울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던 것에 비하면 아주 대단한 변화였다.
“저기, 헤일리? ―사인 한 장만 해주실래요?”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돌아보자 젊은 여자애들 두 명이 눈을 반짝이며 서있었다. 이런 것도 그 한 달 남짓한 사이 달라진 점 중 하나였다.
메이슨은 그녀가 건넨 펜을 받아 그녀의 노트에 사인을 해주며 살짝 웃었다. 얼굴을 붉히는 두 사람에게 펜과 노트를 돌려주며 인사하고 돌아서자 등 뒤에서 꺅, 하는 여자애들다운 환호가 들렸다.
여전히 차가운 시선이 대부분이고 짜증이나 경멸도 여전했지만 그래도 아주 약간은 분명 변화가 있었다. 아주 아주 드물었지만 팬, 혹은 호의를 보내오는 사람이 생긴 것이었다. 아무리 타인의 시선에 무감한 메이슨이라도 비호감보다 호의가 낫다는 건 자명했다.
당장 일이 없어 연예인 일을 그만두네 마네 하다가 갑자기 백십만 달러를 받으면서도 감독과 매니저에게 달달 볶이며 계약하는 배우가 되었다.
헤일리의 몸에서 깨어났던 그 충격적인 순간에도 사는 건 어디나 다 똑같지 않나. 아니, 오히려 새로운 기회로다,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메이슨조차도 이 격변하는 현실에는 잠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대체 이 인생이 어떻게, 어디까지 변할 지 메이슨은 짐작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근처 카페를 돌며 커피를 한 잔씩 사 마시고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오늘의 일과’를 마치고 적당히 저녁거리를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근처를 약간 돌며 각 카페 사이의 거리와 유동 인구를 살폈지만 딱히 여기다 하는 곳은 오늘도 찾을 수 없었다.
뭐, 당장은 영화를 찍어야 하니까 어차피 카페를 차릴 수야 없겠지만―…, 하며 돌아본 메이슨은 집 앞에 누군가가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쪽도 메이슨을 발견했는지 벌떡 일어나 걸어 나오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리스!”
메이슨은 살짝 미간을 구겼다. 헤일리의 사촌 조이였다. 그녀는 전에 봤을 때보다 약간 마르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거기 서있었다.
“리스, 잘 지냈어?”
그녀는 쭈뼛쭈뼛하게 다가오며 물었다. 눈치를 살피는 듯한 시선에 메이슨은 싸늘한 눈을 하는 대신 빙긋 웃었다.
“응. 무슨 일이야?”
메이슨이 빙긋 웃자 조이의 안색이 살짝 밝아졌다. 드디어 이 바보 헤일리의 화가 풀린 건가, 하는 눈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오며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저기,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 할까? 나 할 이야기 있는데―,”
“그냥 여기서 해.”
메이슨은 웃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밝아졌던 그녀가 멈칫했고 메이슨은 이어 물었다.
“왜 왔어?”
생글거리며 웃고 있지만 용건만 빨리 말하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질 말투였다.
“리스……, 너 진짜 왜 그래?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
그녀는 울먹울먹하더니 갑자기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어떻게 계속 이렇게 화를 낼 수가 있어?”
“화? 화 안 났는데, 나.”
메이슨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이 화를 낼 이유는 아무데도 없었다. 헤일리의 가족들이 헤일리를 뜯어 먹는 건 완전히 남 일이었으니까. 물론 벌레 같은 인간들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건 메이슨 개인의 가치관 문제일 뿐이었다.
“리스…―, 제발 용서해줘. 내가 다 잘못했어, 응?”
그녀는 불쌍한 얼굴로 울었다. 헤일리와 제법 닮은 구석이 있는 예쁘장한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돈 문제가 아니야. 내가 여태까지 정말 너무했지? 네가 주는 생활비로 먹고살고 네게 완전히 의지하면서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한 적 없고.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네가 용서만 해준다면 뭐든 할게. 제발. 제발, 리스―.”
날 용서해줘―. 그녀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메이슨의 다리에 매달렸다. 자신이 다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후회와 자책으로 가득한 얼굴로 그녀가 울었다. 메이슨은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내 용서가 필요한 거야?”
눈물을 흘리며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메이슨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알았어. 뭘 용서해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다 용서할 테니까 이제 가봐. 나 저녁 먹고 대본 봐야 해서.”
토니가 오늘 새 대본을 가지고 온다고 했다. 새 대본을 받고 나흘 후부터 바로 촬영. 저녁 먹고, 대본을 읽어보고, 그리고 운동 한 시간을 하고 나면 하루가 다 끝나 있을 터였다. 운동을 하고 나와서는 기절하듯 잠들 테니까.
메이슨은 그녀에게 붙잡힌 다리를 빼내고 툭툭, 옷자락을 털었다. 생각보다 너무나 쉽게 용서를 얻어낸 그녀는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그, 그럼 이제 다시 생활비 주는 거야? 빚도 안 갚아도 되고?”
“내가 왜?”
“요, 용서 해준다며?”
메이슨은 헤일리를 비롯, 이들 식구는 혹시 전체적으로 머리가 나쁜 걸까 잠깐 고민하며 말했다.
“용서는 네가 해 달래서 해준 거고. 내가 화나서 이러는 거 아니라고 했지? ―돌아가, 조이.”
메이슨이 손가락으로 휘휘 꺼지라고 말해주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더 울음을 터뜨렸다.
“리스, 정말 계속 그럴 거야? 이제 충분하잖아. 나 네 돈 안 갚는다고 차압 들어왔어. 당장 다음 주면 아파트에서 쫓겨나게 생겼다구!”
아파트에서 쫓겨나면 나랑 내 아이는 어떻게 살아? 나 이혼하고 돈도 없는데. 지금 생활비도 없어서 밥 먹는 것도 아껴 먹어야 하는 거 알아? 그녀는 자신의 기구한 사정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았다.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야.”
메이슨은 살짝 한숨을 쉬며 되물었다.
“뭐? 무슨 상관이냐구? 너, 넌 동정심도 없니? 어떻게 그럴 수가,”
“내가 날 죽이려던 사람들에게까지 동정심을 발휘해야 할 이유는 또 뭐야? 너, 내 호흡기 떼다가 나랑 눈 마주친 거 잊었어?”
메이슨의 말에 그녀가 멈칫 하더니 “그건 그냥…, 자, 장난친 거야!” 하고 말했다. 변명조차도 머리가 나빴다. 메이슨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웃었다.
“우와, 뭐 이런 또라이 같은 년이 다 있어? 넌 네 생활비 대주는 고마운 사람이 옆에서 죽어 가는데 호흡기 가지고 장난을 쳐?”
“아, 아니 그건…―,”
여하튼 미안해. 그녀가 할말이 없는지 다시 메이슨의 다리를 붙잡았다.
“다른 친척들은 다 너랑 사이가 안 좋아도 나만은 아니잖아! 리스, 응? 생활비 주는 게 부담 되어서 그런 거라면 나라도, 나만 주면 되니까―. 알지? 다른 사람들은 다 사실 살 만한데 그러는 거야. 이렇게 찾아오는 것도 나뿐이잖아, 응?”
제발, 리스. 나는 진짜 진짜 힘들어……. 그녀가 매달리며 말했고 메이슨은 그녀를 향해 참 지겹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쩜 이렇게 다들 똑같이 말하는지 모르겠다. 과연 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건가? 안나, 제이슨, 산드라, 하다못해 누군지도 모르는 인간까지 와서 자기만이라도 도와달라고 전화에 뭐에…, 안나는 어떻게 알았는지 촬영장에 따라와서 매달리고 행패를 부리다 경찰에게 잡혀갔어. 아직 소식 못 들었어?”
“뭐, 뭐…?”
“네가 제일 늦었다고, 멍청아.”
메이슨은 힘 빠진 그녀의 팔에서 다리를 빼내며 말했다.
“네가 울고 빌면서 잘못했다고 하면 ‘그래 알았어. 앞으로 잘해.’ 라고 하며 계속해서 호구로 살던 걘 죽었어. 기억나지? 네가 호흡기를 뗐잖아.”
메이슨은 날도 더운데 왜 자꾸 들러붙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지나쳐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리스! 리스! 리스으으!”
그녀가 울며불며 매달렸고 메이슨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녀를 무시했다. 메이슨은 우는 사람에게 다소 약했지만 그건 눈물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에 한해서였다. 토니라든가, 혹은 노아라든가…….
문을 닫기 위해 매달리는 그녀를 밀어내자 그녀가 문을 붙잡고 입술을 깨물며 노려봤다. 울며불며 매달리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는지 그녀가 독기 어린 눈으로 말했다.
“너 이제 잘나간다고 가족들을 버리는 거야? 빅 감독 영화 한 편에 인생이 바뀔 것 같지?”
메이슨은 무심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스캔들 한 번이면 박살나는 게 연예인이야. 네가 지금 좀 잘나간다고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메이슨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지랄하네. 그런 눈으로 쳐다보자 그녀는 흠칫하더니 부들부들 떨었다. 메이슨은 그녀를 떼어내고 대문을 닫았다.
“두고 봐! 후회하게 될 테니까!”
두고 보라고! 그녀가 악을 쓰는 소리가 대문 너머로 들려왔다. 집 안에 있던 토니가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 나왔지만 메이슨은 그 욕설이 안 들리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 걸레 같은 년아! 두고 보라고!!”
대문밖에서 헤일리의 뒷모습을 보며 온갖 욕설을 뱉으며 저주한 조이는 그가 기어코 한 번 돌아보지도 않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가자 이를 깨물며 “아아아악!” 하고 미친년처럼 소리를 질렀다.
일부러 기껏, 날도 더운데 지저분한 옷을 입고 화장도 하지 않은 채 불쌍한 얼굴로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를 기다렸다.
헤일리의 부모가 죽은 지 십 년. 그 뒤로는 쭉 툭 치면 돈을 뱉는 ATM기계처럼 그를 생각하며 살았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로 쉽게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만 달러가 툭툭 떨어지고, 영화 한 편 하면 백만 달러니 뭐니 쉽게 통장에 착착 쌓였다. 토크쇼에 나가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다음 날 그의 팬들이 고생했다며 명품 가방을 보내온 일도 있었다.
그렇게 쉽게 버는 돈이니, 자신처럼 힘들고 어렵게 사는 친척을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헤일리도 그들의 친척이 추레하게 하고 다니면 창피하지 않겠는가.
자신은 정말로 힘들게 살고 있었다. 헤일리가 주는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늘 빠듯하게 살았다. 갖고 싶은 에르메스 가방은 너무 비싸 엄두도 못 내고 들던 가방만 들었다. 헤일리, 지는 갖고 싶은 가방이나 구두가 생기면 얼마든지 척척 사는 주제에 자신이 가방 하나 달라고 하면 늘 아까운 얼굴을 했다.
헤일리가 주는 생활비가 부족할 때는 가끔 그의 사생활을 잡지에 팔아 용돈을 벌었다. 헤일리는 멍청해서 조금만 구슬리면 누가 자기를 꼬시더라, 요즘 자신은 누가 좋다, 자위 기구를 샀는데 너무 크더라, 하는 이야기를 창피한 줄도 모르고 줄줄 뱉었고 그런 이야기들은 조이의 삶에 보탬이 되었다.
어차피 연예인이란 씹히라고 있는 거니까 별로 죄책감도 없었다. 자신이 없는 이야기를 판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헤일리는 자신이 기사를 팔아서 용돈을 벌 때마다 화난 얼굴로 ‘조이!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하고 울었다. 생활비고 뭐고 안 주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조이는 그를 달래고 얼렀다.
미안하다 사과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빌고, 그 구두가 너무나 갖고 싶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설득하고, 그러니 네가 사줬으면 이런 일은 없지 않냐 화내고, 그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눈물 콧물을 빼고 나면 그는 시무룩한 얼굴로 자신을 이해해주곤 했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대뜸 독촉장부터 보내온 것에서 평소와 다르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평소에 비해 좀 더 화가 난 것일 뿐 어차피 잘 구슬리면 금세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헤일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냉정한 어투로 넌 모자란 병신이냐고 쏘아붙이더니 가방에서 꺼낸 총을 허공에 쏘아붙이고 무서운 얼굴로 웃었다.
“이익……!”
그때의 헤일리가 너무 무섭고 짜증나고 화가 나서 한동안은 너 따위에게 생활비 안 받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집에 차압이 들어오고 월급을 못 받은 베이비시터들이 출근하지 않자 다시 헤일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웃으면서 구슬리려고 했던 것이 실수였다고, 이번에는 울면서 불쌍하게 매달려 동정심을 자극하리라 생각했다. 헤일리는 정이 헤픈 타입이었으니까.
하지만 착각이었다. 헤일리는 화난 표정이 아니라 무심하고 덤덤한 표정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 같은 눈이었다.
‘네가 울고 빌면서 잘못했다고 하면 ?그래 알았어. 앞으로 잘해.? 라고 하며 계속해서 호구로 살던 걘 죽었어. 기억나지? 네가 호흡기를 뗐잖아.’
그의 말대로 이전의 병신 같던 헤일리는 호흡기를 뗀 것과 동시에 어디론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
이대로라면 가지고 있는 가방, 신발도 모두 팔아치워야 할 판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아파트와 페라리가 경매에 넘어가는 건 당장 다음 주였다.
조이는 입술을 깨물고 분을 참다가 다시 “아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헤일리가 들어간 집 문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돌아섰다.
“이대로 쉽게 끝나진 않을 거야, 헤일리.”
두고 보라구. ―그녀가 표독스럽게 중얼거리며 아득, 손톱을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