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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덜 마음이 아플지 모르겠습니다.?
리포터의 입술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세차게 부는 바람 탓인지 아니면 마음의 충격 탓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좋아하던 스타가 간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할 때처럼 비통하고 끔찍한 얼굴을 한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
?The inside 시청자 여러분,?
The inside 시청자 여러분. 그렇게 말한 리포터는 숨을 삼켰다. 정말로 하기 싫은 말을 뱉는 것처럼 입매를 일그러뜨린 그녀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조금 전 영화 ‘리얼’의 촬영 현장에서 레이노아가 헤일리, ―예. 그 망나니 헤일리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취재진들이 가득한 공개적인 자리에서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절규하는 그녀의 옆으로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카메라맨이 찍은 영상이 공개되었다.
하얀 벤츠를 타고, 마치 백마 탄 왕자님처럼 나타난 노아는 헤일리를 쥐 잡듯 잡아대던 취재진들을 가르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모두를 얼음 동상으로 만드는 말을 한 뒤 헤일리의 손을 잡고 촬영장을 떠났다.
‘당연히 데이트죠.’
상큼하게 웃는 노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촬영장은 고요해졌고 사람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그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영화 노팅힐에서처럼 영리한 촬영진들이 두 주인공의 사진을 찍어대는 일 같은 건 없었다. 모두, 하나같이 얼빠진 얼굴로 눈만 끔뻑대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를 얼려버린 두 사람이 어디로 갔냐구요??
리포터가 고발하듯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켰고 카메라가 그녀를 따라 이동했다. 새파란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곳, 그 아름다운 바다 끝에 여객선처럼 거대하고 아름다운 요트가 손톱만 하게 보였다.
노아의 요트, 라케시스였다.
벤츠를 타고 떠난 두 사람은 가까운 헬기 착륙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헬리콥터를 타고 그 초호화 요트에 승선했다.
?가까이서는 찍을 수가 없습니다. 안티 파파라치 시스템 때문에……, 빌어먹을 안티 파파라치, 왜, 왜 카메라를 들이밀면 레이저가 쏘아져 오는 겁니까.?
바람이 미친 듯이 휘날리는 헬리콥터 문 옆에 위험천만하게 선 그녀는 자신의 안위 따위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듯 호화로운 요트를 쳐다보며 원망스러운 눈을 했다.
?도대체 정부는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빨리 파파라치 법을 개정해서 안티 파파라치 시스템 따위, 없애버리세요!?
사생활 따위가 다 뭐람! ―그녀는 이성을 잃은 듯 거칠게 중얼거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의 눈은 당장에라도 저 요트 갑판 위로 뛰어내리고 싶은 것처럼 흔들렸다. 아니, 실제로도 그녀는 그럴 용의가 넘쳤지만 멍청한 헬기 조종사가 배 근처로 그녀를 내려주질 않았다. 그저 요트가 먼 바다로 떠나가고 있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너무나 궁금해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우울한 얼굴로 요트를 바라보며 그녀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대체 두 사람은 요트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정말로 데이트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남자 노아 레이칼튼과 가장 경멸받는 남자 헤일리 러스크가 정말로 데이트를 하고 있는지, 온 미국인이 한마음으로 궁금해할 따름이었다.
* * *
“―내리지 않고 뭐해요?”
앞에서 들린 물음에 메이슨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노아가 나른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혹시 손이라도 잡아줘야 하나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더니 물었고 메이슨은 “아, 아닙니다.” 황급히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잠깐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핀 메이슨은 주춤하며 헬리콥터에서 내렸다. 하얀 갑판 위로 발을 내딛자 새파란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넘실대는 파도 위에서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헬리콥터 앞으로 하얀 유니폼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기립해 고개 숙이고 있었고 필과 노아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바다, 그리고 아름다운 금발의 남자. 호화 요트 위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황홀한 광경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지만 메이슨은 감탄 대신 숨을 들이켜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망망대해. 말 그대로 바다 한가운데, 사방을 둘러봐도 육지라곤 보이질 않았다. 조금 전까지 촬영장,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미친 건가요, 헤일리?’ ‘이번엔 무슨 약물이죠?’ ‘왜 그랬습니까? 의도가 뭡니까?’ 하고 악다구니 쓰는 것을 듣던 중이었는데 왜 갑자기 바다 한가운데에 뜬 거대요트의 갑판 위에 서 있는 걸까.
메이슨은 처음 헤일리의 몸에서 눈을 떴을 때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작금의 상황에 넋을 놓았다.
“저는 간단히 먹을 만한 걸로 주세요. ―아, 샌드위치는 빼구요. 내일부터 당분간은 또 필이 제게 매끼 샌드위치만 먹이며 일을 시킬 테니까.”
얄궂게 웃은 노아가 요리사로 보이는 남자에게 주문하며 메이슨을 돌아봤다.
“당신은요?”
“…―예?”
“점심 말이에요. 뭐가 먹고 싶어요?”
말하면 아무거나 다 튀어나올 것처럼 노아가 물었고 메이슨은 “아뇨, 전 별로―.” 하고 대답했다.
“뭐라도 먹는 게 좋을 텐데요. 언제 내릴지 모르거든요.”
노아는 갑판 아래로 걸어 내려가며 심상한 어조로 충고했다. 갑판에 선 메이슨은 노아의 뒷모습을 보다가 어정쩡하게 요리사를 돌아보았고 그는 상냥한 얼굴로 빙긋 웃었다.
“일주일 정도는 질 좋은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늘 준비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이요?”
메이슨은 눈을 굴리다 “어, 그럼 저도 뭔가 간단하게……,” 하고 중얼거리다 문득 말을 바꿨다.
“아니, 이왕이면 열량이 좀 되는 종류가 좋겠네요.”
“예?”
“그러니까…, 물에 빠져도 버틸 수 있게요.”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메이슨은 이 바로 다음 순간에 노아가 자신을 바다에 밀어 넣더라도 놀라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했다. 너무 예상치 못한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니 사람이 자꾸 머저리처럼 굴게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인생은 평탄하다고, 이전에 삶에 비하면 산들바람이 부는 정원에 서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총탄이 날아드는 정도는 아니라도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는 이전의 삶보다 버라이어티 할 수도 있었다.
아니 확실히, 노아 레이칼튼에게 공개 데이트 신청을 받는 것보단 총에 맞아 죽는 쪽이 평범한 인생이었다.
요리사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수영을 즐기기에 좋은 날씨죠.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하며 웃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수영복과 오일을 준비해드릴까요?”
노아가 내려간 계단 앞에 서서 메이슨을 쳐다보고 있던 필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조금 다가가자 무표정 사이로 언뜻 ‘이 상황에서 수영을 하겠다니, 뇌가 없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는 감정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나중에 물에 빠지면 구명 튜브나 던져주세요.”
메이슨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그는 묘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노아가 내려간 계단으로 향했다. 메이슨은 그를 따라 아래층 갑판으로 내려갔다.
좀 높다 싶더니 요트는 호화롭게도 지상만 4층짜리였다. 난간 아래로 보이는 가장 아래층에는 너른 수영장이 아름다운 파란 빛으로 찰랑거렸다. 비치베드며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파빌리온, 술병을 늘어놓은 바까지 제대로 갖춰진 프라이빗한 수영장이었다. 하긴. 요트 위에 헬기 착륙장이 두 개나 있는데 수영장이 대수일까. 이런 요트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타 보는 것은 처음이라 메이슨으로서도 제법 눈이 호강한다 싶었다. 돈이 좋긴 좋다니까. 메이슨은 중얼거리며 필을 따라 배의 내부로 걸었다.
내부는 갑판보다 안락했다. 한쪽은 완전히 창으로 트여 답답하지 않으면서도 습기 어린 바닷바람 대신 시원하고 달큼한 향의 바람이 불었다. 바닥은 발목까지 올라오는 푹신한 카펫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벽면은 갤러리에 온 것처럼 세련되게 꾸며져 있었다.
“엄청 좋은 요트네요.”
요트가 아니라 최고급 호텔 내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에 중얼거리자 필이 힐끗 메이슨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에드거 레이칼튼 씨가 아들의 18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HVW Novis krug사와 유명 건축가 메이 버먼에게 특별 주문 제작한 물건입니다. 아들이 늘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곳곳에 담겨 있죠.”
“……그래요?”
생일 선물로 요트를 건네다니, 어느 구석에 담겨 있다는 건지는 몰라도 확실히 그 아버지의 마음이 크기는 했다.
생각해보면 10년 전에도 노아의 부모는 약간 극성이다 싶을 만큼 그에게 정성이었다.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꺼질세라, 온 신경을 아들에게 기울인 채 전전긍긍했다. 심지어는 일개 보디가드인 자신에게까지 조심하고 신경 쓰는 기색이 역력할 정도였으니까, 뭐.
물론 그때의 노아는 누구라도 과보호와 익애를 건네고 싶을 사람이긴 했다. 노아는 지금도 아름답지만 그때는…, 뭐랄까, 신경질적이고 도착적인 프랑스 소설에 나올 것 같은 위험한 분위기가 있었다.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아름다운 소년, 노아가 하얗게 질려 떨고 있을 땐 건조하다 못해 바짝 말랐다는 평을 듣는 메이슨조차도 그의 젖은 머리칼을 넘겨주고 어깨를 도닥이지 않을 수 없었다.
“…….”
어제도 사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그 어릴 적 모습이 눈에 밟혀서 그만……. 괜한 오지랖을 벌였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오랫동안 후회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앞으로 생길 일에 대한 대비를 하는 쪽이 나았는데―, 메이슨은 힐끗 필을 쳐다봤다.
“근데 레이칼튼 씨는 바쁘지 않나요?”
촬영장이나 여타 장소에서 만나게 되어도 한 시간 이상은 시간을 빼지 않는 것 같던데, 하고 묻자 필은 습관적인 것처럼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오늘은 모든 스케줄을 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하루 종일이군요.”
메이슨은 놀라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종일 빼라고 지시했다니, 확실히 열량 높은 식사를 달라고 하길 잘했다.
“바쁘신 와중에 하루나 시간을 빼주시다니, 제게 중요한 볼일이라도 있으신 걸까요?”
메이슨은 넌지시 물었고 필은 어느 문 앞에서 멈추었다.
“글쎄요. 저로서는 거기까지는 들은 바가 없어서요.”
문고리를 붙잡고 돌아선 그가 메이슨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나야말로 궁금하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필은 문을 열어주면서 말했다.
“그럼 모쪼록, 좋은 시간 되십시오.”
문이 열렸고 새파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정경 좋은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 가운데, 바다를 보고 있던 노아가 메이슨을 돌아보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필은 문 앞에서 주춤거리는 메이슨에게 말했다. 메이슨은 왠지 묘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이 비유가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부비트랩이 잔뜩 깔린 적진에 맨몸으로 걸어 들어갈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문 안으로 두어 걸음 걸어가자 뒤에서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노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고 메이슨은 살짝 머리를 긁적이다가 의자 쪽으로 걸어가며 최대한 덤덤한 투로 물었다.
“잠깐 봤지만 요트가 끝내주네요. 생일 선물로 이런 걸 받으면 기분이 어때요?”
“귀찮고 번거롭죠. 타고 다닐 시간도 없는데.”
‘날아갈 것 같아요.’,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쁘지는 않죠.’ 와 같은 부드러운 말을 기대했던 메이슨은 “…―요트가 귀찮고 번거롭기는 하죠.”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요트, 좋아하나 보죠?”
“이런 걸 싫어하는 사람은 레이칼튼 씨 정도밖에 안 될 것 같은데요.”
오는 길에 보니 스파spa니 시어터룸theater-room이니 당구대에 퍼팅 필드까지, 석 달 열흘을 갇혀 있어도 심심해 죽을 일은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바다를 항해하는 것도 모자라 여가 시설이 갖춰져 있는 환락의 상징이라니, 이런 걸 귀찮고 번거롭다고 말할 수 있는 노아가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노아는 “싫어하는 정도는 아니고.”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식사는 시간이 좀 걸리겠다는군요. 딱히 배가 고플 시간도 아닌 것 같아서 조금 뒤에 달라고 했는데, 괜찮겠죠?”
메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가 자신을 바다에 밀어 넣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당장은 아니었다.
“식사가 오기 전에 할 수 있는 게 몇 가지 있는데,”
노아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테이블 아래를 보자 작은 서랍이 딸려 있었다. 파인 홈을 잡아 서랍을 열자 안에서 몇 가지 소일거리 삼을 만한 것들이 나왔다.
체스, 카드, 젠가, 그리고 약간의 콘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노아가 손을 뻗어 바삭, 은색의 콘돔 봉투를 집어 들었다. 메이슨이 흠칫, 눈을 굴렸고 노아는 별반 관심 없다는 듯 집었던 콘돔을 툭 던져두고 카드와 칩을 꺼내 들었다.
“카드 정도는 칠 줄 알겠죠?”
잠깐 놀라 숨을 삼켰던 메이슨은 “약간은.” 하고 재빨리 서랍을 닫았다. 메이슨의 앞 의자에 앉은 노아는 능숙하게 카드를 섞었다.
“뭔가 걸까요?”
그가 심상한 어투로 물었고 메이슨은 “20달러부터?” 하고 물었다. 판돈을 키우더라도 시작은 작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노아는 “이왕 거는 거, 서로가 원하는 걸 거는 게 낫겠죠.” 하더니 잠시 생각하듯 카드를 이리저리 섞다가 말했다.
“어때요? 내 쪽이 지면 이 요트를 주죠.”
그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이거.” 하고 웃었다.
“……. ……이 요트가 어지간히도 싫으신 모양이네요.”
아니면 자신을 요트 정박비와 기타 유지비로 파산하게 만들려는 속셈이거나. 입술을 달싹인 메이슨이 겨우 말하자 노아는 피식 웃었다.
“카드를 제법 잘 치나 보죠? 내가 이길지도 모르는데요.”
“……그건 그렇기는 한데.”
메이슨은 말끝을 흐렸다. 물론 그가 이길 수도 있었지만 그럴 확률은 크지 않았다.
그에게 카드를 가르친 건 다름 아닌 10년 전의 메이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지난 10년간 카드 기술을 얼마나 갈고 닦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열일곱 살 노아는 카드 게임에 별 재능이 없었고 메이슨은 간혹 지갑에 돈이 모자랄 때면 카드로 저녁 값을 버는 사람이었다.
“근데 전 드릴 게 변변치 않은데요. 집을 걸 수도 없고.”
“내가 그쪽 집 따위 받아서 뭘 하겠어요.”
파는 것도 관리하는 것도 귀찮고. 노아는 쓰레기를 주겠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단호하게 거절하며 메이슨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하긴. 내기는 걸만한 게 비슷해야 하는 법인데.”
내가 자선 사업가도 아닌데 말이죠. 노아는 탐탁잖아 하는 시선으로 보더니 말했다.
“뭐, 내가 이기면 받을 건 다음에 생각이 나면 이야기하도록 하죠. 받고 싶은 게 없으면 안 받을 수도 있고.”
마치, 어차피 내가 이길 텐데, 하는 투로 노아는 눈을 휘어 웃었다.
“너무 가볍게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메이슨으로서는 나쁠 게 없는 이야기였지만 노아는 과시하듯 촤르륵 카드를 섞었다.
“글쎄요. 별로 대단한 내기도 아닌데요, 뭐. ―식사 전 간단한 유흥에 약간의 스릴을 더할 뿐이죠.”
질 리도 없지만, 진다고 쳐도 약간의 스릴을 위해서라면 이런 요트는 몇 척쯤 잃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때요?”
카드를 받을 겁니까? 노아의 물음에 메이슨은 살짝, 이건 너무 유리한 게임인데, 하고 망설였다. 사실 이렇게 좋은 조건으로 유혹하는 게임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함정일 확률이 높았다.
“돌리세요, 카드.”
그러나 곧 메이슨은 목을 꺾고 양손을 깍지 껴 몸을 풀며 말했다.
노아는 10년 전처럼 가볍게 웃으며 카드를 돌리기 시작했다.
* * *
노아의 실력이 제법 는 것은 사실이었다. 10년 전, 똑똑하고 약은 성격에 반해 포커만큼은 잘하지 못하던 그의 앞에도 그럭저럭 칩이 쌓여 있으니 말이었다.
“오늘 내게 운이 좀 따르나 보네요.”
노아는 바닥에 깔린 카드를 보며 여유롭게 말했고 메이슨은 난처한 얼굴로 이마를 쓸어내렸다.
“아, 확실히 말이죠.”
쌓인 칩을 쓸어가는 노아의 손을 아쉬운 척 쳐다본 메이슨은 트리플이 나온 카드를 슬쩍 카드 더미에 덮었다.
노아의 실력이 제법 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뛰어난 것은 또 아니었다. 표정을 숨기는 것은 잘하는 편이었지만 몇 판 내리 이기자 쉽게 배팅액을 올리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슬슬 다음 판 즈음에선 적게라도 이겨서 노아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가 패를 나누며 물었다.
“밖에서 뭐라고 떠들어대고 있을지, 별로 걱정은 안 되나 보네요.”
“레이칼튼 씨가 미쳤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제게 협박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어떤 사진을 찍혔기에!’ 라고 말이죠.―주어진 카드를 확인한 메이슨은 덤덤히 말했고 노아는 낮게 웃었다.
“되레 당신이 걱정해야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저야, 이미지가 바닥을 찍다 못해 파고들었고.”
요즘 조금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헐리웃 비치의 실례實例로 소개되는 헤일리 러스크였다. 노아와의 스캔들로 전 국민이 그의 안티가 되겠지만 메이슨은 원래 총칼 든 적군들 사이에서도 쿨쿨 잘 자던 사람이었고 연예인 일을 못하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백십만 달러는 물론 큰돈이고 아쉽기는 했지만 먹고사는 게 힘든 정도도 아니고 괜찮았다.
사실 먹고사는 게 당장 급하대도 멀쩡한 몸뚱이로 혼자 먹고사는 정도도 못할까. ……물론 헤일리의 육체는 멀쩡하다고 말하기 미묘한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여하튼.
“난 이미지로 먹고사는 직업이 아니라서요. ―더 걸 건가요?”
카드를 확인한 노아가 물었고 메이슨은 칩 네 개를 내밀며 말했다.
“먹고사는 거야 아쉽지 않으시겠지만 굳이 좋은 이미지에 먹칠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중얼거리듯 말한 메이슨은 힐끗, 노아가 손으로 덮고 있는 카드를 쳐다봤다. 메이슨의 패는 투페어였다. 아주 좋은 패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나쁘지도 않았다. 노아는 자신의 패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조금 망설이다가 네 개의 칩을 더 걸었다. 그가 저렇게 한 번 더 확인할 때는 패가 아쉽다는 이야기였다.
“오픈할까요? 아니면 좀 더 걸래요?”
메이슨이 묻자 노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테이블 위로 패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이번엔 내가 졌나요?”
노아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고 메이슨은 약간 멈칫했다가 말했다.
“아뇨. 오늘 전 정말로 안 되는 날인가본데요.”
노아의 패는 같은 투페어였지만 메이슨이 든 것보다 숫자가 높았다. 이번엔 정말로 단순히 운이 없었다.
너무 많이 져줬나, 메이슨이 남은 칩을 눈대중으로 세며 슬슬 위험할지도, 하고 생각할 즈음 노아가 다시 패를 섞었다.
“어릴 때 말이죠……,”
카드를 나누며 그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굉장히 갖고 싶은 게 있었는데 못 가진 적이 있었거든요.”
메이슨은 그가 준 카드를 확인하며 “당신이요?” 물었다. 호화 요트를 생일 선물로 받고도 귀찮고 쓸모없다고 말할 정도로 귀하게 자란 그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한 적이 있다는 말에 메이슨은 헛웃음을 지었다.
“작은 섬나라라도 갖고 싶었나 보죠?”
“그런 거였다면 그냥 사면 됐겠죠. 그런 게 아니라―…,”
패를 보던 노아가 문득 고개를 들어 메이슨을 바라봤다. 노아의 녹색 눈동자가 묘한 빛을 흘렸고 메이슨은 멈칫해 그를 쳐다봤다. 어딘가 옷자락이 걸린 것처럼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억지로 빼앗거나 강제로 손에 쥐지 못할 건 아니었는데, 그럴 생각도 못할 정도로 그게 귀했던 거죠. 나 따위가 가져도 되나, 혹시 상처라도 나면 어쩌나, 내가 가지려고 억지를 부리다 부서져 버리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레이칼튼 씨?”
이런 이야기를 자신이 들어도 되는 건가. 메이슨이 의아해 부르자 노아는 시선을 돌려 카드 판을 쳐다봤다.
“미움 받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죠.”
그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에게 메이슨은 유일신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을 구원하는 단 한 명의 구원자.
10년 전, 메이슨에게는 노아가 주인이고 고용주였지만 노아에게는 그 상하관계가 반대였다.
노아는 진창에 빠져서 구조자를 기다리는 조난자였고 그를 구할 수 있는 건 세상에서 단 한 명, 그를 그 작은 가방에서 건져내 안아주었던 남자, 메이슨 테일러뿐이었다. 혼자서는 죽어도 그 진창을 나갈 수가 없는데, 메이슨만이 그를 구할 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메이슨이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다면 노아는 영원히 그 어둡고 숨 막히는 구덩이에 내던져진 채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아프간으로 떠나겠다는 메이슨을 앞에 두고 노아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그를 가두거나 협박해서 떠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했다.
그가 돌아서서 나가던 그 때, 미칠 것 같아서 큰 소리로 울며 붙잡고 싶었지만 그가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그…, 옆집 강아지 이야기예요?”
메이슨은 살짝 눈치를 살피며 물었고 노아는 한 장의 카드를 뒤집으며 “보통은 말이죠,” 하고 심드렁히 말했다.
“보통은 이런 경우 사람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게 쉽지 않아요?”
강아지라니. 이게 농담할 타이밍이냐는 듯 쳐다보는 노아의 시선에 메이슨도 카드를 뒤집으며 말했다.
“아니, 사람이라면―…, 당신이 그렇게 간절히 바라고 소중하게 대해주는데 마다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서요.”
메이슨이 생각하기에는 확실히 그랬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평범한 남자라면 몰라도 노아 레이칼튼이었다. 재력이든 권력이든 세계 피라미드 정점에 서 있는 사람. 성격은 좀……, 아니, 상당히 나쁜 편이었지만 그 예민하고 연약한 정서와 고고하고 까칠한 성미도 인간적으로 대면하고 있자면 상당히 매력적인 구석이 있었다. 외모는 솔직히 말할 것도 없었고. 취향이고 자시고를 떠나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남자였다.
노아에게 약해 몇 번이나 그를 외면하지 못했던 메이슨의 입장에서는 ‘사람이라면 노아에게 약한 게 당연하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메이슨의 말에 노아는 잠시 메이슨을 빤히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우습다, 하는 식으로.
“그래서 여하간 말이죠. 그때 배운 게 있거든요.”
노아는 패를 확인하며 말했다. 메이슨도 나누어진 세 장의 패를 확인하며 물었다.
“뭘 배웠는데요?”
“그때 배운 게 뭐냐면―…,”
세 장 중 한 장의 카드, 스페이드 2를 뒤집은 노아가 새 카드를 메이슨에게 나눠주며 말했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일단 구덩이를 파라는 거죠. 제 발로 굴러 들어와도 안이 너무 깊고 넓어서 거기가 함정인지 아닌지 구분도 못 하게.”
“……좀 음습해지셨네요.”
갖고 싶은 걸 한 번 가지지 못했다고 그런 생각을 하다니, 다 가진 사람들의 생각이란 참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는 메이슨을 보며 노아가 턱을 괴고 웃었다.
“어른이 된 거죠.”
노아의 눈에 어린 웃음기를 힐끗 본 메이슨은 “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하고 동의하며 패를 확인했다.
마지막 한 장이 돌기 전. 메이슨에게는 같은 숫자의 카드가 세 장이 들어와 있었다. 마지막 한 장이 다이아 6이라면 포카드, 아니라도 풀하우스는 만들 수 있는 괜찮은 패였다.
노아의 공개된 패는 스페이스 2, 4, 하트 8, 다이아 에이스. 노아가 숨기고 있는 패가 어떤 패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메이슨이 가진 포카드보다 높을 확률은 그가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들었을 경우뿐이었다.
메이슨은 힐끗 노아를 살폈다. 마지막 카드가 돌기 전과 후의 노아의 표정을 확인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때 문 쪽에서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아가 들어오라고 말하자 투피스 정장을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는데, 나중에 가져다 드릴까요?”
“――어떻게 할까요?”
이 판을 마지막으로? 메이슨을 돌아본 노아가 테이블 위에 쌓인 칩들을 차르륵, 들어 보이며 물었고 메이슨은 무심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10분 뒤에 가져다주세요. 금방 끝나니까.”
여자는 깍듯한 인사를 하고 나갔고 그때였다. 방문에서 테이블로 돌아온 메이슨의 시선 끝에 노아의 손이 카드를 툭 건드리는 것이 보였다. 특별한 의미는 없는 손짓처럼 보였으나 메이슨은 시선을 돌리며 무심한 얼굴로 낮게 혀를 찼다.
10년 전, 메이슨이 노아에게 카드를 알려줄 때 가르쳐준 몇 가지 귀여운 속임수들이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저것이었는데, 손 안에 카드를 숨기고 위에 놓은 뒤 아래에서 패를 빼는 단순한 기술이었다. 가벼운 손장난이긴 하지만 숙련도에 따라 쓸 만해지기도 하는 속임수였는데―, 그러나 노아의 손장난은 살짝 미숙한 구석이 있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상대가 틀렸다.
노아가 마지막 카드를 양측에 나누었다. 메이슨은 마지막 패를 습관적으로 확인했다. 다이아 6.
“마지막 판이니 다 거는 걸로 할까요?”
메이슨은 노아의 눈가를 살폈다. 노아의 눈은 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약간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하고 탐색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할까. 노아의 속임수를 지적할 수도 있었다. 노아의 뒤집힌 패가 무언지 맞추고 속임수 이야기를 하면 그는 아니라고 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 나른하게 웃으며 요트를 내어줄 것 같은 사람이었다.
혹은, 넌지시 이번 판은 접고 한 판만 더 하자고 말할 수도 있었다. 다음 판에서는 다시 그 속임수를 쓸 수 없을 거고 그 판이 정말로 마지막 판이 될 수도 있었다.
“으음, 다 건다구요?”
그러나 메이슨은 아쉬운 얼굴로 말하며 카드를 뒤집은 채로 테이블 위로 던졌다.
“아――, 당신이 완전히 이겼네요. 승리의 여신이 절 버렸나봅니다.”
제 주제에 무슨 요트람. 메이슨은 “평생 이런 경품은 타본 적이 없단 말이죠.” 하고 한숨을 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출연료 백십만 달러처럼 노아의 요트 역시 아쉽기는 했지만, 포기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정박료나 유지비를 대다간 정말로 파산하고 말 테니 돈 많은 다른 부자 놈에게 팔리기만을 기다려야 할 텐데, 이 아름다운 요트는 노아에게 무척이나 어울렸다.
이런 속임수를 쓰면서까지 이기고 싶어 하는 그에게 기어코 패배를 안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자리에서 일어나 시선을 돌리며 몸을 풀자 언제부터인가 새파랗던 하늘에서 가는 빗방울이 툭툭대며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늘 저 끝에 새까만 먹구름이 있었다. 메이슨은 난간께로 걸어갔다. 파란 하늘에 검은 구름의 경계선과 움직임이 선명하게 보였다.
배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은데―, 하고 메이슨이 입술을 달싹이려는데 등 뒤에서 “운이 없다니――.” 하고 중얼거리듯 말하는 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포카드를 버리면서 말이죠?”
메이슨은 흠칫 뒤를 돌아봤다. 그가 메이슨의 패를 들추어 확인하고 있었다.
“내가 어떤 카드를 들고 있는지 알고 있었나 보죠?”
고개를 든 그가 메이슨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노아의 녹색 눈동자가 날카롭고 서늘하게 빛났다. 메이슨이 입술을 달싹여 변명을 하려는 사이 노아가 자신의 패를 뒤집었다.
스페이스 2, 4, 하트 8, 다이아 에이스, 그리고 하트7, 클로버9, 잭. 스트레이트 플러쉬는커녕 원 페어조차 없는 아무것도 아닌 패였다.
메이슨은 그의 패를 쳐다보다 마른 침을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요트의 정박료를 댈 자신이 없어서요.”
“아아―, 그렇겠죠, 물론.”
퍽이나 그렇겠다는 듯 가볍게 말한 노아는 눈을 휘며 웃었다. 달큼하게. 만족스럽게 휘어지는 노아의 녹색 눈동자를 쳐다보던 메이슨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
배 주변으로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줄기가 어느새 좀 더 강해져 있었다. 멀찍이 있던 검은 구름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근처 파도가 무섭도록 높아진 것이 보였고 새까만 것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 파란 하늘을 잡아먹듯 뒤덮어 가렸다.
“이런. 폭풍인가 보네요.”
노아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고 메이슨은 무표정한 얼굴로 쓴 입맛을 다셨다. 이 방에 들어섰을 때, 맨몸으로 적의 부비트랩 안에 걸어 들어가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이 떠올랐다. 불행히도 그 감은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고 메이슨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함정에 빠진 것은 알았지만 어떤 함정인지, 그에게 어떤 타격을 입힐 지 알 수 없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가만히, 웅크린 채 상대가 정체를 드러내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배 위에서 폭풍을 만나면 그저 이 폭풍이 작은 것이기를, 금세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군요.”
메이슨은 담백하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늘은 어느새 완전히 새까만 구름으로 덮여있었다. 폭풍이었다.
* * *
시내에도 비가 내렸다. 노아와 메이슨이 탄 캐딜락이 어두워진 거리를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추적을 따돌리기 쉬운, 포드처럼 흔한 차는 아니었지만 비가 거세서인지 따르는 차는 없어보였다.
뒷좌석에 앉은 메이슨의 휴대폰에는 요트에 있는 동안 쌓인 문자 메일과 부재중 전화가 쉴 새 없이 떴다.
“인기 좋네요.”
노아는 싱겁게 말했고 메이슨은 문자를 확인하며 말했다.
“제 매니저가 좀 걱정이 일인 사람이라.”
전화의 대부분은 토니에게서 온 것이었고 문자는 빅에게서 온 것이 많았다. ?뭘 하고 있어?? ?진짜 데이트야?? ?너 정말 노아의 약점이라도 잡은 거야?? ?그런 거라면…… 나도 알려줘, 제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내 딸을 걸고 맹세해.? ?……미안. 딸은 취소야.? 짧은 문자 메시지가 연이어 쏟아졌다. 그 와중에 체이스가 걱정과 염려를 담은 다정한 문자를 보내오기도 했고 프로듀서인 글로리아가 내일로 스케줄을 미뤄도 괜찮겠냐고 묻는 메시지도 남아 있었다.
잘린 건 아닌 모양이지. 하긴 스폰서와 데이트 좀 했다고 일을 잘리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글로리아에게 내일은 괜찮다고 답장을 보내자 옆에서 힐끗 쳐다본 노아가 “내일? 촬영장까지 갈 수 있겠어요?” 하고 나른히 웃으며 말했다.
“집 앞에 파파라치들이 진을 치고 놔주질 않을 텐데요. 아니, 들어가지도 못하려나.”
호텔은 받아주지도 않을 거라고 말한 노아는 물었다.
“내 집에서 묵어도 괜찮은데요. 헬리콥터라면 파파라치를 따돌리는 건 쉬워지니까요. 파파라치 자체도 내 집 앞에는 좀 덜 할 거고.”
너 고생 좀 하겠다, 하는 표정을 한 노아의 친절한 권유에 메이슨은 “……저라면 솔직히 레이칼튼 씨의 생각이 더 궁금할 것 같은데요.” 하고 그를 쳐다봤다.
이 상황에서 집에 방을 빌려주겠다니, 물론 노아의 저택은 한두 채도 아닐 거고 저택마다 방도 많아, 거리를 헤맬 가여운 홈리스에게 작은 호의를 베풀어도 괜찮겠지만 기자들과 대중들에게는 알 바 없는 일이었다. 호텔방에 함께 들어가고 데이트를 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난리가 나는데 동거를 한다는 말까지 끼얹어지면…….
메이슨은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를 쳐다봤다. 노아는 이 스캔들을 잠재우고 싶은 게 아니라 키우고 싶은 것처럼 보였고 메이슨은 남자가 무슨 생각인 건지 솔직히 전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노아에게 대시하는 건―진심이야 어쨌건 간에― 표면적으로 봤을 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노아가 헤일리에게 대쉬하는 건 이상했다. 헐리웃의 감성으로 이상한 일이 아니라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고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이 스캔들을 이용해 지키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메이슨은 자주 총알받이로 사용되었던 전적 탓에 습관적으로 생각했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헐리웃 파파라치들은 독하고 끈질기니 어쩌면 노아의 생각도 다음날 기사로 뜨지 않을까? 메이슨이 슬쩍 그런 기대를 품으며 쳐다보자 노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 생각이 궁금하기야 하겠지만 날 따라다니는 일은 자제하겠죠.”
미국에서 기자 생활 오래 하고 싶다면 말이죠. 노아는 개미 한 마리 안 죽일 것 같은 선량한 얼굴로 퍽 비열한 말을 하며 웃었고 메이슨은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하긴. 레이칼튼 가는 모르지만 노아의 외가인 레베카 가는 정계 명문가로, 그들의 사생활은 메이슨이 있던 동네에서도 몹시 껄끄러워하는 극비사항이었다. 스캔들 하나 터졌다고 금이야 옥이야 키운 노아를 파파라치 무리에게 물어 뜯기게 놔둘 리는 없었다.
“어쨌든……, 고마운 말이긴 한데 일단은 좀.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될 일도 있고 집에 상황도 봐야 할 것 같네요.”
기자들이 따라 붙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집 앞에 기자들의 동향도 살펴보는 쪽이 좋았고. 메이슨의 거절에 노아는 “약간 무모하다고 생각하지만,” 하고 눈을 휘어 웃었다.
“뭐, 괜찮겠죠. 연예인은 파파라치에게 시달리는 것도 업무 중 하나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요.”
노아가 말하자 앞좌석에 앉아있던 필이 두 장의 명함을 건넸다. 한 장은 필의 것이었고 다른 한 장은 노아의 것이었다.
“두 장 다 직통 번호입니다. 유출 하시면 고소당할 수도 있으니 주의 해 주십시오.”
필은 딱딱하게 말했고 명함을 살핀 메이슨은 눈으로 훑어 번호를 외우고 그에게 명함을 돌려주었다.
“……외우신 겁니까?”
필은 설마 그런 거냐는 듯 물었고 노아는 왜인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모르게 평소 기밀을 취급하듯 해버린 메이슨은 한숨을 삼키며 “그러게요. 외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벌써 까먹었네요.” 하고 다시 명함을 갈무리 했다. 굳이 헤일리의 멍청한 캐릭터를 고수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불신으로 가득 찬 필의 눈을 보고 있자니 멍청한 척하는 게 편할 것 같기도 했다.
“아, 저 다음 블록에서 좀 내려주세요.”
메이슨은 멀찍이 보이는 상가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베벌리힐스까지는 아직 멀었는데요.”
“아뇨, 여기면 됩니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요.”
메이슨은 주변을 둘러보며 위치를 확인했다. 분명 그녀의 주소가 이 근처였는데―….
노아는 살짝 의아한 얼굴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지 곧 차를 멈추게 했다. 먼저 내린 필이 차 문을 열어주고 우산을 대주었다. 찰박, 물이 고인 보도를 밟자 쏴아아, 차 속에서는 들리지 않던 빗소리가 우산을 때렸다.
“정말 여기로 괜찮습니까?”
필이 다시 물었고 메이슨은 “아가씨도 아닌데요, 뭘.” 하고 손사래를 쳤다. 메이슨은 차 안을 들여다보며 노아를 향해 인사했다.
“어쨌거나 오늘은 덕분에 살았네요. 촬영장에서 하이에나 떼들에게 뼈도 못 추리고 뜯어 먹힐 줄 알았는데요.”
당장 저 남자의 생각이 무언지 알 수 없고, 덕분에 앞날은 더 험난해졌을지라도 당장 목숨을 구한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메이슨의 인사에 노아는 아까 촬영장에서처럼 달큼하게 웃었다.
“또 보죠. ―빠른 시일 내에.”
다음 만남이 기대된다는 듯한 다정한 시선에 메이슨은 얼떨떨한 얼굴로 “……예, 뭐.”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산은 그냥 쓰고 가도록 하십시오.”
필은 깍듯하게 인사며 차에 다시 올라탔고 메이슨은 뺨을 쓸어내리며 주변을 슬쩍 돌아봤다. 베니스 비치가 가까운 웨스트우드 빌리지. 제법 살기 좋고 가격 높은 동네였다.
메이슨은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빗줄기를 확인했다. 시야가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거리에 사람도 적고 파파라치들도 비싼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 싫어하는 날씨였다. 이런 날씨엔 총소리도 빗소리에 묻히기 마련이었다.
은밀한 일을 하기에 적절한 날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