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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지 ‘Who`s Know’에서 3년, ‘The inside’에서 2년, ‘헐리웃 프리미엄’에서 1년 8개월. 가십지 출판사에서 총 5년 8개월 간 일하다 지난 해 프리랜서 파파라치가 된 마일로는 이런 일에 뼈가 굵은 남자였다.
스타들의 집 앞에서 잠복 하는 날이 집에 들어가는 날 보다 많았고, 스타들의 차 번호판을 딸래미 얼굴보다 자주 봤다. 팝스타 에이미 매터슨의 불륜과 임신 소식을 가장 먼저 때린 것도 그였고 밀로반의 집 안에 숨어들었다가 감옥에 갈 뻔한 적도 있었다.
그는 어디에 숨어 있어야 배우들이 방심하는지, 어떤 각도에서 찍어야 사진이 더 비윤리적이고 자극적으로 나오는지, 스타가 사고를 칠 때까지 며칠을 기다려야 하는지, 어떤 루머를 만들어내야 잘 먹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헤일리 러스크는 한 때는 마일로를 먹여 살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에게 많은 기삿거리를 물어다 주었다. 하루라도 사고를 치지 않으면 거시기가 떨어져 나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매일매일 새로운 기삿거리를 제공했는데, 술에 찌들어 교회 앞에서 구토를 하는 사진, 벤치에 엎어져 자는 사진, 약물에 취한 사진, 노상방뇨 사진, 뺑소니치고 도주하는 사진, 법원에서 나오는 사진 등, 심지어는 기사를 써내는 것도 귀찮아 그의 일탈 행위를 외면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마일로에게 헤일리의 집 앞은 익숙하다 못해 자기집 화장실 같은 곳이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어디에 카메라를 대면 뭐가 보이는지, 어디에서 잠복하는 게 밤에 가장 따뜻한지 근처 음식점은 어디가 맛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남들이 다 헤일리는 하도 빨아서 기삿거리도 없다고 할 때도 마일로는 며칠에 한 번은 헤일리의 집 앞을 찾아 그의 사진을 찍었고 덕분에 그 자살기도 사건도 가장 먼저 다룰 수 있었다.
마일로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헤일리의 집 주변을 쳐다봤다. 저녁 즈음 헤일리와 노아가 요트에서 내렸다는 말이 돈 뒤로 갑자기 일대가 시장통처럼 변했다. 노아 레이칼튼을 취재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럽고 만만한 헤일리를 털어보자는 것이었다. 미국에 있는 파파라치란 파파라치는 전부 이곳에 모인 듯, 7년이나 이 짓을 한 마일로도 아는 얼굴이 반 모르는 얼굴이 반이었다.
11시 반. 요트에서 내렸다던 헤일리는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노아는 요트에서 내렸다는 소식이 채 돌기도 전에 저택으로 돌아갔다는데 정작 파파라치들의 먹잇감인 헤일리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였다. 호텔에 갔거나 친구의 집에 갔다면 금세 정보가 돌았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슬슬 클럽을 도는 게 낫지 않을까. 마일로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옆에서 솔솔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가로등 밑에서 한 남자가 우산을 어깨에 끼고 불편한 자세로 뭔가를 먹고 있었다.
‘Seven Star Burger’
“…….”
마일로는 꿀꺽, 입안에 가득 고인 침을 삼켰다. 세븐스타버거. 마일로가 헤일리의 집 앞에서 잠복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되어주는 햄버거 가게의 종이봉투가 보였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쫀득하게 구워진 햄버거 빵과 육즙이 줄줄 흐르는 두툼한 패티, 고소한 치즈, 많지도 적지도 않은 싱싱한 야채와 세븐스타버거만의 독특한 칠리소스. 단순하면서도 완벽에 가까운 그 조화. 그야말로 별 일곱 개짜리 맛이었다.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그 두툼한 버거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고 우물우물 씹었다. 그리고 다시 한 입.
마일로는 왠지 안타까운 기분으로 그것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세븐스타버거는 매일 저녁 일곱 시가 되면 문을 닫기 때문에 지금 뛰어가 문을 두드려도 한참 늦었다. 안타까움에 침만 꼴깍꼴깍 삼키며 먹는 입을 구경하고 있는데, 시선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마일로를 돌아봤다.
아이쿠. 남 먹는 걸 뚫어지게 쳐다보다니, 마일로는 추접한 행동을 한 것을 자책하며 시선을 돌렸고 “이봐,” 하고 부르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햄버거가 하나 남는데, 먹겠어?”
남자가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는 종이봉투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마일로는 “정말로?” 하고 되물었고 그가 목과 어깨에 끼고 있는 우산을 살짝 흔들어보였다.
“대신 이거, 이거 좀 잠깐만 들어줘. 목에 힘을 주고 먹으려니 불편해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다고.”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금세 커다란 우산이 머리 위로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마일로는 “나야 좋지.” 하고 다가가 그의 우산을 받쳐 들었다. 남자는 홀가분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툭, 따뜻한 종이봉투를 마일로에게 건넸다. 마일로는 황홀한 얼굴로 묵직한 봉투를 가슴에 품었고 남자는 다시 우물거리며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난 마일로야. 프리랜서로 뛰고 있지. 자넨 어디서 왔나?”
그가 “난……,” 하고 입에 물고 있는 햄버거 조각을 우물거리며 삼키고는 말했다.
“난 도니 에블린. ‘핫 이슈 플러스’라는 작은 신문산데―…, 아, 씨발, 우리 편집장 년이 레이노아 놈의 뒤라도 핥을 년이라서.”
남자, 도니는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쭉쭉 빨며 씨근덕댔다. 마일로는 그가 쭉쭉 빤 손가락을 비옷 아래 티셔츠에 쓱쓱 닦는 것을 싫은 눈으로 쳐다보다가 “핫 이슈 플러스? 어디지?” 되물었다.
“몰라? ―아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금방 망해버릴 것 같은 똥 같은 데라고. 노숙자가 덮고 자는 용으로도 못 쓸 거야. 냄새나서.”
“아니 그렇게까지는……,”
입이 제법 험한 친구였다. 모자와 안경 밑으로 살짝 드러난 얼굴은 멀쩡해 보였는데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햄버거를 먹으며 연신 불만과 불평을 늘어놓았다. 살짝 드러난 턱선이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캔자스 사투리를 쓰는 시무룩한 표정의 사내라니, 어디서 봤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진짜 지겨워 죽겠다니까? 클라라, 그년은 정말 정도를 모른다고. 가슴 빼곤 볼 것도 없는 년이,”
도니는 기름기가 잔뜩 묻은 손으로 햄버거 포장지를 구겨 바닥에 버리더니 큼, 하고 가래를 모아 침을 뱉었다. 윽, 마일로는 살짝 그에게서 물러났고 남자는 힐끗 마일로를 쳐다봤다.
“왜 물러나? 비 튀잖아.”
어차피 다 먹긴 했지만. 그는 손을 내밀어 마일로의 손에서 우산을 가져갔다. 마일로는 다시 자신의 우산을 펴며 “나, 나도 좀 들어줘.” 하고 말했다.
“잠깐만. 근데 이 망나니는 언제 들어오는 거야? 벌써 네 시간이나 여기서 이러고 있었다구.”
그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고 마일로는 “난 일주일 째 딸 얼굴을 못 봤다고.” 하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오늘 밤 돌아올지 돌아오지 않을지 모르는 헤일리 이야기보다는 당장 품 안에 햄버거가 식거나 눅눅해질까 봐 그게 더 걱정이었다. 그러나 도니는 우산을 들어주는 대신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혹시, 벌써 안에 들어가 있는 거 아냐?”
“걔가 안엘 무슨 수로 들어가? 사람들이 몇 시부터 지키고 있었는데,”
마일로는 헤일리의 집에 있는 작은 뒷문이나 틈새를 헤일리 본인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마일로가 아는 헤일리는 지금쯤 클럽을 전전하고 있거나 아는 남자들의 집을 찾아다니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엇, 지금 안에서 뭐가 움직인 것 같지 않아?”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무슨 소리야?”
마일로는 살짝 신경질을 내며 아까 도니처럼 목과 어깨 사이에 우산을 끼고 일단 햄버거를 꺼내 들었다. 도니는 “아니 뭔가 움직인 것 같다니까,” 하고 헛소리를 중얼거리더니 저택의 대문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쓸데없는 짓이야, 저게.”
만에 하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헤일리가 안에 있다고 한들 문을 두드리거나 벨 좀 누른다고 그가 고개 빠끔히 내밀고 ‘어서 들어오세요.’ 하겠냔 말이다.
문 앞에서 죽치고 있는 게 어지간히 죽겠나 보군. 마일로는 도니가 멍청한 짓을 하든지 말든지, 아직 따뜻한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며 씹었다. 세븐스타버거 패티의 고소한 육즙과 매콤달콤한 소스가 부드럽게 입안에 퍼졌다.
마일로가 햄버거를 우물거리는 동안 도니는 진짜로 대문 앞에서 얼쩡얼쩡하더니 벨을 눌렀다. 대문 옆 벽에 기대어 서서 졸고 있던 다른 파파라치들도 저놈이 뭘 하나 심드렁한 눈으로 쳐다봤다.
삑. 철커덩.
빗소리 외엔 고요하던 사람들 사이로 묘한 소리가 흘렀고 마일로는 입에 햄버거를 가득 문 채로 고개를 들었다.
도니가 헤일리의 저택의 대문을 열고 아무렇지도 않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마치 집 주인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더니 철커덩 문을 밀어 닫았다.
“어……,”
마일로는 입을 벌린 채 멍청한 소리를 뱉었다. 뭐지? 무슨 일이지? 왜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 ―어떻게 들어갔지?
문 앞에 서 있던 다른 파파라치들도 모두 마일로와 같은 표정으로 문 안을 쳐다봤다. 안으로 들어간 도니가 모자를 벗었고 눌린 머리를 탈탈 털자 화사한 금발이 목덜미로 떨어졌다.
힐끔, 그가 뒤를 돌아봤다. 그는 마일로를 쳐다보며 고맙다는 듯, 씩 웃었고 마일로는 눈만 끔뻑이며 멍청한 얼굴로 있다가 한참 만에 켁, 입에 물고 있던 햄버거 조각을 뱉었다.
“헤, 헤일리?”
헤일리 러스크. 마일로가 7년이나 졸졸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고 마누라 얼굴보다 더 많이 봤던 그 망나니가 대문 안에서 우산을 털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일로는 두 손에 들린 햄버거 봉투를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헤일리가 현관문을 열고 우비를 벗으며 저택으로 들어가는 것을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햄버거를 쳐다봤다.
“어―…,”
옆자리에 앉은 너드같은 동료가 슈퍼히어로로 변신해 사라진 것을 목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마일로는 한참이나 멍청한 얼굴로 서 있었다.
* * *
그리고 아침이 밝았을 때 마일로는 잔뜩 독이 오른 상태였다. 어젯밤 눈앞에서 헤일리를 못 알아보고 놓친 것 때문에 동료 파파라치들의 원성 섞인 비웃음을 당한 것이었다.
노아의 데이트 신청에도 넋을 놓느라 사진을 몇 장 못 건졌는데, 그도 모자라 헤일리가 집에 들어가는 사진까지 모조리 놓쳤다. 파파라치에게 하루를 허탕 치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어제의 사진들을 놓친 건 정말로 병신 같은 일이었다.
게다가 과정도 마일로의 속을 벅벅 긁었다. 바로 옆에서 헤일리가 햄버거를 주고 제가 ‘도니 에블린’ 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며 헛소리를 늘어놓는 동안 내내 햄버거에 정신이 팔려 침만 꼴깍대고 있었던 것이다. 햄버거를 준 사내가 자신이 열여덟 시간 동안 기다린 바로 그 헤일리라는 것도 모르고 말이었다.
변명 같지만 마일로가 그랬던 것도 이유는 있었다. 캔자스 사투리를 질펀하게 늘어놓는 울적한 표정의 사내는 어떻게 봐도 헤일리로는 보이지 않았다. ‘도니’ 는 화려하기는커녕 욕을 뱉고 있는 와중에도 수수하고 존재감은 흐릿했다. 햄버거 냄새를 풍기고 말을 계속 하고 있지 않았다면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터였다.
언제부터 그가 파파라치들 사이에 섞여 있었는지 아는 놈이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귀신에 씐 것처럼, 헤일리가 모자를 벗고 뒤돌아 반짝거리는 미소를 흘리는 것을 보면서도 저놈이 왜 저 안에 있지, 하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눈 뜨고 코만 베인 게 아니라 귀도 베이고 입도 베였달까.
안으로 들어간 헤일리는 마치 마일로를 조롱이라도 하듯이 실루엣이 비치는 피트니스 룸에 들어가 한 시간 가량 운동을 한 뒤 샤워를 할 만한 시간동안 사라졌다가 침실에 불을 켰다. 그리곤 바로 침대에 누운 듯 30초도 안 되어서 불을 껐고 다시 불을 켜지 않았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주제에 유유히, 평생을 안 하던 운동을 하고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처자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곱씹다 열 받은 마일로가 새벽에 집 도어 벨을 미친 듯이 눌러 보았지만 이미 벨의 전원을 끊어놓은 듯 집에는 아무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그리고서 날이 밝았으니 마일로가 독이 오를 법도 했다.
오늘은 발을 걸어서라도 사진을 찍고 말리라,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서 가장 못나고 우습게 나온 사진을 신문 메인과 웹에 올려 주리라, 밖에서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안에서 나오는 건 헤일리 한 명 뿐일 테니 어제 같은 이상한 짓을 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집은 개미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하도록 독 오른 파파라치들이 지키고 있었다. 중간에 아침을 배달하는 청년이 있었지만 예민해진 마일로는 그의 모자까지 벗겨 보고 꼼꼼하게 그를 확인했다.
그리고 아침 9시 45분. 오전 10시에 영화 촬영 스케줄이 있다고 들었으나 헤일리는 집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많은 파파라치들 사이를 헤치고 갈 용기가 나지 않는 거겠지. 마일로는 틀림없이 헤일리가 창문 틈새로 주변을 살필 것을 예상하며 망원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로 창문가를 한껏 클로즈업해 대기했다. 어디서 쥐새끼처럼 보고 있나―…, 살피는데 누군가 “근데 왜 이렇게 안 나와? 혹시 벌써 나간 거 아냐?”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마일로는 입매를 비죽였다. 나가긴 걔가 무슨 수로 나가? 이렇게 수십 명의 파파라치가 문 앞을 지키고 있는데 그놈이 땅으로 꺼지겠는가 하늘로 솟겠는가.
“절대로 못 빠져나가지. 암.”
어제는 방심해서 놓쳤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냥은 지나갈 수 없을 거라고 마일로가 다짐하듯 중얼거리던 순간이었다.
투다다다, 지축을 울리는 소리에 마일로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헬리콥터가 느리게 날아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투다다다, 커다란 소리는 그들을 지나쳐 완전히 사라지는 대신 헤일리의 저택 위에서 제자리 비행을 했다.
귀를 할퀴는 날카로운 굉음과 세찬 바람에 마일로가 미간을 찌푸리며 카메라 렌즈를 손으로 가렸다. 설마. ―설마, 하고 생각했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여긴 주택가고 헤일리의 저택은 고급주택이었지만 헬리콥터 착륙장이 있을 만큼 넓은 집은 아니었다.
마일로는 헬리콥터를 쳐다보며 입을 벌렸고 그리고, 투다다다다다다,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음이 사방을 두드리고 바람을 일으켰다. 잔 나뭇가지와 잔디조각, 흙먼지가 사방으로 쏟아졌다.
마치 드라이아이스 연기 속에서 스타가 등장하듯 흙바람 속에서 헬리콥터가 헤일리의 정원을 구기듯 짓밟으며 착륙하는 것이 보였다.
“…….”
유리창을 깨버릴 것처럼 시끄럽게 울리는 프로펠러 소리에 밖으로 달려 나온 메이슨은 난리가 난 정원 꼬라지에 미간을 구겼다. 꽃들은 바람에 잘려 날리고 나무들은 가지가 꺾이고 잎이 떨어져 헐벗은 채 흔들리고 있었으며 잔디와 수풀은 거대한 헬리콥터의 스키형 랜딩기어에 파헤쳐져 벌건 흙바닥만 보였다.
저걸 저기다 저렇게 착륙시키나. 메이슨은 뿌옇게 날리는 잔디조각과 먼지를 짜증스럽게 손으로 휘저었다.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르고 있는 상대가 누군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노아 레이칼튼이었다.
오늘 아침, 꿈도 안 꾸고 늘어지게 단 잠을 자고 일어난 메이슨은 문 앞에 가득히 포진해 있는 좀비 같은 파파라치들과 그들이 든 카메라를 보며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꺼내 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햅슨 씨? 헤일린데요,’
메이슨이 밝게 인사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예, 말씀하십시오.? 하는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차 좀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차를 말입니까??
‘네. 집에서 나가야 하는데 파파라치들이 떠나질 않아서요. 레이칼튼 씨가 한가하신 분이 아닌 건 알지만, 그분 차 중에 한가한 차가 있다면 집 후문 쪽에 잠시만 주차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이왕이면 자주 타고 다니시는 차로. ―파파라치들이 전부 속으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약간만이라도 흩어져 준다면 빠져나갈 구석은 생길 터였다. 적군에게 포위당한 상태라면 폭탄이나 시선을 끌만한 것을 던져 빈틈을 노리겠지만 파파라치들에게는 폭탄보단 노아 쪽이 더 강렬할 것이고.
수화기 너머 속 필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더니 한동안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휴대폰을 스피커폰으로 맞춰둔 메이슨은 슬슬 옷을 주워 입었다. 도와준다고 했던 말도 있었으니 차 정도는 빌려주겠지, 하는 편한 생각이었다. 노아의 차가 한두 대는 아닐 테니 말이었다.
?집 앞 파파라치들을 따돌리고 촬영장에 가려는 건가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바지에 다리를 꿰던 메이슨은 고개를 들고 휴대폰을 쳐다봤다. 노아의 목소리였다.
‘아, 예.’
메이슨은 살짝 늦게 대답했다. 노아의 전화 목소리는 실제 목소리보다 조금 더 낮고 달달한 편이었다. 메이슨은 걸어가 휴대폰의 스피커폰 기능을 끄고 귀에 대고 말했다.
‘생각보다 제 집 앞에 많이 모여 있어서요.’
여기가 노숙자 보호소인지 난민 수용소인지 모르겠다고 메이슨이 앓는 척 말하자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준비하고 기다려요. 데리러 갈 테니.?
‘아니―, 데리러 오라는 게 아닌,’
메이슨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띠―, 통화 종료음이 울렸다.
‘…….’
데리러 오다니, 설마 정말 직접 온다는 건 아니겠지. 메이슨이 바란 것은 사람들이 노아가 왔다고 착각하고 그쪽에 시선을 돌린 사이 빠져나가려는 것이었지, 진짜 노아의 에스코트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노아가 직접 오더라도 그 차에 탈 수는 없었다. 파파라치들은 노아의 차를 둘러 쌀 것이고 제시간에 촬영장에 가기는커녕, 종일 옴짝달싹 못한 채로 파파라치들의 카메라 배터리가 떨어질 때까지 사진 모델을 해 주어야 할 테니 말이었다.
헐리웃에 무지하다 못해 백지 같은 자신도 아는 사실을 노아가 모르지는 않겠지. ―메이슨은 설령 노아가 직접 온다고 해도 자신을 태워가려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
노아의 차가 근처에 서면 금세라도 튀어나가 반대쪽 길로 도주하려 했던 메이슨은 귀를 막은 채로 헬리콥터가 정원을 박살내는 것을 쳐다봤다. 메이슨이 헤일리가 된 뒤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돌보았던 정원에 의기양양하게 들어선 거대한 헬리콥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프로펠러를 멈추었다. 그리고 곧 문이 열렸다.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제 집에는 헬기 착륙장이 없어요. 거긴 정원이고.”
메이슨은 헬리콥터 안에서 헤드셋을 벗는 노아를 향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그가 데리러 온다고 할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이렇게까지 몰상식하고 무식한 방법으로 등장할 줄이야. 메이슨의 타박에 노아는 나른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그래서 착륙할 때 좀 흔들리더군요.”
헬기 착륙장 정도는 만드는 게 좋지 않아요? ―그는 불편해서 어떻게 사냐는 듯 말했고 메이슨은 대답 대신 얼굴을 구기며 시선을 돌렸다.
대문 밖에서 파파라치들은 물론, 지나가던 동네 주민들까지 무슨 일인가 하고 나와서 구경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경찰 사이렌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타요. 가는 길이 막히진 않겠지만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까요.”
노아는 시간이 많다면 차를 한잔 해도 좋겠지만, 하는 투로 말했고 메이슨은 한숨을 쉬며 조금 빠른 걸음으로 노아의 헬리콥터에 다가갔다. 좀 동네 창피했고 그의 말대로 정말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늘 마중이 요란하시네요.”
어제도 오늘도. 요란하다 못해, 여길 보라고, 빨리 보라고 무력시위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늘 파파라치를 따돌리는 데에는 헬기가 좋다고 하셨거든요. 소란을 일으킬 의도는 별로 없었어요.”
“……그렇군요.”
헬리콥터를 주택가. 남의 집 정원에 착륙시켜 놓고 소란을 일으킬 의도는 없었다니, 그와 이 주제로 대화하는 건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노아는 메이슨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고 메이슨은 잠깐 고민하다가 그 손을 잡았다. 손을 잡고 올라타며 돌아보니 사람들이 멍청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고, 그 사이에 어제 만난 파파라치 마일로가 서 있는 것도 보였다. 어젯밤에도 딱 저 표정이었는데.
피식 웃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엉겁결인 듯 셔터를 눌렀다. 팡, 플래시가 터지는 것과 동시에 노아가 메이슨의 손을 잡아끌어 헬리콥터로 태웠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파파라치들이 팡팡거리며 사진을 찍었고 헬리콥터의 프로펠러는 다시 요란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앞자리에 앉은 필이 메이슨에게 헤드셋을 건넸고 메이슨은 재빠르게 그것을 뒤집어썼다.
“몇 번 더 다지면 착륙장으로 써도 될 것 같은데요.”
두어 번만 더 다지면 흔들리는 건 덜 할 거라고, 프로펠러의 시끄러운 소음 사이로 노아의 심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슨은 입을 다물고 아까보다 한층 더 엉망으로 변한 정원을 힐끗, 창 너머로 쳐다봤다. 헬리콥터가 슬금 떠오르며 반 바퀴 돌자 그 랜딩기어에 나무 몇 그루가 추가로 잘려나가는 것도 보였다. 착륙장으로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히, 정원으로는 못 쓰게 될 것 같았다.
“촬영기간이 얼마나 되죠?”
“……두 달 가까이.”
메이슨의 대답에 노아는 그거 참 잘되었다는 듯이 웃었다.
“착륙장으로 만들 시간을 충분하겠네요.”
“…….”
그의 말대로 두 달이면 정원은 헬리콥터 렌딩기어로 잘 다져진 흙더미밖에 남지 않을 터였다. 물론 집 유리창도 남아있지 않게 될 거고.
한두 번 정도는 그때그때 상황을 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노아의 기행으로 파파라치들이 더 불어날 것이 문제였다.
“……댁에 헬기 착륙장이 있으시다고…,”
메이슨이 짜게 식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여 말하자 노아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녁에 전화해요. 데리러 갈 테니.”
이번엔 필이 아니라 제 쪽으로 걸어준다면 좋겠네요. 헤드폰으로 달큼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귀를 간지럽혔다. 메이슨이 그를 쳐다보자 그는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있다는 듯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 * *
?‘헤일리 러스크, 노아에게 구조되다’
새로운 헐리웃 커플이 탄생한 걸까? 재투성이 아가씨가 왕자님과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가 꿈과 희망의 상징이 되어 사람들 가슴 속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재현된 모습은 아름답지 않았다.
금일(19일) 오전 10시, 헤일리 러스크의 집 앞은 그를 기다리는 취재들로 물샐틈이 없었으나 레이칼튼가의 문양이 새겨진 헬리콥터가 모두의 머리 위에 그림자를 만들었고 그리고 놀랍게도……?
“……이 사진은 화본데요, 거의.”
체이스가 태블릿 PC로 인터넷에 뜬 기사를 살피며 말했다. 분장을 떼어내던 메이슨은 힐끗, 그가 보여주는 사진을 보았다.
자신이 노아의 손을 잡고 헬리콥터로 오르며 카메라를 향해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약간…, 으스대는 것 같기도 한 오묘한 표정이었다.
“참 사진을 절묘하게 찍었네요.”
노아의 비상식적인 방문에 내내 짜증 섞인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잠깐, 아주 스치듯 마일로의 표정이 우스워 웃었더니 그게 사진이 나왔다.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얼굴인데, 왜요?”
지나가던 조역 애쉬튼이 참견하듯 말했고 메이슨은 “부자연스럽게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하고 눈에 끼고 있던 검은 렌즈를 꺼냈다.
메이슨이 새로 맡은 역할은 주인공과 사이가 아주 나쁜 악역이었다. 끝에 가서 주인공과 한편이 될 것 같은 뉘앙스를 잔뜩 풍기지만 영화 내내 주인공과 대립하는 역이었다.
토니는 악역이라 그가 하기 싫다고 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한 얼굴이었지만 사실 메이슨은 악역이 편했다. 원래 그다지 착한 사람은 아니었고 또 착한 척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체이스가 맡은 주인공 역은 메이슨이 가장 싫어하는 성격의 인물이었다. 선량하고 도덕적이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옳은 말만 해대는 꽉 막힌 타입. 실제 체이스는 그렇게 꽉 막힌 건 아니지만 확실히 잘 어울리긴 했다.
“헤일리, 레이칼튼 씨와 사귀는 거예요, 정말?”
애쉬튼은 “정말 그런 건 아니죠?” 하고 못 믿겠다는 듯이 물었다.
“어떨 것 같아요? 사귈 것 같아요?”
메이슨이 렌즈 케이스를 닫아 소품 담당에게 건네며 묻자 애쉬튼은 와르르 웃었다.
“사실 사귈 것 같지는 않죠. 아니 뭐, 레이노아잖아요?”
그 사람이 당신과? 애쉬튼은 메이슨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약간 건방지게 웃었고 체이스는 애쉬튼을 살짝 흘기며 말했다.
“저는 아닙니다. 저는 레이칼튼 씨와 헤일리가 사귀신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고…,”
“에이, 솔직히 좀, 많이 이상하죠.”
애쉬튼은 “안 그래요, 글로리아?” 하고 지나가던 글로리아에게 물었다.
“아니 뭐, 그…―, 레이칼튼 씨가 워낙에 스캔들도 없으시고 인기에 비해 언론에 노출되는 일도 드무니까요. 아무래도 좀…….”
이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
“왜? 그 남자도 헤일리에게 푹 빠진 거지.”
촬영이 잠시 비었는지 어느새 다가온 빅이 참견했다. 노아도 헤일리의 그 끝내주는 모습을 봤으니 반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애쉬튼은 “에이, 감독님.” 하고 그를 달래듯 손을 저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듯.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왜 굳이 취재진이 있는 앞에서 뽐내듯 데이트 신청을 하고 그러겠어?”
“그건 뭐……, 아니, 그럼 감독님은 지금 그분이 헤일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라도 한단 거예요?”
빅은 어깨를 으쓱하며 “원래 사내 녀석들이란 사랑에 빠지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고 싶어 하잖아?” 하며 체이스의 옆에 섰다.
“그런 일반적인 ‘사내 녀석들’, 에 노아 레이칼튼 씨를 넣는다니 세상 여성들의 환상을 깨지 마세요.”
또 다른 조연 배우 리지가 끼어들었다. 메이슨은 캐릭터 때문에 낮에 물들인 검은 머리칼 위로 모자를 눌러 쓰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힐끗, 부외자처럼 빠져서 쳐다봤다.
“다들 너무 무례한 것 아닙니까? 헤일리는 좋은 분입니다. 상대가 누구든 충분히 존중 받으며 교제할 수 있는,” 체이스가 사람들에게 말했고 또 지나가던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근데 헤일리, 예전에 이미 차이지 않았어요?”
“차인 건 아니지. 노코멘트였잖아?”
“그 말이 그 말이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하지만 상식적으로, 사귀는 게 아니라면 레이칼튼 씨가 왜 그러겠어요? 데이트 신청을 한 건 헤일리가 아니라 그쪽입니다.”
“아니 뭐, 무슨 이유가 됐든간에 ‘좋아해서’ 보다는……,”
“지금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어이, 체이스, 진정해.” 빅이 체이스를 말렸고 뒤늦게 달려온 토니가 “무슨 일이야?” 하고 메이슨을 향해 물었다. 메이슨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난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체이스, 헤일리한테 돈 빌려줬어요? 아니면 혹시 헤일리 좋아해요?”
애쉬튼이 왠지 열이 올라 체이스에게 따지듯 물었고 체이스는 “물론 좋아합니다.” 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냐는 듯한 말에 애쉬튼은 왈칵 얼굴을 구겼다.
“체이스도 안 어울려요!”
노아처럼 성역이라는 건 아니지만 체이스 빌러도 영화 한 편당 수천만 달러를 받는 어마어마한 배우였다. 건강하고 성실하고, 모두에게 친절한 신사 같은 남자였다. 헤일리 러스크의 걸레 같은 이미지에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이, 애쉬튼, 말 좀 가려.” 빅이 중재했고 “그래, 자네 말이 좀 심하네.” 어느새 끼어든 토니가 그 말에 동조했다. 동조하는 토니도 애쉬튼의 말이 심하다는 것이지 틀리다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 시끄럽게 떠드는 동안 메이슨은 소품담당과 분장담당에게 수고하셨다고 인사하고 돌아섰다.
“사귀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럴 리가 없어요.”
“사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일을 하겠어?”
“사귄다고 해도 몰래 사귀겠지 뭐 자랑할 일이라고 그러겠어요? 사귀는 게 아니니까―,”
사람들이 저들끼리 한창 토론하는 가운데 메이슨은 집에 가도 되냐고 묻기에 좋은 타이밍을 살폈다.
“저……, 제 촬영분은 끝난 것 같은데 가 봐도 될까요?”
메이슨이 글로리아의 뒤에 가서 조심스럽게 묻자 왁자지껄 떠들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쓸데없는 토론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어때? 레이칼튼 씨랑 말이야.”
사귀나? 빅이 이번에도 총대를 메고 물었다. 메이슨이 뭐라고 하나 다들 그의 입을 벌건 눈으로 주시했다. 메이슨은 어깨를 으쓱하며 간단히 말했다.
“아뇨. 안 사귀는데요. 그분이 왜 저랑 사귀겠어요?”
메이슨이 덤덤한 얼굴로 애쉬튼을 향해 말하자 그가 눈치도 없이 “그러니까요!” 하고 동조했다. 빅과 체이스가 얼굴을 찡그린 채 그를 쳐다봤지만 애쉬튼은 자기 말이 맞았다는 것에 더 당당해진 얼굴이었다.
“근데 레이칼튼 씨는 왜 그래? 데이트 신청에 오늘 아침에도 데려다 줬잖아?”
오늘 오전, 다들 헤일리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리라 포기하고 다른 장면부터 찍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헤일리의 저택 정원이 테러 당했다는데요?’ 하는 소리와 폐허가 된 정원 사진을 휴대폰으로 보여줬고 그와 동시에 그들 머리 위로 헬리콥터가 지나갔다.
촬영장 안에 있는 헬리콥터 착륙장에 허가도 받지 않은 채 내려앉은 헬리콥터의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왠지 심드렁하고 불만스러운 얼굴의 헤일리가 내렸다. 반면에 헬리콥터 안에 앉아있는 노아는 해사하고 달큼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레이칼튼 씨가 제게 왜 그러시는지 저야 모르죠.”
제가 너무 싫어서 제 인생을 힘들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으실 수도 있고. ―메이슨은 오늘 아침 폐허가 돼버린 정원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빅이 “응? 뭐라고?” 하고 되물었고 메이슨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어쨌든 사귀고 그런 거 아닙니다.”
메이슨은 단호하게 말하고 돌아서서 글로리아를 향해 “스케줄 끝이죠?” 하고 다시 물었다.
“오늘 스케줄은 아까 씬으로 끝이네요. 돌아가셔도 괜찮아요, 헤일리.”
PDA를 살핀 글로리아가 약간 더 궁금함이 남은 것 같은 얼굴로 쳐다봤지만 메이슨은 “그럼 돌아가 볼게요.” 하고 빅과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껏 토론으로 달아올랐던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와 ‘…그래?’ 하는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흩어지거나 주변을 서성댔다.
“일도 끝났는데 바로 펍에서 한잔 하지 않을래요? 근처에 좋은 펍을 아는데, 거기가 넌알콜 칵테일도 종류가 많거든요.”
체이스가 이 소란 속에서 안 좋은 소리를 한껏 들은 메이슨을 달래 주기라도 할 요량인지 친절하게 권했다.
“아,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오늘 집을 옮겨야 해서 늦게 들어갈 수가 없어서요.”
“이사 합니까? 어디로요?”
“아뇨, 이사가 아니라 남의 집에서 신세를 잠깐…….”
그러고 보니 토니에게 노아의 집에 가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메이슨은 소품을 챙기고 있는 그를 쳐다봤다.
“파파라치들 때문에 친구 집에서 머무는 겁니까? 근처예요?”
오가기 힘들지 않겠냐는 듯 체이스가 물었고 메이슨은 “글쎄요…….” 하고 말끝을 흐렸다. 노아야 집이 한두 채는 아닐 거고, 아마도 촬영장에서 가까운 집 가운데 비는 집을 빌려주지 않을까 싶기는 했지만 그게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메이슨이 아는 건 그 집에 헬기 착륙장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잠깐 주변을 둘러보고 나타난 애쉬튼이 ‘휘유,’ 하고 약간 신난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헤일리, 촬영장 앞뒤로 파파라치들 완전히 깔렸어요. 나탈리 키스가 정치가의 사생아를 낳겠다고 선언했을 때보다 더 많은데요? 집에는 갈 수 있겠어요?”
“어머나. 아침 일 때문에 더 모인 모양이네요? 내일도 오전 촬영인데 괜찮겠어요? 촬영장 안에도 잠자리를 마련해 줄 수도 있기는 한데…….”
글로리아도 걱정이 되는지 물었고 체이스는 “그럼,” 하고 나섰다.
“친구의 집이 먼 거라면 호텔이나, 아니면, 혹시 저희 집에 묵는 것은 어떻습니까?”
체이스는 충동적으로 권한 듯했으나 곧 아주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요. 제 집도 방이 비고, 촬영장과 아주 가까워서 오가기도 괜찮습니다.”
제 집에서 총도 같이 배우고 영화 이야기도 하고……, ―체이스는 둘이 같이 맥주도 마시고 총도 만지고 함께 영화도 보자며 약간 들뜬 얼굴로 말했다. 사내들의 놀이를 할 좋은 친구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표정에 의자에 주저앉아 있던 빅이 “뭐, 잠깐.” 하고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지금 둘이서 지내려고? 설마……, 같이 다이하드 시리즈 보고 그런 거 아니지?”
“저희 집 DVD 플레이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게 브루스 윌리스 얼굴입니다.”
“……원이야, 투야?”
“원부터 포까지 차례대로 재생됩니다.”
체이스가 당연하지 않냐는 듯이 말했고 빅은 갑자기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번 영화에 대해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오늘, 반드시 셋이서 말이야.”
나도 끼면 안 되냐는 말에 체이스가 약간 고민이 된다는 듯 빅을 훑어봤다. 사내들의 밤에 초대할 멤버로 적합한지 아닌지 꼼꼼히 살피는 체이스의 시선에 빅은 어깨를 펴고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썼다.
“오늘 세 분이서 노시게요? 저도 가도 됩니까?”
“미안하지만 침실이 세 개뿐이라서요.”
애쉬튼이 끼려고 들자 체이스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방이 세 개라는 말에 빅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했고 애쉬튼은 기가 죽어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때요, 헤일리? 괜찮다면 저희 집에서 촬영이 끝날 때까지 같이 지내면 어떻습니까? 다이하드 좋아하죠?”
체이스는 당장 오늘부터 다이하드 원투쓰리포를 달리자며 눈을 반짝거렸다. 다이하드. ―메이슨은 살짝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거의 안 보는 메이슨도 그 영화는 본 적이 있었다. 몇 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전, 막 용병이 된 부하 놈이 좋아하는 영화랍시고 작전 중 비는 시간에 그걸 틀어놨었다. FBI는 병신이고, SWAT는 소녀들이고, LAPD는 머저리였다. 주인공은 터무니없이 오래 살아남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허황된 영화였다. 그 시리즈의 영화를 한 편도 아니고 네 편을 연달아서 보겠다고? 빅과 체이스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밤새 맥주를 마시고 핫윙을 뜯으며 영화를 볼 생각에 들떠 있었다.
노아의 집에 묵는 것도 썩 내키는 일은 아니긴 했다. 동거설도 시끄러울 거고 노아의 이미지에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체이스의 집에 머무는 것이 어쩌면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지만…….
“어때요? 우리 둘이 차를 타고 헤일리는 뒷좌석에서 모포 같은 걸 덮고 있으면 쉽게 빠져나가지 않을까요?”
첩보 영화의 주인공 역도 숱하게 했던 체이스는 들뜬 것처럼 말했고 빅은 “오픈 카 아냐? 들키지 않을까? 트렁크는 어때? 괜찮겠지?” 하고 메이슨을 향해 물었다.
“글쎄요. 전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메이슨은 한숨처럼 대답했다. 체이스와 빅에게나 그게 재미있는 모험이지 늘 그런 짓으로 목숨을 연명 했던 메이슨에게는 그건 장난이 아니었다. 트렁크는 좁고 어둡고 지랄맞게 흔들려서, 엿 먹이고 싶은 놈을 태우기에 적절한 곳이었지 스스로가 올라탈 곳은 절대로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체이스의 집에서 머무는 것이 나았지만 반짝거리는 체이스와 빅의 눈을 보고 있자니 절로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헤일리의 구질구질한 체력에 파파라치에게 시달리고 액션이 섞인 영화 촬영까지 하고, 그리고 밤에 다이하드 따위를 연달아 네 편이나 봐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우울했다.
“트렁크는 좀 그런가? 왜? 괜찮은 것 같은데?”
“전혀 안 괜찮을 것 같은데요.”
빅이 스릴 넘치고 재밌지 않겠냐고 떠들어댄 말에 대답을 한 것은 메이슨이 아니었다.
“좁고 어둡고 흔들리고……, 언론에 알려지면 창피하고 말이죠.”
메이슨은 뒤에서 들린 나른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노아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보다는 헬기가 훨씬 낫지 않나요?”
모양새로 보나 탑승감으로 보나 말이죠. 노아는 메이슨의 바로 옆에 서며 물었다.
“헛, 레이칼튼 씨?”
여, 여긴 또 어쩐 일로……, 갑작스러운 노아의 등장에 빅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촬영장의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프로듀서 글로리아는 멀리서 다급한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고 메이슨은 뺨을 긁적였다.
“전화는 아직 안 드린 것 같은데요.”
끝나면 전화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타날 때마다 이렇게 시선을 집중시켜서야,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메이슨의 말에 노아는 “그렇긴 한데,” 하고 난처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다른 사람이 채갈 것만 같았거든요.”
노아는 체이스와 빅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사랑에 빠진 젊은 청년의 조급함과 질투가 그대로 묻은 듯한 시선이었다. 빅은 화들짝 놀라 변명하듯 말했다.
“아, 그, 머물기로 한 곳이 레이칼튼 씨 댁이야? 아이쿠, 맙소사, 진작 말을 하지! 우린 그것도 모르고 눈치 없이――.”
“그러게요. 하마터면 우리가 눈치 없이 굴 뻔했네요.”
하하하, 체이스가 어색하게 웃었고 빅도 “하하하, 다이하드…….” 하고 웃었다. 아쉬움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목소리였지만 빅은 아무렇지 않은 척 “그래. 트렁크보다야 헬기가 낫지. 그렇지. 아무렴.” 했다.
“헤일리, 레이칼튼 씨 댁에서 머무는 거예요? 두 분 사귀는 사이 아니라면서요?”
체이스에게 남자들의 밤을 거절당하고 찌그러져 있던 애쉬튼이 노아의 등장에 약간 의아한 것처럼 물었다. 그의 말에 노아는 메이슨을 쳐다봤다. 마치, ‘그런 말을 했어요?’ 라고 묻는 듯이.
“…….”
메이슨은 눈을 도르륵 굴려 시선이 따가운 주변을 돌아봤다. 사실이잖아요, 라는 말을 하기엔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사귀는 건 아니긴 하죠.”
메이슨 대신 노아가 대답했다. 그는 약간 난처한 것처럼 메이슨의 표정을 살피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저는 물론 그런 사이가 되고 싶지만요.”
덧붙이듯 중얼거리는 말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노아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들었다. 메이슨도.
“…….”
“…….”
“……. …….”
다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메이슨을 쳐다봤지만 그라고 이 상황에 대해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왜 그래요, 미쳤습니까?’ 라든가, ‘아, 정말 재미있는 농담이네요,’ 라든가. ‘절 놀리는 건가요?’ 와 같은 말을 하기엔 타이밍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아, 그만 갈까요? 피곤하죠?”
다정하게 메이슨을 쳐다본 노아가 세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정말 그러네요.”
아주. 몹시, 무척. ―메이슨이 대답하자 그는 가까운 곳에 헬기를 세워 놓았다며 메이슨을 데려갔다.
“……체이스, 방이 세 개라구요?”
그 두 사람이 떠나고 한참 뒤, 애쉬튼이 다시 물었고 체이스는 메이슨이 떠난 곳을 쳐다보다 말했다.
“……생각해 보니 DVD 플레이어가 고장 났습니다.”
빅과 체이스는 잔뜩 실망한 얼굴과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남자들의 밤은 열리지 않았다.
* * *
“제가 괜히 끼어들었나요? 체이스 빌러 씨의 집에 가고 싶었어요?”
헬기 쪽으로 앞장서서 걷던 노아가 심상하게 물었다.
“아뇨, 뭐 그렇지는 않았는데―….”
중얼거리듯 대답한 메이슨은 걸음을 멈추었다. 안 그래도 밤 새 다이하드 네 편을 연달아 보자는 말에 질려 그쪽은 거절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보다는―.
메이슨의 걸음이 멈추는 기척에 노아가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헬기 뒤로 노을이 지고 있었고 그가 노을을 등진 채 웃으며 물었다. 메이슨은 그의 기분 좋은 듯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제 슬슬, 왜 이러시는 건지 이야기 해 주셔야 될 것 같은데요.”
어제와 오늘 아침, 그리고 조금 전까지 메이슨은 영문도 모르는 채로 노아가 하는 행동에 휩쓸렸다. 어제야, 위기 상황에서 구해준 것이었고 오늘 아침에도, 방식이야 어쨌든 메이슨이 먼저 도움을 요청한 일이었으니 그것에 대해 따져 묻지 않았다. 굳이 이런 방식일 필요가 있냐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냥 두었다.
그러나 같은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스캔들이 커지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제가 착각하는 겁니까?”
심지어는 그가 헤일리를 좋아하고 있다는 묘한 방향의 스캔들이었다.
메이슨은 고개를 기울인 채 노아를 쳐다봤다. 대체 그가 무슨 생각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시선을 집중 시킬 총알받이라도 필요한 것일까?
메이슨의 물음에 노아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른하게 웃었다. 슬슬 그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는 듯한 즐거운 시선에 메이슨은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글쎄요.”
그는 메이슨을 천천히 훑어보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를 염색했군요.”
그의 길고 예쁜 손가락이 메이슨의 검은 머리카락에 닿았다. 메이슨은 흠칫, 어깨를 움칠했지만 그대로 멈추었다.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잘 어울리네요, 생각보다.”
노아는 뭔가를 떠올리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메이슨은 귓가에 닿은 채 멈춘 그의 손가락에 신경이 쏠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손가락을 치우기 위해 메이슨이 손을 올렸고,
“헤일리,”
노아가 낮은 목소리로 메이슨을 불렀다. 메이슨이 멈칫하자 그가 머리카락을 걷어놓은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일 것처럼 몸을 기울였다. 귓가에 따뜻한 숨이 닿았다. 오싹한 기분에 메이슨은 입술을 깨물며 물러나려 했고 노아의 손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낮게 웃은 그가 달큼한 목소리로 “어쩔 건가요,” 하고 속삭였다.
“―내가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면.”
은밀하게 속삭인 그가 조금 몸을 일으켜 메이슨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의 눈이 천천히 휘며 웃었다.
“내가 당신이 헤일리 러스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면……, 어쩔 건가요.”
눈꺼풀 아래로 보이는 녹색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