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모든 스태프들은 숨을 죽인 채 메이슨을 쳐다보고 있었다.
창고로 들어선 그는 꼭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검은 양복,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섬뜩한 무표정까지. 실제 비밀 조직의 요원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안쪽에서 들린 바스락 소리에 그의 날카로운 눈이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창고 안쪽에 숨어 있던 체이스는 가까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숨을 죽였다.
뚜벅, 뚜벅, 뚜벅, 구두굽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발자국 소리가 체이스의 바로 옆 골목까지 울렸고, 그때.
고요한 창고에 작은 진동 소리가 울렸다. 조금 인상을 쓴 메이슨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아니. 밖에서 좀 더 기다려. 안에 쥐새끼가 숨어든 것 같아.”
그가 낮게 말하며 몇 걸음 더 걸었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 아직 이 안에 있다는 것 외엔.”
체이스는 지척까지 다가온 소리에 어깨를 굳히고 마른 침을 삼켰다. 메이슨의 휴대폰 너머에서 ?지원이 필요합니까??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메이슨은 가볍게 웃었다.
“아니.”
지금이라도 뛰쳐나가 상대를 공격하고 도망쳐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듯 체이스가 눈을 굴렸고 문득 그의 눈동자가 멈칫했다.
철컥, 서늘한 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울렸다.
“……,”
체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에서 메이슨이 싸늘한 얼굴로 내려 보고 있었다.
“……내가 쥐새끼를 놓치는 것 봤어?”
무심하게 말한 메이슨은 툭, 휴대폰을 끊었다. 체이스는 숨까지 멈춘 채로 메이슨을 쳐다봤다.
“――컷!”
빅은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컷을 외쳤다. 메이슨은 고개를 들었고 체이스도 땀을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메이슨이 그가 일어나기 쉽도록 손을 잡아 주었다.
“다음 장면 바로 준비해주세요! 5분 뒤에 바로 갑니다!”
글로리아와 스태프들이 다음 장면을 준비하며 잠시 무너진 전열을 정리했다.
“아, 정말로 숨어 있다 들킨 기분이었어요.”
체이스가 자기 팔에 소름이 돋은 것을 보여주며 말했고 메이슨은 적당히 웃었다. 토니가 건넨 음료를 마시는데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레이칼튼 씨 댁으로 가시는 줄도 모르고 제가 너무 나섰죠.”
“아. 아니오, 저야 고마웠죠. 그런 말씀까지 해주시고.”
다이하드 네 편을 연속으로 보자는 것만 아니었다면 그의 집으로 갔을 지도 몰랐다. 실제로 메이슨은 지금 약간 후회하고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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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헤일리 러스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면……, 어쩔 건가요.’
노아가 속삭이듯 말했을 때 메이슨의 머리는 잠깐 멈추었다. 내게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물었을 때,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라는 답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미쳤습니까?’
메이슨은 복잡한 머릿속을 감추며 일단 물었다. 약간 의아한 것처럼 고개를 갸웃하며 쳐다보자 그가 살짝 물러나며 웃었다.
‘몰랐던 것처럼 말하네요?’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덜덜 떠는 걸 보지 않았냐고 그가 농담처럼 말했고 메이슨은 ‘레이칼튼 씨.’ 하고 그를 불렀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내가 헤일리 러스크가 아니라고?’
메이슨은 스스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어딜 봐도, 누가 봐도 자신은 헤일리 러스크였다. 잠시 염색을 해 금발은 아니었지만 창백한 얼굴과 단정한 이목구비, 마르고 큰 키. 곱디고운 손까지. 헤일리 러스크가 아닌 곳이 없었다.
그러나 노아는 되레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요? 당신 스스로도 제대로,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별로 열심히 숨기지도 않았잖아요, 당신? ―노아는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듯이 말했다.
‘…….’
노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헤일리와 전혀 달랐다. 클럽을 전전하지도 않았고 약을 하거나 술을 마시지도 않았다. 헤일리라면 쳐다보지도 않을 옷들을 입고 헤일리의 친척들을 내쳤으며 그의 약쟁이 친구들의 연락을 끊어냈다.
헤일리 러스크로서 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메이슨은 애초에 새로운 삶을 살자고 생각했지 망나니 헤일리로 살자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영화를 찍고 있기는 했지만 카페를 차리고 유유자적 살겠다는 꿈은 여전히 꾸고 있었다.
‘숨기고 자시고―…,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메이슨은 약간 짜증이 난 것처럼 말했다.
‘보통, 사람이 성격이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정말 상상력도 좋으시네요. ―뭐, 제가 저, 헤일리를 죽이고 성형이라도 하고 본인 행세라도 한다는 건가요?’
영화처럼? ―메이슨이 묻자 노아는 대답 대신 묘하게 웃었다.
‘어제 오늘, 제게 이상한 행동을 하신 이유가 그겁니까? 제가 다른 사람 같아서요?’
메이슨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그게 무슨 이유가 된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저 기억상실증이거든요, 저.’
죽다 살아났으니 열심히 살아보자 한 거고.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지 않냐고 메이슨이 말하자 노아는 예상한 답이라는 듯이 웃었다.
‘말을 너무 많이 하네요. 그럴 필요는 없는데.’
노아는 다시 몸을 돌려 헬리콥터 쪽으로 걸으며 말했다.
‘겁먹지 마요. 그러라고 한 말은 아니니. 그저 내가 왜 이러는지, 궁금해하기에 대답해 준겁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마요. ―계속 그렇게 모르는 척하는 것도 좋겠죠.’
메이슨은 노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십여 걸음 앞 헬리콥터에서 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헬기 앞까지 걸어간 노아는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메이슨을 돌아보았다.
‘…….’
메이슨은 노아를 쳐다봤다. 노을은 조금 전보다 더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메이슨은 촬영장이 있는 뒤를 돌아보았다.
노아가 무언가 알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자신의 집에서 마주친 적도 있었고 몇 번, 그의 앞에서 헛소리를 늘어놓은 적도 있었으니까.
용병 일을 하며 사선을 건널 때마다 통감했던 것은 감이 안 좋을 때는 그 즉시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어쩌면, 지금 이대로 돌아서서 도망치는 것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
다시 돌아보자 노아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이리로 오라던가, 어서 가자던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물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10년 전, 경호 임무를 마치던 날 보았던 그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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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로 가는 게 아니었는데…….”
메이슨이 중얼거리자 체이스가 “예?” 하고 되물었다. 메이슨은 별 것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다.
어제, 노아를 따라가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메이슨은 그를 따라 헬기로 올라탔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고, 그런 상태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을 선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주변을 가득 둘러싸고 있는 파파라치들을 뚫고 사라지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려면 못 할 일은 아니었지만 쉽지 않았고.
그리고……, 그 순간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10년 전, 보디가드 일이 끝나 그를 두고 저택을 나섰을 때처럼.
10년 전에는 메이슨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아내와 딸아이를 잃었고 두 사람을 죽인 범인을 찾아 난도질한 뒤였다. 모든 것을 잃었는데 복수마저 너무 빨리 끝나버린 것이었다. 그때 메이슨이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망치거나 타인을 망치는 것뿐이었다.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려던 메이슨에게 한 달간의 경호 임무가 떨어졌고 그리고 다시 노아를 만났다. 자신이 더러운 화장실에서 구해주었던 그 작은 아이를.
그 한 달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Zii나 노아의 부모는 좀 더 일할 것을 권했지만 메이슨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노아를 돌보는 동안엔 죽은 아내도, 아이도 잊게 되기 때문이었다.
메이슨은 그 아름다운 소년에게 약했다. 가족도 애인도 아닌데 그를 돌봐주고 싶고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악몽을 꾸느라 식은땀에 젖어 떨고 있는 그를 보면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식은땀을 닦아주고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고 있자면 그가 조용히 눈을 떴다가 곧 안심한 것처럼 잠들었는데 그게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타인에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은 메이슨에게도 위로가 되었고 그건 곧 그만큼의 죄책감으로 변했다. 언젠가는 아내와 아이를 잊고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겠지만 그때는 너무 일렀다. 더 슬퍼해야 할 것 같았고 더 괴로워해야 할 것 같았다.
경호 업무를 그만두자고 결정하는 것은 쉬웠는데 막상 노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건 쉽지가 않았다. 인사를 하고 서재를 나와 2층, 1층, 계단을 내려가 저택을 나서고 정원을 지나는 내내 걸음이 무겁고 어려웠다.
노아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 아닌데, 그를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을 텐데. ―이성적으로는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메이슨은 열일곱 살인 그가 여전히 일곱 살, 가지 말라고 옷자락을 잡던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떠나면 죽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존재. ―뭐, 노아가 알면 웃다 못해 화를 낼지도 모르는 그런 생각이었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그리고 이제는 열일곱 살도 아닌 스물일곱 살이고, 건강히 잘 살다 못해 메이슨의 평화와 행복을 위협하고 있기까지 했지만 어제 헬리콥터 앞에서 메이슨은 20년 전, 1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딱히 그런 의미의 시선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지.”
메이슨은 싱겁게 중얼거렸다. 20년 전에는 몰라도, 10년 전이나 어제는 노아가 그를 붙잡은 게 아니었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고 순간 노아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 순간 자신이 왜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했는지, 메이슨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헤일리? 괜찮으십니까?”
혼잣말을 중얼대는 메이슨이 이상해 보였는지 체이스가 물었다.
“아, 오늘 몸이 좀 안 좋긴 하네요. 잠깐 쉬면 괜찮을 것 같은데.”
혼자 조용히 생각 좀 하고 싶었는데 체이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사람들 때문에 많이 힘드십니까?”
“예?”
“그, 안티라든가, 레이칼튼 씨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편견이라든가―…. 다들 소란스럽게 구니까 힘든 건 당연하시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금세 잠잠해 질 겁니다.”
진심은 통하는 법이니까요. 체이스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메이슨은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멀끔하게 쳐다봤고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죽어버려, 이 걸레야 -666?
꺼내어 확인하자 666, 익명의 번호로 욕설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당장 노아와 헤어져? ?아빠랑 붙어먹을 년? 문자는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로 연이어 도착했다.
“마, 맙소사. 어떻게 이런 말을! 헤일리, 어서 지워 버려요! 아니, 번호를 추적해 신고합시다!”
옆에서 함께 문자를 본 체이스가 불 같이 화를 내며 말했고 메이슨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움직여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666이라니, 귀엽다 못해 한심할 지경이었다. 아빠랑 붙어먹을 년이라는 부분에서는 헤일리의 성취향까지 반영해준 세심함이 눈에 띄었다.
“됐어요. 뭘 추적까지 합니까, 이런 걸로.”
번호를 바꾸거나 아니면 한동안 휴대폰이 없이 살아도 괜찮았다. 어차피 영화에 관한 연락은 토니를 통해서 하고 있었고 특별히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메이슨은 토니를 찾기 위해 주변을 돌아봤다. 촬영장 구석에 휴대폰을 들고 쪼그려 앉아있는 토니가 보였다. 그는 최근, 헤일리의 기억상실 이후 갑자기 인생이 편해진 것을 견디지 못하고 촬영장의 스태프를 자청해 일을 돕곤 했다. 오늘도 무언가를 옮기고 있었는지 상자를 무릎 앞에 두고 있었다.
표정이 이상해 다가가자 토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헐떡헐떡,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그가 쥐고 있는 휴대폰에서 질펀한 욕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히끅, 히끅,”
메이슨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토니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리, 리스!”
“뭘 이런 걸 듣고 있어요?”
그냥 끊으면 될 걸. 메이슨은 할 일도 더럽게 없네, 하는 얼굴로 그를 보았고 토니는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나, 나는 괜찮아!”
“당연히 괜찮겠죠. 상처 난 데도 없는데.”
메이슨이 심상하게 말하자 토니는 땀을 닦으며 “아, 그, 그렇지……?”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무서워서 심장마비라도 올 것 같았는데 상대가 무심하게 구니 무안한 한편 약간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메이슨은 들고 있던 음료를 토니에게 건넸고 그는 목이 탔는지 받아서 꿀꺽꿀꺽 마셨다.
“이런 전화 많이 왔어요?”
메이슨은 다시 울리기 시작하는 토니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꿀꺽, 목에 뭐라도 걸린 것처럼 음료를 삼킨 토니는 메이슨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 그게, 어제부터 갑자기……. 예전에도 안티는 많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욕하거나 위협을 하는 경우는 없었는데―, 어, 어쩌지?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리스, 네게 테러를 하겠다고 자꾸……. 토니는 입이 자꾸 마르는지 음료를 한 모금 더 삼켰다.
“테러라니, 신고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체이스가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말했고 메이슨도 잠깐 고민했다. 테러 위협이라. 확실히 그냥 넘길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총탄과 폭탄이 정신없이 오가는 전쟁터는 아니었지만 사람은 원래 칼 한 자루로도 쉽게 죽는 법이었다. 안티나 스토커에게 살해당한 연예인은 제법 많았다.
“상대는 한 명이에요? 번호가 어디서 유출 되었는지, 예상되는 사람은 있어요?”
“글쎄, 휴대폰 번호를 소속사 연락처로 쓰고 있어서…. 번호는 페이스북에 올려놨는데.”
토니는 어물거리며 말했고 메이슨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휴대폰을 쳐다봤다. 계속해 울리는 휴대폰을 받자 토니가 화들짝 놀라며 “리스!” 하고 불렀다.
?내 말 제대로 전했어? 헤일리 같은 년은, 씨발, 당장에라도 매장 시킬 수 있으니까.?
휴대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메이슨은 얼굴을 구겼다. 기껏해야 중고등학생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 목소리였다. 전화를 끊고 바로 걸려오는 또 다른 전화를 받자 ?헤일리의 소속사죠? 난 노아의 애인인데요, 헤일리 때문에 제가 아주 곤란해졌거든요?? 하는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전화를 끊고 바로 걸려오는 새 전화를 받자 이번엔 ‘노아와 헤일리의 스캔들이 애들 교육에 좋지 않다’는 학부모의 항의전화였다.
메이슨은 세 번째 전화를 끊고 토니에게 말했다.
“일단 휴대폰 번호는 바꿔요.”
“번호를 바꾸라고? 새 일이 들어오면 어떻게 해? CF라든가―, 연락이 안 되어서 일을 놓치기라도 하면,”
“글쎄요. 이런 상황에서 새 일이 들어올까요?”
저는 아닐 것 같은데? 메이슨은 잘라 말했다. 매번 촬영장 앞엔 기자와 파파라치들이 바글거리고, 출퇴근은 헬기로만 가능하며, 테러 위협을 받는 비호감 연예인에게 새 일이라니. 하던 일도 잘릴 판이었다.
“하, 하지만 기자들한테도 계속 전화가 와. 안 받으면 잔뜩 화가 나서 이상한 기사를 써갈겨버릴 거라구.”
“염려 마요. 전화를 받아도 이상한 기사를 낼 테니까요.”
메이슨은 신경 쓰지 말라고 손을 내저었다. 토니는 그래도 되나 싶은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메이슨은 “새 번호 만들면 문자 보내놔요.” 하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히 인터넷 같은 거 검색해 보고 상처 받지 말고, 길 가다 욕먹어도 신경 쓰지 마요. 욕먹는다고 귀 아픈 것도 아니니.”
안 그래도 소심한 사람 같은데 이런 일을 일일이 신경 쓰다간 당장 내일, ‘몇 달 전 심장마비로 실려 갔던 헤일리 러스크의 매니저, 심장마비로 실려가……’ 하는 기사가 뜰 것 같았다.
“응, 그럴게…….”
토니가 시무룩하고 기운 없는 얼굴로 대답했고 체이스는 “제 매니저가 제게 늘 하는 말이네요.” 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광팬인 토니가 놀라워하며 물었다.
“세상에, 체이스 빌러 씨도 안티가 있어요?”
“그게……, 제가 웃는 게 기분 나쁘다고 그러더라구요…….”
정말 그런가요? 체이스가 은근히 묻자 토니는 “설마요!” 펄쩍 뛰었다. 실제로 체이스를 처음 봤을 때 좀 기분 나쁘다고 생각했던 메이슨은 살짝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여하튼 당장 보이는 위협은 별것 아니긴 한데, 경찰에 신고하거나 경호원을 고용하는 문제는 생각을 해보죠.”
어차피 집을 오가는 건 노아와 함께 헬기를 사용하고 있으니 특별히 경호가 더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하는 건 테러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언론에 대고 떠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건 별로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넌 괜찮아, 리스?”
악성 댓글 하나에도 온갖 히스테리를 부리며 울고불고하던 헤일리의 덤덤한 얼굴에 토니가 물었다. 체이스도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고 메이슨은 힐끗, 주변을 돌아봤다.
“뭐……,”
확실히 빅과 글로리아, 체이스 정도를 제외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꼭 처음 토니의 손에 이끌려 드라마 ‘클루’ 의 촬영장에 갔을 때 같았다. 물론 그때보다는 좀 더 복잡하고 미묘한, 질투나 시기처럼 위험한 감정들도 눈에 띄었지만.
“괜찮아요. 어차피 제가 뭘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요.”
판을 깐 것은 노아였고 말을 움직이고 있는 것도 노아였다. 그가 바라는 게 무언지는 모르지만 메이슨이 할 수 있는 일은 영화를 열심히 찍는 것뿐이었다. 누군가가 깔아놓은 판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살아남는 것은 메이슨이 예전에 했던 일과 비슷했다.
“강하시네요, 정말.”
체이스가 감탄하듯 말했고 메이슨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강하다기보다는 그저, 깊이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타입에 가까웠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근데 헤일리, 당신도 번호를 바꿀 겁니까?”
새 번호는 어떤 걸로……, 메이슨이 새 번호를 알려주지 않을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체이스가 물었다.
“아. 아뇨. 바꾸긴 바꿀 텐데 기다리는 연락이 있어서, 당장은…―.”
메이슨은 생각난 김에, 하고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도로록,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쏟아졌고 메이슨은 ‘되게 인기인이 된 기분인데.’ 하고 실없이 생각하며 번호를 확인했다. 666, 0000, 13, 익명의 욕 문자들 사이에서 기다리던 상대의 번호가 보였다. 메이슨의 옛 동료이자 탐정, 피츠로이의 번호였다.
* * *
며칠 전, 노아의 요트에서 내린 메이슨은 비가 죽죽 흐르는 웨스트우드 빌리지를 찾았다. 헤일리의 사촌 조이의 집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메이슨이 노아와 호텔방에 들어간 간 사진을 찍은 것은 조이였고, 처음 트위터에 사진을 올린 사람은 산드라였다. 그 뒤로 안나, 제이슨, 콜린, 모두가 그 사진을 퍼 날랐고 ‘엿 먹어라.’ 라고 덧붙였다. 아침에 노아가 나타나 손을 붙잡고 데이트를 신청하는 미친 짓을 저질러주지 않았다면 메이슨은 그야말로 엿을 먹고 말았을 터였다.
조이가 따라오는 것을 알면서도 제대로 경계하지 않았던 스스로를 탓하기는 했지만 여하간, ‘날 엿 먹이다니 대단한걸.’ 하고 박수치고 끝날 일은 아니었다.
대형 마트에 들어가 새 옷과 모자, 장갑과 우비를 사고 참 험악해 보이는 식칼 한 자루를 구입했다. 사람을 죽이는 데에는 총이 더 수월했지만, 사람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는 데에는 이, 칼만 한 게 없었다.
메이슨은 검은 옷과 모자에 우비를 뒤집어쓰고 조이의 집을 찾았다. 꽤 좋은 오피스텔이라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기는 했지만 전문가가 설치한 것은 아닌지 사각이 많았다.
벨을 누르고 기다리자 한참동안 안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올 것을 알고 미리 몸을 피했거나 없는 척을 하는 걸까? 메이슨은 ‘조이가 그렇게 똑똑할 리가 없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무심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덜컥. 문은 아주 쉽게 열렸고 메이슨은 미간을 구겼다.
이건 예정에 없던 일인데. 주변을 경계하며 문을 활짝 열자, 난장판이 된 집 안이 보였다. 메이슨은 천천히 안을 둘러봤다. 언뜻 도둑이나 강도가 든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아니었다. 일단 피가 튀거나 칼자국, 총알자국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텅 빈 옷장과 열려 있는 금고, 사라진 여행가방.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이리저리 뒤진 흔적은 아니었다.
도망쳤군. ―메이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맛을 다셨다. 일을 저질렀으니 내심 겁이 나긴 했겠지만 경호원을 고용한 것도 아니고 도망이라니. 이렇게 급하게 짐을 챙겼다는 것도 이상했다.
찜찜한 기분으로 조이의 집을 나서 네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모 안나의 집을 찾았으나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삼촌인 제이슨, 조던, 산드라, 모두 메이슨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들의 휴대폰 번호가 이미 삭제된 상태였다.
잠깐 고민한 메이슨은 3년 전 Zii에서 함께 일하다 최근엔 LA에서 탐정 일을 한다던 피츠로이 그린햄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메이슨은 피츠로이에게 되물었다. 피츠로이는 참을성 있게 한 번 했던 말을 다시 했다.
?조이 크랭크는 처음엔 산타모니카에 사는 친구네 집에 갔다고. 두어 시간 뒤에 거기서 누군가에게 쫓겨 작은 모텔로 갔고, 거기에 두 아이를 버렸어. ―아, 아이들은 내일 보호소에 보내진다는군. ―아이를 버린 그녀는 모텔을 나서다 만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따라갔고 그리고, 사라졌어. 없어. 아무데도.?
피츠로이에게 조이와 제이슨, 안나들의 행방에 대해 추적해 줄 것을 의뢰했던 메이슨은 미간을 구겼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자꾸 되물을 거야? 그런 거면 나 녹음기 좀 가져올게.?
그게 내 대신 말해줄 거야. 피츠로이는 짜증난다는 듯이 말했고 메이슨은 그의 말이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피츠로이가 추적할 수 없도록 모든 흔적이 지워져 그야말로 ‘사라졌다’ 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도 모두?”
?이제야 말이 통하네.?
피츠로이는 ?좋은 사람들이야?? 하고 물었다.
?아주 위험한 냄새가 나는데. 그 사람들 찾으려면 고생 좀 할 거야.?
이건 돈을 좀 많이 줘야 한다며 그가 입맛을 다셨다. 잠깐 고민한 메이슨은 “아니, 됐어.” 하고 잘라 말했다.
?됐다고? 안 찾아??
“안 찾아. 친해서 찾았던 건 아니거든.”
그저 새로운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중에 또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피츠로이는 ?히야, 냉정해라―.?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 사람들,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메이슨은 무심하게 되물었다. 알게 뭐람. 자신의 친척도 아니었고 심지어 피붙이라고 해도 그런 인간들은 알 바 아니었다.
상대는 돈을 더 벌 기회를 잃었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하긴. 나도 이번 일은 좀 위험한 느낌이었으니까 여기서 그만둔다면 다행은 다행인데.?
구시렁구시렁. 피츠로이는 일을 하다 만 기분이 들었는지 중얼중얼 귀찮게 굴었다.
?아. 근데 너, 누구 소개 받고 나한테 연락한 거야? 메이슨이지? 말하는 투가 딱 그 새끼,?
“수고했어. 돈은 알고 있는 계좌로 입금하지.”
메이슨은 상대의 말을 끊고 쏘아붙인 뒤 전화를 끊었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귀신같은 새끼였다. 그게 아니면 남 뒷조사로 밥 벌어먹기 쉽지 않겠지만. 말은 많지만 일은 잘하는 놈이었는데 여전한 모양이었다.
메이슨은 고리에 걸려 흔들리는 공중전화 수화기를 잠시 쳐다보다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봤다.
“볼일은 끝나셨습니까?”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필이 물었다. 메이슨은 덤덤한 얼굴로 시계를 보고 있는 필을 쳐다봤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조이들이 사라진 것에는 저 남자의 입김이 작용한 듯했다. 정확히는 노아의 입김이겠지만.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두 명 이상이 되면 더 어려워진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권력이 강하거나 돈이 많은 사람뿐이었는데 권력과 돈을 모두 가지고 있다면 그때는 일이 무척 쉬워진다.
“오늘은 레이칼튼 씨가 없군요.”
메이슨은 ‘내 친척들을 어떻게 한 거죠?’ 라고 묻는 대신 “바쁘신가 보죠?” 하고 물었다.
“물론 늘 바쁘신 분입니다.”
필은 딱딱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메이슨은 그의 불편한 시선에 피식 웃었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 보네요.”
누구라도 자신을 싫어할 수는 있지만 그는 ‘그 노아’의 비서치곤 표정 관리가 너무 안 됐다. 물론 표정 관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필은 메이슨이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지 좀 더 미간을 구겼다.
“저는 그저―, ……레이칼튼 씨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아, 그건 저랑 같네요.”
하긴, 누군들 그게 안 궁금할까요. ―메이슨이 싱겁게 말하자 필은 한숨을 쉬더니 걸어가 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닥치고 타기나 하라는 듯이.
입을 다문 메이슨이 차로 올라타자 문을 닫아준 필은 조수석에 앉았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고 그 주변을 경호업체의 검은 차들이 따랐다. 그리고 대기 중이던 파파라치들이 뒤를 노골적으로 좇았다.
메이슨은 길게 하품하며 창밖을 쳐다봤다. 파파라치들은 빵빵거리고, 차 앞을 위험하게 끼어들거나 이쪽을 보라고 깡통을 던지기도 했다. 고작 사흘 시달렸을 뿐이지만 저 파파라치라는 놈들이 Zii 상사 베레타만큼 싫어질 것 같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돌리려던 차였다.
“――!”
쿵! 메이슨은 흠칫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다 차 천장에 머리를 찍었다. 윽, 메이슨은 머리를 쥐면서도 창밖을 쳐다봤다.
“무슨 일입니까? 괜찮습니까?”
필이 놀라 물었고 메이슨은 대답 대신 “차 좀 세워요! 빨리!” 하고 소리쳤다. 끽! 필의 손짓에 차가 멈추었고 메이슨은 벌컥 차문을 열고 아까 보던 지점을 내다봤다.
“헤일리? 왜 그래요?”
메이슨의 심각한 표정에 필이 그를 불렀지만 메이슨은 입술을 깨물며 기자들이 늘어선 거리를 노려봤다.
잘못 보지 않았다. 확실히 저 가로등 아래 그 두 명이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아론과 애슐리.
그들이 기자들 사이에 숨어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 * *
메이슨은 반대편에 앉아 우아한 자세로 스테이크를 써는 노아의 얼굴을 빤하게 쳐다봤다. 잘 배운 명문가 도련님답게 그의 식사 예절에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순서대로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잔을 들고, 고기를 잘라 씹었다. 그게 무리하는 느낌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고 달큼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점에서 특히 노아 레이칼튼스러웠다.
용병 출신답게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고기를 찢듯이 잘라 씹어 먹던 메이슨은 영화를 감상하듯 노아의 식사장면을 보았다.
“동물원에서 원숭이, 바나나 먹는 거 구경하나요?”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은 노아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메이슨은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을 하는 대신 “더 드세요.” 하고 그에게 샐러드를 밀어주었다. 노아는 피식 웃으며 샐러드 볼에 집게를 쥐었다.
“근데 오늘은 많이 바쁘셨나 봐요?”
메이슨은 스테이크를 우물거리며 넌지시 물었다. 노아가 집에 들어온 것은 밤 11시가 넘어서였고 덕분에 두 사람은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식사를 하고 있었다. 드래싱을 뿌리던 노아가 의아한 것처럼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왜요? 필을 대신 보내서 서운했어요?”
“예? 아, 예, 뭐.”
메이슨은 진짜 연인처럼 달게 웃으며 묻는 노아의 말에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노아는 낮게 웃더니 말했다.
“별로 급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부모님이 잠깐 찾으셔서요. 너무 오래 안 보기도 했고.”
그는 불량스럽게도 식탁에 팔을 기대며 포크를 달랑 흔들어보였다. “아들 노릇은 참 피곤하죠.” 하고.
“―…알만하네요.”
메이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아와 자신의 스캔들로 속이 까맣게 탔을 레이칼튼 부부를 동정했다. 아무 상관없는 대중이 이렇게 난리인데 부모가 보기엔 얼마나 환장할 일이겠는가. 금이야 옥이야 고이고이 키운 잘난 아들이 천박하기로 소문난 약쟁이와 얽혔으니 말이었다.
“언제 한 번 같이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저를요?”
메이슨이 의아한 얼굴로 “왜요?” 하고 물었다.
“그야 제가 만나는 사람이니까 그런 것 아닐까요?”
노아는 되레 묻듯이 말하며 다시 샐러드를 찍어 입에 넣었다. 입매를 일그러뜨린 메이슨은 그가 우물거리며 샐러드를 씹는 것을 보다 물었다.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고 잘 설명하셨습니까?”
“다음에 소개시켜주기로 했어요.”
촬영 비는 날 좀 알려줄래요? ―노아는 달큼하게 웃으며 말했고 메이슨은 “……아, 오늘은 샐러드가 참 싱싱하네요.” 하고 말을 돌렸다. 노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잔을 들어 와인을 마셨다. 두 사람이 앉은 식탁에는 잠시 달칵거리는 식기 소리만 들렸다.
“…….”
메이슨은 힐끗, 다시 눈을 들어 새침한 얼굴로 고기를 우물거리고 있는 노아를 쳐다봤다.
조금 전 노아의 저택으로 돌아오던 길에 메이슨은 아론과 애슐리를 봤다. 그들은 파파라치들 사이에 섞여서 이쪽을 기웃거리며 누군가를 찾다가 재빠르게 사라졌다. 그들이 찾는 사람이 노아라는 건 사실 명백했다.
다행히 오늘은 아니었지만, 요 며칠간처럼 노아가 자신을 데리러 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보디가드들과 카메라 수십 대가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핀치에 몰린 그들이 무슨 돌발행동을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런 곳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었으니까.
메이슨은 노아의 뽀얀 뺨을 쳐다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근데……, 요즘도 보디가드들 잘 데리고 다니세요?”
“? ―대체로는 그렇죠. 왜요? 또 누가 나를 해치려고 하나 보죠?”
노아는 며칠 전 메이슨이 호텔방에서 했던 변명을 들먹이며 되물었다. 메이슨은 ‘네, 바로 그렇습니다.’ 하는 말을 삼키며 무심한 얼굴로 감자를 잘랐다.
“요즘은 파파라치들이 독하니까요.”
“그야 그렇긴 하지만.”
노아는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듯 혀를 찼다. 메이슨은 “제게는 테러 위협 전화도 온다구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하고 물을 삼키며 말했다. 한가한 걱정처럼 지나가는 투로 말했지만 내심 정말로 걱정이 되기는 했다.
“…―내가 걱정돼요?”
와인을 삼킨 노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메이슨은 “그야…….” 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야?”
메이슨이 말끝을 흐리자 그가 되물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
걱정이 되냐니, 그걸 말이라고. 신체 건강하고, 사람 몇은 간단히 사라지게 할 만큼 돈도 권력도 많은 사람이었다. 어딜 봐도 걱정할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데……, 스스로가 생각해도 정말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이지만 놀랍게도 메이슨은 그가 걱정이 됐다. 호감을 가진 사이라면 으레 할 법할 수준의 걱정이 아니라, 가끔은 스스로의 평화와 안녕을 시궁창에 버려도 좋을 만큼의 걱정이었다.
이게 무슨 병신 같은 짓인가 싶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확실히 그랬다. 엘리베이터에서도, 촬영장 옆 슬럼가에서도, 호텔에서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메이슨은 멍청할 정도로 노아를 염려하고 있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성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메이슨은 “……전 정말 저 자신이 걱정 됩니다.” 중얼거리듯 말하며 물을 마셨다. 노아는 작게 웃으며 와인을 마셨다.
“왜요?”
뭐가 웃기나 싶어서 묻자 노아는 와인 잔을 살짝 흔들며 “그냥……,” 하고 말했다.
“뭐랄까, 당신이 내 걱정을 해주면 참 좋을 텐데, 싶어서요.”
“당신에게 제 걱정이 필요합니까?”
필요 이상의 걱정으로 스스로의 정신건강까지 의심하던 메이슨이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노아는 “아, 그럼요. 그럼요. 무척 필요하죠.” 하고 잔에 남은 와인을 마셨다.
“걱정을 한다는 건 애정이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걱정을 한다는 건 애정이 있다는 이야기. ―노아의 말에 메이슨은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뭐―…, 그런 것까지 바라는 건 좀 사치라고도 생각하지만.”
그냥 그러면 좋겠다고 한 거예요. ―중얼거리듯 말한 노아는 웃으며 와인 병을 들었다. 살짝 젖은 입술을 혀로 핥은 그가 빈 잔에 새 와인을 따랐다. 조르륵. 메이슨은 노아의 잔을 타고 흐르는 붉은 액체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좀 많이 드시는 것 같은데요.”
술이 약한 편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메이슨이 묻자 노아는 “응?” 하더니 거의 비어가는 병을 확인했다.
“아, 그러네요. 둘이 마신 줄 알았더니 혼자 거의 다 마셨네. 혼자 한 병은 좀 많은데. ――와인 안 마셔요?”
아니, 어제는 마시지 않았던가? 노아가 물었고 메이슨은 입을 다물었다. 노아는 “한잔 하지 그래요? 새벽 촬영이에요?” 하고 병을 흔들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술은 좀….”
메이슨은 좀 당황해 손을 저었다. 노아는 “좀?” 하고 메이슨이 흐려놓은 말 뒤를 재촉했고 메이슨은 말을 골랐다.
“그게, 와인 한 잔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제 마셔 보니까 안 되겠더라구요.”
“왜요?” 약간 당황한 메이슨의 표정에 노아는 장난기가 생겼는지 제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발정이 나서요?”
노아의 시선이 도르륵 테이블 끝을 향했다. 메이슨의 고간이 있는 자리였다. 노아가 메이슨의 다리 사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이 픽 웃었고 메이슨은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탁 내려놓았다.
“레이칼튼 씨.”
단호한 메이슨의 부름에 노아는 양손을 들어보였다. 불편한 건 알지만 농담인데 심각한 얼굴 할 필요 있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래, 한잔 할 생각이 들었어요?”
싱글거린 노아가 따라도 되냐는 듯이 들고 있는 병으로 메이슨의 잔을 톡톡 두드렸다. 메이슨은 입술을 깨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아가 조금 놀란 눈으로 쳐다봤지만 메이슨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저는 이만,”하고 말했다.
“둘 다 식사 다 한 것 같으니 저는 일어나 보겠습니다.”
단호한 메이슨의 말에 노아는 “식사야 다 했지만―…, 게다가 일어나 보겠다, 가 아니라 이미 일어났잖아요?” 하고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이게 어느 동네 예의냐는 듯한 노아의 핀잔에도 메이슨은 말했다.
“갑자기 피곤해서요. 좋은 밤 되세요.”
메이슨은 노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도망치듯 식당을 벗어났다.
놀란 얼굴로 메이슨이 나간 문을 쳐다본 노아는 눈을 깜빡깜빡 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식탁 위에는 먹다 만 듯한 메이슨의 접시와 와인이 남아 있었다.
“…―아아.”
노아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잔에 담긴 와인을 마시고 병에 남은 와인을 모두 따랐다. 찰랑찰랑, 제법 많은 양의 와인이 잔에 담겼고 그는 입맛을 다셨다.
“혼자 한 병은 좀 많다니까.”
중얼거린 노아는 피식 웃으며 남은 와인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