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다른 사람들이 어떤 건강상태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메이슨이 생각하기에 ‘메이슨 테일러의 신체’ 는 제법 건강한 축에 속했던 것 같다. 타고난 체력도 근력도 좋았고 운동을 하는 것도 좋아했다. 사실 건강이 나쁜 편이었다면 용병 일은 못했을 테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성욕은 평범한 편이었다. 신체 건강한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조금 강한 편이었던 것도 같았다. 여하간 여자가 있는 환경이 아니고 일은 힘들다 보니 때가 되면 손장난을 하거나 건너뛰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 반해 헤일리는…….
“얜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거냐고.”
와인을 권하는 노아의 말에 도망치듯 식당을 나온 메이슨은 씨근덕대며 묵직한 아랫도리를 쳐다봤다.
‘발정이 나서요?’
짓궂긴 했지만 어린애도 아니고, 벌떡 일어날 정도의 농담은 아니었는데 더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툭 잘라 뱉은 농담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어제 저녁. 메이슨은 노아의 뜻 모를 소리에 심란하기도 하고 오랫동안 안 마셨으니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며 테이블 위에 따라진 와인 잔을 들었다.
많이 마시지도 않았다. 딱 한 잔이었다. 약으로도 마신다는 와인 한 잔.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 메이슨은 점점 뜨거워지는 육체에 히이익, 숨을 삼키며 일어났다. 몸이 달아오르고 다리 사이는 불끈거리고 몸 안쪽이 근질거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몸뚱아리냐고 잔뜩 짜증을 내고 성급하게 손을 움직여 사정한 메이슨은 한 번 사정하고도 다시 바짝 서는 성기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약도 아니고 와인 한 잔 했을 뿐인데 비아그라 한 통을 삼킨 것처럼 허벅지가 땡겼다.
화장실에 앉아 자위 네 번을 하고 나자 팔도 아프고 거시기도 따갑고, 몸도 지쳤다.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 놀랍게도 몸은 여전히 근질근질하고 아랫배는 묵직하고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메이슨은 신경질을 내며 피트니스 룸으로 달려갔다.
한 시간만 뛰어도 녹초가 되는 몸으로 두 시간을 열심히 달리고서 기절하듯 잠자리에 든 메이슨은 아침에 일어나서 흠뻑 젖은 속옷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노아는 어느새 메이슨의 꿈, 단골손님이 되어 있었다.
메이슨이 생각하기에 체력이 안 좋고 건강이 불량하면 성욕도 따라서 초라해지는 게 당연했다. 운동으로 체력을 소진하고 나면 하루 정도는 자위를 하지 않고 지나가도 괜찮아야 했고, 조금 왕성하게 성욕이 발현 되는 날에는 한두 번 자위를 하고나면 달게 잠을 잘 수 있어야 했다. 사람은 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헤일리의 몸은 아니었다. 한 시간만 러닝머신을 뛰어도 녹초가 되는 거지같은 몸으로, 헤일리의 성욕은 굶주린 승냥이처럼 매일매일 날뛰었다.
그래도 평소에는 한 시간 미친년처럼 운동을 해서 녹초로 만들어 놓으면 엉덩이가 근질거려 못 잘 정도는 아니었는데, 와인 한 잔을 마시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와인만 그러는지 다른 술도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시험해 볼 사안이 아니었다. 몸이 이상해지는 그 괴상하고 야릇한 기분은 상당히 두려웠던 것이다.
고환과 애널 사이 피어싱과 찬장 가득한 포르노, 거대한 딜도가 예사롭지 않더라니. 알코올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고 나면 쉬는 날 맥주 캔 하나 들고 뒹굴거리는 게 소박한 소망이었는데, 어쩌면 영영 이룰 수 없는 꿈이 될 지도 몰랐다.
메이슨은 우울하고 쓸쓸한 걸음으로 피트니스 룸으로 향했고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붙잡았다.
“―? 햅슨 씨?”
등 뒤에 서 있는 것은 필이었다. 그는 약간 피곤한 얼굴로 메이슨에게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제 번호, 누군가에게 알려주셨습니까?”
“아.”
메이슨은 필의 손에서 휴대폰을 건네어 받으며 그에게 사과했다.
“아, 토니구나. ―죄송해요, 제 휴대폰에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하나 더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필은 중요한 통화 중이었다며 한숨을 쉬었고 메이슨은 “……그러려고 했는데.” 하고 필을 쳐다봤다. 촬영이 끝난 뒤에 사람들과 잡담은커녕 인사도 제대로 못하게 붙잡아 차에 타라고 눈을 부라렸던 것을 새까맣게 잊은 얼굴이었다. 피츠로이와의 통화도 사정사정해서 2,3분 했을 뿐이었는데 새 전화를 개통할 시간이 있었을 리가.
노아 레이칼튼이 왜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며 샌드위치 따위나 우물대나 했더니 이 남자 때문이었다. 10년 전에는 분명 수줍음이 많은 조용한 청년이었던 것 같은데 누가 이 남자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필은 여하튼 전화부터 받으라는 듯 손을 저었다.
?리스??
예상했던 대로 토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무슨 일이에요?”
메이슨이 묻자 토니가 ?그 남자 누구야? 왜 이렇게 무서워? 지가 선생이야 뭐야.?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아…―, 시간이 늦었으니까요. 무슨 일이에요?”
메이슨은 필에게서 몸을 돌리며 다시 물었다.
?이거 새 번호야. 적어놔. 그리고 네 휴대폰도 새로 하나 했어.?
완전 예쁘더라고. 너도 마음에 들 거야! 토니가 신이 나서 말했다. 메이슨은 제발 핫 핑크색 휴대폰만 아니길 빌며 물었다.
“그리고요?”
?아, 내일 다른 배우 스케줄 때문에 예정된 씬이 아니라 다른 데를 찍게 됐는데―…, 아. 연습할 필요가 있는 부분은 아니니까 그냥,?
“연습할 필요가 없다구요?”
그게 그러니까……, 토니는 갑자기 좀 횡설수설하더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아, 아참.? 하고 말했다.
?엊그제 가져다달라고 했던 것 말이야.?
가져다달라고 했던 것? 메이슨은 “사진 말이에요?” 하고 물었다. 이틀 전 갑작스럽게 노아의 집에 오게 되면서 토니에게 집에 있는 부인과 아내의 사진을 가져다달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응, 사진이랑 검은 가방? 그런 거 없던데??
“사진이 없어요? 침실, 침대맡에 있을 텐데,”
?아, 응. 침대맡이랑 아래도 뒤져봤는데 없더라구. 정말 거기 둔 거 맞아??
토니는 손님방인가 싶어서 손님방에 침대맡도 뒤져 보았다고 말했다. 메이슨은 눈을 깜빡이며 “없다구요?” 하고 다시 물었다.
?―리스??
“아니, 없을 리가――,”
파파라치들이 가져갔나? 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리 파파라치라도 보는 눈이 그렇게 많은데 함부로 남의 집에 그렇게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가방은 몰라도 사진은 대단한 물건이 아니었다.
“금고는요?”
?금고? 별 이상 없던데? 도둑이 들 거나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게 뭔데 그래? 정말 다른 데에 둔 건 아니야? ?
깜빡깜빡 잘하잖아, 너. 토니는 잘 생각해보라며 말했지만 메이슨은 “아뇨. 다른 데 둔 건 아니에요.”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그 아침만 해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왔던 것이다.
금고는 멀쩡한데 자신의 물건인 가방과 사진만 없다니. 메이슨은 “다시 잘 좀 찾아……,” 하고 돌아서다 말을 흐렸다.
“――햅슨 씨.”
약간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던 필은 메이슨의 부름에 한숨을 쉬었다.
“토니, 제가 나중에 전화 할게요.”
?응? 그래, 내일 늦지 말고……,? 메이슨은 토니의 말을 다 듣기 전에 휴대폰의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며 필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제 물건에 대해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아닙니까?”
필은 휴대폰을 받고 다시 한숨을 쉬더니 “예, 알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메이슨은 입을 다물고 남자를 쳐다봤다. 잠시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그는 “확실한 건 아니지만,” 하고 대신 변명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말했다.
“돌려드리지 않으려고 하셨던 건 아닐 겁니다.”
그저 챙겨준 것일 뿐, 이라는 말에 메이슨은 물건을 가져간 사람을 직감했다. 필은 요즘 적잖이 힘든 듯 또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제, 헬기로 당신을 촬영장에 데려다 준 뒤 레이칼튼 씨께서―…,”
* * *
‘레이칼튼 씨께서 잠깐 당신 댁에 들리시긴 했습니다. 뭘 가지고 나오시는 것 같기는 했는데……,’
메이슨은 필이 해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노아의 방문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들어갈까, 말까. 문을 두드릴까, 돌아설까.
물건을 가져간 것은 노아가 맞는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어떤 것들을 가지고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사진과 가방, 헤일리의 물건이 아닌 자신의 물건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노아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상황에 직면하자 상당히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니,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르지.”
물건이야, 뉴욕에서 한 번 그의 앞에서 엎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 고른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주의력에 문제가 없다면 그 화려한 집에서 자신의 물건을 골라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그럼 문제는 그걸 왜 가져갔냐는 건데―.
“…….”
메이슨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부터는 생각이 꽉 막혀서 바늘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등 뒤에서 누가 잡아채기라도 하듯 조금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헤일리의 몸으로 노아를 만날 때마다 ‘왜?’ 하는 의문들이 하나씩 늘어났지만 메이슨으로서는 늘 알 수가 없었다. 왜 노아가 뉴욕, 내 집 문 앞에 있지? 왜 나를 공격하지? 왜 내 생사를 묻지?…… 그저 시킬 일이 있는 것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늘어났지만 그 외에 다른 생각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메이슨은 이유를 모른 채 일을 하는 데에 익숙한 편이었다. 전쟁을 하든, 작전을 수행하든, 상부에서 이유를 알려주는 건 무척 드문 일이었다. 메이슨 본인도 자세한 사정을 알아봐야 머리만 아프다는 것을 알기에 이유를 묻는 법이라곤 없었다.
“…….”
그래서 메이슨은 노아의 방문 앞에 서서 망설였다. 지금 이 방문을 두드려 노아에게서 짐을 찾으려면 내내 모르는 척 해왔던 많은 의문들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 짐을 꼭 찾아야 할까. 메이슨은 시무룩하니 생각했다. 새 여권은 불편하겠지만 또 만들면 되고, 사실 이 외모로는 위조여권을 이용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재산도 아깝기는 하지만 돈이야 또 벌면 되고, 아내와 딸아이의 사진은…….
메이슨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두 사람이 죽은 지 벌써 십 년이었다. 두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고 슬퍼했던 것도 어차피 아프간에 가고 딱 한 달 동안이었다. 몸은 미친 듯이 힘들고 사람은 수도 없이 죽어나갔다. 죽은 아내와 딸아이보다 더 잔인하게 살해당한 일가족을 매일같이 보고 지내니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메이슨의 사과였다. 잊어서 미안하다고, 살아남는 데 바빠 너무 빨리 모르는 척했다고, 두 사람을 잊는 것이 무서워 매일같이 쳐다보며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십 년이었다. 심지어 그 사이 자신은 한 번 죽기도 했었다. 더 이상 아무도 자신을 메이슨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렇게 연이 끊어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그건 아니지.”
메이슨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버려두는 건 또 기분이 내키질 않았다. 자기 손으로 당당하게 버린다면 몰라도 이건 빼앗기는 것 같지 않은가.
아니, 하지만 빼앗기면 안 될 이유는 또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메이슨은 중얼중얼 노아의 문 앞에서 한참을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하다가 지쳐 고개를 들었다.
“―….”
아, 몰라. 죽기야 하겠냐. 차라리 죽이려고 들면 명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일 수 있으니 속은 편할 지도 몰랐다. 아니, 편할까? 몰라. 정말 모르겠다. 메이슨은 복잡한 생각을 갈무리하며 일단 문을 두드렸다.
―똑똑.
“―….”
문을 두드린 메이슨은 안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자나? 벌써? 아니 시간은 확실히 좀 늦기는 했다. 저녁을 먹은 시간이 애초에 11시가 넘었을 때니 이미 자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긴 했는데…….
―똑똑.
메이슨은 다시 문을 두드렸다. 혹시 방에 없나? 메이슨은 조금 더 기다리다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똑똑. 이번에는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안에서 작은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
메이슨은 살짝 고민하다가 조심히 문고리를 돌렸다. 방 안은 무척 어두웠고 침대엔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이불 위로 살짝 흘러나온 머리카락이 밝은 빛을 띠고 있었다. 노아의 머리카락 같았다.
“―….”
자고 있나? 메이슨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봤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CCTV는 돌아가고 있었지만 노아를 죽이려는 것은 아니니 상관없었다.
메이슨은 조심스럽게 노아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메이슨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필에게도 딱히 설명하지 않은 거라면 메이슨의 가방은 방 안 어딘가에 던져두었을 가능성도 상당했다. 사진과 돈 몇 푼, 노아 본인에게는 별로 귀한 물건도 아닐 테니…….
메이슨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둥글게 몸을 말아 자고 있는 노아의 머리털을 힐끗 쳐다보고 조심스럽게 그 옆을 지났다.
“…―,”
침대 오른쪽으로 테이블 옆, 의자 아래 새까만 덩어리가 보였다. 메이슨은 그게 자신의 가방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메이슨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가방을 들었다. 그리곤 힐끗, 노아로 추정되는 이불 덩어리를 쳐다봤다.
노아는 여전히 곤히 잠든 듯했고 메이슨은 가방 안을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살짝 가방을 열자 안에서 건드리지도 않은 듯한 사진과 여권, 돈뭉치들이 보였다.
필의 말대로 그냥 주려고 했던 건 맞는 것 같은데……. 메이슨은 짧게 혀를 차며 가방을 어깨에 메고 돌아섰다. 어쨌거나 저쪽도 남의 물건에 손을 댄 것이니 가방이 없어졌다고 해서 특별히 따지거나 하지는 않을 터였다.
문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며 머리를 박을까 말까 도망칠까 말까 고민했던 것에 비해 일은 너무나 쉽게 마무리 되었다. 메이슨은 이제 다시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가 문을 닫고 일에 대해 모르는 척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흐,”
작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노아의 침대 옆을 지나던 메이슨은 이불더미 사이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인식하지 않았을 때는 몰랐는데 소리를 캐치하고 나자 작은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고 있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메이슨은 설마 노아가 깨어 있는 건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 …,”
깨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등 뒤를 돌아보자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차가운 눈 같은 것은 없었다. 대신 뭔가 미묘하게…….
“……설마…….”
입안으로 중얼거린 메이슨은 조심스럽게 노아 쪽으로 다가갔다. 캐노피를 들추자 이불 속에서 흘러나온 노아의 머리카락이 좀 더 자세히 보였다. 메이슨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만졌다.
설마 했던 대로 이불 밑 금색 머리카락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
작은 소리도 조금 더 명확하게 들렸다. 흐느낌이 섞인 괴로운 숨소리였다. 이불 속 그의 몸이 잘게 떨고 있었다.
메이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는 척 그냥 지나갈까. 어차피 노아가 이러는 건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상관할 바도 아니었고 게다가 지금은 방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몰래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다.
“―…,”
그러나 모르는 척 지나쳐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손은 이미 노아가 뒤집어쓰고 있는 이불을 조심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웅크린 팔 사이로 노아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얼굴은 지독하리만큼 창백했다. 눈가에선 눈물이 후둑후둑 떨어지고 있었고 예쁜 입술은 앙다물려 가쁜 숨을 토하고 있었다.
살려줘, 구해줘, 도와줘, 노아가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 웅얼거리는 것처럼 끊임없이 살려줘, 살려줘, 공포 속에서 빌었다.
10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고 아름다운 평소 모습 탓인지 노아는 10년 전보다 더 작은 것처럼 느껴졌다.
나 진짜 무슨 병인가. 왜 그냥 지나치질 못하지. 메이슨은 낮게 혀를 차며 손을 뻗었다.
노아의 축축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겼다. 따끈해진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골라 넘겨주자 가엽고 아름다운 노아의 옆얼굴이 드러났다.
……예쁘긴 예쁘네…….
메이슨은 침대맡에 자리 잡고 앉아 노아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위로라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있는 게 아닐까. 메이슨은 반쯤은 그렇다고 생각하며 노아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계속해 만지작거렸다.
“돈도 많고 똑똑하고 예쁘고……, 잘 살면 좋을 텐데.”
어쩜 저렇게 세상 무섭고 독한 건 하나도 모르고 살까, 남들이 그렇게 질투할 만큼 잘 먹고 잘 살면 좋을 텐데. 메이슨은 머리카락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단 한 번 운이 나빴을 뿐이었다. 어차피 해리성 기억상실증으로 자세한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다 벌써 20년 전 일이었다. 왜 아직도 이렇게 괴로워하는 걸까.
악몽을 꾸고 있는 노아는 아직도 가방에 갇힌 일곱 살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메이슨은 그가 안쓰럽고 가여워 입안이 쓴 것을 느꼈다.
“……별것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쁜 일들은 다 지나갔고 이제 무서울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메이슨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가 듣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혼자 울지 말라고, 메이슨이 중얼거리려는데 눈물에 젖은 노아의 입술이 달싹였다.
“…―,”
메이슨은 눈물이 후둑 떨어지는 그의 눈가를 쳐다봤다.
“……마요,”
가지 마요. 나 두고 가지 마요, 노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메이슨은 마른 침을 삼켰다.
‘가지 마요…….’
필사적이던 또 다른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신이 여행 가방 안에서 아이를 갓 꺼내 구급차를 부르러 가려고 했을 때 붙잡던 아이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무서울 정도로 뜨겁게 열이 올라서 매달리던 작은 손.
“…….”
메이슨은 어느새 노아의 큰 손이 자신의 옷자락을 쥐고 있는 것을 쳐다봤다. 어린 아이였을 때처럼 간절히, 필사적으로.
메이슨은 그때처럼 노아를 껴안아주는 대신 이마를 짚었다. 어느새 자신의 이마에도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곤란하다니까. 메이슨은 자신의 옷자락을 쥐고 있는 노아의 손을 보며 생각했다. 곤란하고 위험했다. 차라리 강하게 쥐고 후려치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텐데 이렇게 덜덜 떨면서 쥐어온 손은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대로 주저앉아 어깨를 안아주고 싶었다.
“…….”
메이슨은 노아와 다시 만나지 않는 게 나았을 지도 모르겠다고, 쓴 입맛을 다시며 생각했다. 어딘가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거라고 혼자 가끔 생각하던 것이 나았다. 물론 노아는 지금도 가끔 이렇게 악몽을 꾸는 것 외에는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듯했지만, 그래도 이런 모습을 보고나면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메이슨은 노아의 손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자신이 노아를 두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구급차를 불렀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를 구해주었던 것처럼, 노아는 괜찮을 터였다. 나 아니면 안 된다든가, 내가 구해주고 싶다든가, 그런 생각들이 메이슨의 머릿속을 귀찮고 번잡스럽게 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메이슨은 자신을 붙잡고 떨고 있는 노아의 손을 떼어냈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손은 아주 쉽게 떨어져 시트 위로 떨어졌고 메이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직접 떼어내고서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노아와 관련된 일이라면 쉽게 병신이 되곤 하는 스스로를 향해 걱정과 염려를 보낸 메이슨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요, …―슨,”
빨리 나가버리자, 도망치듯 생각한 메이슨은 등 뒤에서 들린 작은 애원에 흠칫 놀라 그를 쳐다봤다.
……지금 그가 메이슨이라고 날 부른 건가? ―메이슨은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노아가 숨을 헐떡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슬프고 분하고 괴로운 것처럼 우는 그의 얼굴을 쳐다본 메이슨은 입맛을 다시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환청을 들었나. 메이슨은 자신이 정말 슬슬 맛이 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며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을 주워들었다.
“―…이슨, 메…,”
돌아섰던 메이슨은 다시 노아를 쳐다봤다. 이번엔 확실히 환청이 아니었다. 지금 설마 정말로 내 이름을 불렀나? 메이슨은 입술을 달싹이며 숨을 삼켰고, 그때였다.
메이슨은 숨을 삼킨 채로 멈추었다. 잠들어 있던 노아가 눈을 뜬 것이었다. 노아가 눈을 깜빡였다. 놀란 듯 크게 떠진 녹색 눈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후두둑 시트 위로 떨어졌다.
“노, ……레이칼튼 씨.”
이것 좀 놔주실래요. 메이슨은 단단히 잡힌 손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조금 전 메이슨이 떼어냈던 노아의 왼손이 메이슨의 오른손목을 단단히, 아프게 쥐고 있었다.
깜빡. 노아가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였다. 축축이 젖은 긴 속눈썹이 움직이는 것이 드라마틱해 보였다.
“……어디 가요…?”
“예? 어디 가냐니……,”
왜 여기에 있냐도 아니고, 뭐하고 있냐도 아니고 어디 가냐니. 메이슨은 이게 무슨 물음인가 싶어서 “제 방에……,” 하고 대답했고, 그리고 팔에 강한 통증과 함께 세상이 빙글 돌았다.
“――!”
메이슨은 신음을 삼키며 몸을 움츠렸다. 순식간에 등에 시트가 닿아 있었다. 노아가 서 있던 메이슨을 잡아당기듯 침대 위로 내던진 것이었다. 메이슨은 숨이 턱 막히는 충격에 “이게 무슨,” 하고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다.
“――,”
노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히끅, 숨을 삼킨 메이슨은 고개를 돌려 노아가 양팔로 자신을 가둔 것을 확인했다.
“저, 레이칼튼 씨―…,”
자세가 굉장히 묘하고, 그리고 무서운데요……. 메이슨은 더듬거렸고 노아가 “왜……,” 하고 느릿하게 물었다.
“왜 당신이 여기에 있어요.”
“아, 그게 말이죠.”
메이슨은 눈을 굴리며 “여기가 제 방인 줄 알고 들어왔다가 보니까,” 하고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아하.”
시선을 돌리던 노아가 바닥에 떨어진 검은 가방을 보고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했다.
“가방을 가지러 온 거군요.”
노아는 생각보다 나긋하게 말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하는 듯이.
“곧 돌려주려고 했어요. 어제는 깜빡했고 오늘도……, 낮에 생각나서 저녁 식사 뒤에 줘야지 했는데 또 깜빡 했거든요.”
가지려고 한 건 아니에요. 조용한 노아의 말에 메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가 탐낼만한 물건도 없었다. 요트도 귀찮아죽겠다는 남자에게 돈뭉치 몇 다발과 위조여권, 죽은 사람의 사진 따위가 귀할 이유는 없었다.
“별로 오해한 건 아닙니다. 그러실 분도 아니고…….”
메이슨은 적당히 웃으며 일어나려고 했다. 노아가 자연스럽게 비켜주고 나면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 뒤 방을 나가야지 생각했다.
“……팔 좀 치워 주실래요?”
메이슨의 말에 노아는 힐끗, 자신의 팔을 보며 “팔이요?” 하고 되물었다.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다는 노아의 말투에 메이슨은 ‘뭔가 약간 이상한데, 얘가 왜 이렇게 지진아처럼 굴지……?’ 하고 생각했지만 다시 친절히 말했다.
“예. 일어나려는데 팔이 가로막고 있어서.”
노아는 메이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다시 팔을 보았다. 아아. 그는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왜 이러지. 잠이 덜 깼나? 메이슨은 그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고 내내 무표정하던 노아도 조금 웃었다.
“그럼 이제, 이것 좀,”
메이슨이 노아의 팔을 치우기 위해 그의 어깨를 잡았고 노아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기 싫은데요.”
“……예?”
메이슨은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물었다. 노아는 팔을 뻗어 메이슨의 머리칼을 쥐어 살짝 당겼다.
“읏,”
메이슨은 그의 손이 당기는 대로 몸을 일으켰고 노아가 메이슨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가긴 어딜 가요.”
그의 무릎이 메이슨의 다리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힛, 메이슨은 쭈뼛,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얼어붙은 얼굴로 노아를 쳐다봤다. 그는 참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이렇게 아랫도리를 천박하게 적시고서, 말이죠.”
* * *
노아는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다. 술을 얼마나 마시든 취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문제는 일정량 이상의 술, 이를테면 와인 한 병 이상을 마시면 잠잠하던 정신병이 도진다는 것이었다.
열여섯에서 열여덟 살 사이, 가장 정신이 불안정하던 시기로 돌아간 것처럼 자려고 누우면 꼭 어릴 적의 꿈을 꾸었다. 물론 어린 시절 납치당했을 무렵의 꿈이야 평소에도 종종 꾸는 것이었지만 알코올이 들어가면 그 꿈은 굉장히 리얼해지고 디테일해진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생생한 그 꿈에 노아는 견딜 재간이 없었다. 그 여자가 했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선명하게 떠올랐고 좁은 가방 안에서 올라오던 열기와 퀴퀴한 냄새까지 그대로였다.
어릴 때와는 달리 노아가 이 꿈에서 가장 싫어하는 부분은 메이슨에게 구출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에게 구출되는 순간은 달콤했다. 메이슨은 더 없이 다정했고 상냥했다. 무표정하던 눈은 자신을 살피며 따뜻하고 안쓰러운 빛으로 변했다. 구질구질하고 냄새나는 자신을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옷을 벗어 감싸주었다. 팔을 뻗으면 껴안고서 ‘이제 괜찮아.’ 하고 속삭여주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안도감과 충족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달콤하고 행복한 순간을 노아가 싫어하는 이유는 그 다음 순간 탓이었다.
‘나 두고 가지 마요.’
노아는 애원하듯 말했다. 메이슨은 갈등하는 얼굴을 하다가 자신을 꼭 껴안아주었다. 그 품은 안락하고 다정했지만 노아는 알고 있었다. 메이슨이 곧 자신을 두고 간다는 것을. 눈을 감으면 메이슨이 떠나는 것이 느껴졌다.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은데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메이슨이 떠나는 건 끔찍했다. 꿈의 다른 부분들과는 달리 메이슨이 떠나는 것만은 끝난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른 것들은 다 과거라고,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메이슨에게 버림받는 것은 늘 현재진행형이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은 노아를 꿈에서 건져냈다. 눈을 뜨자 바로 앞에 메이슨이 있었고 노아는 자신이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발밑에 떨어진 가방과 일어나고 싶어 죽겠다는 그의 표정만 아니었어도 내내 꿈이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저, 이건 생리적인……,”
그렇게 누르니까 말이죠, 그는 좀 당황해 말했다. 노아는 그의 귓가 머리카락을 야하게 쓸어 넘겨주었다.
“그 전부터 이랬던 것 같은데요.”
노아는 속삭이듯 “보세요.” 하고 말했다.
“……내가 좆 좀 눌러줬다고 이렇게 됐다고요?”
노아가 옷 위로 메이슨의 성기를 쥐며 말했다. 이미 단단해져 물기까지 느껴지는 성기의 모양에 메이슨은 귀를 빨갛게 물들였다. 노아는 따끈해진 메이슨의 귓불을 문지르며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객관적으로 보면 전혀 닮지 않은 얼굴일 텐데……, 노아는 그 앞에서 자신이 더 이상 객관적일 수 없다는 걸 느꼈다. 검은 머리칼에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는 헤일리는 이제 완전히 메이슨처럼 보였다.
정작 메이슨은 한 번도 저런 표정을 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었다.
노아는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어깨를 밀어붙이며 그의 바지를 거칠게 벗겼다.
“그만둬요, 레이칼튼 씨!”
메이슨은 숨을 헐떡이며 노아의 팔을 붙잡았다. 멈칫한 노아는 낮게 숨을 쉬며 웃었다.
“왜요? 이렇게 발정 난 몸으로 나가서, 그리고 어쩌려고요? 당신 침실에 있던 그 흉측한 딜도도 없는데.”
“――그건,”
세상에. 그런 걸 박아 넣고 놀다니. ―감탄인지 빈정거림인지 모를 노아의 말에 메이슨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헤일리의 그 기함할 컬렉션과 그야말로 흉측하던 딜도가 떠올랐다. 없애려다 사내의 의리로 남겨놓았던 것을 후회해 봤지만 이미 늦었다.
메이슨이 당황한 사이 노아의 입술이 더럭, 목덜미를 깨물었다. 엊그제 잇자국을 냈던 그 자리였다. 보드라운 입술과 따뜻한 숨이 닿아 메이슨은 어깨를 움츠렸고 노아가 속삭였다.
“나가서 다른 남자를 붙잡게요?”
노아는 바르작거리는 메이슨이 번거로운 듯 메이슨의 티를 잡아 벗기며 능숙하게 손목에 감았다.
“나로는 부족할지 아닐지 일단 해보는 게 낫지 않나요?”
“아니, 저는,”
해보는 게 나은지 안 나은지 결정할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 달아오른 몸에 당황한 메이슨의 입술을 노아가 깨물듯이 핥았다.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올려 앞니로 살짝 물었다. 노아의 재촉에 입술이 벌어졌다. 아니,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눈앞이 흐려지고 허벅지가 떨렸다. 망할, 헤일리의 몸. 메이슨은 원망하며 그의 혀를 받았다. 노아의 키스가 점점 더 진하고 진득하게 변했다.
노아는 메이슨의 뒷머리를 움켜쥐어 당겼다. 더 벌어진 입술에 노아의 혀가 야하게 흘러들었다. 혀를 감고 입천장을 쓸며 입술을 빨았다. 그의 입술이 메이슨의 입술 주변을 핥듯이 빨았고 그의 낮은 숨소리가 야하게 뺨에 닿았다.
“흐, ―,”
메이슨은 허리를 쓸어내리는 손에 참지 못하고 신음을 뱉었다. 노아의 입술이 헐떡대는 메이슨의 귓가를 핥으며 귀 아래쪽 뺨을 물었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쾌감에 메이슨은 도망치려고 몸을 떨었고 노아가 그의 허리를 잡고 더 강하게 목덜미를 핥았다.
“이것 좀 보라고요.”
이러고 나간다구요? 노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거칠어진 그의 숨이 목덜미를 간질였고 그의 손이 부풀어 오른 가슴을 움켜쥐었다.
“씨발, 젖꼭지를 이렇게 세우고―…,”
“힉, 하지,”
메이슨은 통증과 함께 느껴지는 뜨거운 감각에 허리를 뺐다. 노아의 손톱이 젖꼭지와 가슴을 아플만큼 할퀴었다. 목덜미를 핥은 입술이 가슴을 깨물었고, 가슴을 할퀴었던 손은 배꼽 아래를 더듬었다.
“노아, 제발―…,”
메이슨은 미칠 것 같은 쾌감 속에서 이성을 찾으려 애썼다. 노아는 반쯤 벗겨낸 메이슨의 바지 사이, 이미 축축하게 젖은 성기를 쥐었다.
“――,”
노아는 메이슨의 성기를 문질렀다.
싸요, 그가 심장께에 대고 음탕하게 속삭였고 메이슨은 어찔함에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곧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사정했다. 힉, 메이슨이 어깨를 굳히며 참았던 정액을 줄줄 쏟아내자 노아는 가슴을 깨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정말 꼴사납네요.”
메이슨은 수치심에 이를 깨물었다. 노아는 달아오른 눈으로 제 입술을 핥았다.
“하하―…, 씨발, 아래가, 예? 여기 아래가 벌름거리고 있잖아요. 빨리 넣어달라고.”
아직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노아는 못 참겠다는 듯이 메이슨의 허벅지를 길게 빨았다.
“하지, 하지 마요. 나는,”
메이슨은 헐떡거리며 겨우 말했다. 온몸이 땀으로 젖을 만큼 달아올라 사정까지 한 마당에 거부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그는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노아를 두고 10년 전, 20년 전을 떠올리며 그를 안쓰러워하던 이런 타이밍에는 아니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이상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이성을 붙들고 있었다.
“노아, 흣,”
노아는 메이슨의 말을 듣지 않았다. 메이슨이 허벅지 께에 잔뜩 싸 놓은 정액을 손으로 문지르며 엉덩이를 쥐었다. 그리곤 그의 말대로 벌름거리고 있는 애널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메이슨이 펄쩍 뛰자 노아는 다른 손으로 다이아 피어싱을 잡았다.
“다리 벌려요.”
숨을 몰아쉰 노아는 마치 다리를 벌리지 않으면 피어싱을 쥐어뜯을 것처럼 말했다. 메이슨은 “노아…, 레이칼튼 씨,” 하고 그를 불렀다.
“저는 이러려던 게,”
메이슨은 필사적으로 말했지만 노아가 그의 말을 끊으며 피어싱을 잡아당겼다. 힛, 살점이 뜯겨져 나갈 것 같은 공포와 통각에 메이슨이 그의 팔을 붙들었고 노아가 말했다.
“벌려요, 메이슨.”
다리 벌려요, 메이슨. ―그의 손을 밀어내려던 메이슨은 그대로 멈췄다.
“…―,”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메이슨은 고개를 들어 노아를 쳐다보았다. 그의 예쁜 눈가가 열로 야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금,”
지금 뭐라고……, 메이슨은 더듬거렸고 노아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힘 빠진 메이슨의 허벅지를 벌려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젖은 손가락은 음탕하고 저속하게 안을 문질렀다. 메이슨은 혼란스러운 머리로 신음을 삼켰다. 몸은 달아오르고 머리는 식어버리고, 완전히 미칠 것 같았다. 곧 노아가 질퍽하게 젖은 손가락을 빼냈고 메이슨은 완전히 탈력해 숨을 몰아쉬었다.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선뜩한 감각에 발기해 있던 성기에서 질질 정액이 흘렀다.
아, 씨발. 메이슨은 이를 갈았다. 헤일리의 몸으로 살게 되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이는 것에 화가 난 적은 없었다. 무슨 말이냐고, 왜 나를 메이슨이라고 불렀냐고 따져 묻고 싶은데도 몸이 발정 나 헐떡대고 있었다. 온몸에 털이 곤두서 열이 오르고 근질댔다. 그의 말대로 젖꼭지가 서고 엉덩이께가 벌름거렸다. 몸이 녹진하게 늘어져 손끝에도 힘이 빠졌다.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도 배 아래쪽으로 피가 몰려 계속해 만져지고 싶었다.
어느새 버클을 푸르고 성기를 꺼낸 노아가 열에 흐려진 눈으로 다가와 키스했다.
“하지, 말라고 했,”
입술을 두드리는 키스는 의도가 분명했다. 달래듯 입술을 빨고 손으로는 허벅지를 쓸어내리며 제 허리에 감도록 들었다. 노아의 성기가 젖은 아래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식은땀이 목 뒤로 흘러내렸다. 이건 정말 아니었다. 절박함에 눈앞이 새까맣게 흐려졌고, 그때.
“――,”
투둑, 입술로 짭짤한 피 맛이 느껴졌다. 노아가 조금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메이슨은 헐떡대며 그를 노려봤다. 노아는 찢어져 피가 흐르는 입술을 손으로 더듬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싫어요?”
이럴 만큼? 노아는 자신의 입술을 물어뜯은 메이슨을 향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제가 병이 있어서 몸이 좀, 보시다시피 그렇기는 한데―…, 전 분명히 계속 말한 것 같은데요.”
하지 말라고. 메이슨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눈앞이 열로 흐려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약이라도 먹은 것 같은 꼴로 헐떡대면서 이렇게 말하는 게 설득력이 없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놔 주세요.”
메이슨은 아직도 자신의 허벅지를 붙들고 있는 노아를 향해 말했다. 다시 그가 몸을 더듬는다면 자지러지느라 아무 말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메이슨은 이 자리를 당장에라도 벗어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당장 벗어나 재활원을 가든 치료를 받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애널 앞에 박힌 다이아 피어싱도, 창피해서 자살하고 싶은 기분이 들더라도 피어싱 가게나 병원에 가서 빼달라고 하고.
“정말 가방을 가지러 들어왔다고요.”
노아는 손등으로 피가 흐른 입술과 턱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메이슨은 “이러려고 들어온 건 확실히 아닙니다.” 하고 몸을 물렸다. 노아는 달아오르던 게 식었는지 나른해진 얼굴로 메이슨을 놓아주었다.
메이슨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웅크리며 손에 꼬인 옷자락을 풀었다. 아직도 꺼덕하게 선 자신의 성기를 한심스레 흘기며 발목까지 내려간 속옷을 끌어올린 메이슨은 고개를 들었다. 노아가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듯 서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 그리고…, 전 메이슨이 아닙니다. 침대에서 다른 남자 이름을 부르는 건 강간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아, 그래요.”
노아는 듣기 싫다는 듯이 메이슨의 말을 끊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린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메이슨의 가방을 주워들었다.
“어제도 당신이 헤일리 러스크가 아니면 누구겠냐고 그랬었죠.”
“……그 가방은 그저……, 나중에 메이슨에게 돌려줘야 해서.”
메이슨은 의무처럼 변명했다. 노아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예, 제가 메이슨입니다.’ 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속을 갈라보지 않는 이상에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속을 가른다고 해도 메이슨이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오늘 일 전에 네가 메이슨이냐고 물었다면……, 그때도 대답해 주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더더욱 자신을 밝힐 수 없었다. 이런 몸으로 자신이 누군지 밝혀야 한다니, 벌칙게임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메이슨에게 노아는 지켜주고 싶은 상대였고 그 앞에서는 꼴사나워지고 싶지 않았다. 노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기억하든지간에 메이슨 본인 자존심에 그랬다.
“그래요. 확실히 당신이 내게 한 번만 자자고, 자기가 환장하게 잘하니 좆 한 번만 빌려달라고 했던 그 헤일리 러스크가 맞는 것 같네요.”
노아는 빈정대며 차게 웃었다. 피 맺힌 입술을 야하게 쓸어내리는 동작에 시선을 돌린 메이슨은 “……그건, 말했듯이 기억상실증이라……. 지금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반복해 말했다.
“섹스를 거절했다고 다른 사람이라니, 상상력이 풍부해도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절 놀리는 거라면…―,”
“그만해요. 지겨우니까.”
“그만 할 건 당신,”
노아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그만하라고 하잖아.” 하며 메이슨의 머리칼을 쥐어 당겼다. 노아의 얼굴이 가까워졌고 메이슨은 숨을 삼켰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이 메이슨이잖아요.”
노아는 으르렁거리듯 낮게 말했고 메이슨은 바로 대답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메이슨은 미친 사람을 쳐다보듯 그를 보며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잘 보세요. 저는 메이슨이 아닙니다.”
아무리 미쳐도 이렇게 보고 있으면 알 수 있겠죠. ―메이슨은 노아의 녹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말했다.
눈동자가 먼저 흔들린 것은 노아였다. 노아의 얼굴이 처음으로 천천히 일그러졌다.
“―…,”
한 번 더 단호하게 부정하려 했던 메이슨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당신이 그렇게 말할 걸 알고 있었어요.”
노아는 웃으려는지 고개를 기울였지만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된 채로 말했다.
“알고 있다고요. 내가 뭐라고 당신이 내게 그런 걸 밝혀주겠어요. 알고 있으니까, 굳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저는 그런 게, 메이슨은 금세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노아의 표정에 당황해 말을 삼켰고 노아는 머리칼을 쥐고 있던 손을 놓으며 말했다.
“당신이 스스로 메이슨이라고 내게 말해주길 바란 적 없어요. 그런 특별한 대접, 꿈 꿔 본 적도 없으니까.”
노아는 메이슨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몸을 숙였다. 그의 숨이 목덜미 가까이, 뺨에 닿았다.
“당신이 누구인척하고 살든 내 옆에만 있어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목소리에 애원의 기색이 서려 있었다.
“―…그래, 내 곁에 남아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노아는 참는 것처럼 말했다. 그의 모습이 묘하게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애처럼 무기력하고 작았다.
“그렇게 가고 싶으면 다른 곳에 가서 살아도 좋아요.”
“…―,”
“정말 싫지만, ……그래도 좋아요. 당신은 원래 내 말 같은 거 듣는 사람도 아니니까……, 씨발, 엿 같은 전쟁터로 나가고 싶다면…―, 내가 붙잡을 수 없겠죠, 결국은.”
말을 쏟아내며 씁쓸한 듯 웃는 노아의 눈에서 언제부터인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메이슨은 뺨으로, 무릎으로 떨어지는 노아의 눈물에 숨을 삼키며 그대로 굳어 있었다.
“…….”
노아는 메이슨의 뺨에 떨어진 자신의 눈물을 보며 ‘아, 내 머리가 한계구나.’ 하고 생각했다. 자신이 이러는 게 술 때문일까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저 어릴 때부터 조금씩 삭던 머리가 이제 정말로 한계점에 닿아 있었다.
노아 자신도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사람의 영혼이 다른 사람과 바뀐다니, 이건 영화도 드라마도 아니고 현실이었다. 현실에서는 그런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노아도 몇 번이나 생각했다. 자신이 미쳐서 메이슨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엄한 사람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마음에도 내내 그런 불안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메이슨 같았고, 점점 메이슨처럼 보였다. ……노아는 그가 메이슨이기를 바랐다.
그가 메이슨이 아닐 수도 있다고, 메이슨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기 때문에 노아는 그가 메이슨이라고 믿었다.
어차피 그가 메이슨이라고 해도 자신의 곁에 남아주거나, 자신을 특별하게 여겨줄 리도 없는데. 그저 한두 번 자신을 구해주고 위로해 주었을 뿐, 다시 이 지옥 속에서 자신을 꺼내어 줄 리도 없는데.
노아는 그래도, 그가 죽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욕심 부렸다는 거 알아요.”
그를 자신의 옆에 데려다놓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했다. 그가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게 제대로 옭아매고 있다고, 다 잘 되어가고 있다고 여겼다. 그가 자신을 아껴주거나 사랑해주지 않더라도 곁에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내 곁에 있기 싫으면 떠나도 좋아요. 이대로 평생, 다시는 못 만난다고 해도 견딜게요.”
노아가 간과한 부분은, 그와 상대가 같은 선에 서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니라고 하지 마요.”
그가 메이슨이 아닐 수도 있다, 짧은 생각이 스쳐가는 것만으로도 노아는 이미 한계였다. 갉작대던 정신은 이미 끝장난 지 오래였다.
“제발, 당신이 세상에 없다고는 하지 마요.”
그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노아는 그의 파란 눈동자에 뜬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쓰게 웃었다. 웃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불쌍하게 여겨주기를, 조금이라도 동정하기를 노아는 간절히 빌었다. 그의 앞에 매달리듯 꿇고 앉아 속삭이는 것처럼 애원했다.
“아니어도 맞다고 해요.”
낮게 한숨을 내쉰 노아는 솜털이 곤두선 메이슨의 뺨을 쥐고 말했다. 제발 당신이 메이슨이라고 해요.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내 머리를 쏴버릴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