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ill the lights-21화 (21/29)

21

그들이 메이슨과 노아를 데리고 온 곳은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폐쇄된 창고였다. 그들은 사무실로 썼던 것 같은 작은 방으로 두 사람을 데려가 손과 발을 테이프로 단단히 묶었다.

메이슨은 힐끗, 어둑한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 한 구석에 의자 두어 개와 작은 텔레비전, 침낭과 빵 부스러기 등이 흩어져 있었다. 퀴퀴하고 절망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방 한 켠에서 메이슨은 시선을 멈추었다.

“…….”

왜 헬기나 전용기가 아니라 차를 요구해 이런 곳으로 돌아왔나 했더니 저걸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지.

방 한 구석에 알타의 금고가 있었다.

메이슨은 낮게 혀를 찼다. 하긴. 저것 때문에 모든 일이 시작되었는데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차라리 저것을 포기하고 노아의 부모에게 금품을 요구해 제삼세계로 떠나는 것이 가장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 텐데. ……아니, 사실은 살아남을 확률은 어차피 제로에 가깝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제일 나았다.

Zii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노아 레이칼튼을 인질로 잡다니, 목숨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보다 못한 짓이었다. 그 수밖에 없었겠지만 최악의 수였다.

그들도 그 생각을 하고 있는지 두 사람 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과한 욕심이 모든 것을 망쳤다는 것을 그들도 이제는 알 터였다. 메이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내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노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노아의 창백한 얼굴에 메이슨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잘생기고 멀끔한 이마에 난 찢어진 상처에 울컥 쓴 물이 올라올 만큼 분하고 짜증이 일었다. 가만히 있지 왜 쓸데없는 소리는 해서―…. 아니, 애초에 저 위험한 놈들을 혈혈단신으로 만나러 간 것부터가 문제였다. 저가 뭐라고 보디가드들도 없이 혼자 이런 놈들을 만나냔 말이었다.

“대체―…,”

메이슨은 묶인 손을 들어 피와 땀으로 흠뻑 젖은 노아의 이마를 더듬었다. 도대체 이게 뭐냐고. 그와 키스하며 보았던 도자기처럼 매끈한 이마가 피 얼룩으로 엉망이었다. 메이슨이 화가 난 얼굴로 상처 근처를 살피자 노아가 살짝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이 꼴을 하고? 메이슨이 낮게 묻자 노아는 눈을 휘어 더 진하게 웃었다. 그는 참 달큼하다는 듯이 말했다.

“좋아서요.”

“……좋다고요?”

메이슨이 기가 막혀 되묻자 노아는 “아, 지금 죽어도 좋을 만큼요.” 하고 재차 말했다.

“…….”

잠시 그를 쳐다본 메이슨은 손등으로 노아의 이마를 짚었다. 혹시나 했는데 확실히 열이 있었다.

“저기요! 약 없습니까? 해열제랑 소독약이나……,”

메이슨이 돌아보며 말하자 애슐리가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메이슨은 사근거리는 노아를 숨기며 “열이 있는데……,” 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상황이 우스운가본데, 우린―!”

아, 씨발! 그녀가 총을 든 손으로 벽을 내리쳤고 파스슥, 표면이 약간 부서지며 모래가 흘렀다. 메이슨은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그녀는 한참을 씩씩대다가 다리가 어긋나 삐꺽대는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녀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 눈물이 나는지 손으로 눈가를 감싸며 다시 한 번 ‘아우, 씨발.’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밖을 돌아보고 돌아온 아론은 그녀를 보고 “왜 울고 지랄이야?” 하고 짜증을 냈다. 그는 메이슨을 일으켜 벽 쪽에 던져놓고 노아의 앞에 의자를 가져다가 앉았다.

“레이칼튼 씨.”

메이슨을 보며 달큼하게 웃고 있던 노아가 그의 행동에 찬물을 맞은 것처럼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론은 노아를 향해 살짝 몸을 숙이며 말했다.

“불편하겠지만 잠시만 들어주십시오. ―우린 당신을 납치하고 싶었던 게 아닙니다.”

“아, 그래요.”

이마는 아프고 팔다리가 묶여 좀 많이 불편하지만, 네. 그래요. ―노아는 빈정대듯 대답했다. 늘 신사답고 상냥하기로 유명한 노아의 그런 반응에 아론은 좀 당황한 듯했다. 늘 노아의 저런 모습을 봐왔던 메이슨도 미간을 구겼다. 안 그래도 불안해하는 놈들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론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프레드를 통해 보낸 쪽지는 봤습니까?”

“아, 금고 어쩌구.”

노아는 고개를 기울여 우습다는 듯이 웃었다. 아론의 얼굴은 조금 더 굳었다.

“저희는 레이칼튼 씨가 저 금고에 관심이 있어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 금고를 당신에게 팔 생각인데―…,”

아론의 말에 메이슨은 노아를 돌아봤다. 금고에 관심이 있었다고? 노아가? ―그러나 정작 노아는 키득대며 웃었다.

“글쎄―…, 난 저 금고가 뭔지도 모르겠는데요.”

“? 아닙니까? ―분명 금고를 가지고 도망간 남자를 Zii에게서 가로채려고 했다고―,”

“아, 그랬죠. 그랬죠.”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퍽 이 상황이 우습다는 듯이 짧게 웃은 그는 낮게 한숨을 쉬고 곧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내가 찾은 건 금고가 아니라 메이슨이지만.”

그는 힐끗, 바닥 한 쪽에 엎어져 있는 메이슨을 돌아보며 말했다. 노아의 말에 애슐리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론은 멍청한 얼굴로 노아를 쳐다봤다.

“메이슨이라구요?”

메이슨은 노아의 시선에 마른 침을 삼키며 아론과 애슐리의 기색만 살폈다. 안 됩니다, 노아. 그들을 도발하지 마요. 안 그래도 절망한 상태의 그들을 더 자극하는 건 노아에게도 아주 위험했다. 좀 더 순순히 굴라고, 그를 붙잡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전에 노아가 말했다.

“내가 당신들을 만난 건 저런 금고 나부랭이 때문이 아녜요. 난 그저 당신들 얼굴이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메이슨을 죽인 놈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찬찬히―….”

노아는 눈물로 젖은 채 얼어붙은 애슐리의 얼굴을 보고 희게 굳은 아론을 돌아봤다. 그리곤 나른하게 웃었다.

“아, 맞아요. 당신들이 그런 표정을 하는 게 보고 싶었어요.”

아론의 얼굴이 서서히, 아주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노아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된 까닭이었다. 메이슨은 아론의 손이 허리 홀스터, 권총을 쥐는 것에 급히 노아의 입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눈앞에 남은 선택지가 절망 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그러나 노아를 막기엔 너무 멀었고 그의 독살스러운 말은 아무런 방해 없이 흘렀다. 그 순간 아론이 무서운 표정으로 총을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안 돼!”

메이슨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그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탕――! 선뜩한 파공음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 * *

?……이 공교로운 사건에 대해 LA경찰은 인질로 잡힌 노아 레이칼튼과 헤일리 러스크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인질교섭팀은 납치범들과 접촉을 시도 중에 있으나……?

?…헤일리 러스크가 왜 갑자기 인질범들의 차로 뛰어들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당국은 그가 공범은 아닌지를 확인 중에 있으며…―?

티비에서는 어느 채널을 돌려도 내내 그들의 이야기였다.

?이 일에 대해 레이칼튼 가와 레베카 가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두 가문은 노아와 헤일리가 무사히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들, 납치범에게 어떠한 죄도 묻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두 사람에게 털끝 하나의 상해라도 입힌다면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해 피의 복수를 할 것이라고……?

다른 채널에서는 노아의 어머니 켈리 레베카가 울부짖으며 ‘내 아들을 그냥 놔두란 말이야!’ 하고 소리 지르는 영상이 흘러나왔다. 남들은 한 번도 당하지 않는 일을 두 번째 겪는 그녀는 결국 혼절했고 그녀를 안은 에드거 레이칼튼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카메라를 치우라고 소리 질렀다.

세상은 모두 이 끔찍한 사건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미국이 사랑하는 노아 레이칼튼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소망했다. 20년 전 그랬던 것처럼.

“…―텔레비전 꺼.”

아론의 말에 애슐리는 대답하기도 싫다는 듯 쳐다보다 텔레비전의 코드를 뽑았다.

그녀는 절망적인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일이 왜 이렇게 됐을까. 늘 위험하고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살았지만 이렇게 막막한 상황에 처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 자의가 아니었다. 아론이 메이슨을 죽이고 총을 들이대며 선택하라고 했을 때부터, 애슐리에게 이런 길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었다.

Zii를 배신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사를 죽이고 Zii가 노리는 물건을 빼돌린다? 곱게 죽을 생각도 버리는 게 좋았다.

그래도 어쩌면. 정말 레이칼튼 가와 거래를 할 수만 있다면 살아남을 길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신들이 그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거라면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아, 맞아요. 당신들이 그런 표정을 하는 게 보고 싶었어요. 눈앞에 남은 선택지가 절망 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그 표정―…’

잔인한 노아의 말에 눈앞이 흐려진 것은 애슐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런 상황을 바랐던 건 아니지만.

애슐리는 파리하게 질려 아론을 흘기다가 시선을 돌렸다. 헤일리에게 안긴 노아가 눈을 감고 쓰러져 있었다. 그의 붉은 피가 제법 넓게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 * *

총에 맞은 노아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메이슨이 절규하듯 소리 지르는 모습이었다.

우와, 하느님.

벼락에라도 맞은 것처럼 후들후들, 몸이 고통으로 떨리는 순간에도 노아는 달큼하게 생각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런 거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노아가 가장 컨디션이 나쁠 때 꾸는 꿈은 납치당했을 때나 메이슨이 떠났을 때를 되새김질하는 꿈이 아니었다. 오히려 컨디션이 아주 나쁘면 꿈은 아주 달콤하고 행복했다.

메이슨은 떠나거나 죽지 않고, 그와 함께 있었다. 열이 나 누워있는 그의 이마를 짚어주고 ‘괜찮습니까?’ 하고 묻거나 걱정 어린 표정으로 곁을 지켰다.

꿈인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무섭고 초조한 기분으로 그 달큼한 꿈을 곱씹다가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 즈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면 꿈이 다디단 만큼 현실은 더 비참하고 끔찍했다.

그래서 노아는 지금 이 현실이 꿈이 아닐까, 정말로 꿈이라면 이대로 영원히 깨지 않게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생각했다.

메이슨이 그를 껴안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노아, ―노아!” 하고 간절히 부르고 있었다.

“으―…,”

노아는 좀 더 아픈 척을 하며 낮게 신음했다. 메이슨은 금세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노아, 정신 차려 봐요. 괜찮습니까? 노아!”

자신을 껴안은 메이슨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뜨거운 열기에 노아는 숨을 삼키며 그의 팔에 뺨을 기댔다.

“…―,”

연약한 척 몸을 떨며 숨을 삼키자 메이슨은 말도 안 나온다는 듯이 “――대체 왜,”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왜 저놈들을 도발했냐는 말인 듯했다. 노아는 좀 더 그의 팔에 파고들며 “……아파요,” 하고 중얼거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총에 맞으면 아프지, 그걸 맞아봐야 안단 말인가. 메이슨도 여러 번 총을 맞아봤다. 치명상인적은 거의 없었지만 어딜 맞든 죽을 만큼 아팠다.

팔 중간 즈음에 난 노아의 총상은 치명상까지는 아니었지만 위험했다. 여긴 너무나 더럽고 습하며 당장 병원으로 달려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메이슨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노아를 보며 계속해 숨을 삼켰다.

그는 본래 안 좋은 상황일수록 냉정해지는 타입이었다. 위기가 가까울수록 머리가 잘 돌아갔고 그 덕에 늘 재기를 발휘해 목숨을 구해왔었다. 노력해서 냉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랬다.

그러나 메이슨은 이번만큼은 냉정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후들거리는 팔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노아의 어깨를 계속해 눌렀다. 묶인 손으로 지혈을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피는 무서울 정도로 많이 흘렀다.

“제발 이것 좀 풀어줘.”

메이슨은 애슐리를 향해 말했다. 주저앉아 있던 애슐리는 넋 나간 아론을 쳐다보다가 다가가 메이슨과 노아의 손발을 풀어주었다.

“――무슨 짓이야?”

벌떡 일어난 아론이 애슐리에게 총을 겨누며 물었고 애슐리는 아론을 노려봤다.

“무슨 짓이냐고? 난 한두 시간이라도 더 살고 싶어. 알아? 지금 이 남자가 죽으면 다 끝이니까!”

“인질은 하나 더 있어.”

멍청한 짓 하지 마. 아론이 위협적으로 말했고 애슐리는 코웃음을 지었다.

“하나 더 있다고? 저 남자 집안에서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가 죽었다는 게 확인 되는 순간 레이칼튼 가에서 건물을 폭파 시켜 버릴걸?”

애슐리는 싸늘하게 말하며 메이슨의 손발에 묶인 테이프를 칼로 잘라냈다. 아론은 부들부들 떨다가 쾅! 의자를 걷어차 부수고 밖으로 나갔다.

“―…,”

메이슨은 손이 풀리자마자 웃옷을 벗어 노아의 어깨를 눌렀다. 그에게 붕대 몇 개와 지혈제가 든 구급약통을 던져 준 애슐리는 지친 얼굴로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현장에서 체포된 프레드 랄프의 말에 따르면 범인들은 이 범행을 사전에 계획한 것은 아닌 것으로……,?

메이슨은 힐끗, 텔레비전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쳐다보고 다시 노아를 돌아봤다. 피와 식은땀에 젖은 그는 가늘게 숨을 쉬며 품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메이슨은 약통 안에 든 작은 가위를 불로 지지고 노아의 상처에 소독약을 부었다.

“흣―…,”

메이슨은 신음하는 노아의 잇새에 옷자락을 밀어 넣어주며 “아플 겁니다.”하고 중얼거렸다. 그의 상처에 칼을 대고 밀어 넣었다. 재빨리 총알을 찾아 뽑아낸 뒤 상처에 약솜을 대고 붕대로 단단히 감았다.

응급처치가 끝난 후 메이슨은 옷자락을 노아의 입술 사이에서 빼내며 그의 이마를 살폈다.

메이슨은 이미 반쯤 눈을 감은 노아의 이마에 피가 멎은 것을 확인하고 냉정하게, 그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 지 가늠했다. 삼십 분?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알 수 없었다. 지금은 괜찮아 보인다고 해도 당장 수혈 받지 않으면 곧 쇼크가 올 거고 그 뒤엔 어떻게 될 지 상상할 수 없었다 …―죽을 수도 있다. 그보다 쉽게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수도 없이 보지 않았던가. 메이슨은 가늘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고 있는 노아의 뺨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껴안아 줘요.”

작게, 노아가 응석을 부리듯이 말했고 메이슨은 희미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분명 자신보다 큰 남잔데 애달프고 가여운 기분이 들어 메이슨은 그의 어깨를 껴안았다. 어릴 때와는 달리 피냄새가 짙게 흘렀다. 하지만 뜨끈하고 축축하고……. 느리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자신이 놓아버리면 금세라도 죽어버릴 연약한 생물.

“…….”

메이슨은 깊이 숨을 삼켰다. 메이슨은 자신이 왜 이 남자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왜 그가 늘 그렇게 눈에 밟혔는지 알 것 같았다.

메이슨 스스로도 거의 인식하지 못했지만 노아를 구했던 것은 그에게 굉장히 감동스러운 순간이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평생을 건조하고 덤덤하게 세상을 살던 그가 그 작은 가방 안에서 죽어가던 노아를 발견했을 때만큼은 가슴에 긴 파문이 있었다. 자신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던 작은 아이. 그가 애달프게 가방을 긁던 소리를, 그 사람 많은 거리에서 오직 자신만이 들었다. 오직 그만이 그 작은 가방에서 노아를 건져내고 이렇게 껴안았다.

모든 것이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까.

메이슨은 지친 눈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애슐리를 쳐다보고 다시 노아를 보았다. 자신만이 구할 수 있었던 노아, 그리고 자신을 죽인 아론과 애슐리. 그 아론과 애슐리는 다시 노아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 어떤 접점도 없는데, 만날 리가 없는 사람들이 만나서 여기까지 와 있었다.

이 모든 인과를 정말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자신이 헤일리의 몸에 들어온 것도, 이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살면서 운명 탓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신의 존재를 믿어본 적도 없었지만 메이슨도 이 순간만큼은 이것이 신의 안배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라면 어떻게 노아가 이렇게 자신의 품에 안겨 있을 수 있을까.

메이슨은 노아의 뺨에 입술을 댔다. 축축하고 보드라운 뺨이 입술에 닿았고 노아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 힘이 없는지 곧 눈을 감았다.

“……밖으로 나가서 다른 사람을 만날 때까지 잠들지 마요.”

메이슨은 노아에게 작게 속삭이고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애슐리를 향해 메이슨은 말했다.

“그를 불러와, 애슐리. 너희와 협상하고 싶으니.”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고 메이슨은 쓰게 웃었다.

* * *

“텔레비전 꺼, 애슐리.”

주변을 살피고 돌아온 아론은 거칠게 말했다. 애슐리는 질린다는 얼굴로 코드를 뽑았고 아론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노아를 껴안고 있는 헤일리를 돌아보았다.

“――협상을 하고 싶다고?”

그는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협상이라니. 처음에 차에 올라탄 것도 주제에 지랄한다 생각하기는 했지만 점점 가관이었다.

“너 따위가 우리와 협상을 한다고?”

아론도 헤일리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메이슨처럼 만사 관심 없고 심드렁한 인간이 아니고서야 헤일리 러스크를 모를 수가 없었다. 남자라면 누구든 좋아 다리를 벌리는 걸레 같은 년. 술과 마약에 찌들어 온갖 사고를 치는 망나니. 트러블 메이커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인간이었다.

“씨발년이 건방지게――,”

아론은 이를 갈며 총을 꺼내 들었다.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던 새끼였다. 그 호텔에서도 이 새끼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때 노아를 만났다면 지금보다는 분명 상황이 나았을 터였다. 저놈이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하간 일을 꼬이게 만든 것은 그의 탓이었다.

남자를 향해 총을 겨누자 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론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검은 눈동자에 문득 등골이 서늘한 것을 느꼈다.

“왜. 연예인 나부랭이가 이런 일에 휘말리니 정말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나 보지? 네 머리통에 구멍이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안 해 봤지?”

아론은 오싹한 것을 숨기며 헤일리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 밀었다.

“저 레이노아도 쏴 갈겼는데 너라고 무사할 것 같아?”

중얼거리듯 말하며 아론은 방아쇠를 당길까 말까 고민했다. 이대로 헤일리를 쏴서 죽여 버리고 노아도 죽이고, 애슐리도 죽이고 자살해 버릴까 싶기도 했다. 사실 아론의 앞에 펼쳐진 유일한 길은 그것뿐이기도 했다.

아론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 천천히 구부러지던 순간이었다.

“병신처럼 굴지 마, 아론.”

헤일리가 덤덤한 투로 말했다. 아론은 눈을 크게 뜨며 남자를 쳐다봤다. 아론? 내가 이름을 말했던가? 노아에게 들은 건가? 아론이 순간적으로 멈칫하는 동안 그가 이어 말했다.

“너만 죽으면 다 끝날 것 같아? 노아를 죽이는 순간 베를린에 있는 네 누이와 어머니의 인생도 박살나는 거야.”

알지, 무슨 말인지? 헤일리는 작게 웃으며 아론을 쳐다봤다. 아론이 말을 잊고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저 새끼가?

“너도, 아직 여섯 살 밖에 안 된 딸이 걱정돼서 자살도 못했지?”

헤일리는 애슐리를 향해서도 말했다. 딸이 있었어? 아론이 놀라 애슐리를 돌아보았고 애슐리는 얼어서 주춤, 뒷걸음질 쳤다. 탕! 아론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고 총구에서 튀어나간 총알이 헤일리의 뺨을 스칠 듯 지나 벽에 박혔다.

“너 뭐야? 대체 어떻게 알았어? 우리에 대해 미리 조사했나?”

눈을 크게 뜨고 협박하듯 묻는 아론의 말에 메이슨은 그의 눈을 천천히 쳐다봤다.

“그 총알, 네 머리에 박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내 이야기를 듣는 게 나을 거야.”

메이슨은 그들을 적당히 자극하면서도 도발하지 않는 팽팽한 선을 생각하며 말했다. 당장 그들의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통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제발 이번 한 번만, 한 번만 더 임기응변이 통해주기를 신에게 빌었다.

“노아는 놔줘.”

메이슨은 최대한 냉정한 투로 말했다. 그들 스스로가 노아를 놓아주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들과 여기서 싸우는 건 노아를 위험하게 만드는 일 밖에는 되지 않았다. 메이슨은 노아를 붙들고 있는 손이 차게 식은 것을 느끼며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바깥에 대기하고 있을 경찰들과 그 대가로 헬기든 전용기든 협상해서 얻어내도록 하고―…, 전용기가 좋겠지. 멀리가야 할 테니까.”

원하는 것을 모두 다 얻지는 못할 터였다. 그들이 노아를 쥐고 돈을 받아 도주까지 한다면 앞으로는 노아를 노리는 제2, 제3의 납치범들이 생겨날 테니,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끽해야 당장의 안전한 퇴로 정도가 분명했다.

“어디로든 먼 제삼세계로 떠나. 그 사이 추격이 붙지 못하도록 인질이 되는 건 나로도 가능할 테니까.”

“이 씨발, 너 대체 뭐냐고 묻잖아!”

아론이 총신으로 메이슨의 머리를 후려쳤다. 메이슨은 주륵, 눈가로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총으로 쏴버리는 것이 아니라 총신으로 후려쳤다는 건 나쁘지 않았다. 그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이야기고 그 혼란은 어쩌면 평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위험한 임기응변을 통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메이슨은 최대한 여유롭게 웃었다.

“내가 누구냐니. …―언제까지 모르는 척 할 거야?”

“뭐?”

얼빠진 표정의 아론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아론의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크게 비치고 있었다. 메이슨은 죽음을 겪던 순간처럼 그를 보고 눈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12.”

뜬금없이 튀어나온 숫자에 애슐리가 “뭐?” 하고 되물었고 아론은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흠칫했다. 그의 어깨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메이슨은 살짝 웃었다. 평소처럼.

“36.5, 37…….”

“너…―, 설마,”

메이슨이 계속해 읊자 아론은 물론 애슐리까지 창백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거짓말 하지 마!”

애슐리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고 아론은 다시 총구를 들이댔다. 이번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메이슨은 깊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그날, 알타의 입에서 마지막 숫자를 들은 건 나뿐이었지?”

안 그래? 메이슨의 말에 아론과 애슐리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 * *

“하……, 하하.”

하하하, 아론은 한참 만에 입을 열어 헛웃음을 지었다. 제법 길게 웃은 그는 이내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지랄하지 마. 누가 믿을 것 같아?”

메이슨은 네 마음대로 생각하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론은 총구를 바짝 들이댄 채로 말했다.

“왜. 네가 메이슨이라는 개소리라도 할 셈이야?”

메이슨은 대답 대신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 새까만 눈동자에 아론은 메이슨이 죽던 순간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새까만 재수 없는 눈동자. 총에 맞아 나자빠진 주제에 자신을 비웃는 듯한 그 서늘한 시선.

“이게 대체 무슨 수작이야.”

아론이 까딱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듯이 방아쇠를 반쯤 당기기까지 하며 노려봤다. 아까보다 많이 진정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의 손은 가늘게 떨렸다. 메이슨은 그의 손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협상을 하자고 했잖아.”

메이슨은 천천히 노아를 끌어안고 일어났다. 총을 겨누고 있던 아론의 팔도 함께 각도가 올라갔다. 품에 안겨 있는 노아의 체온이 느릿하게 떨어지는 것에 메이슨의 신경은 한계까지 당겨져 끊어질 것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메이슨은 여유를 가장하며 말했다.

“제삼세계에 떨어지더라도 돈은 필요하잖아? 레이칼튼 가에서 너희에게 풍족한 미래까지 약속할 리는 없다는 걸 알거고.”

당장은 그런 미래를 약속해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노아의 목숨을 쥐고 있다고 해도 저쪽은 포악한 맹수였다. 노아를 그들 손에 넘기는 순간, 그들은 돌변해 본색을 내보일 것이었다.

납치범이 요구한 것이 과하면 과할수록 레이칼튼 가와 레베카 가의 복수는 처절하고 잔인해질 것이고 그들이 용인하는 것은 고작해야 당장의 도주정도였다. 그나마도 몇 년이 지나더라도 잊지 않고 찾아올 터고. 그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아론과 애슐리도 그 점을 분명 알고 있을 것이었다.

메이슨은 그의 총구를 쳐다보면서 냉랭한 얼굴을 했다.

“――아론.”

애슐리가 총을 겨눈 아론의 팔을 붙들었다. 아론은 새빨개진 눈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메이슨은 죽었어.”

아론은 씹어뱉듯이 말했다.

“시체를 불로 지지고 폭탄으로 터뜨렸는데,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고? 다른 사람의 몸으로? 그런 개소리를 어떻게 믿어?”

알타의 방에서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은 죽은 알타와 메이슨, 애슐리와 아론뿐이었다. 그중 알타와 메이슨은 죽었고 그 두 사람이 죽은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눈앞에 있는 것이 메이슨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면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누군가 배신했다는 것뿐이었다. 소울 스와핑 따위를 믿는 것보다는 서로를 의심하는 것이 더 쉽기에, 아론은 자신의 팔을 붙잡은 애슐리를 노려봤다.

“―아론!”

아론의 싸늘한 시선에 애슐리는 배신이라도 당한 듯 소리를 질렀다. 아론은 애슐리를 돌아보고 다시 메이슨을 쳐다봤다. 메이슨은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너희가 무슨 생각을 하든, 날 누구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어.”

메이슨은 잠들지 말라고 속삭인 보람도 없이 자신의 어깨에 완전히 늘어져 기대어 있는 노아를 좀 더 끌어안으며 말했다.

“노아는 놔줘. 다함께 죽고 싶은 게 아니면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높은 곳에 걸어봐.”

아론은 파리하게 질려 식은땀만 흘리며 눈을 감고 있는 노아를 쳐다보고 다시 애슐리를 돌아봤다.

“――애슐리.”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았고 아론은 “저 남자 데리고 나가.” 하고 고갯짓을 했다. 그 고갯짓을 따라 노아를 쳐다본 애슐리는 조금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틀림없이 아론도 자신을 의심하고 있을 텐데, 노아와 함께 이 방을 나가서 그를 팔아넘기고 혼자만 도망칠까 감시를 해도 모자랄 판에 자신을 보낸다는 것이 의외였던 것이었다.

“……좋아. 전세기를 요구해보지.”

애슐리는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지만 같이 살아날 길이 있다면 필사적으로 버티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노아를 이리 줘.”

그녀의 말에 메이슨은 힐끗 노아를 쳐다봤다. 그가 자신의 옷을 살짝 잡은 것도 같았지만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잃은 노아를 그녀의 어깨에 단단히 기대게 하며 잠깐, 그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놓았다. 그 서늘하고 축축한 손이 떨어지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달칵――.

노아를 부축하듯 안은 애슐리가 방을 나갔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메이슨은 낮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밖으로 나간 뒤에는 대기하고 있던 협상가들과 의료진이 노아의 상태를 알아보고 최대한 빨리 협상을 진행할 터였다. 그거면 됐다. 그거라면, 팔에 후유증은 조금 남을지도 모르지만 틀림없이 살 수 있을 것이었다.

메이슨은 노아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그가 자신에게 그랬듯이.

‘제발, 당신이 세상에 없다고는 하지 마요.’

아마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자신은 죽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계속 인질을 데리고 있는 것처럼 하기 위해 시체조차 남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자신이 기분 나쁘게 메이슨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상에야 더욱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내 머리를 쏴버릴 것 같으니까.’

“…….”

서글피 울던 노아의 얼굴이 떠올라 메이슨은 쓴 입맛을 다셨다.

혹시 자신이 죽더라도, 자살하거나 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메이슨은 쓰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론이 그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분명히 애슐리 년의 수작이겠지만―…, 그 눈알이 꼭 메이슨 그 새끼처럼 기분 나빠서 말이야.”

아론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메이슨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론. 이 욕심 많은 놈. 메이슨은 그가 이런 놈이라서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마지막까지 금고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네 사람 모두 시체가 되어 구르고 있었을 테니까.

금고에 대한 욕심이 있는 한, 오천만 달러가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필사적으로 살려고 노력할 테고 그것이 노아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 옳았다.

“그래, 마지막 숫자가 뭐지?”

메이슨은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 뜸을 들이자 아론이 차게 말했다.

“셋을 셀 동안 말해. 네가 말을 하지 못하면 널 쏴버리고 당장 뛰어나가 애슐리 년을 죽여 버려야 하니까.”

메이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아론이 숫자를 세기 전에 말했다.

“―7.”

아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메이슨을 쳐다보다가 겨누고 있는 총을 까딱하며 말했다.

“열어.”

혹시 그가 훼이크 번호를 말했을까 싶었는지 아론은 금고를 여는 것을 메이슨에게 시켰다. 메이슨은 “의심 많은 건 여전하네.” 하고 금고로 다가갔다. 순간적으로 금고를 마구 눌러 안에 장치되어 있을 폭탄을 터뜨려버릴까 싶었지만 노아의 애원하던 얼굴이 눈에 밟혔다.

아마 죽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살 기회가 있다면 살고 싶었다.

또 그렇게 울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메이슨은 눈물로 얼룩졌던 노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메이슨이 맞다는 말을 해주지 못했구나. 대단한 말도 아닌데 그때 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 해봐야 이미 다 늦었지만 그래도…….

“…―.”

핏물이 든 탓인지 지독히도 씁쓸한 입맛을 다신 메이슨이 마지막 번호를 누르자 철커덩, 금고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순간 아론의 손이 다가와 메이슨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뒤로 내팽개쳤다.

“―큿!”

쿵! 메이슨은 바닥에 구르며 아론이 새빨개진 눈으로 열린 금고를 들여다보는 것을 보았다.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잔뜩 쌓여있는 금괴와 문서들이 보였다.

“하―…,”

정말로 열린 금고를 못 믿겠다는 듯이 들여다보던 아론이 고개를 돌려 메이슨을 쳐다봤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네가 정말 메이슨이라고?”

메이슨은 그의 시선이 떨리는 것을 멀거니 쳐다봤다. 자신이 죽인 사람을 눈앞에 두고 아론은 다시 한 번 총을 겨눈 채 숨을 몰아쉬었다.

“네가, 정말―…,”

정말 메이슨이야? 그의 말은 마쳐지지 않았다. 그 순간 밖에서 총소리가 울렸기 때문이었다.

――탕!

건물을 울리는 총소리에 메이슨도 아론도 그대로 눈을 크게 뜨고 밖을 돌아보았다. 닫힌 문 밖에서는 한 방의 총성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고요해 시간마저 멈춘 듯한 정적이었다.

“…―무슨,”

메이슨은 순식간에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총소리는 문 앞,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노아는 기절한 상태였고 애슐리는 딸 때문이라도 자살을 할 여자가 아니다. ―총을 쏜 사람이 누구이며 누가 맞았는지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잘못 들은 거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그보다 몸이 더 빨리 움직였다.

“노아!”

메이슨이 달려 나가려고 하자 아론이 그를 뒤에서 잡아챘다. 메이슨은 어깨를 잡는 아론의 팔을 잡아 꺾으며 팔꿈치로 그의 턱을 내리 찍었다. 비리비리한 헤일리가 그런 순발력을 발휘할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한 듯 아론은 턱을 붙잡고 반걸음 물러섰다.

메이슨은 그가 물러난 틈을 타 다시 방문을 열기 위해, 노아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달려갔다. 탕! 등 뒤에서 발포된 총알은 메이슨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

메이슨은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지며 힉, 숨을 삼켰다. 총알에 관통당한 고통 때문인지 노아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눈물이 쏟아졌다.

“씨발…―, 너 같은 게 메이슨일리가 없지.”

아론이 입술에 흐른 피를 닦으며 말했다.

“사람 다쳤다고 정신 빠져 달려가다 총 한 발 맞았다고 쳐 우는 새끼가, 그 독종이라고?”

저 죽을 때조차 눈 하나 깜빡 안하던 그 새끼라고? 메이슨은 지독한 고문에도 눈 한 번 끔뻑하지 않고 비명 한 번 지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놈이었다. 아론은 깜빡 속을 뻔했다며 씨근덕댔다. 그래,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리가 없지. 아론은 벌레처럼 바지락 대며 앞으로 기고 있는 남자의 어깨를 발로 짓밟았다.

“――,”

메이슨은 입술을 깨물고 남은 팔로 굴러다니는 약통을 뒤엎었다. 놈이 놀라 숨을 들이켜는 사이 재빨리 가위를 집어 그의 발목에 찔러 넣었다. 아론이 재빨리 피했지만 발목에 제법 굵은 상처가 남았다.

“――큭, 이 씨발!”

그가 총의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재빨리 일어나 그의 팔을 붙들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헤일리의 육체는 완력이 약한 편이었지만 상대의 힘을 이용하면 제대로 내던질 수 있었다. ―다리만 정상이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총에 맞은 다리는 힘을 지탱하지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식은땀이 온몸을 흠뻑 적셨다. 아론에게 깔린 채로 엎어진 메이슨은 다리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삼키며 등 뒤로 힘껏 가위를 질러 넣었다. 가위가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 났지만 복부는 아니었다. 허벅지나 그런 곳――.

쾅!

메이슨은 이마에 가해지는 충격에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아론이 메이슨의 뒷머리를 잡고 그대로 바닥으로 찍어 내린 것이었다.

“―…아,”

노아. 메이슨은 후들거리는 팔로 일어나려고 애썼다. 아픔이고 비실거리는 육체고, 메이슨의 머릿속에는 오직 문 밖에 쓰러져 있을 노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가 밖에서 죽어가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나자빠져 있으면 안 되는데. 그는 이미 피를 많이 흘렸으니 한 발 더 맞았다면 정말로 위험할 텐데. 팔이나 다리 같은 곳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혼자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 차가운 바닥에 누워 죽어가고 있을까. 그건 정말로 싫은데―….

“―…,”

메이슨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지만 머리 뒤에서 또 한 번 충격이 울렸다. 후들거리며 눈을 뜨려고 했지만 의식이 하얗게 멀어졌다. 죽음과는 확연히 달랐지만 비슷했다.

그대로 모든 것이 하얗게 변했다.

“…―하아, 하아―.”

이 씨발――. 아론은 잇새로 욕설을 뱉으며 피가 줄줄 흐르는 허벅지께를 손으로 쥐었다. 저 쥐새끼같은 남자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인질로 써먹어야 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벌써 죽여 버렸을 텐데.

마지막에 머리를 얻어맞고도 문 쪽으로 기어갈 때는 그 지독함이 정말 메이슨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메이슨이든 아니든 안전한 곳으로 가면 반드시 죽여 버려야지. 메이슨의 시체보다 더 잘게 잘라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만들 셈이었다.

퍽! 기절한 헤일리를 걷어찬 아론은 씩씩대며 상처께를 누르고 절뚝절뚝 걸었다. 애슐리가 왜 노아를 쏴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보다 궁금한 건 왜 밖이 조용하냐는 것이었다. 어쩌면 애슐리가 노아를 쏜 것이 아니라 애슐리가 기절한 노아를 버리고 자살해 버린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애슐리, 그년 설마――,”

중얼거린 아론은 숨을 몰아쉬며 벌컥, 방문을 열었다.

“읏,”

문을 열자 생각지도 못한 새하얀 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아론은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뭐야?” 하고 고함을 친 아론은 시야에 붉은 것이 스치고 지나간 것을 깨닫고 그대로 굳었다.

빛에 눈이 익숙해지고 고개를 들자 온몸에 붉은 것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붉은 포인트가 모여 마치 커다란 동공을 그리듯 머리와 가슴이 온통 붉은 빛이었다.

“―…이게, …….”

아론은 망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Zii의 검은 군대가 포진해 있었고 수십, 아니 수백의 저격총 레이저가 그를 조준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발포할 것처럼.

“…―.”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론은 총을 버리고 천천히 양손을 들어올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애슐리가 정말로 나를 배신한 건가?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는 아론의 옆으로 Zii의 군의관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헤일리를 살폈다. 그리곤 곧 그를 업고 다시 아론을 지나쳐 나와 누군가에게 뭔가를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남자는 헤일리의 희게 질린 뺨을 쓸어내리고 곧 그를 밖으로 내보냈다.

아론은 헤일리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 피에 젖은 금발 머리는 눈에 익었고 그가 돌아서며 아론을 무섭도록 차가운 눈으로 쳐다봤다.

“누구 찾아요?”

남자, 노아는 “아, 혹시 이 여자?” 하며 쥐고 있던 갈색 머리칼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퍽, 잔인한 소리가 나며 검붉은 덩어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노아가 그것을 발로 툭 밀자 그 검붉은 것의 얼굴이 드러났다.

“…―애슐리……,”

아론은 신음처럼 중얼거리며 노아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 * *

순한 얼굴로 웃고 있는 노아를 멍청한 얼굴로 쳐다본 아론은 문득, 그의 손가락에 걸려 있는 총을 쳐다봤다.

애슐리의 총이었다.

“아, 이거.”

아론의 시선에 노아는 해사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총을 쳐다봤다.

조금 전 애슐리에게 업히듯 부축되어 방을 나선 노아는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눈을 굴려 주변을 돌아본 그는 무거운 듯 자신을 부축하며 걷는 애슐리의 몸에 기대어 옅게 숨을 쉬었다. 출혈이 심하긴 했는지 몸이 무거웠다.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지만.

노아는 힐끗, 애슐리의 허리 뒤춤에 건 홀스터를 쳐다봤다.

‘?’

애슐리는 아래쪽에서 스친 인기척에 자신이 부축하고 있던 노아를 내려다보았다. 정신이 들었나? 기절해 있는 편이 거래하기는 편할 텐데, 생각하는데 노아의 팔이 애슐리의 허리를 껴안듯 스쳤다.

‘――!’

애슐리는 더듬, 자신의 건 홀스터를 만졌다. 분명 거기 꽂혀 있어야 할 총이 비어 있었다. 홀스터에 꽂혀 있던 총은 그녀를 겨누고 있었다.

‘―…무슨,’

총을 든 노아는 당장에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처럼 손가락을 건채로 말했다.

‘왜. 당신들이 납치한 게 일곱 살 어린애라도 되는 줄 알았어요?’

노아는 희게 웃었다. 그가 이십 년 전, 가방 속에 갇혀 있던 어린 아이처럼 연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메이슨 하나로 족했다. 메이슨이 지켜준다면 노아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그만 있다면 노아에겐 이 모든 것이 어린애들 장난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설마,’

애슐리는 주춤거리며 중얼거렸다. 설마. 설마 그가 방아쇠를 당길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노아 레이칼튼이 얼마나 대단하든 그는 일반인이고 유명인이었다. 보통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총을 들고 있다고 해서 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고, 그가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멈칫한다면 애슐리는 그에게서 총을 빼앗아낼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프로였고 저쪽은 아마추어는커녕 입문자도 못 되니까. 애슐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장전―…,’

장전은 했어? 노아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그렇게 말하려던 애슐리는 자신의 가슴을 쳐다봤다. 갑자기 귀가 먹먹해지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몸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 허억,’

가슴께에 새빨간 구멍이 뚫려 터지듯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손으로 허겁지겁 막아보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피가 쏟아졌다.

‘장전은 아까 했잖아요, 당신이.’

기억 안 나나 봐요. 이제와선 별로 상관없는 일이지만. ―노아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가 천천히 무너지는 것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녀의 몸을 뒤져 휴대폰을 꺼낸 노아는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금세 전화가 울렸고 통화 버튼을 누른 노아는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 말했다.

‘――내가 Zii에 투자한 금액이 얼마죠?’

?……설마, 레이칼튼 씨? 레이,?

‘정말로 실망스럽네요.’

노아는 심드렁히 짧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Zii의 부대가 창고 안을 가득 메운 것은 단 2분만이었다.

“인질을 껴안고 총을 뒷주머니에 꽂아두다니, 멍청했죠.”

노아는 짧게 평하며 웃었다. 아론은 숨을 헐떡거리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슉! 공기를 가르며 총알이 날아가 아론의 양 무릎에 명중했다.

“컥,”

아론은 그대로 주저앉았고 ?움직이면 발포한다.? 하는 싸늘한 음성이 확성기를 통해 들렸다. 아론은 고통과 공포에 후들후들 떨며 고개를 들었다. 다시 빨간 빛이 얼굴과 가슴, 팔, 다리 온 몸을 비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고 아론은 고개를 숙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

뚜벅뚜벅,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머리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죽음처럼 스산한 느낌의 그림자에 천천히 고개를 들자 총을 든 노아가 그의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기분이 어때요?”

노아는 천천히 총으로 아론의 이마를 누르며 말했다.

“무서워요?”

아론은 노아의 얼굴을 공포에 질려 쳐다봤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눈을 가늘게 뜬 그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분명 자신이 조금 전까지 인질로 잡고 있던 연약하고 비참한 도련님이 틀림없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총구를 겨눈 채 웃고 있는 남자는 압도적으로 잔인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 나도 정말 무서웠거든요.”

노아는 아론의 무릎을 밟으며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이 총으로 이렇게, 메이슨을 죽였죠.”

고통에 몸부림 쳤던 아론이 몸을 웅크리고 숨을 헐떡댔다.

“나의 신을.”

내 하나님을 당신이 죽였어.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로 아론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납치당한 게 무서웠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노아는 아론이 메이슨을 죽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거예요.”

노아에게 이건 메이슨의 복수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자신의 복수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 노아는 그것을 몇 번이나 겪었다. 현실에서, 그리고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에서도 몇 번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겪었다. 살이 떨리고, 눈물이 나고, 정말로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그 감각을 노아도 알고 있었다.

엄청난 공포였지만 메이슨의 죽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메이슨이 죽어버린 세상에서 사는 공포를 겪을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았다.

“무, 무슨―…,”

메이슨이 노아의 하나님이라고? 아론은 노아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괜찮아요.”

노아는 너 따위가 알아 뭣하겠냐며 웃었다. 그가 “그저……,” 하고 말끝을 늘이며 아론의 이마에 닿아 있는 빨간 불빛을 쳐다봤다. 아론은 그 부분이 아픈 것처럼 느껴져 숨을 몰아쉬었다.

“그 저격 포인터가 겁납니까?”

노아는 아픈 것도 아닌데, 하는 투로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들은 당신을 쏘지 않을 테니까.”

달래듯 말하는 목소리에 아론은 입술을 달싹이며 애슐리를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Zii의 부대를 쳐다보고 노아를 보았다.

‘저들’은 당신을 쏘지 않는다. ―애슐리의 가슴에 난 새까만 구멍은 Zii의 짓이 아니었다.

“맞아요.”

긍정한 노아는 아론의 이마에 대고 있던 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웃고 있는 노아의 눈은 소름끼칠 만큼 차가웠다. 동정이나 망설임 같은 인간적인 감각은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론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검은 것이 스물거리며 몸 위로 올라와 자신을 아래로 끌어당기려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무언지 깨달은 아론의 눈이 공포로 흐려졌다.

“…―,”

아론은 무슨 말이든 하려고 했지만 그 입에서 소리가 나기 전에 손가락이 당겨졌다. 퍽! 수박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고 입을 벌렸던 아론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철퍼덕, 피가 둥글게 그의 머리 주변으로 쏟아졌다.

뺨에 튄 미지근한 피를 느끼며 노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 내내 이렇게 하고 싶었거든요. 정말로.”

메이슨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노아는 눈을 크게 뜨고 죽어나자빠진 아론의 얼굴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절명한 뒤에 일어나는 짧은 경련이 모두 멈출 때까지.

아론이 더 이상 솜털 하나도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까지 그를 지켜본 노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변에 가득한 Zii의 요원들이 그를 보고 있었다.

* * *

“여기는 노아와 헤일리가 납치된 LA 템플 시티 외곽 창고 앞입니다. 조금 전, 노아와 헤일리가 무사히 구출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아앗, 잠시만요! 창고 문이 열립니다! 저건 누굴까요! ―헤일리인가요?”

다급히 말한 리포터는 카메라가 따라오든지 말든지 옐로우 라인 가까이 달려갔다. 그녀의 말대로 공장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구급대원들이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를 들것에 실어 나오고 있었다. 수많은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에게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언뜻 하얀 얼굴이 낯이 익었다.

“헤일리! 헤일리 러스크입니다! 헤일리가 구출되었군요!”

리포터가 카메라를 향해 소리 질렀고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다. 헤일리가 들것에 실려 구급차에 태워지는 사진을 담기 위해 수백의 카메라가 바쁘게 깜빡였다.

“들것에 실려 나오다니, 다치기라도 한 것일까요? ―예? 총상?”

구급차 가까이에 있는 기자들이 소리 지르는 것을 들은 리포터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총상이라니, 맙소사!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노아는 무사한 겁니까?”

그리고 그녀가 카메라를 향해 묻는 것과 동시에 등 뒤에서 커다란 함성 소리가 들렸다. 감탄과 기쁨의 함성에 그녀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오, 하느님!”

하느님,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녀가 탄성을 내질렀다. 예감대로 노아 레이칼튼이 그의 비서 필 햅슨의 부축을 받으며 공장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세상이 간절히 바랐던 대로 노아가 살아서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팔을 다쳤는지 붕대를 감고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온 노아는 창백한 얼굴이기는 했지만 두려움에 질린 얼굴은 아니었다. 땀과 피로 젖어 있었지만 노아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또 단정한 얼굴이었다.

그의 어머니 켈리 레베카가 달려와 그를 껴안았고 에드거 레이칼튼과 조지 레이칼튼의 모습도 보였다. 장관인 그의 외조부와 노아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노아! 괜찮습니까?”

“범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팔에는 총상을 입은 겁니까?”, “헤일리는 대체 이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어머니입니까?”

“노아! 여기 좀 봐주세요! 레이칼튼 씨!”

그가 구급차에 올라타기 위해 걸어 나오자 기자들의 질문과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보디가드들이 그를 막아섰지만 기자들은 끈질기게 질문을 던지고 사진을 찍었다.

“노아! 한 마디만 해주세요!”

노아가 인터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지 않을까, 다들 한 마디라도 기삿거리를 따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한 남자가 뒤에서 밀려드는 기자들에게 떠밀려 옐로우라인에서 벗어나 노아의 앞 쪽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

그 작달막한 기자의 난입에 순간 정적이 흘렀고 곧 경찰과 보디가드들이 그를 옐로우라인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그에게 다가갔다.

“어엇,”

그 기자는 보디가드들이 떠미는 대로 밖으로 밀리며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었는지 노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노, 노아!”

애타게 부른 음성에 구급차로 올라타던 노아가 문득 멈추어 뒤를 돌아보았다. 기자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필사적으로 물었다.

“노아! 몸은 괜찮습니까? 현재 TV를 보고 있는 마, 많은 국민들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노아가 멈추어 서자 기자를 몰아내려던 보디가드들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노아는 기자를 향해 옅게 미소 지었다.

“걱정해줘서 감사해요. 저는 아주 괜찮습니다.”

그 미소에 기자는 질문을 잊고 머뭇거렸다. 다시 보디가드들이 그를 떠밀기 시작했고 기자는 허우적거리며 말했다.

“초, 총상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렇습니까? 납치범들과 난투가 있었습니까? 대체 어떻게 나온 거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기자는 절규하듯 소리 질렀고 노아는 한숨처럼 웃었다. 약간은 공교로운 듯, 그러나 안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미소에 기자들이 술렁거렸다. 이윽고 노아의 입술이 열렸다.

“그가 저를 구했어요.”

노아는 “저를 납치범들에게서 구하고 총에 맞았죠.” 하고 재차 말했다.

“그, 그라니요?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설마…―,”

모두의 머리에 총상으로 들것에 실려 구급차에 태워진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웅성웅성, 헤일리 러스크가 노아를 구했다고? 사람들이 크게 동요했다.

“맞아요. 그가, 헤일리가 아니었으면 저는 이미 죽었겠죠.”

아, 틀림없이 죽었을 거예요. ―노아는 중얼거리듯이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보디가드에게 떠밀린 기자는 옐로우라인 밖으로 내던져지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노아는 ‘헤일리 러스크가 노아를 구하고 총에 맞았다.’ 라는 발언에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쭈욱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에, 수많은 기자들이 헤드라인이 될 한 마디를 기다리며 웅성거림을 멈추었다.

“―…지금 당장, 그가 무척 보고 싶네요. ―내가 살아있다는 실감이 날 것 같거든요.”

노아는 아릿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구급차에 올라탔다.

턱, 구급차의 문이 닫히고 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출발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모두 플래시를 터뜨리고 제발 한 마디만 더 해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아우성을 쳤다.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갔던 Zii와 한 발 늦게 현장에 도착한 경찰, 노아의 비서인 필이 장내를 정리했다.

곧 브리핑이 이어졌다.

* * *

?……, 이어진 Zii와 경찰, 레이칼튼 가의 합동 브리핑에 따르면 범인들은 노아와 헤일리를 놓친 직후 상황을 비관해 자살한 것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범인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경찰은, …―?

노아는 지겹도록 흘러나오는 브리핑 장면에 버튼을 눌러 채널을 돌렸다.

?와우,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요? 망나니로 헐리웃의 골칫거리였던 그는 이제 그야말로 슈퍼 히어로나 다름없습니다!?

화면에서는 헤일리가 노아를 따라, 그를 구하기 위해 범인들의 차에 억지로 올라타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차문에 끼인 손이 클로즈업 되었고, 손에서 피가 나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무서운 범인들을 향해 무언가 말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범인들의 약간 당황한 표정도, 차에 탄 헤일리가 노아의 손을 잡아주는 것까지. ―희미한 화면이었지만 수십 대의 카메라 앞에서 벌어진 일은 디테일한 곳까지, 마치 영화처럼 편집되어 텔레비전, 뉴스에서 방송되었다.

?‘―…지금 당장, 그가 무척 보고 싶네요. ―내가 살아있다는 실감이 날 것 같거든요.’?

노아의 간절하고 애절한 고백까지. ―영화도 아닌데 영화보다 더 감동적인 엔딩이 이어졌다.

?영화, 드라마, CF, 패션 거장들은 물론 수많은 업계 관계자들이 헤일리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다리에 총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는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로……,?

노아는 몇 번 더 채널을 돌리다가 텔레비전을 껐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그의 앞에 헤일리, 아니, 메이슨이 눈을 감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한참동안 그를 지켜보던 노아는 붙잡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려 뺨에 부비며 속삭였다.

“…―어서 일어나요.”

보고 싶으니까. 중얼거리듯 말한 노아는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미간을 움칠거리는 메이슨을 보며 달큼하게 웃었다.

눈을 뜨면, Zii의 도구 노릇을 하던 ‘메이슨 테일러’의 외로운 삶이나 망나니 ‘헤일리 러스크’로 걸레 취급당하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이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니까 어서 일어나요.”

일어나서 내게, 대답해주세요. 노아는 애원하듯 낮게 속삭였다.

“메이슨―….”

메이슨. 메이슨―…. 노아의 부름에 그가 화답이라도 하듯 속눈썹이 부드럽게 떨렸고 아주 천천히 그의 눈이 열렸다.

* * *

눈을 뜨는 것은 헤일리의 몸에서 깨어났을 때와 비슷했지만 좀 더 기분이 좋았다. 신선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살랑거렸고 멀리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주파수가 안 맞는 라디오 같은 느낌은 이번이 더 심했다. 이번엔 정말로 텔레비전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가 금세 끊어졌다.

노아가 비참하게, 혼자 죽어가는 것에 괴로워하며 눈을 감았던 메이슨은 신선한 풀 향기와 바람이 뺨을 스치는 것에 ‘내가 정말 죽었구나.’ 생각했다.

아쉽지는 않았다. 노아가 그렇게 죽어버리고서 혼자 살았다면, 몸은 또 어떻게든 살기야 했겠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이었다. 예전에 자신이 그랬듯, 약을 먹고 아프간이라도 가야 했을 텐데…… 헤일리의 비루한 육체로 아프간에 갔다간 총에 맞아 죽지 않아도 나흘이면 어떤 이유로든 죽을 게 뻔했다.

차라리 잘되었다. ―메이슨이 사후세계를 담담히 받아들이며 생각하는데 손등에서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스쳤다.

어서 일어나요. 노아의 달큼한 목소리도 귓가에 닿은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둘 다 죽었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서 만나게 된 걸까?

“……메이슨.”

노아가 부르는 소리에 메이슨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잠시 뿌연 세상이 보였고 미간을 찌푸리자 곧 시야에 상이 맺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아름다운 노아의 얼굴이었다.

“…―,”

메이슨은 눈을 깜빡였다. 노아의 이마에는 하얀 거즈가 붙어 있었고 환자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메이슨은 느릿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병원인지 어딘가의 침실인지 알 수 없는 호화로운 방, 창에서는 하얀 햇살과 살랑거리는 바람이 흘러들었다. 따뜻한 햇볕의 향기. 풀내음.

현실인지 사후세계인지, 혹은 꿈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메이슨은 천천히 노아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금세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왜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 걸까. 또 혼자 외로워하고 무서워하며 죽었기 때문일까? 메이슨은 안타깝고 먹먹한 기분에 손을 들었다. 그의 뺨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그 전에, 손을 붙잡고 있는 다른 손이 있었다.

노아의 손이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

가늘게 떨리고 있는 노아의 손등을 보며 메이슨은 숨을 삼켰다.

아아. 현실이구나.

노아가 살아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 하나만은 틀림없었다. 다른 것은 어떻게 되었든, 메이슨은 그것 하나만 알면 괜찮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메이슨.”

떨림이 섞인 노아의 부름에 메이슨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헤일리가 아닌 메이슨에 대한 호명이었다. 노아의 아름다운 눈에서 툭,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메이슨은 살짝 웃었다.

“…―예.”

예, 노아. ―약간은 잠긴 목소리였지만 이번에는 대답할 수 있었다.

그가 내도록 해주고 싶던 대답이었다.

[히든트랙 : 자낙스]

"아......,아프간이요."

메이슨이 아프간에 가게 되었기 때문에 내일부터 경호일은 다른 사람이 오게 될거라고

이야기 했을 때, 노아는 별반 놀라지 않았다.

일주일전 필을 통해 미리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노아는 그냥 덤덤히 '아.일주일이 벌써 지났구나.'하고 생각했다.

한달 전 메이슨을 저택으로 불렀을 때부터 노아는 내내 이날으라 각오해 왔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지만 그래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각오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노아가 처음 메이슨을 기억해낸 것은 그가 막 열여섯 살이 되던 무렵이었다.

자신이 납치를 당했다는 사실이야 여기저기서 보고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는 그일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해리성 기억상실증.커다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기억의 일부분을 잃는 기억장애.

노아는 따깋 그일에 대해 기억해내려고 애쓰지 않았다.

무언가 잃었다는 생각은 했지만 굳이 그 일에 대해 떠올리지 않아도 그는 자주 불면증에 시달렸고,

자다가 숨을 쉴 수 없어 깨는 일도 많았으며,좁고 어두운 곳에 갇히게 되면 수시로 발작하고 있었다.

그게 어떤 일인지 기억하지도 못하는 상화에도 그러고 있으니, 구태여 아픈 기억을 되살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이나 의사도 그에게 그때의 무서운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열여섯 살. 학교 화장실에서였다.

그날따라 내내 머리가 아파 코카일을 조금 들이킬 생각으로 화장실에 들어갔떤 노아는 어느순간 갑자기 눈물을 쏟고 있었다.

울고 ,소리지르고,머리를 벽에 찧었다. 갑자기 화장실 안에서 발작하듯 울부짖는 노아의 모습에 모두가 놀랐고 사람들이 그를 화장실에서 끌어냈을 때는 이미 그가 기절한 뒤였다.

다음날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것이 기억이 났다.

어쩌다 그 무명 여배우를 따라갔는지, 따라가서 무슨일이 있었는지, 작고 좁은 여행 가방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어떤 절망이 그를 뒤덮었는지,

팔다리가 얼마나 아팠으며 나중에 손과 발에 감각이 사라졌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도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남자. 노아는 화장실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그에 대해서도.

그를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따. 그는 자신이 노아를 구했다고 나서지도 않았기 때문에 당시 그 근처에 살았던 그 나이대의 모든 남성의 프로필을 모두 뽑아야 했다.

노아는 그를 찾으면서도 자신이 그를 왜 굳이 찾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구해줬던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래서 뭐. 노아는 여전히 불안하고 불안정했다.

인생에 대해 감사한 마음은 커녕 늘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가고 있었다.

그에게 딱히 감사 인사를 할 것도 아니면서 노아는 그를 찾았고,그가 zii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zii에 엄청난 금액을 후원하며 그를 살폈다.

그리고 열일곱 살.

노아는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이성적으로는 그 공포가 부당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매일매일 숨이 막혔고 멀쩡히 않아 있다가도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나이를 먹고 힘이 강해지고, 이제 그 무명 여배우 따위는 가볍게 손을 꺽어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그때 생각만 하면 병신처럼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노아는 스스로의 그런 모습이 아주 진저리가 나도록 싫었지만 극복할 수 없었다.아무것도 자신을 구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노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누구도 자신을 구하지 않았다.

---그 남자 외에는.

그리고 귀한 아드님이 산산이 부서지듯 망가지는 모습을 보다 못한 그의 부모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메이슨을 경호원으로 부른 것이 지난달 이었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메이슨을 만났다고 해서 노아의 불안한 정서가 금세 변하진 않았다.노아는 딱히 그를 만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한 번 구해줬다고 해도 그는 결국 노아를 두고 떠났다.

어차피 그런 것이다. 그는 노아를 그 작은 가방 안에서 꺼내 목숨을 살려주었지만 노아의 인생을 구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매일매일 얼마나 힘들어하든 그 남자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걸 노아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니 한 번 나타나서 들여다보지도 않았겠지. 딱히 원망할 일도 아니었다.

노아는 남자를 만나며 착각하지 않기 위해 그것을 똑똑히 떠올렸다.

결국 그는 자신을 두고 갈 것이라는 걸. 그와 자신은 남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난 한 달 간은 제법 많은 일이 있었다.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 패닉에 빠지면 옆에서 지키고있던 남자는 노아의 양 어깨를 붙잡고 그가 진정이 될 때까지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노아가 자기 안의 세계에서 나올 때까지 바라보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날리도록 입으로 작은 바람을 불어주었다.

후후, 달래듯이..

악몽을 꾸면서 몸을 떨면,어느샌가 따뜻한 손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슬고슬, 머리카락을 고르며 노아가 완전히 달게 잠이 들때까지 달래주었다.

때때로 긴장해 차갑게 손이 얼면 낮게 혀를 차고선 손을 붙잡아 줄까요.하고 묻는 일도 있었다.

입을 다물고 서서 쳐다보면 가만히 손을 잡아주었다.

한 달은 순식간이었다.지난주,메이슨은 처음 계약대로 다음 주에는 아프간에 가리고 했다고 필에게 말했다.

노아의 부모님도, 필도 그를 붙잡기 위해 여러가지 제안을 했지만 그를 붙잡지는 못해싿.

메이슨은 가족을 잃은 지 오래 되지 않았고 노아의 경호 일처럼 몸이 편한 직업을 한는 것을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아는 그가 가끔 가족사진을 꺼내어 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대도, '다음 주라니,금방이려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였다.

그리고 생각대로 일주일은 금방이었고 메이슨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내일부터는 다란사람이 오게 될 테니 건강히 잘 지내시라고.

"그렇군요,아프간은 위험할 텐데, 약간 염려가 되네요."

노아의 말에 메이슨은 "그쪽이 더 마음은 편할 것 같거든요." 하고 평범하게 말했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다른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군요......"

노아는 무슨 말인가 더 하려고 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메이슨이 금세 인사를 하고 이 방을 나갈 것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할 말이 없었다.

울면 안돼. 노아는 속으로 어린애처럼 생각했다.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 달 간 경호를 하고, 받았을 뿐이었다. 대단한 사이가 아니었고 얄팍하게 존재하던 고용주와 고용인이라는 관계도 지금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순간, 자신이 울면 너무나 이상할 거라는 걸 아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빰으로 떨어지는 눈물, 일렁이는 시야로 메이슨이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어,저......."

당황해서 걸어오는 그를 보며 노아는 입을 벌렸다.

안 가면 안돼요? 아프간 따위, 가지 말고 그냥 내 옆에 있으면 안됩니까? 동정이든 뭐든, 아무래도 좋으니까 제발 가지마세요.

뭐든지 할테니까, 제발......,--노아는 당장에라도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구걸의 말들을 삼켰다.

꾸역꾸역 비어져 나오려는 애원을 삼키고 삼켰다. 뱃속에 울음의 맛이 느껴졌다.

"미안해요. 온을 학교에서 일이 좀 있었는데......."

노아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매달려서 어쩔건데. 자신은 여자도 아니고,열살차이에, 제 정신인 순간보다 제 정신이 아닌 순간이 더 많았다.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애인이든,친구든,가족이든, 서로에게 매달리고 붙들고 그런 관계가 될 수 없었다.

지난 한 달도 돈으로 산 관계일 뿐,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그에게 그것들은 그저 평범한 업무였을 뿐이었다.

알고 있는데, 이건 분명 이상한 장면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노아도 조금 당황했다.

"괜찮으십니까?"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고 노아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저 원래 이상하잖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오늘은 눈물샘이 또 미쳤나보네요.--노아는 살짝 웃으며 말했고 메이슨은 조금 입술을 달싹였다.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것처럼 망설이던 그는 대신 주머니에서 작은 약통을 꺼냈다.

그는 이런걸 주어도 되나 싶은 얼굴을 했지만 곧 그것을 내밀었다.

"이거, 가끔 제가 힘들 때나 먹던 건데 아프간에 가면 아마 이런 건 필요 없을 것 같거든요."

노아는 눈을 깜빡이며 그가 내민 약병을 받아 들었다. 눈물이 후두둑 약병 위로 떨어졌다.

고개를 들자, 그가 약간 다정한 눈으로 말햇다.

"자낙스라고......, 신경안정젠데, 아마 비슷한 걸 이미 드시고 있겠지만 혹시나 싶어서."

노아는 그를 쳐다보다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아....... 고마워요."

울음을 삼키느라 대답 한 마디가 쉽지 않았다.

메이슨은 노아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제법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 주었다.

그냥 가지 그래요, 라는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은 그의 뒷모습이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건강하십시오."

그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노아는 "...... 건강하세요."하고 말했다.

그는 별 미련 없이, 한 번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나갔고 노아는 멍한 얼굴로 아주 오랬동안 그 문을 쳐다봤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창가로 노을이 지고있었고 노아는 메이슨이 주고 간 약명을 쳐다봤다.

툭, 뚜껑을 열고 하얀 알약을 꺼내 입 안에 넣었다.

물 없이 넘긴 알약은  입 안에서 쓴 맛을 남기며 녹다가 목으로 넘어갔다.

노아는 소파 의자에 기대어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약간 어지러워지고 몸이 나른해지면서 곧 잠이 쏟아졌다.

그는 메이슨이 떠나지 않는 꿈을 꾸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