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영웅 사냥. (2)
==============
4048일.
[당신은 죽었습니다.]
4047일.
[당신은 죽었습니다.]
4046일.
[당신은 죽었습니다.]
그건 한 명의 역사를 지우는 일. 영원히 탑에 새겨질 것만 같았던 전설을 지우는 일이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았듯, 염제의 전설도 고작 며칠 만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어려웠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씨발···!”
나는 악을 썼다. 악을 쓰며 나 자신을 죽였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는 떠올렸다. 염제가 내 몸을 불태웠을 때 느낀 그 고통을. 억울함을. 분노를. 자기가 마을을 불태운 주제에 뻔뻔히 돌아와서는 ‘나한테 뭘 줄 거냐’라고 말한 그의 얼굴을.
나를 벌레처럼 깔본 그의 표정을.
‘죽인다!’
푹!
나는 이빨을 꽉 물고 칼을 내 목에 찔렀다.
‘죽여주마, 유수하!’
이건 나를 죽이는 일이었지만.
더 나아가 염제를 죽이는 일이었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4040일.
4039일.
4038일.
4037일···
ㆍ
ㆍ
ㆍ
ㆍ
ㆍ
ㆍ
얼마나 나를 죽였을까.
줄어들지 않는 모래시계처럼 내 작업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염제의 업적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피라미드같이 굳건하게만 보였다.
그 피라미드에 서서히 금이 갔다.
「염제 단독으로 39층 토벌!」
「솔로 플레이로 38층 토벌! 염제의 또 다른 전설!」
「37층 토벌 성공!」
「헌터 유수하. 세계 랭킹 1위에 등극. 한국인으로서 최초.」
「검성의 실종으로 텅 비어버린 랭킹 1위의 옥좌. 다음에 차지할 주인공은 누구? 외국 전문가들 입을 모아 “최유력 후보는 한국의 유수하”.」
「난공불락 10층 돌파. 수수께끼의 영웅은 과연 누구?」
「검성, 실종 22일 차. 헌터 업계 최악의 혼란이 도래하는가.」
자취방 벽에 붙은 신문 쪼가리들.
염제의 역사를 보여주는 그 증명서들이 사라져갔다.
한 장씩.
「솔로 플레이로 38층 토벌! 염제의 또 다른 전설!」
「37층 토벌 성공!」
「헌터 유수하. 세계 랭킹 1위에 등극. 한국인으로서 최초.」
「검성의 실종으로 텅 비어버린 랭킹 1위의 옥좌. 다음에 차지할 주인공은 누구? 외국 전문가들 입을 모아 “최유력 후보는 한국의 유수하”.」
「난공불락 10층 돌파. 수수께끼의 영웅은 과연 누구?」
「검성, 실종 22일 차. 헌터 업계 최악의 혼란이 도래하는가.」
한 장씩.
한 장. 다시 또 한 장.
노인의 이빨이 하나씩 빠지듯 점점 더 벽지가 드러났다.
「37층 토벌 성공!」
「헌터 유수하. 세계 랭킹 1위에 등극. 한국인으로서 최초.」
「검성의 실종으로 텅 비어버린 랭킹 1위의 옥좌. 다음에 차지할 주인공은 누구? 외국 전문가들 입을 모아 “최유력 후보는 한국의 유수하”.」
「난공불락 10층 돌파. 수수께끼의 영웅은 과연 누구?」
「검성, 실종 22일 차. 헌터 업계 최악의 혼란이 도래하는가.」
사라져갔다.
‘보인다!’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한참 남았지만··· 괜찮다. 버틸 수 있다. 영원불멸할 것처럼 보였던 염제. 그 싸이코패스가 결코 영원하지도 않고 불멸하지도 않는다는 것. 오직 이 사실만 확실해진다면.
나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야!’
칼을 휘둘렀다.
휘둘러서, 37층을 토벌한 염제의 시간을 죽였다.
「헌터 유수하. 세계 랭킹 1위에 등극. 한국인으로서 최초.」
「검성의 실종으로 텅 비어버린 랭킹 1위의 옥좌. 다음에 차지할 주인공은 누구? 외국 전문가들 입을 모아 “최유력 후보는 한국의 유수하”.」
「난공불락 10층 돌파. 수수께끼의 영웅은 과연 누구?」
「검성, 실종 22일 차. 헌터 업계 최악의 혼란이 도래하는가.」
나는 다시 칼을 휘둘렀다.
휘둘러서, 세계의 정상에 오른 염제의 시간을 죽였다.
「검성의 실종으로 텅 비어버린 랭킹 1위의 옥좌. 다음에 차지할 주인공은 누구? 외국 전문가들 입을 모아 “최유력 후보는 한국의 유수하”.」
「난공불락 10층 돌파. 수수께끼의 영웅은 과연 누구?」
「검성, 실종 22일 차. 헌터 업계 최악의 혼란이 도래하는가.」
죽였다.
「난공불락 10층 돌파. 수수께끼의 영웅은 과연 누구?」
「검성, 실종 22일 차. 헌터 업계 최악의 혼란이 도래하는가.」
죽였다.
「검성, 실종 22일 차. 헌터 업계 최악의 혼란이 도래하는가.」
마침내.
[당신은 죽었습니다.]
나의 낡은 칼은 어느덧 새것처럼 반짝이게 되었다.
나의 손에서는 주름살이 조금 적어졌다. 나의 자취방은 이사를 반복하여 조금씩 좁아졌다. 젊은 시절로 되돌아갈수록 생활은 빈곤해진 것이다. 잠깐이나마 휴식하려고 화장실을 가 보면 확 젊어진 내 얼굴을 거울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
없었다.
나의 벽에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수많은 신문 기사가 없었다. 잡지 인터뷰가 없었다. 자취방 벽에는 아무런 종이 쪼가리도 걸려 있지 않았다.
공백空白.
염제라는 이름의 역사를 지워버린 것이다.
“해냈다.”
내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돌아왔다···.”
11년 전. 5월 6일.
염제 유수하가 각성하기 한 달 전으로.
나는 회귀했다.
4.
‘망설일 필요가 없다.’
허름한 옷차림.
‘기다릴 필요도 없다.’
초라한 후드티와 츄리닝 바지. 20대 초반에 내가 가진 전부였다. 나는, 내가 가진 전부를 한겹의 갑옷처럼 둘러 입고 외출하였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흥분감은··· 없었다.
‘유수하.’
그놈을 죽이기 전까지는.
‘방심 따윈 하지 않는다.’
4090번.
오늘로 돌아오기 위해서 내가 죽은 횟수였다.
처음 계산했던 것보다 40번이나 더 많이 죽었다. 수천 번 자살하는 데 걸린 시간. 휴식하는 데 걸린 시간까지 다 합치니 그렇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유수하에 대한 모든 것,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오늘 하루. 5월 6일을 열 번이나 반복하여서.
‘오전 11시.’
유수하는 거의 항상 오전 11시에 일어났다. 5월 6일. 이날도 어김없이 오전 11시에 기상했다. 어젯밤에 맥주를 4병이나 빨아서 그런지 일어날 때부터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오후 2시.’
유수하는 월세를 들어 사는 오피스텔을 나와서 사냥터로 향한다. F급 말단 헌터들이 자주 묵는 오피스텔. 말단 헌터들이 사냥하며 잘 죽는다는 점을 노려서, 오피스텔 집주인은 월세를 싸게 내건 대신 보증금을 강하게 걸었다. 장사 수완이 좋았다.
‘오후 3시.’
유수하는 탑 2층 사냥터에서 슬라임 따윌 잡았다. 그렇지만 슬라임만 잡아서는 하루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오후 3시 11분에 유수하는,
“아. 염병. 난 언제쯤 되면 검성처럼 떵떵거리면서 사냐···.”
하고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다시 4분이 지난 오후 3시 15분에는,
“와, 슬라임 사냥하는 거 진짜 재미없네.”
라고 중얼거렸다.
평범한 F급짜리 헌터.
언젠가 일확천금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인생.
그것이 21살의 유수하였다. 32살의 염제가 아니라.
“확 복권이라도 당첨되었으면···.”
얼마 가지 않아, 21살의 유수하는 그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회귀 스킬을 얻자마자 유수하는 자기 능력을 이용해서 복권에 당첨되었다.
상인연합. 이른바 상련(商聯)이라 불리는 길드에선 매주 복권을 발행했다. 탑 안에서 복권을 찍을 수 있는 길드는 상련이 유일했다. 그리고 이 복권에 당첨된 헌터들은 모두 기록에 남았다.
당첨 기록에는, 훗날 염제라고 불리게 될 청년 또한 남아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연속으로 1등에 당첨된 행운아로.
‘그게 오늘로부터 3주 뒤와 4주 뒤.’
하지만.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21살의 유수하에게 그런 미래는 오지 않는다.
‘너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5월 6일. 오후 5시 31분.
유수하는 2층 사냥터를 벗어나 이동했다. 이대로 평생 슬라임만 잡아서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초보자 헌터들이 별로 가지 않는 곳, 조금 더 난이도가 높은 구역으로 향한 것이다.
조금 더 외지고 험악하며.
앞으로 36분간 유수하를 제외하고 아무도 다니지 않을 곳으로.
‘···왔다.’
나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놈이다.’
하품하면서 어슬렁거리는 남자. 유수하.
11년을 거슬러 올라왔는데도 나는 단번에 그놈을 알아봤다. 내 안목이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유수하 저놈이 11년 뒤나 지금이나 외모가 비슷했다.
‘나중에 불로의 영약이라도 구해서 처먹었겠지.’
고맙구나.
네놈이 욕심이 터질 대로 터진 돼지라서!
‘와라.’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긴장감을 꾹 삼키고 입을 열었다.
“거, 거기 헌터님! 살려주십쇼···!”
“어?”
유수하가 내 쪽을 쳐다봤다.
“늑대들한테 습격받았습니다···. 흑. 제발 살려주십쇼. 포션을 좀···.”
나는 온몸에 피칠을 했다. 피범벅이었다. 물론 나의 피가 아니라 미리 사냥해둔 몬스터들의 피였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 지금 내 모습은 죽기 일보 직전의 초보자 헌터일 것이다.
“아, 젠장. 뭐야?”
당연히 유수하의 눈에도 그렇게 비출 거다.
“아저씨가 이쪽 몬스터들 벌써 건드렸어? 빌어먹을. 그럼 오늘 사냥은 텄잖아.”
“포, 포션을 좀···.”
“포션은 무슨 얼어죽을. 내 하루일당도 못 채우게 생겼는데. 하아.”
유수하가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얼마 줄 건데.”
“예?”
“포션값으로 얼마 줄 거냐고. 아저씨. 설마 내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이 비싼 포션을 공짜로 줘야 돼? 생판 처음 보는 아저씨한테? 그건 진짜 아니잖아.”
유수하가 플라스틱병을 꺼내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찰랑. 연금성 길드 마크가 새겨진 병 안에서 피처럼 붉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연금성에서 20골드. 다섯 개 묶음으로 사면 개당 19골드로 팔아주는 회복 포션이었다.
“이, 이십 골드··· 드리겠습니다. 드릴 테니 어서···.”
“와. 이 아저씨 봐라. 욕심이 장난 아니시네.”
유수하가 무릎을 굽혀서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저씨 상황 판단이 안 돼? 지금 댁 죽으려고 하잖아. 죽으려고. 이 포션은 아저씨를 살려줄 물건이고. 그런데 겨우 20골드로 아저씨 목숨을 사고 싶어? 아저씨 목숨은 20골드짜리야?”
“에···.”
“막말로 여기서 내가 확 떠나버리면? 아저씨 그냥 죽는 거야. 죽기 싫으면 목숨값은 제대로 계산하셔야지.”
“······.”
오냐.
알고 있었다.
“사, 사십 골드로···.”
“됐고. 지금 가진 거 다 내놔.”
이런 녀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 하긴. 아저씨는 주고 싶어도 그 꼬라지로는 주지도 못하겠구나. 손도 안 움직이지? 걱정 마. 내가 대신 수금해줄게. 나도 그 정도 서비스 정신은 있거든.”
유수하는 손을 뻗어서 내 품을 뒤졌다. 윗옷 주머니. 후드티 안쪽. 바지 주머니까지 더듬거렸다. 그놈은 기어이 가죽 지갑을 찾아내고 씩 웃었다.
“어디 보자. 1골드, 2골드, 3골드···. 음. 대충 60골드쯤 되나? 아저씨 뭐 이렇게 가난해. 좀 많이 들고 다녀.”
“으. 그건, 제 전 재산···.”
“괜찮아. 내가 잘 써드릴게.”
유수하는 지갑을 챙기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4050일 전, 아니.
4050일 후에 날 불태우면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 사는 게 다 이런 거지, 안 그래?”
읏쌰. 녀석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나한테 주기로 약속한 회복 포션은 도로 집어넣은 채 말이다. 대신 그가 꺼내든 것은 칼이었다.
검劍.
사람을 살려주는 물건이 아니라 정반대로 죽이는 도구.
‘하.’
나는 유수하를 올려봤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그냥,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 시선을 좀 다르게 해석했는지 유수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이,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내가 아저씨한테 포션을 줄까 고민해봤는데··· 여기서 아저씨를 살려주면 나중에 나한테 복수할지도 모르잖아? 그건 안 되거든. 사람이 후환이 없이 살아야 하는데, 아저씨는 내 얼굴을 봤으니까···.”
유수하는 미소 짓고 있었다.
“뒈져주셔야지.”
언젠가 텔레비전으로 뒷모습만 봤던 헌터. 10년 동안이나 영웅으로 숭배했으며, 저 사람처럼 성공하고 싶어서 그토록 질투했던 자.
영웅의 맨얼굴은 추악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다.’
나는 조용히 유수하가 칼을 잡는 모습을 보았다.
‘후환 없이 살아주마.’
녀석이 천천히 칼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오른발을 치켜들어 그놈의 가랑이를 걷어찼다.
“욱!?”
휘청, 칼을 내리찍으려던 유수하의 자세가 아주 잠깐 비틀거렸다. 하지만 나에겐 그 잠깐의 시간만으로도 충분했다. 유수하가 내지른 칼의 경로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다음,
“어?”
그놈의 목을 내 검으로 찔렀다.
“···, ······!?”
나는 유수하와 달랐다. 없애야 할 자, 죽여야 할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쓸데없이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았다. 목을 찔러버린 즉시, 다시 검을 비틀어서 유수하의 턱 아래를 그어버렸다.
“크, 훅···!”
피분수가 뿜어졌다. 내 손은 금세 흥건해졌다. 유수하는 욱, 욱, 신음을 쥐어짜다가 땅바닥에 쓰러지면서 겨우 비명다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악!”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에 불과했다. 곧바로 피거품이 끓으면서 놈의 목이 막혔다.
“읍, 커헉···! 욱···!”
일초가 지날 때마다 유수하는 죽어갔다.
그놈도 자기가 죽어가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유수하는 땅바닥에서 헤엄치다 말고 등을 구부렸다. 자기 양손으로 목의 상처를 막았다. 그렇지만 피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 틈새로 핏물이 더 진하게 흘렀다.
“그래.”
나는 유수하의 목을 꾸욱, 짓밟았다.
“······!”
녀석의 눈동자가 커졌다. 왜. 어째서. 그런 의문과 분노가 눈빛에 실려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곧 꺼져버릴 눈빛. 내가 거기에 대답해줄 필요 따윈 조금도 없었다.
“좋은 경험을 시켜줬다고 생각하마.”
나는 검을 잡았다.
4090번 나를 죽인 검을.
그리고, 휘둘렀다.
괴물을 죽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