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10화 (10/400)

10화.  독주의 시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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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침에 눈을 뜰 때 제일 짜증 나는 상황은 뭘까.

어젯밤에 맞춰둔 스마트폰 알람이 유독 시끄럽게 울리는 거?

밤새 개기름이 머리카락에 덕지덕지 묻어서 가만히 있기만 해도 끈적거리는 거?

그냥 오늘 하루도 또 일해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

-일어나! 얼른 깨지 못해!

“아, 제발 좀···.”

-지금부터 네놈이 일어날 때까지 내 고향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를 들려주마. 참고로 나는 생전엔 음공(音攻)도 익혔거든? 내가 노래 한 소절 부르면 인마, 잡졸들은 삼십 명씩 대가리가 터져나갔어!

전부 아니다.

웬 성불하지도 못한 귀신놈이 나불거리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벌써 시간이 몇 시인 줄 알고 침대에 누워 있냐!

“도대체 몇 시인데요?”

뜬눈으로 스마트폰을 살펴봤다.

잠금화면엔 멋진 글씨체로 AM 4:01이 적혀 있었다.

“아직 새벽 네 시잖아요, 미친놈 씨!”

-어허. 새벽 네 시면 벌레들도 일어나서 꿈틀거릴 때란다. 넌 벌레보다 약하니까 더 일찍 일어나야지.

“그냥 댁이 잠을 못 자니까 심심해서 그런 거겠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나.

배후령은 뭔가 찔리는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와. 왜 검성이 새벽 네 시마다 일어나서 수련하나 싶었는데. 성실해서 그런 게 아니라 댁이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였네!”

-그래. 나 혼자 심심해서 깨웠다. 됐냐? 덕분에 일찍 일어나서 수련하면 개이득이니까 이것도 다 감사를 받아야 할 일이야. 어서 엎드려서 절해라.

“주, 죽이고 싶다···.”

-흐흐. 난 이미 뒈진 몸이라서 못 죽이지. 꼬우면 너도 죽어보시든가! 아, 하긴 넌 죽어도 못 죽는구나. 이런 좀비 같은 새끼. 네 이름은 이제부터 김공자가 아니라 김좀비다.

“젠장.”

나는 대충 운동복을 차려입고 나왔다. 2평짜리 쪽방에서 귀신이 쉬지도 않고 떠들어대니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자취방을 나온 다음, 아직 어두운 새벽하늘 아래에서 조깅했다.

“후욱, 후우···.”

-김좀비야. 다시 말하는데 넌 악바리 근성 말고는 재능이 없어.

배후령이 두둥실 날아서 내 옆에 따라붙었다.

-원래 내가 진득하게 바닥부터 가르치는 걸 선호하거든. 근데 넌 바닥이 없단다. 바닥의 바닥이라고 해야 할까?

검성한테서 [검의 성좌] 스킬을 복사한 지 어느덧 사흘째.

그동안 유수하를 한 번 더 사냥했고, 검성과 마주치는 것을 열심히 피했다. 지금은 배후령이 직접 짜준 스케줄에 따라 훈련하는 중이었다.

-재능으로 따지면 너는 이른바 심연의 재능을 가진 셈이지. 크으. 멋있다! 부럽다!

“후욱··· 사람이 뛰는데, 방해하지··· 후우. 맙시다···!”

-뭐. 요컨대 특별 과외가 필요하다 이 말씀이야. 특별 과외를 받으려면 먼저 비싼 수강료를 준비해둬야 하고.

배후령이 씩 웃었다.

-슬슬 복권 타러 가야지, 좀비야.

2.

상련이라는 길드가 있다.

상인연합의 준말. 길드장은 랭킹 3위의 헌터, 통칭 ‘백작’.

언제 한번 언급했다시피 백작은 유일하게 바깥세상에 물건을 내보내거나 들여보낼 수 있다.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일인 기업이라고 할까? 이 개사기 스킬 덕택에 상련은 탑 안의 경제를 독점하고 있다.

무슨 말이냐면.

“저기요.”

“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복권 당첨금 타러 왔는데요.”

탑 1층 도시, 바빌론에서 복권을 발행하는 곳도 상련이 유일하다는 거다.

“아. 저희 상련행복복권에 당첨되셨군요!”

“예에, 뭐.”

“축하드립니다!”

고양이 귀 모자를 쓴 점원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해바라기처럼 화사한 영업용 스마일은 덤이었다.

-야. 나 볼 때마다 궁금한 건데 고양이 귀 모자는 왜 쓰는 거냐?

‘상련장이 고양이 집사래요.’

-아무리 고양이가 좋다고 해도 그렇지 멀쩡한 사람한테 고양이 귀를 씌워? 그놈은 틀림없이 변태 새끼일 거야. 장담해도 좋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물론 눈앞의 점원도 마음속으로는 고양이 귀 모자를 병X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점원은 을 오브 을. 고양이 귀든 바퀴벌레 더듬이든 길드장이 입으라면 닥치고 입을 수밖에 없었다.

아, 참고로 점원은 남자였다.

남녀 공용 유니폼이거든. 저거···.

“실례지만 날짜는 확인하셨나요, 손님? 구매한 지 2년이 지난 복권은 죄송하지만 당첨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지난주 복권이니까요.”

“다행이군요!”

배후령한테 씌인 다음 곧바로 구매한 복권이었다. 어차피 한 번쯤은 복권에 당첨될 필요가 있었을뿐더러, 배후령이 줄기차게 ‘일단 자본금이 있어야 한다!’ 하고 떠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원 확인 절차에 들어가겠습니다. 아, 참. 몇 등에 당첨되셨나요?”

“1등이요.”

“네?”

점원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1등 당첨입니다.”

“······.”

“여기 번호 확인해주시죠.”

점원의 머리 위에는 전광판이 걸려 있었다. [상련 행복복권 1등 당첨금액]이라 적힌 전광판에는, 마치 카지노의 슬롯머신처럼 여태까지 이월된 금액이 깜빡였다.

5만 3천 골드.

내 고향에서 쓰던 화폐로 치자면 약 55억 원.

-야. 돈 벌기 참 쉽다. 그치?

일순 조용해진 주변에 배후령의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렀다.

점원이 당황한 표정인 채로 말했다.

“···번호 확인했습니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손님. 바로 담당자를 불러오겠습니다.”

“예에. 천천히 다녀오십쇼.”

점원이 헐레벌떡 어디론가 걸어갔다.

상련 본부 건물.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이쪽을 훔쳐보는 것이 느껴졌다. 1등 당첨이라는 소리를 얼핏 들었겠지. 다들 나를 부러워하는 눈빛이었다.

-좀비야, 괜찮냐? 너 이러다 어디 으슥한 골목길에서 칼빵 맞는 거 아냐?

“다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는 것도 아니고요.”

복권에 당첨된 헌터는 모두 기록에 남았다. 염제 유수하도 마찬가지. 그래서 녀석이 과거에 2번 연속으로 1등을 타먹었다는 사실을 나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알려질 거면 아예 대놓고 드러내는 편이 안전하지.’

복권에 당첨되어봤자 바로 암살을 당하더라.

만일 그런 소문이 퍼지면 이미지에 타격을 받는 쪽은, 다름 아니라 복권을 마구 팔아야 하는 상련 쪽이니까.

잠시 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김공자 님. 제가 담당자인 아서 테일러입니다.”

접수원보다 한결 더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다가와서 허리를 숙였다. 이게 무척 정중한 인사였다.

고양이 귀 모자를 착용했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지만.

“이명은 ‘금고지기’입니다. 편하게 이명으로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공자입니다. 소속하신 길드에 되게 잘 어울리는 이명이네요.”

“하하!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럼 저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시지요.”

금고지기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저래 보여도 이명을 가졌다면 최소 랭킹 300위 안에 드는 헌터. 아직 F급에 불과한 내가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랭커였지만, 금고지기는 시종일관 내게 공손했다.

-그야 자그마치 5만 골드짜리 고객님인데 당연하지.

귀신놈이 또 산통을 깼다.

-좀비야,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거든? 넌 아무래도 대접받으면서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너무 쉽게 감격하는 거 같아. 며칠 전에도 너한테 죽는 재능이 있다고 칭찬하니까 막 감동한 표정을 짓고. 보는 내가 다 불쌍하지 뭐냐.

‘아. 닥쳐요, 제발. 좀.’

-인간이 그렇게 쉬우면 안 돼, 인마. 날 본받으라고. 세상 사람들은 전부 나를 떠받들기 위해 존재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거라.

내가 아무리 쪼들려도 유수하랑 당신만은 죽어도 본받지 않을 거다.

마침 유수하도 이 귀신도 이명이 비슷비슷했다. 염제. 검제. 어쩌면 이명이 제(帝)로 끝나는 것들은 전부 또라이 정신병자인 거 아닐까.

“저, 김공자 님. 죄송합니다. 어딘가 불편하신 점이라도···?”

나를 위층으로 안내하다가 금고지기가 말했다. 자신이 뭘 잘못했나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정신 나간 놈으로 보일까봐 얼른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냥 잠깐 딴생각에 잠겨서요.”

“아. 다행이군요.”

금고지기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셔서 제가 모르는 사이에 무례를 범했나 걱정했습니다. 하하. 아니라고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놓이네요···.”

뭐지. 이 사람? 혹시 천사인가?

-쯔쯧. 참 쉽다, 쉬워.

싸이코패스 귀신의 잔소리는 무시했다.

우리는 VIP 접견실로 들어갔다. 접견실 테이블에 이미 금화더미가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점원이 미리 와서 준비해놓고 간 모양이었다.

금고지기가 빙긋 웃었다.

“전부 김공자 고객님께서 가지실 금액입니다.”

“···굉장하네요.”

무려 5만 개가 넘는 금화!

그것들이 일제히 조명을 받자 방안이 환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에 피가 돌았다. 연출인지 뭔지 몰라도 확실히 압도적이었다.

“이 금화를 모두 가져가셔도 좋고, 아니면 저희 상련에 금고를 장만하신 다음 보관해도 좋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나는 제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역시 돈의 마력이란 대단하다.’

솔직히 군침이 돌긴 했다.

하지만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최정상에 서는 것. 만인의 부러움을 독차지할 정도로 잘난 헌터가 되는 것이었다. 돈은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돈을 휘두르는 인간이 되어야지, 돈에 휘둘리는 인간이 되지 말자. 김공자.’

침착함을 되찾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련 금고에 보관하겠습니다.”

“아. 정말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고객님!”

금고지기가 반색했다.

“저 개인적으로는 당첨자 여러분께 항상 말씀드립니다. 직접 가져가고 싶으신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되도록 상련 금고를 강하게 추천드린다고요. 못된 마음을 먹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으니···.”

“그리고.”

내가 입을 열었다.

“상련 명예 길드원 지위를 사고 싶습니다.”

“예?”

“2급 명예직을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이 1만 골드죠?”

나는 테이블에 다가가서 금화더미에 손을 올렸다. 황금빛. 인간을 현혹하는 색깔이 번쩍거렸다. 하지만 나는 똑같은 황금색이면서도 훨씬 더 매혹적인 불길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의 미래.

미래를 위해서라면, 이런 금화는 얼마든지 투자할 것이다.

“일시불로 사겠습니다.”

“······.”

금고지기가 잠시간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김공자 고객님께선··· 아직 가입하신 길드가 따로 없으시지요?”

“예.”

길드.

헌터가 어떤 길드에 드는 것은 단순히 친목질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가장 큰 의의는 길드의 [보호]를 받는 것에 있었다.

비록 헌터관리국이나 자경단이 있다고는 해도···.

‘아차 하는 순간에 공격당할지 몰라.’

염제와 검성이 나를 살해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무법천지. 바깥세상의 선진국에 비하면 이곳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어리석게 염제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돼.’

염제는 지 혼자 잘난 맛에 살았다.

복권에 연속으로 당첨된 다음에도 유수하는 어디에도 [보호세]를 내지 않았을 거다. 빤히 보였다. 그냥 다 자기 돈이라면서 신나게 살았으리라.

‘그러니까 나중에 암살당하고 독살당하지.’

한심하게 말이다.

쓸데없이 거대 길드들과 척을 질 필요가 뭐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금고지기가 수첩을 꺼내서 뭔가를 적었다.

“누구나 정해진 가격을 내면 저희 길드의 명예회원이 될 수 있지요. 바로 직원을 시켜서 2급 명예회원증을 발급해드리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나는 마저 필요한 사항들을 말했다.

“지금 제가 값싼 자취방에서 사는데요. 당분간 머무를 수 있도록 상련에서 숙소를 추천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돈은 제대로 내겠습니다.”

“······.”

“또, 아마 신문사에서 1등 당첨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할 건데. 그때 실명은 밝히지 않더라도 꼭 상련 명예회원이라는 사실은 기자한테 알려주시면 좋겠네요.”

금고지기는 내가 말한 사안들을 수첩에 적다가 아주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처, 철저하시군요. 고객님.”

“어휴.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요. 이 정도 대비는 해둬야죠.”

“···옳으신 말씀입니다.”

금고지기 뒤에서 배후령이 배꼽을 잡고 낄낄 웃었다.

-야. 얘 너 호구로 취급하다가 조금 허를 찔린 표정이다. 이거 꿀맛인데. 이래서 내가 엘리트들 놀리는 재미를 놓칠 수가 없지.

‘아니. 애당초 저보고 사람이 쉽다면서 쯧쯧거린 건 댁이잖아요. 웬 내로남불입니까.’

-내가 그랬어? 잘 모르겠네.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아마 아닐 거야.

맙소사. 인성이 더러워도 이렇게 더러울 수가.

난 절대로 저런 혐성은 되지 말아야지.

-뭐, 아무튼 혼자서도 그럭저럭 잘하네.

배후령이 씩 웃었다.

-갓난아기 돌보는 것처럼 내가 기저귀까지 챙겨줘야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지금 하는 거 보니까 괜찮겠다.

‘말이라도 못 하면 밉지라도 않지···.’

-짜식. 너도 기분 좋아 보이는구먼, 뭘.

그렇다.

마음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내 입가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연하죠. 이제부터 시작인걸요.’

4000번의 죽음과 4000일의 회귀.

염제한테 복수하느라 제대로 쓰지 못한 회귀의 특권.

이제는 그걸 당당히 누릴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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