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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S급 자살헌터-11화 (11/400)

11화.  독주의 시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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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좀비야. 과외 수업을 받으려면 뭐가 제일 중요한지 아냐?

“일단 저를 좀비라고 부르는 것 좀 그만해줬으면 좋겠는데요.”

-바로 수강료란다.

상련 본부에서 할 일을 다 마치고 우리는 나왔다.

대낮. 점심이 가까워지자 길거리도 활기찼다. 일선에서 은퇴한 헌터들이 음식점이나 잡화점 따위를 열어서 열심히 호객했다.

물론 그중에는 파리만 날리는 가게도 많았다. 그런 가게에선 꼭 주인장들이 문가에 앉아서 멍- 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될놈될. 안될안. 잔인하지만 바깥세상에서나 바빌론에서나 변치 않는 진리였다.

-그리고 넌 방금 수강료를 확보했지. 자아, 이제 뭐가 있어야 할까?

“음. 실력 좋은 과외 선생?”

-어허. 그건 이미 네 눈앞에 계시고.

배후령이 뻔뻔하게 말했다.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말이다.

-좋은 참고서! 너의 성장을 빠르게 도와줄 교과서가 필요하지.

“교과서···.”

-응. 비급서나 영약 같은 거. 근데 비급서를 읽어봤자 지금 네 수준으로 이해할 리가 없거든? 결국 존나게 비싼 영약들을 긁어모으는 수밖에 답이 없어.

이 양반은 맞는 말을 해도 꼭 얄밉게 한다니까.

-참고로 난 싸구려 영약은 취급 안 해. 왜, 연금성이라 하던가? 의사들이랑 약사들이 가입하는 길드 있더구먼. 거기서 최고급 장인들이 제조한 영약만 구해와라.

“엑.”

-가게가 어디 있는지는 내가 알고 있으니 걱정 말고. 마르쿠스 할아범도 자주 들르는 곳이 있걸랑. 거기 가서 영약들을 싹쓸이하면···.

“자,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응? 왜?

내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길거리 행인들이 근처를 지나쳤기 때문이다.

“···그런 영약들은 진짜 어마무시하게 비싸지 않아요?”

-당연히 어마무시하게 비싸지. 부르는 게 값인데. 아마 가격 들으면 억! 소리 날걸.

배후령은 실실 웃었다.

-대충 얼마인지 알려줄까?

“···한번 들어나 보죠.”

배후령이 내 귓가에 소곤거렸다. 가격을 듣고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값이 나가지 뭔가.

“지금 남은 돈을 다 쏟아부어도 4개 정도밖에 못 사잖아요!?”

-낄낄. 한꺼번에 사면 할인 좀 받아서 5개쯤은 주문할 수 있을 거야. 걔네가 장사할 줄 알더라고. 이래서 돈맛 본 의사들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너, 너무 비싸···.”

세상에. 이래서야 또 가난해지게 생겼다. 1등 복권에 당첨되었으니 넉넉하게 살겠거니 싶었는데.

-뭐. 기껏 벌어들인 돈이 쉽게 나가는 거 같아서 아까울 수도 있다만 뭐 어쩌겠냐? 네 재능이 부족해서 생기는 비극인데. 이것도 전부 네 팔자려니 생각··· 음!

배후령의 얼굴이 굳어졌다.

-공자야. 숨어라.

“예?”

-어서.

목소리가 진지했다. 나도 모르게 근처의 양철 쓰레기통 뒤에 숨었다. 비리고 쉰 냄새. 식당에서 음식물 찌꺼기를 버리는 데 쓰는 쓰레기통이었다.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일인데 갑자기 숨으라 그래요?”

-조심해. 마르쿠스 할아범이야.

“······.”

나는 숨을 죽였다. 조심히, 쓰레기통 너머로 길거리를 훔쳐봤다. 백발을 뒤로 묶은 노인. 현 시대 랭킹 1위이자 [탐정의 혜안]을 가진 검성이 저 멀리서 걸어가고 있었다.

‘들키면 골치 아파진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 긴장감이 전해진 것일까. 배후령도 투 머치 토커 기질을 버리고 한동안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우리 둘은 나란히 쓰레기통에 숨어서 검성을 눈으로 좇았다.

“···또, ···시끄···.”

다행히 검성은 이쪽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노인은 여느 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어디론가 향했다.

-에이, 씨.

검성이 어느 건물에 들어가는 걸 보고 배후령이 인상을 찡그렸다.

-쯧! 텄네. 저기가 제일 좋은 가게인데.

“제일 좋은 가게요?”

-영약 말이야, 영약. 그나마 제일 잘 제조하는 약제사가 저기에 가게를 차렸어. 아. 진짜! 쟤 빼고는 다 허접한 약팔이라고. 웬만하면 저기서 사야 하는데···!

배후령이 발을 동동 굴렀다. 이 귀신이 진심으로 분해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나는 그 옆에서 골똘히 고민에 잠겼다.

‘검성이랑 똑같은 가게를 사용하는 건 위험 부담이 너무 커. 하지만, 좋은 영약을 만들 줄 아는 약제사라.’

나는 스마트폰으로 상위 랭커들을 검색했다.

1위부터 시작해서 목록이 주르륵 떴다.

+

1위. 검성 / 소속: 없음.

2위. 흑색마녀 / 소속: 흑룡(길드장).

3위. 백작 / 소속: 상인연합(길드장).

4위. 이단심문관 / 소속: 만신전(길드장).

5위. 독사 / 소속: 천무문(길드장).

6위. 바벨의 언어사 / 소속: 만학(부길드장).

7위. 광역통신사 / 소속: 환문신문(부길드장).

8위. 성기사 / 소속: 자경단(부길드장).

+

“없다.”

내가 툭 던지듯 중얼거렸다.

계속 발을 둥둥 굴리고 있던 배후령이 내 혼잣말에 반응했다.

-어? 뭐가 없어? 네 행운이?

“아니요. 오히려 정반대라고 봐야죠.”

행운이 없기는커녕 아예 넘쳐 흘렀다.

“생각보다 돈이 별로 안 들지도 몰라요.”

-뭐?

“최고급 영약을 구하는 데 푼돈만 써도 될 것 같다고요.”

내가 씩 웃었다.

“엄청 좋은 약제사를 한 명 알고 있거든요.”

우리는 번화가를 벗어나서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가난한 동네. 돈벌이가 힘들어 낡은 곳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한마디로 말해서 할렘가에 가까운 동네였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이쪽을 쳐다보는 헌터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여기에 진짜 실력 좋은 약제사가 산다고?

배후령은 못 믿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평범하게 실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역대급으로 재능이 넘치는 약제사죠.”

-구라 좀 작작 쳐라. 그런 재능을 가진 인간이 왜 이딴 곳에서 지내겠어?

“아, 믿기 싫음 마시던가요.”

골목실 저편에서 쯔쯧, 혀를 차는 소리들이 들렸다. 이쪽을 쳐다보던 헌터들이 고개를 돌린 것이었다.

내가 혼잣말하는 모습을 보고 정신병자로 착각했겠지. 이런 할렘가는 치안이 최악이었지만 웬만해선 정신병자를 건드리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피식 웃었다.

‘지금 내 지갑이 금화로 가득찼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되려나?’

뻔했다. 눈이 돌아가서 짐승처럼 달려들 거다.

물론 나의 지갑 사정을 저들한테 친절히 밝혀줄 의리는 없었다. 어디선가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나는 더욱더 깊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 건 그 쯤이었다.

“제, 제발 제 실험 도구만은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젊은 사람의 목소리.

거기에 뒤이어서 거친 말투들이 울렸다.

“지금이 벌써 몇 번째인데 그딴 소리를 하고 있어!”

“납기일이 지난 지 벌써 반년이야. 그럼 대가를 치러야지.”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거미줄의 중심처럼 골목길과 골목길이 교차하는 지점. 조금이나마 탁 트인 그곳에는 허름한 가게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사람들이 다투고 있는 곳도 거기였다.

“읏. 도, 도구들까지 다 가져가면··· 전 정말로 먹고살 수가···.”

“됐어, 더 볼 것도 없어. 싹 다 가져가!”

덩치 좋은 깡패들이 리어카에 기계들을 착착 실었다. 20대 후반쯤 되었을까? 저 낡은 가게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어떻게든 손수레를 붙잡으며 애원했다.

“일주일! 일주일만 더 주세요. 아니, 5일만 더 주시면···.”

“그 일주일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반년이 된 거 아냐!”

퍽. 깡패들이 리어카를 밀어젖히자, 가게 주인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길바닥에 엎어졌다. 무릎이 까지면서도 가게 주인은 리어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 아직, 완성하지 못한 물약이···!”

“어휴. 웬 미친 약제사한테 물려가지고. 아가씨! 내가 정말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절대 다시는 약 만드는 일에 얼씬거리지도 마!”

리어카는 삐그덕거리며 골목길로 사라졌다.

이곳에 남은 것은 무릎을 꿇은 채 절망하는 가게 주인. 그리고 나를 포함해서 이 사달을 구경하러 기어 나온 동네 사람들밖에 없었다. 구경꾼들이 수군거렸다.

“쯔쯔. 저 가게 언제 망할 것 같더라니까.”

“물약이 비싸도 너무 비싸잖아. 무슨 체력 포션 하나가 40골드야?”

“어린 나이에 장사를 우습게 본 거지···.”

구경꾼들의 얘기가 들린 걸까.

망연자실하게 땅만 쳐다보고 있던 가게 주인이 휙! 고개를 치켜들었다.

“비, 비싸다뇨! 전 거의 원가밖에 안 받아요!”

몰골이 꽤 처참했다. 며칠째 머리를 안 감았는지 긴 머리가 떡져 있었다. 얼굴에 쓴 안경도 오래된 골동품처럼 낡았다. 목소리마저 까랑까랑하여서, 옥 굴러가는 소리가 아니라 옥이 깨지는 소리에 가까웠다.

“이런 가격에 이만한 물약을 제공하는 가게는 바빌론에서 우리 가게밖에 없다구요! 오, 오히려 여기같이 형편없는 동네에 가게를 차려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받아도 모자라요! 예!”

“어이고, 저것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갑세. 나 참. 자기는 뭐 잘났다고 큰소리를···.”

구경꾼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흩어졌다.

불호(不好)!

어딜 어떻게 봐도 도저히 호감이 생길 것 같지 않은 가게 주인이 그곳에 있었다.

“앗···. 자, 잠시만요. 여러분. 이왕 여기까지 모이신 거 체력 포션 한 병이라도···. 제 특제 포션 한방이면 다 죽어가던 헌터도 팔딱거려요.”

“아. 안 사요, 안 사!”

가게 주인이 뒤늦게 구경꾼들을 붙잡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한참 전에 엎어진 물. 구경꾼들은 서로 욕지거리를 흘리면서 금세 사라졌다.

“정말로 효과 좋은데··· 거짓말이 아닌데···.”

결국 가게 주인은 털퍼덕 주저앉았다.

-야.

눈앞에서 벌어진 꼬락서니를 다 관람하고 배후령이 중얼거렸다.

-설마 네가 말한 ‘역대급 약제사’라는 게··· 저 찐따는 아니지?

“맞다고 하면 어쩔 건데요?”

-진지하게 네 정신 상태를 걱정할 거다. 얘가 4000번 넘게 죽었더니 뇌까지 이상해졌구나, 하고. 그런 다음 바빌론에서 제일 실력 좋은 정신상담사를 소개해주마.

내가 코웃음 쳤다.

“귀신이 보이는 시점에서 이미 정신 상태는 걱정해야죠. 저 주인, 역대급 약제사가 맞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쇼.”

-역대급 약제사가 아니라 역대급 찐따겠지! 미친놈아!

배후령이 시끄럽게 굴었으나 무시했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가게 주인을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기요.”

“으···?”

가게주인이 나를 올려다봤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행색이 초라했다. 어디서 주워온 옷을 입었는지 상의와 하의가 전부 길었다. 그나마 하얀 가운을 걸쳐서 ‘아, 거지가 아니라 약제사인가 보네’라고 겨우 알아볼 정도.

“사장님. 아직 장사하시죠?”

물론, 이 사람은 거지가 아니었다.

평범한 약제사는 더더욱 아니었다.

“아직 장사하시는 거라면 물약 좀 주문하고 싶습니다.”

연금성주(鍊金省主).

훗날, 랭킹 5위로 올라서게 될 약제사.

지금 시점에선 랭킹 밖에 있지만 반드시 대성하게 될 사람이었다.

“조금 비싼 물약들인데 상관없습니까.”

“아, 네. 네! 당연하죠! 뭐든지 만들어드릴 수 있어요!”

약제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방금 전 가게가 망하게 생겼는데 천만다행으로 비싼 물약을 시키겠다는 손님이 왔다. 그야 기사회생한 기분이 들 법했다.

“저, 그런데 비싸다면 얼마나 비싼 거로···?”

“글쎄.”

미래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감히 주문할 엄두가 안 나는 약제사였지만, 이번엔 달랐다.

“일단 2만 골드 어치 정도는 사고 싶은데요.”

“······.”

약제사가 입을 벌렸다.

몰골이 좀 처참하면 뭐 어떻단 말인가. 내겐 눈앞의 약제사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보이기만 했다. 그것도 순금 100%짜리 황금알!

나는 미소를 지었다.

“뭐 하세요? 주문받으셔야죠, 사장님.”

아예 뼛속까지 단골손님이 되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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