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15화 (15/400)

15화.  너도 스킬이 있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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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주일이 지났다.

-고르르···.

냄비 끓는 소리를 내며 몬스터가 휘청거렸다. 대왕 고블린. 5층 사냥터의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는 몬스터가 결국은 목젖이 따인 채 쓰러졌다.

나는 비장한 얼굴로 대왕 고블린의 시체를 내려보았다.

“고르.”

지난 일주일을 통틀어서 눈앞의 몬스터가 제일 강적이었다. 아, 이 괴물을 잡기 위해서 몇 번이나 죽었던가? 나는 한 명의 명예로운 전사가 되어 라이벌을 떠나보내는 심정으로 대왕 고블린을···.

-지랄하고 있네. 또라이 좀비 같으니.

“아. 좀. 6코인 만에 겨우 사냥했잖아요. 감상에 잠기게 가만히 두면 안 됩니까?”

참고로 6코인이란 내가 6번 목숨을 걸었다는 뜻. 지금이 6코인째이니 그동안 대왕 고블린을 잡느라 5번 죽은 셈이었다.

배후령이 콧방귀를 뀌었다.

-몬스터 하나 잡았다고 감상에 잠기면 그게 또라이지 뭐야. 난 팩트밖에 안 말해.

“와, 그러시구나. 우리 검제님 인성도 참 좋으셔.”

배후령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것에서 이미 알겠으나, 나는 어느덧 오러에 익숙해졌다. 지금도 영약의 효과로 시간은 느릿느릿 흐르고 있었다.

다만 내가 오러를 혀에 집중하여서 평소보다 ‘훨씬 빨리’ 말하고 있을 뿐.

“고르륵.”

정면승부가 아니라 야바위를 써서 이긴 거지만.

나는 똥색 카드 한 장을 꺼내어 확인했다.

+

[고블린 상류사회]

랭크: F

효과: 대왕 고블린은 고심했습니다. ‘우리 고블린의 문화는 수준이 너무 낮다. 모든 언어가 케르륵, 케륵, 으로 끝나다니. 이래서는 본좌의 위엄을 빛낼 수가 없지 않은가!’ 그 때. 대왕 고블린의 천재성이 번뜩였습니다. ‘그렇다! 이제부터 본좌는 케륵이 아니라 고륵이라 말하겠노라. 고륵! 본좌의 고상한 감성에 어울리는 발음이로다.’

※단, 부족 내의 갈등이 심해집니다.

※몬스터 대왕 고블린으로부터 복사한 스킬입니다.

+

내가 혀를 찼다.

“고블린들도 참 쓰잘데기없는 걸 신경 쓰네요. 케륵이든 고륵이든 그게 그거인데.”

-그러니까 고블린이지. 인간도 별다를 거 없고.

“네?”

-뭐, 혼잣말이다.

무슨 뜻이느냐 물으려는 순간,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의 존재가 한층 더 뚜렷해집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

하지만 나는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수많은 헌터들이 인터뷰에서 증언했고, 심지어 개인 동영상으로 직접 보여주기까지 했으니까.

“드, 드디어!”

바로 레벨업!

[헌터 김공자의 레벨이 성장합니다.]

“아···.”

감격스러웠다. 일평생 F급짜리 헌터로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지 모른다며 불안해했다. 하지만 복제 스킬과 회귀 스킬을 얻고, 수많은 고통을 뛰어넘어··· 마침내 나한테도 레벨업의 순간이 도래했다.

[스킬 슬롯이 확장됩니다!]

[이제 당신의 헌터 랭크는 E급입니다!]

비록 아직은 E급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화르륵!

발밑에서 붉은색 오러가 확 치솟았다. 불길. 혹은 단순히 빨간 물줄기를 닮은 그것은, 한 차례 내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다시 아래로 흘러내려 사라졌다.

-···불꽃인가?

배후령이 앞에서 미간을 좁혔다.

-아니, 핏물? 쯥. 헷갈리네. 불꽃이거나 피 같은데···.

“방금 그게 레벨업 이펙트였죠?”

-단순히 보기 멋있으라고 있는 이펙트는 아니지.

배후령이 뒤통수를 긁었다.

-일종의 힌트야.

“힌트요?”

-음. 레벨업할 때 어떤 이펙트가 발현되느냐에 따라 [오러의 형태]가 정해지거든. 가령 네가 죽인 염제라는 놈 있잖아. 그놈은 틀림없이 [불]이 자기 오러의 형태였을걸.

“불꽃이라.”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염제가 어느 슬럼가 골목에서 성녀를 불태워 죽이던 광경. 다시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기분 나쁜 기억이었지만···. 확실히 유수하는 화염이라는 형태로 오러를 다루었을 것 같다.

-오러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는 보통 헌터의 트라우마에 따라 결정돼.

트라우마.

-자기 인생을 결정지을 만큼 중대한 사건. 장면. 기억. 그런 것이 오러의 형태로 나타나는 거지. 무의식의 모습이라고 할까? 뭐, 꼭 부정적인 트라우마일 필요는 없지만. 대체로 그래.

“과연.”

-내가 볼 때 좀비 너는 불길 아니면 핏물이야.

얘기를 듣다 보니 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면··· 검성은 오러가 어떤 형태인데요?”

-달빛.

배후령이 툭 던지듯 말했다.

-마르쿠스 할아범이 어린 시절 산속에서 길을 잃었대. 죽기 싫어서 바득바득 산꼭대기에 올라갔는데, 정상에 가까워지니까 밤하늘을 가린 나뭇잎들이 점점 드문드문해졌다는 거야. 마침내 산꼭대기에 오르니까, 시커먼 밤하늘이 환히 펼쳐져서.

월광(月光).

-그 순간 생각했다더군. 저 달은, 혼자서 스스로 빛나는 게 아니라 태양의 빛을 받아들일 뿐인데,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삶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구나. 아. 나도 달빛처럼 받아들임으로써 빛나고 싶다.

“······.”

-그게 무척 인상이 깊어서 평생 마음속에 담아두고 살았다는데.

나는 듣다가 어이가 없어졌다.

“어린 시절이었다면서요?”

-엉. 12살 때라더라.

“어떤 12살짜리 꼬마가 그렇게 깊은 생각을 해요?”

배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마르쿠스 할아범이 타고난 꼰대지. 쯧쯧. 난 12살 때 어떻게 하면 눈앞의 깡패 새끼를 효율적으로 줘패버릴 수 있을까만 생각했거든.

“아니, 그것도 좀··· 정상은 아니신 듯···.”

검성이 타고난 꼰대라면 눈앞의 배후령은 뭘까? 타고난 양아치?

-아무튼 5층도 익숙해졌다. 6층 사냥터로 올라가자.

“아, 그거 말인데요.”

내가 말했다.

“그냥 바로 10층 보스 공략하면 안 됩니까?”

-뭐?

“몬스터 스킬을 복제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고. 오러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제가 보기에는 충분히 10층 보스도 잡을 수 있어요.”

배후령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매서웠다.

-김공자. 애송이 주제에 벌써 자만하기 시작한 거 아니냐?

“절대 아닙니다.”

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10층!

우리 세계에서는 지난 수년 동안 10층을 공략하지 못했다. 난공불락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런 고난이도 구역을 감히 클리어하겠다고 말했으니, 배후령 입장에선 충분히 우려할 법했다.

“진짜 자신 있어요.”

하지만 나는 정말로 공략할 자신이 있었다.

아니, 확신이 들었다.

“만약 제가 2코인 안에 10층 보스를 못 잡으면 댁을 스승님이라 불러드리죠.”

-어? 2코인?

배후령은 갑자기 혹한 표정이 되었다.

-고작 고블린 두목 잡는 데 6코인 걸린 놈이 10층 보스를 2코인만에 잡겠다고? 진짜? 너 모르는 모양인데 나는 내기에서 봐준 적이 없어.

“단! 조건이 있습니다.”

-응?

내가 검지를 들었다.

“10층 보스가 어떤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 저한테 숨기지 말고 다 말해주기. 이건 거짓말치면 안 됩니다. 카드를 속이는 것도 금지예요.”

-흐음. 뭐 그 정도쯤이야···.

“그리고!”

나는 씩 웃었다.

“제가 이기면 절 공자님이라 부르십쇼. 최대한 공손하게. 예의와 예절을 갖추어서요.”

-······.

“왜요? 쫄? 에이. 쫄리면 관두시든가.”

꿈틀.

양아치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나 뽑으라면 바로 ‘쫄리냐?’ 일 거다. 그리고 배후령은 보통 양아치가 아니었다. 자그마치 99층까지 공략한 이세계 최강의 양아치였던 거다.

배후령은 안면 근육이 꿈틀거렸다.

-카악, 퉷! 이 천둥벌거숭이가 사기 스킬 좀 가졌다고 버릇없이 천하의 검제님을 우롱해? 오오냐, 좋다. 어디 내기판을 벌여보자!

“콜.”

-콜! 김좀비 너는 10층 보스를 공략하지 못하고 평생 죽을 때까지 날 스승님이라 부르게 될 것이여. 아! 넌 죽지도 못하니까 그냥 영원히 스승님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아야겠네.

“망상 스킬 갖고 있으세요? 어서 공자님 모실 준비나 하십쇼.”

-흐흐흐.

“크흐흐.”

우린 서로 노려보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멀리서 고블린을 사냥하던 헌터들이 수군거렸다.

“야. 저 사람 아까부터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려.”

“이제는 아예 혼자서 웃기까지 하네. 정신에 문제가 있나?”

“쉿! 이쪽 쳐다볼라. 모르는 척해, 모르는 척.”

“······.”

···되도록 혼잣말은 좀 줄여야겠다.

나는 얌전히 입을 닥치고 10층으로 향했다.

4.

10층 보스방 앞에는 다른 사냥터와 달리 관리인이 서 있었다.

헌터관리국에서 파견된 사람은 내 얘기를 듣더니 눈썹을 찡그렸다.

“혼자서 보스에 도전하시겠다고요?”

“예.”

관리인의 표정이 ‘이 미친놈께선 누구시지?’ 로 바뀌는 데엔 불과 2초도 안 걸렸다.

“저기. 지난번 뉴스를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흑룡 길드에서 정예 멤버로만 30명. 최상위 랭커 4명까지 더해서 공략조를 꾸렸다가 실패했습니다. 솔로 사냥은 자살 행위입니다.”

“뭐 어때요?”

난 당당했다.

“공략을 원하는 헌터는 무조건 보내주는 게 관리국 규정이잖아요.”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관리인이 난감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실례지만, 여기 출입하는 헌터는 다 제가 기록합니다. 나중에 관리국 상사가 기록을 들춰볼 텐데··· 그럼 전 죽을 게 뻔한 헌터를 그냥 입장시킨 나쁜 놈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이쪽 사정도 좀 봐주세요.”

“음.”

어떻게 할까. 나는 침착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뭐야? 관리국? 우리 세계에서 탑을 공략할 땐 이런 놈들 안 키웠어!

물론 나 혼자만 침착했다는 의미다.

-이놈들이 빠져서는! 관리국이니 길드니 만들어서 정치질하는 꼬라지, 난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그딴 거에 심력을 낭비하니 아직도 10층에서 빌빌거리는 거다! 야, 김좀비! 그냥 이 자식 패버리고 보스방에 들어가버려.

‘아니.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왜 때려요?’

-감히 내 앞길을 막고 있잖아.

역시 싸이코패스 아니랄까봐 사람 인권이 모기 수준이었다.

“관리인님.”

나는 마음속으로 혀를 쯧쯧 차면서 주머니를 꺼냈다.

“평소부터 고생하시는 거 보입니다. 관리인 님이 맞아요. 혼자서 도전하는 거, 그냥 자살 행위에 불과하죠. 그런데··· 제가 진짜로 자살을 하고 싶어요.”

“네?”

“요즘 너무 힘들어서요···.”

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1년 전에 애인이 죽었어요. 얼마 전엔, 연금성에서 저한테 불치병을 선고하더라고요. 아무리 길게 살아봤자 반년이라는데 저, 그 반년을 애인도 없이 견딜 자신이 없습니다.”

“아···.”

-뭐?

배후령이 인상을 구겼다.

-이 좀비 자식이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나는 무시했다. 그리고 눈앞의 관리인한테 계속 속삭였다.

“그런데 제가 말단이긴 해도 헌터예요. 연금성에 입원해서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기다리면서 인생을 끝내긴 싫어요. 죽을 때 죽더라도··· 마지막까지 꼭 몬스터한테 도전하고 싶네요.”

“그런 사연이···.”

관리인은 내 얘기를 들으면서 서서히 딱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전혀 관계없는 타인의 불운한 비극을 들으면 사람들이 ‘아···’ 라며 짓는 표정 있잖은가. 그거!

“여기 제가 투병하려고 모아둔 돈이요.”

나는 돈주머니를 관리인한테 건넸다. 묵직했다. 주머니엔 일백 골드가 들어 있었다.

“어차피 이제 쓸데도 없고··· 관리인님이 가지시죠.”

“이, 이런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사라질 거 세상에 남기는 거 없이 가뿐히 떠나고 싶어요. 관리인님. 내가 여기에 출입했다는 것도 기록하지 말아주십쇼. 제 헌터 인생 마지막 부탁입니다···.”

관리인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거의 울먹일 것처럼 말이다. 아마 저 무거움에는 돈주머니의 무게도 쫌 얹혀 있겠지.

“···알겠습니다. 가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얼씨구.

배후령이 어이없어했다.

-야. 둘이서 영화 찍냐? 지금 어디서 몰래카메라 돌아가는 거 아니지?

뭐라 하든 간에 관리인은 나를 통과시켜주었다.

관리인과 헤어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돌길. 10층 보스가 머무르는 곳은, 옛날 귀족가처럼 몹시 화려한 저택이었다. 그 저택으로 향하는 돌길을 걸었다.

‘원래는 염제 유수하가 클리어한 10층.’

내가 저택의 대문 앞에 섰다.

양손으로 천천히 문짝을 밀었다.

‘이번엔 다르다. 내가 염제를 대신해서··· 아니.’

끼이이익.

경첩이 떨리면서 저택의 대문이 열렸다.

‘염제보다 더 화려한 전설을 써주마.’

나는 한발짝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까르르르르!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과 동시에 내가 열고 들어온 대문이 닫혔다. 쿠웅! 순식간에 주변이 어두워졌으며, 어두워진 저편에서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들이 더 진해졌다.

촛불이 하나씩 켜졌다.

-놀아줄 거야?

이곳. 저곳.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바닥에 눌어붙은 촛불들이 밝혀졌다. 촛불이 밝혀진 곳에는 어김없이 인형이 놓여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자주 갖고 놀 것 같은 아가씨 인형들.

-우리랑 놀아줄 거야?

인형들이 입을 벌렸다.

-얼음땡?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숨바꼭질?

-얼음은 녹았어. 꽃은 다 찢어졌어. 숨바꼭질로 하자!

-그러자! 우리랑 놀아줘! 숨바꼭질로 놀아줘!

-꺄르르르르!

내가 자세를 취했다.

“오냐. 놀아주마.”

지난 일주일 동안 단련한 오러가 내 몸에서 피어올랐다.

그런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보스 스테이지에 입장했습니다.]

[도전자는 헌터 김공자. 1인입니다.]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아직 인류의 누구도 공략하지 못한 스테이지.

이른바 ‘불지옥 저택의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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