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16화 (16/400)

16화.  트라우마 페널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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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흑룡.

이 세상에 탑이 열린 날부터 줄곧 정상에 군림해온 길드.

「우리는 실력이 부족해서 10층을 공략하지 못한 게 아니야.」

흑룡을 지휘하는 랭킹 2위의 헌터. 흑색마녀는 수십 번이나 10층에 도전했다. 도전할 때마다 실패했다. 랭킹 2위의 헌터는 패배했지만 그래도 공략에 참여한 헌터들을 모두 살려서 돌아왔다.

어느 인터뷰에서 흑색마녀가 말했다.

「그냥 운이 조금 없었을 뿐.」

반면에 염제는 혼자서 10층을 돌파하고 선언했다.

「운도 실력이다, 찐따들아.」

훗날 찐따 선언문이라 불리는 인터뷰였다.

졸지에 찐따 집단이 되어버린 흑룡에선 염제를 적대시하기 시작하는데··· 뭐, 이제는 중요한 얘기가 아니었다. 어차피 유수하는 내 손에 죽었다. 저런 인터뷰가 이뤄질 가능성은 사라진 거다.

문제는 이것.

‘왜 다른 헌터들은 실패하고 염제만 10층을 공략할 수 있었나?’

‘염제가 압도적으로 강해서?’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 정답이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

2.

[보스 스테이지를 개시합니다.]

목소리가 울린 것과 동시에 저택의 풍경이 일변했다.

화르륵!

여기저기서 촛불들이 엎어졌다. 엎어진 자리에선 불꽃이 치솟았다. 미리 기름칠이라도 발라져 있었을까. 화마(火魔)는 순식간에 서양식 저택을 집어삼켰다.

-까르르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오직 인형들만이 멀쩡했다.

-아저씨가 술래! 우리는 도망칠게!

-도망치자, 도망치자! 여기서 도망치자!

수백 체. 아니, 자그마치 수천 체에 이르는 아가씨 인형들. 1층 로비에만 인형들이 그토록 무수하게 널려 있었다. 아마도 저택 전체를 통틀면 수만 체의 인형이 숨어 있겠지.

‘이 중에 하나.’

꿀꺽. 내가 침을 삼켰다.

‘저택 어디엔가 [진짜 인형]이 딱 하나 숨어 있다.’

수만 분의 1의 확률!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공략조가 실패한 원인이었다.

‘진짜 인형이 어디 있는지 찾는 동안 다 불타서 죽어버린다. 죽기 전에 탈출하려면 기껏해야 10분 정도밖에 탐색할 시간이 없다.’

지금 저택에서 타오르는 화염은 평범한 불이 아니었다. 화마. 업화(業火). 이른바 지옥불이라 불리는, 불꽃의 형태로 구현된 [오러]였다.

즉.

‘이 거대한 저택이 통째로 오러에 불타고 있지.’

오러를 쓸 줄 아는 보스 몬스터!

여태까지 공략조는 이 오러의 불지옥에 타 죽든가, 죽기 전에 탈출하든가, 둘 중 하나의 결말을 맞이했다. 어떤 헌터는 목숨을 걸고 수만 분의 1의 확률에 도전했지만 헛수고였다.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타죽었을 뿐.

난공불락의 불지옥.

그리고 여기에··· 오직 염제만이 10층을 클리어한 이유가 숨어 있지.

“운빨로 먹고 사는 새끼.”

내가 중얼거렸다.

그렇다. 염제는 보스 몬스터랑 오러의 형태가 똑같았다.

다른 헌터들에게 여기 저택은 불지옥. 그러나 염제한테는 자기 집 안방처럼 편안했다. 10층 보스 몬스터의 업화는, 동시에 염제 유수하의 속성이기도 했으니까.

“쯧.”

한마디로 말해 상성이 맞았다.

‘진짜 인형을 발견할 때까지 유유자적 돌아다녔겠지.’

그래 놓고 운도 실력이라며 잘난 척하다니.

역시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었다.

-운빨로 먹고 사는 헌터는 좀비 너잖아.

“제가 뭐 운빨로 먹고 삽니까?”

배후령의 깐죽거림에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지금도 힘들게 오러로 버티고 있는데요.”

양 눈썹 사이로 땀방울이 주룩 흘렀다. 후끈한 열기! 사우나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뜨거운 불길에 전신이 흠뻑 젖었다. 만일 오러를 몸에 두르지 않았으면 진즉 불타 죽었을 거다.

-응. 그래봤자 앞으로 1분이 한계일걸?

얄밉게도 배후령은 내 상태를 정확히 꼬집었다.

-참고로 말하지만 마르쿠스 할아범은 30분은 멀쩡히 버틸 수 있다. 할아범이 아직 여기에 도전하지 않은 이유를 말해줄까? 30분을 1시간으로 늘릴 때까지 실력을 쌓기 위해서란다.

“···아, 예에. 검성이랑 제 실력 차이를 확인해줘서 고맙네요.”

-낄낄낄.

화염에 휩싸인 저택 로비를 배후령이 자유로이 날아다녔다. 아래에선 인형들이 까르르 웃고 위에선 귀신이 낄낄거리고. 완전히 유령 저택이 따로 없군.

-그래서? 2코인밖에 없는데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하려고.

“어쩌긴 뭐 어째요. 일단 죽고 봐야죠.”

-얼씨구. 여기서 죽으면 네 오러가 갑자기 왕창 늘어날 거 같냐?

배후령이 비웃었다.

-여길 클리어하는 방법은 2가지밖에 없어! 운 좋게 진짜 인형을 찾아버리거나. 아니면 진짜 인형을 찾을 때까지 화염을 버틸 정도로 기가 막히게 오러를 잘 쓰거나. 근데 넌 멍청하게 자기 스스로 2코인만 걸었잖아? 안 될 거야, 아마.

“흐흐.”

땀을 흘리면서도 나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분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네. 아니. 둘만 알고 셋을 모르는 건가.”

-뭐?

“누가 이길지, 한번 죽고 나서 봅시다.”

이제 오러가 바닥나기 20초 전.

나는 가장 근처에 놓인 인형한테 다가갔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서서 죽기도 심심했다, 정도일까. 어쩌면 정말로 운이 좋아서 눈앞의 인형이 [진짜]일지도 몰랐다.

-우리랑 놀아줄 거야?

끼기이익.

인형의 목이 돌아갔다. 목만 돌아갔다. 공포 영화에 당장 섭외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인형은 프릴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불길이 사방을 태우건 말건 치맛자락 한올도 불타지 않았다.

마치 화염에 면역된 것처럼 말이다.

“잡았다.”

내가 인형의 머리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까륵.

인형의 무표정한 입에서 웃음이 흘렀다.

-땡! 내가 아니야!

인형의 입에서 흐른 것은 웃음만이 아니었다. 입술. 피부. 눈동자. 인형의 몸이 촛농처럼 흘러내렸다. 불길은 한순간에 인형을 집어삼켰으며, 삼켜지는 도중에도 인형은 망가진 레코드 기계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니야!

-아니야! 내가, 아니야. 내가··· 내가··· 아니야··· 내가···.

-내가··· 아니야···.

모조리 불타 녹아버렸다.

“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온몸이 뜨거웠는데도 등 아래가 살짝 서늘해졌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호러틱한 장면이었다.

“소름 돋네. 왜 꼭 보스 스테이지를 이렇게 기분 나쁘게 만들었대요?”

-탑의 거룩하신 뜻을 누가 알겠니. 좀비야. 너 같은 뺀질이한테 개사기 스킬을 내려주는 것도 탑의 뜻인데. 아마 탑에 인격 같은 게 있다면 변태 싸이코패스일걸.

“진짜 말을 해도 꼭···.”

나는 그 이상 투덜거릴 수 없었다.

“크윽!?”

오러가 다 떨어진 것이다.

이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 불길이 달려들었다. 후끈! 가장 먼저 신발 밑창이 녹았다. 다음으로 옷소매가. 그리고 머리카락에 불꽃이 옮겨붙었다.

“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악! 아아아아악!”

전신이 불타올랐다. 살이 녹았다. 피부가 흘러내려도 불길은 안 멈췄다. 오히려 살 속에 더 맛있는 먹잇감이 숨어 있다는 것처럼 더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신경. 뼈. 목구멍. 내장.

“우, 씹···! 욱, 크아아악!”

-그리고 너는 탑을 뛰어넘는 변태지. 크으. 아무리 세상에서 제일 잘난 헌터가 되고 싶다지만 불타 죽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다니. 내가 인정한다, 김좀비! 넌 진짜 변태야!

죽고 싶다.

얼른, 1초라도 빨리 죽고 싶다!

“으···!”

목소리가 안 나왔다. 소리가 먹먹해졌다. 눈과 귀가 불살라진 것이다.

머릿속이 과열되어서 터질 것 같은 순간,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목소리가 의식 속에서 들려왔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젠장.

조금만 더 빨리 죽여줄 것이지.

‘-푸하아!’

나는 깊은 물 속에 잠수했다가 겨우 수면에 나온 사람처럼 숨을 쉬었다. 물론, 정말로 호흡한 게 아니라 단순히 숨을 내쉰 기분에 불과했지만.

이곳은 명계. 내 맨몸이 꼭 유령같이 돌아다니는 칠흑의 장소였다.

[죽음으로 인해 스킬 조건이 달성됩니다.]

[몬스터 헬파이어 메이든의 스킬을 무작위로 카피합니다.]

그리고 내게는 기회의 장소이기도 했다.

[스킬 카드를 형성합니다.]

어두운 허공에 카드들이 떠올랐다. 의외라면 의외일까? 보스 몬스터임에도 황금색 카드는 1장밖에 없었다. 나머지 카드는 전부 은색과 똥색으로 빛났다.

‘자아. 약속, 까먹지 않았죠?’

-알고 있어. 짜식. 설마 내가 내기로 약속한 걸 어길 사람으로 보이냐. 걱정하지 마.

배후령이 피식 웃었다.

-어디 보자아. 요 아가씨는 어떤 스킬을 가졌으려나?

배후령이 두둥실 날아올라서 카드들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미리 약속한 대로 나한테 스킬들의 내용을 알려주려는 것.

-오오! 야, 이거 대박인데?

배후령은 황금색 카드부터 읽었다.

+

[불지옥 결계]

랭크: S-

효과: 원한(怨恨). 원성(怨聲). 원망(怨望). 당신의 풀리지 못한 한, 당신의 닿지 못한 목소리, 당신의 이뤄지지 못한 소망. 그것들을 모두 불태우십시오. ‘뜨거워.’ 뜨겁습니까? 세상을 불더미로 만드십시오. ‘죽을 것 같아.’ 죽이십시오.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반경 2km 공간에 오러의 불지옥이 강림할 것입니다.

누구도 당신의 허락 없이는 이 지옥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단, 당신도 반드시 결계 안에 있어야 합니다.

+

무시무시한 스킬이었다.

-이건 무조건이네. 좀비야, 닥치고 무조건 이 스킬 찍어라.

‘······.’

-응? 야, 김좀비. 왜 대답이 없어.

‘아니요. 그냥.’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왠지 몰라도 조금 마음에 걸려서요.’

뭐지?

대단한 스킬이 맞았다. 그런데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먹다가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수도관이 망가졌는데 정확히 어디가 고장났는지 알 수 없는 기분.

‘···아무튼 다음 스킬들도 읽으시죠.’

-엉? 이것보다 좋은 기술은 없을 거 같은데. 그냥 이거 고르면 되는 거 아냐?

‘제가 노리는 스킬은 따로 있습니다. 자아, 얼른요!’

-쓰읍.

배후령은 입을 삐죽였지만 내 말에 따라 카드들을 읊었다.

-오냐, 잘 들어라. [미궁 설계] A-급, [인형조종술] B급, [원격 조종] B-급, [함정 설치] C급···.

멈칫.

-······.

배후령은 카드를 기세 좋게 읽다가 뚝 멈추었다. 마지막 스킬. 뒷면이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카드 앞에서 배후령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씨발?

나는 씩 웃었다.

‘그럼 그렇지.’

-아니, 야··· 잠깐만···.

‘됐어요. 알겠으니까. 읽어줄 필요도 없습니다.’

확신했다.

바로 저것이 내가 원하는 카드임을.

[스킬 카드를 선택해주십시오.]

카드들이 공중에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속도가 빨랐다. 그러나 처음부터 오직 하나의 카드만을 노려봤던 나에겐 혼란을 주기 어려웠다.

-야! 공자야! 야! 우리 이러지 말자.

그걸 배후령도 아는지 열심히 소리쳤다.

-이거 봐. 와, 황금색 카드! 와, S급 스킬! 쩔어! 이거 얻으면 막 네가 원할 때마다 불지옥 결계가 차자자자작 생기는 거잖아. 얼마나 멋지냐.

‘잘 모르겠는데요.’

-그걸 왜 몰라! 반한다! 내가 여자라면 김공자 너의 불지옥 매력에 홀딱 반해버린다! 가즈아! 오늘부터 김공자 톱스타 인생 가즈아아아!

내가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느꼈어야죠.’

단서는 있었다.

‘수만 체의 인형 중에서 [진짜]는 단 하나. 진짜 인형은 스킬을 쓰는 장본인일 테니 당연히 화염에 데미지를 안 받아요.’

내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왜 가짜 인형들까지 불 속에서 멀쩡한데요?’

그리고 은색 카드를 낚아챘다.

-아아아악! 안 돼! 안 돼! 씨발, 안 돼!

‘정답은 하나뿐이지 않겠습니까. 검제 씨.’

나는 은색 카드를 뒤집었다.

+

[자나 깨나 불조심]

랭크: A

효과: 앗, 뜨거워라! 이렇게 뜨거운 걸 놔두면 우리 집이 홀라당 타버리겠지요? 하지만 이제 안심하세요. 당신이 지정한 생명체와 물체는 화염에 면역이 되어, 더는 불타지 않게 됩니다. 화마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안전한 생활을 누리십시오!

※단, 물속성과 빙속성에 의한 피해가 300% 증가합니다.

+

그렇다.

10층 스테이지. 불지옥 저택의 숨바꼭질.

이곳의 보스는 [불태우는 능력]만 가진 게 아니었다.

‘아자!’

정반대로, 무언가를 [불타지 않게 만드는 능력]도 가진 것이다.

나는 주먹을 쥐고 승리의 도취감에 휩싸였다.

‘왔노라! 보았노라! 잡았노라!’

-안 돼··· 안 돼, 으허헝. 이건 아니야··· 진짜 이건 아니잖아···.

배후령은 멘탈이 붕괴했다.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자아, 이제 이 스킬로 저 자신한테 화염 면역을 걸어버리면 끝. 느긋하게 진짜 인형이 어디 있는지 찾아내기만 하면 되거든요. 게임 오버거든요. 댁은 오늘부터 저를 공자님이라 불러야 하거든요!’

-젠장··· 씨발··· 우라질··· 이건 사기야. 망겜이야···.

‘으하하하! 어서 공자님이라고 부르시죠!’

어두운 공간에 나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내 것이 아닌 목소리도 조용하게 울렸다.

[선택 완료. 스킬을 복사합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우리 두 사람의 내기에서 내 쪽이 승리했음을 알려주는 축포.

이제 하루 전으로 돌아가서 똑같이 10층 보스에 도전하면 됐다.

클리어를 코앞에 둔 셈이었다.

[현재 당신의 헌터 랭크는 E급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스킬로 인한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어?

‘아. 맞다.’

계속 F급짜리 말단으로 남아서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알림.

하지만 이제는 E급 헌터로 성장한 나에게, 생애 첫 페널티가 찾아왔다.

과연 페널티로 뭐가 주어질까.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페널티 심도는 약(弱). 지옥도(地獄道)입니다.]

‘응? 트라우마?’

예상치 못한 단어의 등장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하다니 그게 무슨 뜻···.’

화아아악!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눈앞의 공간이 하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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