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트라우마 페널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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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략자는 헌터 김공자. 1인입니다.]
[클리어 보상 측정 중··· 측정 완료.]
[보상은 24시간 뒤, 11층에 입장하고 주어집니다.]
보스 스테이지 클리어.
아직 아무도 해내지 못한 업적. 그것을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가 이루었다. 랭킹에도 등록되지 않았으며 아직 이명(異名)도 없는 내가.
만일 이 사실이 알려지면 세간이 발칵 뒤집히겠지.
“하아.”
하지만 내 기분은 편하지 못했다. 기쁨과 울적함이 마음을 절반씩 차지했다고 할까? 나는 고독한 시인처럼 잿더미밖에 안 남은 폐허를 서성였다.
-야. 왜 똥 씹은 표정이야? 히든 스테이지까지 클리어했다잖아. 나도 생전에 히든 스테이지를 공략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야. 아마 보상이 괜찮을걸.
“댁 같은 싸이코패스는 왜 제가 울적한지 모르겠죠. 인간의 마음이 없으니까요.”
-음. 이제 보니 똥을 씹은 게 아니라 똥을 싸고 있군.
“······.”
놀라웠다. 방금 배후령의 말 한마디로 울적함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래. 이 또라이 양반을 데리고 살면서 내가 감상에 젖기란 불가능하지.
“···그냥 세상이 좀 개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응?
“방금 보스 스테이지에서 봤잖아요. 우리 세계든 이세계든 개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건 별로 다를 게 없더라고요.”
-하긴.
배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사는 곳이 다 그러겠지.
우리는 한동안 묵묵하게 서 있었다. 시간을 삭히는 침묵이었다. 배후령은 나와 함께 저택의 잔해를 쳐다보다가 “으!” 하고 몸을 떨었다.
-됐다. 됐어. 어휴. 나한테 이런 건 안 맞아! 그보다 김공자 너, 아까 대단했다!
“네?”
-너만의 방식을 찾아서 보스를 공략한 거 말이다. 굉장했어. 칭찬해주마!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아마 본인 딴에는 솔직하게 칭찬하는 것이겠지만 좀 소름이 돋았다.
“···사람 낯설어지게 웬 칭찬이에요?”
-인마. 나도 칭찬해야 할 게 있으면 칭찬해. 이번엔 운이 아니라 네 실력으로 난관을 극복한 거잖아. 우리 공자가 나랑 파트너인데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뻐해야지. 안 그르냐?
나는 더더욱 미간을 좁혔다.
“수상한데···?”
-에이. 수상하긴 무슨. 잘했다, 김공자! 멋지다, 김공자! 이대로 11층 열리면 쭉쭉 달려서 냉큼 랭킹 1위부터 먹어버리자! 다른 놈들이 사기라고 욕하면 어떠냐. 억울하면 지들이 사기 스킬을 먹든가!
배후령이 상쾌하게 웃었다. 뭐지?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지. 내일 해가 서쪽에서 떠오르거나 탑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에야 배후령이 이럴 리 없는데.
그 때였다.
[모두에게 알립니다.]
[금일, 10층 스테이지 클리어되었습니다.]
목소리.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알립니다.]
나 혼자한테만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하늘을 가득 메우면서 목소리는 메아리쳤다.
[금일.]
[10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려주는 축포.
[지금부터 24시간 뒤, 11층 스테이지가 개방됩니다.]
피유우우웅···!
하늘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불꽃놀이였다. 제일 먼저 보라색 불꽃이 터졌으며 곧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수십 가지의 색깔과 수천 줄기의 불꽃이 찬란히 개화(開花)했다.
“아···.”
나는 멍하게 하늘을 올려봤다. 상공의 불꽃은 터지고 난 다음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스스로 움직였다. 불꽃 하나하나가 마치 이무기처럼 구불거리며, 천천히 형태를 갖추었다.
[24:00:00]
시계의 형태였다.
[23:59:59]
그리고 하늘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나는 배후령과 나란히 창공을 올려보았다.
문득 배후령이 중얼거렸다.
-드디어 본편 개시로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생전에 똑같은 불꽃쇼를 본 적이 있지.
“저도 두 번째로 보는 광경입니다. 하지만.”
주먹을 꾹 쥐었다.
“하지만, 예전의 저는 이때 1층 술집에 있었습니다. 단순한 구경꾼이었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해서 한참 우왕좌왕했고. 결국 기회를 놓쳐서 평생 F급짜리 헌터에 머물렀고···. 젠장. 다시 생각해도 멍청했네.”
-낄낄.
배후령이 웃었다.
-그래. 엑스트라에서 주인공으로 승진하니까 기분이 좀 어떠냐?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스마트폰을 꺼냈다.
헌터 업계와 관련된 커뮤니티에서 어찌 반응하고 있는지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뭐야? 불꽃놀이 뭐임?
-지금 1층에서 불꽃놀이 합니다. 이거 1층만 이런 건가요?
-나 3층 사냥터인데 여기서도 불꽃쇼 한창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낮의 불꽃놀이는 모든 커뮤니티를 불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방금 목소리 들은 사람.
-10층이 클리어했다는 소리 들렸는데 실화냐.
-흑룡 길드에서 10층 클리어한 거임?
-아무런 공지가 없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죠?
게시글.
-관리국에서 예고한 다음 공략은 2주 뒤입니다.
-절대 흑룡 아님! 흑룡 간부들 지금 1층 바빌론 은행 앞 사거리 카페에 다 있음. 증거 사진 첨부함.
-누가 클리어한 거야?
또 게시글.
-[속보] 10층 클리어!
-클리어를 이룬 길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아.
-[속보] 흑룡, 클리어 선언 없음.
1초가 지날 때마다 수십 개의 게시글이 쏟아졌다. 한 곳만 그런 게 아니었다. 헌터 커뮤니티라면 어디든 다를 게 없었고, 이 불길은 곧 다른 커뮤니티까지 번졌다.
바빌론에서 운영되는 언론사들은 허겁지겁 한 줄짜리 속보를 쏟아냈고, 찌라시들은 다시 장작이 되어서 커뮤니티를 불태웠다.
-흑룡이 아니라면 어떤 놈들이야?
-나 지금 만신전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이단심문관이 갑자기 신관들 모으는 거 봤다. 난리 났다. 만신전도 클리어 당사자가 아닌 듯.
-맞다! 검성이다!
-검성이 혼자서 클리어한 거임. 백프로임.
-아, 검성이라면 그럴 수 있지.
커뮤니티에서 번진 불길들은 처음엔 따로따로 타올랐다. 어느 곳에선 만신전 길드를 밀었다. 다른 어떤 곳에선 검성을 지목했다. 백작, 독사, 성기사 등등. 최상위 랭킹에 군림하는 헌터들의 이름은 다 한번씩 거론되었다.
하지만···.
-무슨 소리야. 검성 지금 술집에서 우유 마시는데?
-검성 아닙니다. 증거 사진 첨부합니다.
-독사는 도장에서 길드 문하생들 가르치고 있음.
-뭔 소리 하는 거야?
-바빌론 광장에서 성기사 일한다.
-직접 물어봤습니다. 검성이 자기가 한 일 아니라고 말하는데요?
-잠깐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상련 간부입니다. 실명이랑 이명 밝힐 순 없지만 상련 아닙니다.
-왜 클리어 선언하는 길드가 하나도 없는 건데.
-뭐야 시X.
따로 타오르던 커뮤니티의 불판은 얼마 안 가서 하나로 모였다.
하나의 거대한 의문으로.
-그럼 누구야?
-지금 누가 클리어한 건지 아무도 몰라?
-10층 공략한 헌터 누구인가요?
-도대체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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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칵.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그리고 아까 배후령이 던진 질문에 대답해주기로 했다.
“지금 기분 말입니까.”
어느새.
내 입가는 웃고 있었다.
“솔직히 죽여주네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누구한테 배우지 않았더라도 이게 무슨 감정인지 나는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확신했다.
바로 정상에 올라선 기분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거 같습니다.”
-그치?
배후령이 씩 웃었다.
-물론 지금은 착각에 불과하지. 너는 세상을 다 가지지 않았고, 기껏해야 10층을 공략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100퍼센트 착각인 것만은 아니다. 김공자. 너는 지금 네 세계의 누구보다 정상에 가깝다.
“알아요.”
나는 시선을 돌렸다.
“이제 진짜 정상에 오르는 길만 남았죠.”
불지옥 저택에 도전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돌계단. 그 계단을 뛰어오르는 사람이 한 명 보였다.
내가 불치병에 걸렸다면서 속인 관리인이었다.
“헉, 허억···! 허어억. 헌터, 님···!”
관리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어지간히도 급하게 뛰어온 것 같았다. 그는 내 앞에 멈추어서서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방금··· 방금 그거. 호, 혹시 헌터님이 하신 겁니까?”
“뭐를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시, 십층 클리어 말입니다!”
관리인이 소리쳤다.
“제가 오늘 담당자인데··· 오늘 하루 동안 10층에 도전한 사람은 헌터님 한 분밖에 없어서, 그래서··· 지,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관리국에서 저한테 어떻게 된 일이냐고 계속 전화를···!”
“음.”
관리인을 슬쩍 살펴보았다. 위잉. 위이잉. 나와 대화하는 도중에도 관리인의 바지주머니는 끊임없이 요동쳤다. 아마도 전화가 걸려오는 것이겠지. 그가 밝힌 대로 현재 탑에선 난리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만약 정말로 클리어했다면 어쩌시게요?”
“예?”
“제가 만약에 진짜로 10층을 클리어한 헌터라면 어떻게 하실 건지 여쭤봤습니다.”
“그, 그거야···.”
관리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미처 헌터님 신분증을 검사하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검사를.”
“에이이. 관리인님. 말씀이 이상하시다. 미처 검사하지 못한 건 솔직히 아니죠. 저한테 100골드나 받으셨으면서.”
“그, 그건···.”
“일하느라 정말 고생하십니다.”
툭.
내가 관리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들겼다. 관리인이 벙찐 얼굴로 내 쪽을 봤다. 나는 그를 지나쳐서 유유자적 돌계단을 내려갔다.
등 뒤로 절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자,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헌터님! 이명만이라도 괜찮습니다! 제발 이명만이라도 알려주시고 가십시오! 안 그러면 제가 관리국 선배들한테 얻어터집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저 이명 없습니다.”
“······.”
“고생하십쇼. 아, 쫓아오진 마세요. 그 때는 진짜로 도망칠 겁니다.”
다행히 관리인은 쫓아오지 않았다. 만에 하나 쫓아왔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저 사람은 계단을 올라오느라 잔뜩 지쳤으니 내가 가볍게 따돌릴 수 있었다.
-야. 쟤 표정 가관이다. 완전 귀신을 본 표정인데.
배후령은 혼자서 뒤를 돌아보며 낄낄 웃었다.
-아무튼 잘했어. 원래 이름값은 그렇게 높이는 거야. 암. 네가 누구인지 숨기고 다른 사람들이 널 찾아오게 유도해야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검제 양반.”
-어? 왜?
나는 10층 입구에 설치된 전송석 앞에 섰다.
“저, 깨달았습니다.”
-뭘 깨달아?
“왜 갑자기 댁이 저를 칭찬했는지 깨달았다고요.”
1층으로 전송하는 것을 예약하면서 나는 말했다.
“내기.”
배후령이 멈칫했다.
“기억났습니다. 2코인 안에 보스를 깨면 절 [공자님]으로 부르기로 약속했죠? 와, 이거 어쩌나. 내가 진짜 2코인만에 십층을 돌파해버렸는데. 우리 검제님 큰일 나셨네.”
-야. 공자야··· 우리가 그래도 파트너인데···. 그건 쫌 아니지 않니?
배후령은 울상을 지으며 애원했다.
-생각해봐. 무릇 파트너란 대등한 관계를 일컫는 말이란다. 너와 나. 동등한 관계. 99층까지 정복한 자와 훗날 100층에 도전할 자. 야아, 파트너! 친구!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냐!
나는 환히 웃어주었다.
“됐고. 앞으로 말 걸 때는 공자님이라 부르십쇼.”
-······.
“평생.”
배후령의 표정이 절망에 빠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