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30화 (30/400)

30화.  가을비는 핏물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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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2층 퀘스트가 주어집니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창문에 뭔가가 쏟아졌다.

투둑, 투둑.

빗방울이었다.

알현실의 화려한 창문에 빗방울이 부딪혀 미끄러졌다. 우리는 잠시간 창문에 묻은 빗물에 시선이 빼앗겼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 바람에 놀란 건 아니었다. 우리를 조금이라도 놀라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오, 오오···.”

“악몽이다··· 악몽의 비가 또 내린다!”

바로 빗물의 색깔.

창문에서 흘러내리는 비는 피처럼 붉었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핏물이었을지 모른다. 우리와 함께 알현실에 있던 NPC들은, 무관과 문관을 가리지 않고 머리를 감싼 채 신음하기 시작했다.

“여신이시여, 우리를 버리지 마소서!”

“뭐, 뭐야. 얘들 갑자기 왜 이래···?”

검성과 싸우느라 지친 독사가 힘겹게 주위를 둘러봤다.

“마왕이다···.”

갑주를 차려입은 어느 NPC가 중얼거렸다. 그는 알현실 바닥에 엎드린 채 어깨를 떨었다. 그 떨림에 전염되기라도 한 듯 여기저기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제국은 이제 끝이야···.”

“마왕이 도래한다···.”

“폐하··· 우리의 주군께서는 어디로 가신 것인가···?”

NPC들 가운데 낯빛이 어둡지 않은 자가 없었다. 절망. 체념. 한탄. 그들의 표정은 진짜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독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놈들 웃기네. 야. 이거 다 연출이지? 또 무슨 일인데.”

“퀘스트가 시작된 겁니다.”

내가 조용히 말했다.

“가만히 있어도 우리가 더 싸울 것 같진 않으니까요. 더 내분을 일으키기 어렵다면 직접 공격하는 수밖에 없죠.”

“공격이라니? 누가?”

“누구겠습니까.”

나는 창문 바깥을 노려보았다.

“우리한테 이따위 보상을 제시해서 내분을 유도한 장본인이죠.”

머릿속에서 웃음소리가 흘렀다.

[가을비의 마왕이 당신의 말을 긍정합니다.]

쏴아아아!

빗줄기는 더 강해졌다. 처음엔 창문을 노크하듯이 조심스러웠던 빗소리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수십 방울, 수백 방울, 수천의 방울진 붉은색이 창문을 난자하였다.

“······.”

나는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여기서는 바깥이 안 보였다. 빗줄기가 너무 심해진 나머지 유리창이 통째로 시뻘겋게 물든 것이다. 나는 칼자루로 유리창을 내리쳐서 깨트렸다.

쨍그랑!

알현실 안으로 새빨간 빗방울이 쏟아졌다. 비로소 바깥이 제대로 내려다보였다. 궁궐 한복판. 알현실 바깥에는 황궁이 펼쳐져 있었다. 황궁 너머에는 도시가. 도시 너머에는 거대한 성벽이.

[가을비의 마왕이 현현합니다.]

성벽 너머에 그것은 있었다.

-가여운 것들아.

그것은 작게 입을 벌려 속삭였다.

그렇다. 속삭임이었다.

단지 속삭이는 것만으로도 그것의 목소리는 장벽을 뛰어넘었고, 황궁의 무수한 담벼락을 뛰어넘었으며, 마침내 깨진 유리창 안쪽으로 흘러들었다.

-이세계의 인간들을 소환하여 중진에 앉힌다고 하여 어디 그것이 너희의 방패가 되어줄 성싶더냐. 너희는 그들을 용사라 부른다지만 정녕 그들이 너희를 위한 영웅일 것 같더냐.

비가 무수히 내렸다.

-어디 불러보아라. 마음껏 부르도록 하여라. 부르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더냐? 수천의 용사와 수만의 기사를 불러라. 그들 또한 너희와 같은 인간에 불과하거늘. 너희의 어리석음은 끝을 알지 못하여 가엽구나.

무수히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목소리는 울렸다. 도시의 장벽에 울렸다. 궁궐의 담벼락에 울렸다. 알현실의 벽에 울렸다. 그것은 웃었다. 큰 웃음이었다. 웃음소리는 메아리치고 또 메아리쳐서 두개골을 울렸다.

“으, 아아···.”

NPC들이 더욱더 아래로 머리를 처박았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듯 머리통을 쥐어뜯었다.

그나마 우리 같은 헌터는 사정이 나았다. NPC들과 달리 우리는 마왕의 웃음소리를 처음 들었다. 견딜 만했다. 만일 일 년 내내 저런 웃음소리를 들어야 한다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들아.

그 때였다.

나에게만 보이는 지도. 미니맵. 전신(戰神)의 축복을 받아 비추는 지도에 빨간색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미니맵에 천천히 찍히기 시작한 붉은색 점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증식했다.

수백.

수천.

수만.

곧, 지평선 너머가 전부 빨간색으로 칠해졌다.

-너희의 악의에 삼켜져라.

벼락이 쳤다.

하늘과 땅이 일순 창백해지고, 그 사이에 놓인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도 상의 붉은 점들은 모두 괴물들이었다.

“······.”

“······.”

헌터들이 입을 다물었다. 11층 스테이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괴물 군단. 무수한 대군이 지평선 너머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키르르.

-케엑, 켁!

괴물들이 울부짖었다. 이빨을 벌렸다. 목을 비틀었다. 고블린의 뒤틀린 얼굴에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저것들에게 피의 빗물은 도리어 성수(聖水)인 모양이었다. 위대한 성전에 나선 기사처럼 괴물들은 하늘을 올려보았고, 붉은 비를 경배하였다.

“···말했잖아요.”

내가 칼자루를 꾹 쥐었다.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고요.”

그리고 눈앞에 글자들이 펼쳐졌다.

+

[제국 수도 공방전]

난이도: A~SSS

임무 목표: 용사들이여! 그대들은 마왕군에 용감히 맞서 싸워 보급로를 사수했습니다. 이에 위기를 감지한 마왕이 직접 출전했습니다. 마왕은 언제 어디서든 몬스터 군단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마왕이 노리는 곳은 아이김 제국의 심장부. 황도(皇都) 하카므니아입니다.

다행히, 먼곳까지 현현하느라 마왕의 힘은 약해져 있습니다.

마왕을 막으십시오!

※단,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13층은 개방되지 않습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약해져 있다고?”

독사가 무심코 웅얼거렸다.

“저게?”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이건··· 불합리하잖아. 어떻게 클리어하라고? 애당초 깨라고 만들어진 퀘스트가 아니야. 10층까지는 튜토리얼이었다고 해도··· 난이도가 너무 다르잖아. 이런 건.”

“거기까지. 침착해집시다.”

나는 등을 돌려 알현실을 바라보았다.

헌터들이 있었다. 헌터들 뒤에선 NPC들이 절망하고 있었다.

“우린 할 수 있습니다. 탑에선 클리어하지 못할 퀘스트를 내리지 않아요.”

“하지만, 저만한 숫자의 몬스터를 우리가 어떻게 물리치냐···?”

“그러니까 침착해지라는 말씀이에요.”

나는 NPC들을 가리켰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한 헌터가 아니에요. 본인이 스스로 선택해놓고 잊었어요? 독사님. 당신은 [아이김 제국의 친위대장]입니다. 친위대장이면 친위대를 이끌어야죠.”

“······.”

“우리 헌터들만으로는 이번 스테이지를 깰 수 없어요.”

그래.

“NPC들을 설득하세요. 일으켜 세우세요. 지휘하세요. 진짜 사람을 대하듯 NPC들을 대해서 어떻게든 전쟁터로 이끄십시오.”

11층 스테이지도 그렇게 해서 공략했다.

“우리는 서로 싸우면 안 됩니다. 검성님. 당신은 제국의 기사단장입니다. 기사단장과 친위대장이 서로 칼을 겨루어서 싸우다니요. 그런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제대로 막겠어요?”

“······.”

“기사단장의 보상을 받았으니 이득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이득이긴 이득이죠. 하지만 권리를 챙겼으면 의무도 짊어져야 합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제국의 수뇌부 [역할]을 이어받았고, 이제 역할극을 펼쳐야 할 때예요.”

나는 성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기사는 진지한 얼굴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외무장관님.”

“음.”

“지금 여기가 알현실인데 정작 황제가 안 보여요. 궁전 어디엔가 황제가 있을 겁니다. 외무부 문관 NPC들을 데리고 황제를 찾아주세요. 우두머리가 없으면 NPC들도 제대로 안 따라줄 겁니다.”

성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대장군님.”

나는 이단심문관을 돌아보았다. 이단심문관은 오른팔을 잃었는데도 방긋방긋 잘만 웃었다. 오히려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 대장군이라면 저로군요!”

“저는 당신 같은 헌터가 딱 질색이에요. 진짜 싫습니다. 언젠가 당신이랑은 결착을 봐야겠다고, 아까 당신이 하는 짓거리를 보고 느꼈죠. 하지만, 지금은 대장군씩이나 되는 당신을 잃으면 안 됩니다.”

“아하핫. 저는 김공자 헌터가 점점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만!”

“저한테 전권을 맡긴다 했으니 닥치고 제 말을 들으십쇼.”

내가 지도를 살펴보며 말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붉은색 파도가 점점 더 수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성벽에 병사들이 많을 겁니다. 눈앞에 몬스터들이 해일처럼 밀어닥치는데 정신 상태가 멀쩡할 리 없죠. 대장군인 당신이 직접 성벽에 올라서 병사들을 다독이세요.”

“음! 노블레스 오블리주군요!”

“무슨 일이 있어도 성벽을 사수해주세요. 성벽이 뚫리면 이번 스테이지는 끝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단심문관이 미소 지었다.

“전 태어나서 지금까지 약속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지키지요!”

“오케이.”

나는 좌중을 바라보았다.

“그럼 전 먼저 가겠습니다.”

전쟁의 시간이었다.

4.

파앗! 팟!

황궁을 벗어나자, 나머지 헌터들이 후발주자로 속속 소환되고 있었다.

“우와. 여긴 또 어디야?”

“꾀죄죄한 항구가 아니라서 좋네.”

마치 관광이라도 온 여행객처럼 헌터들은 수도의 거리를 두리번거렸다.

“엑, 산성비냐? 뭔 빗물 색깔이···.”

“지붕 아래로 들어가! 얼른!”

“야. 보상으로 역할을 선택하라는데?”

“역할? 역할이 뭐야?”

후속주자들은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우리보다 뒤늦게 도착한 탓일까.

‘하긴 먼저 12층에 올라온 최상위 랭커들조차 서로 의심하고 싸웠는데.’

심지어는 의심된다는 이유로 세 명을 죽였다. 하물며 후속주자들은 어떻겠는가! 방금 새로운 스테이지에 입장한 헌터들한테 많은 걸 기대할 순 없었다.

‘지금은 헌터들을 설득할 시간이 없어.’

이 순간에도 마왕의 군단은 다가오고 있으니까.

‘일단 NPC들로 공격을 막고 본다!’

나는 헌터들을 무시하고 거리를 달려나갔다. 길거리가 더럽게 복잡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겐 미니맵이 있었다. 성벽으로 향하는 최단경로를 착실하게 밟았다.

“김공자.”

막 황궁을 벗어났을 때였다. 내 옆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마녀님?”

“흑룡주(黑龍主)라고 불러. 난 내 이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마녀. 랭킹 2위의 헌터가 어느새 나타나서 나와 나란히 달렸다. 발걸음에 오러를 실은 걸까. 마녀는 마치 미끄러지듯 길거리를 달려나갔다.

“갑자기 어떻게 여기로 나타나셨어요?”

“···내 스킬이야. 순간전이. 시야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거든.”

개사기 스킬이었다.

-야, 좀비야. 얘한테 한번 죽어라! 순간전이라니 너무 개꿀이잖아! 다른 놈은 몰라도 얘한테 죽는 거라면 내가 인정해줄게. 얼른 죽어!

배후령의 말을 무시하고 내가 물었다.

“그럼 먼저 성벽에 가시지 않고 뭘 하세요?”

“당신을 데리러 온 거야. 당연하잖아.”

마녀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달리고 있는데도 전혀 지친 기색이 안 보였다.

“11층에서 봤어. 당신, 여기 NPC들한테 먹히는 검을 가지고 있지? 무슨 검인지 몰라도 그게 있으면 NPC들의 사기를 올릴 수 있어. 지금 성벽의 병사들한테 필요한 인간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마녀가 나를 쳐다봤다.

“동의해줘.”

“예?”

“나와 함께 순간 전이하겠다고 말로 확실하게 동의해줘. 안 그러면 당신을 이동시킬 수가 없어. 내 스킬의 제약이야.”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잠깐만요. 순간 전이라면 못해도 S급 스킬일 텐데요? 저한테 이렇게 제약까지 다 말해주셔도 괜찮습니까. 비장의 한 수잖아요.”

“이상한 말이네.”

마녀는 이마를 닦았다. 우리 위로 붉은색 빗방울이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이마에도 빗물 때문에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마녀의 검은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 말에 따르면 나는 이 제국의 재상이잖아. 재상이 자기 나라를 지키는 데 비장의 한 수를 꺼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니야?”

“······.”

“시간 없어. 대충이라도 상관없으니까 어서 동의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룡주의 스킬 사용에 동의합니다.”

그 순간이었다. 마녀가 왼손을 뻗어 내 오른손을 잡았다. 꾸욱. 빗물에 젖은 손이 나를 감쌌다. 빗물에 미끄러지지 않겠다는 듯 기다란 손가락이 내게 깍지를 걸었다.

“어?”

“-제약이 하나 더 있거든.”

마녀는 내 손을 잡은 채 속삭였다.

“전이.”

파앗!

눈 깜빡할 사이, 우리는 성벽 위에 도착했다.

예상한 대로 성벽은 엉망진창이었다. 저 앞에서 몬스터 군단이 몰려오는데도 제국의 병사들은 대처하지 않았다. 아니, 대처하지 못했다. 병사들은 성벽 뒤에 숨어서 덜덜 떨거나 신을 향해 기도했다.

“끝이다···.”

“신이시여. 자비를 베풀어주시옵고 부디 우리의 가여움을···.”

“히익, 히··· 후윽···.”

NPC들. 그러나 살아 있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

설령 그들이 허상과 같다 해도 그들이 느끼는 공포마저 허상은 아니었다. 그들이 절망해서 짓는 표정마저 헛것은 아니었다.

“흑룡주님. 데려다주셔서 고맙습니다. 여기서부턴 제가···.”

“기다리렴.”

마녀가 한숨을 쉬었다.

“후배한테 못난 모습만 보여주고 쫓겨날 수는 없지.”

“네?”

“나도 가만히 앉아서 길드장이 된 건 아니란다.”

마녀는 깊이 심호흡했다.

그리고 입술을 열었다.

“-아이김 제국의 병사들이여!”

흑빛의 오러가 마녀의 몸에서 흘렀다.

검은색은 붉은색보다 조금 더 진했다.

“일어서라! 성벽에 올라서 그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돌로 지어진 성벽이 그대들을 저절로 지켜줄 거라 착각하고 있는가. 진정으로 우리 제국을 지키는 장벽은 돌덩어리가 아니요, 오직 그대들, 제국의 장병들뿐임을 모르는가!”

성벽 뒤에 웅크린 병사들이 한 명씩 고개를 들었다.

“재상님···?”

“재상님이시다.”

웅성웅성.

병사들에게 마녀는 그들의 재상으로 비추는 듯했다. 누군가 한 명이 재상을 알아보았으며, 그가 흘린 말은 빗물을 타고 순식간에 전염되었다.

마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서라! 나는 그대들에게 일어설 것을 명령한다. 언젠가 성벽은 무너지고 우리의 고향은 파괴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대들이 일어서 있는 이상 제국은, 우리의 아이김 제국은 쓰러지지 않는다! 바로 그대들이 제국이기 때문이다!”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일어서라!”

마녀는 격앙되어 있었다. 차가운 무표정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녀는 격분한 얼굴로 마녀는 성벽을 내려다보았으며, 마녀의 눈길이 병사들을 스칠 때마다 병사들은 마치 그물에 걸린 것처럼 마녀의 시선에 끌려다녔다.

“일어서라, 제국의 병사들이여! 아이김의 마지막 성벽이여! 바야흐로 제국 그 자체인 전사들이여! 창을 쥐어라! 검을 잡아라! 더는 잡을 것이 없어질 때까지, 더는 창칼을 쥘 손이 없어질 때까지! 제국을 위하여, 그대들 자신을 위하여 일어서라!”

마녀는 손을 움켜쥐었다.

내 손을.

“신께서 우리를 수호하신다!”

마녀는 내 오른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나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스르릉!

검집에서 성검(聖劍)이 뽑혀 나왔다.

나는 칼자루를 쥐고 드높이 들어 올렸다. 붉은 소나기가 쏟아지는 장벽. 그 한복판에서 성검의 칼날이 찬란하게 빛났다. 하얀빛은 빗물을 뚫고 병사들의 얼굴에 비추었다.

“시조의 검···.”

“성검이다. 여신께서 증거하신 성검이다!”

그리고.

[수호의 여신이 당신의 선택에 감사를 표합니다.]

[수호의 여신이 마지막 권능을 쥐어짭니다.]

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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