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붉은 검. (1)
============================
1.
아무도 알지 못했다.
왜, 정확히 언제, 어디서, 그것이 나타났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것은 존재하는 데 있어 다른 자의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
-가여운 것들아.
다만 그것이 나타날 때면 붉은 비가 내렸고.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들아.
빗물이 내린 곳에서는 곧 핏물이 흘렀다.
-너희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을 잡아먹는구나. 너희는 그것을 인간의 운명이라 자위하느냐? 나는 그것을 들짐승의 업보라 칭하련다. 내가 오늘 들짐승을 살육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더냐.
악몽의 비.
11층 스테이지, 장군 NPC에게 일부러 죽임을 당했을 때였다. 나는 장군의 트라우마를 엿보았다. 악몽 속에서 장군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장군뿐만 아니라 무수한 인간들도.
-후퇴하라!
-또, 비가···.
-비가 내리지 않는 땅으로 도망쳐!
변방의 소국들이 제일 먼저 무너졌다.
소국들을 아우르던 대국이 그다음에 무너졌다.
대국을 장성으로 삼아 버티던, 또 다른 소국들이 소리 없이 붕괴했다. 나라가 하나 무너질 때마다 인류의 강역은 조금 더 좁아졌다. 왕실의 사직이 하나 사라질 때마다 인류의 역사는 조금 더 짧아졌다.
다만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지 않는 곳으로···.
비가 내렸다.
-끝이다. 종말이다.
비가 내렸다.
-여신이여, 우리를 버리지 마소서···..
그리고 비가 내렸다.
조금씩 좁아지던 인류의 강역은 어느덧 한줌밖에 안 남았으며, 조금씩 짧아지던 인류의 역사는 어느새 한쪽밖에 안 남았다.
사관(史官)들은 낡은 깃펜을 아껴서 썼다. 역사서의 마지막 페이지에 ‘그리하여 인류는 멸망하였다’라는 문장을 자기 손으로 적게 될 운명을 문관들은 말없이 받아들였다.
이제 대륙에는 오직 하나의 제국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가여운 것들아.
악몽의 주인.
모든 마물의 왕.
고로, 최후의 사관들은 그것에 이름을 붙였다.
-너희의 악의에 삼켜져라.
마왕魔王.
2.
비가 내렸다.
빛이 비치었다.
비는 땅으로 쏟아졌고, 빛은 하늘로 솟구쳤다.
내가 뽑아든 성검의 빛이 붉은 먹구름을 꿰뚫었다.
“오오···.”
빛이 비치는 곳에서 핏방울은 내리기를 관두었다.
핏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병사들은 하늘을 올려봤다.
비가 그친 것이다.
“여신이시여···.”
단지 그뿐.
붉은 빗방울이 멈추었을 뿐.
모든 비가 그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성검의 빛이 비친 곳에만 비가 멈춘 것에 불과했다.
작은 쉼표. 작은 빛.
“여신께서···.”
“신께서 제국을 수호하신다!”
그러나, 때로는 작은 것으로 충분할 때가 있었다.
작은 것밖에 남지 않은 인간들에게 그러했다.
제국의 사람들한테 강역이란 한줌밖에 남지 않은 땅이었다. 역사란 아직 채워지지 않은 마지막 페이지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왕국의 백성들이 알았고, 병졸과 장군이 알았으며, 미관말직과 고관대작이 알았다.
모두가 알고 있어서 알현실엔 NPC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재상이 국정을 포기했기에.
대장군이 군사를 포기했기에.
친위대가 더는 황제를 친위하지 않았기에.
기사단은 기사의 의무를 지키지 않았기에.
모두가 버린 제국.
그렇기에, 탑은 제국을 무대로 삼았을 것이다.
모두가 버린 아이들이 10층의 어느 저택에 안치되었던 것처럼.
“일어서라!”
흑룡의 마녀가 외쳤다.
병사들이 차례차례 무릎에 힘을 주어 일어섰다. 성벽을 손으로 짚고 일어서는 병사가 있었다. 창에 기대어서 겨우 일어서는 병사가 있었다. 동료의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우는 병사가 있었다.
“일어서라!”
마녀는 병사들에게 제국의 마지막 성벽이 되어라 명령했다. 그렇다. 그들은 성벽일 것이다. 한 명의 외침이 벽에 부딪혀서 메아리치듯, 마녀가 외친 소리는 제국의 병사들에게 흘러 메아리쳤으므로.
“일어서라!”
“재상 각하가 이곳에 있다! 우리와 함께하신다!”
“시조의 검이 우리를 지키고 있노라!”
그리하여 성벽은 성벽이 되었고, 창은 창이 되었으며, 병사는 병사가 되었다.
“일어서라, 어서 일어서!”
“재상 각하 앞에서 이 무슨 추태인가!”
부관들이 돌아다니면서 병졸의 등을 때렸다. 병사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이 투구를 고쳐 썼다.
투구 끄트머리에서 새빨간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빗방울은 더 이상 병사의 시야를 가리지 못했다. 제국의 병사들은 정면을 바라보았다.
“후우···.”
마녀가 작게 한숨을 흘렸다.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검은색 오러가 점차 잦아들었다. 약간 무리해서 오러를 쓴 것일까. 마녀의 이마에는 붉은 빗방울만이 아니라 투명한 땀방울도 조금 맺혀 있었다.
“···왜?”
마녀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우크라이나 사람이 연설하는 거 처음 봐?”
“어···.”
“우리나라에 빨갱이가 많거든.”
마녀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게 미소를 지은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난 공산주의자가 싫지만 걔들이 연설 하나는 잘하지. 배울 점이 있더라.”
“예?”
“···아무것도 아니야.”
마녀의 얼굴이 도로 무표정해졌다. 입꼬리가 다시 내려갔다. 뭐지? 흑룡주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배후령이 쓱 끼어들었다.
-그냥 아재 개그가 안 먹혀서 쪽팔려 하는 거 같은데.
‘엥. 아까 그게 개그였어요?’
-몰라. 분위기로 봐서 그렇다고. 근데 지금 너처럼 반응해버리면··· 아니, 됐다. 좀비야. 넌 어디 집단에 들어가서 상사랑 어울릴 생각 마라. 꼭 지금같이 헌터길만 걸으렴. 알겠지?
뭔 얘기인지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꽤 분명했다.
“김공자. 이제부터 어쩔 거야?”
방금 마녀가 연설해준 덕분에 전황이 조금이나마 반전됐다는 것.
“우선 우리가 성벽에서 버텨줘야 할 텐데.”
“그렇죠.”
나는 붉은 지평선을 노려봤다.
수없이 많은 괴물들이 마왕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녀의 S급 스킬은 순간전이. 하지만 순간전이를 통해 저곳으로 날아간다고 하여도, 마왕한테 죽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마 눈 깜짝할 사이에 몬스터들한테 포위당해서 죽겠지.
일단은 마왕과 1:1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병사 NPC들이 버티는 동안 헌터들을 끌어와야 해요. 그럼 싸움에서 밀리진 않을 겁니다. 억지로 성벽을 뚫으려고 마왕이 몬스터를 더 투입하면···.”
“투입하면?”
“마왕 앞으로 저를 전이시켜주시죠.”
마녀가 빤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특공대구나.”
“예.”
“죽을 작정이니?”
당연한 의심이었다.
아직 나는 E급 헌터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나 마왕이 강력할지 몰라도, 고작 E급짜리한테 목이 날아갈 정도라면 애당초 대륙이 멸망하지 않았을 거다.
중과부적. 역부족.
어떤 수식어를 동원해도 내 불리함을 온전히 표현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내게 죽음은 패배를 뜻하지 않았다.
“이길 작정입니다.”
나의 죽음은 승리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저한테도 비장의 한수가 있거든요. 믿어보십쇼.”
“······.”
마녀가 한숨을 흘렸다.
“그래. 당신 말대로 헌터라면 누구나 비밀은 하나씩 가지고 있으니까. 당신의 칼이 저 보스 몬스터한테 통할 만큼 날카롭길 바랄게.”
물론 그럴 생각이다.
-재미난 장난을 치는구나. 여신이여.
그 때였다.
-마지막 발악이라 봐주기에도 적잖이 가소롭다. 빛이라. 내일의 벼알을 수확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빛이 내린들 무슨 소용이더냐. 가여운 것들을 다독이더니 너마저 가여워졌는가.
마왕의 목소리가 전장을 가로질렀다.
-그렇다면 나도 빛을 보여주리라.
순간, 굉음이 울렸다.
마녀와 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마왕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서, 굉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검이었다.
서서히.
먼 지평선에서 마왕은 서서히 검을 휘둘렀다. 시간이 느려지는 듯했다. 마왕의 검에서는 우리와 다른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검은 다만 시간을 베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왕의 검은 시간이 아니라 하늘을 갈랐다.
하늘을 가를 적에 검격은 이미 한 줄기의 붉은 광선이었다.
광선이 정확히 성문을 노렸고, 꿰뚫었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먼지 태풍이 불어닥쳤다.
마녀와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은 사이, 사방이 먼지에 뒤덮였고, 뒤덮인 먼지 너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병사들의 비명이었다.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뒤이어서 울렸다.
잠시 후.
“흡, 콜록···!”
태풍이 조금 가라앉았을 때 우리는 비명이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먼지가 눈을 찔러 고통스러웠지만, 고통보다 경악이 더 컸다.
마녀는 마른기침을 뱉은 뒤에 중얼거렸다.
“···정말로 힘이 약해져 있는 거, 맞아?”
제국의 성문은 무너져 있었다.
마왕이 조소했다.
-가여운 것들아.
먼지가 자욱해진 하늘로 붉은 비가 쏟아졌다.
웃음소리는 먼지에 섞여서 하늘에 흘렀고, 빗물에 섞여서 땅에 흘렀다.
하늘에서 땅까지 비웃음이 메아리쳤다.
-여전히 너희가 제국이더냐.
3.
무너진 것은 성문만이 아니었다.
붉은 광선은, 성문을 작살내고도 한참이나 더 뻗어 나갔다. 길거리가 짓뭉개졌다. 대로의 양변으로 늘어선 건물이 짓이겨졌다. 마침내 길거리 끝에 우뚝 솟은 황궁(皇宮)마저 광선에 휘말렸다.
콰아아아앙!
궁궐의 일부가 무너졌다. 빙하에 부딪혀서 침몰해버리는 선박처럼, 화려한 궁전은 기우뚱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멀리서는 제국의 궁전이 파괴되는 소리가 들렸다.
[용사 1인이 사망합니다.]
가까이서는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마왕의 하수인이 아닙니다.]
어느 죽음을 알리는 목소리가.
“······.”
귀가 먹먹했다.
마녀와 나는 잠깐, 서로 쳐다보았다.
“···알현실이 있는 자리였어.”
먼저 마녀가 입술을 열었다.
“검성과 이단심문관, 독사는 이미 알현실에 없을 거야. 각자 기사단이나 친위대를 이끌고 여기로 오고 있을 테니까. 성기사는 당신 명령에 따라 황제를 수색하느라 바쁠 거고. 그러면, 남은 사람은···.”
백작.
“···먼저 죽어버리다니.”
백작은 배신자가 아니었다.
“나쁜 녀석.”
마녀가 조용히 웅얼거렸다.
그뿐이었다.
동료의 죽음을 떠나보낼 때 마녀는 많은 말로 배웅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좌우로 몇 번 저었다. 동료의 죽음을 털어내는 그녀만의 작별법인가 싶었다.
“흑룡주. 만약 정말로 백작님이 전사한 거라면 바깥세상과···.”
“지금은.”
마녀가 나지막히 말했다.
“지금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탑에서 두 번째로 강하다는 사냥꾼은 그저 노려보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의 사냥감을.
“아무리 마왕이라 해도 저런 공격을 계속 쏘아댈 수는 없을 거야. 김공자. 나와 같이 무너진 성문을 지켜줘.”
미니맵의 빨간 점들에 변화가 생겼다.
괴물의 군세는 바다의 파도처럼 널리 일렬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게 바뀌었다. 붉은 점들은 마치 송곳처럼 뾰족해졌다.
돌파를 시도하는 걸까.
“예.”
송곳이 향하는 곳은 성문.
붉은 광선이 무너트린 빈틈이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마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이.”
우리는 무너진 성문으로 이동했다.
-키르르륵!
-케엑, 키! 키기긱!
-그오오오오!
어느새 몬스터들이 코앞까지 밀어닥쳤다. 화살이 날아다녔다. 성벽 위에서 궁병들이 사격한 것이다. 그러나 붉은 물결을 막아 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고블린, 오크, 스켈레톤, 온갖 괴물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달려왔다.
첫 번째 파도가 우리한테 도착하기까지 겨우 2분 남짓.
-좀비야.
배후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1분이라도 좋다. 아니, 30초여도 상관없어.
수십, 수백 마리의 괴물들이 먼지 구름을 뚫고 들이닥쳤다.
그것보다 다시 수십, 수백 배에 이르는 괴물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혼자서 버텨라.
내 앞을 가로막는 아군은 없었다.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네가 사람들한테 희망이 되어주어야 한다.
고로, 나는 최전선에 홀로 서 있었다.
-혼자서 버텨. 30초라도 상관없다. 저 괴물 새끼들을 네가 혼자 막아서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중요하다. 30년을 살아남는 인간을 영웅이라 부르는 게 아니야. 모두에게 30초가 절실히 필요한 순간. 그 30초를 안겨주는 인간이 바로 영웅이다.
나는 배낭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영웅이 되어라.
배낭에서 유리병을 꺼내었다.
먼 훗날 연금성주라 불리게 될 자.
그 약제사의 영약이 담긴 유리병을.
-내가 도와주마.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유리병에 담긴 영약을 전부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20층까지 검술을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했지? 조금 이르지만 실습 시간이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뒷발을 비스듬히 디뎌.
1초의 간격을 두고 심장이 요동쳤다.
-앞발은 똑바로 땅을 밟아.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이제 정면을 봐라.
보았다.
-맨 앞에 고블린이 두 마리다. 원래 시력이 나쁜 것들이지만 먼지구름 때문에 지금은 아예 눈을 가늘게 뜨고 있어. 저러면 본능적으로 검을 넓게 휘두르려고 한다. 적이 어디에 있든 한대 맞춰보자는 심산이지. 놈들이 휘두르기 전에 찔러라.
심장이 점점 더 빨라졌고.
1초의 간격은 점점 더 느려져만 갔다.
-네 성검은 빛나는 용도밖에 없지만, 시야를 뺏기엔 제격이다. 싸움에서 절대적인 1초는 중요하지 않다. 상대적인 1초만이 중요할 뿐이야. 너의 검으로 상대방의 눈을 빼앗아서, 상대방한테서 1초를 얻어라.
그리하여, 나의 1초는 나의 심장보다 조금 더 빨랐다.
-왔다.
나의 검은 나의 1초보다 조금 더 빠를 것이다.
-가자. 파트너.
배후령이 내 옆에 나란히 섰다.
-영웅이 될 시간이다.
나는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