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35화 (35/400)

35화.  나의 죽음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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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

성기사가 미간을 좁혔다.

“이곳에 무슨 볼일인가?”

설마 이런 골목에서 검성을 만날 줄은 몰랐겠지. 의외의 장소였고, 의외의 인물이었다. 단순히 우연이라 믿어주기엔 검성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젊은 아가씨가 벌써 귀가 가물거리는구먼.”

노인은 나를 향해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길을 비키라고 말했다네. 거기 있는 남자에게 볼일이 있으니.”

“말이 거칠군. 김공자 헌터와 단둘이서 나눌 말이라도 있다는 얘기인가?”

“허어. 그놈의 이름이 뭔지 따위는 관심이 없네.”

“······.”

골목의 공기가 일변했다.

성기사는 더는 미간을 좁히지 않았다. 단지 무표정하게 검성을 노려보았다. 명백한 경계심. 자경단이라는 거대 길드에서 넘버투까지 올라간 이 실력자는 확신한 거다. 노년의 검사가 결코 호의적인 의도로 다가오지 않았음을.

“비키게나.”

검성이 말했다.

“이미 세 번이나 비키라고 말했다네.”

“한 번 말해서 안 되는 일은 세 번 말해도 안 되고, 서른 번 말해도 안 된다. 검성이여. 나이를 먹더니 세상사의 단순한 진리조차 잊어버렸는가.”

성기사가 서서히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김공자 헌터는 자경단을 비롯하여 5대 길드에 정식 입단했다. 김공자를 공격하는 것은 곧 5대 길드에 선전포고하는 것과 다름없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만··· 자경단이 잠자코 지켜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하!”

검성이 비웃음을 흘렸다.

“역시. 길드들도 죄다 한통속이란 소리렷다. 내 그럴 줄 알았네.”

“···한통속이라니. 점점 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군.”

시간이 흐를수록 골목의 공기는 험악해졌다.

“검성. 당신이 때때로 [인간 사냥]을 벌인다는 것은 이미 여러 제보를 받아서 알고 있다. 물론, 당신의 개인적인 신념에 뭐라 간섭할 정도로 자경단은 한가하지 않다. 하지만 내가 버젓이 보는 앞에서 사냥 따윌 저지르겠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다르다면?”

“목숨을 걸고 막겠다.”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나?”

“아니.”

성기사가 무표정하게 노인을 노려보았다.

“나는 전력을 다해 당신과 싸울 것이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죽는 순간 당신은 무고한 인간을 쳐죽인 쓰레기 살인마로 전락한다. 검성. 남은 일생을 살인마로 보내고 싶다면 마음껏 덤벼라.”

“······.”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았을 일생. 내가 시궁창에 처박아주마.”

검성의 늙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미 저녁이었다. 골목에선 해가 빠르게 저물었다. 멀리 골목 저편에선 사람들이 오가는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이곳엔 우리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검성과 성기사가 대치한 가운데 침묵이 흘렀다.

바로 이 정적.

‘그래.’

이런 침묵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성기사를 데려왔다.

‘검성은 무고한 사람한테 약하다.’

그리고 성기사는, 거대 길드의 간부 중에서 아마도 유일하게 무고했다.

지난번 회차. 12층 스테이지에서 검성이 나를 죽이려고 했을 때.

그때도 성기사가 총대를 메고 검성과 나 사이를 중재했다. 검성은 의미심장한 말을 흘리면서 성기사한테 기껍게 중재자의 역할을 맡겼다.

-성기사 아가씨인가.

-자네는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사람을 한 명도 해하지 않은 인물이지. 좋네. 나도 믿어보겠네.

평범한 듯 흘러간 말.

그렇지만 내 귀는 놓치지 않았다.

즉.

‘성기사는 킬카운트가 [0]으로 표시되어 있다.’

아무리 검성이 난폭한 윤리관을 가졌다지만··· 아니. 오히려 극단적인 윤리관을 가졌기에 더욱더, 노인의 눈에 성기사는 선인(善人)으로 비출 수밖에 없다.

‘검성은 절대로 성기사를 해하지 못해.’

일종의 상성.

악인에게 있어 검성은 두렵기 그지없는 살인귀지만.

선인에게 검성은 전혀 해롭지 않은 노인에 불과했다.

게다가···.

‘성기사뿐만이 아니지.’

뚜벅.

누군가가 우리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약제사였다. 성기사와 검성이 연달아 등장하는 바람에 여태까지 얼어 있던 약제사는, 겨우 발걸음을 내디뎌서 양팔을 벌렸다.

“저, 저기요!”

약제사가 입을 열었다. 딱, 딱. 얼마나 긴장했는지 턱이 떨었다. 약제사는 몇 번이나 입술을 오므리면서 한마디씩 말을 끊어 뱉었다.

“무슨 일인지 저는 전혀 모르지만··· 여기 계신 소, 손님은! 저의 은인이세요!”

훗날 연금성의 길드장으로 발돋움할 헌터.

연금성주.

성공가도가 약속되어 있는 헌터가 있는 힘껏 말했다.

“바빌론엔 바깥세상처럼 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손님을 지켜드리는 건, 가게 주인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아무리 검성님이라 해도! 저희 가게 손님을 건드리는 건 용서할 수 없어요!”

“······.”

“며, 며칠 전에도 깡패들이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곤란했다고요! 죄송하지만 그만 제 가게 앞에서 떠나주세요! 정식 퇴거 요청입니다!”

약제사가 소리쳤다. 만일 검성과 직접 맞붙게 된다면 약제사는 1초도 안 되어서 목이 날아갈 것이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검성의 기세가 약해졌다.

똑같은 이유에서였다.

‘성녀. 성기사. 연금성주.’

세 사람은 미래에도 착하기로 유명한 헌터들이니까.

‘염제가 슬럼가에 불을 질렀을 때도, 성기사와 연금성주가 제일 먼저 화재 현장에 도착했지.’

선인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손해를 보고 살며,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며, 그렇기에 많은 사람에게 호구로 취급받는 자들.

하지만 헌터 랭킹 1위의 검성을 막아세울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선인밖에 없다.

없었다.

“어쩔 것인가.”

성기사가 말했다.

“시궁창에 떨어지고 싶다면 기꺼이 어울려주겠다만.”

“······.”

검성은 한참을 망설였다. 만약 내 생각이 옳다면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내 생각은 옳았다.

얼마 안 가서 노년의 검사가 칼자루에서 손을 거둔 것이다.

“···단지 오늘은 날이 아니었을 뿐이네.”

검성이 살기를 거두었다.

발걸음을 뒤로 돌릴 때조차 노인은 끝까지 내 쪽을 노려봤다.

“나와 마주치지 않기만을 빌게나. 성기사 아가씨와 거기 사장이 없었더라면, 자네의 목은 이미 길바닥에 떨어져 있었을 것일세.”

좋다.

2단계 조건 클리어.

이로써 검성이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칼부림부터 휘두르는 일은 피했다. 날 죽이더라도 최소한 죽이기 전에 한두 마디의 말 정도는 섞을 수 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한두 마디의 여유였다.

“검성님!”

노인이 발걸음을 완전히 돌리기 전에 나는 소리쳤다.

“내일 정오에 도시 북쪽 공터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오셔도 좋고 안 오셔도 좋습니다. 저 혼자서 기다릴 겁니다. 정말로요! 만약 제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싶으시다면 부디 내일 정오에 와주십쇼!”

노인이 고개를 슬쩍 돌려서 나를 노려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내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그뿐. 검성은 별다른 대답을 내놓지 않은 채 조용히 골목을 떠났다.

터벅. 터벅.

발소리가 멀어져서 마침내 다 멎어버린 다음에야 비로소 성기사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십년감수 했군. 아닌 달밤에 살인귀와 만나다니.”

살인귀.

“···검성님이 살인귀로 유명합니까?”

“유명하진 않지. 하지만 적어도 5대 길드장들은 잘 알고 있다.”

성기사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깥세상에 살 적에 딸을 살인마한테 잃었다는군. 워낙에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 노인이라서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만.”

“······.”

“그 탓인지 몰라도 검성은 살인자에겐 가감이 없어. 손속이 독하지. 뭐, 하지만 증거도 없어서 사실상 방관하고 있다···. 음. 당연하지만 이 이야기는 비밀이다.”

배후령이 내 앞에 끼어들었다.

-맞아. 마르쿠스 할아범이 나한테 말한 적 있어. 연쇄살인마한테 딸이랑 사위가 죽었대. 손녀랑 손자만 겨우 살아남았다나.

‘그걸 왜 지금 말합니까?’

-엉? 뭔 소리야. 네가 안 물어봤잖아.

배후령이 뻔뻔하게 말했다.

그래. 원래 이런 양반이지.

“뭐. 검성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성기사가 씁쓸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름한 골목.

이 도시의 할렘가가 저녁노을을 등지고 그림자처럼 펼쳐져 있었다.

“자경단에서 일하다 보면 이런저런 범죄자를 만나게 되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정말로 이딴 인간이 살아 있어도 괜찮은가 싶을 때가 많다. 죽어 마땅한 인간을 미리 죽여버린다···. 나조차 가끔은 그런 유혹에 들 때가 있어.”

성기사가 중얼거렸다.

“거대 길드장들은 모두 저마다 깊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김공자여. 자네도 우리와 한 패가 되었으니 점차 알게 되겠지만···. 정말로, 지독하게, 악취가 풍길 정도로 썩은 곳이 많아. 과연 자네는 어떤 식으로 반응할는지··· 음.”

성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부외자한테 너무 많은 얘기를 들려줬다고 생각한 걸까.

“이야기가 딴길로 새버렸군.”

그녀는 일부러 조금 더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여기 포션값은 얼마인가? 자경단은 항상 예산이 부족해서 너무 비싸면 곤란하다만···.”

4.

다음날.

나는 황량한 공터에 홀로 서서 스마트폰을 보았다.

안 그래도 인적이 드문 벌판엔 정말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당연했다. 지금 바빌론의 헌터들은 광장에 모여들어서 축제를 벌이고 있었으니.

지난번 회차와 비슷했다.

‘하지만 달라진 점도 있어.’

힐끗.

나는 폰 화면에 떠오른 뉴스들을 읽었다.

-[속보] 11층은 집단전? 흑룡 간부 전원 집합.

-축제를 앞두고 거대 길드들, 급하게 팀별로 공략조를 조직···.

-이단심문관 단독 인터뷰! “11층을 공략하고 싶다면 철저히 팀을 이루어야.”

-거대 길드의 또 다른 야합인가?

-정보의 출처는 수수께끼···.

그렇다.

세상은 조금 바뀌었다.

다름 아니라 바로 나에 의해서.

“······.”

그리고 조금 더 바뀔 것이다.

“흐음.”

벌판 저편에서 검성이 천천히 걸어왔다.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는 탓일까? 노인의 등 뒤로 펼쳐진 하늘이 유독 새파래 보였다. 멀리, 도시가 있는 방향에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00:01:31]

상공에는 빛의 시계가 유유히 떠 있었다.

푸른 하늘, 사람들의 목소리, 빛의 시계.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검성은 나를 향하여 다가왔다.

“정말로 혼자 있군.”

검성이 멈추어 섰다.

“혼자서도 본인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하긴, 그만한 살육을 저지른 암살자라면 실력에 자신이 있을 만하지.”

눈빛.

나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이 꽤 생소하게 느껴졌다. 지난 회차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지난번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인정이 눈빛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신뢰도 인정도 없었다.

불신. 적대심.

단지 한 명의 살인마를 보는 시선이 저곳에 있었다.

-좀비야?

‘······.’

-너 괜찮냐?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아요.’

그저 심장이 조금 아팠을 뿐이다.

“검성님.”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긴히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유언이라면 들어주마.”

“저는 검성님이 왜 저를 죽이시려 하는지 알고 있어요.”

검성이 입꼬리를 들었다.

“과연.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꼴이로군. 네 죄를 스스로 아는 것이렷다.”

“[탐정의 혜안]이라는 스킬 때문이죠.”

“······.”

검성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네놈이, 그걸 무슨 수로···?”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제발 믿어주십쇼.”

나는 입을 열면서 생각했다.

사람의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모두가 자기 자신만의 고집을 가지고 있다. 검성의 경우엔 [탐정의 혜안]이 바로 고집이다. 상대방의 킬 카운트를 보여주는 기술. 이 스킬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어떤 오류를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검성은 그저 무시한다.

그래서 고집인 것이다.

눈앞의 노인은 그 고집대로 여태껏 살아왔다.

고집대로 살아온 사람은, 삶과 고집이 분리되지 않는다. 섞여 있다. 고집을 버리는 순간 자신의 삶도 버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

심지어 나를 신뢰하게 해야 한다.

눈앞의 인간이 여태까지 살아온 삶을 스스로 부정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다시금 생각해보자면,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할 수 있어.’

주먹을 꾹 쥐었다.

‘이쪽도 목숨을 걸면 그만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검성님. 저는 예언가입니다.”

“뭐?”

“정확히는 예언과 같은 스킬을 갖고 있죠. 이 스킬 덕분에 검성님이 [탐정의 혜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검성님은 저를 죽일 테고, 저는 대체 왜 내가 죽어야 하는지 묻거든요.”

“······.”

“그때 검성님이 말씀하죠. 자신한테 [탐정의 혜안]이라는 스킬이 있고, 이 스킬에 따르면 제 머리 위에 [4093]이라는 숫자가 떠 있다고요.”

작은 거짓말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거짓말을 써서라도 노인을 설득해야 한다.

내가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

이 사실에 검성이 신뢰를 보내줘야만, 12층을 무사히 클리어하는 것이 가능하니까.

[00:00:00]

어느덧 하늘의 시계는 영(零)을 가리켰다. 멀리 도시에서 축포가 터졌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축하하는 환호성이 아련히 들려왔다.

노인과 나.

오직 두 사람만은 축제에서 한발짝 비끼어 서서, 서로 바라보았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나서 검성이 말했다.

“-맞혀보게.”

“예?”

“나는 지금 등 뒤로 왼손을 감추고 있다네. 그리고 손가락을 들고 있지. 내가 손가락을 몇 개 들고 있는지 맞혀보게나. 자네가 정말로 예언가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낼 것일세.”

오케이.

역시 이런 식으로 나왔군.

예상한 대로다.

“만일 맞추지 못한다면 자네가 감히 거짓을 고한 것으로 간주하겠···.”

아마도, 검성은 혹시라도 내가 공격해올까봐 완벽히 준비하고 있었을 거다. 기습을 가해도, 아이템을 써도, 스킬을 사용해도, 어떤 공격을 가하여도 검성은 쉽게 막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나는 검성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단검을 꺼냈다. 검성이 움찔했다. 그리고 노인이 공격에 대비하여 방어 자세를 취했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내 목을 찔렀다.

“뭣!?”

검성이 눈을 치켜떴다.

노년의 검사가 대비한 것은 이쪽이 공격해오는 것뿐. 설마 내가 스스로 목을 찌르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잠깐의 방심. 1초의 시간. 그 덕분에 나는 자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나에게는 1초의 시간만 있어도 충분했다.

다시, 하루를 시작했다.

10층 스테이지를 내려와서 거대 길드장들과 만났다. 포커 게임을 쳤다. 이겼다. 성기사에게 청하여서 함께 골목으로 들어갔다. 검성과 마주쳤다. 성기사와 약제사가 나를 두둔해주었다. 검성은 물러났고, 나는 내일 정오에 만나자며 소리쳤다.

[00:00:00]

그리고 다시금 이 순간에 섰다.

검성은 어제와 똑같이 말하였다.

“-맞혀보게.”

지난 회차와 똑같은 시험.

그러나 나의 반응은 지난번과 똑같지 않았다. 맞혀보게, 라고 검성이 말했을 때 나는 멍청하게 ‘예?’ 하고 되묻지 않았다. 대신 미리 예상했다는 것처럼 대답해주었다.

“지금 등 뒤로 왼손을 감추려고 하시네요.”

“······.”

“손가락을 든 다음에 몇 개를 들었는지 알아맞혀 보라고 주문하시겠죠. 제가 진짜 예언가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낼 거라고 생각하시면서요.”

검성의 얼굴이 조금 더 딱딱하게 굳었다.

“검성님. 믿어주십시오. 저는 예언 스킬과 같은 것을 터득하고 있어요. 저를 이 자리에서 죽이는 건 간단하죠. 하지만, 저를 죽이면 12층 스테이지를 무사히 클리어하는 게 불가능해집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 겁니다.”

“···잠깐만. 기다려보게.”

검성이 말했다.

“이것만으로는 증거가 부족하네. 예언이 아니라 [투시술]이나 [독심술]을 가진 걸 수도 있다. 자네가 정말로 예언가라는 보장을 어디서···.”

그래.

한 번으로는 부족하지.

이것도 이미 각오한 바였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한 명의 사람을 설득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그 사람이 어느 분야의 정점에 오른 노인이라면 더욱더.

“이것만으로는 증거가 부족하네. 예언이 아니라···.”

“예언이 아니라, [투시술]이나 [독심술]을 가진 걸 수도 있다고 의심하고 계시는군요. 제가 정말로 예언가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느냐면서요.”

하지만 괜찮다.

시험하고 싶으면 계속해서 시험해봐라.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의심하려거든 얼마든지 의심해라.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일주일이 걸리든 보름이 거리든 상관없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나는 당신을 설득할 자신이 있다.

나의 죽음은 당신의 삶보다 더 길다.

“······.”

마침내, 검성이 입술을 다물었다.

노인이 가지고 있는 의혹과 의심은 전부 앞질러지고 엎어졌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검성님. 믿어주십시오.”

“······.”

“여기서 저를 죽이면 안 됩니다. 12층 스테이지에서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하고 말아요. 정말이에요. 제가 무고하다고 말씀드리려는 것도 아니고, 저를 영원히 살려달라고 부탁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5일.”

내가 손가락을 펼쳐 들었다.

“앞으로 5일 동안만 저를 죽이지 말아주십쇼. 저를 따라다니면서, 진짜로 제가 죽어 마땅한 놈인지 아닌지, 두 눈으로 보시고 직접 판단해주십시오.”

검성이 침묵하였다.

나는 다시 단검을 들어 목을 찌를 필요도 없이, 노인이 마음속으로 갈등하고 있음을 알았다. 마지막 일격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이 ‘마지막 일격’이 되어줄 건지 잘 알았다.

“아직도 제 말씀을 믿지 못하시는군요.”

“······.”

“검성님은 나중에, 먼 훗날, 저한테 한마디 말을 알려줍니다. 이 한마디 말만 하면 제가 정말로 예언가임을 믿어줄 거라면서요.”

“···그게 무엇인가?”

내가 대답했다.

“검제(劍帝).”

노인의 눈이 커졌다.

그와 상관없이 나는 계속 말했다.

“누구의 이명인지는 저도 모르지만, 이 한마디면 저를 믿어줄 거라 하던데요.”

“······.”

침묵이 가라앉았다.

멀리 도시에서는 여전히 환호성이 울리고 있었다. 여신의 형상이 강림하여 일장연설을 펼치는 광경도 얼핏 보였다.

여신이 사라질 즈음해서 노년의 검사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5일이라 말했는가. 젊은이.”

“예.”

“좋네.”

검성이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5일 동안 본인은 자네의 뒤를 쫓아다닐 것일세. 자네가 하는 말, 하는 짓, 태도와 자세를 모두 빠짐없이 눈여겨볼 걸세. 그다음에 자네가 죽어 마땅한 인물인지, 아니면 정말로 예언가여서 나한테 다가온 것인지, 내 판단하지.”

“······.”

“이걸로 되었나.”

좋다.

“···예. 됐어요. 그거로 충분해요.”

나는 머리를 깊이 숙였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건을 전부 클리어했다.

첫 번째, 길드장들에게 약조를 받아둘 것.

두 번째, 검성이 나를 보자마자 죽이진 않게 할 것.

세 번째, 검성이 당분간이나마 나를 신뢰할 것.

‘드디어.’

이제 드디어, 12층에 올라가도 길드장들과 검성이 반목하지 않을 것이다.

쓸데없이 서로 의심하여 싸우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무고한 헌터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도.

“그럼, 검성님. 다음 스테이지에서 뵙죠.”

나는 목이 메는 걸 견디며 말했다.

검성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당장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했다.

“전송.”

파아앗!

하얀빛이 나를 감쌌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나는 생각했다.

‘이제 마왕을 사냥하는 일밖에 안 남았다.’

세상은 바뀌었다.

‘기다려라. 마왕.’

그리고 조금 더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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