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38화 (38/400)

38화.  용사의 이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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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가 내리던 날, 그것은 눈을 떴다.

그것에는 이름이 없었다. 형체가 없었다. 차라리 그림자라 불러야 할 것이다. 비가 내리던 날에 어느 그림자가 눈을 떴고, 눈을 뜨자마자 자신에게 처음으로 비춘 생물을 보았다.

-개굴.

이 생물이 무엇인지 그것은 몰랐다. 모르는 게 많았다. 다만 소리··· 빗소리. 사방에서 개굴거리는 소리가 자욱하게 들려왔다.

빗물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그것은 마치 뱀처럼, 아직 뱀이 뭔지도 모르는 시절이었으되, 본능적으로 눈앞의 생물을 향해 기어갔다. 꾸물. 꾸물. 무언가가 접근해오는 것을 생물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한 채 빗물을 우러러보며 짖고 있었다.

생물에서도 달콤한 향기가 흘렀다.

그것은 입을 벌렸다. 한순간이었다. 예쁘게도 지저귀던 생물은, 한순간에 그것의 아가리에 잡아먹혔다. 개굴! 그것에겐 이빨이 없었으므로 생물의 몸은 찢어지지 않았다. 단지 녹았다. 뱃속에 떨어져서, 위장에 고여서, 천천히 녹아갔다.

비가 내렸다.

위장에 고인 생물이 다 녹아서 흐물흐물해졌을 무렵, 그것은 자신에게 앞다리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뒷다리도 생겼다. 다리가 밟은 것이 땅이었고, 다리가 밟지 못하는 것이 하늘이었다. 하늘과 땅을 비가 이어주었다. 세상은 조금 더 맑아졌다.

아.

초록의 미끄러운 살결로 빗방울이 떨어져서 조각조각 부서지는 감촉. 촉감. 생명의 예감.

-개굴.

그것이 입을 벌려 기쁨의 신음을 흘렸다.

-개굴.

비가 내렸다.

그것은 조금 더 살고 싶어졌다.

4.

처음은, 일격이었다.

촤아아악!

나의 눈은 공격을 제대로 쫓지도 못했다. 시간이 늘어나는 영약을 마셨는데도 말이다. 나는 1초를 한없이 늘려놓았지만, 마왕의 일격은 길어진 내 1초보다 더 빨랐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하루.

나는 손바닥에 검은색 유성펜으로 일(一)을 그렸다. 먼 훗날, 아주 나중이 되어서도 오늘이 며칠째인지 잊지 않도록. 어느 감옥에 유배된 죄수가 자신의 지나간 자유를 숫자로 증거하듯.

-좀비야.

그래.

-놈의 검술 자체는 대단할 게 못 된다.

이것은 감옥이다. 시간의 감옥.

-그냥 무지막지하게 힘으로 때려 박는 거에 가까워. 물론 그것만으로도 엄청 무섭지. 대체로 힘만 쎄면 뭐든지 때려 부술 수 있거든. 하지만···.

“하지만, 공격해오는 방향만 알면 피할 수 있겠네요.”

-그거지.

만약 평범하게 퀘스트를 진행하면 어떻게 될까.

지난번 회차에서, 그, 격류처럼 몰아치던 전쟁터에선 과연 얼마나 많은 병사가 죽었을까?

한 명의 병사가 죽을 때마다 적어도 20년의 여생이 사라지고 만다. 20년은 더 살 수 있을 인간이 허망하게 죽어버린다.

열 명이 죽으면 200년.

백 명이 죽으면 2000년.

나는 그만한 시간을 구하고자 어떠한 역할도 택하지 않았다.

단지 한자루의 검을 쥐고 마왕 앞에 섰을 뿐.

그렇다면, 이 한 몸.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영원에 유배될 각오를 다져야 하리라.

-근데 문제는 방향을 알아도 네가 피할 깜냥이 되냐는 거지. 약골 새끼! 좀비 같은 시체 새끼!

“아, 시끄러워요. 좀.”

-깔깔.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하루로 돌아오면, 그날 하루를 반복했다.

반복할 뿐만 아니라 지나간 싸움을 복기했다.

복습했다.

-아직도 오러를 다루는 게 미숙해. 넌 그게 문제야. 발에 오러를 집중해서 회피하면 그만이라고.

“발에 집중한 채로 움직이려 하면 자세가 무너지던데요.”

-그러니까 허벅지랑 허리, 어깨에도 오러를 흘려줘야지. 균형 있게.

“아니, 말이 쉽지···.”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못 하겠으면 뒈지시던가.

“씨발.”

하루가.

다시 하루가 흘렀다.

-감히.

마왕의 분노한 목소리를 마주하는 것도 벌써 몇 번째일까.

-제대로 순서를 밟도록 하여라, 여신의 용사여.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고 이곳에 오다니 무엄하도다. 제국의 관을 이어받은 자만이···.

“자. 오늘도 원샷 때리시고.”

-뭐라?

슬슬 문답을 주고받는 것도 지겨워졌으므로, 나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영약부터 마셨다. 서서히 느려지는 시간 속에서 나는 마왕한테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다. 챠앙! 아쉽게도 내 일격은 마왕의 검에 쉬이 가로막혔다.

-네놈···.

“용사가 마왕을 벤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마왕이 용사를 벤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여기에, 더 무슨 말이 필요하냐.”

-······.

“와라. 마왕.”

[당신은 죽었습니다.]

“내가 바로 제국의 검이다.”

-좋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내 앞에서 증명하여라!

[당신은 죽었습니다.]

-너의 증명을 내게 보여라!

“그래.”

[당신은 죽었습니다.]

“보여주마.”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이 세계는 멈추었으며.

멈추어진 세계에서 시간을 증명하는 것은 다만 내 검이었다.

나의 검은 유일한 시침이어서.

이 세계에 1초(秒)를 흐르게 하려면 먼저 나의 검이 1초(招) 더 이어져야만 했다.

나는 단지 1초를 사는 검에 불과했지만.

이 세계는 오직 나의 1초에 얹혀서 한 번의 숨을 더 쉬었다.

물길이 넘쳐 하늘의 밑동까지 범람코자 해도 한점의 물방울부터 흘러야 하듯.

내가 영원을 살고자 하여도 1초의 시간으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의 생을 살았다.

“잘했어, 김공자!”

하루.

“세상에!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게 생겼다니!”

다시 하루.

“아마 헌터가 40명도 안 죽었을 거야!”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어쩌면 그것보다 덜 죽었을지 몰라··· 아아!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잖아!”

마녀의 말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11층 스테이지.

흑룡주의 손을 잡고 함께 전이하여, 보스 몬스터를 박살내는 퀘스트. 하루를 반복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와 같았다. 마왕을 상대하며 하루를 죽고 하루를 살던 끝에, 어느덧 11층의 양상도 점차 바뀌었다.

조금씩.

“잘했어, 김공자! 세상에! 50분도 안 되어서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게 생겼다니! 더구나 그 토문드라는 방패선임병이랑 협력해서 우측을 보강하라는 네 말이 절묘했어! 아마 헌터가 30명도 안 죽었을 거야!”

그렇지만 확실하게.

“40분도 안 되어서! 아마, 헌터가 20명도 안 죽었을 거야!”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효율적으로.

조금 더 치명적으로.

하루를 반복할 때마다 조금씩 마녀의 얼굴이 들떴다. 목소리가 밝아졌다. 50명밖에 안 죽었을 거라고 말하던 일 년 전의 마녀보다, 20명밖에 안 죽었을 거라고 웃는 어제의 마녀는 조금 더 행복해 보였다.

“아···.”

하루를 죽었다.

“말도 안 돼···. 잘했어, 김공자! 네 말대로 그 제슈아라는 기사를 치료하고 함께 골렘을 상대하게 했을 뿐인데, 아아, 어쩌면, 10명도 안 죽었을지 몰라···. 이런 게 가능하다니. 가능했다니. 이런 전장에서, 응. 가능했구나···.”

하루를 살았다.

-네놈.

어떤 하루에, 마왕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뭐가.”

-왜 웃고 있느냐고 물었노라.

나는 미소를 지었다.

“행복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행복해서 웃는다.”

마왕이 검을 들었다.

-이제 곧 죽을 것에게도 행복이 있는가.

“너는 이해하지 못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거고.”

-오만하구나, 여신의 용사여.

“소박할 뿐이다.”

나는 검을 휘둘렀다.

-가여운 것.

검이 나를 베었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나의 검은 어제보다 오늘 더 빠르다.

내일은 더 빨라질 것이다.

내가 살고 있으므로.

살아 있으므로.

“······.”

그 날은 소리 없이 찾아왔다.

마녀는 나의 손을 잡았다. 꾸욱. 그녀는 모르겠지만, 내 손바닥에는 수많은 일백(一百)이 검은색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내게 그 숫자들은 흔적 없는 주름살과 같았다.

이곳, 시간의 감옥에 투옥된 나날이 얼마나 흘러갔는지 알려주는 주름살.

“방금···.”

마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방금 확인했어. 김공자. 한 명도···.”

내 손바닥에 잡힌 마녀의 손 역시 떨고 있었다.

“한 명도, 안 죽었어.”

떨림은 흐느낌이 되었다.

“만신전까지 다 확인해봤는데, 없대···. 멍청하게 팔뚝에 화살을 맞은 바보들은 있지만, 그런데··· 그런데도. 죽은 사람은 없대.”

흑룡.

이 세상에 탑이 열린 날부터 줄곧 정상에 군림해온 길드.

흑룡을 지휘하는 랭킹 2위의 헌터. 흑색마녀는 수십 번이나 10층에 도전했다. 도전할 때마다 실패했다. 랭킹 2위의 헌터는 패배했지만 그래도 공략에 참여한 헌터들을 모두 살려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었다.

“고마워···.”

그 사람이 나에게 얼굴을 기대었다.

“정말로, 고마워···.”

마녀는 울고 있었고.

또한 웃고 있었다.

나는, 조금 더 살고 싶어졌다.

그렇다.

시간은 흐른다.

나의 심장 속에서 흐른다.

-감히!

심장이 뛰는 이상, 나는 검을 휘두른다.

-감히 혼자서 이 나를 막아보겠다는 말인가! 제국의 도움을 받지도 않고!

“오냐.”

드넓은 평야.

멈추어진 시간과 정지해버린 세계 한가운데.

멈추지 않을 심장과 정지하지 않을 검으로, 나는 적을 겨누었다.

“원래 용사는 혼자 싸우는 거라니까.”

-어리석은 것!

마왕이 진노하였다.

그것에는 이름이 없었다. 형체가 없었다. 차라리 그림자라 불러야 할 것이다. 그림자는, 피처럼 붉은 대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공기를 불온하게 흔들면서 검격은 나에게 날아들었다.

피하였다.

-네놈···!

다음 일격도.

그다음 일격도.

-나의 그늘은 너희의 악의다!

변화가 벌어진 것은 그 때였다.

마왕이 붉은 대검을 휘둘렀다. 내 새로운 1초를 1년 가까이 가로막았던 그 네번째 일격이, 파챠앙! 거울 깨지는 소리와 함께 막혔다. 달려들던 칼날이 빛의 파편에 찔려 물러났다.

“-미안해, 김공자.”

누군가가 내 옆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긴 흑발이 공기에 날려서 작게 찰랑거렸다.

“당신이 부탁한 대로 알현실에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금방 좀이 쑤시지 뭐니.”

흑룡의 주인.

마녀가 입꼬리를 들어 웃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심심해서 죽을 거 같더라. 그래서 당신이 우리한테 부탁해놓고 뭐 하나 싶어서 쫓아왔어··· 흐응. 혼자서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네?”

“용사 놀이죠.”

“재밌어?”

나도 웃었다.

“존나 기분 째지는데요.”

“하긴. 사냥할 보람이 있어 보이는 짐승이구나.”

다섯 개의 거울이 허공에 날아올랐다.

“혼자만 재미를 보게 할 수는 없지. 나도 낄게.”

“와. 다 잡아놨는데. 이제 와서 스틸하는 법 있습니까?”

“몰랐어? 남의 사냥감 가로채는 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걸.”

“그건 인정.”

황량한 벌판에 웃음소리가 흘렀다.

-이놈들···.

마왕이 으르렁거렸다.

웃을 때 따라웃지 못하는 존재가 마왕이 되는 거겠지.

“미안하다. 야.”

내가 칼을 흔들었다.

“혼자서 상대해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생각해보니까 역시 용사는 다구리로 마왕을 치는 게 맞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방법이잖아? 관습적으로 이해해줄 수 있는 부분이지.”

-같잖은 수작질로 하늘을 가리려 드는구나!

부글.

마왕의 몸을 뒤덮은 구정물이 들끓었다.

-더는 검으로 어울려주지 않으마!

구정물이 땅에 쏟아졌다.

마왕의 몸속에서 흐르는 진액은 무한정인지, 구정물은 땅에 흐르고 또 흘러서 순식간에 벌판을 검게 물들였다.

마치 거대한 그림자가 지상에 드리운 것 같았다.

-백귀여, 나의 소리에 답하여라.

부글. 부르르.

그림자가 끓어올라 물거품을 토했다.

-키르르륵!

-케엑, 키이이!

방울진 그림자 하나하나마다 괴물이었다. 시커먼 진액이 형체를 갖추었다.

어떤 거품은 고블린으로. 어느 거품은 오크로.

한 마리의 오크가 머리를 저어서 진액을 털어냈다. 물거품이 흐르고 나자, 평야에는 수천 마리의 괴물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크오오오오!

짐승들이 사납게 울부짖었다.

“이건···.”

마녀는 주변을 둘러보고 미간을 좁혔다.

“우리끼리 어떻게 해볼 수준이 아니네. 검성! 당신은 거기서 멀뚱멀뚱 뭘하는 거야. 도와주진 못할망정.”

“좀 더 지켜보려고 했지. 저 청년과 구정물이 싸우기 시작하고 30초도 안지났거든. 설마 저 구정물이 괴물들을 불러낼 줄 어느 누가 알았겠나.”

30초 동안 나를 지켜보았을 검성이 검을 빼면서 말했다.

“맞는 말씀이네요. 저도 1분은 버티고 도움을 청할까 했거든요.”

30주 넘게 그의 시선을 받아야했던 나는 웃으며 답했다.

“사내들이란······ 됐어. 김공자, 내 손을 잡아. 여기서 빠져나가겠어. 검성! 당신도 얼른 이리로 와. 이 물량 안 보여?”

마녀는 성질을 부리면서 날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마녀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의 의문에 대답을 돌려주는 대신.

나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백귀소환(百鬼召喚).”

멈칫.

마왕이 일순 당황했다.

-네놈. 방금 무슨···?

그러나 마왕을 앞질러서, 먼저 나에게 닿은 목소리가 있었다.

[스킬을 발동합니다.]

나의 자격을 증거하는 목소리였다.

곧, 평야가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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