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41화 (41/400)

41화.  그의 시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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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빛이 감싼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12층에서 마왕의 존재를 탐색··· 발견 불가.]

[마왕의 퇴각을 확인.]

파아아아앗!

[역사개변(歷史改變).]

하얀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연하게 반짝거리는 안개 같다고 할까. 빛무리는 순식간에 드넓은 평야에 펼쳐졌고, 곧 아이김 제국의 수도까지 뒤덮었다.

빛방울.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빛의 방울들이 무수한 민들레 꽃씨처럼 휘날렸다.

“이건···?”

마녀가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김공자. 대체 무슨 일이야?”

“어, 아뇨. 저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서···.”

당혹스럽긴 나도 마찬가지.

세상이 온통 빛무리에 둘러싸이는 걸 보며, 마음속으로 물어봤다.

‘검제 양반.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혹시 아세요?’

-아니, 나도 이런 건 처음인데. 뭐야 이거? 무서워.

‘······.’

검술 배울 때를 빼면 이 양반 진짜 도움이 안 되네.

어떻게 이런 무식 고릴라가 99층까지 공략했는지 몰라.

-음? 야, 김좀비. 너 방금 속으로 나 씹었지? 그치?

‘에이. 검제님은 너무 대단해서 저같이 미천한 놈이 감히 속내를 짐작하기가 어림 턱도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이상하다. 아닌데. 낯짝이 몰래 나를 욕한 면상인데···.

배후령이 인상을 찡그리고 투덜거렸다.

우리가 잡담을 떠드는 동안에도 빛방울은 끝없이 휘날렸다.

“어?”

눈에 띄게 변화가 느껴진 건 그때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제국의 웅장한 장벽을 가리켰다.

“흑룡주. 저기 좀 보십쇼.”

“응?”

“성벽이요. 깃발들 숫자가 확 줄어버린 거 같은데요.”

성벽 위에 꽂혀서 휘날리는 군기(軍旗).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만들어진 깃발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언뜻 세어도 수백 개에 이르던 깃발은, 이미 수십 개로 줄어들었다. 심지어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더 적어졌다.

“···그러게. 당신 말이 맞아.”

마녀가 미간을 좁혔다.

“잠깐만 나 좀 잡아보렴. 확인해봐야겠어.”

“예, 동의합니다.”

“전이!”

마녀는 내 손을 잡고 스킬을 사용했다. 다음 순간, 우리는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가 아니라 제국의 성루에 올라가 있었다. 화려한 시가지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세상에···.”

마녀가 나직하게 신음했다.

“전부 바뀌고 있잖아.”

정말로 그랬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빈민촌, 아니. 난민촌이 사라졌다. 마왕에 의해 멸망해버려 대륙 방방곡곡에서 도망쳐온 피난민들. 그런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이룬 할렘가가 새하얀 빛에 둘러싸였고··· 그리고 없어졌다.

애초부터 난민촌 같은 건 없었다는 듯이.

“······.”

저잣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의 옷차림도 달라졌다. 낡은 누더기가 멀쩡한 천 옷으로 바뀌었다.

시장의 가판대에 놓인 과일들마저 변화했다. 썩어버린 사과들이 서서히 싱그러운 윤기를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역사개변···.”

“뭐?”

“역사가 바뀐 거예요.”

성벽을 순찰하는 경비병의 머릿수도 확연히 적어졌다.

숫자만 적어진 게 아니라 표정부터 달랐다.

병사들의 얼굴은, 더는 마왕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한 절망으로 물들어 있지 않았다. 근무의 따분함. 순찰에 대한 지겨움. 일상을 보내는 인간의 표정으로 어느덧 바뀌어 있었다.

“원래라면 아이김 제국은 마왕의 침공을 받았어요. 받아야 했고요. 싸움 끝에 승리를 거두든, 패배해서 멸망해버리든··· 어느 쪽이든 간에 마왕군의 침략을 마주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침을 삼켰다.

“이번 세계에선 마왕의 침공 자체가 [없는 일]이 되어버렸어요.”

아무도 모르는 사이.

누구도 알지 못하는 동안, 마왕의 침략은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

내가 없애버렸다.

“···역사가 뒤바뀐 겁니다.”

그 결과가 눈앞에서 펼쳐졌다.

[11층 스테이지를 개정합니다.]

[12층 스테이지를 개정합니다.]

하얀빛이 도시를 감쌌다.

거지로 돌아다니던 어린아이의 얼굴에, 빛이 닿았다.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며 무작정 발길을 옮기던 남자의 옷자락에, 빛방울이 묻었다.

샤아아아아···.

빛방울이 민들레 꽃씨처럼 휘날렸다.

도시의 저잣거리에. 사거리에. 기둥이 허물어진 어느 상점에. 누군가가 일을 마치고 돌아갈 집에.

빛의 손끝이 부드럽게 세상을 쓰다듬었고,

[개정 완료.]

곧 멀어졌다.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마녀 역시 말문을 닫았다.

멈추어진 세계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우리 둘이 침묵했을 뿐인데도, 마치 세계가 숨을 죽인 듯했다.

그러나.

“---자자, 쌉니다! 싸요!”

얼마 안 가서 침묵은 깨졌다.

“에일브란트에서 막 건너온 사과입니다! 싱싱한 사과입니다! 나으리, 제철 과일은 엘프도 놓치지 않는답니다! 여기 싱싱한 사과 좀 보고 가십쇼!”

소리.

“요즘 목욕탕은 물이 영 아니야. 지저분한 게 눈에 보인다고. 나 참, 관료라는 작자들이 물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야 우리보고 뭘 믿으라는 건지···.”

소리가 들렸다.

내가 퀘스트를 받음으로 인해, 여태껏 멈추어져 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 참. 태자 전하들이 아주 말썽이라는군! 궁궐 담벼락에선 매일밤마다 폐하의 곡소리가 들린다지 뭔가. 소문에 불과하긴 해도 내 생각엔···.”

“오늘 저녁은 우리끼리 한잔. 어때?”

“한 푼 적선하세요. 한 푼이요! 여신님께선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엘프도 입맛을 다신다는 에일브란트 사과입니다! 쌉니다!”

세계가 다시 숨을 쉬었다.

“거기!”

그중에는 우리를 향한 숨소리 또한 있었다.

“웬 놈들이냐!”

마녀와 내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 성벽에서 한 명의 장군이 검을 들고 있었다.

장군은 인상을 무섭게 찡그렸다.

“무엄하구나! 어떤 놈들이 감히 제국의 성루를 짓밟느냐! 당장 내려오거라!”

어딘지 모르게, 그 얼굴이 낯익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사르바스 아이김···.”

장군 NPC의 두 눈이 커졌다.

나 같은 인간을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은 눈길이었다.

“허! 망측한 도적이로다. 네놈이 어찌 내 이름을 아는 것이냐?”

내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렇구나.’

본래는 12층이 아니라 11층에 있어야 할 장군.

누구보다도 먼저 헌터들을 친절히 맞이해주는 제국인.

내가 일부러 죽임을 당하여서 스킬을 복사한 NPC.

“이놈들아! 내려오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느냐!”

그런 남자가 생판 남을 대하듯 소리치고 있었다.

12층만이 아니라 11층의 역사마저 바뀐 것이다.

두근.

‘아.’

문득, 심장이 가슴을 쳤다.

정체 모를 감정이 차례대로 나의 심장과 가슴, 그리고 전신을 휘감았다. 식도까지 막혀버렸는지 말이 잘 안 나왔다. 왜일까? 세계는 숨소리를 되찾았지만 정반대로 나의 목소리는 뭔가에 빼앗긴 것 같았다.

“······.”

입술을 달싹이며 장군을 내려봤다.

벌써 오랜 이야기가 되어버린 기억.

장군 NPC가 나한테 해준 말들을 회상하면서.

-용사의 목숨을 끊다니요.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제국을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회의적이었습니다. 자기 세계도 아닌데 과연 용사라는 자들이 우릴 위해 열심히 싸워주겠냐고. 하지만 노파심에 지나지 않았군요. 재차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장군의 미소가 마지막으로 떠올랐다.

-부디, 저희 제국을 잘 부탁드립니다.

“······.”

아아. 그래.

이런 것이구나.

“흐.”

이유는 몰라도 내 입가에선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하핫, 으하! 하아, 아하하하핫!”

배꼽을 잡고 웃었다.

장군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올려봤다. 병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마녀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배후령은 미친놈 보는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제국인들이 나를 잊었다는 슬픔도 물론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한 감정이 나의 온몸을 사로잡은 것이다.

“아아.”

크게 심호흡을 했고.

조금 더 크게 입을 벌렸다.

“----지켰다!”

내 입에서 사자후가 터졌다.

장군의 어깨가 움찔, 움츠러들었다.

“지켰다!”

성벽에 선 병사들이 멈칫했다.

“너희의 제국을 지켰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붉은 오러에 실어 사자후가 널리 울리도록 하였다.

“나는! 약속을 지켰다!”

제국의 인간들이 고개를 돌렸다.

저잣거리에서. 사거리에서. 상점가에서. 누군가의 집에서.

내 목소리는 도시의 장벽을 울렸고, 궁궐의 담벼락에 울렸으며, 알현실의 벽에도 부닥쳐서 울렸을 것이다. 웃었다.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메아리치고 또 메아리쳐서 탑을 울렸다.

“한점의 부끄러움 없이!”

나는 성루에 우뚝 서서 하늘을 가리켰다.

“단 한 점의 후회 없이!”

수백 일.

손바닥이 유성펜으로 새까매질 때까지,

그저 한 명의 희생자도 보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수백 일을 건너서 마침내 가을비의 마왕을 물리친 것이,

“자랑스럽다!”

기뻤다.

“내가, 해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런 감정은 처음으로 느껴보았다.

쓰레기처럼 살았다.

남을 질투하고, 다른 사람을 비웃고, 술을 마시는 것만으로 하루를 소일했다. 소진했다. 냉정함이라는 명목으로 내 심장을 얼렸다. 인생을 버렸다. 나를 버렸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스테이지 클리어.]

적어도 오늘의 나는 떳떳하였다.

[금일, 12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사람들한테 떳떳하였다.

마녀와 검성에게도.

세상을 향해서도.

무엇보다 나 스스로 떳떳하였다.

[모두에게 다시 한번 알립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자랑스러울 수 있었다.

[금일, 12층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그런 인간일 수가 있었다.

[공략 인원 측정 중···.]

[측정 종료.]

심장이 터질 정도로 기뻤다.

[공략자 3명을 공지합니다.]

제국의 하늘에 빛이 아로새겨졌다.

+

[공략 기여도 순위]

1위. 사왕(死王)

2위. 마녀(魔女)

3위. 검성(劍星)

+

아마도 NPC에게는 안 보일 글씨.

장군은 나의 사자후에 굳어버려 있었다.

“도,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사르바스 아이김!”

장군이 움찔했다.

나는 성루에서 그를 내려보았다.

“제국을 잘 부탁한다!”

“······.”

“미안하지만 용사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마왕을 잡아주었으면 됐지! 아마 너희 제국도 안 보이는 곳에서 썩었을 테고, 이런저런 문제가 많겠지만! 뻔하다만!”

나는 활짝 웃었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어떻게든 알아서 해라!”

“······.”

“우리 존재 빠이팅이다! 아자, 아자! 화이팅!”

장군이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뻐끔 벌렸다.

“아,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당최, 도무지···.”

-으하하하하!

배후령은 배꼽을 잡고 허공에서 뒹굴었다.

-으힉! 으히히히히! 끄흑!? 미, 미친놈! 또라이 새끼! 좀비 새끼! 쫌 어른스럽게 회한의 감정에라도 잠기는 건가 싶었더니 와, 이 또라이는 그냥 대놓고 지 자랑질을 해버리네! 사고구조가 궁금하다, 야! 김좀비! 내가 인정한다! 넌 진짜 연구 대상이야!

‘아.’

나는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럼 어떡해요? 오늘의 제가 너무 사랑스러운데.’

-미, 미친놈···! 김또라이 새끼! 으헉, 오냐! 괜히 찌질거리진 않아서 마음에 든다! 으히히히힉!

그렇게 웃어놓고도 아직 부족하다는 듯 배후령이 허공을 뒹굴었다.

나는 마녀를 돌아봤다.

“자자, 흑룡주! 뭐 하세요. 어서 13층으로 가시죠!”

“······.”

마녀가 오묘한 낯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상위 헌터들 중엔 원래 정상인이 잘 없지. 괜찮아. 이해한단다. 그래도 이단심문관보다는 나아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할게.”

“네?”

“전이.”

마녀가 내 손을 잡고 스킬을 발동했다. 다음 순간, 우린 다시 황야에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별다른 예고도 없이 검성의 팔뚝을 잡았다.

흑룡의 주인은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입장권은 항상 1위한테 먼저 주어져.”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우리를 대표해서 전송을 말하도록 해. 사왕.”

처음으로 내가 이명으로 불린 순간이었다.

오늘은 처음인 경험이 아주 많은 날이었다.

“예.”

내가 미소를 지었다.

“-전송.”

그리고.

나의 무대는 다음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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