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44화 (44/400)

44화.  < 마왕의 이름.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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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길었다.

긴 시간을 건너서 이곳까지 왔다.

[스킬로 인한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이제 슬슬 어느 악몽에 대하여 얘기할 때가 된 것 같다.

열두 번째 층에서 벌인 전투.

한점의 물방울이 되어 격류에 휩쓸렸던 순간.

[페널티 심도는 중(中).]

마왕에게 죽임을 당하고서 본 것이다.

[아귀도(飯鬼道)입니다.]

트라우마.

악몽의 주인이라 불리는 자의 악몽을.

[페널티 개시.]

[몬스터 가을비의 마왕의 트라우마를 생성합니다.]

불길에 타오르는 마을.

어느덧 불바다의 한복판에 나는 외로이 서 있었다.

아니.

-태워라!

외로이 서 있는 것은 어쩌면 내가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겐 배후령이 함께했다.

정말로 혼자서 불지옥에 떨어진 자는 화마(火魔)의 저편에 있었다.

-마녀의 둥지를 불살라버려라!

에스델.

변방의 성녀.

망가진 백성을 구원해주는 이.

-자비를 보이지 말라. 전부 저주에 걸린 괴물들이다!

-한 명도 놓치지 마라!

에스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이 안 나왔다.

도저히 이해하지 못해서, 입만 겨우 뻐끔거렸다.

왜?

어찌 인간이 인간을 불태우는가?

자신에게 감사하다고 말한 부모들. 자신에 의해서 새로운 삶을 부여 받은 갓난아기들. 그 아이들이 전부 학살당했다.

-영주님의 뜻이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병사들이 마을의 목책을 부서트렸으며,

-국왕 전하께서 명하셨다!

제각기의 문장을 가진 기사들이 칼을 내리쳤다.

-떠오르는 해를 파수하시며, 땅과 바다 사이에 거하는 모든 이들의 수호자이신 대동방의 황제 폐하께서···.

-교황 성하께서 말씀하시길, 감히 성녀라 자신을 참칭하는 이단자를···.

-숲의 대현자께서 당부하신 일이니, 정령이시여, 이 화살에···.

-인어의 여왕께서 나눠주신 이 보옥이 우리의 지팡이에 마력을···.

-태고의 화산에서 명예로운 약조를 지키기 위해 우리 용기병들도 왔다! 자, 기룡들아! 불을 뿜어 저 사이한 것들을···.

그들은 소리높여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밝혔지만, 그럼에도 에스델은 알 수가 없었다.

저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누구이길래 인간을 불태운다는 말인가.

-아아, 아아악!

-살려주세요!

저들은 용의주도했다. 마치 큰 사냥감을 잡을 때처럼 마을을 에워쌌다. 피할 구멍이 안 보였다. 마을을 빠져나가려는 일가족이 있었지만, 곧 붙잡혀서 사냥당했다.

도망칠 곳은 오직 마을의 광장뿐.

창에 찔려서,

칼에 쫓겨서,화살에 당해서,

망치에 맞아서, 지팡이에 노려져서, 불에 데여서,사람들은 점점 더 광장으로 몰렸다.

-쿨럭!

마을 한가운데.

자신이 만들어낸 낙원의 한복판.

연기가 자욱해진 그곳에서, 에스델은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만 참으렴. 조금만···.

한 아비가 등을 구부렸다. 세상의 땅바닥과 아비의 허리 사이에 작은 빈틈이 생겼다. 그 빈틈으로 어린 자식이 숨었다. 아비는 튀는 불똥을 대신 맞아주었으며, 매캐한 연기를 대신 삼켜주었다.

아비가 먼저 죽었다.

자식은 아비보다 1분 더 살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어느 늙은 할아비와 할미가 서로 껴안았다. 동반자의 마지막을 배웅하려는 것일까? 에스델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펴보니, 아니었다. 할아비와 할미의 틈새로 갓난아기가 파고들어 있었다.

-조금 더···.

불길이 번진 순간, 할아비와 할미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늙은 부부는 떨어지지 않았다. 불꽃에 팔꿈치가 타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새까만 숯덩이가 될 적에도 노부부는 꽉 껴안고 있었다. 마지막을 작별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아이라도 살리려는 포옹.

부부가 먼저 죽었다.

빈틈에서 흘러나오던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는, 1분 뒤에 끊어졌다.

하나둘씩.

광장에서 기침 소리가 및었다.

과수원을 차려서 마을 제일의 부자가된 가족도. 새벽마다 밭에 나가서 농사일을 한 노인도. 가을이 되면 밀밭을 명하게 쳐다보며 ‘나 락이 누렇게 익어버렸네’ 하고 중얼거린 노파도.

_왜…?

어느 백성이나 망가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위장에 잠든 불치병. 뇌와 등을 좀먹은 암. 눈앞이 보이지 않는 눈. 앞을 걸을 수 없는 발. 세상에 병은 많고도 많아서, 에스델은 기꺼이 질병을 집어삼켰다.

그 모든 질병을 삼켰을 때보다,

-어찌……?

지금 더 심장이 까맣게 물들었다.

연기에 그을렸다.

불길에 타올랐다.

가만히 입술을 열어보았다.

-······.

입안에서, 탄내가 났다.

에스델은 자신의 심장이 조금 까매졌음을 알았다.

하룻밤 동안 마을이 타올랐다.

하룻밤 동안 에스델이 타들었다.

버석!

에스델이 손끝으로 잿더미를 긁었다.

아무도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마을이 불꽃에 휘감긴 것을 보고 병사들은 유유히 떠난 것이다.

타오르고 남은 낙원의 잔해.

-레판도르···.

그곳에 한 아비의 시체가 있었다.

-다제나···.

아비 아래에 아이의 시체가 있었다.

-솔라페···,조우······ 우겐사체···.

팠다.

-모바자이잔···. 토포··· 엔나······ 가르초프···.

맨손으로. 손끝으로.

잔해밖에 남지 않은 마을의 잔해를. 잿더미로 내려앉은 낙원의 잿더미를. 손가락이 시꺼멓게 물들고, 손톱이 깨져 흐른 핏물마저 검정으로 변색되어도. 에스델은 팠다.

-······.

그리고, 입을 벌려 먹었다.

인간의 살을.

인간의 뼈를.

살과 뼈조차 없다면, 잿더미를.

-······, ···. ······.

사람의 살은 더는 향기롭지 않았다. 아무런 식욕도, 어떠한 아름다움도 느낄 수 없었다. 탄내. 그저 타고 남아버린 잔향뿐. 그럼에도 에스델은 쉬지 않고 타버린 것들을 먹었다. 집어삼켰다. 게걸스럽게. 설령 추악할지라도.

에스델의 입가는 까맣게 더러워졌다.

에스델의 이빨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가여운 것···.

그녀의 식도는 검정색으로 칠해졌으며, 위장에 진물이 고였다. 핏물은 진액이 되어 온몸으로 퍼졌다. 핏물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 눈물도 아니었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눈물이라면, 어째서 투명하지 않단 말인가.

-가여운 것들······.

그러니 그것은 한낱 구정물이다.

다른 인간들이 쓰다 버린 하수물이 흐르고 또 흘러서, 자신에게 도착한 것이다.

오갈 데가 달리 없어, 그저 자신의 심장에 고여버린 것이다.

-가여운 것들아···.

구정물이 검게 흐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너희가,

광장에 흘렀다.

-너희가, 너희도. 너희도 인간이거늘.

마을에 흘렀다.

-너희도 인간으로 태어나 생의 아름다움을 알 것이며, 너희도 인간이어서 눈물을 흘릴 줄 알진대, 어찌. 어찌하여서.

황야에 흘렀다.

-괴물이라 불렀느냐. 괴물이라 태웠느냐? 아름다울 줄 알고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로는 정녕 부족했더냐. 그리하여 부르고 태우는 데 거리낌이 없었더냐.

산야에 흘렀다.

-그리하여 너희는 여전히 인간으로 남고, 이것들은··· 나의 아이들은 영원토록 괴물로 남아야 하는 것이더냐? 그것이 너희의 세상이더냐.

원한은 비처럼 흐르고.

-그 세상에서, 너희만은 웃음을 짓는 것인가. 너희만이 아름답기를 허락받았느냐. 너희만이 눈물을 흘릴 자격을 가졌느냐. 너희만이 인간이더냐. 너희에겐 사람이 사람이려면 증명이 필요한 것이로구나.

심장은 메아리쳐 우짖는다.

-그렇다면 이제는 너희가 증명하라.

비가 내렸다.

-나에게 보여라.

비가 내렸다.

-너희를 저주하마.

비가 내리므로.

이제 어떤 마을도 불타지 않을 것이고, 어느 변방의 어귀도 불길에 휩싸이지 않을 것이다.

나의 아이들. 나의 피. 나의 심장이 빼앗긴 색깔이여.

내 핏물은 이미 색을 잃어 다만 잿더미의 구정물로 흐를 뿐이지만, 이 세상에 내리는 비가 붉어서 나의 피를 대신하여 증거하는구나.

-너희의 악의에 삼켜져라.

비가 내렸다.

비가.

-너희가,

비가,

비가 내렸다.

-너희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며,

계속.

-그리하여 너희를 그렇게 만들었다.

비가,

비가 내려서···

-공자야.

깜빡.

-깨어라.

목소리.

-여기는 너의 지옥이 아니다.

나직한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트라우마 재현 완료.]

[피대상자의 자아(自我)가 유지된 것을 확인.]

[페널티를 종료합니다.]

일도.

단지 한 자루의 칼을 쥐었으니.

양단 (雨斷).

다만 내가 베어야 할 것이 세상에 남아서다.

-공자야!

깜빡.

-지금이다!

눈앞을 바라보았다.

아니.

눈앞이 내게 보였다.

-머리가 비었어!

수유(煩突)의 시간을 영겁인 양 부유하고.

찰나를 건너온 나의 눈앞엔, 온몸이 새까만 자가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구정물이 흘렀다.

물은 베어도 여전히 물이어서, 베어야 할 것이 많았다.

일도양단.

베어야 할 것을 베었다.

- 크아아아아!

베이면서, 검은색의 왕이 구정물을 흘렸다.

어쩌면 구정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구정물이라면 어째서 붉겠는가.

피.

새빨간 핏방울이 마왕의 몸에서 흘렀다.

-욱··· 크윽···!

마왕이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을 내디뎠을 때, 마왕의 오른팔에선 구정물이 흐르지 않게 되었다.

마왕이 디딘 발자국에는 여전히 검은색 웅덩이가 고였으나, 한 발짝일 때보다 두 발짝일 때, 두 발짝일 때보다 세 발짝일 때, 웅덩이는 점점 더 졸아들었다.

어느새.

-큭, 후윽······ 으으윽···.

마왕의 몸에선 구정물이 벗겨지고 있었다.

뚜욱. 뚝.

더 이상 구정물이 흐르지 못해 핏물이 대신 흘렀다.

생명의 색이란 본래 그러했는지 붉은 것이었다.

[가을비의 마왕의 존재가 흐릿해집니다.]

그곳에 절대적인 무위를 자랑하던 존재는 이제 없었다.

-안 된다······ 안 되는, 읏···!

마왕이 오른손으로 왼팔을 감쌌다. 왼팔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핏방울 한 점 한 점이 새어나가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예전에 엎어진 물을 어떻게든 되담으려는 사람처럼, 마왕은 상처를 꾹 막았다.

-나의 아이들······ 이렇게는··· 원망, 원성을···.

“퇴각해라.”

내가 나직이 목소리를 냈다.

사람의 칼이 몸을 양단한다면 목소리는 혼을 절단한다.

내 목소리에 베인 것처럼 마왕이 멈칫했다.

“스무 번째 층으로 물러서라. 어차피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해. 너의 본거지로, 최후의 마왕성으로 얌전히 돌아가.”

이미 ‘월드맵’만 봐도 전황은 명명백백했다.

푸른색 영토. 인류의 강역은 다시 대륙을 뒤덮었다. 중간 산맥을 넘었다. 여신의 방패라 불리우는 협곡을 넘겼다. 외눈의 거인이 굽어 보는 신전. 요정들이 춤을 추는 삼림. 인어가 뛰노는 폭포. 용암이 흐르는 산야…. 대륙의 벌판에서 구석까지 푸르지 않은 영토가 없었다.

반면에 붉은 영토는.

“이제 너의 출발점으로 돌아가라.”

한 점.

고작 하나의 점(占)에 불과했다.

아무리 드넓은 벌판을 태워버린 불길이라해도, 마지막엔 한홉의 불씨가 되어 사그라들고. 설혹 하늘의 밑둥까지 범람한 물길이라 하여도, 종래에는 한점의 물방울이 되어 그치듯.

광활한 세계지도엔 반닷불같이 미약한 빨간점만이 찍혀 있었다.

그곳이,

“네 종착점이다. 마왕.”

마왕이 잇소리를 냈다.

-네, 놈······.

마왕은 고개를 들었다. 구정물이 멈추어서 핏물이 흘렀으나, 여전히 마왕의 몸에서 절반은 시꺼멓게 타 있었다. 얼굴도 그랬다. 붉은 색 눈동자가 유독 흉흉하게 빛날 뿐. 아직 잿물에 잠긴 얼굴로 마왕은 이쪽을 노려보았다.

"흠."

검성이 말없이 칼자루를 쥐었고.

“마지막 일격은 사왕한테 양보할게.”

마녀가 느긋하게 여섯 거울을 거느렸다.

-······.

어디를 봐도 역전의 기회 따위는 없었다. 빈틈이 안 보였다. 마왕의 트라우마를 엿본 탓일까. 꼭 작금의 상황이 병사들한테 둘러싸인 마을과 같이 느껴졌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인의 장막.

-크윽!

마왕에겐 도망치는 것 말고 답이 없다. 그런데도 선뜻 답을 고르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정답이 아님을 마왕도 알기 때문이다. 똑같다.

불길을 피해 광장으로 도망치는 것이 삶을 겨우 1분밖에 늘려주지 못하듯. 우리에게 내쫓겨서 20층으로 퇴각한다 한들, 패배의 순간이 약간 뒤로 미루어질 뿐이다.

-제기랄···! 제기랄!

마왕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가을비의 마왕이 퇴각을 결심합니다.]

[가을비의 마왕이 20층으로 후퇴합니다!]

그래.

불 타죽을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도망치는 것이 사람이지.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마왕은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마왕의 퇴각을 확인.]

[역사개변.]

[19층 스테이지를 개정합니다.]

세상이 또 한번 빛방울에 감싸였다.

마왕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나는 뒤를 돌아봤다.

"검성님.”

“음.”

“흑룡주.”

“그래.”

“죄송합니다. 20층은 저 혼자서 깨고 싶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저 마왕과는 결착을 내고 싶습니다. 혼자 가도록 보내주십시오.”

"······."

마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응. 난 괜찮아. 여기까지 오는 데 당신이 제일 공헌했고···. 어차피 5일 동안은 당신 말대로 움직이지 않기로 했는걸. 그걸 내 멋대로 깨고 도와준 거니까, 이번엔 정말로 가만히 있어줄게.”

“흐음.”

검성이 칼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오늘이 끝나면 벌써 5일째라네. 20층을 정리하고 나면 본인과 따로 만나게나. 자네와 나 사이에는 나누어야 할 말이 많을 것일세.”

“예. 알겠어요.”

나는 다시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향했다.

“전송.”

스무 번째 스테이지.

[환영합니다, 사왕.]

마왕.

에스델이 태어났던 마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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