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46화 (46/400)

46화.  < 마왕의 이름.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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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두려움.

어떤 감정보다도 인간적인 감정.

“히···.”

타천한 성좌의 얼굴을 물들인 것은 그런 감정이다.

미지의 앞날에 대한 불안.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것’은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한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자, 그것이 겁에 질려 신음했다. 그러나 한낱 신음으로는 누군가의 발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난 네놈이 인간이 되어주어서 정말 반갑거든.”

내가 말했다.

“인간이 아니라 계속 괴물이었어 봐. 내가 힘들게 죽여봤자 [백귀소환]의 대상이 되지 못하잖아? 아니, 이제는 [백귀환생]인가. 스킬 명이야 뭐든 상관없긴···.”

“으아아아아!”

휘청.

그것은 마지막으로 공포에 저항했다. 마왕의 붉은 검. 이젠 제대로 들지도 못할 정도로 무거워진 칼. 최후의 발악으로 그 대검을 잡은 것이다.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팔뚝이 붉은 검을 들어올려서, 날 향하여 마구 휘둘렀다.

"음."

물론 그런 마구잡이에 내가 당할 리 없었다. 가뿐히 발을 놀려서 피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타천한 성좌가 덜덜 떨면서 검을 휘둘렀다.

배후령이 툭 중얼거렸다.

-글러먹었어.

그는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자세부터 어설퍼. 발이 땅을 제대로 딛지도 않고. 검을 휘두르는 주제에 앞을 제대로 보지도 않아. 검로(劍路)에 확신이 안 담겼잖아, 어이. 그거 휘두른 다음엔 어쩌려고? 뭐 하려는 거냐?

배후령이 투덜거렸다.

-쯧. 전형적으로 스킬과 오러에만 의존한 검사의 말로군. 아니, 검사조차 아니지.

19층을 클리어하고 난 이후 쭉 침묵을 지켰지만, 눈앞에서 타천한 성좌가 벌이는 ‘촌극’이 검제의 안목엔 심히 불쾌한 듯했다.

-봐라. 좀비야. 저걸 봐. 기본기에 충실해야 한다고 내가 누누이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인간이 의지해야 할 건 결국 자기의 손이랑 발밖에 없어.

배후령이 말했다.

-네가 결말을 보여줘라.

보여주었다.

나는 한번의 검을 휘둘러서 하나의 검을 깨트렸다. 차아아앙! 칼과 칼이 부딪히면서 사납게 울어댔다. 타천한 성좌는 경악한 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

“아,"

일도양단.

눈앞에서 붉은 대검이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이다.

“아아, 으··· 아아아···.”

검이 조각난 것과 더불어서 타천좌의 마지막 반항심도 부러졌다. 털썩. 가녀린 짐승은 길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카시아 꽃잎이 그것의 작은 엉덩이에 깔려 뭉개졌다.

‘마왕의 말로인가.’

나는 땅바닥에 좌절한 그것을 차분히 내려보았다.

‘죽음을 수확하는 자라···.’

문득 탑이 나한테 이명을 건네주면서 한 말이 떠올랐다. 죽음을 수확하는 왕에게 경의를. 탑은 그렇게 고했다. 왠지 모르게 지금의 상황에 들어맞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해졌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네.’

나는 천천히 칼자루에 힘을 줬다.

타천좌의 목을 취하기 위해 검을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어. 좀비야? 근데 잠깐만 기다려봐라.

"······."

-한참 있는 폼 없는 폼 잡고 있는 데 끼어들어서 미안. 아니, 사실 별로 미안하진 않고. 그냥 심심해서 해본 말이야. 암튼 걔 죽이지 말고 좀만 기다려봐.

언제나 그러듯 검제가 ‘검제’했다.

“아, 씨. 왜요?”

나는 짜증이 확 치밀어서 그냥 속마음이 아니라 입으로 대꾸했다. 어차피 20층엔 검성도 마녀도 데려오지 않았겠다. 내가 미쳤다고 오해할 헌터도 없었다.

-아니. 네가 되게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뭘요.”

-들어와. 쟤가 이제 몬스터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지. 근데 그렇다고 인간이냐? 내 말은, 좀비 너랑 똑같은 인간으로 취급받느냐고.

혹시 그냥 평범한 NPC가 된 걸지도 모르잖아?

“그게 뭐 어때···.”

-NPC도 죽이면 [백귀환생]에 소속되는 거 확실해?

내가 검을 멈추었다.

“어···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요?”

-넌 존나 호구 새끼여서 아직까지 NPC를 한 번도 죽여본 적 없잖아. 몬스터가 [백귀환생]에 소속되지 않는단 건 분명하지만 NPC도 그런지는 아직 모른다고.

"······."

-그냥 분위기로 밀어붙였다가 나중에 보니까 [죄송! NPC는 스킬 대상이 아니었네요!] 같은 결말이 나면 어쩔래? 응? 갑자기 분위기 싸해지는 거 네가 책임질 거냐?

“아니, 그치만···.”

-야. 김좀비. 정신 차려!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탑이 이런 부분에선 무지 냉정해.

이런 X발.

여전히 타천좌는 채 두려워하는 낯빛으로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에 물든 눈.

내가 욕설을 흘리면서 스킬 카드를 다시 확인했다.

+

[백귀 환생 (百鬼還生)]

랭크: SSS

효과 : 당신이 직접 죽인 자들을 소환합니다. 사자는 생전의 능력을 계승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할 경우, 사자는 생전의 기억과 외형을 계승합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만 몬스터로 소환됩니다.

※단, 일주일에 1번만 소환할 수 있습니다.

+

-봐봐. 당신이 직접 죽인 ‘자’들이라고 하잖아.

배후령이 카드를 가리켰다.

-이 ‘자’에 NPC가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지 네가 어떻게 아는데? 응? 확신할 수 있어?

“에, 엔피씨도 사람이에요. 사람.”

-오오. 그건 네 생각이시고요. 김좀비 씨.

배후령이 엄격하고도 근엄하시며 진지한 면상으로 말했다.

-저놈 모가지 따기 전에 먼저 탑이랑 협상해보거라.

“탑이랑 협상하다니···.”

-왜? 뭐 어때. 아까 보니까 혼자 알아서 잘 하더구먼. 이미 한 번 해본 일인데 두 번을 못하겠냐?

“음···."

그건 그렇다.

나는 조금 뻘쭘한 기분으로 하늘을 올려봤다.

“저기요. 탑님…?”

[탑이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다행히 이제 와서 개무시 당하는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아까 한정적이나마 ‘사도(使徒)의 권한’이 주어진다는 알림음이 들렸는데, 아마 그 덕분 아닐까? 적어도 당분간은 자유로이 탑과 의사를 소통할 수 있어 보였다.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

-야. 아까 전엔 탑한테 반말 까더니 왜 급하게 존댓말 찾냐? 웃긴 놈일세.

“그게 방금은 감정이 욱 하고 올라와서 저도 모르게 반말을··· 아, 됐어요. 좀 조용히 하십쇼!”

우리가 투닥투닥 다투는 와중에도 탑은 성실히 응답해주었다.

[탑이 당신의 질문이 무엇인지 확인합니다.]

“어디 보자. 으음. 그러니까 백귀환생 스킬은 NPC도 죽이면 사자로 인정해주는 겁니까? 아니면 저 같은 헌터만 취급하나요?”

그러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탑이 판단합니다.]

[해당 질문은 탑의 권한을 넘어섭니다.]

“예?”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내 예상을 더욱더 뛰어넘었다.

[탑은 질문자의 권한을 확인합니다.]

[통과. 사왕은 현재 임시 사도의 자격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탑은 사왕의 문제 제기를 정식 의제(議題)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탑은 만생(萬生)의 여섯 성좌에게 다수결 회의를 요청합니다.]

파아아앗!

하얀빛이 내 눈앞을 뒤덮었다.

'-어?'

찰나의 시간이 흘러 눈을 깜빡였을 때, 나는 이미 외딴 곳에 떨어져 있었다. 낯선 곳은 아니었다. 낯설지 않은 곳이어서 오히려 더 당황스러 웠다.

명계(莫界). 나의 어두운 지옥.

죽을 때마다 내가 돌아오는 스타트 지점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죽지 않는 이상에야 올 일이 없는 곳.

‘여긴 왜…?’

그 순간 목소리가 나의 의식을 환기시켰다.

[참가자를 확인합니다.]

아니.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제6좌. ‘모든 가극단의 작가’가 참석합니다.]

[제5좌.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참석합니다.]

[제4좌. ‘맹목을 관조하는 달’이 참석합니다.]

[제3좌. ‘본산(本山)을 창조한 자’가 참석 합니다.]

[제2좌. ‘공허에서 춤추는 신’이 참석합니다.]

"······."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끝없는 어둠밖에 펼쳐지지 않아서, 내 눈엔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러나 설령 보이지 않는다해도 느낄 수 있었다.

존재감.

[만생의 여섯 성좌가 참석한 것을 확인.]

[탑은 임시 사도 ‘사왕’의 문제 제기를 공유합니다.]

사방에서 존재감이 느껴졌다.

단순히 인기척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압도적인 존재감이.

그것들은 가만히, 암흑의 너머에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유 완료.]

시선이 느글거리는 공간에 목소리가 흘렀다.

[의제에 대한 다수결 회의를 진행합니다.]

[스킬 ‘백귀환생’의 대상에 NPC가 포함되는가?]

[NPC가 포함되는 것에 동의한다면 찬성해주십시오.]

[NPC가 포함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반대해주십시오.]

나지 막하게.

형체 없는 존재들이 입을 열었다.

-Gesh··· la······ ZaquA cho··· Deo······.

알 수 없는 언어.

-Sato, yovela? Weloyo-na Sh니···! Deo phenta···.

-kunto, nyola Gesh-ve-Nail na? Nai-Gesh-Nail na?

그것은 그림자로 이루어진 언어 같았다.

보이지 않는 뱀들이 이곳에 가득하였다. 왼쪽과 오른쪽에서, 위쪽와 아래쪽에서, 아니, 코앞에서 쉭쉭거렸다. 쉬익··· 쉭···. 그것의 목소리는 뱀의 혓바닥이었다. 혓바닥은 붉고 길어서, 내 귓구멍에 흘러들어 뇌(腦)의 한 모퉁이를 건드렸다. 핥았다.

-Gesh··· Mula-Gagamia······ cho Gretehen Weloyo···.

-Nail.

아찔했다.

어지러웠다.

분명히 지금의 나는 몸이 없는 의식뿐일 텐데, 구토가 치밀었다. 토하고 싶었다. 뭐라도 좋았다. 뭐든지 뱉어버리고 싶었다. 뱃속에 기름기가··· 아니, 뇌에 기름기가 스며들었다.

영혼이 바닥까지 혓바닥들에 핥아지는 감각.

-Layo na.

그 때, 목소리가 일제히 멈추었다.

-Gesh. Nail. Nai-Gesh-Nail.

-······.

-······.

-Deo zakun.

적막.

공허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어떤 존재도 입을 벌리지 않았다. 침묵했다. 귓구멍에 흘러들어서 나의 뇌수를 핥아 마시던 목소리들··· 그것들도 어느덧 멈추었다. 그제야 간신히 숨을 쉰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탑에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나는, 힘겹게 정신을 차렸다.

‘탑에 있는 존재들은 어떤 언어를 쓰든 다 번역되어서 들려···. 그런데 이들은 다르다. 탑 밖에 거주하는 자들이야. 가을비의 마왕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어쩌면 이 탑을 설계한 장본인들일지 몰랐다.

아직 내가 상상치도 못하는 어딘가에 도사리는 자들.

잠시 긴 침묵이 있고 나서,

[의제에 대한 투표를 진행합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겨우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해졌다.

[제6좌 ‘모든 가극단의 작가’가 반대표를 던집니다.]

[제5좌 ‘신기루를 거니는 공녀’가 찬성표를 던집니다.]

[제4좌 ‘맹목을 관조하는 달’이 찬성표를 던집니다.]

[제3좌 ‘본산(本山)을 창조한 자’가 반대표를 던집니다.]

[제2좌 ‘공허에서 춤추는 신’이 기권합니다.]

찬성 2표.

반대 2표.

기권 1표.

"······."

내가 멈칫했다.

이들이 누구이고 어디서 온 존재들인지 아직 알 수 없다. 모른다. 단, 내 스킬 [백귀환생]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저들한테 있다는 것.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저들은 찬성도 반대도 아닌 표결을 내놓은 것이다.

왜?

저들은 나한테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 잠깐만.’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이제는 쉭쉭거리는 뱀소리가 없어진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직······ 투표하지 않은 존재가 1명 있다.’

그렇다.

이 공간에 소환될 적에 내 머릿속에 똑똑히 들려왔다.

「탑은 만생의 여섯 성좌에게 다수결 회의를 요청합니다.」

어디 그 때뿐이던가?

뱀의 목소리들이 쉭쉭거리기 직전에도 비슷한 알림음이 들렸다.

「참가자를 확인합니다.」

「만생의 여섯 성좌가 참석한 것을 확인.」

‘그래. 여섯 명이라고 했어!’

탑은 이곳에 참석한 존재가 여섯이라고 보장했다. 그렇다면, 지금 벌어진 투표는 이상했다. 찬성 2표. 반대 2표. 기권 1표. 다 합쳐서 다섯 명밖에 안 됐다.

나머지 1표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그리고,

-······."

-······."

나머지 1명이 누구이길래 모두가 침묵하는 것인가.

'······.'

굳이 이 공간에 참석할 필요가 없는 이.

처음부터 이곳에 머무르므로, 올 필요가 없는 이.

언제나 항상 이곳에 있어서 모든 것을 아는 이.

탑의 주인.

‘……저는.’

나는 어두운 공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곳에 가장 무거운 존재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저는, 찬성이 맞다고 생각해요.’

최대한 차분하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까지 고민해온 바를 나직하게 말했다.

‘만일 NPC가 스킬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보죠. 그럼 어떻게 마왕은 수많은 몬스터를 소환했지요? 마왕이 학살한 제국의 인간과 왕국의 백성도 전부 NPC였을 텐데요.’

시선들이 조용히 날 쳐다보았다.

‘물론, 여러분이 걱정하는 게 뭔지 짐작은 가요. 제가 NPC를 마구잡이로 죽인 다음에 소환수로 부릴까봐 염려하는 거겠죠···. 하지만, 저는 제가 어떤 인간인지 충분히 보여드렸다고 자신해요.’

어두운 공간.

나는 존재감이 느껴지는 방향을 차례, 차례,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저 ,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

‘앞으로도 그렇게 살진 않을 겁니다.’

결국 똑같다.

상대가 아무리 강대한 존재여도 내가 취할 방법은 정해져 있다. 똑같이 두 가지다.

맞서 싸우거나. 아니면 설득하거나.

‘마왕은 NPC를 죽이면 소환수로 부릴 수 있는데 저는 그럼 안 됩니까? 불공평하죠.’

-나쁘지 않네요.

그 순간 무언가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으며,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오싹했다. 음절이 하나씩 끊어질 때마다 등골에 전류가 흘렀다.

-하지만 번잡해요.

그 목소리는 웃음기를 흘리고 있었다.

-사왕. 머리가 아니라 심장으로 말해보세요.

'······.'

나는 조금 침묵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말을.

‘저 마왕은, 제가 잡은 사냥감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제 꺼니까 건드리지 마십쇼.’

목소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제 1좌.]

[‘만생(萬生)의 주인’이 찬성표를 던집니다.]

어둠을 조각내어서 깨트리는 웃음소리였다.

[투표를 종료합니다.]

[찬성 3표. 반대 2표. 기권 1표.]

[사왕의 스킬 ‘백귀환생’에는 NPC가 포함됩니다.]

쨍, 쩌억! 쩌저저억!

웃음소리에 어둠이 유리창처럼 쪼개졌다. 공허한 지옥에, 다시 공허한 빈틈들이 벌어졌다. 그곳에선 하얀빛이 흘러들었다. [사왕의 임시 사도 권한을 박탈합니다.]

눈부신 빛에 휩싸이면서, 나는 깨달았다.

[회의를 종결합니다.]

내가 탑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좀비야? 야, 김좀비?

깜빡

내가 눈을 다시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카시아 꽃잎. 배후령. 그리고 한때 가을비의 마왕이라 불린 타천좌였다. 아카시아 꽃잎에는 소리가 없었고, 타천좌는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다.

오직 배후령만이 공중을 기웃거리며 말을 걸었다.

-갑자기 왜 멍을 때리냐? 탑한테 한번 물어보라니까.

"······."

-김좀비 씨? 헤이, 좀비킹. 내 말 들리세요?

기분이 이상했다.

단지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는데··· 동시에, 영원한 시간이 흘러간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묘했다. 방금 겪은 기억도 순식간에 흐릿해져서,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검제 양반···.”

-와. 이제 좀 반응하네. 얘가 자꾸 좀비라고 놀리니까 뇌 수준도 진짜 좀비를 닮아가나 봐.

“당신은 안 들렸어요? 못 봤어요?”

-뭘?

“그게, 탑이 저를 명계에 소환해서···. 만생이라느니 무슨 좌라느니···. 막 탑의 주인 같은 존재가 나타나서 웃고··· 몰라요?”

배후령이 인상을 찡그렸다.

광견병에 걸린 개를 본 얼굴.

한마디로 미친놈을 쳐다본 표정이었다.

-좀비야, 미안하다. 내가 널 너무 좀비로 몰아갔구나. 내가 평생 누구한테 미안해본 적이 없는 인간인데 갑자기 막 미안한 감정이 드네···. 이제부터는 좀 적당히 놀릴 테니까 얼른 정신 차리렴.

"······."

모른다.

이세계에서 탑을 99층까지 공략한 검제도. 그리하여 ‘검의 성좌’라는 이름을 얻어서 배후령이 된, 눈앞의 전설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방금 내가 누구를 만난 거지?’

서늘한 감각이 목덜미를 휘감았고, 어깨로 퍼졌다. 마침내 등줄기까지 번졌다.

'도대체······.

꾸욱.

나는 애써 칼자루를 강하게 쥐었다.

‘···아니야. 침착해지자. 김공자.’

침을 한번 삼킨 다음, 눈앞을 바라보았다.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아직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아직 모르는 일이 많지만.’

길 한복판에 타천좌가 주저앉아 있었다.

‘내가 아는 것도 분명히 있다.’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지금, 나는 나의 사냥감에 최후의 일격을 날린다.’

언젠가 탑의 100층에 도달하면 무언가를 알 수도 있으리라.

배후령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 공자야? 그냥 죽이려고? 탑한테 안 물어봐도 괜찮아?

“괜찮아요.”

내가 말했다.

“이미 답을 얻었습니다.”

타천좌가 손을 뻗었다.

“자, 잠깐···! 살려······!!”

나는 검을 휘둘렀다.

이 검은, 내가 10층을 위령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무기였다. 처음으로 11번째 스테이지를 공략할 때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인 검 이었다.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12번째 스테이지에 감옥처럼 갇혔을 때, 언제나 항상 나의 손에 쥐인 검이었다.

나의 시간을 함께 하여 증명하는 칼.

그 검으로, 타천한 성좌를 베었다.

"······!"

아주 약간의 비명이 있었고.

비명이 끊어지면서 타천좌는 쓰러졌다.

피가 흘렀다.

핏물이 흘러 또 다른 아카시아 꽃잎을 물들였다. 한잎의 하양이 한점의 빨강에 물드는 것을 내려다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귀여, 되살아나라.”

꿈틀!

나의 그림자가 요동쳤다.

그저 평평할 뿐인 그림자에서 새까만 손이 치솟았다. 지옥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것 같은 그 손은, 이상하게도, 이 지옥에서 탈출하기 싫다는 듯 저항했다. 하지만 쓸데없는 발악이었다.

“일어서.”

그림자는 나의 명령에 반항하지 못했다. 그늘에서 머리를 뱉었다. 가슴을 뱉었다. 허리가 뱉어지고 다리가 뱉어졌다.

“이··· 흑, 아··· 아아···."

그것은 갓 태어난 영양 새끼처럼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아무리 다 자란 성인의 몸뚱어리를 갖추었다해도, 그것은 이제야 비로소 태어난 목숨에 불과했다.

그리고.

"에스델은 네가 빼앗은 이름에 지나지 않아. 네가 가져도 되는 이름이 아니다."

이 세상에 목숨을 탄생시킨 자에겐 언제나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의 첫 번째란, 내가 짊어진 생명한테 이름을 지어주는 것.

“아귀.”

긴 머리카락을 흘리며 그것이 나를 올려보았다.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아귀다.”

“너는 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라.”

일찍이 에스델이라 불렸고.

변방의 성녀로 칭송받았으며.

가을비의 마왕이라 경외 받은 이가 어깨를 떨었다.

“예······."

그 어떤 이름도 가질 자격이 없었던 자는, 비로소 내게 이름을 받아서, 머리를 수그렸다. 아카시아에서 하얀 꽃잎이 떨어져 그것의 머리카락에 묻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약속한 5일의 마지막 날.

"······저의 주군이여."

사왕과 마왕.

두 명의 왕 중에서 하나가 낙화(落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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