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덕질의 끝판왕.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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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마녀는 걱정스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너무 막 나가지만 말렴. 웬만한 실수는 다 커버칠 수 있어. 하지만 정말로 막 나가면 나도 언론을 통제할 수가 없단다.”
“저처럼 얌전한 사람도 없어요. 아시잖아요. 저 예언가예요, 오케이? 뭐가 제일 모범생스러운 답변인지 정도는 대충 압니다.”
“···정말 믿어도 되겠니?”
“에이. 당연하죠.”
나는 마녀한테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마이크를 넘겨주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마녀는 날 걱정하는 듯했지만, 정말로 괜찮았다. 나한테는 [비장의 방법]이 있거든.
“아. 아아.”
가볍게 목청을 쓰다듬었다. 스키커를 통해서 내 목소리가 광장에 퍼졌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사왕이라는 이명을 받은 헌터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찰칵! 찰칵!
빛이 장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나는 그다지 당황스럽지 않았다. 어제 인파에 한번 둘러싸였던 경험이 일종의 예방접종이 되어준 것일까? 생각보다 여유롭게 플래시 세례를 받아넘겼다.
“성함이··· 존 에반스 기자님?”
“예. 맞습니다.”
젊은 기자가 내 쪽을 똑바로 쳐다봤다. 기자 정신으로 불타는 눈동자.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내 정체를 폭로하겠다는 듯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꽤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음."
그런 눈길과 마주한 지금 이때.
내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은 딱 하나였다.
“전부 제가 부족해서 나오는 우려의 목소리라고 생각합니다.”
반면교사(反面敎師).
염제처럼만은 되지 말자!
“네?”
기자가 마이크를 잡은 채 눈을 깜빡거렸다. 아마도 내가 이런 식으로 반응할 줄은 예상치 못했나 보다. 한편, 나는 머릿속으로 염제의 뺀질거리는 면상을 떠올리며 말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전부 제가 부족해서 나오는 우려의 목소리라고 생각합니다.”
내 비장의 한수는 매우 간단했다.
‘무조건 염제랑 반대로 말하면 된다!’
나한테 뭐 대단한 인터뷰 솜씨가 있겠는가?
나는 마녀와 달랐다. 연설로 군중을 휘어잡는 재주 따윈 없었다. 재능이 없었고, 기술이 없었으며, 경험조차 없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남들이 모르는 지식을 알고 있었다.
바로 이 세상에서 제일 싸가지 없는 헌터의 인터뷰들을!
‘염제랑 정반대로만 가면 못해도 중박은 친다.’
나는 거의 십년 가까이 염제를 덕질했다. 덕분에 내 머릿속은 도서관이나 다름없었다. 염제가 저질러온 만행과 망언이 기록된 도서관 말이다.
만약 지금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내가 아니라 염제였다면?
이렇게 말했을 거다.
「전부 내가 잘 나서 20층까지 공략한 거다. 애송이 새끼들아.」
「내가 뼈 빠지게 고생해서 공략했는데, 뭐? 어쩌라고. 거기서 얻은 아이템들이나 경험치는 당연히 내 꺼지. 여보쇼, 기레기 나리. 내가 안 가지면 그럼 씨, 누구한테 드릴까요? 어?」
「네 애비요?」
지금 내가 즉석에서 지어낸 말이 아니다.
실제로도 저랬다!
‘그래서 회귀하기 전엔 기자회견 때 마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
일명 [네 애비요] 사건이다.
당연하게도 기자회견은 화려하게 폭발했다. 기자들이 욕하는 소리가 생방송으로 나갔으며, 마녀가 다급히 회견을 끝냈을 무렵엔 이미 때가 늦었다.
그야말로 대참사.
생방송이 급히 중단되었으나 비극은 끝나지 않았나니.
유수하가 기자들한테 맞불을 놓아서 부모욕, 처갓집욕, 쌍욕, 세상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은 전부 혓바닥으로 토해내는 장면을, 개인 방송 스트리머들이 고스란히 중계한 것이다.
‘괜히 별명이 염병이 아니라니까.’
소문에 따르면 그날 이후 마녀가 일주일 동안 병석에 누웠다던가.
아마 [네 애비요] 사건을 계기로, 마녀는 유수하라는 헌터한테 학을 뗐을 거다. 거대 길드들이 유수하와 갈라서게 된 것도 이 사건 때문 아니었을까.
‘과거에 염제는 이 기자회견을 거하게 말아먹었다.’
즉.
‘난 그냥 염병이랑 정반대로 말하기만 하면 돼.’
최악을 뒤집으면 최선이 되는 법!
나는 유수하의 망언집을 떠올리며 마이크를 꾹 잡았다.
「전부 내가 잘 나서 20층까지 공략한 거다. 애송이 새끼들아.」
“저에 관해서 여론이 뜨겁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대평가예요. 여기 계신 흑룡주와 검성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절대 혼자서 20층까지 공략할 수 없었죠.”
「내가 뼈 빠지게 고생해서 공략했는데, 뭐? 어쩌라고.」
“물론, 저는 최대한 노력했다고 자부합니다. 희생자 제로를 목표로 삼아서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저의 ‘희생’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헌터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깁니다. 무엇보다… 제가 좋아서 한 일이죠.”
「거기서 얻은 아이템들이나 경험치는 당연히 내 꺼지. 여보쇼, 기레기 나리. 내가 안 가지면 그럼 씨, 누구한테 드릴까요? 어?」
“그러므로 저는 제 권리를 주장할 생각이 없습니다. 10층부터 19층까지 전부 길드장 여러분께 권리를 맡긴 것도 그래서입니다. 20층을 독점하는 것 아니냐고 말씀했는데… 아니요. 20층은 일종의 [그린벨트] 지역입니다. 20층엔 본래 거기서 거주하던 탑의 주민들이 살 것이고요. 저는 단지 관리자 역할에 만족할 겁니다.”
「네 애비요?」
“에반스 기자님. 이상입니다.”
"······."
“또 질문 있으십니까.”
기자 정신으로 불타오르던 젊은이가 말을 더듬었다.
“어··· 없습니다.”
좋아.
나는 여기서 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만약 염제라면 저 기자의 말을 듣고 뭐라 반응했을까?
「오냐. 할 말 없으면 꺼져라, 미국산 돼지 자식아.」
빤히 상상되는 장면이 다.
여기에 추가로 더해서 가운뎃손가락의 우람함까지 선보이겠지.
‘보자. 이것과 정반대되는 대사를 읊으면···.’
내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아. 혹시 다른 질문 있으면 잠깐 받도록 하죠, 여러분.”
광장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말 잠깐에 불과한 침묵이었지만.
“여기요! 환문신문입니다!”
“질문 받아주십시오, 사왕님! 유탑일보입니다!”
“바벨탑 브로드캐스팅 시스템에서 나왔습니다!”
“사왕님!”
기자들이 일제히 팔을 들었다. 내가 말이 잘 통하는 상대라는 사실을 감지하자마자, 기삿거리로 삼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든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어미새를 향해 열심히 부리를 흔들어대는 아기 오리들.
‘와.’
나는 기자단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반면교사 전략 개쩔잖아?’
역시 염병.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재수 없는 싸이코패스.
언제나 나쁜 의미에서 나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남자였다.
지금도 나침반은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또렷하게 알려주었다.
「뭐? 환문신문? 너희랑은 인터뷰 절대 안 해. 거긴 꼰대밖에 없잖아. 신문만 펼쳐도 늙은이 냄새가 나더라. 야, 명색이 기자라면 좀 씻고 다녀라.」
나는 염제의 어록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럼 환문신문 기자님부터 질문하십쇼.”
효과는 굉장했다.
회견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말 그대로 대성공. 1시간 넘도록 즉문즉답이 이어졌건만, 나는 흔한 말실수 한번 안 저질렀다.
사실 회견의 막을 내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기자들이 어떻게든 기사 1줄이라도 더 뽑아내려고 아득바득 달려들었으니까. 결국, 마녀가 내 마이크를 빼앗아서 기자단을 다독여야만 했다.
“여러분! 조금 더 저희의 새로운 영웅에 대해 아시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마녀가 손끝으로 하늘을 쓱 가리켰다.
[00:05:27]
어느덧 빛의 시계가 0시 0분 0초에 가까워졌다.
새로운 스테이지가 개방되기까지 불과 5분 남짓!
기자회견을 끝내기엔 이것보다 더 적절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저희는 하룻밤의 휴식을 끝내고 오늘 다시 탑 공략에 몰두하겠습니다. 부디 깊은 관심과 따뜻한 응원으로 저희를 지켜봐주세요. 이번에도 희생자 제로라는 목표를 향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
“아아아….”
여기저기서 아쉬운 탄성이 흘렀다.
이대로 회견이 마무리되는가 싶었을 때, 한 명의 용자가 팔을 치켜들었다.
“흐, 흑룡주!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부탁드립니다!”
“네. 정말로 이번 질문만 받고 회견을 끝내겠습니다.”
“흑룡주와 사왕! 두 분은 어떤 사이입니까!?”
그 순간, 사람들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순수한 흥미. 약간의 음흉함.
유사 이래 인간이 제일 궁금해하는 떡밥이 바로 연애 얘기였다. 아마도 기자들은 마녀와 나를 그런 쪽으로 엮고 싶겠지.
“흐응···.”
마녀가 힐끔, 나를 돌아봤다.
개구쟁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마녀의 눈동자엔 어렴풋하게 장난기가 감돌았다.
“저희 두 사람의 관계라··· 그렇네요.”
마녀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희대의 명대사로 남을 발언이 나왔다.
“-친구 이상의 전우 관계입니다.”
술렁술렁.
기자단이 웅성거렸다. 친구 이상이라는 말에 집중해야 하는가? 전우(戰友)라는 말에 집중해야 하는가? 어느 쪽인지 갈피를 못 잡는 분위기였다.
질문을 던진 당사자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치, 친구 이상의 관계라는 말씀입니까?”
“글쎄요.”
마녀가 여유롭게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친구 이상의 전우 관계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착각과 오해의 소지가 없었으면 하네요.”
“착각과 오해의 소지라면···!”
“오늘 흑룡에서 주최한 기자회견을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마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관심과 응원을 보내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흑룡 길드장, 흑색마녀였습니다. 여러분 모두께 좋은 하루가 되길 기원합니다.”
기자들도 벌떡 일어섰다.
“흐, 흑룡주님! 이렇게 가시면 안 되죠!”
“방금 발언에 대해서 제발 더 상세한 코멘트 부탁드립니다!”
“흑룡주!”
“사왕님, 지금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왕님!”
와오.
기자들이 쉰 목소리를 토해내면서까지 아우성쳤다. 그렇지만 마녀는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나를 무대 뒤편으로 안내하면서 히죽 웃은 것이다.
“어서 가자꾸나.”
“어."
나는 기자단을 잠깐 돌아봤다. 다들 울상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불판 달궈놓고 휙 떠나버려요?”
“나 드라마 보는 여자야.”
마녀가 지그시 왼쪽 눈을 감았다.
장난스러운 윙크.
“원래 마지막엔 불을 질러야 인상이 깊이 남는단다.”
과연 탑에 군림하는 길드장의 관록이 엿보이는 한마디였다.
3.
무대 뒤편.
우리는 사람의 이목이 없어지는 곳까지 걸었다. 거기에 가서야 비로소 마녀가 "후우!” 하고 숨을 크게 내쉰 다음, 내 양손을 덥썩 잡아 버렸다.
“완벽했어! 사왕!”
마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기자회견 내내 무덤덤하게 표정을 관리한 분이랑 정말 동일인물이신가 싶었다.
“언제 또 인터뷰하는 방법은 배웠니! 기특해라!”
“어···.”
그냥 염제가 하던 거 반대로만 했는데요.
“겸손한 태도가 특히 플러스 요인이었어! 사람들은 영웅을 좋아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아하는 게 있거든. 바로 자기한테 머리를 숙여주는 영웅이야! 물론, 겸손함이 지나져서 비굴함이 되면 안 되지만··· 당신은 딱 좋았어. 세상에. 균형이 절묘했지 뭐니!”
그냥 염제가 하던 말 반대로만 읊었는데요.
“언론을 다루는 재주까지 있는 줄은 몰랐어. 아아. 도대체 이 아이는 여태까지 뭘 하다가 이제서야 나타난 거람! 탑도 공략해주지, 이미지도 잘 만들어주지, 내 어깨가 10배는 가벼워진 기분이야···!”
"······."
뭐지?
이렇게까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까 쫌 마음이 찔렸다.
싸이코패스를 반대로 흉내 냈을 뿐이라고는 차마 말을 못 하겠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바로 말하렴. 돈? 명성? 권력? 아니면, 연인? 걱정하지 말려무나. 탑에 존재하는 거라면 뭐든지 당신한테 안겨 줄게.”
“저야 가지고 싶은 건 그럭저럭 챙기고 있으니까 괜찮은데···. 흑룡주. 아까 친구 이상 전우 미만의 발언은 뭐였어요? 저 속으로 깜짝 놀랐잖아요.”
“아. 그거?”
마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
“아무것도 아니야. 일부러 연막을 좀 뿌린 거지.”
“연막이요?”
“응. 어차피 언론에선 있지도 않은 염문을 파헤칠 거란다. 그만큼 당신 이미지는 손상될 거고. 그러느니 차라리 당신이랑 나한테 시선이 집중되도록 연막을 뿌려두는 게 좋아.”
“그래요···?”
내가 언론을 다뤄본 적이 없어서 이게 맞는 말인지 틀린 말인지 모르겠다.
마녀는 어렴풋이 웃었다.
“걱정 마. 사왕. 나 혼자서 여론을 다뤄본 지 벌써 수년째란다. 이런 분야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날 믿고 맡기렴. 전문 분야는 전문가한테. 알았니?”
“아, 네.”
이상하다.
뭔지 몰라도 뭔가 기묘한 느낌이···. 그래. 마치 사냥터에서 미지의 몬스터한테 노려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사냥터가 아니라 1층 도시 바빌론이었다. 몬스터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기분 탓인가?
-쯔쯔쯧.
배후령이 혀를 찼다.
-한심하구나, 좀비야. 너에게 머리가 있으되 뇌가 안 달렸으니 어찌 내가 너를 좀비라 부르지 않겠느뇨. 명색이 사냥꾼이라는 새끼가 지 발로 사지(死地)에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아이고야.
‘아 또 뭔 소리예요?’
-한심하다! 한심해!
배후령이 갑갑하다는 듯 가슴을 쾅쾅 두들겼다. 안 그래도 험악하게 생긴 양반이 가슴까지 두드리니 영락없는 고릴라였다.
그 무렵이었다.
"와아아아아!"
무대 저편. 광장이 있는 방향에서 드높은 함성이 터졌다. 우리를 향해서 보내던 환호성과는 약간 성격이 달랐다.
“십!"
“구!"
"팔!"
바로 카운트 다운.
나는 마녀와 대화하는 걸 멈추고 하늘을 올려봤다.
[00 : 00 : 05]
어느새 21층 스테이지가 열리기 직전까지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삼!”
“이!”
“일!”
그리고.
[00:00:00]
하늘에서 숫자를 이루던 빛줄기가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더욱더 거세졌다. 그 환호에 보답이라도 하겠다는 양, 빛줄기들은 다시금 모여들어서 여신의 모습을 이루었다.
[전사들이여.]
푸른 창공.
여신의 형상이 입술을 열었다.
[탑에 오르는 자들이여.]
[마왕의 한이 서린 그늘을 돌파한 것을 축하드려요.]
새로운 스테이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한번 여신의 형상을 목격했기 때문인지, 마냥 즐거운 듯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하지만 과거에도 탑을 경험해본 나는 알고 있었다.
- 좀비야.
‘예.’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방심하지 않습니다.’
10층까지 튜토리얼이었던 탑이 11층부터 달라졌던 것처럼.
21층에선 또다시 20층까지와는 전혀 다른 무대가 펼쳐진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영원히 탑의 1층에 머무를 수도 있었어요.]
그 사실을, 여신의 형상이 냉정하게 고하였다.
[이곳은 도망친 자들을 위한 도피처.]
[여러분은 도전을 포기하는 대신 안주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요.]
[그렇지만 여러분은 10층과 20층을 돌파함으로써 선택한 것이에요.]
너른 하늘에 목소리가 울렸다.
[이 탑의 끝을 목격하고 말겠노라고.]
[그렇다면, 여러분의 의지에 답하는 것이 올바를 터.]
촤아아악!
예고도 없이 하얀빛이 우리를 감쌌다. 마녀와 나뿐만이 아니었다. 광장이 있는 방향에서도 당혹스러운 소리들이 들여왔다.
“뭐, 뭐야!?”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
이것이 저번과 가장 크게 달라진 점.
아직 아무도 ‘전송’이라고 말하지도 않았건만, 하얀빛이 우리를 집어삼킨 것이었다.
마녀는 당황한 낯빛으로 자신의 발밑을 내려보았다.
“···설마, 강제 전송?”
그 추측이 옳았다.
[탑에 오르는 자들이여.]
[탑에 오르기로 결심한 자들이여.]
[기꺼이 새로운 이름을 받아 탑의 전사가 된 자들이여.]
여신이 양손을 가슴에 모았다.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듯이.
[이제부터는 오직 선택받은 전사들만이 고귀한 업을 짊어질 것이에요.]
순간, 하얀빛이 완전히 우리를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