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57화 (57/400)

57화.  < 비블리오마니아(Bibliomania).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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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헌터들이 도서관에 둘러앉았다.

“으음….”

넓게 원형으로 앉은 헌터들. 그 한복판에는 [묵시록]들이 수백 권 쌓여 있었다. 이제부터 저 중에서 한 권을 선택해야 했지만, 아무도 섣불리 책더미에 다가서지 못했다.

당연했다. 바로 조금 전에 동료들이 책에 잡아먹혔다. 그것도 50명이나. 모두가 두려워하거나 침울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활기차게 웃으려면, 웬만한 또라이가 아니고는 어림도 없지 않을까?

“아하핫!”

놀랍게도 그런 또라이가 있었다.

“시작하자마자 50명 탈락이라니. 이건 뼈 아프군요.”

금발의 소년. 자타공인, 우리 세계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또라이. 이단심문관이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본래 전진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잊지 말고! 더욱더 열심히 공략에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기운 차리십시다! 하마터면 100명이 날아갈 뻔했는데 50명으로 그친 것도 대단한 행운입니다. 잃어버린 것에 슬퍼하는 대신 지킨 것에 기뻐해야 하는 겁니다!”

이단심문관이 입을 열면 열수록 분위기가 험해졌다.

우리 주변으론 지금도 책갈피 메이드들이 돌아다녔다. 책갈피들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뜨거운 커피와 홍차를 서빙했는데, 250명의 헌터 중에서 유일하게 이단심문관만 "아! 감사합니다!” 하고 냉큼 받았다.

“흠?”

이단심문관이 홍차를 홀짝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마십니까, 여러분? 굉장히 맛있어요?”

“먼저….”

내가 이단심문관의 말을 끊었다.

싸이코패스가 오래 얘기하게 내버려두면 좋을 게 없지.

“이단심문관. 댁은 조금 입 다물고 계십쇼.”

“네? 어째서요?”

“당신이 떠들수록 우리들 사기가 내려가요. 의욕이 없어진다고요. 여기서 사기까지 더 내려가면 진짜 큰일이니까, 제가 됐다고 할 때까지 닥쳐주시죠.”

“아. 그러면 정말 큰일이군요.”

이단심문관이 활짝 웃었다.

“알겠습니다, 사왕! 기꺼이 닥치겠습니다!”

헌터들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단심문관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말라. 나는 저 또라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그냥 감을 잡았을 뿐이다.

“자."

내가 분위기를 바꿔보려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여러분. 모두 알았을 거예요. 저 성좌한테 함부로 덤비면 안 된다는 거. 지금 당장은 도서관장이 준 퀘스트를 얌전히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헌터들의 시선이 천천히 나한테 모였다.

본능적으로 부담감이 느껴졌지만,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이제 나는 랭킹 3위다.’

이 자리에서 3번째로 발언권이 강한 헌터!

숨 쉬는 것만큼이나 사람들 시선을 받는 데 익숙해져야 했다.

나는 철저히 무표정을 가장하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퀘스트를 따른다고 해서, 딱히 우리가 불리한 것도 아니에요. 여러분. 퀘스트창을 한번 살펴봐주시죠.”

내 말에 따라 헌터들의 시선이 허공에 걸렸다.

내가 보는 것과 똑같은 홀로그램이 저들의 눈에도 비출 거다.

+

[리메이크 더 월드. 제1권]

난이도: 미정(未定)

임무 목표: 수많은 세계가 있으며, 수많은 멸망이 있습니다. 성좌 ‘방구석 도서관장’은 이것을 연재중단이라 표현합니다. 방구석 도서 관장은 불합리한 이유로 연재중단을 맞이해버린 세계들이 다시금 이야기를 이어나가길 원합니다.

우선 연재중단된 묵시록들 가운데 한 권을 고르십시오!

만일 세계를 구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 세계가 여러분의 22층으로 등록될 것입니다.

※단, 임무에 실패할 경우 22층은 개방되지 않습니다.

+

“다 읽으셨죠?”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엔 “예”라고 대답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단심문관을 닥치게 만든 효과일까. 당분간은 내 권위에 도전할 헌터가 없어 보였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마지막 부분이에요. [만일 세계를 구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 세계가 여러분의 22층으로 등록될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다들 아시겠어요?”

헌터들이 어리둥절해했다.

이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보상인지 아직 모르는구나.

내가 말했다.

“어떤 세계를 구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보상이 달라져요. 자. 만약 다이아몬드가 잔뜩 매장된 세계를 구한다고 칩시다! 그럼, 그 세계가 우리의 22층이 되어주는 거죠.”

'........"

헌터들의 낯빛이 확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는 그냥 예시예요. 우리처럼 탑에서 사는 사람들한테 그딴 석탄 쪼가리는 필요가 없죠. 하지만 식량, 물, 갖가지 광석이 풍부하게 매장된 세계라면 어떨까요?”

“자급자족….”

마녀가 중얼거렸다.

“정말로 자급자족이 가능해지는 거구나.”

“바로 그거예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한복판에 쌓인 책더미. 도서관장이 우리한테 ‘이중에서 고르라’ 하고 골라준 묵시록들을 향해서 걸어갔다.

“이, 이봐! 사왕!”

등 뒤에서 독사가 소리쳤다.

“그거 함부로 만지면 또 촉수 괴물이…!”

나는 묵시록들 중에 아무 책이나 한 권 집었다. 헉! 헌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또다시 촉수 괴물이 튀어나올까 봐 얼른 도망쳐버린 헌터마저 있었다.

그렇지만 1초, 2초, 3초가 흘러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묵시록은 마치 평범한 책처럼 내 손에 얌전히 잡혔다.

“어, 얼레?”

독사가 슬그머니 외눈을 떴다.

“아무 일도 없네…?”

“후후.”

공중에 둥실둥실 떠 있던 도서관장이 웃었다.

“그렇소! 본좌가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 이상에야 묵시록들은 평범한 책에 불과하다오. 물론 만지기만 해도 위험해지는 금서(禁書)들이 있소이만. 그런 책들은 아주 깊숙한 곳에 봉인해뒀으니 걱정하지 마시구료.”

"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에 잡힌 책을 펼치자, 또 다른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바로 책에 대한 정보였다.

+

[소르므윈 학원 이야기]

장르: 로맨스, 판타지

난이도: D급

제한 인원: 4명~5명

※현재 연재가 중단되어 있습니다.

소개: 소르므윈은 유서 깊은 마법 학원입니다. 우정과 경쟁, 사랑과 질투가 오가는, 평범한 학원이지요. 이 묵시록도 평범한 학원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학원 지하에 세계멸망급의 아티팩트가 봉인되어 있지만 않았다면 말입니다!

연중 사유: 악녀 영애가 약혼자(황태자)를 2회차 환생한 여학생한테 빼앗겨버림. 빡 돌아서 아티팩트의 봉인을 풀어버리자 대악마가 해방되어 세계를 멸망시킴.

+

연중 사유, 요컨대 세계멸망의 원인이 참 안쓰러웠다.

차라리 운석이나 해일 때문에 멸망한 세계들이 낫지.

‘불쌍하다. 꼬마들 치정 싸움 때문에 멸망해버린 세상이라니….’

도서관장이 화날 만했다.

생각을 해보자.

******

"아아."

파아란 보석에 금이 가듯, 얼음장 같던 황태자의 눈동자에 이해가 스미기 시작했다.

그동안 둘 사이를 갈라놓았던 기나긴 오해가, 2번째의 삶을 지난 지금에야 마침내 녹아서 스러진 것이었다.

“나의 반쪽이 여기에 있었구나. 실비아 영애. 그대가 바로 나의 반쪽이었어.”

탄식하듯 중얼거린 황태자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실비아는 말없이 숨을 죽인 채 심장으로 흐느꼈다.

죽을 때까지 이 순간을 잊지 못하리라고, 두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깨달은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쾅 소리와 함께 황태자가 통째로 터져 나갔다.

‘‘엑?"

다음 순간 실비아도 터져나갔다.

멀어져가는 실비아의 의식 속으로 들려온 것은 두서없는 비명들이었다.

“꺄아악!.”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다!”

“운이 나쁘군.”

세상.

그것이 끝장나는 순간이었다.

******

한참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던 로맨스 소설이 갑자기 이 따위로 중단되어 봐라. 독자라면 누구나 빡쳐버릴 거다.

소설책이어도 그런데 진짜 세계라면 오죽하겠냐.

‘아무튼.’

지금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여러분! 여기 와서 책 좀 살펴보십쇼.”

내가 헌터들한테 소리쳤다.

“책들마다 난이도랑 내용이 다 달라요. 이중에서 우리가 깰 수 있는 난이도의 책들. 그리고 깨면 우리한테 제일 이득이 될 책들을 따로 골라야 합니다!”

몇몇 헌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는 멀뚱멀뚱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멍청아.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주니까 저러지. 헌터들이 얼마나 말귀를 안 들어먹는 새끼들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배후령이 말했다.

-지금 네가 감당해야 할 헌터 대가리 숫자가 250명이야. 250명. 저놈들한텐 반말을 찍찍 싸야 그나마 들을까 말까 할걸.

‘진짜요?’

-너 랩업 할 때마다 [당신의 존재가 한층 뚜렷해졌습니다]라는 소리 듣잖아. 그게 뭔 뜻인지 알아? [네 자존심이 더 강해졌습니다] 야. 원래 레벨이 높은 헌터일수록 자존심이 존나게 쎄. 말귀를 안 쳐먹지.

과연.

나는 오러를 담아서 사자후를 터트렸다.

“묵시록이 수백 권인데 어떻게 나 혼자서 다 읽냐! 와서 읽어라!”

움찔.

그제야 엉덩이 무거운 헌터들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다들 들어!”

나는 쉬지 않고 명령했다.

“그룹을 나누자고. 자기가 소설책이나 역사책 좀 읽어봤다는 양반은 왼쪽으로! 난 소설이든 역사든 진짜 하나도 모르겠다 싶은 사람은 오른쪽으로! 얼른! 빨리!”

헌터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우르르르!

사람들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책 읽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장르에 따라 나눠져! 로맨스 좋아하는 사람들은 로맨스 그룹으로! 판타지 좋아하는 사람들은 판타지 그룹으로! 추리소설 좋아하면 추리소설 그룹 따로! 얼른!”

드디어 도서관 분위기가 좀 분주해졌다.

내 지휘 아래 헌터들이 빨빨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자. 이제부터 우리는 모두 책을 읽습니다!”

내가 묵시록을 들고 툭툭 두들겼다.

“수백 권의 책을 장르별로 나눠서 분배할 거예요. 로맨스 그룹은 로맨스 책을 읽으십쇼. 다른 그룹들도 각자 장르에 맞게 독파하시고요! 책을 읽어서, 여러분은 이게 망작인지 흥작인지 판단하십쇼.”

“읍! 읍!”

이단심문관이 팔을 열심히 흔들었다.

여전히 내 지시에 따라 입을 닥치고 있었다.

“…예, 말씀하십쇼.”

“사왕! 망작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기준을 알려주시지요! 이야기가 좋으면 흥작이고, 이야기가 나쁘면 똥망작인 것입니까?”

“아뇨. 전혀 아니죠.”

내가 한 권의 묵시록을 펼쳐서 보여줬다.

“예를 들면 이런 게 망작입니다.”

+

[화산에서 살아남기!]

장르: 서바이벌, 로맨스

난이도: D급

제한 인원: 2명

※현재 연재가 중단되어 있습니다.

소개: 이 세계는 핵전쟁으로 황폐해졌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력이란 경이롭군요! 핵전쟁이 벌어지고 난 지상에서도 주인공과 주인공의 연인은 살아남았습니다. 주인공 커플은 온갖 역경과 고난을 뛰어넘은 뒤, 새로운 아담과 이브가 되겠노라고 맹세합니다.

연중 사유: 주인공 커플이 마지막 날에 야숙한 곳이 하필이면 활화산 지대였음. 밤중에 화산이 폭발. 화산에서 날아든 돌덩어리에 주인공도 주인공의 연인도 맞아 죽음. 인류는 멸망하다.

+

내가 참담한 어조로 말했다.

“보통 망작도 아니고 똥망작이죠.”

“왜요?”

이단심문관이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새로운 아담과 이브라. 낭만적이고 좋지 않습니까!”

“이 세계는 구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이미 핵전쟁이 일어난 세상이거든요.”

나는 한숨을 쉬며 책을 덮었다.

“방사능이 득실거리는 세상을 22층으로 얻어봤자 뭐 하게요? 저희들 단체로 방사능에 오염되어서 죽을 일 있습니까.”

“아하.’’

참고로.

과거에 염제는 기가 막힌 방법으로 대도서관을 클리어했다.

22층부터 29층까지 죄다 [용암]이나 [화산]이 깔린 세계만 공략한 것이다.

‘미친놈이지.’

염제는 불에 면역력이 있다. 용암이 흐르고 화산이 터지는 막장 세계라 해도, 염제는 유유자적하게 산책할 수 있다.

순전히 [얼마나 쉽게 공략할 수 있는가]만 기준으로 두고 묵시록을 선택한 셈.

어떤 묵시록을 구원해야 우리한테 이익이 되는지, 눈꼽만치도, 진짜로 전혀 고려를 안 했다.

‘잘만 하면 보물창고를 여덟 개나 얻을 수 있는 기회인데!’

하여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은 도움이 안 된다.

결국 탑에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한테는 손해니까.

‘이번엔 최대한 뽕을 뽑을 수 있는 묵시록들만 골라주마.’

헌터들의 실전경험에 도움이 될법한 몬스터들이 솟아나는 묵시록이라거나, 희귀한 광물로 가득찬 묵시록이라거나, 보구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폐허를 무대로 한 묵시록이라거나, 양념치킨과 탕수육이 숲을 뛰놀고 새우튀김이 바다에서 춤추는 묵시록이라거나.

아니. 마지막 건 취소하자. 실제로 있다면 좀 많이 무섭겠다.

어쨌든!

“명심하십쇼! 스토리가 똥이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나는 헌터들한테 책을 나눠주며 외쳤다.

“주인공이 발암이라든지, 스토리가 노잼이라든지, 그런 것도 신경쓰지 마십쇼. 그냥 읽으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서, 이 세계를 구하면 과연 우리 모두한테 이익이 될지 말지를 계산….”

멈칫.

책을 나눠주다 멈춰섰다.

한 명의 헌터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저기요. 흑룡주?”

“응. 왜 그러니?”

마녀였다.

내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여긴 [추리] 그룹인데요.”

평소부터 추리소설을 즐겨읽는 사람들의 모임.

왠지 몰라도 거기에 마녀가 당당하게 앉아 있었다.

이 사람, 아까 인물창 봤을 땐 로맨스물 팬으로 뜨지 않았나?

“알고 있단다.”

마녀가 당연하다는 듯 턱을 끄덕였다.

“설마 내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앉았을까.”

“어…. 흑룡주. 추리물 좋아하셨어요?”

“당연하지.”

호르릅.

마녀가 다소곳하게 블랙 커피를 마셨다.

“나 지적인 여자야.”

"........"

미친.

이 길드장님은 왜 또 갑자기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거냐. 드라마 좋아하고. 로맨스 좋아하고. 척 봐도 막장 로맨스에 열광하는 독자잖아.

‘설마.’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로맨스 덕질하는 걸 주변에 알리기 싫어서…?’

그러고 보니, 유난히 [로맨스] 그룹에 헌터가 적었다. 심지어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반대로 왠지 모르겠지만 [무협]에는 남자들만 득실거렸다.

장담하건대 저중에 진짜로 무협을 읽는 사람은 한줌도 안 될 거다.

'와.'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 사람들이 지금 상황에서도 코스프레를 하는 거야!?’

-말했잖냐.

배후령이 뚱하게 중얼거렸다.

-레벨 높은 헌터들은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산다니까. 게다가 얘들은 전부 이명까지 받은 놈들이잖아. 가오가 없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것들이야. 못 봤어? 아까 50명이 한꺼번에 자살특공하는 거? 전부 미친놈들이라고.

돌아버리겠군.

“아니, 흑룡주… 아무리 그러셔도 그렇지….”

“뭐가 아무리 그런데?”

마녀가 태연하게 되물었다.

무덤덤한 그녀의 얼굴이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느껴졌다.

나는 필사적으로 할 말을 떠올려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니요…. 저는 흑룡주가 되게 로맨틱한 분이시구나… 평소부터 그렇게 생각했는데. 로맨스가 아니라 추리 그룹에 계시니까 조금 의외여서….”

커피잔을 잡은 마녀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흐응. 그래?”

마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완전히 똑같았다.

“내가 로맨스와 어울리는 사람으로 보이니?”

“예. 오히려 로맨스가 아니라 다른 곳에 계시면 좀 이상하다고 할지…. 꼭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계신 것처럼 느껴지네요….”

“하아.”

마녀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사왕이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지. 지금까지 살면서 로맨스 소설은 읽어본 적도 없지만, 그래. 이번 기회에 한번 새로운 장르도 익숙해져 볼까? 무엇이든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만 헌터로서 올바른 자세인걸.”

“지당하신 말씀이네요….”

“응. 알았어.”

마녀가 가뿐한 발걸음으로 로맨스 그룹으로 향했다.

마치 서부 영화에서 황야의 저편으로 걸어가는 카우보이 같았다.

나는 매우 미묘한 심정으로 그녀의 등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굉장하군요, 사왕!”

그런 내 모습을 이단심문관이 초롱초롱거리는 눈빛으로 올려봤다. 얘도 추리 그룹에 앉아 있었다.

“흑룡주가 한번 어디에 앉으면 잘 일어서는 법이 없는데 말입니다. 아핫. 정말이지 굉장한 신인이 나와줬습니다!”

“…만신전주. 당신도 추리소설 읽어요?”

이단심문관이 천사처럼 활짝웃었다.

“셜록 홈즈는 알고 있습니다!”

“아. 닥터 왓슨도 압니다.”

내가 가만히 마음속으로 명령어를 읊었다.

‘인물창.’

스르륵.

눈앞에 문자들이 비췄다.

+

이름: 이단심문관(異端審問官)

호감도: 50

선호 장르: [동화] [신화] [전설]

불호 장르: 없음

선호 캐릭터: [인간]

불호 캐릭터: 없음

선호 플롯: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불호 플롯: 없음

심리 상태: ‘셜록 홈즈는 알고 있습니다! 아. 닥터 왓슨도 압니다.’

+

미친.

소름이 돋았다.

‘겉모습이랑 속마음이 완전히 똑같아?’

더군다나 불호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얘 진짜 사람 맞냐!?’

충격과 공포였다.

그야말로 순수 내츄럴 본 크레이지 싸이코.

“음? 왜 그러십니까, 사왕?”

크레이지 싸이코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잠시간 고민했다.

그리고 품속에서 싸인팬을 꺼내어, 이단심문관의 손등에 글씨를 적어줬다.

[동화].

내가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단심문관님.”

“예!”

“댁은 이제부터 동화 그룹이에요.”

“동화입니까!”

“그래요. 이 그룹에는 이단심문관님 한 명밖에 없어요. 이단심문관님이 혼자서 그룹에 들어오는 책을 다 검증하고 심사해야 합니다.”

“오오! 책임이 막중하군요!”

크레이지 싸이코가 눈을 반짝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막중하죠. 그러니 잘 부탁드릴게요.”

“아하핫.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왕. 확실하게 심사하겠습니다!”

그래.

수백 권의 묵시록 중에 동화는 단 한 권도 없지만 말이다.

나는 또 일반인 코스프레를 시전하는 헌터가 없는지 샅샅이 뒤졌다. 결과는 굉장했다. 250명 중에서 무려 100명이 넘게 자기 독서 취향을 속이고 있었다.

‘이런 미친놈들….’

결국 그룹을 나누는 데만 세 시간이 걸렸다.

자그마치 112명에 이르는 코스프레어를 제자리로 돌려보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

마지막 1명에 이르러선 침묵을 금치 못했다.

+

이름: 독사(毒能)

호감도: 32

선호 장르: [이세계물], [최강물], [깽판물], [하렘물] …

불호 장르: [정치물], [범죄물]

선호 캐릭터: [누님], [여동생], [유부녀], [순수], [새침떼기], [여장미소년] …

불호 캐릭터: [마피아], [건달], [금발 태닝 양아치]

선호 플롯: [이세계에 소환당한 내가 알고 보니 지상 최강 드래곤과 마계 최강 여제의 피를 이은 순수 치트 캐릭터여서 무쌍이 무엇인지 보여주겠습니다만 무언가 문제라도?], [아무래도 여동생이 저를 위해 창조신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만 그저 고요한 일상을 보내고 싶을 뿐인 평범한 고등학생인 저로서는 곤란할 뿐인데요] 등 이하 [치트], [무쌍]. [하렘], [이런이런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야겠네]

불호 플롯: [NTR]

심리 상태: ‘와, 시발. 구파일방은 뭐야? 무협은 뭐 이러냐 진짜. 한 줄 읽을 때마다 개방이고 표사고 땀내나는 사내새끼들만 가득이네. 쌍. 독자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한 거 아니냐?’

+

그 인물은 한쪽 눈에 안대를 끼고 있었다.

그 인물은 천무문주라 불리우는 검객이었다.

그 인물은… 라이트노벨의 황제였다.

“엉?”

독사가 날 돌아봤다.

“뭐야, 뭘 봐? 책 읽느라 바쁜데.”

그리고 독사는 [무협] 그룹에 앉아 있었다.

“아니요…."

나는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독서 방해해서 죄송해요. 계속 읽으십쇼….“

"오냐.”

나는 등을 돌리고 힘없이 걸어갔다.

이번 21층에 와서 확실히 깨달았다.

상위 헌터들은 하나같이 미친놈이었다.

그리고 이 미친놈들을 내가 캐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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