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64화 (64/400)

64화.  < 정마대전(正魔大戰).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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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계가 멸망했는데도 두 무림인은 전쟁을 그만두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어이를 상실하기에 충분했지만… 더 충격적인 장면은 따로 있었다.

바로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이었다.

“선비는 붓을 가리지 아니하며, 무인은 칼을 가리지 않는 법.”

천마가 무림맹주를 향해서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나무작대기가 들려 있었다.

“본좌가 비록 섬혈마검을 깜빡하고 두고 오는 바람에 마편태를 쥐고 있으나, 네놈 같은 영감탱이 하나는 능히 골로 보낼 수 있노라." “오오냐!”

무림맹주가 회초리를 들고 호기롭게 외쳤다.

“과연 누가 무림을 마지막으로 일통할 것인지 자웅을 겨뤄보자꾸나!”

그리하여 두 무인은 격돌했다.

어쩌면 ‘격돌’이라는 표현은 좀 과했을지 모르겠다.

두 사람이 보여준 작태는 단순한 드잡이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천마군림보 (天魔君臨步)!”

“흐읍! 황월파천(黃M破天)!”

천마와 무림맹주는 제법 그럴싸한 말을 소리치며 맞붙었다. 하지만 그럴싸한 것은 말뿐이었다.

두 사람이 손에 쥔 것은 회초리에 불과했고, 회초리들이 어우러지며 내는 소리는 경쾌하다 못해 발랄하였다.

탁! 탁! 탁!

얼마 안 가서 회초리가 부러졌다. 그러자 천마와 무림맹주는 눈알을 부라리며 서로한테 달려들었다. 천마는 무림맹주의 수염을 잡았으며, 무림맹주는 천마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건 대체….”

그야말로 점입가경.

우리 모두 어안이 벙벙해진 가운데,

-허 참, 이상하네.

배후령이 유별난 반응을 보였다.

-자세는 제대로 잡혔어. 저놈들.

‘네?’

-초식이랑 호흡이 제대로야. 내 세계로 따져도 초고수들인데.

나는 다시 한번 결투를 쳐다보았다. 무림맹주가 천마의 눈을 찌르려고 들어서 천마가 다급히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참이었다.

‘저게요?’

-모르겠냐, 저 묘리를? 저 눈 찌르기는 신룡의 발톱이 악룡의 여의주를 나꿔채는 이치가 담긴 것이니 이름 붙이자면

쌍룡쟁주(雙龍爭 珠)라 할 수 있겠고, 저 얼굴 감싸기는 현생에 강림한 부처가 중생의 얼굴을 하나하나 감싸주는 의미가 담겼으니 천식관음(千式親音)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 뒤로도 검제의 설명은 주구장창 이어졌다.

나는 한 손을 들어 그런 검제의 설명을 막았다.

‘근데 왜 저 꼬라지로 개싸움을 해요?’

-그러니 이상하단 말이다. 형(形)이 저 정도까지 왔으면 마땅히 기(氣)도 따라와야 하는 거고 그러니 의(意)도 충만해야 하는 건데,

지금 움직임에 기가, 그러니까 오러가 하나도 안 실려서 저 지랄인 거거든. 단전이 개박살이 났어도 저렇지는 않을 텐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배후령을 본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어쩌면 유일한 가능성을 말이다.

‘검제 양반, 지금 그냥 날 놀리고 있는 거죠?’

-어허, 좀비야. 내가 무슨 마구니도 아니고, 이런 것 갖고 농을 치진 않는단다.

검제는 거꾸로 내게 면박을 주었다.

-아니 씨, 정말 저게 안 보여? 하필 폐관수련도 오러 하나만 갖고 형과 의를 어거지로 끌어내던 아귀랑만 해가지고. 끌끌. 뭐 하긴 그게 딱 그때 너한테 필요한 수행이긴 했다만은…….

가을비의 마왕과 싸우느라 수년을 보냈던 일을 폐관수련이라고 잘라 말하는 것이야 어쨌든, 검제는 진지했다.

그리고 진지한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났다.

“저 늙은이랑 여자…… 제법 하는군.”

독사가 외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방금 물어뜯기에는 지왕사의 이치가, 그리고 방금 팔로 걷어낸 데에는 온월용의 이치가 배어있어.”

-히야, 저놈이 ‘진짜’라지만 무인은 무인이네. 그래, 땅의 왕이라 불리는 거대한 뱀 처럼 물어뜯기, 그리고 편안히 넘어가는

용(種越龍)과 같은 걷어내기! 봤냐 좀비야? 너랑 달리 보는 눈이 있잖냐.

나는 말없이 독사의 심리창을 띄워보았다.

천무문주는 팔짱을 낀 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 [천하무쌍] 스킬에 뜨는 파생 투로(關路)들로 분석해보자면…… 역시 맞아.」

「저 움직임들. [‘지’옥견(켈베로스)으로 전생해서 마‘왕’성의 정문을 지키게 된 것까진 좋은데 양옆의 머리도 트러블메이커와 클래스 위원장의 전생이어서 그 ‘사’이에 낀 제가 괴롭달까요], 그리고 [‘온’라인 게임의 용사였던 남고생은 ‘월’반한 연하의 클래스메이트이자 인기 만화가인 소꿉친구와 함께 진정한 ‘용’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로 해설할 수 있어. 확실해.」

검제가 말을 잃었다.

사정을 모르는 약제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그런가요, 문주님…? 그냥 어린애들 막싸움처럼 보이는데….”

“씨벌. 아무 눈에나 보이면 고수랑 하수랑 무슨 차이겠어? 나 같은 사람 눈에나 보이는 거지.”

「세상에. 파생 투로의 갈래가 몇 가지야 대체? 검성 할배보단 훨씬 윗줄이구만 저 둘.」

「보는 것만으로도 레벨업 할 것 같네. 돌아가면 제자놈들한테 가르쳐줄 게 생겼구나.」

음.

‘검제 양반.’

-응, 좀비야...

‘만류귀종인지 뭐시기인지도 있잖아요? 같은 답을 내는 데에도 여러 공식이 있는 거고… 독사 저 양반은 저게 무술을 보는 시점인 거겠죠.'

-그래, 고맙다…….

무림맹주와 천마라는 작자들이 개싸움을 하고, 그걸 보면서 라이트노벨의 황제가 깨달음을 얻고, 무엇보다 내가 검제를 위로하는 이 기묘한 풍경은, 다행히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엣취! 아이고 얼어 죽겠네!”

약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이 연놈들아! 언제까지 싸움박질만 하고 있을 거냐! 니들 앞에 있는 우리는 안 보이냐! 끌끌, 저저, 좁아터진 시야하고는! 나 젊을 적이랑 똑같구나, 똑같아!”

검성마저 주춤하게 했던 꼰대의 일갈은 심후하기 그지없었다.

무림맹주가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다.

“음, 모처럼 찾아온 손님이거늘. 확실히 이래서야 예가 아니구만.”

천마도 헛기침을 했다.

“일단은 본좌가 머무르는 동혈(洞穴)로 안내하마.”

4.

오래지 않아 먹구름이 갰다. 더 이상 나도 반짝이로 주위를 밝히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햇볕에 쐬인 좀비들은 다시금 목석처럼 굳어버렸고, 우리는 무사히 설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후우. 후우으음….”

“헉, 허억… 흐어억…!”

다만 천마와 무림맹주. 두 사람의 빈약한 체력이 걸림돌이 됐다.

둘은 평범한 무림인이 아니라 마교와 정파의 수장. 이 세계에서 제일 고강한 무위를 뽐내야 할 사람들이었다. 검제와 천무문주가 각기 다른 경로로 그들의 무위를 보장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어찌 된 노릇인지… 두 사람은 체력이 완전 저질이었다.

단순히 눈밭을 조금 걸었을 뿐인데도 헉헉거리는 것 아니겠는가.

"음."

보다 못한 내가 슬쩍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좀 업어드릴까요?”

“부, 부탁하겠노라. 오늘따라 심법(心法)을 운용하는 게 여의찮구나.”

결국 아까처럼 내가 천마를 업었고, 독사가 무림맹주를 업게 됐다.

독사가 엄숙하게 말했다.

“사왕. 그건 좀 아니지.”

“네?”

“이렇게 돼야지.”

아까는 내가 천마를 업었던 만큼, 이번에는 독사가 천마를 업고 내가 무림맹주를 업게 됐다.

“어떻게 봐도 이게 맞지.”

“네…."

차마 따질 기력이 없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 때였다.

‘어라?’

무림맹주를 업고 걷던 나는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상하다.’

배후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이상해?

‘몸이 따뜻해요.’

-응?

‘…몸이 엄청 따뜻하다고요. 지금 날씨가 얼마나 춥습니까? 당장 저희도 오러를 끌어올리지 않으면 얼어버릴 지경인데… 이 사람, 몸이 따뜻해요.’

-.......

검제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이 없었다. 나도 뒤따라 생각에 잠겨 들었다.

우리가 그러듯 오러로, 그러니까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는 걸까? 하지만 방금 벌어진 전투에서는 전혀 내공 같은 게 안 느껴지지 않았던가.

‘뭐지? 아다리가 안 맞는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그렇지만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는 알아채지 못한 채, 우리는 눈밭을 건넜다.

“이곳이 본좌의 거처로다.”

천마가 안내해준 곳은 설원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굴이었다.

천장에는 드넓은 구멍이 뚫려서, 노을빛이 환하게 쏟아졌다.

“와아….”

약제사가 입을 벌렸다. 서리 낀 안경 너머로 눈빛이 반짝거렸다.

“오, 온천이잖아요?”

동굴에는 노천탕이 있었다.

깊은 연못이 동굴 바닥에 고였다. 연못의 수면에서 모락모락 수증기가 피워올랐다. 천연온천이 엄동설한의 추위를 이겨내고 주위를 포근하게 덥히는 것이었다. 위로는 노을. 아래로 온천이 흐르니, 과연 절경이 따로 없구나 싶었다.

“본좌가 오래전에 찾아낸 심처로다.”

천마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설마 새외의 이방인을 손님으로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만. 먼저 씻거라. 본좌는 노물과 더불어서 어디 대접할 음식이 없는지 뒤져 보겠도다.”

“엥. 우리가 대접할 게 벽곡단 말고 또 있나?”

“그러니까 한번 뒤져보자는 얘기 아닌고. 노물아. 나이를 먹더니 귀까지 먹어버린 게냐.”

“맨날 노물노물 노래를 부르는데 따지고 보면 네년이랑 난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도 않아!”

“꼬우면 네놈도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하거라.”

천마와 무림맹주가 궁시렁거리면서 동굴 저편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온천가에 남아서 묘한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시, 신기하네요. 아까 전만 해도 사생결단을 내겠다고 싸웠는데….”

“3년째 싸우고 있다지 않은가. 싸우면서 드는 정이란 것도 있겠지.”

약왕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이 근처는 따습하고 좋구먼. 에잉. 이 세계에 오자마자 계속 남정네 손을 잡고 있어서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어. 이젠 좀 떨어져주게, 천무문주.”

“검성은 왜 이딴 양반이랑 친구를 먹은 거야?”

“어허! 말은 단디 해라. 내가 마르쿠스 놈과 친구를 먹어준 거다!”

“아니 무슨… 하긴 검성 그 양반도 제대로 된 양반은 아니었지. 씨벌, 유유상종이구만.”

그렇게 우리는 노천탕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했다.

목욕을 끝마친 우리에게 두 무림인은 음식을 대접했다.

“음. 대접할 게 마땅치 않아서 멋쩍구만.”

“벽곡단이다. 많이 들거라.”

천마와 무림맹주가 차려온 것은 굵은 알맹이들. 환(九)이었다.

겉보기엔 청심환을 닮았는데 알갱이가 조금 더 컸다.

“옛날에는 간간이 늑대 따위의 사냥감을 찾을 수 있었다만. 요즘엔 짐승도 여간해선 보이지 않노라. 천하가 어쩌다 이리되었는지 본좌로서도 모를 노릇이야.”

“아뇨.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공손하게 접시를 받았다. 세상이 멸망해버린 지 3년째라고 했다. 음식다운 음식이 있을 리 없겠지.

우리 일행은 조심스럽게 벽곡단을 깨작였다.

"윽!"

"으."

독사와 약왕이 대놓고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나도 하마터면 인상을 찌푸릴 뻔했다. 오래된 커피 원두를 생으로 씹어먹은 맛이라고 할까? 도저히 맛있게 먹을 음식은 못 되었다.

“설마 이것만 드시고 생활하신 건가요…?”

약제사가 신기하다는 듯 벽곡단을 집어서 이리저리 살폈다.

“거의 그러했노라.”

“어, 얼마 동안이나요?”

"음."

천마가 동굴벽을 쳐다보았다. 벽에는 바를 정(正)자가 무수히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이 동굴에 은거하기 시작하면서 하루에 한 획씩 날짜를 표시해둔 것 같았다.

“벽곡단만 먹고 버틴 지는 대략 2년이 넘었구나.”

“2년……."

약제사는 말문이 막혔다. 자그마치 2년 동안 이 알갱이들만 먹고 생활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약제사가 신음했다.

"마, 말도 안 돼요. 그래서는 제대로 된 영양을 취할 수가 없을 텐데. 당질과 지질, 단백질, 그리고 비타민과 미네랄 같은 것의 적절한 조화 없이 인체는……"

“흐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만 아직 견딜 만하다.”

“나는 못 견디겠다!”

약왕이 빽 소리쳤다.

벌떡 일어선 약왕은 주섬주섬 아공간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버너와 고기, 해산물 같은 것들이었다.

“비켜들 봐, 이것들아! 쯔쯔. 이딴 거나 주워 먹으니 그렇게 눈밭 건널 기력도 없지. 몸 생각 안 하는 것도 나 젊을 적이랑 똑같아서는. 물은 있나?”

“어어, 물은 눈을 녹여서 마시거나, 이따금 해가 연속으로 나면 저 안에 흐르는 석수를….”

“미치겠구만 미치겠어. 사람 몸 70%가 물인데 그런 물이나 처마시니 답이 없지. 답을 아는 물을 마셔야지 에잉.”

버너로 불을 지핀 약왕은 생수를 꺼내 냄비에 부었다.

생수병을 본 약제사가 깜짝 놀랐다.

“브, 블링 H2O잖아요? 그 비싼 걸……"

“이게 뭐가 비싸! 조리용으로 쓰기에 적당해서 그냥저냥 쓰는 거지. 에잉. 탑 밖에 있을 때는 거들떠도 안 보는 물이었거늘. 쯔쯔. 하여간 마르쿠스 그놈만 아니었어도….”

난데없이 시작된 요리 풍경을 두고 검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좀비야. 블링 H2O가 뭐냐?

‘글쎄요? 에비앙 같은 건가봐요.’

-에비앙은 또 뭔데? 공청석유 같은 거냐?

‘공청석유가 뭔데요?’

-무지하게 비싼 물 있어.

그럼 비슷한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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