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66화 (66/400)

66화.  < 천마(天魔).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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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

이대로는 안 됩니다.

……천마님. 혈귀대의 반이 궤멸했습니다! 원로들이 무림 출두를 선언하고 천하에 흩어졌지만, 벌써 종적이 끊겼습니다. 정파의 머저리들과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본교의 위기, 아니, 어쩌면 천하의 위기일지 모릅니다. 개방의 거지들이 소문 내기를…….

……천마님. 분부하신 대로 문파를 가리지 않고 약방(藥M)을 만들었습니다. 당문의 장문인은 물론이고 모산파의 고수들이 다 왔습니다. 강시병을 여럿 잡아다가 생체로 써먹을 것이니, 조속한 시일 내에 성과가…….

……천마님. 월영마군과 혈마까지 당했습니다. 오늘 백 명의 강시를 해치워도 내일 천 명의 강시가 새로 생겨납니다. 괴질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약방에선 아문혈과 천추혈을 대침으로 막아 상단전을 보호하면 강시를 잠재울 수 있다고는 하나, 그 이상의 방도는…….

……천마님. 낙도(落鳥)로 피하십시오. 섬에 들어가 폐관하면 제아무리 강시병이 백만이고 천만에 이른다 한들, 제깟것들이 바다를 건너올 순 없을 것이옵니다. 어찌 무림이 이곳 하나뿐이겠습니까? 본교의 기치가 자리하면 그곳이 곧 무림 아니겠습니까…….

......천마님. 대전의 약속에 무에 중하겠나이까. 천하가 혼탁해지기 전에 맺은 맹조입니다. 하늘의 이치가 바뀌었는데 인간의 도리가

굳건할 수는 없습니다. 무림맹주와 나눈 맹세는 잊으시고, 부디 권토중래하소서.......

천마님.

천마님.

2.

“---어떻게 견디셨어요?”

한참 침묵한 뒤, 내가 처음으로 건넨 질문은 이거였다.

무슨 수로 버텼냐는 거.

세상이 멸망하고 사람들이 시체로 전락해버린 지옥.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반쯤 시체가 되어버렸다. 단 한 순간이라도 내공의 흐름을 막히면 심장이 멈춰버릴 위험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3년이란 세월을 견뎠느냐며 질문한 것이다.

"......."

천마와 무림맹주는 섣불리 대답치 못했다. 두 사람은 서로 쳐다봤다. 그리고 내가 이해하지 못할 눈빛을 나눈 뒤,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거라.”

두 사람은 동굴을 빠져나갔다.

나 역시 두 사람을 뒤따랐다.

동굴에서 나갈 때 우리는 말이 없었다. 혹시라도 다른 일행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었다. 그래서 우리는 긴 시간 동안 침묵했다.

동굴이 끝난 것과 동시에 정적이 깨졌다.

“사람은 언젠가 죽노라.”

바깥에선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무림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하나 전해지지. 만독불침(萬毒不候)에 금강불괴(金剛不壞)의 경지에 오른 절정고수가 한 명 있었느니라. 어떠한 독으로도 체내가 좀먹지 아니하니 불식(不M), 어떠한 검으로도 체외가 다치지 않으니 불상(不傷)이라.”

하아, 하고 천마가 숨을 흘렸다.

“가히 무적이라 할 수 있지. 내불식(內不li). 외불상(外不傷). 가장 잔인한 독으로도 해할 수 없고, 가장 날카로운 검으로도 해칠 수 없는 자를 어찌 죽이겠는고?”

새벽이 푸르렀다.

어스름에, 세상은 그저 창백한 그늘이었다.

“하지만 옛날이야기에서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지. 바로 무적(無敵)이다.”

그늘이 된 세상. 그곳을 천마와 무림맹주가 걸어갔다. 한 발자국씩. 천천히. 발자국이 찍힌 곳까지 땅이었고, 찍히지 않은 곳부터 하늘이었으니, 천지(天地)를 분간시키는 것은 다만 사람의 발걸음이었다.

“새외의 아해야.”

천마가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우리는 동굴을 나와서 어제의 설원으로… 무공 좀비들한테 둘러싸였던 그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절정고수가 어찌 죽었는지 짐작하느냐.”

“어떻게 죽었는데요?”

“색마(色魔)를 접붙여서 죽였다.”

천마가 입꼬리를 들었다.

“음양합일의 쾌락은 독이 아니지. 검은 더욱더 아니다.”

“어. 하지만 지나친 쾌락은 독 아닐까요?”

“옳다. 그러므로 색마는 처음부터 쾌락의 폭풍을 선사하진 않았노라. 교묘하게. 차분히 시간을 들였다. 처음에는 가장 은은한 쾌락부터 시작하여서… 결국은 가장 치명적인 쾌락까지 탐닉하도록. 절정고수를 길들이고 또 길들였지.”

동이 텄다.

설원이 조금 하얘졌다.

그 하양은 천마가 흘린 숨결을 닮았다.

“색마가 교합하면서 내리치는 손바닥을, 절정고수는 아픔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색마가 휘두르는 채찍을 절정고수는 쾌락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색마의 손짓과 발짓, 작은 눈짓조차도 절정고수에겐 하나의 행복이 되어버렸지.”

스륵.

천마가 손을 올렸다.

“마지막 순간에,”

그리고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가볍게. 색마는 그저 가볍게, 절정고수의 목을 졸랐다.”

"......."

“고강한 무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심후한 공력이 소요하지 않았다. 두 손. 자신이 가진 양손으로 목을 조른 게다. 목이 졸리고 숨이 막힐 적에 절정고수는 쾌락으로 절여져 환히 웃었다지. 죽어서도 시체의 얼굴은 행복하게 미소를 지었다는구나.”

천마가 키득거렸다.

“절정고수는 말 그대로 절정에 휩싸인 채 죽었다. 불식이었고 불상이었으되 불행(不幸)은 아니었던 셈이니라.”

설원 한복판.

시체들이 보였다. 죽어서도 죽지 않은 듯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 그것들은, 새벽의 어스름에 쬐어 우두커니 굳어 있었다. 시체들은 미동도 하지 않아서 꼭 그림자로 이루어진 숲 같았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단순하다.”

“색마 따위와는 놀아나지 말라는 게지!”

무림맹주가 툴툴거렸다.

“그냥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정말로 있었던 일이다. 에잉! 당문(唐門)에서 옥이야 금이야 키워낸 고수였거늘, 저년이 몰래 색마를 보내서 암살했어.”

“후후.”

좀비들은 눈밭 이곳저곳에 대중없이 널려 있었다. 어제 우리 일행을 쫓아오던 흔적일까. 그런 좀비들을 향해 천마가 다가섰다.

“강호에 초출(初出)하는 애송이들은 대부분 착각하노라. 무림인의 목표란 무적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요, 무공을 익히는 이유는 불멸과 영생을 얻기 위함이라고.”

읏싸, 하고 천마가 좀비 한 마리를 들어올렸다.

“갈(唱)."

천마와 무림맹주. 두 사람은 좀비를 들어 옮겼다.

“만독불침에 이른 자는 독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죽게 된다. 금강불괴에 이른 자는 검이 아닌 다른 무엇에 죽게 되노라. 알겠는고. 강호인은, 단순히 어떤 무공을 익힐 것인지 선택하는 게 아니다.”

천마는 힘겹게 좀비를 움직였다.

“자신이 어떤 무인으로 살 것인가 선택하는 동시에,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 또한 결정하는 것이다.”

좀비를 옮기는 천마의 움직임은 굼뜨고 느렸다.

마치 무거운 짐을 배달하는 우체부처럼, 천마는 좀비를 옮기면서도 중간중간에 내려놓았고, 깊이 숨을 쉬었으며, 다시 움직였다.

“사람은 언젠가 죽노라.”

그러기를 거듭했다.

“우리라고 그걸 모르겠느냐. 어찌 죽는다는 사실이 원통하겠느냐?”

간밤에 좀비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흩어진 좀비들을 천마와 무림맹주가 다시 한 마리씩 모았다.

“---다만 이런 식의 죽음은 바라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두 사람의 체력은 보잘것없었고, 시체는 너무나 많았다.

“암살을 당해도 좋다. 독살을 당하여도 좋다. 천라지망에 빠져 협공을 당해도 좋고, 소림사 땡중들한테 한방을 먹는 것도 좋다. 믿었던 수하에게 배신당하여 죽는 것도 좋으며, 후기지수한테 비무를 신청받아 죽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도다.”

중천 (中天).

천마와 무림맹주가 좀비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았을 무렵, 태양은 하늘의 정중앙에 떴다. 어느덧 설원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자욱하게 찍혔다.

“허나, 이러한 죽음은 용납할 수 없다.”

천마가 숨을 헐떡이며 나를 봤다.

“어찌 견디느냐고 물었느냐.”

"......."

“우리는 그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죽고 싶을 뿐이니라.”

정파의 노인이 수백의 시체를 일렬로 놓았다.

마교의 여인이 수백의 시체를 일렬로 놓았다.

그리하여 좀비들은 꼭 양군으로 나뉘어 대치하는 부대처럼 보였고,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서 전투를 시작할 것만 같았다.

나는, 문득 떠올렸다.

「사망한 원인은 똑같아도 사망한 날짜는 전부 달라요.」

묵시록의 세계에 떨어져 처음으로 좀비들을 목격했을 때.

우리 일행이 시체의 숲을 관찰하며 나누었던 대화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시체를 옮겼다고 볼 수밖에….」

「일종의 무덤일까요?」

「무덤이라. 멀리서 보면 병마용(兵馬桶)처럼 보이기도 해.」

밤이 되면 좀비들은 제멋대로 움직인다.

그런데도 무려 천 마리에 이르는 좀비들이 설원 한곳에 모여 있다.

생각해보면 이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후우….”

“흐음."

그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좀비들을 한곳에 옮겨놓지 않는다면 말이다.

“오늘은 멀리까지 간 놈이 몇 명 없구나.”

마교의 오백인.

“어젯밤엔 달밤이 맑았다. 햇빛만큼은 아니지만 달빛도 강시들에게 먹히니….”

정파의 오백인.

천마와 무림맹주는 각자의 수하들을 옮기었다. 꼬박 한나절이 걸리는 대작업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묵묵히 움직였다.

마치 당연한 일과를 행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정마대전을 치르고 있노라.」

「그러기를 벌써 3년이 흘렀구나.」

눈이 내리고.

“정파무림은 결코 강시 따위한테 멸망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죽고.

"본교의 명운도 한낱 시체들에게 파먹힘으로써 결딴나지 않노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모조리 사라지며.

“정녕, 우리 정파가 멸망해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간악한 마교의 손끝 때문이어야 한다.”

모든 무급비서에 먼지가 끼어 읽을 자가 없어지더라도.

“만일 본교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단지 정파의 칼날에 의해서다.”

아직 이 세계는 멸망하지 않았다.

세계가 멸망하기 위해서는 두 명의 사람이 마저 죽어야만 하므로.

설령 세계에 십억의 인간이 있어, 구억하고도 구천구백구십구만에 구천구백구십구 명의 인간이 전염병으로 죽는다 하여도. 마지막에 남은 자. 최후의 1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그 세계의 사인은 병사가 아니라 다만 자살이다.

적어도 무림의 맹주와 마교의 하늘은 그리 여겼다.

“무림맹주. 남궁세가, 태상가주. 남궁운.”

노인이 포권을 취하였다.

“부월선이다.”

“마교주. 소백향.”

여인이 포권을 취하였다.

“천마(麻魔)다.”

태양은 중천을 넘었으며.

천하에 두 사람이 남은 지 수년이 흘렀다.

그 수년 동안, 두 사람의 일과란 오직 이 세계의 사인을 무엇으로 정할 것이냐였다.

“990번째 비무를 청하는 바다.”

무림맹주에 의한 마교의 멸망인가.

“생결인고, 생사결인고?”

아니면 천마에 의한 정파의 멸망인가.

“생사결 (生死決).”

“받아들이마.”

두 무인이 포권을 풀었다.

오백의 정파인과 오백의 마인이 마주한 설원 한가운데, 무림맹주와 천마가 달려들었다.

두 사람이 펼치는 무공을 나는 여전히 알아볼 수 없었다. 내가 볼 때, 저들은 겨우 발을 내딛고 있었다. 힘겹게. 정말로 간신히 팔을 내뻗었다.

발동작은 느리기 그지없어서 어린애라도 쫓아가지 못할 것이었고.

손동작은 허약하여서 한알의 귤조차 으스러뜨리지 못할 것이었다.

"......."

쇠퇴해버린 장르.

쇠퇴해버린 세계.

이 묵시록은 990일에 거쳐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이건….”

내가 입을 열었다.

멀리서 두 사람의 비무를 지켜보며, 부지불식간에 중얼거린 것이다.

“이대로는 안 돼요.”

나의 심장이 울렁이고 있었다.

“불합리해요.”

-.......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설원에선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한때 천하제일인을 논하며 화려한 무공을 펼쳤을 무림맹주와 천마는, 이제 어린애 수준의 드잡이질밖에 못 했다. 눈밭을 굴렀다. 헛발질을 디뎠다. 수염을 쥐어잡았고 머리카락을 잡아뜯었다.

“검제 양반 눈에는 저게 진짜 대단한 싸움으로 비출지 몰라요. 예. 전 이제 막 검술에 입문한 초짜나 다름없으니까요. 하지만 저 드잡이질에 아무리 대단한 묘리가 담겨 있어도, 아무리 굉장한 이치가 숨어 있어도……"

대낮이 다 지나서 저녁에 이르도록.

무림맹주와 천마는 한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이건 모욕이에요.”

노을이 졌다.

오늘도 승부는 가려지지 못했다.

“두 사람에 대한 모욕이라고요.”

쇠퇴한 세계.

치료할 방법이 없는 전염병이 창궐해버린 세상에서, 두 무림인은 기어코 목숨을 이어나갈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서로의 목숨을 취하기에는 너무도 약해진 것이다.

“이럴 순 없어요.”

원하는 대로 태어날 수 없기에 세상은 잔인하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죽을 수 없는 세상이란 무엇인가?

제대로 끝을 내지도 못한다는 것.

삶이 그냥, 도중에 끊겨버리고 말았다는 것.

-뭘 어쩔려고?

배후령이 조용히 말했다.

-네가 대신 천마를 죽이고 무림맹주를 죽일 테냐? 그래. 그것도 자비로운 선물이 될 수 있지. 나라면 그럴 거다. 하지만 나든 너든 어디까지나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돼.

“알아요.”

두 무림인은 자살을 희망하는 게 아니다.

만일 죽어야만 한다면, 오로지 상대방의 손에 죽기만을 희망하는 것이다.

마교는 괴질 따위에 멸망하는 게 아니라 정파에 패배하여 무너진다.

정파는, 전염병 따위에 굴복하는 게 아니라 마도천하가 도래하여 부서진다.

그러한 끝.

제대로 된 결말.

납득할 수 있는, 삶의 종착역.

내가 난입하여 저 둘을 죽여봤자 그건 [끝]도 아니고 [결말]도 아니다. 자비로운 선물조차 못 된다.

그딴 것은 그저, 어린애가 동화책 뒤에 덧붙여놓은 [낙서]에 불과하다.

그런 것으로는 안 된다.

“저는,”

나는 배후령에게 말했다.

“저는 저만의 방법으로 이 세계를 갈무리지을 거예요.”

-그 방법이 무엇이냐?

배후령의 질문에 나는 답하지 않았다.

노을이 왔다.

“버, 벌써 저녁이 되었구나. 노물아.”

“겨울이라 그런지… 허억. 하루가 빨라….”

“내일은 반드시 결판을 지어주마.”

“누가 할 소리….”

저녁이 깊어졌다.

990일째의 정마대전도 자연히 휴전되었다.

천마와 무림맹주는 손속을 거두었고, 어제보다 더 지친 행색이 되어 동굴로 돌아갔다.

“어디 갔다 왔냐?”

일행들이 우리를 맞았다.

독사가 동굴 입구에서 보초를 섰으며, 약제사와 약왕은 좀비를 둘러싼 채 뭔가 연구하느라 바빴다. 어제 우리를 놀라게 만든 무당파 장문인의 좀비였다.

“저희는 환자를 보고 있었어요. 어제는 경황이 너무 없어서….”

“진척이 좀 있습니까?”

약왕과 약제사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약왕이 먼저 쯧 소리를 냈다.

“아직이다.”

“네… 이, 이런 바이러스는 처음이니까요.”

그렇겠지.

마천과 무림맹주는 먼저 쉬겠다며 동굴 저편으로 걸어갔다. 나는 두 무림인의 등이 멀어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약제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장님.”

“네?”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쇼. 만약 치료제를 만든다 치면 대충 어느 정도 걸릴 거 같으세요?”

“아. 으음, 으으.”

약제사가 우물쭈물거렸다.

“정말로 솔직히 말씀드리면… 최소한 120일이요.”

“그 두 배. 세 배 더 걸릴지도 모른다. 원래 이런 스케줄은 넉넉하게 잡는 게다. 넉넉하게 잡아도 모자라게 마련이거든.”

약왕이 퉁명스레 덧붙였다. 약제사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예, 저 말씀도 옳아요. 정말 최악의 경우지만….”

음.

"짧으면 100일. 길면 300일 정도라고 보면 되나요?"

“으. 그게……"

약제사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사, 사실 아예 만들지 못할지도 몰라요. 시설과 환경도 열악하고. 지금 시점에선 장담을 드릴 수가없어요. 사왕님. 죄송해요…. 기껏 절 믿어주시고 이런 스테이지에 데려오셨는데… 제한시간 안에 치료제를 개발하기란, 불가능해요.”

제한시간.

우리를 묵시록으로 보내면서 도서관장은 말했다.

「제군들이 눈을 뜨면, 그곳은 아직 천마실록이 불행한 연재중단을 맞이하기 10일 전의 세계일 것이라오.」

「부디 멋진 결말을 보여주시길 기대하겠소.」

즉, 무슨 일이 벌어질진 몰라도.

앞으로 10일 뒤면 세계는 정말로 멸망한다.

지금까지 힘겹게 살아남은 천마와 무림맹주도 죽게 되리라.

바로 그 열흘의 시간을 약제사는 제한시간이라 말한 것이다.

“정말로 죄송해요….”

“아뇨.”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네, 네에?”

“걱정하지 마세요. 사장님.”

허리춤에 찬 단검.

나는 칼자루를 천천히 매만졌다.

“시간 문제는 제가 어떻게든 해결하겠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연구하세요.”

"......."

“어제 이 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 드렸던 말씀. 기억하시지요?”

이곳은 평범한 책이 아니다.

엄연히 하나의 세계다.

우리는 세계를 구하려고 온 것이다.

"........"

약제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두 사람은 모종의 눈빛을 공유하고 있었다.

“…기, 기억해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요, 사왕님….”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드릴 말씀은 어제와 같습니다. 시간제한이 코앞이라느니. 이 스테이지를 깨지 못하면 영원히 묵시록에서 탈출할 수 없다느니. 그런 잡생각은 전부 끊어주세요. 저는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테니, 사장님도 사장님의 최선만 보여주세요.”

“잡생각을 전부 끊고……"

“예. 약속드릴게요. 그 외에 다른 문제들은 전부 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훗날 연금성주로 불리게 될 사람을 향해서.

“저를 믿고 일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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