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 천마(天魔).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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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제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시 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사왕님이 아니었으면 전 아직 슬럼가 뒷골목에 있을 거예요. 기구들도 다 뺏겨버리고…. 솔직히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도 안 가요.”
약제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안경 너머에 그녀의 눈빛은 아까보다 훨씬 또렷했다.
“네. 사왕님께서 저한테 해주신 걸 보답하고 싶어요. 아무런 생각도 않고 치료약을 만드는 데에만 전념할게요. ……하지만 저는, 제 일에 정신이 팔리면 정말로 주위가 안 보여요. 예의도 차리지 않고요. 아마 무척 건방지게 굴 거예요. 그래도……"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껏 실력을 발휘해주십시오.”
지금은 자잘한 예의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미래에 연금성주가 필요할 뿐.
“……알겠어요.”
약제사가 안경을 고쳐 썼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약왕을 쳐다보았다.
“영감님.”
“으잉? 뭐냐.”
“이제부터 저를 전력으로 서포트해주세요.”
약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노인의 주름살은 그의 고집만큼 굵었다.
“서포트? 서포트으으? 이런 고얀 것을 봤나. 예끼, 이것아.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다! 어디서 새파란 애송이가 이 약왕님한테 고작 서포트를 하라고….”
“스킬카드 오픈.”
"...응?"
약제사의 손에서 스르륵, 카드들이 솟아났다.
황금색 카드 1장. 은색 카드 3장.
평범한 헌터라면 1개도 얻기 어려운 스킬을 약제사는 4개나 터득한 것이다. 그것도 오직 B급 이상의 고급 스킬들만.
약왕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 무에냐. 나한테 스킬 자랑하려는 게냐? 에잉. 최근 젊은 것들은 스킬이면 다 되는 줄 알아서 큰일이야. 모름지기 진정한 실력이 란….”
약제사가 말했다.
“보셔도 되어요.”
“뭐?”
“제 스킬들이 뭔지 보셔도 된다고요.”
약왕은 당황했는지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헌터에게 스킬이란 비장의 무기. 절대로 남들한테 들키지 말아야 할 노하우였다. 스킬을 공개한다는 것은, 자신의 강점만이 아니라 약점들까지 낱낱이 고백하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행(愚行). 멍청하고 어리석은 짓.
“아니면 그냥 제가 직접 보여드릴까요?”
하지만 약제사는 거침이 없었다.
“이 스킬은 [움직이는 병원]이에요.”
그녀는 스스로 카드를 뒤집어서 약왕한테 보여주었다.
“피 검사부터 뇌파 검사까지 전부 실시간으로 가능해요. 제가 미리 저장해둔 약제도 꺼내서 쓸 수 있지요. 단, 2% 확률로 오진이 일어나네요. 이건 [생명진단서]. 환자의 상태를 유전자 단위로 알 수 있어요. 저는 두 가지 스킬을 조합해서 오진이 일어날 확률을 최소화...."
“자, 잠깐만! 잠깐 기다려라!”
약왕이 뒤늦게나마 정신줄을 잡았다.
“이것아! 왜 네 스킬을 나한테 보여주는 게냐! 내가 이걸 연금성이나 동업자들한테 까발리면 어쩔려고!”
“괜찮아요. 그런 잡생각은 신경 안 쓰기로 약속했어요.”
약제사가 말했다.
“공개하려면 공개하셔도 되어요. 하지만 이번에 치료제 만들 때까진 확실하게 서포트해주세요.”
“아니, 그러니까 나한테 왜….”
“하루라도 개발 시간을 당기려면 영감님이 필요하니까요.”
"......."
“제가 꼴보기 싫으시지요?”
약제사가 약왕을 바라보았다. 덤덤하다 못해 차가운 눈빛이었다. 언제나 허둥지둥거린 약제사였는데, 지금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무표정했다.
“어린 것이 주제도 모르고 까불어서 화나시지요? 저 같은 사람이 재능을 가졌다는 것이 짜증나겠지요? 제가 앞으로 살아갈 날이 영감님보다 한참 남아서, 그래서, 영감님보다 더 오래동안 사람들한테 대접받을 거라는 것이, 짜증나서 미칠 것 같으시지요?”
"......."
흔히 사람 목소리를 새에 비유한다. 그러나 장담컨대 약제사의 목소리는 어떤 짐승도 흉내내지 못할 것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래. 벌레를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였다.
불개미들이 지글거리는 듯한 소곤거림.
"이번에 저를 전력으로 도와주시면,”
약제사가 안경 매무새를 고쳤다.
“여태까지 제가 만들어놓은 약 레시피들. 다 드릴게요. 어디 가서 제가 만든 레시피라고 말도 안 할게요. 가지세요. 쓰세요. 영감님이 발명한 레시피라고 사람들한테 말하세---."
그 순간, 약제사의 안경이 미끄러져서 바닥에 떨어졌다.
노인이 뺨을 때린 것이었다.
"......."
약제사가 안경을 주웠다. 그리고 안경알을 옷소매로 묵묵히 닦았다. 왼뺨엔 발간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약제사는 다시 안경을 쓴 다음, 조용히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이 치를 떨었다.
“고얀 것……"
“좀비 바이러스는 제가 분석할게요.”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게다.”
“영감님은 제가 시키는 것들을 해주세요.”
“네 자존심이 뭉개져서 썩은내를 풍기게 될 날이 기어코 올 것이다.”
“필요한 걸 제가 써서 드릴게요.”
“언젠가는 너도,”
“그 때는 영감님께서,”
노인과 여인은 동시에 말했다.
“너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다.”
“그것을 찾아서 저한테 주세요.”
그리고 두 헌터는 말이 없어졌다.
무당파 장문인의 시체를 사이에 두고, 왼편에 약제사가, 오른편에 약왕이 앉았다. 약제사가 뭐라고 중얼거리면 약왕이 받아 적었다. 무채색의 공기. 초상화보다 정물화에 가까워진 두 사람은, 그저 사무적인 대화만 나누었다.
“사왕님. 죄송하지만 나가주세요.”
약제사가 시체의 머리에 매스를 들이대면서 중얼거렸다.
“사왕님의 숨소리가 신경 쓰여요. 무척. 무척, 방해되어요.”
“나가면서 좀비 여섯 마리만 더 잡아와라.”
약왕이 시체의 어두운 입안을 살피었다. 보라색과 검은색으로 물든 좀비의 혓바닥을, 약왕은 집게로 꼬집었다.
“샘플이 더 필요해. 어린애. 젊은놈. 노인. 각각 다른 성별로. 그리고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약재가 있으면 구해와라.”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맡기십시오.”
그날부터.
우리는 전시태세에 들어갔다.
밥 먹을 시간도 아까웠다. 몸을 씻는 것은 사치였다. 바로 옆에 노천탕이 있는데도 약제사와 약왕은 목욕을 안 했다. 밤이건 낮이건, 두 헌터는 벽곡단을 깨작이면서 좀비들만 연구하였다.
“어허…. 분위기가 심히 바뀌었구나.”
천마가 아리송하다는 듯 우리 일행을 보았다.
“깨달음이라도 얻으려는 것인고? 젊은이들이 열심이도다.”
“거 조개탕이나 도리팔 리조토라는 것은 더 요리하지 않는 겐가?”
무림맹주가 슬쩍 약왕한테 치근덕거렸다.
“정녕 황실의 숙수도 울고 갈 솜씨였다네. 세상만 멀쩡하였어도 자네를 대남궁세가의 요리장으로 임명하는 것인데.”
“바쁘니까 꺼지시오.”
약왕이 고개를 들지도 않고 대꾸했다. 아공간 주머니에 한손을 집어넣더니 휙, 물병을 던졌을 뿐.
“배고프면 물배라도 채우시던가.”
“끄으응.”
약왕의 요리를 맛보지 못하게 되어 어지간히도 아쉬운 걸까. 무림맹주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도 약왕이 던진 블링 H20를 캐치해서 잘만 마셨지만.
“노물아. 괜히 바쁜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어서 가자.”
“알겠다. 알겠어. 아이고, 요즘 따라 몸이 말을 안 들어서 고생이야.”
무림맹주가 지친 듯 투덜거렸다.
“오늘은 또 강시놈들이 얼마나 흩어졌을지….”
“멀리 가본들 천리를 가겠는가? 잔말 말고 나오거라.”
“오냐.”
무림맹주가 투덜거리면서 천마와 더불어 동굴을 나갔다.
오늘도 어제처럼 좀비들을 모으려는 거겠지. 정마대전의 991번째 날을 보내기 위해서.
하루가 흘렀다.
세계가 멸망에 이르는 날도, 하루 더 가까워졌다.
다시 하루가 흘렀다.
하루가.
다시, 하루가.
카운트다운.
멸망을 기다릴 뿐인 나날.
아직 멈추지 않은 오르골에 불과한 세계.
“흐음."
일주일.
묵시록에 떨어진 지 꼭 일주일이 지났다.
그날, 천마는 동굴 천장을 올려보았다.
“……오늘은 밖에 나갈 수가 없겠구나.”
세상에선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바람에 눈이 날리고 또 날리어서, 위와 아래,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았다.
세상은 한낱 어두운 설원이었다.
하얀색이 어두울 수도 있음을, 이때 처음으로 알았다.
“뭐. 이런 날도 있니라.”
천마는 대수로울 거 없다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오히려 요 며칠 동안 날이 맑았던 게 요행이었다. 심할 때는 30일이 넘도록 광설(狂雪)이 내렸지. 햇빛이 나지 않아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노라.”
“그럼 강시들이 계속 움직일 텐데요.”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너무 멀리 가면 강시를 회수할 수 없잖아요.”
“그럴 때는 어쩔 수 없도다. 잃어버리는 것이지.”
천마가 한숨을 쉬었다.
“본래 3년 전만 해도 본교의 전력은 1 천에 달했다. 저 노친네가 끌고 온 정파의 애송이들도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니, 아예 찾아오지 못할 정도로 멀리 가버리는 강시들이 생기더구나.”
그럴 것이다.
실종된 시체들. 아니. 실종이 아니라, 망실(亡失)당한 시체들. 하늘에서 눈보라가 휘몰아칠 때마다 천마와 무림맹주는 몇 명씩 시체를 잃어버렸으리라.
“그게 제일 무서우시겠어요.”
"음?"
“자고 일어나서 설원에 나갔는데, 어제 있었던 강시가 어디론가 사라졌을 때요.”
"......."
천마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본좌가 무서움 따위를 느낄 성싶더냐?”
여인의 눈동자는 묵빛이었다.
머리카락도. 차려입은 도복조차.
오로지 검은색으로 일관된 그녀의 모습은, 마치 새하얀 설원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려는 것 같았다.
“예. 그러실 거 같아요.”
“과연 천하가 뒤집히긴 많이도 뒤집혔다. 본래라면 그따위 말을 지껄인 놈의 머리통이 여즉 무사할 리 없건만. 새외의 아해야. 너는 세상이 망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천마님과 맹주님은 고수죠. 저랑은 비교하는 게 죄송스러울 정도로 무(武)에 조예가 깊으세요.”
나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온천가에 무림맹주가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수라 해도 내공이 무한은 아니에요.”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게냐.”
“언제 내공이 다 떨어집니까?”
멈칫.
“경추혈을 내공으로 막고 계시지요. 심장 박동도, 호흡도,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도, 전부 내공으로 해결한다고 말씀했어요.”
24시간 내내 이기어검을 쓰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던가.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많은 내공을 지니고 있다 해도, 그런 무지막지한 짓을 영원히 이어나갈 수는 없어요.”
“다시 물을게요. 언제 내공이 다 떨어집니까, 천마님?”
여인은 얼마 전에 말했다.
「사람은 언젠가 죽노라.」
그 말에는 울림이 있었다. 깨달은 자가 내는 울림이었다.
인간이 무언가를 깨닫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직접 그것을 겪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천마가 신음했다.
“정말로, 눈치가 빠른 아해로고.”
“며칠 안 남았지요?”
“……조금 정정하마. 더럽게 눈치가 빠른 아해구나.”
이 세계는.
[천마실록]은 어떻게 멸망에 이르게 되는가.
생각해보면 놀라울 정도로 간단한 문제였다.
“내공이 떨어지면, 두 분이 몸을 움직이는 건 불가능해집니다.”
“그래.”
천마가 하늘을 올려보았다.
동굴의 뚫린 천장에서, 하늘이 토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먼저 발끝과 손끝을 폐하게 되겠지. 그다음은 종아리와 팔목. 무릎. 어깨. 허리. 차례대로 내공을 돌리지 않을 것이며, 내공이 스미지 못한 몸은 마침내 썩어버릴 것이다.”
말 그대로 괴사(壞死).
연료가 떨어지면 차례대로 가동이 멈추는 건물처럼.
어느 순간부터인가, 두 사람은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심장. 폐.”
여인이 허름한 도복의 가슴께를 짚었다.
“상단전.”
그리고 자신의 정수리를 두들겼다.
“세 부위만 남기고 모든 부위가 썩는다. 아니. 다른 곳들이 썩도록 내버려두게 된다.”
“…이미 알고 있으셨군요.”
“소림사의 땡중이 1년을 함께 버텨주었지.”
천마가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땡중 아니랄까 봐 그놈은 누운 채로 입적하였다. 마지막 순간에는, 음. 얼굴만 빼면 강시랑 별로 다를 바도 없더구나. 온몸이 구석구석 검게 썩어서…. 유언으로 아미타불도 못 외었다.”
"......."
“두렵냐고 물었느냐. 그래. 두렵도다.”
흔히 사람 목소리를 새에 비유한다.
그러나 장담컨대 천마의 목소리는 어떤 짐승도 흉내내지 못할 것이었다.
“본좌는 두렵다.”
한잎의 꽃이 떨어지는 듯한 중얼거림.
“내공이 소진되는 게 두렵다. 진기마저 고갈되는 게 두렵다. 눈보라가 치는 것이 두려우며, 햇빛이 나지 않는 게 두렵고, 날이 밝았을 적에 본좌의 부하가, 부하였던 것들이 사라지는 게 두렵다. 숨을 쉴 때마다 앞으로 몇 번의 숨을 더 쉴 수 있을까 염려한다. 심장이 뛸 때 마다, 앞으로 몇 번 더 박동의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을지, 두렵다.”
천마가 탄식했다.
“기어이 본좌가 저 노친네를 죽이지 못할까 두려우며. 기어코 저 노친네가 본좌를 죽이지 못할까 두렵다. 본좌와 노친네가 더불어 침상에 누워 꼼짝할 수도 없게 될 날이 올까 두렵다. 침상에 누워, 누운 채, 그저 내공이 말라 없어지기를 기다리게 될까 두렵노라.”
무의미한 죽음.
자신들이 마지막까지 발버둥쳤다는 것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죽는다. 죽어서 사라진 세상에 눈만 내리고 또 내리어서, 그저 무채색에 불과한 풍경화만이 남는다.
“아아.”
이것이 [천마실록]이 맞이하게 될 결말.
세계의 엔딩이었다.
“천하는 이다지도 두려운 것이다.”
하루가 흘렀다.
묵시록에 떨어진 지 8일째.
세계가 멸망하기까지 이틀이 남은 날.
“마두야.”
침상에 누운 채, 무림맹주가 중얼거렸다.
“더는 몸을 움직일 수 없겠다.”
무림맹주는 웃고 있었고.
그리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나직한 소곤거림 .
그것이 하나의 세계가 멸망에 이르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