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68화 (68/400)

68화.  < 천마(天魔).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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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죄송해요.”

약제사가 말했다.

“현재 상태에서는 치료할 수 없어요.”

그녀는 무림맹주를 진찰하고 있었다. 진찰하는 내내 약제사는 표정이 희미했다. 이미 환자에게 가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직 ‘가망이 없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진찰하는 의사와 같았다.

"......."

천마가 묵묵히 무림맹주를 내려보았다. 어차피 치료는 기대하지도 않은 것일까. 다만 무표정한 얼굴로 천마는 입술을 열었다.

“일어서라.”

“미안하다.”

“네놈의 사과 따위를 들으려는 게 아니다. 일어서라. 무림맹주 부월선.”

어두운 동굴.

천마의 숨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녀의 입에서는 독향(毒香)이 흐르는 듯했다.

“본좌와 약조하지 않았느냐. 마도천하에 도전하여 정파무림의 기치를 세우겠다며 호언장담하지 않았느냐. 기어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결집시켜 일전을 꾀하지 않았더냐. 그런 네놈이 병상에서 죽을 수는 없다. 그럴 수는 없는 게다.”

“미안하다.”

“일어서라.”

독의 향기가 조금 더 진해졌다.

“일어나서 무기를 쥐어라. 네놈의 멋대가리 없는 도끼를 쥘 필요도 없다. 목검을 들어라. 회초리든 편태든 나무막대기든, 뭐든지 좋다. 쥐어라. 쥐어서 본좌와 맞서 싸우거라.”

“미안하다.”

“일어서라고 말하였다.”

“마두야.”

무림맹주가 숨을 쉬었다.

그는 하룻밤 만에 더 늙어 있었다.

“내가 너보다 약해서 미안하다.”

"......."

“하루라도 더 버티려 했지만, 이제는 힘들다. 너도 느꼈을 거다. 이미 나는 선천진기(先天眞氣)를 끌어다가쓰고 있었다. 내공이 다 떨어졌다. 진기도 다 닳았다. 너라면 아직 1 년을 더 버틸지 몰라도… 나는 여기까지다.”

정적.

“내가 너보다 약했던 것이다.”

노인이 누운 채 중얼거렸다.

“나를 죽여다오.”

"......."

천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소림의 방장(方丈) 놈처럼 되기 싫다. 내 몸이 썩어서 문드러지기 전에 죽여다오. 강시가 되면 눈앞을 보아도 보는 게 아니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그러니….”

“그러니, 침상에 누운 네놈을 죽이라고?”

독향이 정점에 이르렀다.

“지금 그리 말하는 것이더냐?”

천마의 몸은 작았다. 그 작은 몸에서 시커먼 불이 피어올랐다. 내공이 형태를 갖추었고, 타올랐다.

살기 (殺氣).

내공은 타오르면서 그을음의 냄새를 풍겼다. 그것은 여인이 살아온 삶의 냄새였으며, 참고 견뎌온 삶의 냄새였다. 천마의 향기는 잡초를 짓이겨 뭉개놓은 양 독했다.

“이것이 네놈이 약조한 대전의 결말인고? 이것이?”

"........"

“차라리 진즉에 동귀어진(同歸於盡)할 것이지, 무슨 영광을 위해 여태껏 견딘 게냐. 아예 본교와 정파의 아해들을 다 모아놓고 단체로 자결하도록 명했을 것이지, 무슨 광명을 누리겠다고 여즉 고집을 피운 게냐.”

무림맹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노인이 흘린 눈물은 흔적이 되어 뺨에서 굳었다.

"나는....."

“남궁운. 공자 시절부터 천무지체(天武之體)를 타고났다고 뭇 강호인의 찬사와 질투를 독차지했으며, 약관의 나이에 절정의 경지를 밟았다. 이립(而立)이 되기도 전에 남궁세가의 가주가 되었지. 마도천하가 득세하자 맹주로 추대 받았다. 모든 정파의 정수가 네놈에게 어려 있고, 모든 백도(白道)의 원념이 너에게 서려 있다. 그런데. 그러하거늘, 본좌의 마수에 순순히 목을 내어주겠다?”

"......."

“좋다. 죽여주마.”

천마가 몸을 일으켰다.

“허나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야.”

그녀는 어디론가 향했다. 여인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그을음의 탄내는 여전했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오러에 조예가 없는 약제사와 약왕은 특히나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 뒤, 천마가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도끼가 들려 있었다.

“남궁의 노물아. 네놈이 애지중지 여기던 옥부월이다. 벌써 잊어먹지는 않았으렷다.”

“소백향……"

“말하라.”

천마가 도끼를 치켜들었다.

“무는 협을 잊었고, 협은 무를 잃었다.”

"......."

“그리 말하라. 그리 말하면 원하는 대로 죽여주마.”

무武는 협을 잊었고.

협快은 무를 잃었다.

그것은 정파무림의 종말을 뜻했다.

마교의 주인은 말한 것이다. 무림맹주 스스로 정파의 멸망을 인정하라고. 그리 인정해야만 목숨을 거두겠노라고. 그것도 너의 애병(愛 兵)으로 목을 끊어버리겠다고.

“말하라.”

“어서 말하지 못하겠는가!”

노인의 입술이 달싹였다. 입이 열렸고 이빨이 열렸다. 하지만 그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이 이어지지 못했다. 노인은 혀를 잃어버린 듯했다. 몇 번이나 입이 열렸고, 그때마다 혀는 길을 잃었다.

“못 한다.”

노인이 숨을 토했다.

“못 하겠다…… 나는, 말하지 못한다……"

눈물의 굳은 자국에 다시 눈물이 흘렀다. 주름살 위에서 눈물은 지층으로 덮였다.

겹겹이 쌓인 눈물은, 노인의 늙은 살갗과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노인의 살은 본래부터 노인의 눈물로 이루어진 것 같았고, 눈물은 눈이 아니라 살에서 흘러나온 것 같았다.

“나는 말하지 못한다….”

"......."

“미안하다. 미안하다, 백향아….”

천마가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 날은 무림 맹주의 목을 가르지 않았다.

그저 맨땅에 찍혔을 뿐.

무림맹주의 얼굴 바로 옆. 그곳에 도끼는 찍혔다. 동굴 바닥의 단단한 암석은, 마치 두부처럼 쉽게 갈라졌다. 회초리조차 들기 어려워 하던 천마가 암석을 가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내공을 소진하였을지,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강시가 되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고 말했더냐.”

천마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상관없다. 지금 네놈은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다. 삶이 아닌 삶과 죽음이 아닌 죽음에 다를 바가 어디 있는가? 본좌는 차이점을 알 수 없다. 무의미하구나. 무의미해……"

그녀는 등을 돌렸다.

“천하가 다 공(空)이 되어버렸구나.”

다음날.

무림맹주 남궁운은 새벽에 죽었다.

병사病死였다.

4.

묵시록에 떨어진 지 열흘째.

이 세계가 멸망하는 날이 다가왔다.

“……귀중한 샘플을 얻었어요.”

약제사가 말했다.

“이미 좀비로 변해버린 지 2년, 3년이 된 감염자들만 가지고는 바이러스를 분석하는 데 한계가 있거든요. 이번 샘플 덕분에 실시간으로 감염 진행을 관찰했어요. 큰 진전이네요.”

약제사의 앞에는 무림맹주가 누워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시체.

노인의 몸은 쇠사슬로 칭칭 묶였다.

“죽었다고 해서 곧바로 좀비가 되는 게 아니라…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각성하는 모양이에요. 아마 감염인자가 뇌에 전부 퍼질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거 아닐까 추측해요.”

“연구 성과는 내가 정리해뒀다.”

약왕이 서류철을 건네었다.

그는 혀를 쯧쯧 찼다.

“이 녀석은 약을 만드는 솜씨가 있을진 몰라도 그걸 남한테 설명하는 재주가 없다. 진짜 전혀 없어. 에잉, 이래서 지 잘난 맛에 사는 것들이란….”

“전력을 다해 연구했지만.”

자기를 타박하는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약제사가 말했다.

“역시 치료제를 개발하기란 불가능했어요.”

“시간이 너무 부족했습니까?”

“네. 적어도 90일. 가능하다면 넉넉하게 120일 정도….”

철커덩!

-고오오.

쇠사슬이 부딪히면서 껄끄러운 소음을 냈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무림맹주의 시체가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오오… 으어, 우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무림맹주를.

아니, 무림맹주였던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가리를 벌려 계속 발버둥 쳤다.

'......."

천마가 걸어온 것은 그때였다.

터벅.

여인이 조용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흑색의 여인.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도복, 검은 눈동자를 가진 천마는, 검은 칼을 들고 있었다. 여인의 칼은 그녀의 그림자보다 더 짙었다.

“---한심하구나.”

천마가 무림맹주의 시체를 내려보았다.

“수십 년의 세월이 허무하고 또 허무하노라.”

우리는 본능적으로 천마한테서 떨어졌다.

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기(毒氣)가 강렬했다.

내공이 피어오르다 못해 그녀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결국에 한 꺼풀 벗겨지면 사람이란 이런 것이라. 축생(畜生)과 다를 게 무엇인고. 먹고, 먹어서, 육신이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먹어 해치워, 이윽고 사라질 뿐이니. 무는 협을 잊었으며 협은 무를 잃었다.”

천마가 왼손을 내밀었다.

“먹어라.”

좀비가 입을 벌려 손을 깨물었다. 콰즈즉! 피가 튀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졌다. 자기 자신의 왼손을 개처럼 물어뜯는 무림맹주의 모습을, 천마는 무심한 눈빛으로 내려보았다.

“어, 어이.”

독사가 아연해져서 한 발짝 다가섰다.

“이보쇼. 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러다 당신까지 강시가 되어버리면 어쩔려고……!”

“다가가지 마세요.”

내가 독사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어?”

“이미 끝났어요.”

“끝나다니? 뭐가……"

살점이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퍼억! 지나치게 흉악한 소리에 일행들 전원이 어깨를 움츠렸다.

천천히 시선을 돌려보면, 그곳에는 왼손이 너덜너덜해진 천마.

그리고 머리를 잃어버린 무림맹주가 있었다.

천마가 무림맹주의 입안에서 내공을 터트려, 머리째로 박살 낸 것이었다.

"흐."

우리 모두 말을 잃어버린 가운데.

“흐으, 하하…. 으하하.”

천마가 입을 열어 웃었다.

“으하하하! 핫! 하, 아하하하핫!”

그야말로 광소(狂笑)였다.

동굴 천장에선 여전히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그러나 천마가 흘리는 웃음소리에 파먹혀, 눈소리는 한낱 자잘한 소음으로 전락했다. 웃음소리가 동굴을 메웠고, 하늘에 울렸으며, 세상을 좀먹었다.

-좀비야. 조심해라.

배후령이 나직하게 말했다.

-주화입마(走火入魔)다.

그 순간.

천마가 고개를 돌려서 이쪽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살며시, 여인이 고혹한 미소를 지었다. 입술이 벌어진 틈새에서 기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호오.”

목덜미에서, 소름이 돋았다

“본좌를 암살하러 온 백도들인가.”

그녀의 눈은 이미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았다.

“좋구나. 덤비거라. 어디 검을 나눠보자꾸나.”

“다들 도망쳐요!”

내가 소리친 것과 동시에 천마가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피분수가 뿜어졌다. 약왕의 피였다. 약왕은 정확히 목이 베여서,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무릎이 꺾였다.

즉사였다

코앞에서 동료가 죽은 것을 보고, 독사가 뒤늦게 검을 빼들었다.

“이런, 씨발….…!?”

눈으로 검로를 읽지 못했다. 아니, 동작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천마가 검을 휘둘렀고] 정확히 똑같은 순간에 [약왕의 목이 베였다]. 찰나의 간극조차 없었다.

-미쳤군.

배후령이 신음했다.

-탈마(脫魔)의 경지를 넘었다. 내공은 물론이고 진기까지 전부 쏟아부은 덕분이겠지만… 지금 저건, 일시적이나마 생사경(生표境)에 들어섰어. 전성기의 내가 살아 돌아와도 10번 붙어서 4번은 진다.

저것이 천마.

강시에게 물려 쇠약해지기 전의 모습.

이 세계에 군림한 천하제일인이었다.

“가당찮구나.”

천마가 흥얼거렸다.

“소림의 방장아. 그딴 수작으로 본좌를 막을 성싶더냐. 무당의 말코도사야. 네놈이 감히 본교의 업(業)을 감당할 것 같더냐.”

천마는 한 걸음, 한 걸음, 우리한테 다가왔다.

“천하에 비탄이 흘러넘쳐 숭산이 잠기었다. 천지에 원한이 타올라 무당산을 불태우노라. 마교가 무림의 하늘이요, 본좌는 마교의 하늘이다. 너희가 천외천을 논할 자격이 있는가.”

“젠장!”

독사가 검을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사왕! 약제사를 데리고 도망쳐라!”

안 그래도, 이미 그러고 있었다.

나는 약제사를 안아 들고 뛰었다. 어차피 도망치기란 불가능할 테지만, 그럼에도 달렸다. 마지막까지 발악하기 위해서. 이 결말과 이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

“너희로는 안 된다! 백도의 졸개들아!”

뒤쪽에서 천마의 웃음소리가 쫓아왔다.

“남궁운!”

한 번, 두 번, 세 번.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있었다.

“남궁운은 어디 있느냐!”

그리고 더는 칼소리가 이어지지 않았다.

세 번의 합(合)을 버티고 독사는 절명한 것이었다.

“남궁가의 태상가주를 불러 오거라! 무림맹주를 대령토록 하여라! 제아무리 무림에 숲이 울창하고 하늘이 광활하여도, 이 천상천하에 본좌의 검을 받아낼 일재는 한 명이나니! 사마군아! 당장 남궁운을 본좌의 앞에 끌고 오거라!”

웃음소리는, 질기고도 질겼다.

한 걸음 도망쳐도 웃음소리는 열 걸음 따라붙었다. 상대가 안 되었다. 결국 등 뒤까지 웃음소리가 바싹 따라붙었을 때, 내 품 안에서, 약제사가 입을 열었다.

“사왕님.”

약제사는 나를 올려보았다.

“계속, 믿고 있어요.”

그리고.

무언가가 우리 둘을 베었다.

관통하였다.

"------."

하늘이 기울었다. 땅이 기울어졌다. 나는 발을 잃고, 허리 아래를 잃어버린 채, 상반신만 남은 몸뚱어리로 눈밭에 넘어졌다.

그렇다.

하얀 눈밭이었다.

우리는 동굴을 빠져나간 것이다.

"......."

조금 먼 곳에, 약제사가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떨어진 곳만 설원은 유독 빨겠다. 딸기 시럽을 뿌린 빙수 같다고, 나는 멍해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아하하. 흐으, 하하핫!”

눈이 내리고 있었다.

“으하하하하! 하, 아하하하……"

눈이 내리는 동안 하늘과 땅은 구분되지 않았다. 어두운 하얀색. 그저 서늘하고 창백한 그늘만이 보였다.

누군가가, 눈밭에 발걸음을 찍으며 멀어지고 있었다.

발걸음이 찍히면 그래도 하늘과 땅이 갈리는 듯했다. 하지만 눈보라는 쉴 새 없이 휘몰아쳤고, 마지막까지 남은 발자국마저 파묻혔다.

소리 없이.

자취 없이.

아무런, 냄새도 없이.

사람을 그을리게 만든 세상도. 세상에 그을려진 사람도. 그리하여 새까만 그을음이 묻히고 파묻혀서 오로지 하얀 설원만 남도록. 무색 (無色), 무취(無臭), 무음(無音)의 눈보라만이 영원히 내리도록.

세계는 멸망하였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뿐.

나에게 멸망은 끝을 의미하지 않았다.

[24시간 전으로 회귀합니다.]

이제.

당신의 세계를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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