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69화 (69/400)

69화.  < 별자리가 죽은 세계.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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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겨울날.

소백향은 어미를 따라 설원을 건넜다.

날이 흐렸다. 흐린 하늘로 눈이 쏟아졌다. 쏟아지는 눈보라 속에서 사람은 겨우 그림자에 불과하였다.

어미의 뒷모습도, 그림자처럼 흐릿했다.

소백향은 소리를 높였다.

-엄마!

소백향은 문득 두려워졌다. 눈소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는 눈소리에 가려져 좀처럼 크게 울리지 못했다.

-엄마!

어미의 그림자는 여전히 멀었다.

소백향은 조급해 졌다.

어미를 쫓으려면 더 빨리 걸어야 했다. 그러나 걸으면 걸을수록 숨이 찼다. 걸을수록 목소리가 작아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으······.

어미를 따라잡으려면 소리치는 걸 멈추고 더 빠르게 걸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아예 걸음을 멈추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야 할 것인지.

어린 천마(天魔)는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동안, 그림자는 조금 더 멀어졌다.

-엄마!

결국 소백향은 멈추었다.

-엄마!

발을 멈추니, 과연 목소리에 약간은 더 힘이 들어갔다. 지금까지 자신은 목소리가 들어갈 자리를 발걸음으로 뺏고 있었던 것이다. 소백향은 이제 어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볼 것이며, 꼭 그만큼 그림자가 뚜렷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일까.

그림자는 조금 더 멀어졌다.

소백향이 소리를 치는 동안, 더 멀어졌다.

이윽고 어미의 그림자는 눈보라에 파묻혀 설원과 다를 바 없어졌다.

-······.

어미가 자신을 버린 것인지.

눈길을 건너자는 핑계로 자연스러운 작별을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어미가 자신을 잃어버린 것인지.

소백향은 알지 못했다.

알 수 없었다.

2.

[당신은 죽었습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그곳은 끝없이 어둡기만 한 공간이었다.

[죽음으로 인해 스킬 조건이 달성됩니다.]

[소백향의 스킬을 무작위로 카피합니다.]

나의 지옥.

[스킬 카드를 형성합니다.]

눈앞에서 카드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당장의 내 관심사는 스킬 카드가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돌리면서 배후령한테 말했다.

‘검제 양반. 서류철 외웠어요?’

-뭐, 어느 정도는.

배후령이 뒷머리를 긁었다.

약제사와 약왕이 필사적으로 연구하여 그 결과를 적어놓은 서류철. 그것이 중요했다. 천마가 주화입마에 빠져 난동을 부리느라, 서류철의 내용을 차분히 외우지 못했다.

-네가 외운 거랑 내가 외운 걸 합치면 그럭저럭 조각이 맞춰질 거다. 잊어먹기 전에 얼른 돌아가야 하지만···.

‘오케이. 그럼 빨리 스킬부터 선택하죠.’

-음.

배후령이 허공에서 움직였다. 그리고 카드들의 뒷면을 봐서 읊어주었다. 천마가지닌 스킬은 꽤 많았는데, 그중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1개였다.

+

[마천신공(魔天神功)]

랭크: A+

효과: 마교. 그들은 하늘의 이치를 증오합니다. 저주합니다. 이들은 증오하고 저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교단을 만들었으며, 마침내 하나의 교리를 이루었습니다. 마천신공은 교리의 정수가 담긴 무공입니다.

마천신공을 깨우친 자는 능히 하늘을 찢어발기고 태산을 짓뭉갤 수 있습니다! 다만, 신공의 초식들에 담긴 증오와 저주를 깊이 이해해야만 합니다.

세상을 증오하고 저주할수록 하늘은 무색해질 것이니. 마천신공의 극의를 터득한 자. 그가 곧 하늘을 뒤엎을 이, 천마(天魔)입니다. ※단, 신공을 펼치면 자아를 유지하기 힘들어집니다.

+

마천신공.

광오하기 그지없는 이름이었지만, 나는 뭐라 빈정거릴 수 없었다.

‘······이게 아까 저희가 본 무공이겠죠?’

왜냐하면 정말로 그만큼 강력했으니까.

멀리서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약왕의 목이 떨어졌다. 독사가 3합을 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가을비의 마왕]과 싸우면서 제법 단련되었다고 자부한 나조차, 천마가 펼친 검로(劍路)를 미처 눈으로 쫓지 못했다.

가히 천하제일의 절기.

-쩝. 전형적인 마공(魔功)이구먼.

배후령이 눈쌀을 찌푸렸다.

-결국에 무공이든 진법이든 다 세상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의 문제야.

‘세상에 대처해요?’

-오냐. 세상을 넉넉하게 받아들이려 하면 대체로 정파. 세상을 할퀴려 들면 그게 곧 마교지. 그래서 정파의 무림인은 [세상을 받아들일 그릇]으로 자기 몸을 만들고, 마교 놈들은 [세상을 할퀼 손톱]으로 자기 몸을 만드는데······.

흐음, 하고 배후령이 팔짱을 끼었다.

-가장 간단한 예를 들어주마. 검을 머리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은 상단베기 말이야. 그걸 어떤 유파에서는 마치 [호랑이가 달려드는 태세]와 같다 하여 호세(虎勢)의 검격이라 부른다.

휙!

배후령이 자세를 잡아서 양팔을 휘둘렀다.

'······!'

일순간이지만 나는 움찔했다. 정말로 한 마리의 맹수가 달려드는 듯한 기세가 느껴졌다.

강했다.

말투와 행색이 너무 한심해서 가끔 까먹지만, 눈앞의 배후령은 검제. 한 자루의 검을 쥐고 탑을 거의 정복할 뻔했던 무인이었다.

-뭐. 사실 호랑이든 황소든 뭐든 상관없어. 무공의 창시자, 개파조사(開派祖師)가 무슨 깨달음을 얻었느냐에 따라 초식은 천차만별로 달라지니까. 아무튼 호랑이나 황소를 약간이나마 [흉내]를 낸다는 게 중요해.

모방한다. 흉내를 낸다.

그리하여 세상의 무언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배후령이 말한 [세상을 받아들인다]라는 건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마공은 달라.

배후령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아까 전 팔을 휘둘렀을 때와 똑같은 자세.

-마교에서는 초식을 가르칠 때 이렇게 말한다.

흡, 하고 배후령이 발을 디뎠다.

-네놈이 도적한테 배때기가 쑤셔진 순간의 분노를 떠올려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갈라졌다.

그것에 직면한 나는, 무심코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얼굴.

다름 아니라 배후령의 얼굴 때문이었다.

한없이 차가운 분노가 그의 무표정에 서려 있었다.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현령(懸令)한테 여동생이 끌려가던 순간을 떠올려라. 아무것도 못 한 너의 나약함을 기억해라. 관아 앞에서 하룻밤이 지나도록 우두커니 기다렸건만, 새벽에, 그저 서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동생의 얼굴을 마음에 그려라.

배후령이 검무(劍舞)를 펼쳤다.

검을 들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나는 배후령의 검이 보이는 듯했다. 그 검은 우리가 서 있는 공간만큼이나 새까맸다.

-동생의 시체를 너 홀로 파묻던 광경을 다시 떠올려라. 겨울이었는가. 땅이 얼어붙어서 잘 파이지 않던가. 잘 파이지 않은 땅을 기어이 손끝으로 파내었는가. 손톱이 깨졌는가. 깨진 손톱에서 피가 흘렀는가.

'······.'

-결국에 일 자(尺)도 파지 못한 구덩이에 동생의 시체를 뉘였는가. 발부터 묻었는가. 차가운 흙더미를 동생의 몸에 얹었는가. 마지막까지 묻지 못한 동생의 얼굴에, 네 손으로 직접 흙알을 담아서, 한줌씩 뿌렸는가.

숨이 막혔다.

배후령의 검무가 이어질수록, 끝없이 펼쳐진 공간이 한뼘씩 좁아지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울 정도였다. 한낱 손짓과 팔짓에 불과할 텐데도 배후령이 흘리는 원한이 진동했다.

-그 흙알갱이의 감촉을 떠올려라. 흙을 파내던 손길로 검을 잡아라. 동생에게 흙을 흩뿌린 손짓으로 검을 휘둘러라. 네 무력함을 한탄하고 세상의 잔인함을 원망하라.

나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세상을 할퀴는 손톱······.'

-그래.

배후령이 팔을 거두었다.

비로소 막혔던 숨이 풀렸다.

-내공을 운용하는 심법(心法)이라고 할까? 말 그대로 마음을 일으키고 몰아세우는 방법이야. 강호인이든 헌터든, 결국 내공이나 오러를 얼마나 잘 사용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리걸랑.

배후령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쉽게 말하면 기세 싸움이지. 마공이 기세가 좀 찐해.

'······.'

-아무튼 좀비 네가 배울 필요는 없어.

나는 가만히 은색 스킬 카드를 바라보았다.

-아니, 딴 무공을 배울 필요 자체가 없단다. 이 몸이 누구시냐? 검제님 아니더냐? 이 우주에서 제일 잘나신 무림인이라 이거지. 잘 모르겠지만 넌 이미 나의 절기를 천천히 익혀가고 있거든! 마천신공이니 뭐니 이 몸의 무공에 비하면 쓰레기나 다름없······.

‘배울래요.’

-······어?

배후령이 눈을 깜빡거렸다.

‘배운다고요. 이거. 마천신공.’

-어, 어어… 어어어···.

깜빡. 깜빡.

배후령이 말문을 되찾은 것은 대략 3초가 흐른 다음이었다.

-왜!?

‘배우고 싶어서요.’

-내 무공에 비하면 이건 허접 쓰레기라니까!!

배후령이 날뛰기 시작했다.

-설마 좀비 너, 아까 천마인가 하는 잡것이 펼친 검극에 혹해버린 거냐!? 와 씨. 돌겠네. 그건 걔가 진기(眞氣)를 쏟아부어서 잠깐 생사경에 입신한 것뿐이야! 뽕빨이라고, 진기뽕빨! 좀비야. 자고로 무인은 진기뽕에 취하면 안 된다!

내가 피식 웃었다.

‘지금 제가 댁 말고 다른 사람 무공 배우려고 해서 삐진 겁니까?’

-뭐어어?

‘걱정하지 마십쇼. 아무렴 우리 검제님의 무공이 우주최강이죠. 제가 그걸 몰라서 마천신공을 배우려 들겠어요?’

-음···.

배후령이 코를 씰룩였다.

그래도 내가 살짝 추켜 세워줘서 자존심이 충족된 모양이었다. 하여간 이 귀신은 정말 다루기 쉽다니까.

-암. 내가 최강이지. ···근데 그럼 뭣 하러 마교의 신공을 배우려는 거냐?

‘이번 스테이지를 완벽하게 공략하기 위해서요.’

달리 말하면, 이 세계에 올바른 결말을 내기 위해서다.

‘만일 치료제가 만들어진다고 해보세요. 그래봤자 천마랑 무림맹주, 두 사람을 구하고 끝이에요. 다른 인간이라고 해봤자 죽은 지 2년이 넘었는데···. 치료한다고 해서 멀쩡히 살아날 리 없죠. 안 그래요?’

-으음.

배후령이 미간을 좁혔다.

-그건 네 말이 맞지.

‘그럼 엔딩이 어떻게 나겠어요? 다시 태어난 신세계에서 무림맹주랑 천마가 [아담과 이브가 된다]? 검제 양반. 댁이 보기에는 이게 좋은 엔딩처럼 보여요?’

-······.

배후령은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아마 머릿속으로 천마와 무림맹주가 부부가 된 모습을 떠올리고 있겠지 .

-아니, 그건 좀 아니야···. 정말로 아니야. 두 사람이 알콩달콩한 커플이 되는 장면이 상상이 안 돼. 기분 나빠···.

‘그치요?’

나는 눈앞을 바라보았다.

[스킬 카드를 선택해주십시오.]

쉭! 쉬시이익!

카드들이 허공을 난잡하게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미 나는 한 장의 카드를 점찍어 놓고 있었다. 내 시선은 은색 카드를 놓치지 않았다.

‘치료제 제작은 [좋은 엔딩]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첫 번째 조건에 불과해요. 결국에 멋진 결말이란 건, 정말로 작품 속의 인물들이 만족할 수 있느냐에 달렸고···.’

내가 팔을 뻗어 카드를 낚아챘다.

‘저는 천마와 무림맹주한테,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결말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선택 완료.]

[스킬을 복사합니다.]

물론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현대 당신의 헌터 랭크는 D급입니다.]

[스킬로 인한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천마가 가진 악몽.

그녀의 심장에 고인 원한.

내가 건너야 할, 또 다른 지옥.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패널티 심도는 중(中).]

그렇지만, 내가 가로지르게 될 지옥은 이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아귀도 입니다.]

내가 건넌 지옥의 풍경에 대해서는 차분히 말할 기회가 있으리라.

3.

하루 전으로 돌아오고 나서.

나는 여덟 번의 자살을 더 감행했다.

우리가 묵시록에 떨어진 ‘첫날’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추워!”

지난번 회차와 똑같이, 독사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약제사와 약왕도 본능적으로 자기 몸을 끌어안았다. 무시무시한 추위가 우리 일행을 덮친 것이다.

고오오오!

눈보라가 고고성을 울리며 휘몰아쳤다. 엣취! 약제사는 벌써부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뭐, 뭐가 이렇게 춥나요. 여기 무림 아니었나요?”

“히익. 웬 시베리아 벌판이······."

하얀 설원이었다.

나에게는 지난 열흘 동안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광경.

하지만 다른 일행들은 당황해서 허둥거렸고, 나는 말 없이 약제사의 손을 잡았다.

“아."

약제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해요. 사왕님.”

"······."

얼마 안 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계속, 믿고 있어요.」

설원에 흩뿌려진 약제사의 상반신. 그리고 새빨갛게 물든 눈밭이 연이어 떠올랐다. 심장이 조금 울렁였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나직하게 말했다.

“당연한 일인데요, 뭐. 천무문주는 약왕님을 챙겨주십시오.”

“오냐!”

“그리고 방금 저기에서 사람 그림자가 언뜻 보였습니다.”

저번 회차와 달리 이번에는 내가 일행들을 이끌었다. 얼마 안 가서 눈보라가 잦아들었고, 우리 앞에는 인영(人影)의 숲. 아니. 시체의 숲이 펼쳐졌다.

독사가 어리둥절해했다.

“···뭐야. 이것들은? 왜 인간들이 전부 얼어 있어?”

“좀비 같네요.”

내가 시체의 얼굴을 매만졌다.

“엉? 좀비?”

“예. 이거 보십시오.”

나는 좀비의 입안을. 정확하게는 이빨을 가리켰다.

“치아에 살점이 덕지덕지 묻어 있어요. 여기 사람들은 밥을 먹고 나서 이빨을 닦는 습관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죠. 뭔가를 짐승처럼 물어뜯었다는 애기인데···.”

"······."

내 말에 약제사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는 한결 진지해진 눈빛으로 시체의 입 안을 살펴보았다. 잠시 뒤, 약제사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정말이에요. 이 시체의 주인과 입 안에 묻은 살점, DNA가 불일치해요. 서로 완전히 타인이에요.”

“이, 인육을 먹은 건 아닌감?”

약왕이 질색했다.

“왜. 옛날 사람들은 인육을 먹기도 했잖은가. 좀비가 아니라···.”

“그렇게 보기에는 사망 날짜가 이상해요.”

약제사가 안경을 고쳐 썼다.

“시체의 사망일은 약 3년 전. 반면에, 살점의 주인은 2년 전에 사망했어요. 시체가 1 년 동안이나 살아서 움직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네요. 상상하기 어렵지만··· 예. 사왕님이 말씀한 대로 좀비 같은 생물이 아닐까 추측해요.”

“나, 나는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괴물 같은 건 딱 질색이라고! 어떻게든 해봐라!”

“엑. 영감님. 저 한테 뭐라 말씀하셔도······."

약제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오케이.’

지난 회차보다 훨씬 더 진행이 빨라졌다.

이대로 좀비들이 움직이기 시작해도, 저번처럼 대경실색하는 일은 없을 거다. 사태를 예측하고 있느냐 없느냐. 이것만으로도 사람의 반응은 전혀 달라졌다.

무엇보다.

"음."

내 머릿속에는 지난 며칠 간의 연구결과가 기억되어 있다.

“사장님. 약왕님.”

“네?”

“으잉?”

“제가 신기한 스킬을 하나 가지고 있어요. 무슨 스킬인지 말씀은 드리지 못하지만요. 저의 스킬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나는 연구 결과를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내 기억력은 완벽하지 못했다. 단번에 서류철을 외웠을 리 없다. 하지만 천마한테 죽어서 24시간 전으로 돌아갔을 때, 다시 한번 서류철을 찬찬히 암기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배후령이 함께 외워주기도 했고 말이지.

“으으음···.”

내 설명을 듣고 약제사는 생각에 잠겼다.

“···굉장하네요. 완벽한 연구 방법이에요. 흠잡을 구석이 없어요. 이건 꼭 제가 한 거 같은··· 하지만 쓰는 용어는 저랑 완전히 다르구. 아니, 진짜로 진짜 굉장해요. 사왕님께선 대단한 스킬을 가지고 계시군요···?”

약제사는 감탄한 눈빛으로 날 보았다.

내 입장에 보면 약제사가 자화자찬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가. 사장님은 자기 자신을 ‘진짜로 진짜 굉장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구나. 이 삭막한 세상에, 어쩌면 그 자신감이야말로 대단한거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본다.

“흠. 연구할 시간이 단축되어서 좋은 거 아니겠냐?”

약왕은 쉽게 쉽게 생각했다.

“아무튼 난 좀비들한테서 좀 멀어지고 싶구나. 으잉. 어디 따뜻하게 묵을 만한 곳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 때.

“---으하하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번 회차에선 누가 웃음소리의 주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무림맹주. 남궁세가의 태상가주인 노인이 웃음을 터트린 장본인이었다.

“마도천하도 오늘로 끝이다!”

“하."

그리고.

“지나가던 개가 뒤엎어져 웃겠구나.'

천마의 목소리도, 물론 들려왔다.

"······."

나는 숨을 죽이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다가갔다. 바스슥. 눈알갱이가 신발 아래로 밟혔다. 목소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내 머릿속에서는 언젠가 천마가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 장면이 뚜렷해졌다.

「두렵다.」

“본좌가 멀쩡한 이상 마도의 천하도 건재하다.”

「천하는 이다지도 두려운 것이다.」

“부월선. 네놈이야말로 정파무림에 작별 인사를 고하도록 하여라.”

「남궁운은 어디 있느냐! 남궁가의 태상가주를 불러 오거라! 무림맹주를 대령토록 하여라!」

천하제일인.

이 세계에서 제일 강력하며.

바로 그러하기에 최후의 순간까지 살아남게 된 여인.

한없이 슬픈 의미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실현하게 된 무인.

"후."

그 무인이 아직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직은 당찬 웃음을 선보이며, 설원 한복판에서, 이 세상에 맞서고 있었다.

마치 백지장에 유일하게 찍힌 일점(一點)처럼.

“노괴의 혓바닥이 참으로 길구나. 혈귀들은 본좌의 밀명을 받아 잠시 새외로 출타하였을 뿐이니…… 음?”

나는 다만.

그 일점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했다.

“너희들은······?”

천마의 눈이 커졌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내 모습을, 천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지켜보았다. 그럴 만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수년 만에 처음으로 만나는, 살아 있는 사람일 테니까.

“어, 어허. 지금 본좌가 헛것을 보는 것인고? 마치 생사람이 움직이는 듯······."

“천마님.”

나는 여인의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서늘한 눈밭이 내 무게에 깔려 살며시 내려갔다.

“어?”

“멀리 새외에서, 천마님의 위용을 듣고 이리 더듬어서 찾아왔습니다. 아주 옛날부터 고금제일인의 명성을 전해 들으며 깊이 흠모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각오하고, 천마를 향해서 외쳤다.

“저를 천마님의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

천마가 귀신을 본 것처럼 입을 떡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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