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70화 (70/400)

70화.  < 별자리가 죽은 세계. (2) >

=======================

4.

‘추워.’

설원 한복판에서 소백향은 생각했다.

하얀 눈밭에 파묻히니, 세상은 무색(無色)이고 무취(無臭)이며 무음(無音)인 것이 되었다.

세상이란 단지 차가운 백지였다.

‘추워……'

살이 차가웠다. 뼈가 차가웠다. 피 또한, 차가웠다.

소백향은 생각했다.

‘뱃속이 얼얼해.’

‘엄마?’

‘오장육부가 얼음으로 가득 메워진 거 같아.’

‘엄마.’

‘여긴, 너무 추워.’

생각하고 생각했다. 생각이 거듭되는 동안 내장은 점점 얼어붙었다. 이윽고 그런 생각을 생각하는 머릿속까지 추워졌다.

차갑고.

또 차갑기만 한 세상.

어미의 멀어지던 뒷모습.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허.

무음이 깨졌다.

-기이한 일이로다. 참으로 기이하구나.

뒤이어 무취가 깨졌다.

-이 부근에 눈이 내리고 그친 지 벌써 열흘. 뒤덮인 눈의 두께만 헤아려도 5척(尺)에 이르거늘. 어찌하여 이 아해는 여즉 숨이 붙어 있느뇨?

마지막으로, 무색 마저 깨졌다.

소백향이 어린 눈으로 눈앞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서 있었다. 그가 눈밭을 파헤쳐서 소음이 난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서 노인 냄새가 훅 풍긴 것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동자는, 흑색이었다.

-평범한 아해가 아니구나.

노인은 마교의 늙은 고수였다.

-빙설지체(氷雪之體)를 타고났다. 천하의 차가움이 너에게는 곧 내기(內氣)이겠다. 기이하고 또 기이하도다. 어린 꼬마가 눈만 파먹고도 설원 속에서 열흘을 넘겼으니, 이야말로 문헌 속에서나 들어보던 극음지체(極陰之體) 아니련가!

-.......

-아해야. 이름이 무엇이냐.

소백향이 입술을 열었다.

-몰라요.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이는 얼마가 되었더냐?

-몰라요.

-어쩌다 이런 눈밭에 파묻혔는고.

-몰라요.

-.......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차가웠다. 생각이 얼어붙었고, 생각을 생각하는 머리가 얼어붙었으며, 그리하여 자신의 머리와 심장에 담긴 모든 말들이 다 얼어붙은 것 같았다.

-불쌍한 것. 어린 것이 벌써 조화경(造化境)에 파묻혀서….

노고수가 신음했다.

-허나 무공을 익히기에는 더없이 완벽한 그릇이다. 북해의 궁주가 보면 억금을 내서라도 데려갈 일재로고. 기연(奇緣)이라! 그러나 무슨 기연일꼬. 너에게 본교가 기연이 될 것인지, 본교에 네가 기연이 될 것인지. 내 노안으로는 가늠하기가 퍽 어렵구나.

소백향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까부터 노인이 뭐라 말하는 건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눈앞의 사람은, 너무 어려운 말밖에 안 했다.

쓰다듬.

노인이 소백향의 머리를 매만졌다.

-아해야. 나를 따라오겠느냐.

-.......

-먹여주고 재워주마.

그것은 이해하기 쉬운 말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이 말했다.

-너에게선 아무런 향기가 나지 않는구나. 이름이 없고 태생을 모르니, 너는 필시 눈에서 태어난 아이일 것이다. 너에게 내 성을 주겠다. 그리고 너를 눈의 향기라 하여 백향(S香)이라 부르마.

눈의 향기.

-이제부터 너는 마교의 교인(敎人), 소백향이다.

소백향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어디로 가게 되나요?

노고수가 미소를 지었다.

-너 같은 아해들이 모이는 곳이란다.

5.

“---불가하다!”

천마가 말했다.

“본좌는 살아오면서 단 한 명도 제자를 둔 적이 없다. 아무리 세상이 요 꼬라지로 전락했다지만, 본좌의 법도에는 변함이 없노라. 제자라니! 말도 안 되는 일!”

온천 동굴.

우리는 설원을 떠나서, 이 세계에 마지막 남은 생존자들의 심처에 와 있었다. 천마와 무림맹주는 ‘아직도 살아남은 이가 있었다니…’ 하고 놀랐지만 기꺼이 우리를 손님으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손님으로 받아줄 뿐.

제자로 받아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에이. 마두야. 뭘 그렇게 쪼잔하게 구느냐?”

무림맹주가 옆에서 벽곡단을 쩝쩝 씹었다.

“새외의 아해들이 살아남은 게 기특하구만.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너한테 가르침을 받겠다며 이 험난한 강호를 뚫고 당도했으니, 기특함에 어여쁨까지 추가될 만하지. 뭐 예전처럼 딱딱하게 굴어댈 필요가 있느냐?”

“기특하고 어여쁘다만.”

천마가 흠, 하고 콧숨을 흘렸다.

“그럼에도 사제(師弟)의 법도란 냉엄한 법! 본교에선 함부로 사람을 입교(入敎)시키지 않는다. 오직 부모에게 버려지고 세상에 버림당한 아해들만 마교에 들 수 있노라.”

“쯧쯧. 저것들은 우리보고 맨날 꼰대라고 욕하는 주제에 사람 가리기는 우리보다 더한다니까.”

무림맹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해야. 그렇댄다. 이왕 이리된 거, 허섭한 마교 나부랭이 따윈 내버려두고 본인을 스승으로 삼아보는 것은 어떠하냐? 나는 남궁운. 대남궁세가의 태상가주이자 정파무림의 맹주다. 내 제자로 들어오면 아주 애정을 듬뿍……"

“왜 저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못하시겠다는 겁니까, 천마님?”

내가 노인을 무시하고 물었다. 무림맹주는 살짝 충격을 받았는지 ‘왜! 설마 새외에는 내 이름이 널리 퍼지지 못한 것인가…!?’ 하고 외쳤다. 좀 불쌍하긴 한데 내버려두자.

천마가 미간을 좁혔다.

“방금 말하지 않았는고. 세상에 버림당한 아해들만 입교할 수 있니라.”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말했다.

“수수께끼의 괴질 때문에 사람들은 강시로 변해버렸어요. 무림의 문파와 세가는 나란히 멸망했죠. 천하가 인간을 버렸으니, 저희는 이제 다 세상에 버림당한 셈입니다. 좋든 싫든 상관없이 말이에요.”

“천마님. 입교의 조건은 저절로 만족한 거 아닐까요?”

천마가 입술을 다물었다.

내 말이 옳기 때문이겠지.

무엇보다… 나는 헌터였다. 바깥세상을 버리고 탑에 투신한 고아였다. 내가 세상에 버림받았다고 말하기엔 좀 부끄러웠지만, 내가 세상을 버려봤다고는 말할 수 있었다. 천마가 말하는 [입교 조건]은 충분히 만족시킬 거다.

“……좋다.”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 자신한다면 어디 삼재검법이라도 펼쳐보거라.”

그녀는 지그시 나를 내려보았다.

“너에게 본교의 가르침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는지, 본좌의 눈으로 직접 판별해주마. 어차피 말만 번지르르할 것이 뻔하다만."

"......."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성검을 빼들었다. 스르릉! 넓은 동굴에 칼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은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어떤 검술을 시연할지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었다.

물론, 삼재검법 따위를 선보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스킬을 발동합니다.]

마천신공 (魔天神功).

바로 이 순간을 노리고 습득해놓은 기술이 있었으니까.

“...후우.”

신공이 발동하자, 머릿속에서 무수한 동작들이 그려졌다.

기묘하고 신묘한 검로(劍路)들.

하지만 눈앞에 길이 보이는 것과 그 길에서 운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나는 아직 마천신공을 깊이 깨닫지 못했다. 이대로 검술을 뽐내봤자, 황새를 쫓아가는 뱁새처럼 몸이 찢어질 뿐이다.

‘어차피 찢어질 거라면.’

그러므로, 나는 떠올렸다.

‘제대로 찢어져야지.’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온 [트라우마]의 풍경.

그것들을 차례차례 마음속으로 그리면서 검을 휘둘렀다.

마공(魔功)을 펼치기 위하여.

여태껏 탑을 오르면서 목격한, 목격해버린, 신음과 비명이 있었다. 신음과 비명은 언제나 날것이어서 생생했다. 마치 바로 방금 전에 들은 것처럼 나는 신음과 비명을 떠올렸다. 그들의 목소리로 내 심장을 물들였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배가 고파요. 먹을 걸, 제발.」

어느 저택의 지하.

그곳에 갇혀 고문당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살고 싶어.」

아이들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저택에 불이 붙어 타오를 때. 아이들은 눈앞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걸 빤히 보면서도, 사슬에 사로잡혀 도망칠 수 없었다. 가만히 불에 태워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놀고 싶었어.」

아이들의 비명을 심장에 담아, 검을 휘둘렀다.

“마, 마두야! 저 검법은……"

"......."

근처에서 무림맹주가 당황해하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그러나 무시했다. 지금 내가 심상(心相)에 담아두어야 할 것은 무림맹주의 소리가 아니었다.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한뼘씩.

나는 내가 떠올려야 할 것을 떠올리며 검을 휘둘렀다.

「태워라!」

「마녀의 둥지를 불살라버려라!」

어느 대륙의 변방.

그곳에서 병자들을 구원하려 했던 아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왜?」

「너희도 인간이거늘.」

아귀는 눈에서 검은 진물을 흘렸다. 그녀가 만든 낙원. 자그마한 마을이 불태워지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불태우고, 사람이 사람에게 불살라지는 광경이 아귀의 눈에 인으로 박혔다.

「너희도 인간이어서 눈물을 흘릴 줄 알진대, 어찌.」

「괴물이라 불렀느냐. 그리하여 태우는 데 거리낌이 없었더냐.」

「너희만이 인간이더냐.」

아귀의 절규를 심장에 담아, 검을 휘둘렀다.

"......."

"......."

나의 검은 점점 더 빨라졌다. 내가 죽음으로써 얻은 마천신공이 형(形)이 되었다. 내가 죽어서 이식받은 트라우마가 의(意)로 맥박쳤다. 중간중간에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았지만, 그때는 오러(氣)를 끌어올려서 억지로라도 검로를 이었다.

-이 새끼 봐라…?

배후령이 말하길, 마공이란 세상을 할퀴는 손톱이었다.

하지만 마천신공을 펼칠수록 내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그것은 아마도 손톱보다는 비명이나 절규에 가깝지 않을까.

-와.

내 검로는 이어지고 또 이어져서 마침내 검무(劍舞)가 되었다.

-무림에서 태어났으면 영락없이 마교에 들었을 새끼였네, 이제 보니.

나의 검무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미숙했다. 어수룩했다. 꽃향기가 나지 않았으며, 다만 불에 타오른 냄새만 풍겼다. 검술에도 얼굴이 있다면, 내 칼은 다만 화상(火傷)을 입어버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오로지 비명일 뿐.

음양의 이치가 아무리 경탄스럽다 해도, 거기에서 태어난 세상은 비탄스러울 따름이고.

사서삼경의 글줄이 아무리 현묘하다 해도, 천한 인간이 내지르는 비명 한 줄기를 이기지 못한다.

음양을 담은 검법보다 세상의 비탄을 담은 칼사위가 더 날카로우며.

현묘한 도리에 따라 움직이는 검보다, 한 줄기의 비명을 따라 휘두르는 칼이 더 강하다.

비탄이 깊을수록, 비명이 천할수록, 칼은 더욱 강해진다.

그러기에 우리는 강하다.

강자존强者存.

그것이 마교의 교리였다.

「말하라.」

「무는 협을 잊었고 협은 무를 잃었다. 그리 말하라.」

「그리 말하면 원하는 대로 죽여주마.」

천마란, 그러한 교리의 하늘이다.

제일 높은 하늘.

마땅히 천마는 교인들의 모든 비명을 알고 있어야 하며, 그것을 전부 검으로 풀어낼 줄 알아야 한다. 천마가 펼치는 검로는 한줄한줄마다 세상을 향한 비명이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이 세상 어딘가에, 비명을 지르고 절규를 토한 자들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천하가 다 공(空)이 되어버렸구나.」

「수십 년의 세월이 허무하고 또 허무하노라.」

그런 하늘마저.

천마조차도 최후의 순간에는 비명을 질렀다.

「아하하. 흐으, 하하핫!」

미쳐서 웃었다.

「으하하하하! 하, 아하하하…….」

그 웃음을 심장에 담아, 검을 휘둘렀다.

“.그만.”

검을 휘둘렀다.

“그만하여라.”

검을 휘둘렀다.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어느덧 내 검이 멈추었다.

내가 멈추고자 하여서 멈춘 것이 아니었다. 회초리. 천마가 나무막대기를 들어서 나의 칼날을 꾸욱 막아 세우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내공이 회초리에 서려서 울렁거렸다.

“네놈……"

천마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디서 본교의 절기를 훔쳐 배운 것이더냐.”

그녀의 눈동자는 새까맸다.

“본좌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아무리 형이 엉망이고 미숙했다 하나, 네가 지금 펼친 것은 틀림없이 마천신공이다. 이 천하에서 신공을 익힐 수 있는 자는 오직 마인뿐이거늘, 본좌는 너의 얼굴을 본 적이 없도다.”

“말하라. 어디서 훔쳤느냐!”

나는 그제야 생각보다 내가 지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숨이 찼다. 온몸이 훔뻑 젖었다. 오른손에 쥔 성검이 바위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림맹주는 물론이고 우리 일행의 사람들도 숨을 죽인 채 날 보고 있었다. 동굴의 뻥 뚫린 천장에선, 밤하늘의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느낀 것보다 시간이 훨씬 더 오래 흘렀을지도 모르겠다.

"저에게......."

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에게, 자격이 있습니까?”

"......."

“제게 천마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습니까.”

천마가 침묵했다.

한참이나 침묵한 끝에 여인은 등을 돌렸다. 동굴의 까마득한 저편으로 천마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등은 사람을 거절하는 등이어서, 아무도 그녀를 뒤쫓지 못했다.

만일 나한테 조금만 더 기력이 넘쳤다면 쫓아갔을지 모르지만….

“사, 사왕님?”

털썩.

무릎이 턱 풀렸다.

“사왕님! 괜찮으세요, 사왕님!?”

의식이 흐릿했다. 한꺼번에 지나치게 많은 오러를 소모해버린 탓이라고, 멍해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이대로 하룻밤 내내 기절해버릴 것이다.

나는 안심하라는 뜻에서 약제사한테 미소를 지으려고 했으나 그조차 어려웠다. 눈앞이 벌써 깜깜했다.

-쯧쯧.

기절하기 직전. 배후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격이 안 맞는 무공을 펼치니 초죽음이 되지. 뱁새 새끼야. 이래서 사람이 기초부터 쌓아 올려야 하는 거라고 누누이 말한 거다. 배후령이 한숨을 쉬었다.

-뭐, 하지만…….

그리고.

-썩 나쁘진 않은 뱁새였다. 기특한 새끼.

나는 정신을 잃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