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별자리가 죽은 세계.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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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겨울.
소백향은 입산(入山)하였다.
열한 살의 일이었다.
-아이야.
-아무도 너에게 뭔가를 강요하지 않을 거란다.
마교의 총본산.
노인이 데려다준 그곳은 천국과도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아침저녁으로 음식이 나왔다. 따뜻한 이부자리가 주어졌다. 채찍질하는 관아의 향리마저 없었다.
-먹고 싶을 때 먹으렴. 자고 싶을 때 자렴. 놀고 싶을 때 놀렴.
-.......
-백향아. 다만 살고 싶은 대로 살려무나.
소백향은 얼떨떨했다.
아마 이곳이야말로 전설로 듣던 무릉도원이리라.
-여기 어른들은 모두 착해!
또래 아이들이 활짝 웃었다.
-아무것도 시키지 않잖아.
-우리를 노예로 키우려는 걸까?
-바보야! 여기 온 지 1년째인데 그런 건 없어.
천국에는 자기 말고도 고아가 많았다. 아주, 많았다. 눈어림으로 헤아려도 2000명이 넘는 숫자. 심지어 매일 아이들이 한두 명씩 입교했다. 어느 흉년에는 수십 명이 하루 만에 들어온 적도 있었다.
세상엔 이렇게나 고아가 많은 것인가.
-……너희는.
소백향이 입술을 열었다.
-너희는 어쩌다 여기 왔어?
정적.
아이들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일순간에 입을 벌렸다.
-농사가 너무 안 지어졌대!
-우리 엄마는 유곽에서 일했는데….
-말하기 싫어. 왜 너한테 말해야 해?
-응. 밤에 칼 든 도둑들이 마을을 휘저었어요!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병에 걸리고.
-자꾸 때려서. 도망쳤어.
배고픔. 천직. 사생. 도적. 전염병. 학대.
아이들이 입을 열 때마다 그곳에서 독(毒)이 흘러나왔다.
-.......
소백향은 어지러웠다. 배고픔에 졸아진 독은 쓰라렸다. 천직의 원한을 품은 독은 아렸다. 사생아의 출생을 지닌 독은 매서웠다. 도적들에게 칼부림을 당한 독은 서늘했다. 전염병에서 자라난 독은 고약했다. 학대와 구타로 절여진 독은 썩었다.
-너희는…….
천하에 무슨 독이 이토록 잡다한가. 세상의 모든 쓰라림과 아림, 매서움, 서늘함, 고약함, 썩은내가 전부 이곳에 모였는가.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인가? 이곳이 천국일 수 있겠는가.
소백향은 떠올렸다.
-너희는, 이제 행복해?
고독(塵毒)의 항아리.
-지금은 괜찮아?
항아리에 두꺼비와 독사, 독거미, 지네, 불개미, 말벌, 온갖 독충(毒蟲)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뚜껑을 봉한다. 독사가 두꺼비를 물어뜯고 두꺼비가 독거미를 잡아먹으며, 독충이 독충끼리 갉아먹어서, 마침내, 마지막 한 마리가 생존할 때까지.
졸인다.
단 하나의 극독(極■)을 만들기 위하여.
-응!
아이들이 환히 웃었다.
-매일 밥을 먹을 수 있으니까.
-엄마 대신에 일하지 않아도 되고.
-난 항상 괜찮아.
-응. 여기엔 도둑이 없잖아요?
-아파도 의원님이 고쳐주는걸.
-아무도 안 때려. 좋아.
두꺼비. 독사. 독거미. 지네. 불개미. 말벌.
아이들이 입을 열어서 웃었지만, 소백향의 눈에, 또래친구들은 그저 독짐승과 독벌레로 보였다. 그렇다. 이곳은 천국 따위가 아니었다. 단지 한 명의 고독을 키워내기 위한 항아리에 불과했다.
-.......
소백향은 가만히,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려보았다.
차가웠다.
따뜻한 아침의 죽으로도, 저녁의 국물로도, 두꺼운 이불로도 덥힐 수 없는 무언가. 결코 데워지지 않을 얼음이, 어느새 가슴 한복판에 박혀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심장이었다.
어미가 떠나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미가 떠나길 멈추지 않았고.
따라서, 눈이 내리길 그치지 아니했다.
-.......
그날부터.
소백향은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먹고 싶을 때 먹으렴.」
매일 아침저녁으로, 먹는 음식을 줄였다.
「자고 싶을 때 자렴.」
일찍 자서 더욱 일찍 일어났다.
「놀고 싶을 때 놀렴.」
놀지 않았다. 아이들이 동산을 쏘다니며 웃을 동안, 웃음소리로 자신들의 독을 중화(中和)하는 동안, 소백향은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백향이는 이상해….
-맨날 농부들이랑만 놀아!
-이상해.
-응. 밥도 일부러 안 먹더라구요.
-왜 농부들이랑 어울리는 거야?
-몰라.
무시했다.
「다만 살고 싶은 대로 살려무나.」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노인이 찾아왔다.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마교의 노고수였다. 시간이 꽤 흘렀으나 노인은 그 겨울날과 달라진 바가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백향아.
-예. 오랜만에 뵈어요.
-네게 물어볼 것이 있어 왔단다.
툭툭.
노고수가 지팡이로 땅을 두들겼다.
-듣자하니,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는다고.
-예.
-듣자하니, 농부들을 도와서 네가 먹을 것은 스스로 경작하여 수확한다고.
-예.
-듣자하니, 네가 입는 옷과 쓰는 이불도 모두 너 스스로 만들어서 입는다는구나.
-예.
-어째서냐?
노인이 머리를 기울였다.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사치스럽진 않더라도 풍족하게 살 수 있노라. 이곳은 도원향(桃源鄕)이라. 어른들이 너희를 위해 농사짓고 과일을 딴다. 너 역시 어린 아해에 불과하거늘, 어찌 스스로 일하는고?
소백향이 입술을 열었다.
-산 아래에서 농사를 짓는 모(毛) 씨네는 딸아이 둘을 현령한테 잃었어요.
-으흠?
-과수원에서 일하는 최씨는 성벽을 쌓는 일에 불려갔다가 둘째 아들이 죽었어요. 이것이 억울하여 관아에 고발했지만, 문초당하여, 첫째 아들까지 죽었지요. 두 아들의 시신을 고향에 묻고 나서 최 씨와 부인은 이곳으로 귀의했어요.
-.......
소백향은 일일이 고했다.
고아들에게 농작물을 가져다주는 농사꾼들은, 하나같이 세상에 의해 다쳐 있었다. 억울한 사연을 품지 않은 자가 없었다. 단 한 명도.
-이곳은 천국이 아니에요.
농부들의 사정을 낱낱이 읊조린 다음, 소백향이 말했다.
-저들이 바보여서 저희를 공짜로 먹이고 입히는 게 아니에요.
-허면?
노인이 되물었다.
-왜 너희가 공짜로 먹고 자는 것이라 생각하느냐?
-복수를 대신해주길 바라서.
-억울하고 또 억울하여서. 자신들의 삶을 망가뜨린 현령과 향리를 용서할 수 없어서. 복수하고 싶지만, 도저히 복수할 힘이 없어서. 소백향이 말했다.
-들었어요. 무공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배우고 익혀야만 대성할 수 있다고. 저 농부들은, 우리를 먹이고 입혀주는 사람들은, 이미 나이가 들어서 무공을 깊이 연마하지 못해요.
그러나.
-하지만 [무공을 익힐 수 있는 아이들]을 위해 농사를 지어줄 수는 있지요.
-우리는 공짜로 먹고 자는 게 아니에요.
그것이 이 낙원의 정체.
-저들을 대신하여 세상에 복수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마교의 총본산이었다.
노인은 침묵했다.
한참이나 침묵하고 나서, 노고수가 물었다.
-백향아.
-예.
-천하에 대고 할 말이 있느냐.
소백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차가움에 대하여.
어느 겨울의 눈보라에 대하여. 그날, 아이를 뒤따라오게 하고 설원을 건넌 어떤 어미에 대하여. 아이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기어이 발걸음을 재촉한 어미에 대하여. 남아버린 아이에 대하여. 차가움에 대하여.
누군가의 심장에 대하여.
-있어요.
배고픔에 대하여. 유곽에서 태어난 아이에 대하여. 사생아에 대하여. 도적들에게 가족을 잃어버린 아이에 대하여. 전염병에 마을이 사라져버린 아이에 대하여. 학대와 구타를 당한 아이에 대하여.
그들의 독에 대하여.
-많이 있어요.
세상은 넓었고.
-아주 많이요.
말해져야 할 것은 무한했다.
노고수가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그러하느냐…… 그러하겠구나.
조용했다.
-허면, 세상은 너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노인이 눈을 떴다.
-나는 본교 칠원로(七元老)의 일인. 마불(魔佛)이다.
-지옥에도 부처가 있나요?
-지옥에 있지 않다면 부처가 무슨 쓸모이겠는가.
소백향이 이곳을 지옥이라 불렀음에도 노고수는 책을 잡지 않았다. 도리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소백향은, 자기가 올바른 길에 들어섰음을 알았다.
-백향이 너는 입교의 시험을 통과하였다. 풍요로운 먹거리와 아늑한 잠자리에도 흐려지지 않았으니. 필경 너의 독은 선명할 것이다. 나를 사부로 받들고, 부를 때는 스승님이라 부르려무나.
스승님.
-앞으로 너의 칼은 무수한 비명을 대신하여 울릴 것이다.
노인이 지팡이를 들었다.
그리고 어린 천마의 어깨에 올렸다.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리거라. 나의 제자야.
그날.
소백향은 입교(入敎)하였다.
열세 살의 일이었다.
7.
“일어나라.”
내가 깨어난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눈을 뜨니, 바로 코앞에 천마의 얼굴이 있었다.
“어허. 어서 일어서지 못하겠는고?”
"......."
진짜로 코앞이었다. 어찌나 가까웠는지 천마의 속눈썹이 훤히 다 보였다. 그녀가 눈을 깜빡거릴 때면 속눈썹이 흑빛의 커튼처럼 사르르, 여닫혔다.
나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런 나를 천마는 빤히 굽어보았다.
“저기. 천마님.”
막 깨어난 탓일까. 입안이 텁텁했다.
“계속 거기에 계시면요. 제가 일어나고 싶어도 일어날 수가 없는데요. 아마 머리가 부딪칠 거 같거든요?”
“흐음. 일어나자마자 청산유수인 걸 보아하니 몸은 멀쩡하구나.”
천마가 허리를 세웠다.
“온천에 들어가서 목욕재계하라. 온 정성 들여서 몸과 마음을 씻어야 할 것이다.”
“네?”
“본좌는 동혈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천마가 휙, 돌아서서 걸어갔다. 내가 뭐라 할 사이도 없었다. 천마의 작은 등은 저편으로 사라졌다.
동굴에 남은 것은 멀뚱히 서 있는 나.
그리고 잠에 빠진 일행들뿐.
“으응, 우냐아앙….”
“어허, 으음….”
“훗….”
밤 늦게까지 바이러스 연구에 몰두한 것일까? 곤히 자는 약제사와 약왕 주변으로는 도구들이 난잡하게 널렸다. 독사는 무슨 좋은 꿈을 꾸는지 선굵은 미소를 지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어떤 꿈을 꾸길래 저리들 달게 자는 걸까.
나는 한 번 셋의 심리창을 띄워보았다.
「예, 제가 옳아요. 아니 이 쉬운 걸 대체 왜 설명까지 해야하나요? 설명해봤자 알아듣지도 못할 거잖아요. 아무튼 제가 옳으니까 좀 시키는대로 하세요. 미쳐버리겠네요 아주 그냥 이 물벼룩처럼 우매한 작자들이……. 아, 아니 여러분, 그, 제가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라……. 조금만 더 대가리를 쳐굴려보시면, 아니, 머리를 써보시면 금세 알 수 있을 간단한 이치를 왜 못 알아처먹냐는, 우으으,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후, 이것으로 내가 100번째 승리를 거두었구나, 마르쿠스…. 덤으로 약제사인지 뭔지 하는 저 꼬마녀석에게도 999999번째 승리를 거두고 말았어. 어허, 정녕 이 숀 맥칼리스터의 빅토리 로드를 가로막을 자는 없는 것인가. 가장 슬픈 의미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실현해버렸도다….」
「므후히헤헤햇! 푸히히히낄낄음후히히히!」
음.
‘깨우면 안 되겠네.’
특히 마지막 것에는 손도 대면 안될 것 같다.
나는 조심조심 몸을 씻고 나왔다. 반짝이와 배후령도 내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여명과 설풍이 뒤섞여 하이얀 하늘이 그런 우리를 굽어보았다….
8.
동굴을 빠져나가자, 눈덮인 세계가 그 곳에 있었다.
설원 한복판에 천마가 서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머리끝부터 발끈부터 훑어보았다.
“구석까지 박박 긁었는고?”
“예. 마음의 때까지 씻겨서 깨끗해진 기분입니다.”
“본좌는 말 잘하는 놈이 싫다.”
여인이 마뜩잖은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네놈은 말을 너무 잘하는구나. 혓바닥이 가볍다, 가벼워. 대장부의 기질이라기보다 사기꾼의 기질이 다분하니 걱정이 태산 같도다.”
"어."
그런가?
나는 딱히 말하는 데 재능을 느껴본 적 없었다. 하지만 랭킹 2위인 마녀도 틈만 나면 나보고 ‘말은 잘 한다니까’라고 핀잔을 줬다. 설마 나도 모르는 재능을 타고난 것인가?
그런 생각에 잠겨있자니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천마는 미간을 더 좁혔다.
나는 그녀의 심리창도 한 차례 띄워보았다.
「헛바닥은 교묘한 주제에 낯짝은 또 얼빵하여서 순둥이가 따로 없구나.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하오문주 감이로다.」
하오문주가 뭐지?
“따라오너라.”
나는 천마를 따라 눈길을 걸었다.
눈밭을 건너는 동안 천마가 말했다.
“본래 마교의 옷을 입으려거든 수많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비록 네놈이 자격을 증명하였으되, 그렇다고 시험까지 통과한 것은 아니다. 본교의 첫 번째 시험은….”
“[안락의 시험]이죠?”
"......."
터벅.
기분 탓인지 몰라도 천마의 발걸음이 살짝 삐끗한 것 같았다.
“공짜로 재워주고 입혀주며 재워주지요. 거기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아이들은 외가(外家)라 하여 농부, 장인, 표사로 키워요.”
이들이 마교의 살림살이를 전담한다.
“하지만 [안락의 시험]에 통과하면 다르죠. 내가(內家)의 제자로 인정받습니다. 정식으로 마공을 익히는 자들은 오직 내가 제자들뿐이고요. 이때 마침내 마교에 입교한다고 말합니다.”
“……그건 또 어찌 아느냐?”
지난번 회차에서 당신한테 죽어 트라우마로 봤거든요.
그리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씩 웃고 말았다.
“제가 아는 게 좀 많습니다.”
“아아. 하늘도 무심하도다! 마지막 인연이랍시고 본좌에게 데려온 것이 이런 능글이라니. 내 정녕 이런 하오문도 같은 놈팽이를 본교의 제자로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고….”
배후령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암. 좀비 이놈이 상당히 하오문도 같은 놈팽이 같긴 하지! 천마라서 그런지 사람 보는 눈이 쫌 있네.
‘아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아예 놈팽이라면 관심이라도 끄겠는데. 묘하게 할 때는 하려고 들어서 관심을 끊기도 뭣 해요. 그래서 더 악질이야!
칭찬인가? 욕인가?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는 건지 욕하는 건지 아리까리할 때, 나는 그냥 칭찬으로 해석하는 쪽이다.
삭막한 시대. 칭찬에 인색해진 오늘날. 나라도 사람들의 말을 곱게 받아줘야지 않을까? 그래. 설령 상대가 배후령처럼 괴팍하고 괴상하며 만사에 부정적인 귀신이어도 말이다….
-바로 너의 그런 점이 놈팽이같다는 거다! 좀뱁새 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진짜로.
“---이쯤이면 되겠구나.”
천마가 안내한 곳에는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거대한 구덩이. 마치 콜로세움처럼 중앙이 움푹 패인 그곳은, 새벽의 햇빛이 닿지 못해서 한밤처럼 어두웠다.
“기뻐하거라.”
천마가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본좌는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마도천하(魔道天下)! 자격이 충분한 이상에야 하늘은 교인을 거절하지 않노라.”
“아! 그러면….”
“허나, 아직은 정식 제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
엑.
“아니. 천마님, 너무하십니다! 천마님의 제자가 되려고 멀리 새외에서 찾아왔습니다.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도 보여드렸어요. 그런데 또 정식 제자가 되기에는 미진하다니, 이 무슨 말씀인가요!”
“……일단 네놈의 말이 심히 의심쩍도다.”
천마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봤다.
“새외에서 왔다는 것도 진짜인지 수상하다. 본좌를 예부터 흠모했다는 것도 진실인지 의심스럽다. 본좌의 감에 따르자면 전부 거짓 같다마는… 네 천성이 과히 악독한 것 같지는 아니하여, 가만히 내버려둘 뿐이도다.”
아니.
이 무림인은 뭐 이렇게 감이 좋아?
“솔직히 성정만 보면 선한 것도 같아서 기이하노라. 그래. 너는 참으로 기이한 놈이다. 본좌에게 네놈이 기연이 될지, 네놈에게 본좌가 기연이 될지, 당장은 가늠하기가 어렵구나.”
“……시험은 뭡니까?”
“저기.”
천마가 구덩이 밑바닥을 가리켰다.
“저 아래에 강시병 하나를 던져 놓았노라. 본교에서 깨나 촉망받던 후기지수요, 강호에서 이름을 제법 날린 절정고수다. 저 강시를 꺾어 보아라. 그러면 너를 내가(內家) 제자로 받아들이마. 단,”
팔짱을 낀 천마가 단서를 달았다.
“배고픔을 느끼면서 싸워라.”
“예?”
“말한 그대로다. 강시병과 싸우되, 너의 마음속에는 오직 배고픔. 배고픔의 고통만이 자리해야 하노라. 그것 이외의 감정이나 생각이 심상(心相)에 파고드는 것은 불허한다.”
천마의 목소리가 울렸다.
"할 수 있겠느냐."
"......."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녀는 이미 나를 [제자]로 여기고 있다.
아직 정식 제자가 아니라느니, 내가 제자가 아니라느니, 그런 것은 다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천마의 마음속에서 나는 마교의 가르침을 받게 될 제자. 마천신공을 이을 전인이었다.
“너의 모든 칼질은 굶주림에서 우러나온 손짓이어야 한다.”
천마가 말했다.
“굶주린 자의 목소리와 신음, 팔짓, 발동작, 모든 것을 떠올려라. 떠올려서 마음에 심어라. 하나의 심지(心志)로 삼아라. 이 심지에 의거하여, 오직 굶주림에 의해서만, 칼을 휘둘러라.”
“그때 비로소 마천신공은 진정한 위력을 발한다.”
나는 구덩이를 내려다보았다.
-그오어어어!
밑구멍의 밑바닥에서, 좀비 한 마리가 울부짖고 있었다. 검은색 도복. 오래되어 헤지고 낡았지만 좀비는 틀림없이 마교의 복장을 걸쳤다.
지옥을 닮은 구덩이.
어쩌면 저 좀비가 나의 사형(師兄)이라 할 수도 있겠지.
"만약에…."
내가 입을 열었다.
"오직 굶주림으로만 검을 휘두를 수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한번도 굶어본 적 없는 자를 일격에 벨 수 있다.”
천마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로써 정파의 무림인 가운데 5할은 일초지적(一招之敵)으로 전락하노라.”
그러므로 가로되.
세상을 할퀴는 손톱이라.
"먼저 아사(飯死)의 식을 익혀라. 다음은 갈사(渴死)의 식이다. 오로지 목마름에 의해서만 칼을 휘두를 줄 알아야 하며, 그리하여 말라 비틀어진 적 없는 자들을 일격에 벨 수 있어야 한다. 다음은 익사G弱死)의 식이니. 너는 모두 아홉 가지의 검을 익힐 것이요, 네가 익힐 아홉 가닥의 검로는 족히 천하를 뒤덮을 것이다.”
나는 꾸욱, 칼자루를 쥐었다.
"그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건, 꽤 매력적이네요.”
천마가 입꼬리를 들었다.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본 그녀의 미소인 듯싶었다.
아마도 나의 투지가 마음에 든 것이리라.
“허면 뭘 망설이느냐? 어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그리고.
나는 좀비 구덩이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