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자살헌터-74화 (74/400)

74화.  < 죽음을 줍는 자.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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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

아귀가 조심스레 나를 올려봤다.

“112명의 죽음은 과합니다. 지금도, 며칠 사이에 알아뵙기 어려울 정도로 수척해지셨사온데….”

“왜. 내 몸이 걱정될 정도로 충성심이 무럭무럭 자랐냐?”

아귀가 머뭇거렸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첨을 곁들이는 게 좋은가. 아니면 속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게 좋은가.

“...주군께서 사라지시면 저 역시 사라집니다.”

아귀가 입술을 열었다.

“더는 저의 작은 낙원에서 지낼 수 없게 됩니다. 저의 목숨과 기억, 의미, 모든 것이 없어집니다. 모든 것이 주군께 달렸나이다. 저는 저 자신을 염려하므로, 주군의 몸을 또한 염려하옵니다.”

“솔직해서 좋네.”

내가 입꼬리를 들었다.

“어때. 요즘 살 만하냐.”

“예…?”

“에스델의 마을에서 살게 되었잖아. 네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들도 돌아왔고. 어떻게 지내냐?”

20층을 독점할 권리를 얻은 뒤. 나는 아귀를 마을에 풀어주었다. 지금처럼 시킬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면, 앞으로도 계속 마을에 머무르게 할 작정이었다.

아귀는 긴장한 낯빛으로 답했다.

“잘… 지내고 있사옵니다.”

“별일은 없고?”

“별일이라 하옵시면… 아.”

아귀가 눈을 깜빡였다.

“헌터라 이름하는 이들이 들이닥친 때가 있었습니다. 사왕이 갑작스레 강해진 비밀, 5대 길드가 숨긴 보물이 여기 있을 거라면서… 하지만 주군께서 데려왔던 마녀라는 자와 그녀를 따르는 헌터들이 막아, 큰 소란으로 번지진 않았습니다.”

과연 흑룡 길드. 애프터서비스가 확실하다.

“더 이상 인근 왕국의 군소 영주들이 찝적거리는 일도 없사옵니다. 저희를 치기 위해 자신들이 끌어들였던 유목민들에 의해 홍역을 치르고 있는 터라… 그것이 아니어도 제국과 신전이 동시에 제 마을을 성지로 선포했습니다. 이따금 리저드맨과 엘프들이 와서 선물을 주고 가기도 하고….”

이세계의 일도 순리대로 풀려가고 있는 것 같다.

“그, 다만… 제게, 더 이상의 능력이 사라진 터라.”

“음.”

“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병자들이… 또, 성지 선포 이후로는 특히 기적을 바라는 순례자들도 합하여 찾아오는데, 이들을 어찌하면 좋을지… 우선은, 역시 주군께서 소개해주신 이단심문관이란 자를 따르던 헌터 신관들이 돌보고는 있사온대….”

“생각해둔 바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구체적으로는 약제사의 약집을 20층에 새로 세워줄 생각이었다.

‘새 손님은 나를 통해서만 받겠다고 해줬으니.’

이번 원정만 마무리된다면 약제사의 입지도 공고해질 터.

‘나도 교통정리는 확실히 해줘야지.’

환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곳인 만큼 갖가지 병에 대한 경험도 쌓을 수 있을 거다.

‘약제사 혼자서는 업무량이 감당 안 되겠지. 직원도 두게 될 거야. 아귀를 조수로 붙여주는 것도 괜찮고, 약사 지망생 헌터들을 제자로 받게 해도 괜찮겠고. 그러다 보면 자연히 약집 규모도 커질 테고……'

새 약집이 연금성 지부로 인정받고 그 지부가 다시 본부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내 사람은 내가 챙겨줘야지.’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 밖에는?”

“그 밖에는 딱히… 아, 다제나가, 다제나는 제 마을의 아해이온대. 헌터들이 가져다준 떡볶이라는 게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그리고 가르초프는, 이 사람은 과수원을 지키는 노인인데, 이 사람이 과일을 마을을 경비 서는 흑룡의 헌터들한테 나눠주어서, 흑룡의 헌터들은 그 보답으로 또 주군 세계의 과일을---."

바람이 불었다.

눈발이 흩날렸으며, 흩날리는 눈송이로 달빛은 조용히 스몄다. 아귀의 목소리도 눈처럼 흘렀다. 달밤 아래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나는 끝까지 들어주었다.

아귀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상황이옵니다.”

“살 만하단 소리네.”

아귀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살 만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 사람들도 좀 살 만해져야지.”

"......."

“어서 시체들을 모아와라."

금빛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귀가 고개를 조아린 것이다. 조아린 입술에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3.

적재적소라는 말이 있다.

아귀를 소환하여서 죽음의 수집을 맡긴 것은, 결과적으로 아주 잘한 일이었다.

타천한 성좌. [가을비의 마왕]이라 불리며 한때나마 이세계를 멸망시킨 장본인. 그녀는 죽음을 수확해오는 방법을 잘 알았다.

“관청이 있는 마을이나 도시부터 찾겠사옵니다.”

아귀의 손짓에 따라 수천의 스켈레톤이 움직였다.

“관리들의 일터이니 마땅히 지도가 있겠지요. 어수룩한 지도에 불과하겠사오나, 지리를 대조하여 써먹을 정도는 될 것입니다. 조각난 지도들을 기워내어 외딴 농촌과 어촌을 더듬고자 합니다.”

탐색이 시작하고 사흘째부터 좀비들이 배달되었다. 무공을 익힌 강호인의 시체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농부이자 백성. 그러 했던 사람들의 시체였다.

“굶는 아이들을 보다 못해, 제 자식들과 목을 맨 어미의 시체를 데려오겠사옵니다.”

스켈레톤의 뼈는 하얬다. 하얀 뼈들이 줄지어 시체들을 가져왔다. 설원 한가운데. 뼈의 하양과 눈의 하양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멀리서 보면--- 꼭 시체들이 스스로 발걸음을 움직여 나한테로 모여드는 것 같았다.

“아침에 눈을 떠서 제 어미의 시체를 보게 된 아이들을. 어미의 곁에서 울어대다 야생초가 시들듯 죽어버렸을 아이들의 시체를 또한 데려오겠사옵니다.”

시체의 행렬이 이어졌다.

죽음들이 나열되었다.

“부모 된 도리를 못 했다면서 죽은 어미를 욕했을 마을의 사람들을.”

“전염병을 피해 우물 아래에 숨었으나 결국에 올라오지 못했을 이를.”

“감옥에 갇힌 채, 도망칠 기회조차 갖지 못하여 그대로 아사했을 죄수를.”

아귀는 엄선하고 또 엄선하여 빈자(貧者)들을 진상하였다.

마치 임금에게 가장 귀한 것만을 조공하는 신하처럼.

일주일이 되었을 때, 아귀는 다시금 눈밭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데려왔나이다. 주군.”

나는 설원을 바라보았다.

-그오오오….

-으어, 우으어어!

-키우우….

수많은 죽음이 나열되어 있었다.

시체들은 스켈레톤에게 팔다리가 잡혀서 바둥거렸다. 어느 시체의 얼굴은 늙었다. 어떤 얼굴은 앳되었다. 굶주림이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것이었다.

“……좋아.”

나는 넥타이를 풀었다. 양복을 벗었으며 속옷을 버렸다. 어두운 밤. 나는 맨살을 드러낸 채, 스켈레톤들한테 명령했다.

“풀어줘.”

그 순간.

스켈레톤들에게 잡힌 몸이 풀리자마자, 112명의 좀비들은 달려들었다. 본능적으로. 살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곳으로.

내가 서 있는 자리를 향하여서.

“오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다 와라!”

콰즈즉!

어린 시체가 뛰어들었다. 그것이 내 종아리를 물어뜯었다. 끔찍한 고통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오려는 때, 격통이 도중에 끊어졌다. 늙은 시체가 허벅지를 잡아뜯은 것이다. 종아리에서 터진 고통은 허벅지에서 끊겼다가, 다시, 배로 짙어져서 솟구쳤다.

"-----."

아마도 나는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비명을 내가 들을 수는 없었다. 시체가 나의 귀를 찢었으므로.

입술이 먹혔다. 혀가 먹혔다. 들을 수 없게 되고, 말할 수 없게 된 나는, 수많은 그림자가 내 몸에 파고드는 광경을 다만 바라보았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달은 영원히 눈이 내리는 땅인 듯 새하앴다.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어느 노인이 마지막으로 올려다본 밤하늘도, 꼭 지금과 같았다.

그는 평생 강에서 소일한 어부였다. 강시에게 손가락이 물리게 되었을 때, 노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나룻배를 몰았다.

-배에 탄 채로 죽으면 세상에 민폐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마을이 보이는 강가에서 노인의 나룻배는 둥실둥실, 흔들렸다.

노인은 배에 누웠다. 관짝에 드러누운 것처럼 편안했다. 이대로 파도에 배가 뒤집혀서 죽어도 좋았다. 잠들듯 죽어도 좋았다……. 노인은, 강에서 태어나 강에서 죽는 것을 행복이라 여겼다.

마지막으로 올려다본 달은 고요하였다.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천하가 어쩌다 이리 변모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젊은 태수는, 밤에 성벽을 거닐면서 생각했다. 본래 자신은 향리조차 아니었다. 글이나 몇 줄 외우며 글방을 하던 서생이었다. 하지만 태수가 죽었고, 태수의 향리들이 죽었으며, 향리의 하수인들이 죽었다.

죽음이 죽음을 수소문하듯 이어졌다. 수소문의 끝에는 자신이 있었다.

-성주(城主)님.

병졸이 다가와서 말했다. 그도 본래는 병졸이 아닌 주막집 기둥서방이었다. 아료를 부리긴 해도 머리가 잘 돌아가서 쓸 만했다.

-무엇이냐?

-곡창이 비었습니다. 보름이 지나면 창고에 좁쌀 한줌도 없을 겁니다. 어부들이 간혹 물고기를 잡아오긴 하지만, 부족합니다. 어찌 하올련지….

-노인들에게 배급하는 곡식부터 줄여라.

젊은 태수가 말하였다.

-강시병은 무수하다. 아직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아껴야만 한다. 노인과 아이에게 돌아가는 음식을 삼분지 일로 줄여라.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눈앞의 태수는 냉혹했다. 가끔은 강시보다 차가운 것도 같았다. 마을 어귀에서 경서만 읊어대던 샌님이 어디서 저런 강단을 배웠을지, 병졸은 가끔 의아스러웠다.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온데….

-젊은이에게 나눠주는 음식도 반절로 줄이라. 더 줄이는 사람과 덜 줄이는 사람이 있으되, 모두 함께 줄이는 것이라면 견딜 만하다.

-그래도 불만이야 나오지 않겠습니까?

-내가 먼저 굶겠다.

태수가 짧게 말했다.

-아예 단식을 하마. 우두머리인 내가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으면 불평분자들도 힘을 잃을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어차피 이곳도 얼마 버티지는 못할 터. 며칠 굶는다 하여 달라질 게 있겠느냐.

성벽에서 올려다본 달은 고즈넉하였다.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이대로는 우리 전부 굶어죽을 거야!

꼬마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여자애였다. 개방(汚常)에 속한 거지로서, 빈자와 부자의 구분이 사라져버린 지금은, 또래 아이들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었다.

-성주놈이 애들은 먹지도 말래. 살지도 말라는 소리지!

-그럼 어떡하면 좋아, 누나…?

-죽을 때 죽더라도 뭘 먹고 죽어야지. 그래야 때깔 좋은 강시가 될 거야.

꼬마가 씩씩거렸다.

-내가 개방에서 배운 조리법이 하나 있어. 토과(土菜)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진흙과자야.

-진흙과자…?

-진흙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과자지.

꼬마가 눈을 빛냈다.

-잘 들어! 헤엄을 칠 줄 아는 아이들은 계속 물고기를 잡아. 괜히 어른들한테 갖다 바치지 말고, 우리끼리만 나눠 먹는 거야.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강가에 가서 부드러운 진흙을 퍼와.

-뭘 어떻게 하려구?

-보여줄게.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아이들이 강가의 진흙을 퍼내었다. 흙에는 모래알이 섞여 있었다. 아이들은 진흙을 채에 담아다가, 몇 번이고 자갈을 걸렀다.

-이 진흙을 뭉쳐서, 돗자리에 깔아두면.

꼬마 두목이 열심히 손을 놀렸다. 그녀는 진흙을 공처럼 뭉쳐서 돗자리에 퍽, 던졌다. 그리고 회반죽을 펼치듯 진흙을 넓게 넓게 부쳤다.

-좋아. 됐어!

-되다니… 뭐가?

-이대로 햇볕에 말리기만 하면 돼. 그럼 진흙과자가 만들어져.

아이들은 어이가 없었다.

-그냥 흙을 햇빛에 구운 거잖아!

-이게 어떻게 과자야!?

-시끄러워. 개방의 비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요리법이니까. 잘 보고나 있어.

꼬마 두목이 주머니를 꺼내었다. 소금이 담긴 주머니였다. 원래부터 귀한 소금이었지만 배급이 끊어진 지금은, 한알한알이 사금(金)과 같았다. 꼬마는 진흙 반죽에다 소금을 조금씩 섞었다.

-자아!

한나절이 지나자 진흙이 바싹 말랐다.

-이제 됐어. 하나씩 먹어 봐! 하지만 먹을 때 조심해. 한입에 많이 먹으면 맛이 없어! 아껴서 조금씩만 갉아먹어.

아이들이 반신반의하며 진흙과자를 물었다.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의외로 먹을 만하네?

어떤 아이는 햄스터처럼 진흙과자를 앞니로 깨작였다.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짠맛이 있어서 좋아.

어떤 아이는 혓바닥으로 진흙과자를 핥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치 아이스크림을 할짝거리는 것처럼. 아이의 침이 묻어서, 진흙과자의 언저리가 흥건히 젖었다.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맛없어….

어떤 아이는 그저 울상을 지었다.

꼬마 두목이 낄낄거렸다.

-괜찮아. 먹을 수만 있으면 됐어. 앞으로는 우리가 먹을 걸 전부 챙겨야 하니까. 평소에는 토과를 먹고, 물고기 잡히면 물고기도 먹자. 알았지?

-응, 누나….

아이들은 주린 위장을 진흙으로 달래었다.

사람의 입구멍은 간사했다. 소금기를 머금은 흙을, 아이들의 식도는 밥으로 받아들였다.

진흙이 삼켜지려면 짠맛이 혀를 속여야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진흙과자를 먹을 적에 단번에 베어물지 않았다. 혓바닥으로 진흙과자를 핥으며 소금기를 맛보았다.

-너무 핥지만 마! 맛이 다 사라지잖아. 핥으면서 깨작여야 해.

강가에서 아이들은 날마다 진흙을 반죽했다.

-응?

강변.

-저기 봐. 시체야.

어느 노인이 나룻배를 탄 채 떠나버린 바로 그 강물의 언저리였다.

강에서 태어난 노인은 강에서 죽었다. 그것을 노인은 행복으로 여겼다. 나룻배를 관짝으로 삼아 죽어버리는 것이 세상에 폐를 안 끼치는 방도라고 생각했다.

노인이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익사한 시체가 때때로 강변으로 밀려온다는 점이었다.

강물에서 죽은 것이 노인의 행복이었다면, 반대편이 아니라 이쪽 강가로 떠밀려왔다는 것이 노인의 불행이었다.

그리고 모두의 불행이기도 했다.

-노인이 물에 빠져 죽었나 봐.

-불쌍해….

-어부일까.

아이들이 공포와 호기심으로 늙은 시체에 다가갔다.

-어?

어두운 새벽이었다.

-자, 잠깐만!

-응?

-강시야! 그냥 시체가 아니야!

아이들의 여린 풋내를 맡고 시체가 꿈틀거렸다.

-도망쳐!

도망친 아이들이 있었고.

-아....

도망치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황도(皇都)와 연락이 끊기고, 주변 촌락들과도 끊기어버린 어느 강변의 성루는 그렇게 멸망했다. 노인이 죽었다. 마지막 성주가 싸우면서 죽었다. 졸병이 성문을 빠져나가려다 죽었다. 꼬마 두목은 동생을 감싸고 죽었다.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그들은 살려고 했다.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발버둥쳤다.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살려고 했기에, 굶주림을 감내한 것이다.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아이들이 강가에서 젖은 땅을 찾아, 진흙을 퍼내던 손가락. 돗자리에 진흙의 반죽을 발라 넓게 펼치던 손길. 다 마른 진흙쿠키를 꽉 붙잡은 손끝도.

[당신을 죽인 적의 트라우마를 재현합니다.]

112명의 죽음.

그중 어느 하나, 굶주림 아닌 손짓이 없었다.

[트라우마 재현 완료.]

[피대상자의 자아가 유지된 것을 확인.]

[페널티를 종료합니다.]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

설원이 적막하였다.

조용해진 밤. 내 혼잣말이 나직하게 흘렀다.

“나무껍질 달이는 방법이라도 배울까 싶었는데….”

현실이란 내 상상을 뛰어넘었다. 멸망에 이르던 세상에서 나무껍질은 트라우마조차 못 된 것일까? 인간은 궁지에 몰리면 진흙마저 먹을 수 있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일어서서 눈을 팠다. 맨손에 오러를 감쌌다. 눈을 파고 또 파니, 만년설 아래에 얼어붙은 땅에 이르렀다.

이 세상에 떨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본 땅이었다.

“어디 보자….”

수년째 얼어 있는 땅을 파내기란 쉽지 않았다. 역시 오러를 써야만 했다. 한줌의 흙을 파내어서, 만년설과 함께 오러로 뜨겁게 지졌다. 꼭 국물을 끓이듯이. 한참이 지나자 흙알갱이가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흙탕물.

모래알과 자갈을 일일이 건졌다. 꿈에서 본 대로 따라했다. 진흙을 둥글게 반죽하였다. 양복 외투를 벗어다 돗자리로 삼았는데, 그 위에 반죽한 흙덩어리를 넓게 펼쳤다.

"음."

시간이 흘렀다. 아침과 대낮의 햇볕에 진흙쿠키가 구워졌다. 꼭 달고나처럼 생긴 진흙쿠키를 나는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이빨로 깨작여보았다.

바스락, 하는 소리가 입안에서 울렸다.

"......."

혓바닥으로 진흙쿠키의 테두리를 핥았다. 감촉이 조금 말랑해졌다. 하지만 혀끝에서 말랑거릴 뿐, 부서진 진흙쿠키를 혓바닥으로 받아들이자, 흙알갱이들이 입천장에 들러붙었다. 입안 전체가 바스락거렸다.

"......."

조금 지나자 요령이 생겼다. 이 음식은 어금니로 씹어먹는 게 아니었다. 앞니로 갉아먹은 다음 조금씩 목구멍으로 삼키는 것이었다. 태양의 온기와 흙의 냄새. 그 두 개를 간직했을 뿐인 먹거리를, 나는 천천히 파먹었다.

음.

"......맛이 없구나."

깨물었다.

“맛이 없잖아.”

깨작여서 먹었다.

“진짜, 맛이 없어."

삼키었다.

"......."

어깨가 떨렸다.

심장이 떨렸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분노인가. 슬픔인가. 어쩌면 증오였다. 인간은 본래 땅에서 나온 목숨일 텐데, 어찌하여 땅을 파먹지 못하는가? 땅의 내음과 흙의 식감은 왜 이다지도 비루한 것인가.

왜.

"......."

어느새 내 오른손이 꾸욱 쥐어져 있었다. 분노일지 모르고 슬픔일지 모르며 어쩌면 증오일지 모르는 감정이 나의 손에서 응어리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감정은 본래, 손으로 쥐어지는 것이었다.

말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휘둘러지기 위해서.

무공이란, 단지 자신의 손에 남은 한 줌을 휘두르는 일이었다.

"......."

돌아가자.

나는 성검을 빼들었다. 칼끝으로 내 목을 겨누었다.

돌아가서 천마에게 나의 검을 보여주자. 아니. 나의 검이 아니다. 이름 없이 죽어간 노인과 병졸, 성주, 아이들의 검이다.

나는 무협지를 읽어본 일 없어서 음양오행의 오묘한 도리 따위는 모른다. 내 무공에 묘리가 있다면 다만 저들의 비명이다. 내 칼날에 천리(天理)가 담긴다면 그저 하늘이 버려버린 인간들의 손짓이다.

원망이고 원한이기에, 마魔.

단지 원망과 원한으로 올려본 하늘이기에, 마천魔天.

나는 성검으로 목 정중앙을 찔렀다. 112명분의 죽음을 심장에 담고, 회귀했다. 해야 할 일은 지난 회차와 다를 바 없었다.

천마에게 제자로 받아달라 청했다.

저번과 똑같이 천마는 하룻밤을 고민했다.

하룻밤이 지나고 나서, 천마는 내게 시험을 제시하였다.

“시험은 뭡니까?”

"저기."

천마가 구덩이 밑바닥을 가리켰다.

“저 아래에 강시병 하나를 던져 놓았노라. 본교에서 깨나 촉방받던 후기지수요, 강호에서 이름을 제법 날린 절정고수다. 저 강시를 꺾어 보아라. 그러면 너를 내가(內家) 제자로 받아들이마.”

단, 하고 천마가 말했다.

“배고픔을 느끼면서 싸워라. 강시병과 싸우되, 너의 마음속에는 오직 배고픔. 배고픔의 고통만이 자리해야 하노라. 그것 이외의 감정이나 생각이 심상에 파고드는 것을 불허한다. 할 수 있겠느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해지지 않는 것을 굳이 대답으로 풀어낼 까닭이 없었다.

대신, 조용히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그오어어어!

한 명의 강시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무심한 눈으로 강시를 바라보았다.

"......."

입안에 진흙의 향기를.

손짓에 흙덩어리의 감촉을.

심장에 오직 아이들의 굶주림만을 담아내어서.

마천신공魔天神功.

제일식第 一式.

아사유검 飯死流劍.

칼을 휘둘렀다.

일격, 두 다리를 베었고.

이격, 두 팔을 잘랐으며.

삼격 , 강시의 목을 베었다.

그중 어느 하나, 굶주림 아닌 손짓이 없었다.

마교의 절정고수였던 이는 구덩이 밑바닥에 처박혀 침묵했다.

"......."

나는 위를 올려보았다.

천마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마치 우리 일행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어쩌면 그때보다 더 경악한 얼굴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눈빛이 흔들린 다음에는 심장이 요동칠 것이다.

이제는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인생의 의미.

그것이 새로이 시작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으므로.

보이게 되었으므로.

“천마님.”

내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다음은 어떤 죽음을 선보이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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