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독자의 마음.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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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이다. 호감도가 95라니.
그리고 호감도 95에 이르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눈앞에 펼쳐졌다.
“빛자님! 당신을 보기 전까지 저는 눈먼 심봉사에 불과했어요!”
내 발바닥을 잡아 쪼몰락거리며 도서관장이 외쳤다.
“당신의 말과 대사를 듣기 전까지 전 귀머거리였답니다!”
발톱깎이로 내 새끼발톱을 따각따각 깎으려 시도하며, 도서관장은 눈을 빛냈다.
“당신은 저의 빛! 당신은 저의 음악!”
눈빛이 무서울 정도였다.
“당신의 이름이 공자이니 저는 기쁘게 유교(儒敎)로 개종하겠어요! 오직 당신만을 위한 선비가 되겠어요! 아, 유붕자원방래니 불역낙호야! 본 관장은 오늘부터 공자님을 받드는 유학자예요!”
“야. 쫌, 야!"
세상에 어떤 개같은 선비가 사람 새끼 발톱을 노리는가.
그리 반문하고 싶었는데, 도서관장의 눈동자를 보고 깨달았다. 눈빛이 심상치 않다. 눈이, 내가 뭐라 말해도 상큼하게 무시해버릴 눈탱이다. 일단 숨결부터 거칠었다.
“당신 계속 이러면 저 다음부터 묵시록에 안 들어갑니다!”
"......."
멈칫. 도서관장이 내 발바닥을 잡은 채 멈추었다. 소름이 끼치는 점은, 동작이 멈춘 이 때에도 내 발을 쪼몰락거리는 손짓만은 여전했다는 것이다. 미친 건가?
도서관장은 깊은 시름에 잠긴 선비처럼 고민했다.
“……과연. 유효한 협박이에요.”
그래도 내 말이 먹혔구나 안심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건 공자님의 캐릭터를 분석할 때 불가한 일이에요.”
뭐?
캐릭터 분석?
“왜냐면 공자님께선 알고 계시니까요. 천마처럼 억울하게 시들어가는 인물이 다른 묵시록에도 있을 거라는 걸. 그렇다면 공자님의 성격상, 그 사람들을 돕지 않고는 참을 수 없겠지요.”
도서관장은 미소를 지었다.
“공덕후를 우습게 보지 마세요. 본 관장은 공자님보다 공자님을 더 자세히 알고 있답니다! 저는 공자님께서 천마실록 1일차에 벽곡단을 집어 먹었을 때, 왼손과 오른손 중에 어떤 손을 썼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2페이지에 걸쳐서 묘사할 수 있어요….”
역시 미친 건가? 미쳤군. 이건 미친 것이다.
“자, 공자님. 순순히 본 관장한테 넘길 걸 넘기세요! 이래 봬도 수면향을 써서 공자님을 잠재우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본좌는 참 놀라울 정도로 양심적이랍니다.”
“저도 당신 양심에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공자님께선 이해하시지 못하겠지요. 누군가의 덕이 되어본 적 없으니까요. 아, 오호통재라!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덕쿵해본 적 없는 삶이란 얼마나 처량한가요? 그런 인간의 심장이란 얼마나 차가울까요? 그래도 본 관장이 우리 빛자님을 이해해드려야만……"
“[당신이 싫다]고 말하기 전에 물러나십쇼.”
뚝.
이번엔 정말로 도서관장이 멈췄다.
“저한테서 다섯 발자국 떨어지십시오. 안 그러면 진짜 말합니다.”
"......."
도서관장은 얌전히 샤샤삭 물러섰다.
“평소대로 하오체 써주시고요. 징그럽습니다. 솔직히. 그리고 제 머리카락이랑 손톱도 제발 돌려주시죠.”
“아니 되오! 처,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시오!”
예전 같은 말투가 돌아왔다.
도서관장은 비단 주머니들을 꾹 껴안으면서 울상을 지었다.
“차라리 본좌의 목을 잘라 가져가시구료! 아니. 잠깐, 기다리시오. 공자여. 방금 그건 일종의 과장법이었소. 진짜로 본좌의 목을 잘라야 할까 고민하는 표정을 짓지 말아 주시오…. 진심으로 상처를 받아버린다오……"
한 마리의 풀 죽은 햄스터처럼 도서관장은 중얼거린 것이다.
결국 도서관장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기분 나쁜 것들이 담긴 비단 주머니를 태워버린 다음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도서관장과 나는 간신히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굉장했소.”
먼저 도서관장은 새로 완결된 [천마실록]을 평했다.
“천마를 위하는 그대의 마음이 참으로 갸륵했소이다! 천마의 제자가 된 것만으로도 능히 [엔딩]을 볼 수 있었다오. 허나 그대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소! 최후의 정마대전…. 최고의 비무…. 어허, 본좌는 달콤한 쵸코 아이스크림 빙수를 맛본 기분이라오.”
“이제 그럼 [천마실록]의 강호가 22층에 편입된 겁니까?”
“그렇구료.”
도서관장이 빙긋 웃었다.
“다른 헌터들도 자유롭게 22층에 출입할 수 있소. 천무관(天武館)에 저장된 무공서들을 보아 스킬을 익히는 것도 가능하지. 전부 그대의 공훈이오. 공자여.”
"......."
나는 턱을 짚었다.
“묵시록에 있으면서 궁금해진 점이 있어요. 관장님한테 묻고 싶은데….”
“무엇이든 물어보시오! 거의 뭐든 대답해드리겠소!”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제 구두를 벗기려는 건 그만하시고요. 왜 [천마실록]은 묵시록입니까?”
도서관장이 고개를 기울였다. 내 질문이 낯설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왜? 으흠. [천마실록]이 묵시록인 데 별도의 이유가 필요하오?”
“제 생각에는요.”
나는 구두를 도로 신었다.
“관장님은 해피엔딩을 좋아합니까? 아니면 배드엔딩을 선호하나요?”
“어느 쪽이건 우열을 가릴 수 없소.”
도서관장은 즉답했다.
“결말이란 인물들의 삶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항구요. 삶은 행복할 수도 있고 고달플 수도 있지! 되도록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이야 무릇 독자의 마음이외만, 본좌는 그들의 슬픔과 실패마저 껴안아 주고 싶소.”
“배드엔딩도 어엿하게 제대로 된 결말이란 뜻이군요.”
“음. 당연한 말씀이라오.”
“그래서 더 의문이 들어요.”
내 뒤로 돌아오려는 도서관장의 손목을 잡고, 가위를 뺏었다. 도서관장이 깡총깡총 뛰면서 가위를 가져가려 했지만 키가 안 닿았다.
“제가 개입을 안 했어도 [천마실록]은 제대로 결말이 났어요. 배드엔딩이지만요.”
“스승님은, 무림맹주와 함께 끝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노력했습니다. 비록 무림맹주가 먼저 죽어서 스승님께서 실성하셨다고 해도... 그것도 스승님이 도달한 결말입니다.”
나는 도서관장의 눈을 바라보았다.
“왜 [천마실록]이 묵시록에 포함됩니까? 관장님. 무림맹주가 죽고 스승님이 실성하여 자진하는 것은, 결말로 취급받지도 못하는 겁니까?”
사실 이 의문 자체는 '나와 우리들의 희생양'이라는 동화를 보았을 때부터 들었던 것이었다. 나로서 인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를 떠나서 그것은 말 그대로 순리에 따른 결말을 맞이한 세계처럼 보였으니까.
성좌는 침묵했다.
도서관에는 기절한 헌터들이 내쉬는 숨소리들만 고요히 흘렀다. 세엑, 시이익…. 헌터들의 가슴이 오르고 내리는 가운데, 도서관장은 무표정했다.
“왠지 모르게 해피엔딩을 보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는 안 되겠소?”
“결말이 마음에 안 든다면 관장님이 직접 고치면 됩니다.”
"......."
“관장님은 강하죠. 저 같은 헌터가 보기엔 전지전능합니다. 그런데도 묵시록을 직접 고치는 대신 저희를 파견했어요.”
즉, 이 성좌는 ‘독자’다.
이야기에 개입하는 것을 끔찍히 싫어하며 다만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독자다. 결코 ‘작가’의 위치에 오르길 원치 않는다. 오를 수 있어도 거부한다.
절대 스스로 개입하지 않는 독자.
가로되 [방구석 도서관장].
“저도 캐릭터 분석 한 번 해볼까요? 이 정도로 철저한 사람이 단순히 뭔가 이상하게 끝났다는 이유로 묵시록으로 분류했을 리 없어요. 천마실록도 그렇고 다른 묵시록들도. 묵시록이 묵시록으로 분류되는 데에는 사실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겠죠.”
“……참, 쉽게 넘어가 주지 않는구료.”
도서관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따라오시오.”
도서관장이 내 손을 잡았다. 남은 한손으로는 책을 집었다.
책의 제목은 천마실록(天魔實錄)이었다.
“---묵시록의 진실을 알려드리겠소.”
성좌가 책을 열었다.
그리고 빛이 시야를 덮쳤다.
3.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설원의 세계에 와 있었다.
그렇지만 설원을 걸어서 다닐 필요는 없었다. 도서관장은 여전히 내 손을 꾸욱 잡았으며, 긴 옷소매를 기러기 날개처럼 펄럭이며 겨울의 하늘을 날았다.
“만일에.”
설원을 넘었다.
“만약 좀비 바이러스가 [천마실록]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한 전염병이라면. 정녕 그러했다면. 그대가 말한 대로, 본좌는 절대 이곳을 묵시록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오.”
설산을 건넜다.
“그 말은…."
“좀비 바이러스는 이곳에서 저절로 발생한 병이 아니오. 철저히 바깥세상으로부터 전래된 돌림병이지. 마치 신대륙이 외부 세력에 침략당한 것과 같소.”
하아. 도서관장이 하얀 숨결을 흘렸다.
“저어, 보이는구려.”
그곳은 드높은 산봉우리였다.
이 세계의 영봉(靈峰).
하늘의 천장에 닿은 산꼭대기에,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 반짝이가 불길한 기운을 감지합니다.]
허리춤에 차인 성검이 부르르 떨었다.
그것을 눈치채고 도서관장은 말했다.
“오호. 그대의 검도 느껴지는 모양이구료.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대가 지닌 검도 본래는 온전한 성좌였으니. 사람은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자를 금방 알아보는 법이라오.”
“비슷한 처지라면….”
“공자여. 그대는 성좌가 타천하는 모습을 본 적 있소?”
타천. 가을비의 마왕. 아귀.
“예, 있어요.”
“그렇다면 성좌가 죽어서 남긴 시체를 본 적은 있소?”
"......."
“역시 없구려.”
도서관장이 쓸쓸히 웃었다.
“꽤 귀한 광경이니 이번 기회에 눈여겨보시오.”
그것은 용(龍)이었다.
용의 시체였다.
산꼭대기에 용이 죽어 있었다.
한때 비단같이 매끄러웠을 가죽은 검게 타버렸다. 용의 머리에 달린 뿔은 석탄처럼 버스럭거렸다. 두 조각으로 깨진 여의주가 눈밭에 파묻혔다.
그리고.
[반짝이가 자매의 기척을 감지합니다.]
가슴 한복판에 한 자루의 칼이 박혀 있었다.
[반짝이는 저것이 수호성검의 두 번째 자매검, 연민의 검이라고 말합니다!]
칼에서 흑빛의 탁기(周氣)가 흘러나왔다.
형질을 따지자면 오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오러는 아니었다. 가을비의 마왕을 두르고 있던 것과 비슷한, 아니, 그 보다 더 탁하디 탁한 무언가였다. 넘실거리는 탁기는 용을 감쌌으며, 설산의 산꼭대기를 뒤덮었다. 산봉우리에 하얀 눈발이 내리면 즉시 탁기가 감염되어 검정으로 물들었다.
-아프다…….
새카만 눈.
-원통하다.......
빛이 사라진 흑룡(黑II)의 눈에서 신음이 새었다.
-아프다. 아프도다…….
-고통스럽다.
-원통하다. 아리다. 쓰라리다. 아프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죽었다고 말씀하지 않았어요? 저건, 지금도 살아있잖아요.”
“이미 죽었다오. 저곳에서 보이고 들리는 것은 시체의 원망에 불과하지. 존재의 격이 성좌에 이르면 죽어도 곱게 죽을 순 없소.”
우리 둘은 설봉에 착지했다.
흑룡이 가까운 곳에서 끝없는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떤 성좌의 최후를, 도서관장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대들 일행이 좀비 바이러스라 부른 전염병. 그것의 실체는 저주요.”
“저주……"
“음. 이 강호무림의 성좌, [대호休湖)에 머무는 황룡]이 죽으면서 남기고 만 저주. 죽어도 죽지 못하는 원한. 이미 죽었음에도 여전히 육신만은 남아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시체. 그런 저주에 감염되었을 때 강호인들은 강시가 되어버린 것이오.”
나는 용의 시체를 올려보았다.
-아프다…….
전염병의 숙주. 저주의 진원지.
이 세상을 멸망시킨 질병이 바로 저 시체에서 시작했다.
결국에 스승님께서 목숨을 거두시게 된 것도, 용의 저주 때문이다.
“…성좌가 자기 가슴을 찌른 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죽인 것이군요.”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그럴 것이오.”
“범인이 누구입니까?”
“벌써 그대는 진범을 짐작하고 있소.”
나는 이빨을 아득, 갈았다.
“레판타 아이김.”
“그렇소.”
도서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명은 살천성(殺天星). 세상의 경계를 넘어다니며 성좌들을 죽이는 인물이지.”
성좌란, 해당 세계를 대표하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반짝이는 말했었다.
“그리고 성좌를 잃어버린 세계란, 마치 방벽을 잃어버린 성과 같소. 이처럼 당돌한 파멸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오.”
묵시록.
대표자가 죽어버리고, 그 주민들 모두가 사라져버린 세계.
“그놈은 왜 멀쩡한 성좌들을 죽이는 겁니까? 아이김 제국을 건국했으면 얌전히 자기 나라에서 황제 노릇이나 할 것이지, 왜 애꿎은 세상을 망치고 다니는 거냐고요.”
“그건 본좌가 대답해드릴 수 없구려.”
도서관장은 내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본좌는 일개 독자에 지나지 않소. 그대는 본좌를 가리켜서 전지전능하다 말했으나, 사실이 아니오. 본 관장은 굳이 말하면 전지무능(全知無能)하오. 세계의 진실을 알 수 있되 그곳에 개입하진 않소.”
자조적으로 말한 도서관장이 문득 나의 허리를 가리켰다.
“하지만 그대는 다르다오.”
내 허리에 메인 검을.
“개입할 수 있는 그대는, 또한 개입하고 있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대는 누군가가 망가트린 것들을 하나씩 고치고 있다오.”
“한 번은 우연이라 할 수 있소. 두 번은 인연이지. 세 번에 이르면 필연이 된다오. 그대는 살천성이 버리고 떠난 제국을 구했으며, 살천성이 쪼갠 성좌를 거두었고, 이제 살천성으로 인하여 멸망한 세계에 당도했소.”
도서관장이 말했다.
“[대호에 머무는 황룡]을 죽인 수단은 악독하고도 잔인하오. 평범한 사람은 저 검에 손을 댈 수조차 없소. 그러나 그대는 가능하지. 공자여. 그대는 우연과 인연이 겹쳐서 하나의 필연을 이루었으니 말이오.”
나는 다시 흑룡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반짝아.’
성검이 작게 떨렸다.
[예, 용사님, 이라고 반짝이가 답합니다.]
‘네 자매를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반짝이가 말합니다. 자신을 뽑아서 자매검과 닿게 하면 된다고.]
‘좋아.’
나는 검을 뽑았다.
겨울의 공기가 갈렸다.
흑룡의 가슴에 박힌 검을 나의 칼로 내리친 것이다.
[수호의 여신이 자신의 조각을 흡수합니다.]
일순간, 나의 칼은 빛에 둘러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