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독자의 마음.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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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검에서 빛이 흘러나와 흑룡을 뒤덮었다.
[연민검이 흡수에 저항합니다!]
하지만 내게 반항하는 기운도 만만치 않았다. 술렁! 검은색 독기가 여름 장마철의 하수물처럼 범람했다. 그동안 조용히 잠을 자다가 갑자기 건드려져 화들짝 깨어난 흑표범 같았다.
[연민검이 당혹해하고 있습니다.]
[자매에게 레판타 아이김을 배신한 것이냐고 질책합니다.]
[수호의 여신이 자매를 다독입니다.]
내 성검의 빛과 흑룡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연민검은 새로운 주인의 자격을 요구합니다.]
하얀색과 검은색.
어느 쪽도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성좌의 힘은 막강합니다. 자격이 없는 이에게 주어져서는 결코 안 됩니다. 연민검은 아직 당신을 새로운 주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
나는 가만히 흑룡의 가슴에 꽃힌 검을 바라보았다.
“일리는 있어. 하지만 어떻게 자격을 증명하라는 말이냐?”
흑룡의 시체에서 탁기가 새어나왔다. 울렁울렁…. 지금까지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진득한 독기. 그것이 형태를 이뤘다.
어두운 천사.
발끝부터 머리까지 거무튀튀한 물로 이루어진 천사였다.
[자신은 여신의 연민이 떨어져 나와 이루어진 파편.]
[당신이 누군가의 우상(偶像)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면-.]
[이제는 누군가를 연민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무표정한 천사가 날개를 펼쳤다.
그 날개마저 탁했다.
펼쳐진 두 날개에서 거무튀튀한 타액이 뚝, 뚜욱, 떨어졌다.
[자신에게 잠시간 몸과 마음을 맡길 것을 요구합니다.]
“왜 그래야지?”
[당신의 기억을 엿보기 위함입니다.]
성검이 내뿜는 빛이 조금 더 거세졌다.
[수호의 여신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함께 여행하다보면 용사님에게 새로운 주인의 자격이 있음을 저절로 알 수 있습니다.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됐어.”
나는 칼을 거두었다.
“나를 믿지도 못하는 검을 허리에 차고 다닐 수는 없지. 천하의 명검이라도 내가 불안해서 못 견뎌. 와라! 와서, 내 기억이든 뭐든 마음에 찰 때까지 훔쳐보라고.”
내가 양팔을 벌린 순간이었다.
[연민검이 당신의 연민(懷惑)을 시험합니다.]
천사의 두 날개가 내 시야를 덮었다. 마치 어미새가 아기새를 감싸듯, 거대한 흑빛 날개가 나의 몸을 둘러싼 것이다.
사방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눈앞으로 꿈결과 같은 광경들이 흘렀다.
「친절한 아저씨.」
불에 타오르는 정원.
「조금만 참으렴….」
「가여운 것들아.」
연기에 휩싸인 낙원.
「천하가 다 공이 되어버렸구나.」
어느 모란이 붉게 핀 설원.
「나의 제자야.」
정원과 낙원 그리고 설원이 차례대로 빠르게 흘러갔다.
돌연, 어두운 시야가 환히 밝아졌다.
내 시야를 뒤덮었던 천사의 날개가 사라진 것이다.
[.......]
흑색 천사는 황급히 날개를 거둬들이고 내 쪽을 쳐다보았다. 성좌의 파편인 그것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검은색 눈썹 너머의 검은색 눈동자엔, 숨길 수 없는 당혹스러움이 감돌았다.
[당신은…….]
“나는 완벽하지 않아.”
먼저 말했다.
“사람의 호의에 약해. 호의를 얻고 싶어 하고. 그걸 위해서 조금 무리하기도 한다. 칭찬받는 걸 무척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길 원해서 발버둥 쳐. 그게 내 약점일지도 모르지.”
성좌의 파편이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완벽하지 못한 것은 네 예전 주인도 똑같아.”
[.......]
“레판타 아이김이 얼마나 웅대한 생각으로 성좌들을 죽이고 다니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혹시 어쩌면 고귀한 행동일지도 몰라. 하지만, 설령 그러해도, 나는 레판타 아이김에게 잘못을 따질 거다.”
나는 검을 들어서 흑색의 천사에게 겨누었다.
“만일 네가 예전 주인은 완벽해서 잘못 따윈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나를 따라오지 마라. 그런 검은 나도 필요 없어.”
흑색 천사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레판타 아이김을 죽일 생각입니까?]
“만약 죽여야 마땅한 인간이라면.”
[그 판단에 사적인 감정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주실 수 있습니까?]
“모르겠다.”
나는 솔직한 심정으로 말했다.
“스승님이 죽었어. 강호가 망가졌지. 너무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어서, 나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만은 약속할게.”
[.......]
“그러니 내가 엇나갈 것 같으면 너도 최선을 다해서 나를 바로 잡아줘. 나는 나의 최선을. 너는 너의 최선을 다하자. 그것이 서로 함께 한다는 말의 의미일 거다.”
흑색 천사의 날개가 허물어졌다.
[제 능력은 고통.]
[저에게 베인 자는 고통을 느끼되, 결코 몸에 상처가 남지 않으며, 죽음에 이르지도 않으니.]
[상처 없는 고통이야말로 저의 능력입니다.]
천사의 형태가 무너졌다.
무너져서 검은 물이 되었다.
[새로운 주인이여.]
[최선(最善)을 다하여 당신을 섬길 것을 맹세합니다.]
촤아아악!
검정의 타액이 소용돌이쳐서, 내가 쥔 성검으로 쏟아졌다. 마치 격렬한 홍수 같았다. 성검은 사막의 목마른 여우같이 모든 물을 받아 마셨다.
[수호의 여신의 존재가 한층 더 뚜렷해집니다.]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 오.......
일찍이 이 강호무림의 성좌였던 신수(神獸).
가슴에 박혀 있던 칼날마저 흘러내려 내 검에 흡수되자, 흑룡이 신음했다.
-오오.......
흑룡은 이미 오래전에 죽임을 당했다. 무언가를 말로 표현할 마음이 남아있지 않았다. 흑룡은 그저 삶에 지쳐버린 노파가 된 양 옹알거렸다.
-오오오, 오…….
마침내 흑룡의 시체는 진액이 되어 흘러내렸다.
용의 뿔이 버석거리며 부서졌다. 비늘이 촛농처럼 녹았다. 한 세계에서 신화로 군림하던 짐승이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 무너졌다.
설산의 만년설이 무너져 내렸다. 눈사태였다.
나는 산꼭대기에 있어, 내 발밑으로 부서져 세상으로 쏟아지는 눈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겨울이란 죽음의 계절이지.”
도서관장이 내 옆에서 지상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기어이 외로운 계절을 끝냈구려.”
하얀 눈사태가 하얀 세상을 덮쳤다. 그러나 눈사태가 지나가고 난 자리는 더 이상 하얗지 않았다.
땅의 갈색이 비추었다.
갈색은 이 세상의 살색이었다. 드디어 오랜 겨울이 끝나, 지상이 맨살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
어째서 봄바람은 이토록 겨울바람과 냄새가 다른 걸까.
스승님께서는, 봄의 냄새가 어디서 오는지 알고 계실까.
“...관장님.”
“말씀하시오.”
“제겐 클리어 특전이 있어서 사람의 특성이 보입니다. 그 사람이 선호하는 플롯, 인물이 보이죠.”
“알고 있소.”
도서관장이 숨을 흘렸다.
우리가 쉬는 숨은 이제 하얗게 얼어붙지 않았다.
“본좌는 21층부터 30층까지 아우르는 담당자라오. 그대가 받은 특전 또한 본 관장이 준비했소. 음. 본좌가 선물했으니 당연히 알 수밖에 없구려.”
“관장님이 선호하는 인물에 [살천성]이 있습니다.”
“그러하겠지.”
“왜 살천성을 선호하는 겁니까? 레판타 아이김은 성좌를 죽이고 다니는 인간이에요. 싫어하면 싫어했지, 좋아하는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으흠.”
도서관장이 오른쪽 눈을 감았다.
"그대가 물었으니 특별히 대답해드리겠소. 본좌의 아주 오랜 꿈이 있다오.”
“꿈, 입니까?”
“그렇소. 바로 본좌가 좋아하는 소설에 직접 등장하는 것이오!”
성좌의 눈동자가 순진무구하게 빛났다.
나는 의아했다.
“직접 등장한다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관장님은 자유롭게 묵시록을 여행할 수 있잖아요.”
“후후. 독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료. 소설에 [개입]하는 것과 [등장]하는 것은 좀 다르다오. 아니, 정말로 다르지.”
도서관장은 양손의 옷소매로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본좌는 묵시록 입장에서 볼 때 이물질과 다름없소. 이물질, 외래종… 본래 그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 강호무림의 용을 죽인 살천성이건 본좌건, 이물질이란 점에선 피차일반이라오.”
"......."
“본좌는 그런 이물질로서 소설에 개입하길 원하는 게 아니오! 음, 그래선 안 되지. 마치 원래부터 그 세계에 있었던 사람처럼, 다른 인물들과 동등하게, 한 명의 어엿한 캐릭터로서 등장하고 싶다오! 이것이 만상의 독자(讀者)인 내 꿈이오!”
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내 안색을 살피고 도서관장이 싱긋 웃었다.
“그럼 이번엔 본좌가 물어보지. 공자여. 어찌하여 천마를 죽이지 않았소?”
"......."
“천마는 마지막 순간에 심즉살(心卽殺)의 경지를 터득했소. 생전의 힘을 잇지 못한다고 하나, 기억을 잇는 만큼 그대의 백귀로 거두엇더라면 필히 천군만마가 되어주었을 터 . 천마는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하니, 든든한 아군이자 훌륭한 스승으로 남았을 것이오. 왜 천마를 죽이지 않은 것이오?”
“……그건.”
“쉿."
도서관장이 검지를 세워서 내 입술을 막았다.
“괜찮소. 말하지 않아도. 본좌는 이미 이해하고 있다오.”
지그시.
손가락의 감촉이 입술에 눌렸다.
“그대는 스승이 도달한 최후에 간섭하길 원치 않았소. 똑같소. 본좌는 세계들이 맞이한 결말에 직접 개입하고 싶지 않구려. 그대의 마음과 본좌의 마음은 다른 게 아니라오….”
어느덧 세상은 지평선까지 녹아내렸다.
빙판이 무너져 수면을 드러낸 호수 위로, 해가 비추었다.
“본좌는 개입을 거부하오. 그렇다면,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안 남소.”
“...무엇인가요?”
“반대로 생각하면 간단하지. 본좌가 소설의 인물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인물이 본좌를 찾아오는 것이오.”
도서관장은 속삭였다.
“레판타 아이김. 살천성은, 끊임없이 세계들을 오가며 성좌를 죽인다오. 언젠가 본좌의 세계에, 만상의 대도서관에도 방문하게 되겠지.”
도서관장이 미소를 지었다.
“본좌를 죽이기 위해서 말이오.”
성좌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한 권의 책. 다른 묵시록들과 겉모습이 달랐다. 무엇보다 낡았다. 수십 번 수백 번 꺼내어서 읽은 것일까? 노작가의 수첩과 같이 그 책은 표지 가죽이 닳아 해어졌다.
[레판타 아이김 서사시]
가죽에는 그런 제목이 금실로 새겨져 있었다.
"......."
“본좌는 기다리고 있소. 살천성이 대도서관에 방문할 날을. 그가 자신의 이야기에 따라, 자신의 의지로, 언젠가 본좌의 앞에 서게 될 것을 기대하오. 그 날. 본좌는 마침내 레판타 아이김의 이야기에 등장하게 될 것이오.”
“그 이야기의 결말이 설혹 자신의 죽음이라 해도 말입니까?”
“물론이오.”
도서관장이 방긋 웃었다.
성좌는 눈이 녹아내린 지상을 내려다봤다.
한 마리의 학이 춤추듯이 옷소매가 팔락거렸다.
“주인공에게 죽을 수 있다니, 최고의 에필로그 아니오?”
4.
후일담으로 말할 게 있다.
“아, 소교주님.”
도서관에 돌아가기 전에 나는 교인들한테 들렀다. 스승님의 장례가 잘 치러지고 있는가 꼭 확인하고 싶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시지요, 소교주.”
교인들은 나를 보자마자 포권을 취해 인사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당황하고 있는 기색이 느껴졌다. 한두 명이 그러는 게 아니라 교인들 전원이 허둥지둥댔다.
나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벌써 장례가 끝났어요?”
“아, 아니요. 소교주님. 저, 장례식은 아직이옵고….”
“무슨 일이 생겼나요?”
교인들이 눈치를 봤다.
“그것이……"
“천마님의 시신이 사라졌습니다.”
사마군 중 한 명인 혈마(血魔)가 말했다. 스승님께서 종종 혈귀대주라고 부르신 교인이었다.
“예?”
“직접 보시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소교주님.”
나는 혈마를 앞세우고 서둘러 걸었다.
얼마 안 가서, 내가 스승님의 몸을 뉜 장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갑자기 온 세상의 눈이 녹기 시작했습니다. 천마님의 시신도 사라졌습니다…. 송구합니다. 너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져서 미처 대응할 틈도 없었습니다.”
눈이 녹아내린 곳.
그 자리에 스승님의 몸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둘러봐도 없었다.
“저희가 생각하기로 천마님의 내공은 지극히 순수하여,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시신이 기(氣)에 녹아서 사라지신 것 아닌가 하고...."
다만, 붉은 꽃이 피어 있었다.
"......."
스승님의 몸이 마지막으로 누운 자리. 팔이 닿은 곳. 발이 미친 곳.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곳. 그곳에 붉디 붉은 모란꽃이 만개하여 흐드러졌다.
-대단하군.
침묵하고 있던 배후령이 중얼거렸다.
-이 세계의 성좌는 죽어서 저주밖에 안 남겼는데, 너의 스승은 죽어서 꽃을 남겼잖아. 얼빠진 성좌보다 네 스승이 더 낫구만.
나는 화원(花圍)에 다가가서 몸을 굽혔다. 모란의 꽃잎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꽃잎은 작게 떨면서, 내 검지에 빨간 뺨을 비비었다.
그것이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피어난 봄이었다.
“물론 장례식은 계속 준비하고 있습니다.”
혈마가 뒤에서 말했다.
“부디 소교주님께서도 참석하셔서….”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장례는 치르지 마세요.”
“네?”
“이걸로 충분합니다.”
일어섰다.
고개를 돌려 교인들을 돌아보았다.
“제가 법통을 이어받아 소교주가 되었다지만 아직 내심 인정하지 못하는 분도 있겠지요. 강자존. 본교에선 제일 강한 무인이 제일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상례이니까요.”
“자잘한 장례는 비무로 대신합시다. 가장 귀한 물건을 바치는 것이 장례의 법도일 거예요. 저희가 제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스승님께 저희의 칼을 바치지요.”
나는 웃었다.
“덤비십시오.”
봄이 온다.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나의 다음 이야기는, 지금까지보다, 좀 더 위의 스테이지에서 시작될 것이다.